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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산은 무엇인가?
최원석 ─ 경상대학교 연구교수
1. 머리말
우리는 흔히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다만 산이 국토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만이 아
니라, 우리 일상의 생활 및 문화와 심지어 의식에서조차 산의 비중과 영향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뜻으로 넓게 해석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산은 겨레 정신의 원형질이요, 고유한 전통문화라는 그릇을 구워낸 가마였으며, 삶과 죽음으로 순환하는 생활의 근거이자 토대로서의 1차적인 생태환경이었다. 다시 말해 산은 우리의 생명과 겨레문화를 잉태한 태반이자 탯줄이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
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던 것이다. 취락의 입지와 공간구조를 살펴볼 때 나라의 수도나 지방도시 그리고 마을 등 규모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삶의 터전은 산의 둥지에 입지하였고, 비록 평지에 입지한 취락이라도 주위의 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이 이럴진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도 산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흔히 죽어서 돌아가는 생명 회귀의 공간을 산소(山所)라는 일반명사로 부르는 까닭도 바로 산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산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밭을 일구며 살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이 바로 겨레의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산으로 에워싸인 한 우리 땅의 이러한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은 산의 지리학으로서 풍수를 낳았으니, 한
국의 풍수사상은 우리 금수강산의 자연성과 미학을 가장 잘 설명하고 해석해 주고 있다.
우리 땅에는 어느 지역이나 산 이름 및 설화에 풍수가 관련되어 있고, 나라의 수도나 고을 및 마을에 주산(主山)을 배정하여 축을 세우고 주위로 좌청룡 우백호의 공간질서를 갖추었으며, 더욱이 이상적인 삶터가 갖춰야할 경관 요소 중에 산이 부족하면 조산(造山)이라고 하여 산을 만들어서 경관을 보완하는 비보풍수(裨補風水)가 널리 행해졌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지로 이 글에서는, 삶과 죽음으로 순환한 공간적 생활사의 궤적에서 산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
을 미쳤으며, 산과 더불어 수 천 년을 살아온 겨레는 지리적 문화전통을 어떻게 이루었고, 그리하여 산의 의미와 가치를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는지 그 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국도(國都)의 입지관과 산
1) 수도 입지에서 산은 필수적 요소
우리의 전통적인 수도의 입지 선정 과정에서 산은 필수적인 입지 요소였다.
고대의 신시(神市)에서 조선의 한양에 이르기까지 산과 관련된 국도 입지관의 전개 및 발전양상을 살펴보기
로 하자. 도읍지의 선정 관념이 드러나는 최초의 내용은『삼국유사』의「고조선」조에 등장하고 있다.
"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位太伯)을 내려다보니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곧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왔는데 이를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위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홍익인간을 가능케 해 주는 장소로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가 지목된 사실이다.
이것은‘산(태백산)’·‘숲(신단수)’·‘도시(신시)’라는 도읍의 원형(原形)적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
다음에 제시할 기사는 김해 금관가야의 수도 선정 사례이다.
"<수로왕> 즉위2년(43) 계묘 춘정월에 왕이 이르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고자 한다”하고, 이어 가궁의 남쪽신답평(新沓坪)에 가서 사방으로 산악을 바라보고좌우(신하)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이 여뀌잎(蓼葉) 같이 협소하나 빼어나고(秀) 기이하여(異)하여 가히 16나한이 머물 땅도 될만 하거든 하물며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는 7성(聖)의 머물 땅(住地)에 적합함이랴. 강토를 개척하면 장차 좋을 것이다.”하였다 (『삼국유사』「가락국기」)."
위 기사에서도 ‘산’의 요소는 수도 입지 선정 과정에 있어서 제1의 준거요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특히
수로왕은 사방으로 산악을 둘러보면서 산의“빼어나고 특이한 지세(地勢)”를 중시하였다는데, 이러한 관념은
산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가치 해석의 일단으로 보인다. 더욱이 본문의“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룬다”는
역학(易學)의 상수적(象겤的)인 지세 해석 방식으로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수리적인 해석은 국도입지 선정사의 초기적 형태로서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蜂岡)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삼국유사』「탈해왕」)."
탈해가 정한 곳은 이후 신라의 왕경이 들어선 현재 경주의 반월성 자리이다. 위 기사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초생달같이 둥근 언덕을 하고 있어서 오래 살만한 지세”라는 탈해의 입지관이다.
앞에서 살핀 가야의 입지관과 비교한다면, 신라의 경우는 수도가 입지할 산세를 초생달과 같이 유물적(類物的)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초생달은 보름달이 될 가능태를 지니고 있으며 길(吉)한 형상으로서, 이는 초기적 풍수 형국론(形局論)의 관념과 사유방식으로 볼 수 있다.
2) 풍수도참적인 수도의 입지
가야와 신라를 제외한 후대의 역사서에서 볼 수 있는 고대인들의 수도 택지에 관한 구체적 사실은 더 이상 찾기 어렵다. 이제 역사를 건너뛰어 10세기 후고구려에 이르면 드디어 다음과 같은 풍수적인 천도의 기사가 나타난다.
"신라 효공왕 7년(903)에 궁예가 국도를 옮기려고 철원, 평강에 이르러 산수를 둘러보았다(『삼국사기』권 제12)."
"궁예는…(전략)…도참설을 믿어 갑자기 송악을 버리고 평강으로 돌아가 궁전을 지으니…(후략)…(『고려사』태조 원년)."
이 기사로 알 수 있듯이 10세기 당시에 풍수도참설은 나라의 수도 점정을 가늠할 만한 영향력 있는 논리였음
을 알 수 있다. 풍수도참은 지리와 천시(天時)를 인사(人事)의 길흉과 직접 연계시키며 한 나라 수도의 흥망은 지덕(地德)과 시운(時運)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는 논리이다.
궁예에 이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개경을 수도로 정한 때는 개국 2년(919) 정월이었다. 『고려사』에는
“기묘 2년 봄 정월,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여 궁궐을 건축하였다”고 적고 있다.
