한국 8대 명당 지보면 '정사의 묘'
자궁의 묘혈 정승 13명이 배출된 곳… | ||
한국 8대 명당 지보면 '정사의 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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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나 들에서 야영을 하려고 터를 잡는다면 무엇부터 봐야 할까. 먼저,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고 안전한 곳, 물을 구할 수 있는 곳, 아늑한 곳 등을 따져서 자리를 정할 것이다. 하룻밤 머무는 자리가 이럴진대 평생의 보금자리 집터를 결정하거나 묘를 만들어야 한다면 더 많은 관찰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풍수지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익장마을과 지보리의 경계에 있는 정묘(鄭墓)는 우리나라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묘의 주인공은 동래 정씨 제학공파 중시조로 예문관 직제학과 진주목사 등을 지낸 정사(鄭賜 ·1400∼1453)다. 이 묘를 이 지방에서는 ‘정묘’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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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 정승벼슬을 지낸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순위를 보면 첫째 전주 이씨 22명, 둘째 안동 김씨 19명, 셋째 동래 정씨 17명의 순이다. 그러나 왕족인 전주 이씨와 외척으로 득세한 안동 김씨를 제외하면 동래 정씨는 정승 배출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동래 정씨가 이처럼 현달하게 된 것을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면 두 개의 명당 때문이다. 그 하나는 부산 동래에 있는 동래 정씨 2세조 정문도의 묘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곳 지보면에 있는 정사의 묘라는 것이다. 정사는 아들 5명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 정난종의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정사가 죽자 그의 묘터를 잡으려고 부산 동래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정씨 문중보다 한 발 앞서 다른 사람들이 이 자리에 묘를 파고 있어 구경하는 셈으로 들여다보았더니 묘터에서 물이 가득 솟아나고 있었다. 이에 그들이 묘 쓰기를 단념하고 떠나자 정씨 문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수맥을 살펴서 인근 세 곳에 우물을 팠는데, 그 후 더 이상 묘터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정사의 묘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풍수지리가들은 이 자리가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의 명당으로 묘혈은 여자의 자궁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했다. 강 건너 비봉산은 귀(貴)를 뜻하고, 그 앞에는 여근을 향한 남근 형상의 긴 능선이 곧게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 능선 주변을 개간해 지금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보’라는 지명이 정사의 묘가 명당임을 일러준다. 이곳 지보면 지보리는 조선시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다. 풍수지리가들은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이며 그 중심이 되는 여근에 정사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정사의 후손 가운데 수많은 정승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를 그대로 부르기 곤란해 ‘지보’로 바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이 묘로 인해 낙동강 지보나루에 다리를 놓으면 근친상간의 해가 있다고 해서 아직까지 다리를 놓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보’라는 이름은 불가의 보리(菩提)를 떠올리게 한다. 불교에서 ‘보제’(菩提)는 산스크리트어의 ‘보디’(bodhi)의 음역이다. 이것은 최고의 이상인 깨달음의 지혜, 또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보제’가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우리말 ‘××’와 소리가 비슷하자 신성한 불교의 도장에서 소리 내어 읽기가 곤란해진 것이다. 그래서 ‘보리’로 발음하게 되었으며 보리수나 보리심이니 하는 말들이 모두 같은 말에서 나온 것이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보’라는 이름의 내력에 어느 정도 수긍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곳이 그전에 지보주사(知保州事)를 두었던 곳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는 고을 사또를 뜻하는 지현사(知縣事), 지군사(知郡事), 혹은 오늘날의 도지사(道知事)처럼 관직명에 붙는 글자다. 그 지보주사의 줄임말이 ‘지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정사의 묘에 얽힌 전설은 동래 정씨 문중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자 후대에 정사의 묘와 풍수지리를 결부시켜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무덤은 동사 ‘묻다’의 어근 ‘묻’에 명사화 접미사 ‘엄’이 붙어서 ‘묻엄=무덤’이 되었다. 마치 사람의 시체인 주검이 ‘죽다’의 어근 ‘죽’에 명사화 어미 ‘엄’이 붙어서 ‘죽엄=주검’이 된 것과 같다. 무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그 관문이다. 무덤은 영혼의 거처이자 영혼을 천도하는 곳이다. 옛 사람들이 무덤을 통해 그 자손들에게 복을 내리고, 또 죽은 이가 다시 부활한다고 믿었던 것은 무덤이 곧 자연-대모신(大母神)의 자궁이라는 고대적 세계관과 통한다. 어쨌든 오늘날 과학의 이름으로 풍수지리를 함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풍수지리가 발복론으로 혹세무민하고, 또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묘역이나 치장하는 행태로 변질된 것은 참으로 천박한 짓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 풍수지리는 자손 발복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문제이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 땅과 인간의 상생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김기빈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 저자, 토지박물관 지명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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