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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韓山李氏 家門

장안봉(微山) 2014. 3. 21. 22:57
韓山李氏 家門


고대부터 산수가 아름다와

그 빼어남이

5악중의 하나로 불렸던 명산.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지리산과 함께

산진제를 드렸던 곳.


한반도의 허리 태백산맥,

거기서 힘차게 뻗은 차령산맥의

맑은 정기의 소산인 계룡산.


  국내  2번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은  계룡산의

  이런 맑고 힘찬  정기를 고스란히 받은 충정도 땅에는

  예로부터 유서깊은 양반 가문들이 이곳 저곳에 즐비했습니다.


  충청도의 여러 양반가문 중에서도

  단연 그 뿌리가 깊고 튼튼한 한산이씨 가문.



지역적으로 한산이씨 가문은

그 근본을 충청남도 서해안

끝머리에 자리잡은

서천군 한산면에 두고 있습니다.


한산면은 백제때 마산현으로 불렸고, 고려에 이르러

한산으로 개칭(940년 태조23),

  그 후에 한주로 승격(1175년 명종5),

  조선에 들어서 한산군으로 승격(1413년 태종13),

  1914년, 서천군에 병합 된 후에 한산면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서천군에 속한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산군으로서 주변 여러 지역의 중심지였던 한산.


  한산모시와  한산소면주로 유명한 곳이지만

  한산은 한산이씨 가문이 수 백년 동안 쌓아 놓은

  고고한 삶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는 한산이씨의 고향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문서를 통해 추적할 수 있는 한산이씨의 역사는

  고려 중엽의 1세 휘(諱) 윤경(允卿)

  권지호장(權知戶長) 호장공(戶長公)때부터입니다.

  아마도 충남 한산 지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며 호장직을 지낸 가력을 볼때

  한산이씨의 고대 선조들은 그 지방에서 명망있던

  호족 출신이었던것 같습니다.


  대대로 수많은 충신과 이름난 학자를 줄줄이 낳은

  한산이씨 가문의 시조이신 휘 윤경 호장공께선,

  성품이 근엄하고 청렴하셔

  선정을 베풀며  고을 백성을 다스리니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는 백성들이 공의 상을 만들어

  성황묘로 모셨습니다.


  호장공의 묘소위치는 바로

  사적 60호로 지정된 해발 400미터의 토성인

  충남 서천군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한산이씨 문중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입니다.

  백제가 멸망하던 당시 종실의 복신이

  왕자 풍을 모시고 끝까지 항쟁했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그 자리인 것입니다.


  시조이신 호장공의 묘소에 얽힌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자손들이 한산고을에서 여러 대를 거쳐

  호장으로 봉직할 때

  하루는 동헌 마룻장이 뒤틀려 있고,

  마루틈으로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며 올랐습니다.

  이것을 수상히 여긴 후손이 마룻장 밑에다

  계란을 파묻어 두었다가,

  얼마 후에 꺼내 보니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도 신기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이곳이 필시 명당일 것 같아

  원님 몰래 밤중에 호장공을

  평분으로 입장해 놓았다고 합니다.


  묘소를 평분으로 만든 까닭에

  세월이 흐르자 실전되었던 것을

  호장공의 24세손인 휘 승오 삼은공께서

  고종 15년 충청도 관찰사로 도임하여

  퇴락한 관부를 수리하다가 발견하여,

  현재와 같이 재봉축하고 표석을 세웠습니다.


  지관들은 이 묘자리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금계포란형"이라 하였고,

  묘소앞에는 이를 상징하는

  3개의 알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2세 휘 인간(仁幹)께서는

  정조호장(正朝戶長) 벼슬을 지내셨습니다.


  3세 휘 효진(孝進)께서는

  진사(進士) 벼슬과

  봉헌대부 비서랑(奉憲大夫 秘書郞) 벼슬에 오르셨습니다.


  4세 휘 창세(昌世)께서는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都判書)에 추증되셨습니다.


  5세 휘 자성(自成) 찬성공(贊成公)은

  고려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시어

  전북에서 정의대부 정읍감무(正議大夫 井邑監務) 벼슬을 하셨는데

  정읍에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시고,

  고을 백성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돌보시니

  그 덕성과 명성이 나중에

  원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310년 고려 충선왕 때

  젊은 나이로 돌아가시게 되셨는데,

  원나라에서는 봉훈대부 비서감승

  (奉訓大夫 秘書監承)으로 증직되고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光政大夫 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셨습니다.


  배위 흥례이씨(興禮李氏)는

  고려조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 大夫人)으로,

  중국 원나라에서는 요양현군으로 추봉되신

  어질고 현명하신 분이셨습니다.

  찬성공 어른이 돌아가신 후에는

  40년 동안 홀로 아들과 손자를

  극진히 보살피고 잘 가르치셨습니다.


  이렇듯 선대에선

  지방세력의 명망가 호족 집안에 머물렀다가

  그 명성을 드디어 전국에 떨치며

  호장공의 후손 중 일부가

  일약 나라의  최고 명문가의 하나로 부상하며

  번창 발전하게 된 계기는

  6세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휘 곡(穀) (1298-1351)과

  그의 외아드님이신

  7세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휘 색(穡) (1328-1396)

  두 부자에 연유합니다.





휘 곡 가정 문효공


  가정(稼亭) 휘 곡(穀) 문효공(文孝公)은

  자(字)가 중보(仲父), 호(號)는 가정(稼亭)으로

  한산이씨 5세조가 되시는 찬성공(贊成公) 휘 자성(自成; ?-1310)의

  세 아드님 중 막내로 1298년(충렬왕24)

  선조들의 고향인 충남 한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310년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님 찬성공을 여의게 되시는데

  이후에 공은 고향을 떠나 반대편인 동해 바닷가의

  경북 영해에 도착하셔서 그 지방의 토호인

  진사(進士)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서랑이 되십니다.

  함창김씨 집안은 영해에서 몇 대를 내려오며 살았다고 하고

  가정공은 빙장되신 진사 김택(족보의 직함은 鄕校大賢)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진출하십니다.


  1317년(충숙왕4) 20세의 나이에 성균시,

  즉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시고

  3년뒤인 1320년(충숙왕7) 9월 7일 23세때

  문과(文科)에 당당히 급제(及第)하십니다.


  그러나, 이름난 중앙귀족의 자제들이 수월한 경로를 거치며

  평탄한 벼슬생활을 하고 높은 관직에 올랐던 것에 비하면,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셨던 가정공께선

  본국에서의 환로진출이 쉽진 않았던 바,

  공께서는 원(元)나라 과거를 통해 발신할 뜻을 세우십니다.

  그리하여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 순제 원통원년) 35세때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심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333년 36세에는

  제과(制科) 전시(殿試)에 차석(갑과 제2인)으로

  당당히 급제하시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자제로 상등에 급제하기는 또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참고: 450년전쯤에  신라시대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당(唐)나라 과거 전시에 상등으로 급제하며

         한반도의 자존심을 세워준 경사 이후로  

         고려에 들어와서 가정공의 상등급제가 처음이었던 만큼,

         중국의 과거시험은 본토 중국인들한테도

         어렵기 짝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파천황(破天荒)이란 말은 중국 과거시험과

         직접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벽을 뚫고 가정공뿐만이 아니라

         아드님이신 목은(牧隱)도 나중에 원나라 전시에

         당당히 상등으로 급제하여

         부자2대가 고려와 중국 양국에서 문명을 날립니다.

                                  

         가정공, 목은공 두 부자와 두터운 친교를 가졌던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안축(安軸), 안보(安輔)

         두 부자 역시 려말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한산이씨 집안과 대비되기도 합니다만

         상등급제는 아니었습니다]


  즉일로 원나라 재상들의 건의에 의하여

  공은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 檢閱官)에 제수되시고,

  이로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며

  원나라와 본국 고려, 양국에서의 벼슬길이 훤히 열리게 됩니다.


  1334년 37세때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詔書)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

  (嘉善大夫 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으십니다.

   

  이듬해인 1335년 38세때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

(征東行中書省 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때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있던

  원나라의 요구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럽던 것이 

  바로 다름아닌 공녀제도였는데,

  공녀제도는 고려의 조혼풍습까지 유발시키며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가정공은 원나라 순제에게 간하여 공녀제도를 폐지케 하였

  고려의 백성들은 가정공의 공덕을 기려

  곡도와 감사제를 지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입니다.


  공의 17대손 휘 경재(景在) 문강공(文簡公)이 세운 신도비에

  공녀폐지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가정공(稼亭公)이 40세 되는 해인

  1337년(충숙왕 복위 6) 여름에는, 

  본국에서 성균관제주 예문관제학 지제교

  (成均館提?  藝文館提學 知制敎)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임을 인정합니다.


  이후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많은 활약을 하시다가

  49세 때인 1346년(충목왕 2)에는 밀직부사(密直副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진현관대제학(  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재상직에 오르십니다.


  51세인 1348년에는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光政大夫 都僉議 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郡; 정2품) 벼슬에 오르시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십니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인 1351년(충정왕3) 54세의 나이로 서거하십니다.

  공께선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의 대종으로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더불어

  麗末 성리학 정착에 공헌한 바 큽니다.

  백이정(白?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경학(敬學)의 대가로 꼽히십니다.


  이제현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였고,

   충렬․충선․충숙 三朝의 실록을 편수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은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공의 이상은 아쉽게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문선》에 수록된 100여편에 가까운 공의 작품들 중에서도

  한국 가전체 문학의 시초인 [죽부인전(竹夫人傳)]

  특히 더 유명하며,

  그밖에 남기신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등에

  배향되었습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을 남기셨고,

  시호는 문효(文孝)입니다.

 

  공은 오로지 본인의 타고난 능력으로 어렵게 발신하신 뒤

  지방 호족선계의 한산이씨 집안을

  고려말에 신흥 명문세도가의 위치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으로

  후손들이 중시조로 떠 받들고 있는 분입니다.


  부인은 원나라에서 요양현군,

  고려에서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으로 봉한

  진사(進士; 족보에는 鄕校大賢) 택(澤)의 딸

  함창김씨(咸昌金氏)로

  슬하에 외아드님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을 두셨는데.

  이후에 목은공은 당시 원나라와 고려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요, 당대 최고 정치가로 성장하시는

  고려말의 큰 별이 되시는 것입니다.


휘 색 목은 문정공


휘 색(穡)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께서는

1328년 5월 신미일,

아버님이신 가정공(稼亭公)께서 문과급제하시고

8년이 지난 31세의 나이가 되실때,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김종직의 <영해 회고시>에,

"선생이 한 번 나시매 사람의 상서가 되시니

이로부터 단양의 초목이 말랐도다" 란

                구절이 있습니다]


  자(字)는 영숙(穎叔), 호(號)는 목은(牧隱) 입니다.

 

  두살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오십니다.


  목은께선 어려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8세에 숭정산 독서당에 입문, 학문을 시작한 후

  여러 이름난 산사에 다니며 학문을 탐구하셨습니다.