왕건이 개경을 수도로 점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개성이 지닌 풍수지리상의 훌륭한 조건과『도선답산가』에 나오는 “송악산이 진한과 마한의 주(主)가 된다”는 도참설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의종조(1147~1170) 김관의의『편년통록』에는 수도 입지와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기사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신라의 감간 팔원은 풍수를 잘했다. 그가 부소군(왕경 개성부)에 이르렀는데, 군은 부소산 북쪽에 있었다. 산의 형세가 빼어나긴하나 민둥산임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심어 바위와 돌이 드러나지 않게한다면, 삼한을 통일할 자가 나오리라”고 하였다. 이에 강충은 산의 남쪽으로 옮겨 거처하여 소나무를 온 산에 심었다. 그로 말미암아 송악군이라고 이름했다."
3) 수도 선정에서 보이는 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려시기의 위의 기사를 이전과 비교해보면 산과 관련한 수도 입지의 새로운 사유가 드러난다. 송악산의 풍수적 결함, 즉 민둥산을 소나무를 심어서 인력으로 보완한다는 내용이 그것으로서 바로 산에 대한 비보(裨補)적사유가 나타나는 것이다. 고려사를 통독하여 보면 왕조에서는 주산(主山)인 송악의 보전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산기(山氣)를 배양하기 위해서 소나무를 심고 가꾸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산천비보(裨補)적 사유는 조선조 한양에 이르면 더욱 발전되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금산(禁山) 제도로 법제화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국도인 한양에서 실행된 산에 대한 비보는 고려의 개성에서 시행된 그것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우선, 비보에 대한 지리적인 인식체계가 고려조에 비해 심화되었다.
조선조에는 도성에 이르는 산의 주맥(主脈)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멀리는 장백산에서 철령을 거쳐 가평과 양주 그리고 백악에 이르는 체계적인 파악으로 심화하였고, 가까이로는 궁궐에 이르는 내맥(걐脈)에 더욱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둘째, 산에 대한 비보의 형태 및 기능이 고려조에 비해 훨씬 다양화되고 체계화되었다.
고려조에는 주산인 송악산의 비보에만 치중하였으나, 조선조에는 주산에 이르는 내맥과 주산에서 궁궐에 이르는 지맥까지를 고려하는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른 비보형태도 보토(補土), 식송(植松)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특히 조선조에는 동대문 근처에 가산(假山)을 인위적으로 지어 수구(水口)를 방비하는 등의 비보방책을 취하고 있다.
셋째, 비보의 공간범위상, 고려 개경은 주산인 송악에 한정되고 있지만 조선조는 주산의 내맥과 내외 사방의 산을 비보하는 등 광역화되었다.
끝으로, 조선의 비보는 전조에 비해서 금산정책의 법제화 등 산에 대한 정책적인 운영과 조직적인 관리가 체계화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지만 우리 겨레의 수도 입지관에서 산은 중심적인 입지 요소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
으며, 수도의 선정과정에서 드러나는 입지관은 산세에 대한 상수적 해석, 유물적 해석, 풍수도참적 해석 및 비보적인 해석 양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개관할 수 있었다.
3. 산과 고을의 입지 및 배치
1) 고을의 진산과 주산
오늘날 시군이나 읍의 관청 소재지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조의 옛 고을[邑]들은 진산을 배정하여 상징성을
부여하였고, 실제 지형적으로도 대부분 주산을 등지고 입지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읍치(邑治)의 공간구성 및 배치도 산의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더욱이 읍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자연경관의 조건에 비추어 산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산과 고을의 관계를 말해주는 뚜렷한 증거가 바로 각 고을마다 배정하고 있는 진산(鎭山)이다. 일반적으로
진산은 고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많고 따라서 읍 취락은 남향하여 입지하였다.
조선중기의 관찬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총 330개의 고을 중 267개 고을에 진산이 명기되어 있으며, 그 중 북쪽(동북과 서북을 포함)에 진산이 있는 고을은 약 53% 이상에 해당하는 143개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진산의 위치와 읍의 관계를 경남지방을 사례로 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경남 고을의 진산을 분석
해 보건대 총 30개의 고을 중에 삼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산을 정하고 있으니 이러한 비율(97%)은 다른 도
에 비하여 매우 높은 것이다. 이는 경남 지역의 고을에는 신라 및 가야문화권으로서 전통적 산악신앙이 깊이
뿌리내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중에 고을의 북쪽 10리 내에 진산을 두고 있는 고을이 열다섯으로 제일 많았다. 동북쪽에 진산을 둔 양산과 영산을 더하면 30개의 고을 중 17개 고을이 10리 내의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지형적 특성에 따라서는 방위상 동·서·남쪽이거나 고을로부터의 거리상
10리 밖이라도 진산으로 정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원래 진산의 개념은 풍수적 주산(主山) 개념보다 시기적으로도 앞설 뿐더러 사상적 계통이 다르다.
진산이라는 것은 고대적인 산악신앙의 계보로서 고을을 지켜주는 산이라는 뜻이고, 주산이라는 용어는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혈장(穴場)이 있는 명당 뒤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두 개념이 실제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 지역적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울산의 진산인 무리용산인데, 이 산은 읍의 태화강 맞은편 읍의 동쪽 24리의 거리에 있다. 주산은 읍을 등지면서 지형적으로 맥을 대고 있는 것이 필수이나 무리용산의 위치는 강 너머에 지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무리용산의 위치는 읍의 방어적이고 전략적인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이 진산으로 하여금 고을을 수호하도록 의탁하는 상징적 의식이 담겨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래적인 진산 개념은 풍수가 수용된 이후 풍수적인 주산 개념으로 발전하는데, 그 과정을 무라야마지준(村
山智順)은『조선의 풍수』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진산을 구해서 고을을 정하고 진산 아래서 집단 양기를 이룬 도읍은 나중에 들어온 풍수설과 잘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풍수가 목적하는 바는 생기가 흘러 들어오는 땅을 구하는데 있고 생기는 산맥을 따라 흘러온다. 이 산맥을 내룡(來龍)이라고 하는데 진산은 바로 이 내룡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신이 진좌(鎭座)하는 산으로서의 진산을 존숭(尊崇)하기보다는, 음양오행의 깊은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인생의 길흉이 생기를 받아 후박(厚薄)이 정해진다고 믿는 이론적 체계를 가진 풍수설에 기울어져 주산을 두는 것이 도읍의 행복을 확실히 약속해 준다고 해석되었으니 도읍풍수가 모든 고을에 채용되었다고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진산이 도읍풍수의 내룡 즉 주산으로서 중시된 것은 민간신앙이 천신신앙보다는 지기(地氣)에 의한 것으로 변천되면서라고 할 수 있다. 신의 힘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려던 원시적 생각보다는 생기에 의해서 번영을 가져오게 하려는 이론적 인위적 사고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2) 읍의 입지 및 배치와 산의 관계
그러면 읍의 입지 선정 과정에서 산이라는 지리적 요소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조선왕조 실록에는 국도(國都)를 정하는 데 있어서의 네 가지 조건을 말하고 있으니 그 첫째가 산천의 형세라는 풍수지리적 조건이였으며, 두 번째는 교통지리적 조건으로서의 조운(漕運)이 편리한지의 여부와 사방으로 도로가 고르게 나있는지의 문제, 그리고 세 번째는 군사지리적 조건이 되는 성곽을 축조할 수 있는 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고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으니『신증동국여지승람』「거제현」조에는 거제 고을의 입지 선정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보흠의 기문에, 우리 주상전하께서 의정부 우찬성 진양 정상공 분에게 하명하시어,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서, 관아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다가 옮기도록 하였다. 북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삼면은 산이 막혀서 높고 낮음과 찬 샘물 등, 모든 것이 영구한 터로 될 만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고을 터를 고르는 데에 있어서‘음양을 살핀다’는 풍수적 길흉조건과 식수원, 그리고 방위적
여건을 들고 있다. 산천 형세의 음양지리적 조건을 살피는 일이 물을 얻는 일이나 방어적 조건보다 우선시되었던 것이다.
