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

장안봉(微山) 2014. 5. 13.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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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하드보일드]

4년 만에 침묵 깬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현대 風水에서는 빌딩이 山이고 도로가 江입니다"

우리 풍수는 명당 찾기 아니고… 모자란 곳 메워주는 '自生풍수'… 도시에 옛 풍수 이론은 안 맞아…

"앞에선 風水 무시하던 분들뒤에선 묏자리 봐달라 부탁"

 

풍수대가는 어디 살까?… 아파트 1층에 살아 "자기가 좋으면 명당"

4대강 정비는 필요한 일… 낙동강·한강 연결 불필요… 생태계 완전히 달라 위험…

 

 

 

▲ "명당이 따로 있나요, 자기가 좋으면 다 명당입니다."

최창조에겐 조그만 우리나라 곳곳이 다 명당이다.

사진은 18세기 고지도인 '아국총도'와 최창조 전 교수를 합성한 모습. / 조선일보DB

 

 

최창조(崔昌祚·59)는 2004년 8월 행정수도 논란에 휘말렸다. 한 잡지에 보낸 원고가 뒤늦게 불씨를 댕겼다. 그 주장의 요체는 '천도(遷都) 9불가론(不可論)'이었다. 그는 반대파의 영웅, 친노(親盧)파의 원수가 됐다.

통일에 도움이 안된다, 물 부족이 심각하다, 자금조달이 만만치 않다…, 이런 논점을 두고 그는 반대론자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그러나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서 풍수가로 변신한 이 순진한 남자에게 돌아온 건 욕설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어요. 저는 그때 운동권 출신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하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인 걸 알았어요. 그들은 제 말을 들을 생각도, 듣고 싶어하지도 않았어요. 무지막지한 욕만 해댔습니다."

뭇매에 시달리던 그와 아내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에 의존해 잠들 수 있었다. 인민재판 열흘만에 그는 항복했다. 집과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 것이다. 그 뒤 그는 일상 활동을 제외하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는 하루 전에 나왔다는 새 책을 건넸다.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이다. 4년 만에 내놓은 신작(新作)이 하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백지화 논란과 겹친 건 운명일까.

―숨어 지낸 겁니까.

"특강도 하고 답사도 다니고 기업에 자문도 해주고 지냈습니다. 평상시와 같았어요."

―이번에도 풍숩니다, 뭐가 새롭다는 겁니까.

"책 제목을 '빌딩을 산(山)으로, 도로를 강(江)으로'로 하고 싶었습니다. 현대처럼 도시화가 90% 이상 진행된 세상에서는 과거 풍수이론을 적용할 수 없거든요."

―왜 출판사가 필자 주장을 묵살했을까요.

" '풍수'자(字)가 없으면 안 팔린다는군요. 문제는 풍수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도서 10진 분류법에서 9번으로 된다는 데 있어요."

―9번이 뭔데요.

" '사주·잡서(雜書)'항목입니다. 저는 풍수가 인문학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긴 돌아가신 아버지도 제가 지리학과에 진학하니 '왜 풍수를 하려느냐'고 반대했지요."

―최 교수가 되살리겠다는 자생(自生) 풍수가 뭡니까.

"우리 풍수는 명당을 찾는 게 아닙니다. 모자란 곳을 메워주는 비보(裨補)사상이 바탕입니다. 도선국사가 터를 잡은 1200~1300개 사찰 가운데 그렇게 좋은 자리는 몇 곳 안돼요."

―그런 자생 풍수의 맥이 언제 끊긴 겁니까.

"자생 풍수는 도선(道詵)국사에서 무학(無學)대사로 이어지다 조선 중기에 끊겼습니다.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도, 홍경래(洪景來)도, 전봉준(全奉準)도 모두 자생 풍수의 맥을 이은 분들입니다."

―다 풍운아들이군요.

"자생 풍수는 개벽(開闢)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례로 고려 태조 왕건릉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주산(主山)도 없습니다. 후기의 공민왕릉은 명당 중 명당입니다."

―왜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은 시신을 궁궐에 놔두고 전국에서 명당을 찾지요. 시신 썩는 내가 진동해 신하들이 간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공민왕은 원(元)나라에서 오래 살다 온 인물입니다. 그때부터 중국 풍수에 자생풍수가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 풍수와 자생 풍수는 뭐가 다른가요.