  1382년 고려 충혜왕 복위 2년,

  겨우 14세의 나이에 진사 성균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16세의 나이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이곡-이색 부자가문이

  고려 최상층 명문가로 부상하였음을 증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아버님이신 휘 곡 가정 문효공께서 어렵게 발신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올라간것에 비하면

  아드님이신 휘 색 목은 문정공께선

  부친보다 월등했던 본인의 타고난 능력과 또 아버님의 음덕으로

  어렸을때부터 이미 그 탁월한 실력을 만천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가시게 되는 경로를

  밟게 되신 것입니다.


  목은께서 19세의 나이에 장가를 들려하자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고자하여

  혼례 당일까지도 서로 다투었을 지경이었다합니다.


  결국 공께선 당대 제일 명문 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권씨에게 장가드는데,

  그 장인은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

  그 처조부는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

  그 증조부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

  그 외조부는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이었습니다.


  26세때인 공민왕 2년(1353)에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급제,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천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라고 할 수있는데,

  전시에서 차석을 하신건

  원나라 사람이 아니면 장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후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온갖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치다가

  결국 공민왕 20년 (1371) 7월 16일,

  공의 나이 44세 되실때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 (1382) 11월, 55세에 판삼사사(종1품)가 되며

  우왕 11년(1385)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이 되십니다.


  우왕 11년 (1388) 목은께서 환갑되는 해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와서

  6월 8일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고자 할 때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음에

  공께선 조민수등과 함께 6월 9일 창왕을 옹립하셨습니다.


  이해 8월 7일, 공의 나이 61세에

  최고의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시고,

  이성계는 그 다음 자리인 수문하시중이 됩니다.


  그러나, 새 왕국을 세우려는 딴 뜻을 품었던 이성계 일파는

  결국 우왕이 신돈의 혈육이라는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억지 누명을 씌워

  창왕 2년(1390) 11월 15일엔  창왕까지 다시 폐위시키며

  공양왕을 세웁니다.


  목은의 장남이신 휘 종덕(種德) 문양공(1350-1388)께선

  추성 익위공신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벼슬을 지냈는데,

  아버님 목은공께서 창왕을 세우신 것이 죄가 되어,

  조정에서 극형으로 국문하여 장형으로 즉매를 맞아 숨지게 하니,

  이 때 문양공의 나이 39세이셨습니다.

  슬하에 4남을 두셨습니다.


  목은께서 이성계 일파의 뜻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절의를 꺾지 않으시자

  12월 1일에 목은과 그 차자인 휘 종학(種學) 인재공

  (1361-1392)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낸 다음,

  공양왕 3년(1392) 4월 4일 이성계 일파는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때려 죽이고

  다음 7월 17일 이성계가 결국 왕위에 올라

  새왕조을 개국하니 이것이 바로 조선입니다.


  이성계 즉위 후에 이성계의 근위세력인 정도전일파는

  무자비한 반대세력 제거에 몰입했는데

  8월 23일에 목은의 둘째자제인

  봉익대부 서연시독관 진현관제학 상호군 휘 종학 인재공을

  장사현으로 유배되는 도중

  거창 무촌현에 이르렀을 때에

  정도전이 보낸 순홍종이 목 졸라 죽였습니다.

  (혹은 매질을 해서 죽였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인재공의 나이 32세였습니다.

  인재공은 슬하에 6남을 남겼습니다.


  목은의 3남 휘 종선(種善) 양경공(1368-1438)도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그의 일파로 몰려

  한 때 멀리 귀양살이를 갔다가 나중에야 풀려 났습니다.

  양경공은 슬하에 5남을 남겼습니다.


  이미 고려조때에 왕방, 조반등의 음모로

  둘째 아들인 휘 종학 인재공 및 이숭인과 청주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던 목은께선 이렇게 해서  두 아드님을

  당신보다 먼저 앞세워 보내게 되신 것입니다.


  쿠데타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  일파의 무자비한 숙청이 한창이었던

  고려 왕조 말년과 새왕조 조선 초년기를 거쳐

  소중한 두 아들을 잃으시고

  관직 박탈, 연속되는 유배와

  투옥의 생활을 하시던 목은께선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되셨는데

  한 번은 낙향해 계신 공을 찾아와

  이성계는 이런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

  친구의 이 말에 목은께선,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요" 라고.


  공의 이런 소나무처럼 푸르르고

  대나무처럼 굳게  변함없는 절개는

  공과 상의하여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던

  야은 길재에게 써준 시,

  "비흥일개재막막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네)"

  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태조 4년(1395) 11월 24일에는

  태조가 목은을 왕궁으로 직접 초빙하여

  친구의 예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이성계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쓰러트리고 새 왕조를 세워 태조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친구였으며

  윗자리에 있던  목은을

  끝까지 어렵게 대하며

  공의 학문과 품성을 아끼는 마음에

  새 왕조에 입조할 것을

  계속 회유하며 간청했던 것입니다.


  목은을 오래전부터 시기해오며 살해하려고 노리던

  간신배와 조무라기들이 적지 않았는데,

  태조의 옹호로 무사한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드님 둘을 위시하여 

  포은 정몽주 및 많은 친우와 제자들이 고려와 함께 죽어갔지만

  이성계 일파가 목은을 처음에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던

  까닭중에 하나는,

  고려에서뿐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널리 알려지며 추앙받던

  공의 명성과 정치적 위치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계속 기회를 노리던 중에

  다음해인 태조 5년(1396) 목은께서 69세이시던

  병자 5월 7일,

  공께서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수했습니다.

  이에 이방원과 정도전이 사자를 시켜

  여강의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휴식하시던 공께

  술과 안주를 내려 보내어 어주라 속이고

  목은에게 극독이 들은 술병을 보냈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목은공께서는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고

  태조가 보냈다는 그 독술을 마신 후

  곧 배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께선 마지막까지 충성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고매한 품격을 지키시며 의연하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신것입니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여주에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3일동안 조회를 중단합니다.


  셋째아들 양경공이 공의 시신을 거두었고

  자손들과 함께 한산의 가지 고개에 11월에 장사하였습니다.


  다음은 목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6백주년이 되던 1996년 학술발표대회에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목은의 우뚝한 삶을

  종합평가한 것을 실은 것입니다;



  "목은은 학자와 정치가, 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다.

   고려를 통틀어 산문으로는 익재 이제현,

   시인으로는 목은을 꼽는다.

   그가 남긴 시 6천31수는 질적으로도 고려 최고이다"

   (이문원 중앙대 교수)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 비판함으로써

   고려를 불교사회에서

   성리학사회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본격적인 성리학시대를 여는데 이바지한

   당대의 유종이었다.

   불교의 우수성을 함께 인정해

   조선시대 일부 선비로부터 배척받았지만

   목은의 사상은 전것을 이어받아 새로움을 연 것으로

   목은은 당대의 선구자였다"

   (윤사순 고려대 교수)


  "무신정권이래 유행한 문장해석중심의 사장학에서 벗어나

   실천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학 관점에서 사서오경을 일관적으로 해석해

   한국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따라서 목은이야말로

   고려말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와

   이론적 발전에서 결정적 역활을 수행한

   성리학파의 종장으로서

   그의 유학사상은 한국성리학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

   (금장태 서울대 교수)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신축된 뒤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을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서 시험관을 6차례 맡아

   권근, 이숭인, 맹사성 등

   고려말, 조선초의 명신, 학자 1백 32명을 배출하는 등

   교육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신천식 명지대교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여말 삼은의 한 분이신 목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공께선

  당시 고려와 원나라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이셨으며

  그야말로 한국역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실로 너무나 위대한 업적을

  여러 방면에 두루 걸치며 남기셨던

  거인이셨던것입니다.



  "집이 가난하여 아침밥을 간혹 거르기도 했는데

   하물며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명월과 청풍으로 내 집을 윤택케 한다"

   라고하신 목은,


  "소년시절에 산사에서 글을 읽을 때

   죽그릇 속에 비친 얼굴을 대한 적이 있는데

   작위가 봉군에 이르러서도 백발을

   죽그릇에서 볼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신 목은,


  "병든 몸으로 국정을 맡아

   해마다 쌀을 빌려 살아가는 궁색한 형편" 임을

  전혀 숨기지 않으셨던 그 이셨기에

  오늘날 후손들은 당당하게

  목은의 몇 대손이라며 또한 말을 할 수있는 것입니다.


  한산이씨가 관향을 한산으로 부르게 된 것은

  문효공께서 한산군, 문정공께서는 한산부원군에

  피봉된것에 연유합니다.?


  목은 문정공께선 3명의 자제분과 15명의 손자를 보셨고

  한산의 문헌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장단의 임강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서산서원 등 전국 각지에서 배향되고 있으십니다.


  저서로는 <<목은문고>> 와 <<목은시고>>등이 있습니다.



목은 영정과 영당


목은의 영정이 처음 그려진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벽상 삼한의

공신으로 공민왕 때부터 공신각 벽 위에 걸리었고,

양촌 권근 선생이 남긴 화상찬 기록으로 보아

조선 태조 4년(1396)년 이전에 이미 어떤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만은 확실하다.


충남 예산군 덕산에 살던 후손 기태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정덕갑술'이라고 적혀

있는데, 태조 4년으로부터 정덕갑술인 1514년까지는

118년이나 시간적인 격차가 난다. 그렇다면

기태씨가 소장했던 영정은 태조 4년 이전에 그려진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정덕갑술본'은 서울

제용감 뒤 (지금의 수송동 영당터)에 있던 목은의

  손자 휘 맹진(= 맏 아들 휘 종덕 문양공의 4남) 판중추공

  가묘에 봉안되어 자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왜장에게 약탈당해

  멀리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까지 건너갔다. 

  그 후 목은의 외예손인 부산첨사 여우길이 통신사로

  에도에 갔을 때 이 영정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654년(효종5)에 후손 휘 단 등이 김명국 화백을 시켜

  오래 되어 하반신이 없어진 구본을 바탕으로

  두 본을 모사하였다. 그 중 한 본은 지금 수송동 영당에,

  또 하나는 충남 한산의 문헌서원에 모시게 했다.


  1767년(영종32)에 후손 휘 수옥 등이

  한산 문헌서원의 구본을 가지고

  화백 변상벽, 정선, 조영우 등으로 하여금

  두 본을 모사하게 하여 하나는 수송동 영당에,

  또 하나는 한산 영당에 모시게 했다.

  이들 목은 영정은 최근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제1215호)로 지정되었다.


  1938년 후손 훈구씨가 원규, 조원씨와 더불어

  새로 3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해주 영귀정 영당에,

  또 한 본은 덕산 누산영당에, 나머지 한 본은

  서울 수송동 영당에 모셨다.


  목은의 영당은 서울을 비롯하여

  경성, 대전, 덕산, 마전, 상주, 안동, 장단, 청주, 하동,

  한산, 해주, 회양, 횡성 등 전국 각지에 있고,

  이들 영당의 화본은 대부분 수송동 영당의 영정을

  모사해 간 것이다.


  [참고: 집주인이 약간의 수정과  에디팅을 했음]



문헌서원


문헌서원은 충청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77호의

건조물로 무학대사가 예언했던 명당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엔 가정 문효공과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고

휘 종학 인재공과 백옥헌

휘 개 사육신,

음애공을 모셨으며

휘 종덕 문양공은

추배되셨습니다.


