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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전]??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과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선생 묘

장안봉(微山) 2014. 6. 29. 06:09

문희공 제월당 송규렴(文僖公 霽月堂 宋奎濂)

 

1630(인조 8)∼1709(숙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 군수 남수(枏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희원(希遠)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국전(國詮)이며, 어머니는 안경인(安敬仁)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사예(司藝)·응교·서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수찬·부교리·정언·헌납·이조좌랑·사간 등을 거쳐 1667년(현종 8)에 사헌부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문제에 대해 남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 등이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했다가 파면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었다. 이후 사간·수찬·대사간·승지·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4조를 올렸다. 그뒤 안변부사·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대사간·대사헌·우참찬·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우참찬·예조판서·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80세 때에는 지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고,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회덕의 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제월당집』이 있다.

 

 

문희공 묘역 전경

문정공 신도비(전)와 문희공 신도비(후)

문희공 송규렴 신도비-신도비 뒤로 묘소가 보인다

문희공 제월당 송규렴선생 신도비

 

박필주가 찬하고 김진상이 썼으며 민진원이 전액하였다

 

 

 

문정공 옥오재 송상기 신도비-뒤로 묘소가 보인다

문정공 옥오재 송상기 신도비

 

이의현이 찬하고 김진상이 썼으며 유척기가 전액하였다

 

 

 

문희공 묘소(후)와 문정공(전) 묘소 전경

 

문희공 제월당 송규렴 선생 묘소 전경

제월당공은 우암 송시열, 동춘달 송준길선생과 더불어 삼송(三宋)으로 불리웠다

 

 

묘 후경

 

문정공 옥오재 송상기(文貞公 玉吾齋 宋相琦 )

 

1657(효종 8)∼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옥오재(玉吾齋). 학유(學諭) 희원(希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국전(國銓)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규렴(奎濂)이다. 어머니는 동지(同知)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홍문관저작을 지내면서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풍부하여 홍문관에서 상주하는 글은 대개 그가 지었다. 박사·검열을 거쳐, 부수찬으로 있을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 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하므로 가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청했다가 파면되었다.

1689년 부교리로 복직되었으나 이 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이 사형당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민비(閔妃)가 복위되고 남인이 제거된 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고 홍문관부교리·사간원사간·충주목사를 거쳐 보덕·교리·사인을 지냈다.

1697년 세자 책봉에 대한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는 여러 번 정문(呈文)을 지었는데, 문장(文狀)의 사리가 명확하여 청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돌아온 뒤에는 품계가 올라 승지가 되었다. 그 뒤 노론의 중신으로서 대사성에서 예조·이조의 참의가 되고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서는 크게 치적을 올렸다.

대제학·대사헌·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1718년 민회빈(愍懷嬪 : 昭顯世子妃)의 시호 개정을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는데 곧 예조판서에 기용되었다. 다시 이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다가 경종이 병이 있으므로 세제에게 청정(聽政)을 시키자고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상소하였다. 이 일로 1722년 신임사화를 입어 강진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옥오재집』이 있다.

문정공 옥오재 송상기선생 묘 전경

 

 

 

 

재실 전경

재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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