"자생풍수는 기복(祈福) 발복(發福)을 믿지 않아요."

―자생풍수가 중국 풍수와 개벽사상과의 연관 때문에 사라졌다는 얘깁니까?

"무학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입적하자 성종이 국사(國師) 칭호를 내리려는데 삼정승 육판서가 일제히 반대합니다. 무학대사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었겠지요. 경국대전에 보면 음양지리과 교과서 목록이 있어요. 지금 남아 있는 교과서가 없습니다. 규장각에 보관된 책 중 20% 정도만 정리됐다는데 그 안에 있을지는 모르죠."

―그럼 지금 남은 풍수서들은 다 위서(僞書)겠네요.

"비기(秘記)라는 말이 붙은 건 대개 그렇다고 봐야죠."

우리 사회에서 풍수(風水)는 앉아서 천리(千里) 밖을 내다보는 술법(術法)처럼 통한다. 한마디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과학이 종종 사생결단(死生決斷) 게임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바로 행정수도, 청와대 이전처럼 민감한 현안과 연결될 때다. 학자티 물씬한 최창조가 현대 지리학과 고전 풍수 이론을 섞어 한 말을 세상은 제멋대로 이해했다. 그의 팔자(八字)에는 갈등이란 단어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5년 전 처음 '이지메'를 당해본 겁니까.

"90년대 후반 화장(火葬) 문제를 거론했다 유림(儒林)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 제 반론은 경청했지요. 의견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요. 친노와 다른 것도 있어요. 반드시 해 뜬 다음부터 전화하고 해가 지면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유림과 운동권들의 차이가 뭡니까.

"운동권 출신들은 제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반대하느냐, 그 자체에 화를 냈어요. 그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많아요."

―또 어디가요.

"한 시민단체의 상임지도위원을 지금도 맡고 있습니다만 천성산, 사패산 터널 사례에서 보듯 대안 없이 반대만 하더군요. 낭비할 것 다 낭비하고 몇 년 후 해보면 자기들 주장이 틀린 걸로 나타나는데 사과도 안합니다."

―환경을 지키자는 취지는 좋지 않습니까.

"그 단체들 주장을 풍수적으로 말하자면… 흠, 잘생긴 산은 무조건 보호하고 별 볼 일 없는 야산은 건드려도 된다는 식이지요. 댐도 그래요. 환경단체는 무조건 못 만들게 하는데 제가 전주에 8년을 살아봐서 압니다. 그곳은 물이 부족해 금강댐 물을 끌어다 씁니다. 오죽하면 바닷물 담수화(淡水化) 얘기까지 나오겠습니까. 팔당댐에 물을 가득 채워도 유사시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사흘밖에 마실 수 없는 양입니다."

―그래도 생태계를 생각하는 건 그들뿐인데….

"소양강댐 건설 때 생태계 걱정을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새 생태계가 생겼어요. 새만금도 이미 방조제 밖에 새 갯벌이 생기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건설을 '유전자 변형식품' 같다고 겁주지만 배고프면 유전자 변형식품 가리겠습니까? 당연히 먹어야죠."

―토론을 해보지 그랬습니까.

"분위기 자체가 토론이 잘 안되는 풍토였어요. 한 번 논쟁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어요. 막무가내, 토론의 부재는 제가 가본 북한도 비슷해요."

―운동권, 일부 시민단체와 북한이 뭐가 비슷하단 말입니까.

"1997년 12월 북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리 가자 저리 가자, 자기들 마음대로더군요. 어느 날은 새벽에 깨우더니 '교수 선생, 축하합니다. 김대중(金大中) 선생께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왜 저를 새벽에 깨워 축하할 일입니까?"

―5년 전 주장했던 9불가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제가 내세운 것 중에 무리한 근거가 있긴 해요. 남으로 도읍을 옮긴 왕조가 망했다고 했는데 그건 고구려와 백제뿐이거든요. 두 가지 사례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일단 정부가 약속한 것을 어기는 건 사기(詐欺) 아닙니까? 충청도민들이 분개하는 이유를 저는 이해합니다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거야말로 정치적 행정적으로 결정해야지요."