고을의 공간적 배치를 산과 관련하여 살펴보자면, 주산의 지맥이 내려와서 머무는 곳으로서 고을의 중심부
자리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와 읍의 수령이 거주하는 아사, 그리고 공사를 처리하는 동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객사를 중심으로『주례고공기(周괋考工記)』에 따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를 이루어 문묘는 왼편에, 사직단은 오른편에 배치하고, 성황사는 앞에, 여단은 뒤에 배치하되 각각은 주위 산천의 지리적 조건에 맞도록 하였다.
산의 풍수적 조건 여하에 따라서 건물의 배치가 조정되기도 하였으니 함안 고을이 예전에는 남면하여 있었으나 남쪽에 있는 여항산이 화산(火山)처럼 생겨서 자주 화재를 당하게 되자 군성(郡城)의 남향 정문을 동향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을에서 읍성의 북문 혹은 후방문은 잘 사용치 않았는데, 북문은 주산의 지맥이 흘러오는 통로이기에 손상치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3) 읍의 경관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산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고을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경관 요소 중에 산의 지형적 조건이 부족하면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어서 고을의 산 경관을 보완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산을 조산(造山)이라고 하는데 특히 풍수적으로 터를 비보할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보허산(補虛山)· 비보조산· 가산(假山)이라고 한다.
조산은 기능적으로 주로 지세, 혹은 수구의 허결함을 보충하여 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형한다. 예컨대 선산읍에는 다섯 개의 봉황알을 상징하는 오란산(五갻山)이 있는데, 이는 선산의 진산인 비봉산의 기운을 고을에 머물게 하는 한편 고을의 좌측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잠그며 지기(地氣)의 흩어짐을 막는 기능성을 띠고 있다.
유사한 사례는 순흥 고을에도 발견된다. 순흥 고을의 진산 역시 비봉산으로서 봉황산이 날아가는 것을 막고 고을 앞 수구부의 허술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고을 남쪽 5리쯤(석교리 삼포밭들)에 3개의 조산(알봉)을 만들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지만 한국의 전통 고을에는 진산이 배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산의 맥을 대고 입지
하였으며 읍의 공간구성과 건축물의 배치 역시도 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읍이 구비해야 하는 자연경관의 필수적인 요소인 산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위적으로 조산함으로써 경관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전통 읍취락의 입지와 배치, 그리고 공간 구성원리를 풀 수 있는 마스터키는 바로‘산’인 것이다.
4. 산 둥지에 깃든 우리의 전통마을
1) 배산임수의 둥지에 터 잡은 마을
흔히 우리는 한국 전통마을의 입지적 특성을 일컬어‘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마디로 표현한다. 우리 겨
레는 오랜 옛날부터 산의 둥지에 삶터를 일구어 산의 생태환경과 더불어 공존공생하는 생활양식과 문화를 창출하여 왔던 것이다. 산의 고개나 골짜기에 입지한 자연마을의 옛 이름은 흔히 고개의 경우에는 재나 현, 그리고 골짜기의 경우에는 골(곡)이나 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의 사례로 보자면 고개 입지의 마을로서 고분재현 늦은재 느진재(만현) 등이 있고, 골짜기에 입지한 자연마을로서 배나무골 등과 도리실 등의 이름이 있다.
조선중기의 실학자 홍만선은 그의 저서인『산림경제』에서,“ 선비가 살 곳을 정할 때는반드시 풍기(風氣)가
모이고 앞과 뒤가 안온한 터를 가려서 오래 도모할 곳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풍기가 모이고 안온한 터는 산간 분지 지형이다. 홍만선은 터를 정하는 방법을 여러 문헌에서 인용하여 참고케 하였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치생(治生)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지리를 가려야 한다.
지리는 수륙(水陸)이 아울러 통한 곳 트인 곳을 최고로 삼으니 뒤로는 산이고 앞에는 물이 있으면 곧 승지(勝地)가 된다. 그러나 또한 널찍하면서 긴속(緊束)하여야 한다. 대체로 널찍하면 재리(財利)가 생산될 수 있고, 긴속하면 재리가 모일 수 있는 것이다."