   가정, 목은 문집 목각판은 1404년(태조4)제작한 것으로,

   시 35권, 문집 20권, 상소문과 행장문을 합하여

   16본 55권 등 약 820매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보전되어 있습니다.


   목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친필로

   충청남도 문화재 1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산서원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외7필에 소재하고 있는

서산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771년(영조47)에

처음 건립되어

휘 색 목은 문정공과

휘 홍조 수은공을

추모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내려오다가,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62년에 후손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정면3칸의 숭덕사, 10칸의 명교당,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신문,

15칸의 주소 등이 있습니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수은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목은문집>> 등 서적 100여권을 소장하고 있으며,

숭덕사에 목은 영정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신항서원


신항서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에

소재하여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서원입니다.


1570년(선조3)에 창건되어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를 봉안하다가,

1642년(인조20)에 재건하면서

한충을 추가 배향하고,

1650년(효종1)에 송상현,

이득윤을 또 추가 배향하고,

                                   1656년(효종7)에 목은 휘 색

                                   문정공을 추향하여

                                   현재 모두 9분의 선현을

                                   봉향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유정서원으로 불리다가,

  1660년(현종1)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명되었습니다.


  1871년(고종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92년(고종29)에 복구허가를 받아 1904년에 복구되었고,

  1957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물로인데 

  전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었으며  문은 모두 4분합문을 달았고

  이 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습니다.

                            

  건물주위에는 석축담장을 둘렀고,

  마당에는 1685년(숙종11)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가 있습니다.


  매년 음력 3, 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습니다.


 

거두는 말


  "문효공(가정 이곡)이 앞에서 가업을 터닦고,

   문정공(목은 이색)이 뒤에서 아름다움을 이어 다져서,

   문장과 도덕으로 한 나라의 으뜸이 되었음에랴!"


  라는 사육신 박팽년의 칭찬에서도 볼 수있듯이

  한산이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문효공과 문정공으로 이어지며 탄탄하게 다져놓은

  충과 효의 가훈을 바탕으로

  조선조 500년을 통해

  수많은 충신,학자,청백리의 청빈과 대신 및 관료들을 속출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명문거족으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상신 4명, 대제학 3명, 청백리 6명, 공신 12명 등을

  포함하여 문과급제자만도 195명에 이르렀고,

  500여명이 넘는 진사와 생원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만큼의 많은 소과와 문과 급제자를

  한 가문에서 배출했다는 것은

  한국의 모든 문중들을 총망라해서도

  정말로 보기드문 사실입니다.

  특히 한산이씨 가문이 부상한때가 

  가정공-목은공의 두 부자에게서부터

  시작되었던 고려말이었고

  조선왕조가 건국했을때 그 자손들 숫자도

  극히 적었던 만큼

  그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듯 누대에 걸쳐서

  수많은 관리를 배출하며

  조선조를 이끌어간 양반사회의

  중추적 역활을 담당한 빛나는 가문이지만,

  한산이씨 가문의 긍지는

  결코 그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많은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한결같이 쌓아온

  충성과

  청빈의 이 두가지,

  바로 여기에 한산이씨의 자랑이 숨어 있으며

  그 변함없는 가문의 얼과 숭고한 정신은

  지금 현시대에게까지 쉬지않고 이어져 내려와

  오늘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휘 종덕(種德) 문양공(文襄公)


  문양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장자로

  자는 ?구( 九), 호는 삼당(三堂) 혹은 현암(玄巖)입니다.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입니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를 지낸

  진주(晉州) 유혜손(柳惠孫)의 사위가 됩니다.


  1350년, 아버님 목은께서 23세이실때 태어나셨는데

  문양공은 가정의 장손으로

  할아버님 가정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였습니다.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남에게 뛰어났고

  성장하시자 인품이 훤칠하고 지  깨끗하며  직하고 커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 기운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옷으로 몸을 꾸미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합니다.


  할아버님 가정과 아버님 목은의 가학을 이어받아서

  깨다는 것이 남에게 뛰어났고

  또 스스로 얻은것도 또한 많았습니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에

  1373년, 공의 나이 24세때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때에


  우왕때에 추성 익위공신 동지밀직사사(종2품)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1387년 우왕 13년, 공의 나이 38세때에 지밀직으로서

  문하평리 이구와 함께

  정조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습니다.


  1388년, 공의 나이 39세일때 벌어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후에는

  정권이 그의 일파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는데

  아버님 목은께서 창왕을 세우신 것이 죄가 되어

  문양공께서는 극형으로 국문되었습니다.

  장형으로 즉매를 맞아 39세의 나이에 돌아가십니다.


  공이 세상을 뜬 날은

  바로 아버님 목은의 환갑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1390년 12월 1일에

  아버님 목은공과 동생인 인재공이 역모로 몰려

  함께 관직에서 쫓겨나고 귀양을 갑니다.


  이성계 일파가 목은 부자들을 제1의 걸림돌로 지명하고

  일찌기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목은공께선 학문만으로도

  일찌기 고려와 원나라를 모두 울리며 당대 최고이셨고

  벼슬도 최고인 문하시중에 계시며

  정권의 핵심인물이셨습니다.

  고려말의 나라 민심이 목은께 향해있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습니다.


  목은의 세 아들들도 학문과 인격이 부친을 닮아

  모두 훌륭하였기로 일찌기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성했던 문양공과 인재공은

  재상반열의 높은 관직에 있었을 뿐 아니라

  세 아들 모두 당대의 명문 권력가 집안의 사위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관직에 올라 있던 목은의 문인들,

  조선 건국 후엔

  조선초기 유학의 묵직한 한 파를 비중있게 형성했던

  당시 실력가들도 적지않았습니다.

  목은 부자들과 그 근위 세력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이성계 일파에겐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양공은 죽음을 당하고

  바로 밑의 아우 인재공은 1392년에 살해됩니다.

  목은의 3남 중 막내였던 양경공도 한 때 유배살이를 합니다.

  한동안은 장손 계열인 문양공의 후손들과 인재공의 후손들이

  고향인 한산의 선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개성이나 서울 부근에서 묘소를 마련했어야 됐습니다.


  문양공에 대한 기록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많지않은 것은 이성계 일파가 고려말에 감행한

  숙청작업이 얼마나 무자비했음을 추측하게 만듭니다.


  장자인 문양공과 둘째인 인재공을 잃으신 목은께서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 양경공께

  후손의 안위를 지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쉽게 이해가 갈만한 일입니다.


  문양공은 일찌기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얼음속 생선이 부엌에 들어오고

  겨울 죽국이 밭에서 났는데

  이는 하늘이 공의 효성에 감동해서 그랬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합니다.

  아버님 목은께서 말씀한

  "얼음속 생선과 겨울 죽국은 하늘이 알아준것"이란

  시 구절에서 공의 갸륵한 효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님 목은이 병들어 계셨을 땐 벼슬도 마다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병시중을 들었습니다.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였습니다.


  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총명함이 남에 월등하여

  착한 일을 즐겨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이 또한 특별히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문양공은 슬하에 4남을 두셨으며

  할아버님 가정공과 아버님 목은공이 주향이신

  영모리 영모암(충청남도)의

  문헌서원에 추배되셨으며

  공의 효성을 추도한 효행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휘 맹균 문혜공은 문양공의 2남,

  휘 현영 충정공(=판서공)은 8대손,

  휘 기조 충간공은 9대손,

  휘 규령 정혜공은 10대손,

  휘 상정 대산공은 13대손,

  월남 휘 상재는 15대손이 됩니다.


  시호는 문양(文襄)입니다.



휘 종학(種學) 인재공(麟齋公)


  인재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2남으로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입니다.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입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정1품)을 지낸

  양성(陽城) 이춘부(李春富)의 사위가 됩니다.


  1361년 공민왕 10년,

  목은께서 34세때에 태어났습니다.

 

  1374년 공민왕 23년, 공의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1376년 우왕 2년, 공의 나이 16세에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장흥고사에 제수되었습니다.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에 이르렀습니다.


  공의 나이 28세때인 1388년에

  우대언(右代言; 정3품)으로 요동 정벌군이 출정하게

  조병육정신에게 초례를 행하였습니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였고,

  곧 승진하셔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

  (奉翊大夫   書密直司事)종2품)가 되었습니다.


  아버님 목은께서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또한 당대의 최고 학자로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시자

  뭇 사람들이 심한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 합니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으로 사실상 모든 권력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가 억지누명을 씌워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며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는데

  형인 문양공은 곧 죽음을 당하신듯하고

  아버님 목은공께서 탄핵을 받으며,

  1390년 12월 1일 관직에서 쫓겨나실 때

  인재공도 함께 폄출을 당하였습니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왕방, 조반등의 음모로

  윤이와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아버님 목은, 이숭인, 권근등과 함께 청주의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청주성 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백성들의 집도 다 떠내려가는 홍수가 났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하늘의 감응이라 말하고

  태조도 이 사실을 전해듣고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목은공, 인재공, 이숭인, 권근 등이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양촌 권근 선생이 지은

  압각수시문에 내용이 들어있고

  압각수는 바로 청주 현 중앙공원내에 있는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의 별명입니다.


  이리하여 인재공은 석방된 후에 소환되었으나,

  이미 새 왕조를 세울  뜻을 품었던

  이성계 일파의  숙청으로

  공의 나이 32세 때인 1392년에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맞아 죽고

  공은 이숭인등과 함께 또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해에 조선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동문수학한 정도전이 가장 꺼려하고 두려워한 인물이

  바로 인재공이였는데, 그러기에 그는 인재공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욱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정도전이 순홍종을 보내

  인재공을 함창 유배지에서 살해하려 시도합니다.

  마침 공의 문생인 김여지가 판관으로 있었던 차여서 실패하고

  김여지의 비호를 받아 일단 고비를 넘기며 무사하였는데

  8월 23일, 장사현으로 옮기는 도중에

  계속 기회를 노리던 순홍종이

  무촌역에서 인재공을 결국엔 목졸라 죽인 것입니다.

  (혹은 매질해서 죽였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은 문장에 이름이 높았고 사실에 밝았으며

  겨우 29세의 나이에 재상반열에 오르는 등,

  일찍부터 조-부의 유풍을 갖췄던 비범한 인물로

  성격은 강직하고 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했습니다.


  후일 신원되어 한산 문헌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슬하에 6남을 남겼습니다.


  휘 숙야 광목공은 공의 장남, 휘 숙묘 양도공은 공의 4남이 되며,

  휘 훈 안소공은 손자,

  휘 영은 정도공과  휘 유청 한원군(=공희공)은 증손이 됩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전합니다.


휘 종선(種善) 양경공(良景公)


  양경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3남으로

  자는 경부(慶夫), 호는 ??[족보에 호가 나와 있지 않음] 입니다.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입니다.


  양촌(陽村) 안동(安東) 권근(權近)의 사위가 됩니다.

 

  아버님 목은께서 41세이신

  1368년 공민왕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382년 우왕 8년, 공의 나이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언관에 재직했습니다.


  1388년 창왕 원년, 공의 나이 21세 때,

  맏형님 휘 종덕 문양공이 39세의 나이로 돌아가십니다.


  1392년 태조 1년, 공의 나이 25세 때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피살되자

  포은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아버님 목은과 둘째 형님 휘 종학 인재공과 함께

  멀리 귀양살이를 갔습니다.