―평양도 다녀왔다니, 서울과 평양 어디가 풍수적으로 좋던가요?

"당연히 서울이지요.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최창조는 세상과의 불화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유독 집착하는 게 현 청와대 터 문제다. 그는 청와대 터가 우리 국토를 유린하려는 일제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땅을 훼손하는 전통은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에서 유래됐다. 이른바 성소(聖所)를 더럽혀 기를 꺾겠다는 것이다. 최창조는 "일본은 그런 영국의 전통을 더 교묘하게 발전해 우리 땅에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5년 전 경기도 교하(交河)에 새 행정수도를 두자고 했지요.

"새 수도를 교하로 옮기자는 것처럼 돼있는데 행정부처는 서울에 그대로 두고 청와대만 옮기자는 것이었어요. 통일 후 서울이나 평양에 수도를 두면 남북 갈등이 생길 수 있어요. 대통령이 그 중간지대인 교하에 20년 정도 살면 어떻겠느냐는 글이었습니다. 그런 전제가 빠지니 마치 교하 신수도론을 주장한 것처럼 됐지요."

―왜 청와대를 옮겨야 합니까.

"청와대는 조선총독부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가 1927년 지은 겁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게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시작부터 불길했군요.

"청와대 역사를 '피'로 연 거지요.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장관의 관저였고요. 우리 대통령들도 그곳에서 비극을 맞았잖아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쫓겨나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감옥가고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직후 비극을 맞지 않았습니까? 김영삼(金泳三) 김대중 대통령도 골치를 앓았지요."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풍수적으로 청와대 터는 백두산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龍)의 목과 머리에 해당됩니다. 일제가 입 부분에 총독집무처를 짓고 목줄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어 눌러놓은 겁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봤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때 두번 가봤습니다. 두번째 갔을 때 '북악산 정상에 토치카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일제 때 만든 것인데 핵폭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해 보였어요. '지금 건드려서 뭐하겠느냐. 가까운 데 있는 흙으로 메우는 게 좋겠다'고만 했지요. 그때 청와대 내부를 샅샅이 봤는데 청와대 구 본관이나 지금 본관이 구중궁궐에서도 뒤쪽이었어요."

―그게 안 좋은 겁니까.

"저 같은 사람은 1주일만 살아도 돌아버릴 것 같더군요. 이건 풍수가 아니라 환경심리학에도 나와요. 불안감을 조성하는 자리지요. 역으로 보면 그런 터에서 몇년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통령들의 강기(剛氣)가 대단한 거지요."

―청와대 터에 있는 북악은 좋아 보이던데.

"북악산이 참 묘한 산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서울 시내가 전부 조망(眺望)됩니다. 한강까지 보입니다."

―좋은 산 맞네요?

"이상한 게 가까이서 보면 웅장하고 아름다운데 멀리서 보면 인왕산에 눌려 있어요. 자기가 인왕산에 눌리는 걸 모르고 '나는 볼 것 다 본다'는 식의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바로 북악입니다. 그 터에 살다 보면 사람이 점점 더 고집불통이 되는 거지요."

―지금도 교하로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남 근처 옛 일해재단 터가 좋아보이더군요. 지금 세종연구소가 전체의 10분의 1쯤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보안시설도 잘돼있고 서울공항까지 가는 지하도며 지하철도가 이미 다 건설돼 있어요. 아주 좋은 터라고 할 순 없지만 추가비용도 얼마 들지 않을 것 같고요."

―일해재단 터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누굽니까? 상왕(上王) 노릇 하려 했으니 괜찮은 곳이겠다 싶어 가본 겁니다. 그곳으로 옮기는데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해요. 국민들은 대통령이 한강 남쪽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잖아요.

―지금 청와대는 없애야 합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 자체로 관광명소가 될 수 있지요."

최창조가 만능(萬能)일 수는 없다. 그는 청계천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남도청을 옮길 때도 그는 무안을 추천했지만 실제론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해양국가 운운하는 이야기가 화두가 됐어요. 어차피 광주에서 옮긴다니 무안에 있는 삼향면 남악(南嶽)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서울의 북악에 대한 남악의 상징성에 손을 들어준 거지요."

―한창 추진 중인 4대 강 정비는 어떤가요.