마을이 뒤로 산을 등지고 입지하면 실질적으로도 여러 가지 측면의 이익이 있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산간골짜기는 산지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농경에도 매우 유리한 촌락입지였다. 왜냐하면 촌락 주위를 둘러싼 산지나 구릉지에서는 연료·건축재는 물론 다양한 식료를 얻을 수 있었고, 마을 앞을 흐르는 계류 변에는 큰 강변에 비해서 훨씬 좁지만 범람의 위험이 적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농사를 짓기에도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적절한 물의 공급이 그 성패를 좌우하는 벼농사의 경우에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강변의 평야지대보다
이러한 곳이 훨씬 유리하였다. 강변의 경우 대규모 수리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한 일제시대 이전까지 관개에 어려움이 많았던 데 비해, 골짜기에서는 상대적으로 제어가 쉬운 계곡물을 이용해 보(洑)나 소규모 저수지를 만들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이중환도 강가에 사는 주거[江居]는“혹 지세가 낮아서 물에 잠기면 수확을 볼 수 없고 강물이 깊고 크면 관개가 마땅치 않으며”, 반면 계곡을 끼고 사는 주거[溪居]는“평온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경치가 있고 관개와 경농(耕農)하는 이익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산골 입지는 병화와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에도 적당한 곳이었다. 특히 조선중기 이후 심해진 당
쟁과 사화를 계기로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이상향을 동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더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일반 민중들도 이에 동참하여 피병(避兵)·피세지(避世地)의 탐색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마을의 입지 선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대체로 이러한 산곡 입지는 풍수적인 명당의 조건에도 적합한 곳이 많았다. 마을이 골짜기에 입지하고 있어
장풍(藏風)의 조건에도 유리하였으며, 계곡물 가를 끼고 있으므로 득수(得水)의 조건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
다. 우리가 흔히 배산임수라고 하는 마을입지의 전형적 표현은 바로 이렇게 뒤로는 산을 끼고 앞으로는 물을
두르고 있는 풍수적 산곡 입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풍수적인 명당지는 양자(兩者)의 장점을 겸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의 합리적인 입지 기준이자 선택의 척도였던 셈이었다.
2) 좋은 마을터가 되기 위한 산의 미학적 요소
실학자 이중환은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지리적 요인과 경제적 요인[生利], 그리고 사회적
요인[人心] 다음으로 산수의 미학적 요인을 꼽기도 하였다.
"대개 살 터를 잡는데 지리가 가장 으뜸이고 다음에 생리(生利)며 그 다음이 인심이고 다음이 산수니 이 네 가지가 하나라도 결여되면 낙토(樂土)가 아니다.
지리가 비록 아름답더라도 생리가 결핍되면 오래 살 수 없고, 생리가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추하면 역시 오래 살 수 없으며,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더라도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요, 근처에 산수를 완상할 만한 곳이 없으면 성정을 도야할 수 없다."
그는 살만한 마을[可居地]이 되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보이는 산이 사방으로 너무 높아서 해가 늦게 돋고 일
찍 지는 곳은 꺼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산골짜기 입지에서 불리한 채광의 조건을 경계한 것이다.
이중환은 특히 마을 뒷산과 앞산의 미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먼저 마을을 등지고 있는 주산의 모양은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반대로 주산의 내맥(걐脈)이 약하고 둔하면서 생생한 기색이 없거나 산 모양이 부서지고 비뚤어져서 길한 기운이 없는 산은 피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마을에서 마주하는 앞산[朝山]에 돌로 된 추악한 봉우리, 비뚤어지고 외로운 봉우리, 무너지고 떨어지는 형상, 엿보고 넘겨보는 모양, 이상한 돌과 괴이한 바위 등이 있으면 살 수 없는 곳이며, 반대로 맑게 빼어나 보이고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길한 것이라고 하였다.
3) 산을 보전하기 위한 금기설화
산과 관련하여 마을의 지리생활사를 반영하고 있는 민간의 전승으로서 금기형 설화가 있다.
금기형 설화는 문화생태학적인 기능성을 지니는데, 다시 말해 산지 환경의 안정적 보전을 유지하기 위한 문화상징적이고 환경심리적인 장치인 것이다.
예컨대 마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산(주산)에는 개인의 묘를 쓰지 못하게 하는 금기설화가 전국 어디서나 흔히 채록되며 이는 신성한 산에 부정함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경계임과 동시에 마을에서 중요한 지형의 공적인 보전을 위한 문화상징적 장치가 된다. 그리고 산에서 마을터에 이르는 주맥을 중시하여 산제당 등의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 지맥의 안정적 보전을 꾀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산은 우리 겨레에 있어 생존의 필수 조건이자 존재의 바탕으로서 경외롭고 더구나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보전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산을 잘못하여 훼손하면 큰 일이 생긴다는 일종의 신앙같은 믿음도 널리 전승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4) 산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저울추
한편으로 우리 겨레는 자연환경에 대해 결정론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로 설정하지 않고 항상 상호작용적이고
쌍방적인 관계로 생각하였으니, 산과 사람 사이에 대해 조화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문화적인 저울추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최근의 흥미로운 사례가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 중촌마을에 나타난다.
이 마을에서는 92년도부터 3년여 동안 28명의 젊은 사람이 아무런 이유없이 연이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마을주민들은 이 같은 흉사에 관한 합리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자 급기야는 마을의 변고가 마을 앞산이 (풍수적으로 호랑이 형국의 산인데) 채석장 개발로 인하여 얼굴 부위가 깎여나가고 그 살기 띤 모양이 마을 정면에 비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산을 잘못 건드려 마을에 흉화가 생겼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마을 주민들은 호랑이산의 살기를 막는 코끼리 석물상을 호랑이형국과 마주보고 마을 앞에 세우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로 마을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5. 겨레의 영원한 안식처 산소
1) 우리의 산은 겨레생명의 모태이자 끈
우리 겨레의 생활방식은 산천이라는 큰 생명의 토양에 뿌리내린 식물성의 그것이었다. 산에 깃들어 삶터를
이루고, 산밭을 일궈 생명을 길러 먹으며, 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셨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그 태를 산에 묻었고, 생이 다한 육신 또한 산에 묻었다. 우리에게 산천은 현세적 삶이 비롯하고 생성되며 완결되는 전체였던 것이다. 특히 우리는 묘소를 산소(山所)라고 하며 혹은‘뫼’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용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묘는 산과는 뗄 수 없는 불가분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심리학에 집단무의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 집단의 심성에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통분모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를 공간의식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한 집단의 심성에 내재한 원형적인 공간의식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공간의식은 무엇일까? 공간의식은 공간을 반영하는 상이니 공간 그 자체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공간적 원형을 이루는 구성요소를 보면 삼극구조(하늘·산·들)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요소들은 산으로 이어져있다.
산에서 해가 뜨고 산으로 지니 산은 하늘과 들을 이어주는 탯줄이요,그 땅에 사는 인간을 감싸는 태반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산으로 이어져 마을로 그리고 인간으로 이르는 맥을 이룬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산은 생명의 모태이자 끈과 같다.