  4월에 귀양을 갔던 것이고

  7월에 공양왕이 폐위되며 조선이 들어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의해

  아버님 목은의 직첩이 회수되고 서인으로 강등되며

  인재공 또한 직첩을 잃고 곤장 1백대의 형벌을 받은 후

  먼 곳으로 귀양을 또 갑니다.

  한 달 후인 8월에 둘째형님 인재공이

  겨우 32세의 나이로 순흥종에 의해 목이 졸려

  비명에 서거하십니다.

  10월, 교서에 의해 아버님 목은의 유배가 해제되어

  한주(=한산)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이듬해인 1393년(태조2) 공의 나이 26세때에

  아버님 목은께서 사면되시고 편리한데로 살게끔

  나라에서 교서를 내립니다.


  이듬해인 1394년(태조3)에 어머님 정신택주 안동권씨가

  64세로 돌아가십니다.


  1395년(태조4) 공의 나이 28세때 12월 22일,

  태조가 아버님 목은을 한산백에 봉합니다.


  이듬해인 1396년(태조5) 5월 7일 공의 나이 29세때에

  아버님 목은께서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시던 중

  이방원-정도전의 사주에 의하여 독살되시며

  69세로 그 파란만장한 대인생을 마감하십니다.

  11월에 한산 가지고개에 아버님의 시신을

  후손들과 함께 장사지냅니다.

 

  공은 조선 개국 후 후손의 안위를 지키라는 아버님의 유언과

  새 왕조에 입교한 빙장되는 권양촌의 권유로

  순창 백천의 군수와 여흥부사를 지냈고

  이 해에 병조참의가 되었습니다.


  태조가 아버님 목은의 옛친구와 동료로서

  목은에 대한 예를 잊지않고 끝까지 지켜주며 신의를 다한 것도  

  양경공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만 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부합했던 것입니다.


  1409년 태종9년, 공의 나이 42세에 좌우사간대부가 되었는데

  이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시행되었습니다.


  1411년 공의 나이 44세되던 해에,

  명나라의 진연이 지은 아버님 목은의 묘지명에

  태조를 비방한 구절이 문제가 되자,

  그것을 양경공이 진연에게 지시한 것이라 하여

  동래진으로 귀양가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뒤 풀려나 호조참의로 지내다가

  인수부윤으로 승진되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417년 공의 나이 50세에 충청도 관찰사가 됩니다.

  이 때 구암사와의 노비속공 문제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 됩니다.

  석방된 후 이듬해인 1418년,

  세종1년에 한성부윤이 되며

  다시 인수부윤을 거쳐

  1421년 공의 나이 54세에 좌근동지총제가 됩니다.


  1423년 공의 나이 56세에 진전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이듬해에 다시 진하사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 왔습니다.

  이 때 진하사 도총제 권화달의 문제로 인하여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됩니다.

  이듬해에 석방됩니다.


  1426년 공의 나이 59세에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했는데

  새 감사와의 교체 도중 호부 인수인계 일로 파직됩니다.

  이듬 해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공의 나이 61세에 진하사로 다시 북경에 다녀오고

  이듬 해에 선위사로 황주에 다녀왔습니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가 되어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책택하는 일을 관장했습니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로 승진,

  1438년 공의 나이 71세에 중추원사가 되었습니다.

  이 해에 돌아가십니다.


  공은 일찌기 고려-조선왕조 교체기때에

  위에 두 형들을 비명에 잃고

  목은에게 유일하게 남았던 아들로서

  아버님 목은께서 서거하신 후에는

  시신을 거두어 후손들과 장사를 지내고

  아버님의 방대한 저서인 목은집을 펴내는 등

  집안의 어른과 장남구실을 하였습니다.


  할아버님 가정과 아버님 목은을 닮아

  역시 문장에 뛰어났습니다.

 

  아버님 목은의 상을 당하였을 땐 3년상의 여묘살이를 하며

  효성이 지극했던바

  효자로 일컬어졌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습니다.


  슬하에 5남을 남겼는데

  사육신 휘 개 백옥헌공은 공의 손자,

  토정공 휘 지함은 공의 5대손,

  아계공 휘 산해와 장정공 휘 기는 공의 6대손,

  휘 병상과  문정공 휘 병태는 11대손,

  효정공 휘 사관은 공의 14대손,

  문간공 휘 경재는 공의 15대손,

  수당 휘 남규 선생은 공의 18대손 입니다.


  시호는 양경(良景) 입니다.




한산이가의 인물들


  한산이씨인의 타 오르는 굳건한 겨레와 이웃사랑의

  참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며 어진 목민관으로

  그들을 위해 부귀영화 버린 고귀한 선비정신의 원천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초야에 묻혀 평생 책과 벗하며 살던 일개 시골 선비가

  발군하여 일어나 창-칼자루를 잡는

  그 뱃심 좋은 용기,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역사는 먼지더미 책장속에 묻혀버린

  한낱 흘러간 과거지사가 절대 아니라

  현재 우리곁에서 함께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각 개개인의 산 거울이자 

  또한 앞길을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한반도의 기쁨과 슬픔에 동거동락하며 생겨난

  과거와 현재 한산이씨인의 이야기는

  곧 모든 한국인들의 공동된 삶이기도 합니다.


  [알림:1.뛰어난 수 많은 한산이가의 선조들을 모두 열거하며

          업적들을 적기란 보통 작업이 아니므로

          추적범위를 주요인물에게만 한정합니다.


          또한 현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맹활약 하시는 종원들도 가능하다면 추적하여

          장래에 올릴까 합니다.


        2.제가 갖고 있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여서

          아쉬운 점이 상당합니다.


          더 많은 자료를 소장하신 종원들께

          삼가 도움을 부탁~ 합니다~~


          미리  감사드리겠습니다~.


        3.<인물란>의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한산이씨해산공파 행장전' 일부와  

          '한산이씨 영상족보-한평군파',

          그리고 특히 인터넷 사이트

          [디지털 한국학-한산이씨의 인물들]과

          [한국경제일보-충의열전] 페이지 등등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고려(1단계 완료. 계속 자료추가 중)


조선초기(1392-1500)(1단계 완료. 12-15-98)


조선중기(1500-1700)(1단계 완료. 12-15-98)


조선후기-일제시대(1700-1945)(1단계 완료. 12-17-98)


근세기(1945-현재)(1단계 완료. 12-18-98)



고려의 인물들


   시조 호장공부터 찬성공까지... 한산이씨 1세-5세


   공녀제도 폐지케하고 [죽부인전] 쓴 중시조 가정 이곡


   고려말 3은의 으뜸인 한산이씨의 실질적 1세조 목은 이색


   목은의 첫째아들 이종덕 문양공


   목은의 둘째아들 이종학 인재공


   목은의 셋째아들 이종선 양경공


조선초기의 인물들


1.목은의 15 손자들


[이맹유|이맹균|이맹준|이맹진|

  이숙야|이숙휴|이숙당|이숙묘|이숙복|이숙치|

  이계주|이계린|이계전|이계완|이계정]



2.목은의 증손


  만고의 충신 사육신 이개 백옥헌공

  [본국여지도]를 만든 이봉 헌평공

  사육신과 같이 죽은 이유기 도총진무공

  황해도감사 사직하고 고양시에 내려간 이축

  [동국통감],[삼국사절요] 찬진한 이파 명헌공



3.목은의 현손


  문과중시 1등, 호당 선발, [세조실록] 주필한 이영은 정도공

  벼슬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한 이예견

  오위도총부도총관, 의정부좌참찬에 오른 이훈 안소공



4.목은의 5대손


  좌의정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이유청 공편공

  문과 장원급제하고 [기묘명현록]에 오른 이자 문의공

  [토정비결]쓴 토정공의 아버지 이치 찬성공


조선중기의 인물들

1. 활동연대:1500-1600


   임란 상주전투 3충신, 충마의 주인인 이경류 좌랑공

   지극한 효성의 청백리 이기 장정공

   직언을 서슴치 않아 임금에게 신뢰얻은 이령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이산보 충간공

   호당선발되고 대제학과 영의정 지낸 선조조 문장8가 이산해 아계공

   전서와 팔분체의 명필 이언호

   역학에 정통한 백원서원 배향인 이여 송애공

   3조판서 지내고 좌참찬에 오른 청빈 이증 아천군

   신선이라 불린 토정공의 둘째 형 이지번 성암공

   모든 목민관의 표상인 [토정비결]의 이지함 토정공



2. 활동연대:1600-1700


   [석루유고]의 저자로 호당에 든 이경전 석루공

   강직하고 호탕한 성격의 이경함 참판공

   백성 아끼고 선정 베푼 이경항

   형조판서 겸 도총관 지내고 기로소 들어간 이규령 정혜공

   부전자전의 명신 이기조 충간공

   적진 탐정하고 국계사에 제향된 이덕수

   80세로 정2품직에 오른 이덕연

   광해군 죽이지 말것을 주장한 [죽창한화]의 이덕형

   52세에 문과급제한 어진 목민관 이동직

   끝까지 충절을 바쳐 이괄의 난군에 죽은 이목 한원군

   서애 류성룡의 사위 이문영 해산공

   52세 문과급제자로 남에게 경과 성을 다한 이선 판교공

   [춘파당일월록]의 저자 이성령 춘파공

   민심 수습하고 선정 베푼 이성연

   문과에 2번 급제한 이성원

   글씨로 이름을 떨친 [기축록]의 저자 이수경

   높은 벼슬 다 사양한 절개와 용퇴의  이수언 정간공

   어영대장, 포도대장을 역임한 명장 이여발 정익공

   병마절도사로 광주쌍령 전투에서 순절한 이의배 충장공

   대기근에 수많은 백성 구제한 이정기 귀천공

   광해군때 세상을 피한 이정호 사심공

   수원 남양의 한산이씨 파조 이창조 연천공

   우암 송시열의 처남 이태연

   <<인조실록>> 편찬 참여한 [송파집]의 이해창 송파공

   예법에 정통한 이행 군수공

   46세에 문과급제하고 억울하게 유배살이도 한 이행원

   이이첨의 밀명 거부했던 지조높은 명신 이현영 판서공

   좌참찬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이홍연

   '기사환국', '갑술옥사' 겪은 송시열 문인 이홍적 기암공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홍조 수은공

   3대 호당에 들고 28세에 요절한 이후 정랑공

   재상의 아들로 청나라에서 7년 볼모로 지낸 이휘조

   귀양가서 시집 2권 남긴 [취암이공실기]의 이흡 취암공

   벼슬 다 사양하고 절개 지킨 [운암일고]의 이흥발 운암공


조선후기의 인물들

1.활동연대:1700-1800


   문과장원급제했으나 당쟁의 희생물로 사라진 이거원

   사단칠정의 이치 깨달은 영남 예설의 대가 소산 이광정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기중 군자감정공

   부자 2대 포도대장, 어영대장 역임한 복장 이기하 정희공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이덕중