"해야지요. 지금 섬진강을 포함해 5대 강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부서질 정돕니다. 영산강이 제일 엉망이고 섬진강이 그나마 제일 낫지요."

―대운하(大運河)는?

"그건 반대합니다. 낙동강과 한강은 완전히 다른 생태계인데 그걸 연결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고 꼭 해야 될 일도 아닙니다. 수운(水運)이 필요하면 그냥 부산에서 인천항으로 오면 됩니다."

―청계천 정비를 반대했지요.

"지금 해놓고 보니 잘한 거지요. 청계천뿐 아니라 안양천, 정릉천도 사람들이 건드려서 살려놓은 케이스입니다. 몇 년 전에는 물에 손 담그기가 무서울 정도였는데 지금은 왜가리가 날 정도잖아요. 청계천 반대한 건 풍수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조선시대 어효첨이란 분이 있었어요. 청계천은 개천(開川)이라 했는데 그때도 정비 논란이 많았어요. 명당수(明堂水)거든요. '명당수는 맑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을 때 어효첨은 '이렇게 큰 도성의 개천을 명당수라한들 어찌 맑게 할 수 있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부역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거지요. 반대한 그분도, 정비를 주장한 분들도 다 풍수의 대가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시 재상들은 다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어요. 어효첨은 죽은 뒤 강가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발복(發福)을 믿지 않은 거지요. 나중에 홍수가 나 무덤이 유실됐습니다만 옛 사람들이 지금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들보다 나아요."

―갑자기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이야기는 뭔가요?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나면서요. 허허."

―풍수의 대가도 잘못 볼 때가 있는가 봅니다.

"돌아가신 풍수대가 중에 육관도사와 지창룡 선생이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분들이 자진해서 묏자리를 봐준 적이 있어요. 그분들이 아버지가 경기도 여주에 잡은 터에 매장하면 '6개월 내에 큰일이 난다'고 하니 제 형이 '네가 한번 가보라'는 겁니다."

―두 도사(道士)의 말에 당황했겠습니다.

"풍수적으론 안 좋은 땅이었어요. 정북향(正北向)이었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버지 성품 그대로 잡은 터였습니다. 형에게 그 말을 하니 '그러면 됐다'고 하더군요."

―6개월 내 큰일이 생겼습니까.

"아들 녀석이 '서울대에서 잘렸으니 큰 일 난 게 맞다'고 해서 '이놈아 잘린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나왔다'고 했지요."

 

 

▲ 최창조는 풍수가도 많이 틀린다고 했다. 명당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풍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웃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최창조와 지리학, 더 나아가 풍수와의 인연을 맺어준 매개체는 아버지다. 그의 선친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장작을 사 서울에서 파는 일을 했다. 최창조는 일곱 살 때부터 조수(助手)로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어린 그에게 우리 땅, 우리 마을은 뇌리와 몸속에 박혀버렸다. 그래서 그는 천성적으로 도시를 싫어했다. 그는 전북대에서 서울대로 옮긴 지 4년 뒤 교수직을 내던졌다. 만일 전주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서울대 교수는 왜 그만둔 겁니까.

"사람 만나는 게 겁났고요, 또 한가지는 영어를 잘 못했어요. 하와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장소로 다시 오느냐'는 영어를 운전기사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20분 동안 대화했는데도. 사실 서울대로 간 건 여러분 특히 류우익 교수의 권유가 컸어요. 그분이 제 어머니께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내가 보기 싫으냐'고 해요. 내키지 않았지만 서울로 왔죠."

―교수가 사람 만나는 걸 겁내다니요.

"완치됐지만 한때 '공황장애'에 시달렸거든요."

―서울대 교수 그만두고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아내와 재래시장을 며칠 동안 관찰했는데 새벽 4시부터 짐나르고…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농사는 어렸을 때 해봐서 어려운 걸 알고. 집을 줄여 남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SK그룹 고 최종현(崔鍾賢) 회장이 도와줬습니다."

―무슨 대가로….

"처음엔 산소자리 봐달라는 줄 알고 거절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집은 유목민 텐트 이상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었고 자기 소유의 집도 없었어요. '젊은이들이 한국인이라는데 자부심을 갖도록 연구를 해달라'는 거였어요. 지금은 삼성생명과 한화건설에서 도와주고 있고요."