2) 산의 정기를 타고나서 산으로 돌아가는 사람
옛말에 흔히“인걸은 지령(地靈)”이라고 하여 사람은 땅의 정기를 타고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우리 식의
사유였으니 초등학교의 교가에는 어김없이“…산의 정기 받아”라는 내용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우리 겨레의 시조신화인 단군신화를 보아도 산에서 나서 산으로 돌아가는 산의 원형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단군은 하늘의 신인 환웅과 굴 속에서 땅의 정기를 타고 환골탈태한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에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이 때의 나이가 일천 구백 팔 세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는 산의 정기를 타고 나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생명의 회돌이에 있어 산은 우리 겨레의 영원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풍수의 양대 구성 분야인 삶터풍수와 묘터풍수를 막론하고 터잡기는 산의 맥[괟脈]을 타는 것을 필수적으로
친다. 풍수서『탁옥부』에 이르기를, 터를 잡을 때는 반드시 첫째로 “산의 맥이 오는지를 살펴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풍수경전에 “지리의 법은 접목의 법” 이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산가지에 흐르는 원천적 생명 에너지에 접속하는 이치를 일러 표현한 것일진대 산의 맥을 타지 못하는 곳에 어떻게 접을 붙일 수 있을까?
한편 묘터로 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진 산을‘단산(斷山)’이라고 하여 매우 꺼렸다.
묘터 풍수의 교과서 격인『청오경』과『금낭경』을보면,『 청오경』에이르기를 “끊어진 산에 장사 지내면 재앙을 불러 들이고복을 소멸시킨다”고 하면서 그 주문에 “끊어진 산에는 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생명의 근원에 접속되지 못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또한『금낭경』에는“기는 형(形)에 기인하여 오는 것이니 맥이 끊어진 산에는 장사를 지낼 수 없다” 고 분명히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풍수의 묘지 택지에서 꺼려하는 산으로는 맥이 끊어진 산 외에도 벌거숭이 산[童山], 맥이 머물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산[過山], 기울어진 산[側山], 터가 너무 좁은 산[逼山], 돌투성이 산[石山], 홀로 우뚝한 산[獨山] 등이 있다.
3) 풍수설화에 나타난 묘지풍수의 윤리의식
풍수설화 중에는 이른바 단맥설화 유형이라고 하여 풍수의 사회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흔히 있다. 이
야기의 얼개는 대부분 부자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명당의 맥을 끊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여 패가망신한다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대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잣집 주인이 인색하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는 등 나쁜 짓을 일삼았다. 스님이 벌을 주려고 선산의 묘 뒤로 큰길을 내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부잣집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욕심을 내어 산소의 맥을 끊어 버렸다. 그 결과 망하고 말았다."
명당의 입지조건이 산의 맥을 타야 된다고 하여 아무 산이나 그리고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는 않았다.
우선 터잡기의 장소적 제약은 풍수설화에 특정한 산(주로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산이 그 대상이 된다)에 무
덤을 쓰면 마을에 가뭄이 든다는 풍수 금기에 관한 인식으로서 알 수 있다.
예컨대,“ 예천의 금당실 오미봉은 신성한 산이라고 하여 동네 사람들이 숭앙하고 있다. 또 이 산에 무덤을 쓰면 큰 부자가 된다고 믿어 더러는 묘를 쓰려고 하였으나, 그 때마다 가뭄이 계속되어 모두들 두려워하고 신성시하였다”는 식이다.
이와 같은 풍수적 금기관념은 문화생태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마을의 신성한 산은 마을 주민들에게 삶의 정신적 원천이자 생태적인 가치를 지닌 상징체로서 마을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소중하고 성스럽게 보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또한 아무나 명산 명지에 터를 차지하지는 못한다는 믿음은 풍수의 사회적 윤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이
역시 풍수설화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아무리 당대에 유명한 지관이 자리잡은 명당 길지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면 산의 기운이 감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산신령이 관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도선이 산 속 오두막에서 곡하는 소리가 나서 찾아보니 서른 살 먹은 총각이 죽은 부친을 두고 울고 있었다. 도선은 석 달 안에 장가가고 의식도 넉넉할 자리를 잡아주었다.
다음 해 제삿날에 찾아가니 예상과는 달리 예전 그대로였고 다시 묘를 고친 후 다음 해에 또 찾아 오니 또 마찬가지였다. 이에 실망한 도선은 죽으려 하자 산신령이 도선을 부르며 죽은 자가 살인자라 그렇다고 했다."
이처럼 풍수의 논리에서는 조상이 죽어서도 산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얻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산에 생명의 파동이라고 할만한 그 어떤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고, 또 하나는 조상의 유골 역시 미묘한 생명의 유존적인 에너지 장이라는 인체의 생명 현상에 대한 지평의 확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 북두칠성 모양의 조산
한편 묘지에서 요구되는 산의 풍수적 조건이 부족하면 조산(造山)하여 비보(裨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묘지의 풍수적 환경을 개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상이 보다 안락한 조건에서 영면하라는 효성스러운 마음이 근저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매우 다양하고 많은 비보 사례가 있으나 그 중에도 특징적인 묘지 비보의 한 형태를 소개한다.
경기도 이천시 장록동 앞들에 있는 영인 정씨의 선산을 비보하기 위해서 조성한 북두칠성 모양의 조산이 있
다. 풍수에서는 산을 하늘의 별기운이 모인 것이라고 하니, 칠성별도 산으로 여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박용원 씨, 66세, 이천시 장록동 349-8호), 이 조산은 연일 정씨의 선산을 비보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현장에는 정씨의 선산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앞 들 가운데에 작은 길을 따라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의 흙무더기를 놓고 그 흙무지 위에는 각각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조산의 조성은 일제시기에 정기용씨가 추진한 것이라 하며 당시에 장록리 주민들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조성 동기는 선산의 전방이 허하여 안산(案山)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근대에 조성된 묘지 비보의 한 사례이지만, 북두칠성을 상징한 모양으로 조산한 것은 독특한 발상의 비보형태로서, 묘지 공간을 생각하는 그 우주적인 사유가 참으로 놀랍고도 흥미롭다.
6. 풍수사상으로 본 산
1) 풍수에서 산은 무엇인가?
풍수의 눈으로 우리 겨레의 산에 대한 인문적 사유를 살펴보면 참 놀랄만한 직관과 지혜가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풍수는말한다.‘ 산’에 생명의 기운이 깃들고 ‘산의맥’을 통하여 그 생명의 기운이 흐른다고.
뭇생명은 산의 품자락에 깃드니 그래서 산은 생태계의 태반인 것이고, 또 뭇 생명체는 산의 맥을 따라서 이동하니 산은 다름 아닌 생태계의 탯줄인 것이다.