   소론으로 무신란에 연루되어 고문받고 죽은 이명의

   글씨 잘 쓴 "양주어사대비"의 이민채

   지조높던 청백리로 기로소 들어간 이병상 문정공

   [순암집]의 저자 이병성 순암공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은 이병연 사천공

   탕평책 반대한 노론파 청백리 이병태 문청공

   우의정에 올라 기로소 들어간 이사관 효정공

   부전자전의 명화가 "산수도"의 이사인 희산공

   "9조소"로 정조 감동시킨 영남 성리학 대종 대산 이상정

   영조가 재위 40년동안의 최고 인품이라고 칭찬한 이세연

   뛰어난 능력의 관료로 대사헌 지낸 이수득

   목민관으로 명성 떨쳐 임금한테 포상받은 이수보

   흉년들자 8조의 황정책 진언한 이수일 구호공

   바둑을 좋아해 탐닉의 경지에까지 이른 이운영 옥국재유공

   스스로 단릉산인이라 칭한 명화가 이윤영 단릉공

   큰 고함 지르며 사도세자 사사 막으려했던 이이장 충정공

   "안국동 아씨" 의 외할아버지 이집 한주공

  [삼산집]의 저자 청백리 이태중

   경사에 정통하고 시문에 뛰어났던 명필가 이필중

    벼슬에 미련없던 예법의 정통가 이행 군수공

   학문에 힘쓰고 직언 잘한 이현정 약와공

   성리학자로 예론에 정통한 [일선와고]의 이홍재 일선공



2.활동연대:1800-1930s


   고종대에 영의정 지낸 이경재 문간공

   을미사변때 명성황후와 함께 죽음 당한 이경직 충숙공

   고고한 한국 선비의 표상 수당 이남규

   62세에 문과급제하여 기로소 든 이대직

   궁내부특진관에 오른 이명직

   영원한 겨레의 스승이요, 청년인 월남 이상재

   궁내부특진관, 시종원경 역임한  이승순

   독립운동하다 잡혀 교수형 선고받은 춘당 이용규

   조선독립청원사건으로 옥고치른 이용직 강암공

   잠상기술개선의 선구적 역활을 한 실학자 이우규 아주공

   외교관 지낸 [유일록]과 [범사록]의 저자 이태직 설정공

   어영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역임한 이해우 정민공

   내외요직 두루 거치고 기로소 든 이희갑 정헌공

   명주옷도 사양한 청빈의 표상 이희연

   [계서야담]의 저자로 알려진 이희준 문정공

   한글체 일기의 창시 [화성일기] 저자 이희평 계서공

현대의 인물들

[활동연대:1940s-현재]


  평생 독립운동하고 기독교에 귀의한 해관 이관직

  이동복(국회의원)

  의사 겸 행정가로 적극적인 사회활동 편 가동 이명구

  전통문학의 대명사인 [관촌수필], [우리 동네]의 저자 이문구

  이원복(국회의원)

  이일규(전 대법원장. 한산이씨 대종회 이사장)

  대종교 중진으로 많은 사회활동한 위당 이진구

  한국고대사 연구의 큰 별 남운 이홍직

   ........


서원방문


 

  서원은 선현배향을 담당하며 또한 지방교육체제의 핵심기관으로, 

  일찌기 학문을 숭상한 많은 선비들과 문생들이

  모여서 학문을 연마하며 인격을 양성해 나갔던 곳입니다.


  서원의 모체는 물론 고려시대의 향교이나

  조선초기를 넘어서는  대부분 그 기능을 상실했던 바,

  사실상 서원들이 그 후에 많이 생겨나면서 기능을 이어받고

  나라의 훌륭한 인재들과 유력한 지방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했습니다.


  그렇다고, 서원이 완전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사림의 세력이 워낙에 커져서 원래의 기능을 감당치 못하고

  정치적인 목적에 많이 주력했던 폐해가 생기기도 하였는데,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서원철폐령을 내려 사림세력을 

  저지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입니다.


  현재는 서원들이 복구-재건되었고,

  각 문중의 모임장소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보다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적과 문화재로 남아서 

  둘러 보노라면 훈훈한 향수에 젖게도 만듭니다.


  한산이씨 문중과 인연이 깊은 서원들은 전국 각지에 많으나,

  아래의 서원들은 한산이씨 선조들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므로,

  후손들에겐 특히 더 정감이 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고산서원(주향 대산 선생, 소산 선생 배향)


국계사


낙빈서원(백옥헌공..)


노운서원(백옥헌공 배향)


돈암서원(백옥헌공...)


동학사(목은 문정공,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문헌서원(주향 목은 문정공)


민절서원/사육신 공원(백옥헌공 배향)


서산서원(주향 목은 문정공, 수은공)


신항서원 (목은 문정공 배향)


창절사(백옥헌공...)


충령사(백옥헌공, 수당 선생...)


팔봉서원(음애공 배향...)


화암서원(주향 토정 선생, 명곡공)



고산서원


고산서원은 경북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소재,

지방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된

사액 서원입니다.


이 위치에 목은의 14대손인

대산 휘 상정 선생이 1768년

(영조14)에 고산정사를 창건,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입하였는데,

선생이 서거하신 후, 선생의

학덕을 추모한 사림이 1789년(정조13)에 서원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그 후 고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향사만 지내오다가,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윈 경행사,

동재를 중수하였습니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아우인 휘 소산 광정

선생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경내에는 경행사, 호인당,

앙지배, 백승각 등

9동의 건물이 있는데

경생사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인 호인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서 격식을 갖추었으며,

특히 앙지재와 백승각의 양끝은

개방된 마루를 두어 주변 경관을

                                  음미하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문헌서원


문헌서원은 충청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77호의

건조물로 무학대사가 예언했던

명당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엔 가정 문효공과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고

휘 종학 인재공과 백옥헌

휘 개 사육신,

음애공을 모셨으며

휘 종덕 문양공은

추배되셨습니다.


         (영모리 영당 정문)



   가정, 목은 문집 목각판은 1404년(태조4)제작한 것으로,

   시 35권, 문집 20권, 상소문과 행장문을 합하여

   16본 55권 등 약 820매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보전되어 있습니다.


   목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친필로

   충청남도 문화재 1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민절서원(사육신 공원)


  백옥헌공 휘 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여섯 사육신의 높은 충절을 헌양하고자 1681년(숙종7)에

  민절서원이 건립되어 공들을 추도했습니다.


  그 후, 1782년(정조6)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새로 세웠습니다.


  1978년 서울시에서 사육신의 충의 정신을 기리고자

  묘역을 확장해 사육신공원을 만들어 공원화하여

  오늘에 이른것 입니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

  1955년에 세운 육각비,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익시설도 구비된 공원입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내리면 곧 찾아 가실 수 있습니다.




서산서원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외7필에 소재하고 있는

서산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771년(영조47)에

처음 건립되어

휘 색 목은 문정공과

휘 홍조 수은공을

추모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내려오다가,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62년에 후손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정면3칸의 숭덕사, 10칸의 명교당,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신문,

15칸의 주소 등이 있습니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수은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목은문집>> 등 서적 100여권을 소장하고 있으며,

숭덕사에 목은 영정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신항서원


신항서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에

소재하여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서원입니다.


1570년(선조3)에 창건되어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를 봉안하다가,

1642년(인조20)에 재건하면서

한충을 추가 배향하고,

1650년(효종1)에 송상현,

이득윤을 또 추가 배향하고,

                                   1656년(효종7)에 목은 휘 색

                                   문정공을 추향하여

                                   현재 모두 9분의 선현을

                                   봉향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유정서원으로 불리다가,

  1660년(현종1)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명되었습니다.


  1871년(고종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92년(고종29)에 복구허가를 받아 1904년에 복구되었고,

  1957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물로인데 

  전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었으며  문은 모두 4분합문을 달았고

  이 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습니다.

                            

  건물주위에는 석축담장을 둘렀고,

  마당에는 1685년(숙종11)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가 있습니다.


  매년 음력 3, 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습니다.




화암서원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27-1에

소재하여 있는 화암서원은 1610년

(광해군2)에 창건, 1686년(숙종12)에

사액이 내려진 서원입니다.


그 후 1871년(고종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된 것을 1920년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토정공 휘 지함,

명곡공(=충간공) 휘 산보 및

경주이씨 이몽규 세 분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에 김제군수공 휘 정영을

추가 배향하였고, 최근에는 구계우도

추가 배향하며 또한 오위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처음 건물양식은 목조 맞배집의 양식이었으나, 최근에

이 지역이 청천 저수지 시공에 따라 수몰지역이 되었으므로,

현 위치로 이전한 것입니다. 그 후에 축대와 기단을 설치하고

재실과 삼문을 개축-중수하였습니다.


목조건물 전면이 3칸, 측면 2칸인 와가1동으로 5평인 사당과

8평인 재실 2동, 제기고 및 삼문으로 되어있는 사당으로

구조되어 있습니다.


'98년 7월 7일에 토정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문과방목(文科榜目)



작업중!(3명 추가.

약 45% 정도 마쳤음. 12/2)

조선 500년을 거치며

한산이씨 가문에선

문과 급제자 총 195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중시 합격자는 제외)


이 숫자는 한국의 수백이 되는

모든 양반가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하나로서,

실로 그 업적은 훌륭하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대과의 하나인 무과(武科)도 있었지만

  사대부 집안의 자제는 문과에 응시를 주로 했고

  문과 급제를 거치면 중앙의 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바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던 한산이가의 선비들은

  서원이나 향교등에서 모여 글을 읽으며

  문과급제를 주목표로 삼고 학문을 닦았습니다.


  [한국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본관 덕수)

  그의 후손들에게 유언으로

  "너희 자제들은 두 번 다시는 무과에 응시하지 말아라"

  고 한것을 보면 무관의 길이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케하고도 남습니다]


  어지러운 시국때엔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선비들에게 있었기에

  벼슬은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정진에만  힘쓴

  덕망높은 선조들 또한 적지않게 계십니다.


  실상 음직/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 명망했던 선비들이

  정식관문을 거친 등용자들보다 숫자적으로 더 많았으며

  유림에서 행사한 힘 또한 그러기에 막중했습니다.


  문-무-음, 이 세가지를 통해 벼슬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다음은 세대별로 적은 문과급제자 195명의 명단입니다:

 

세대 이름 관직 시호/봉군 증직외 기타

  9세 계완(季 ) 사간원정언

  9세 계전(季甸) 병-이조판서.판중추부사 문열(文烈).한성부원군

               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佐翼功臣)

  9세 맹준(孟 ) 사간원정언

  9세 숙복(叔福) 부교리.병조좌랑

10세 개(塏) 직제학 충간(忠簡) 이조판서. 호당(湖堂)선발

10세 봉(封) 형조판서. 좌찬성 헌평(憲平) 영의정

10세 파(坡) 예조판서. 좌찬성 명헌(明憲) 

11세 영은(永垠) 형-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정도(丁悼). 한산군 호당(湖堂)선발.

                좌리공신(佐理功臣)

11세 예견(禮堅) 대사간

12세 유청(惟淸) 황해감사. 좌의정 공편(恭編) 기로소(耆老所)

12세 윤번(允蕃) 사간원대사간

12세 대사헌. 한성판윤. 우참찬. 문의(文懿)

13세 언호(彦浩) 대사간 전라감사

14세 기 직제학.승지. 대사간.대사헌 장정(莊貞) 영의정 겸 관사감사/세자사.