―결국 부동산 터 봐주는 거 아닌가요.

"종합적인 자료가 올라오면 판단을 도와주는 거지요. 직관(直觀)을 빌려준다고나 할까요."

―재벌가의 명당터 운운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서울에선 어디가 좋나요.

"서울에선 가회동이 제일 낫지요. 성북동도 북촌(北村)의 범주여서 아늑하고. 이태원동, 한남동은 외명당(外明堂)이어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입니다."

―강남 갑부들이 많다는 ○동은?

"서울 지세로 보면 청와대가 목줄기, 위장에 해당되는 곳이 무교동입니다. 대기업 본사와 은행 본점이 많지요. 창자 부위가 마장동 쪽입니다. ○동은 변기(便器)쯤 되는 위치인데 그 얘길 했다가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곧이곧대로 말한 거고, 요새 항외과라는 것도 많이 생기잖아요. 아들이 뭐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창자에 비유하는 게 좋아? 변기에 비유하는 게 좋아?'라고요."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댁이 명당은 아닌 것 같은데. 아파트인데 1층이고.

"명당, 명당 하는 건 배우가 무대 탓하는 것이나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이곳으로 온 건 대학 그만둔 후 생계가 막막해 넓은 집을 팔고 남은 돈을 생계에 쓰려 했던 겁니다. 1층은 장점이 많아요. 공짜로 수목 감상하고 엘리베이터 고장나도 염려없고 사고가 나도 금세 대피할 수 있잖아요. 자기가 좋으면 다 명당입니다."

―경기고 다닌 분치곤 꽤 괴팍한 성격 같은데.

"성적은 거의 꼴찌였어요. 단(段)은 못 땄지만 유도부 주장도 했고요. 고1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그 덕을 톡톡히 봤어요. 당시 경기고에 '체인' '세븐스타'라는 서클이 있었는데 안상수 인천시장이 '체인' 보스였어요. 어느날 술집에서 마주쳤는데 유도부 주장이라 건드리지 않더군요."

 

/ 조선  2009.12.

 

 

 

[名士에게 듣는 山이야기]

최창조 풍수학자

최창조 풍수학자 겸 전 서울대 교수

 

▲ '한국 자생풍수의 대가' 최창조 전 교수가 관악산 자락 호암산에 올라 관악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주량 : 막걸리 3되, 취미 : 등산,

존경인물 : 김구,

가훈 : 건강 제일,

감명깊은 책 : 국민학교 때 방학생활,

감명 깊은 영화 : 대부,

스트레스 해소 : 술,

좌우명 : 땅은 거짓도 없고 용서도 없다….

 

장난으로 적은 게 아니다. 본인 인물소개란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것도 예사인물이 아니다. 좀 우습기도, 황당하기도, 솔직한 것 같기도, 괴짜 같기도 하다.

 

이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한국 풍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그의 이름 앞에 붙어다니는 인물이다. 한국의 풍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고,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알 사람은 다 안다. ‘아니, 근데 그 사람이 자기 인물소개를 저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의 해맑은 표정, 소박한 품성, 무욕의 기질에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풍수의 대가 최창조(58) 전 서울대 교수.

한국에 ‘자생풍수’란 이름으로 풍수를 대중화시킨 건 순전히 그의 업적이고 공이다. 90년대 그가 쓴 책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가 쓴 글은 일간지 한 면을 장식했다. 풍(風)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풍수(風水)를 알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전성기였다. <풍수잡설>(2005), <닭이 봉황 되다>(2005), <땅의 눈물 땅의 희망>(2000), <북한 문화유적 답사기>(1998), <한국의 자생풍수>(97년) 등 그가 쓴 15권의 책은 웬만한 사람이 들어만 봐도 솔깃한 것들이다. 9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도 2000년대 들어 좀 뜸해졌다. 나이 탓일까? 세상 탓일까? 체력 탓일까? 여하튼 근황이 궁금했다.


현대의 풍수는 도시가 대상…체계도 바뀌어야

 

요즘 그는 나이와 떨어진 체력으로 왼쪽 다리에 말초신경 이상이 생겼다. 걸어도 땅에 닿는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그와 같이 관악산 자락 호암산 인근에 잠시 올라갔다. 사실 그 때까지 그의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 산에 올라가 귀띔해줘 알았다. 깁스를 푼 지도 얼마 안됐다고 했다.