놀랍고 신기하게도 우리의 옛 마을과 집들은 마치 엄마의 탯자리 같이 아늑하고 편안한 터둥지에 자리잡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일 것인가?
그런데 그 태반이자 탯줄이 손상된다면 그에 의지하여 잉태되어 있는 생명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임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이에 우리 선조들은 마을이 기대있는 뒷산을 신성시하고 절대 훼손하지 못하게 산제당(山祭堂)이라는 문화상징적인 장치를 하였던 바, 풍수의 눈을 통해 사람과 자연이 접속되어 있는 큰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산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삶터 주위의 모든 산이 지켜져야 할 풍수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는 자연환경의 질서와 이치를 생명의 원리로 사유하고 이해하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자연학이자
환경학으로서, 그것은 천 여 년 동안이나 한국의 취락입지 및 조경, 공간배치와 구성, 건축 등에 널리 활용되었다. 풍수를 오늘날의 학문분야로 자리매김하자면 전통적 생태학이요 환경평가이론이라고 할만하다. 풍수는 자연의 일체를 큰 생명의 범주에서 취급하는 거시생태학일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산과 물, 그리고 기후적 조건으로서의 방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땅의 건강성 여부와 그것이 사람에게 적당한지 어떤지를 살피는 이론인 것이다.
풍수사상을 통하여 보면, 우리 겨레는 자연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였으며, 산을 자르면 피가 흐른다고 말할
정도로 땅을 살아있는 몸과 같이 생각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은 “산등성이는 땅의 근육이고, 흐르는 강물은 땅의 혈맥”이라고했다. 그래서 땅은 어머니와 같은 것이며, 사람이 섬겨야 할 대상이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찾아보면 어미산 계열의 여러 이름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데-“아미산(충남 홍산·남포), 모악(母岳; 서울), 모산(母山; 경기 이천, 충남 결성), 모악산(母岳山; 전북 전주·금구·태인, 전남 영
광·함평), 대모산(大母山; 경기 광주), 대모성산(大母城山; 경기 강화, 전북 순창), 모후산(母后山; 전남 순천·동복), 자모산(慈母山; 황해 평산, 평안 자산), 모자산(母子山; 경북 영천, 경북 청송)”-이러한 흔적을 보아도 우리 겨레의 산에 대한 모성적 인식을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산에 쇠말뚝을 꽂거나, 바위를 깨거나, 산을 자르니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는 전국 어디서나 있다. 경상
북도 예천군 용문면의 금당실이라는 옛 마을의 단맥(斷脈) 설화를 보자.
"금당실 마을 북쪽에는 오미봉이 있다. 옛날 청나라 장수가 이 곳을 올라보니 한 나라의 서울이 될만하다 하여 장수가 태어날 지맥을 찾아 모조리 쇠말뚝을 박아 버렸다. 그러자 붉은 핏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 모습을 본 청나라 장수는 깜짝 놀라 자기 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므로 이곳은 신성한 곳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숭앙하고 있다."
2) 풍수에서 산은 왜 중요한가?
특히 풍수에서 산은 물, 방위와 함께 풍수를 구성하는 세 구성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풍수이론 중에
간룡법(看龍法)이라고 있는데, 이것은 산에 대한 일종의 전통적 환경평가이론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풍수에서 산에 관한 논의는 매우 방대하고 상세한데 풍수경전에서『감룡경』,『 의룡경』등 산의 풍수적 가치를 평가하는 체계적인 저술이 있을 정도이다.
풍수에서는 산이 왜 중요하다고 할까?
산은 땅의 생명력의 표상으로서 땅이 건강한지 아니면 병들었는지를 몸짓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풍수에서는 땅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生氣)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생명의 기운은 생기가 충만한 산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풍수에서 생명의 조건은 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풍수에서 산을 어떻게 보고 땅의 건강성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풀과 나무가 잘 자라고 생태계의 순환이 잘 이루어지는 산이 건강한 산이다. 산의 모양이 용트림하듯 힘이 넘치고 생생한 기운이 가득한 산이 건강한 산이라고 풍수는 말한다.
이렇게 산이 건강한지 어떤지를 보는 방법을 풍수지리학에서는 간룡법(看龍法)이라고 한다. 한자말을 풀이
하면 ‘살필 간(看)’‘, 용 용(龍)’이니, 용을 살피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용을 살핀다고 하였을까?
풍수에서는 산을 용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산의 능선이 이리저리로 몸을 휘돌리고 구불거리는 모습이 마치 용의 몸뚱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충청남도에는 계룡산(鷄龍山)이라고 있다. 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닭[鷄]벼슬이나 용(괟)트림하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멀리서 보면 구불구불한 모양이 꼭 용의 몸뚱이를 보는 것 같다. 풍수경전인『금낭경』에도,“ 산세가 그쳐 머리를 든 형상이 되고, 앞에는 산골물이 둘러있고 뒤로는 산등성이가 중첩하여 있으니 용의 머리가 품어있다.”는 산을 용에 빗댄 비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에는‘용’자가 들어간 산이름이 굉장히 많다.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복룡
산(伏龍山),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와룡산(臥龍山), 하늘에서 용이 하강하는 모습 같다고 천룡산(天龍山), 신비한 기운을 뿜고 있다고 서룡산(瑞龍山), 너그럽고 맘씨 좋다고 덕룡산(德龍山)이다. 이외에도 회룡산, 용호산, 용수산, 용안산 등 여러 수십 가지 이름이 있다. 용 계열 산이름의 지리적인 분포를 보면 용산이라는 산 이름은 주로 바다나 강 등의 큰 물가 근처에 있는 산에 많이 나타난다.
겨레가 산을 어떻게 용으로 사유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의 하나가 강원도 오대산의 적멸보궁에 전한다. 이 곳 오대산 적멸보궁은 신라시기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를 갖다가 모신 곳으로, 해발고도 1,000m가 넘지만 맑은 샘물이 난다.
용트림을 하고 있는 오대산의 산세 가운데 적멸보궁의 위치는 용의 머리라고 하고, 적멸보궁 옆의 맑은 물이 샘솟는 곳은 용의 눈에 해당하여 용안수(괟眼水)라는 이름을 가졌다.