        청백리(淸白吏) 녹선

14세 산보(山甫) 대사간.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충간(忠簡).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 영의정

14세 산해(山海) 대제학.우의정.영의정 문충(文忠) 호당(湖堂)선발

14세 예-형-공조판서.좌참찬 의간.아천부원군 수충분의 평란공신(平難功臣) 

14세 희백(希伯) 정안부사  이조참판

15세 경류(慶流) 병조좌랑  도승지

15세 경전(慶全) 좌참찬.이-형조판서  호당(湖堂)선발

15세 경함(慶涵) 병조참판.한성부우윤  좌참찬

16세 선교랑 행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 세자시강원설서

16세 덕수(德洙) 승지.대사간.강원감사. 이조참의  좌찬성

16세 덕형(德泂) 도승지.한성부판윤.예조판서.지돈녕부사.우찬성 충숙(忠肅) 영의정

16세 예조판서

16세 봉년(鳳年) 사간원대사간

16세 선 공-예조정랑.승문원판교

16세 전 군자감정.승문원판교

16세 제 대구부사

16세 현영(顯英) 대사헌.이조판서 충정(忠貞) 영의정

16세 후(厚) 이조정랑  호당(湖堂)선발

16세 흡(洽) 성주목사.문학.장령.헌납

17세 거원(巨源) 시강원문학.홍문관부수찬.교리.감진어사

17세 기조(基祚) 경상감사.도승지.대사간.부제학.우참찬.예조판서.함경감사.

                공조판서. 충간(忠簡)  영의정

17세 성원(性源) 고산도찰방.시강문학.경기도사.

17세 세연(世演) 대사간 

17세 정기(廷) 예-이조 참판

17세 태연(泰淵) 교리.수원부사.충청-전라-경상-평안감사.대사간 

17세 행원(源) 황해도사.성균관사예 

17세 홍연(弘淵) 대사간.좌승지.공조판서.좌참찬 

18세 광직(稷) 정언.지평  

18세 규령(奎齡) 경상도감사.대사간.도승지.대사헌.도총관 공조-병조참판.

                형조판서.  정혜(貞惠) 기로소

18세 동직(東稷) 관찰사  

18세 만직(稷) 강원감사  

18세 수경(壽慶)   

18세 집 황해감사  

18세 택 대사성.한성부좌윤.이조참판  

18세 효원(孝源) 강계부사  

19세 병상(秉常) 공-예-형조판서.대제학 문정(文靖) 청백리 록선기로소

19세 병태(秉泰) 이조좌랑.교리응교.부제학 문청(文淸) 대제학.이조판서.청백리 록선

19세 수득(秀得) 충청감사.승지.대사간.대사헌.공조참의

19세 수언(秀彦) 경상감사.승지.형조판서.대사헌.전라감사. 정간(正簡) 

20세 기중(重) 군자감정  이조참판

20세 덕중(德重) 승지.대사간  

20세 태중(台重) 지평.부교리.평안감사.예조참판.호조판서.

                예문관제학 문경(文敬) 청백리 록선

20세 필중(必重) 시강원설서  

20세 해중(重) 예조참판  

20세 현중(重) 암행어사.병조참의.승지  

21세 득영 승지

21세 사관(思觀) 충청감사.도승지.좌의정 효정(孝靖) 기로소7

21세 상정(象靖) 예-형조참의 문경(文敬) 이조판서.고산서원배향

21세 수일(秀逸) 지평.장령.헌납.승지

21세 이장(이章) 전라암행어사.부교리.도승지 충정(忠正) 이조판서

21세 태영 도승지.충청-평안감사.예조참판

21세 현정(顯靖) 홍문관 교리

22세 승익 이조참판  

22세 완(琬) 홍문관 교리  승지

22세 희갑(羲甲) 예-이-형조판서 정헌(正獻) 

22세 희조(羲)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부호군 

22세 희준(羲準) 이조참판.경기감사.경기암행어사.공-예조판서.사헌부대사헌 문정(文靖) 

23세 겸재(在) 예조판서

23세 경재1 이조판서.양관제학   

23세 경재2(景在) 영의정 문간(文簡)

23세 도재(在) 형조참판 

23세 시재(在) 이조참판 

23세 우명

23세 우재(在) 경기감사.예조참판.돈령

23세 정재(在) 이조참판.예조판서

24세 승고(承) 이조참판  

24세 승구(承) 교리  이조판서

24세 승순(承純) 대사성.공조판서. 좌-우참찬.동지성균관사.중추원의관.

                궁내부 특진관.시종원경  

24세 승오(承) 형-예-이조판서.한성판윤  

25세 경직(耕稙) 전라감사.궁내부대신 충숙 의정부의정

25세 교직(稙) 참판  

25세 대직(大稙) 대사간.공조참의  기로소

25세 돈우(敦禹) 이조참판

25세 명직(明稙) 홍문관부교리.궁내부 특진관.장례원부경

25세 용직(容稙) 궁내부특진관.학부대신

26세 남규(南珪) 중추원의관.궁내부특진관.승정원동부승지/우승지.형조참의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독립장 수여   



조선왕조 군주별로 본 문과급제자




임금       재위기간    급제자

태조(太祖) 1392-1398 0명

정종(定宗) 1398-1400 과거시험 없었음

태종(太宗) 1400-1418 1명

세종(世宗) 1418-1450 3명

문종(文宗) 1450-1452 0명

단종(端宗) 1452-1455 2명

세조(世祖) 1455-1468 3명

예종(睿宗) 1468-1469 0명

성종(成宗) 1469-1494 4명

연산군(燕山君) 1494-1506 3명

중종(中宗) 1506-1544 9명

인종(仁宗) 1544-1545 과거시험 없었음

명종(明宗) 1545-1567 5명

선조(宣祖) 1567-1608 11명

광해군(光海君) 1608-1623 3명

인조(仁祖) 1623-1649 13명

효종(孝宗) 1649-1659 2명

현종(顯宗) 1659-1674 10명

숙종(肅宗) 1674-1720 28명

경종(景宗) 1720-1724 3명

영조(英祖) 1724-1776 31명

정조(正祖) 1776-1800 4명

순조(純祖) 1800-1834 15명

헌종(憲宗) 1834-1849 20명

철종(哲宗) 1849-1863 7명

고종(高宗) 1863-1907 18명.1894년(고종 31년):과거폐지

순종(純宗) 1907-1910 과거제도 폐지


총 27군주, 518년, 총 195명


사마방목(司馬榜目)



작업중!(8명 추가.현재 20% 정도 마쳤음.12/2)


조선조 500년을 통해

한산이씨 가문에선

소과(小科) 입격자 약 550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의 모든 문중을 총망라해서 최고 수준의 하나입니다.


[참고: 통계에 의하면 전체순위가

       열한번째라고 합니다.

       물론 문중이 큰 집안일수록

       과거합격자도 많고

                         또 그 반면에 불합격자 비율도

                         높기 마련인데,

  한산이씨는 비교적 많지 않은 종원수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를 통틀어  선조들이 상당히 높은 비율로

  소과와 문과에 합격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한 가문의 뛰어남을 단지 많은 벼슬아치의 숫자와

  과거에 누린 부귀영화와 직접 귀결시킬 수는 절대 없지만,

  이러한 사실은 한산이씨가문이 조선시대에 차지했던

  사회적-정치적 위치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이버 검색 기사1(경향신문:9/10/1997)

       네이버 검색 기사2(중앙일보:9/9/1997)]


  사마시(司馬試)는 생원과와 진사과의

  양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생원시는 사서삼경 및 경서를 시험했으며

  진사시는 문장과 운문 능력을

  측정한 시험이었습니다.


  사마시, 즉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자격 및 대과(문-무과)응시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사마시는 태조원년(1392년)과거제도가 시작된 이래

  고종 31년(1894년)에 폐지될 때까지

  230회의 생원시와 186회의 진사시를 치뤘습니다.


  문과급제가 가문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 할 수 있으면

  소과입격은 그 다음이었다 하겠습니다.


  사마에 오르면 일단 음관으로 등용되는 수가 많았으며

  시국이 어지러울 땐 대과를 포기한 선비들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각 세대별로 적은 소과입격자 명단입니다:




세대 이름

  9세  계완(季 ), 계전(季甸), 맹준(孟 ), 숙복(叔福)

10세  개(塏), 봉(封), 파(坡)...

11세  서, 량, 영은(永垠), 예견(禮堅)...

12세  수창(壽昌), 유청(惟淸), 윤번(允蕃), 자, 질, 치(穉)...

13세  언호(彦浩),지번(之蕃), 지훈(之),지함(之함).......

14세  기, 산보(山甫), 산해(山海), 영춘(永春), 증(增), 해, 희백(希伯), ?백( 伯),...

15세  경류(慶流), 경전(慶全), 경함(慶涵), 경홍(慶 )... 

16세  덕사(德), 덕수(德洙), 덕유(德), 덕형(德泂),무, 문영(文英), 봉년(鳳年), 순, 선,

         전, 제, 현영(顯英), 후(厚),흡(洽), 구(久) 무(무),희...

17세  거원(巨源),기조(基祚), 성원(性源), 세연(世演), 정기(廷),

        창조(昌祚), 행원(源), 홍연(弘淵)...

18세  광직(稷), 규령(奎齡), 동직(東稷), 만직(稷), 성령(星齡), 수경(壽慶), 집,

        택, 효원(孝源), 흥직(稷)...

19세  병상(秉常), 병성(秉 ), 병태(秉泰), 석무(碩茂),

        석상(碩相), 석?(碩 ), 수득(秀得), 수언(秀彦)...

20세  기중(基重), 덕중(德重), 태중(台重), 필중(必重),해중(重), 현중(重)... 

21세  광정(光靖), 득영, 사관(思觀), 상정(象靖),수일(秀逸), 이장, 주영, 태영,

         학영, 현정(顯靖)... 

22세  승익, 완(琬), 희갑(羲甲), 희온(羲), 희조(羲), 희준(羲準).....

23세  강재(在), 겸재(在), 경재1(在), 경재2(景在),도재(在), 용재(在), 병운(秉), 병원(秉遠),

         시재, 용재(在), 우명, 우재, 원채, 정재(在)...

24세  수응(秀應), 승고(承 ), 승구(承 ), 승순(承純), 승오(承), 형부....

25세  경직(耕稙), 교직(稙), 대직(大稙), 돈우(敦禹), 명직(明稙), 용직(容稙)...

26세  남규(南珪).... 


수내동 종택


전형적인 농촌가옥인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의 

한산이씨 종가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78호로

지정된, 된장국 맛이 물씬

풍기는 그런 정감 가는

건물입니다.


수내동에는 역말, 넘엇말,

수반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역말에 한산이씨 집성촌 50세대가

집성촌을 이루며

조상대대로 살아왔었습니다.


   타성바지 30여세대를 합쳐, 근근 80여세대를 헤아리던 이 마을도

   신도시 개발과 함께 가옥들이 다 허물어지고

   터주대감들은 타지로 떠나는 등 변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오직 이 가옥 하나뿐이 철거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옛날의 정 어린 모습과 선조들의 발자취를

   현재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곳의 한산이씨들 및 이웃들은 역시 주로 농사를 지었고

   누에치는 집도 많았다고 합니다.