대단히 죄송하고 무안했지만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조금씩 운동하는 게 좋다고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인격의 소유자였다. 다행히 무사히 내려왔다. 근데 상황을 듣고 보니 말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본인은 전혀 문제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풍수 관련 집필이나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곧 도시풍수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될 것입니다. 또 예전에 썼던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는 전면 수정 증보판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전통적인 풍수사상을 어떻게 오늘의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좋은 땅…’은 전통풍수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간 바뀌어 온 풍수관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 책이고, ‘도시풍수’는 어차피 거의 전 국토가 도시화된 마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도시의 명당이란 생각에서 그런 부분들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풍수는 풍토에 관한 지혜의 집적입니다.

과거의 풍토가 농촌 경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현대의 풍토는 도시가 주된 주거환경이 되었습니다. 풍토가 바뀌었으니 풍수에 관한 논리 체계도 당연히 그에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풍수는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고, 그런 것을 재탕, 삼탕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풍수에 담겨 있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그 사고방식의 변용(transformation)일 것입니다. 그 점에서 이제 풍수는 점차 과거의 전원적 풍토를 떠나 도시적 풍토로 돌아올 것입니다.”

전통풍수의 재정립과 도시풍수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을 거의 끝냈다는 얘기로 들렸다. 특히 ‘도시풍수’ ‘도시 명당’이라는 새로운 개념정립으로 또 한번 풍수 대중화를 일으킬지 기대됐다. 역시 대가다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많이 변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교(경기고) 때 공부가 하기 싫어 4·19탑에 놀러갔다 기인을 만나 풍수를 하게 됐다고 말해왔으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 최창조 전 교수가 걸어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왼쪽다리 말초신경 이상에도 불구하고 산에 오른 후 하산하고 있다. / 대화를 나누며 산을 오르고 있다. 이 날 최 전 교수는 불편한 다리와 산에 조금 내린 눈으로 인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 호암산에 오른 후 맑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해맑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는 최창조 전 교수.

 

 

“풍수에 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계기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연이라 봐야겠지요. 물론 저도 우연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아요. 우연의 저변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도 풍수 공부의 방아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부문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거의 반드시라 할 만큼 그쪽에 몰입하게 된 이유를 가지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풍수는 나의 숙명’이란 생각까지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시작 동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꼭 풍수 공부의 계기 같은 것이 떠오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중시하는’ 풍수에 최선을 다하면서 금전과 명예는 무욕에 가까운 그가 부러웠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두 가지가 상당할 정도로 비례할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문득 그가 왜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왔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전해 듣긴 했지만 그와 친한 소설가와의 대화에서 그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 교수 기사가 그동안 언론에 얼마나 크게 보도됐습니까?”
“보통 신문 한 페이지 정도로 나왔죠.”
“그러면 최 교수가 속한 단체는 어디입니까?”
“대한지리학회죠.”
“대한지리학회 기사는 어느 정도 크기로 나왔습니까?”
“거의 1단 크기로 나왔죠.”
“그러면 최 교수는 지리학회 다른 교수들한테 미움 사고 공격받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이 우스개 같은 대화가 많은 의미를 함축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단순 명쾌하게’ 정리됐는지도 모르겠다. 92년 교수직을 그만 둔 그는 주로 집필활동만 했다.

모 대기업 자문위원으로 월급 받으며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했으나 그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풍수를 전공하면서 후회한 적이 없었는지 물어봤다.

 

서울대에서 2년간 산악부 활동

 

“공부하면서 회의에 빠진 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간혹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 성격 탓일 겁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명당은 당신 마음속에’라는 명제가 떠올랐을 때입니다. 만약 명당이란 것이 어느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품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심리작용의 결과라면, 풍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수신(修身)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한 확답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과제인데다가 충분히 수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땅은 땅대로 사람의 마음과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담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본이 명당’이란 엉뚱한 가설 때문에 생긴 회의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땅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곳곳에서 끊기고 물길이 막힌 상황에서 전통적 의미의 명당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현대적 의미의 명당이 필요해진 시대입니다.