용안수 옆에는 구멍 하나가 있는데 이것을 용의 콧구멍이라 한다. 낮에 이 구멍에 가랑잎을 하나 가득 채워놓고 다음날 와 보면 하나도 없이 다 날아가 버린다고 한다. 이것은 밤새 용의 숨결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3) 자연 보완 사상의 논리와 역사
우리가 오늘날 풍수사상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자연에 대한 가치의 발견과 아울러 자연
보완 사상이다. 특히 자연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보태어서 부족함을 보완하였으니 이러한 태도는 사람으로서 어머니, 자연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자 효도라고 생각했다. 아프고 병든 땅을 고쳐서 좋고 건강한 땅으로 만들 수 있다는 비보(裨補) 사상은 우리가 풍수에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환경사상이기도 하다.
이것을 풍수에서는 비보법(裨補法)이라고 하는데 현대의 학문논리로 표현하자면 경관생태학의 경관보완론
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풍수에서 비보란 만약 자연환경에서 산의 풍수적 조건에 부족함이 있고 문제가 있으면 사람의 노력을 자연에 보태어 좋은 산의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에 대한 의미 부여와 환경의 보전 뿐 만이 아니라 산의 생명성을 적극적으로 높이는 방법으로서, 예컨대 산에 나무를 심어 산의 기운(山氣)을 북돋거나, 개발에 의해 잘린 산의 지맥을 잇는 생태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도 비보에 다름 아니다. 우리 곳곳의 마을에 가보면 산을 비보한 현지 사례들이 발견되는데,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산을 만드는 것을 조산(造山)이라고 불렀다. 우리네 고을과 마을에서는 조산비보의 흔적이 숱하게 나타난다.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등 마을에 있는 조산이 지명으로 된 것도 여럿 있다. 비보는 이렇듯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창출하고자 하며 더 나은 자연적 조건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역사적인 측면에서 풍수적인 생태환경을 보전하고자 노력하였던 조선시대의 사실을 살펴보자.
조정에서는 궁궐에 이르는 주산(主山)의 내맥(걐脈)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바,『 경국대전』에 나타난 것과 같이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과 내맥의 산척(山脊)·산록(山麓)은 경작을 금한다”고 법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조에서 한양의 도성에 이르는 산맥을 비보한 구체적인 사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20년(1438)에 주산의 내맥을 보토하도록 한 적이 있으며, 동왕 23년(1341)
에는 도성의 정맥인 정업원 동쪽 언덕으로부터 종묘 주산에 이르기까지 정척 좌우의 20·30보 되는 곳에 소나
무를 재배토록 하였고, 동왕 27년(1345)에는 주산의 내맥인 삼각산과 청량동 및 중흥동 이북과 도봉산의 벌
채를 금하였다. 이러한 도성의 주맥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더욱 심화되어서 급기야 세조 9년(1463)에는 함길
도 장백산의 근원에서부터 철령-강원도 회양부 남곡-금성현의 마현과 주파현-낭천의 항현-경기도 가평현 화악산-양주 오봉산-삼각산 보현봉-백악에 이르는 맥을 주맥으로 파악하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모두에 대해 돌 캐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비보의 대상을 광역화한 이유는 “암석이란 산맥의 골절이므로 다만 도성의 산등성이 내면에서만 돌 캐기를 금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주맥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에는 관청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였는데, 삼각산의 보현봉에서 북악에 이르는 잘록한 맥이 그 곳으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보현·문수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그 중의 보현봉이 도성의 주맥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는 이를 보토소(補土所)라고 표기하였다.
세조 당시인 조선 초기부터 수도인 한양의 생태환경적 축과 네트워크를 백두산에서 북악산에 이르기까지 거
시적으로 파악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산의 맥에 대한 훼손을 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는 비보라는 관점으로 풍수를 보완하기까지 노력하였던 것이다.
7. 산이름과 민간설화의 풍수
1) 생명성이 깃든 산이름
산과 관련된 풍수지명이나 설화는 향촌민들과 산과의 관계 혹은 주민의 산에 대한 인식 및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산이름과 산에 관련된 설화는 지역 주민들이 남긴 풍수생활사적인 유산으로서 그들이 산지 환경을 어떻게 풍수적인 태도로 인식하고 대하였는지를 나타내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는 산과 관련된 다수의 풍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산이름에는 산의 모양과 성격이 담겨 있고, 이름
을 불렀던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인 사고가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산이름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고 또 변천하였지만 그 과정에 끼친 풍수사상의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산이름에 투영된 환경 인식을 살펴보면 용, 말, 호랑이 등의 모양에 빗댄 지명이 다수 나타나는 것을 보아 산
의 형세를 생명이 깃든 것으로 보는 유기체적인 사유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수론 중에서도 특히 산의 생김새에 빗대어 풍수를 설명하는 형국론은 마을 입지의 해석에 널리 적용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좋은 형국의 마을 터에 거주하면 그 지덕을 입어 좋은 소응이 있으리라는 풍수적 기대 심리가 깔려 있다. 따라서 좋은 형국명은 대체로 부귀와 풍요와 장수를 상징하는 것들이었으니, 예컨대 용·봉황·거북·학 형국은 존귀함을 상징하고, 소 형국은 풍요로움을, 매화 형국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였다. 이처럼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는 주술적 원리를 프레이저(Frazer)는‘유사의 법칙(Law of Similarity)’이라 명칭한 바 있는데, 형국론은 유사법칙의 풍수적인 한 응용형태로 해석이 가능하다.
산과 관련된 풍수적 형국명으로는 용, 말, 소, 호랑이, 게, 봉황, 부용, 매화 등이 나타나는데 특히 용과 관련
된 지명이 가장 많다(비룡산, 용머리, 오룡동 등).
이들 각 형국에 부여된 의미를 살펴보자면, 용형국, 봉황형국 등은 삶의 터전을 길지로서 존귀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소형국과 매화형국에서는 풍요로움의 소망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반달형국에서 미래의 희망을 땅에 의탁하는 정서를 알 수 있다. 반월은 둥근달로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풍수적인 길상(吉祥)의 상징이다.
2) 산이름에 관한 세 가지 해석
산이름에 나타나는 형국명의 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산의 형국을 체계화(體系化)하여 상관(相關)적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이른바‘상관적 존재체계’의 철학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연천군 군남면 황지리에서는 형세를 미녀-빗-거울-비녀의 체계로 연관시켜 지형지세를 이해하고 있으니, 빗접산은 미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이고, 전곡읍 고릉리 국사봉은 미녀가 마주 대하고 치장할 때 보는 거울과 같다하여 면경산(面鏡山)이라 한다. 여기서 혈(穴)은 미녀가 풀어놓은 비녀봉에 해당한다고 한다.