  '45년 해방이 되면서 누에치는 집이 줄어들고 

   참외, 수박, 배추 심는 집이 많아져 개발되기 전까지만해도

   과실재배가 성황을 이룬 전형적인 농경지역이었다 합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이란 현재의 지명보단,

   "돌마면 수내리 숲안"이라는 옛이름을 더 사랑한다는 후손들.


   이 곳에 한산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500년전인 조선중엽으로

   휘 장윤(長潤) 봉화공(=韓原君)에게 유래합니다.


   봉화공은 목은의 현손이요, 휘 종선 양경공의 증손,

   휘 계전 문열공의 손자, 휘 우 대사성공의 장남으로

   1455년(단종 3년)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것 없이 유복하게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당숙되는 휘 개 사육신 백옥헌공이

   단종손위사건에 연루되 만고에 남는 충신으로 순절하시고

   숙부되시는 휘 파 명헌공이 또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의 고통과 함께 3대에 이르기까지 관직의 길로 들어설 수

   없었던 암담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봉화공의 관직은 봉화현감에 그쳤습니다.

   수내동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3세 유사비가

   그 아픔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합니다.


   봉화공의 아드님대에서 비로서 벼슬길이 열려

   장남이신 휘 질 한성군은 사마를 거쳐

   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고,

   한성군에 피봉되었습니다.


   한성군은 성품이 어질고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조상의 기제에나 묘소에서 제사 지낼 때

   성심성의를 다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선현에 축원하기를, "자손이 빈곤하여 제사를

   계속할 수 없을 듯 하오니 원컨데 도와주시사

   자손으로 하여금 영화롭고 귀하게 되게 하옵소서" 하시니,

   공의 손자인 휘 기 송와공, 휘 증 아천군,

   증손인 휘 산해 아계공, 휘 산보 명곡공 등이

   일시에 출세하여 가문을 빛내게 되었습니다.

 

   수내동의 본격적인 한산이씨 터전이 마련되는 것은 

   봉화공의 손자요, 한성군의 3남인

   휘 지숙 한평군(韓平君)에 이르러서 입니다.

 

   한평군이 이 곳에 처음 입주하였을때 

   마을 앞에 나무 몇 그루 심는것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 울창한 큰 숲을 이루어

   동네 이름이 "숲안"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숲안" 이라는 말이 약간 변질하여

   지금의  "수내동"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합니다.

  

   수내동 영장산 자락에는

   산 기슭 명당자리에 모셔져 있는 봉화공의 산소를 위시하여

   봉화공의 아드님 휘 질 한성군의 산소와

   손자이신 휘 지숙 한평군의 산소 등,

   대대로 존엄하신 선현들의 산소가 20여기나 안치되어 있습니다.


   숱한 유서깊은 역사와 전설을 남기고

   500년의 지나간 세월속에 훌륭한 인물을 대거 배출한 수내동.

  

   그곳은 한평군파(韓平君派)의 후손들 뿐만 아니라

   모든 한산이씨인들이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작가 이문구(李文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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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작가 이문구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언제부턴가 손꼽는 대표 중견작가의 한 명으로

한국문학계에 확실한 그 자리를 굳히며

잃어버린 우리의 옛것과 옛정을

자욱하게 진동하는 된장국 맛의

구수한?펜끝으로 생동감 넘치게 되살려 주는

전통문학의 대명사 이문구님.


  본인이 처음으로 이문구님의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7-8년전인 어느 푹푹 찌는 여름날 이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모처럼 집에 들린 저는

  "관촌수필(冠村隨筆)"이란 생소한 제목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시종내내 정감어리고 구석구석 가슴 찡하게 슬프며

  또 어느 부분에선 재밌기까지 하던

  미니 시리즈 비데오테이프를 통하여

  이문구님의 솔냄새 잔뜩 풍겨나는 세계와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 밤을 홀랑 새우며 감명깊게 보았던 비데오테이프를 통하여

  어린시절 저의 모습과 과거의 추억들도 많이 떠 올렸으며

  특히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조인(李朝人)이셨던

  작가의 할아버님은,

  여러모로 저로 하여금 적지않은 공감에 빠지게도 하였던 것입니다.

  작가의 아버님 또한 저에게 유사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경기대 국문과 교수로서 교육과 창작을 겸하며

  후진양성에도 매진하시는 이문구님.

 

  '96년 충청남도 개도 100주년을 맞아 발표된

  "자랑스런 충남인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그간 문학계와 출판계로 부터 받은 상장과 시상만해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 합니다.


  또한 문학계의 여러 모임-단체와 각종 행사에

  굵직한 중책을 도맡아 하며

  문인들의 생활향상 및  

  문학계의 질적-양적 발전 등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제일 바쁘게 활동하시는 이문구님.


  이문구님은 1941년 충남 보령군 대천군 대천리 관촌마을

  (지금의 보령시 대관동)에서 목은의 20대손이요,

  휘 산보(山甫) 충간공(忠簡公)의 13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고조부께선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정3품),

  증조부께선 상주목사(尙州牧使; 정3품)의 벼슬을 한

  대대로 인물을 배출하며 줄곳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머물은

  뼈대깊은 가문의 후손답게

  작가는 다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6.25를 전후하여 집안이 망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보령 남로당 총책을 맡고 계셨던 작가의 부친을 비롯하여

  위의 형님 세분이 모두 "빨갱이"란 이유로 비명에 숨지고,

  외가로 잠시 몸을 피한

  4형제중 막내였던 작가만이 혼자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집안의 정신적 기둥이셨던 작가의 조부께서도 곧 세상을 뜨시고

  이내 어머님을 잃는 등

  작가는 졸지에 고아가 됩니다.


  그 후 중학시절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던 작가는

  '59년 19세의 나이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고

  막노동과 날품 등을 해야만 하는 또 다른 고생을 겪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선비기질과

  본인의 뛰어난 창작력에 힘입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친 후,  

  젊은 시절의 상상할 수 없는 여러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며

  드디어 나중에는 본인만의 독보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등

  이문구님은 우뚝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을 한국문학계에 영원히 남게하며

  영롱한 빛을 발하게 한 

  대표작품 "관촌수필"을 읽노라면,

  작가의 문학 이데올로기를 형성케한

  가족-사회-문화적 뒷 배경과 좀 더 밀접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 위치에 올랐다 하여도

  작가들의 생애가 결코 순탄한 인생은 아닌가 봅니다.

  '98년 9월 모 신문사와 작가가 가진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문구 하면 그래도 작가치고는

   이 땅에서 인기작가축에 끼는 이름인데,

   지난 한해('97) 월평균 수입이 딱 118만원이더라구요.

   그것도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원에 고정강사로 뛰고,

   외고도 열심히 쓴 결과가 그거였어요.

   이젠 구체적인 대책이 필요할 때입니다..."

   [대한매일신문 문화면: 인터뷰/소설가 이문구씨 (98/9/18)]

  IMF란 어려운 때를 맞아 책을 사서 읽는 일반인들의 숫자나

  글을 대할 마음의 여유 또한 현격하게 줄어든 까닭에

  대체적으로 문인들의 생활이 전보다 더 어려워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들-"가난해도 문학은 멈출 수 없다"(중앙일보:98/9/9)]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때이므로 

  한반도 전체에 침체된 국민들의 사기향상을 바라며

  더욱 더 눈부신 활약 기대속에

  우리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그 자존심을 

  이문구님께 자신있게 맡기는 것입니다.


작가 약력


  '41년 충남 보령군 대천읍 대천리 387번지 관촌마을

  (지금의 보령시 대관동)에서 출생.

  '59년 상경. 행상과 날품으로 생계를 유지함.

  '61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입학.

        김동리-서정주-박목월-조연현-김구용 등을 은사로 모심.

  '63년 졸업.

  '65년 단편 「다갈라 불망비(不忘碑)」발표;

        "현대문학" 9월호에 초회 추천.

  '66년 단편 「백결」"현대문학" 7월호에 추천 완료.

   이후 수 많은 창작활동과 문예계의 여러 중요 실책을 거쳤음....


   주요수상: 한국창작문학상('72),

             한국문학작가상('78),

             요산문학상('90),

             흙의 문예상('91), 펜문학상('91),

             서라벌문학상('92),

             만해문학상('93), 농민문화상('93) 및

             신동엽창작기금('82) &

             춘강문예창작기금('89) 수혜자로 선정.

   가족:부인 임경애(任景愛) 여사.

             

   현재는 경기대 국문과 교수로 재임 중.




주요작품


「관촌수필」, 「우리 동네」, 「장한몽(長恨夢)」,

「짱하리 싸리나무」,  「만고강산(萬古江山)」,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이상한 아빠」,

「소설 오자룡(吳子龍)-이지함(李之함)」,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엉겅퀴 잎새」 등등 외 다수.....


  9권으로 "이문구 전집"이 이미 출간되었고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가동 이명구(可東 李明求)

 

  이른바 명의(名醫)는 사람 몸의 병을 고치는데 머루르지만

  선의(善醫)는 인간의 생명을 살린다고 합니다.


  서양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고대 희랍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일찌기 그의 선서에 의사(醫師)가  걸어가야 할 

  여러가지 도덕적-윤리적-사회적-의학적 등의

  중요한 가르침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삭막한 현대사회와 그에 적응하는

  20세기 최말의 의학현황에 비쳐볼때

  어딘가 모르게 고개를 꺄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또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의학의 고귀한 근본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불구하겠으나

  아마도 변화무쌍한 세월의 변천에

  의술또한 그 철학과 책임이 변하는가 봅니다.


  새해 '99년 1월의 인물로 지정된 가동 이명구 선생은

  한반도의 극변하는 개화기때 태어나셔서

  의술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명의로만 활동한것이 아니라

  사회의 병들어 죽어가는 여러가지 암적인 부폐성에도

  대담하게 맞써 싸우며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준

  선의요 선각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의 삶은 그랬기에 더욱 값졌던 것입니다.


선생의 삶:민생교육과 질병퇴치에 평생을... 

  가동 선생은 목은의 20대손으로

  189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백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까지 소학, 사서 등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이후 신학문에 접하여 사립 보성중학을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전문학교를 마친 선생은 1916년부터 1921년까지

  청주 자혜의원(慈惠醫院)과

  충남 태안에서 공의(公醫)로 봉직하였는데,

  특히 3․1 만세운동이 나던 해에는

  만세운동에 항거하다 부상당한 증평, 미원, 병천

  등지의 동포들을 성심으로 돌보아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1921년 8월, 30세때에 6년간의 공의생활을 청산하고,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참된 인술을 베풀기 위해 청주로 환도,

  [신명의원(新明醫院)]을 개업한 뒤에는,

  의술과 함께 고장의 발전을 위해 발벗고 나섰습니다.


  특히 낙후된 교육환경 개선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

  청주권이 교육 문화도시로서의 기반을 닦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청주면협의회원과 도의원, 중추원 참의,

  은성장학회(殷成獎學會) 이사장, 제3대 충북지사,

  충북 향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충북지방 발전에 공로가 컸습니다.