이 논리를 좀 확장시키면 결국 ‘명당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풍수적 사고방식은 자본을 배척하는 성질이 분명 있습니다.

명당을 만들기 위한 자본이라, 풍수를 위한 반(反)풍수적 개념의 도입은 저를 충분히 회의에 빠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두 가지 회의를 해결하여 궁극적으로 도시풍수 혹은 도시명당이란 개념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회의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발전을 위한 하나의 매듭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단순명쾌하게 ‘후회는 있었지만 남 탓은 하지 않았다’였다. 역시 무욕의 소유자 그대로였다. 풍수로 세상에 지식을 전하면서 인격적으로 세상에 청량감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도 풍수 전문가들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했다.

 

“풍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아주 현학적인 척하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개념을 써가며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한테 그 개념이 뭐냐고 실제 물어보니, 자기도 정확히 모르고 있더라고요. 개념도 모르면서 일반 사람들을 가르치려하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일반인들도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예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지휘하는 풍수 전문가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도 안합니다. 자기가 유아독존인 척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실제 그 사람들 하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고 물어보니, 근거가 없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르니 뭔가 있는 척 위장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셋째, 사람들이 물어보는 대로 성실히 답변해주면서, 이유도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믿음이 가는 풍수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지난 1970년 서울대 지리학과 단합대회를 북한산 정상 백운대에서 가졌을 ??의 장면.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최창조 교수. 최교수는 당시 서울대 산악부에서도 활동했다. /

지난 1969년 울릉도 성인봉을 오르기 전 배에서 울릉도 통구미를 최 전 교수가 직접 촬영했다. /

69년 울릉도 성인봉을 등산한 후 나리분지로 하산하면서 최 전 교수가 '너와집' 모습을 담았다. 당시 이 너와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모든 군속(群俗)들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고 무욕적이면서 해맑은 표정의 소유자인 이 풍수대가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같기도 했다.

그의 이런 품성이 어디서 나왔을까? 유유자적하면서 여유 있는 그의 자세는 영락없이 산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보여주는 그 산 말이다. 언제부터 산을 좋아했냐고 물어보니 서울대에서 2년간 산악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취미란에도 항상 등산이라고 쓰여 있다.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봤다.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다 써도 되냐고.

 

“내가 어느 자리, 어느 순간에서건 내가 한 말은 한 마디 빼지 않고 다 써도 괜찮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돌아서서 딴소리 않는’ 이 솔직담백하고 해맑은 풍수대가의 세상에 대한 외침으로 들렸다.

 

 

/ 월간산. 2007.03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본 4대강

 

"4대강살리기는 중태 빠진 어머니 치료"

 

사람들은 대개 풍수를 ‘묏자리 잡는 술법’, ‘집터 잡는 기술’,

 

‘조상들의 지리 지혜’, ‘전통적인 환경사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풍수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풍수는 미신도 과학도 아닌 상식에 바탕을 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풍수는 땅의 기를 살펴 땅의 성격을 읽어내고, 땅과 인간이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풍수는 서구적인 지리 전통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정교한 이론 체계다.

 

우리 선인들은 풍수적인 사고를 통해 환경을 인식했고 장소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리고 풍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처리하는 방식으로서 우리의 공간 속에 투영돼왔다.

 

풍수의 논리구조는 인간이 생명력의 흐름인 땅의 생기(生氣)를 받아 사람과 삶터의 생명력과 건강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땅은 저마다 독특한 성격을 가졌다. 산이 많은 곳, 들이 너른 곳, 지대가 높거나 낮은 곳 등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땅의 생김새와 분위기는 다양하다.

 

4대강 살리기는 반드시 필요한 치료행위

 

땅의 성격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 지기(地氣), 즉 땅기운이다. 지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빛과 바람, 그리고 물이다. 바람과 물은 지기를 운반하는 존재이며, 빛은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동력이다.