유사한 사례는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의 전설에도 보인다.
“ 어떤 풍수가가 능안 뒷산에 올라 주위의 산세를 보니 전방에 솟은 산은 풀무와 같고, 남쪽의 숯골은 숯가마, 동북쪽 신답리의 쇠춘이는 쇠빛깔, 북쪽 연천읍 고문리 느즌모루는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인 모루 형상을 하고 있어 쇠를 녹일 수 있는 도가니혈을 찾아 다녔다”는 식이다.
둘째, 형국간의 작용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여 긴장감(緊張感)과 생동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관계적 의
미 및 구조는 배타적 모순 관계가 아니라 평형적 대립[對待]관계이다.
역시 연천의 사례를 살펴보면, 청산면 초성리 법수동 동쪽의 쥐산이 동북쪽에 있는 먹이인 노적봉을 바라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상인데, 거물래 산 동쪽의 고양이산이 내려보고 있어 쥐가 기가 죽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는 식의 이해가 그것이다.
유사한 사례로는 왕징면 노동리에도 있다. 두리산의 황새봉이 먹이인 우렁산(우렁이 형국)을 늘 쪼아 먹는 형세이나 개룽지개울이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 되어 먹지 못한다고 한다. 이처럼 고양이산과 개룽지개울을 중간에 개입시킴으로써 쥐와 황새의 먹이에 대한 모순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막고 생태적인 평형관계를 유지시키고 있으니, 이를 평형적 대대관계라고 일컫는 것이다.
셋째, 상징적 장치를 통해 형국의 기능을 인위적으로 보정(補整)하고 있다. 장남면 원당리에 있는 말뚝봉이
그 사례인데, 주마산은 산의 형국이 등에 짐을 잔뜩 얹은 말이 동쪽으로 달려나가는 형상으로서, 원당 3리 지역에는 예전부터 마을의 재운(財運)이 이 산의 형국 때문에 외부로 흘러나간다 하여 산 동쪽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를 ‘말뚝봉’ 이라 이름지어 지기(地氣)를 보호했다고 한다.
3) 아기장수형· 단맥형· 금기형 풍수설화
풍수지명이 주로 지리적 자연환경을 표징하고 있는 것이라면, 풍수설화는 사회적 성격과 윤리성이 게재되어
있다. 산과 관련된 마을의 풍수설화는 일반적으로 아기장수형, 단맥형, 금기형 등의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풍수설화 역시 산과 사람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있어 좋은 지리적인 자료가 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풍수설화의 내용에 나타난 이야기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산은 사람에게 신비한 힘을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또한 산은 살아있는 유기체 혹은 사물의 기능적인 시스템으로 다루어졌고, 산은 다치기 쉬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위의 세 가지 유형 중에 아기장수형 설화는 피지배자(서민 혹은 문중)와 지배자(왕조) 간의 계급적 갈등이
반영되어 있으며, 용마바위 혹은 용마산의 기운을 타고 아기장수가 탄생한다는 풍수지리적인 계기를 구조로
지닌다. 양평의 용문면 삼성리에도 신분적 계급갈등을 담고 있는 아기장수 설화가 채록된 바 있다.
"용문면 삼성 2리에는 말무덤이라고 있는데 양지벼래 뒷산에 위치하였으며 원주 이씨 문중에 날개가 돋힌 장사 어린이가 태어 났는데 후환이 두려워 3일만에 맷돌로 눌러 죽였더니 용마가 난데없이 내려와 이곳에 쓰러져 죽어서 묻었는데 이후 이 곳을 말무더미라고 한다."
그리고 단맥형 설화는 명당을 이루는 지맥을 끊거나 차단하는 풍수적 계기를 포함하는 구조로서 대외적 갈
등과 신분계급간 혹은 빈부계층간의 갈등이 주종을 이루며, 시기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일제시기의 것이 많다.
일제에 의한 단맥형 설화의 경우, 일제치하에서의 일본인들의 수탈은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민족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존재로 잠재의식 속까지 깊이 새겨졌을 것이며, 그 결과로 철도나 도로의 건설에 따른 실제적 행위와 함께 단맥의 행위자로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풍류산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와서 장수가 태어날 것을 염려해서 쇳물을 끓여 혈을 끊었다는 곳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한국구비문학대계』, 1-3 : 109)"
그리고 풍수 금기형 설화는 풍수적 환경 및 비보물의 안정적 보전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로서의 의미
를 지닌다. 특히 마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산에는 묘를 쓰지 못하게 하는 금기가 있는데 이는 신성한 산에 부정함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경계임과 동시에 마을에서 중요지형의 공적인 보전을 위한 문화적 장치를 뜻한다. 그리고 배의 형국에 우물을 파는 것은 배에 구멍을 뚫는 행위와 같다고 보아 금하고 있으니 이 역시 마을의 형국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한 금기이며, 명당으로 이르는 지맥을 중시하여 안전을 꾀하는 것 역시 지맥보전을 위한 금기 사례가 된다.
8. 맺음말
“우리에게 산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정해진 해답을 요구하는 형식논리적 질문이라기보다는 생태환경을
이루고 있는 산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를 통찰하고,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 배어 있는 산그늘과 같은 원형질, 그리고 겨레정신의 집단무의식에서 차지하는 산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내는 화두(話頭)와도 같은 물음이다.
이 글에서는 다만 산을 둘러싼 겨레의 지리적 생활사를 공간적인 차원에 초점을 두고 그 내력을 살펴보았다.
또한“우리에게 산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요구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산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윤리와 가치 등에 대한 대답을 요청하는 질문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산에 대한 인식의 전환기에 서있다.
과거의 산은 경제적인 가치로서 한갓 장애물 아니면 개발의 대상이었다면 21세기에 있어 산은 생태환경적인 뭇 생명의 존재기반으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산의 둥지에 삶터를 일구었던 우리 선조들의 수 천 년의 삶과 문화가 그랬듯이, 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산이 지닌 자연가치를 드높여서 산이 지닌 생태환경적인 큰 생명을 보전하고 더욱 보완하는 일 뿐이다.
바로 우리에게 산은 겨레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어머니의 태반이요 탯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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