 

바람과 물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산이다. 산에서 물길이 시작되고, 바람은 산을 타기도 하고, 산은 바람을 막기도 한다. 물은 산과 함께 흐르기도 하고 산에 막혀 멈추기도 한다. 산과 물의 배치와 모양은 지기의 흐름과 분포를 달라지게 한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엄청난 주장에 대한 최초의 느낌은 황당함이었다. ‘반 섬나라, 반도인데 운하가 왜 필요한 거지?’ 꼭 뱃길이 필요하다면 동, 서, 남해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고, 내륙에는 대단위 공업단지도 별로 없으니 배를 띄워 물건을 날라야 할 만큼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운하 사업에 대한 반대가 4대강살리기 사업에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사업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나는 4대강 사업이 현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치료행위라고 믿는다.

 

 

말이 나온 김에 환경을 빙자해 반대를 일삼던 사람들에게도 한마디 하자. 동강댐?

지금 어찌 됐는지 아는가?

여름철만 되면 삼류 유흥장에 쓰레기더미가 된다. 강물을 탄다고 사람도 여럿 희생됐다. 천성산과 북한산 터널은? 수년을 끌며 막대한 예산을 날렸지만 결국 개통됐고, 그것으로 생태계가 크게 훼손됐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청계천 사업에는 필자도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후회한다. 내 반대는 심사숙고에서 나온 게 아니라 “당신 전공이 풍수니까 반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자들의 권고에 별 생각 없이 따랐을 뿐이다.

물론 청계천 복원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둑한 곳에서 쥐 떼가 보행인을 놀라게 한다거나, 여름철이면 노숙자들이 많이 몰려든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부작용 무서워 포기해선 안돼

 

하지만 반대에도 윤리의식과 염치가 필요한 법이다. 환경운동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운동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반도 대운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풍수적으로든 상식적으로든 지금 우리의 강들은 죽어가고 있다. 풍수는, 아니 대부분의 민족은 자연을 어머니로 본다. ‘어머니인 땅’, 이것이 풍수의 출발이다. 4대강살리기는 중태에 빠진 어머니를 치료하자는 것이다.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병든 어머니를 방치하자는 데 지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고쳐드려야 한다.

 

실제 성공 사례도 많다. 청계천이 그렇고 내가 사는 안양천이 그렇다. 어릴 때 살았고 지금도 큰댁이 있는 중랑천도, 가끔 가보는 양재천도 다 그런 사례다. ‘치료’ 전에는 손가락을 담그는 것조차 꺼려지던 썩은 물이 이제는 왜가리와 물오리가 구역 싸움을 벌이는 곳으로 변했다.

 

당연히 물고기가 많아져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 ‘어머니’인 땅은 중병을 앓고 있다. 치료해드려야 한다. 당연히 치료 과정에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 부작용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풍수는 치료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풍수는 치유(治癒)의 지리학이다.

 

위클리공감 글·최창조(녹색대학 풍수풍류학전공 교수,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

 

 

 

4대강?

나는 전격적으로 찬성한다.

 

나는 평생을 강을 끼고 살았고 냇가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전국의 어지간한 저수지와 남해안,제주도의 바닷속을 헤집고 다닌 사람이다.

그래서 경험으로 본 생각이다.

 

우리나라 하천의 하상이 높아져서 더 이상 뚝을 쌓을 수도 없다. 강바닥은 이미 썩을대로 썩은 오니로 차있다. 지자체장놈들이 자갈,모래 채취를 분별없이 해먹어서 아주 엉망이다.

보를 막아서 더 썩는다고한다. 내가 보기로는 보를 쌓고 오랜시간이 지나면 아주 좋아진다. 토사의 유출도 막고 생태계가 살아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올 여름 적조가 생겨 문제인데 전에 저수지의 바닥을 파내어 저수용량을 늘리는 공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급수의 물이 몇년동안 악취가 나서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다. 바닥의 오니를 퍼내면서 생긴 것이다.

몇년후 기막히게 좋아졌다. 전보다 더.!!!

 

환경?  맞아 죽을 소리지만 이 땅의 오염주범은 축산농가다. 왜 환경단체는 입 다무는가?

1990년 초부터 생기는 축산 농가에 저수지,강물은 썩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낚시는 접었다. 전국이 다 그랬다. 지금도....

 

바다도 똑 같다. 양식장 밑바닥 좀 들여다 보라 .

한려수도? 웃기는 소리다 바다밑도 퇴적물이 그득하다. 다 썩었다.

포항제철 앞바다가 제일 깨끗하다면 믿을까?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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