  예컨대, 석교초등학교 건립, 망선루(望仙樓) 철거 및 이건(移建),

  청주교 가설, 팔결다리 가설 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

  성과를 거뒀고,

  여자교육기관의 설립을 통감하여

  김원근(金元根) 선생의 협찬과 기부금을 마련,

  청주여자중학교를 세운 일은 길이 남을 업적이라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1939년 48세에 학무국을 방문,

  청주에 사범학교 설립문제를 제의 한 바,

  함경북도 나남(羅南)으로 배정되어 있던 것을 변경시켜

  1941년 3월에 개교를 보게 하였습니다.


  이밖에 제3대 충북지사 재임시 건립한 괴산 수력발전소 건설에도

  일익을 담당하였고,

  1951년 청주농과대학(현 충북대)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여

  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1975년 84세의 향수로 서거하였습니다.


  [자료 참고: <인터넷 사이트-청주시 사회저명인사>

            (가동자서전(可東自敍傳), 청주근세 60년사화)]


수당 이남규(脩堂 李南珪)


공의 자는 원팔,

호는 산좌, 수당으로

목은의 19대손,

휘 종선 양경공의 18대손,

휘 계전 문열공의 17대손,

휘 치 찬성공의 14대손,

휘 지번 성암공의 13대손입니다.

휘 산해 아계공의 12대손


1855년 철종 6년에 

휘 호직 공과 어머님 청송심씨 사이의 장남으로

서울 미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61년 겨우 7세의 나이에

  기호 유림의 대표적 학자인 성재 허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는데,

  어린 나이때부터 유학에 밝아 이름을 떨쳤습니다.


  1875년(고종12), 21세의 나이에 사마시

  양과에 합격,

  1882년, 28세의 나이에

  정시문과급제하여 승정원 권지부정자에 올랐습니다.


  1885년, 31세의 나이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그 뒤 부수찬, 수찬을 역임하였습니다.


  1893년, 39세때 부호군을 지내고,

  1896년 42세때에 안동부 관찰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898년, 44세의 나이에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습니다.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형조참의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김택영, 황현, 이건창과 함께  구한말 4대 명문장가로

  문명을 날렸습니다.


  공은 1883년부터 1905년까지 명성황후(=민비) 시해만행을

  규탄하는 "청절왜소",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하여 이론과

  결전을 주장하는 "청토적소" 등의 상소를 잇따라 올려

  항일유림의 상징적 존재로 떠 올랐는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흥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영흥 부사직을 박차며,

  '왜적을 물리치고 적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를 올렸던 공은

  이미 유림과 백성들로부터

  당대에 추앙을 받았습니다.


  1906년, 공의 나이 52세때에 충남 홍산(=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었는데,

  이 일로 인해 1907년, 53세때에 일제에 검거돼

  공주옥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일제의 회유를 완강하게 거부하던 공은 며칠 뒤인 9월 26일, 

  아산군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휘 충구와 함께

  지는 해를 받아 번쩍이는 왜구의 칼날을 당당히 받으시고

  장렬하게 피살되었습니다.


  한편 공이 일제에 연행될 때 호통을 치며 외친,

  "사가살부가욕!"(="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의 일화는 그 후 많은 유생들의 항일투쟁정신을

  고취시킨걸로 유명합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 독립장이 수여됐으며,

  아드님 충구 또한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습니다.


  공은 '97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선생의 정신을 기린 수당선생 3대항일전쟁사적기념비가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충령사에 '97년 11월 28일, 

  박상범 국가보운처 장관, 권쾌복 광복회 회장,

  심대평 충남 도지사 등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갖고

  세워졌습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월남 휘 상재 선생은

자가 계호, 호는 월남 입니다.

목은의 16대손,

휘 종덕 문양공의 15대손,

휘 맹진 판중추공?의 14대손으로

고향인 충남 한산군 서천면 종지리에서

철종 원년 1850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휘 희택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농사를 짓던 중농 살림의 한 평범한

한산이씨 양반집에서 선생은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 고종원년, 선생의 나이 15세에

  강릉유씨와 혼인하였습니다.


  18세되던 1867년 서울에 올라와 과거를 치뤘는데,

  돈에 눈이 어두운 오리들과 소인배들의 매관매직으로

  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방거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개탄한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파묻히려 하였으나, 막중한 겨레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고 태어났던 운명이었던만큼 하늘은 선생을 그렇게 초야에

  뭏히게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친족인 휘 장직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 들어가

  1880년, 선생의 나이 31세 되던해까지

  개인비서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10여명의 수행원중

  한 명이 되어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26명의 사절단과 함께

  일본에 갔습니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1884년, 선생이 35세되던 해에 신관제에 의하여 개설된

  우정총국의 총판 홍영식이 선생을 주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선생은 낙향을 하게 됩니다.


  1887년, 나이 38세때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의 문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선생은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귀국한 뒤 낙향하셨으나, 몇 년 후인 1892년,

  선생의 나이 43세에 전환국위원,

  1894년 45세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등을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하셨습니다.


  1896년, 47세에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쓰셨습니다.

  이해 7월 서재필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 보았습니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회되었을때,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가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셨습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선생의 나이 49세,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돼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셨는데, 

  계속 나라의 운명을 걱정,

  탐관오리들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시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선생의 나이 53세때에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둘째 아들 휘 승인과 함께

  다시 구금되십니다.


  2년후인 1904년 2월 석방되십니다.


  옥고를 치루시는 동안에 감방 벽틈 사이에 낀

  작은 쪽지를 발견하고 읽었는데,

  "너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참으로 큰 승리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 마음으로 감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월남은

  이 날부터 성경을 읽고 드디어 세례를 받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재탄생하십니다.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후일 YMCA)에 가입하십니다.


  1905년, 선생의 나이 56세때에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선생의 나이 58세때에 법무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시고,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나셨습니다.


  1906년, 59세때에 YMCA 초대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과 청년교육에 헌신적인 투신을 하시게 됩니다.


  1910년 선생의 나이 63세 되던해에,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였습니다.


  66세가 되던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를 동원,

  청년회를 파괴하였는데,

  이 때문에 간부들은 국외로 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에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십니다.


  이듬해인 1914년에는 전국적으로 여러 학생 YMCA를 발족케 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셨습니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 및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가 되게 하였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습니다.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뤘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 운동정신을 이뤄

  놓으셨습니다.


  선생의 나이 71세되던 1920년 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장으로서

  1920년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때의

  이른바 제2독립운동에 해당하는 여러 YMCA 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와 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73세되던 1922년에는 신흥우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 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셨습니다.


  같은 해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셨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셨습니다.


  1924년, 75세 고령의 나이에 조선일보 초대사장이 되셨고,

  1925년 제1회 전국기자회 의장으로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십니다.


  선생의 나이 78세 되던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여러 번 사양끝에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해 사망,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애도 인파가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한상선영에 배치되셨습니다.


1957년 선생이 떠난지 30년이 지난 해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비문을 썼습니다.



  선생은 풍자와 기지가 넘쳤고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키셨으며,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아하셨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월남 선생의 추모제엔

  선생을 기억하는 각계의 인사들이 줄을 이으며

  선생의 정신을 길이 되살리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상정부서>>, 

  <<독립문건설소>>등 다수의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토정 이지함


토정공의 생애

우리에게 <<토정비결>>로

너무나 유명한 文康公 土亭 이지함(1517-1578)

선생은 목은의 6대손,

양경공의 5대손, 문열공의 현손으로

중종 12년에 현령 휘 치(穉) 찬성공의

세 아들중 막내로 외가인 충남 보령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계공 휘 산해, 명곡공 휘 산보는 공의 조카가 됩니다.


  토정공의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입니다.


  공은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생애의

  대부분을 지내며 뭇 백성들과 아픔을 같이했는데,

  호 [토정]은 여기에 연유하게됩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휘 지번(之蕃) 성암공 밑에서

  글을 배우다 뒤에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공께서 의학,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달통하게 된것은 화담의 영향이 컸습니다.


  1573년(선조 6) 공의 나이 57세때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비로서 벼슬길에 나가는데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62세때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을 구호하였습니다.

  공은 아쉽게도 이해에 서거하십니다.


  공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게 되자

  공을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년의 신수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심하여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공은 평생에 걸쳐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도 제향되었습니다.


  조선시대 3대 기인으로 일컬어지며

  수많은 전설적인 일화를 뿌렸던 토정.

  그러나 공은 한낱 기인에 머문 인물이 아니라

  선도의 대가로서 민족의 운명과 삶의 진실에 

  통달했던 인본철학자요, 뭍 백성의 고생과 아픔에

  동참한 목민관의 참 표상이었던 것입니다.

  토정공은 먼 장래를 바라보는 선각자의 식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오늘날까지도 그처럼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알게 모르게 침투하며 심지를 자극하는 선견도

  한국사에서 찾아보기 드뭅니다.


  1713년(숙종 39)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문강(文康) 입니다.




FAQs


시조 휘 윤경 호장공 이전의 한산이씨 선계


  문서에 기록된 것이 없어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씨는 크게 보아서

  신라시대 6촌장의 한 명이었던 이알평 후손 계통과

  중국 한나라에 시조를 두고 있는 전주이씨가 있다합니다.


  그 밖에 역시 중국 당나라 사람인 이무의 후손인 고성이씨가 있고

  가야국 김수로왕의 2남인 허겸을 시조로 하는 인천이씨 등이

  있습니다.


  경주이씨는 역사가 오래된 문중이므로 시조이래

  그 밑에서 갈라져 나간 집안들이 많은데,

  아산이씨, 우봉이씨, 원주이씨, 재령이씨, 평창이씨, 합천이씨 등이

  모두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주이씨와 우계이씨의 일부도 역시 이알평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위에 열거된 이씨 집안들은 삼국시대때의 가문역사-창립에

  대한 기록이 문서에 적혀 전해 내려오는 우리 나라에서

  아주 오래된 문중들입니다.

  한산이씨의 역사는-문서를 통해 밝힐 수 있는 측면에서-

  삼국시대까지 올라가지는 않고 고려 중엽때인만큼,

  호장공의 선계가 과연 어느 계통의 누구로부터 분파되어

  내려왔는지는 사실상 그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옳을것 같군요;

  이알평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중 한 명이 호장공의 선조일수도

  있는 등, 그렇지 않으면 타성에서 이씨로 귀화한 분일 가망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서에 적힌 직-간접적인 기록에 의하면

  호장공 선계의 몇대 선조와 그 이후의 후손들이

  한산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직을 지내며

  지방 명망가의 호족지위를 확실하게 굳혔던 것을 알수 있으므로

  타성에서 귀화하였을거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많이 결여됩니다.


  시조를 삼국시대에 두고 있는 가문들중에서도 중간세계의 기록이

  분실되어 그 이후의 고려때 조상중 한 명을 중시조로 모시며

  계통을 잇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한산이씨 역시 호장공 이전의 몇대 선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답니다.

 

  한산이씨를 포함하여 시조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이씨본은 대략 1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호장이란


  호장은 21목의 향리중에서도 최고 당대의 위계로

  책임은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건국 후 최고 권력층으로 자리 잡은 문중들 중에

  호족출신이 상당수입니다.

  왕족이 된 전주이씨도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산이씨 시조 휘 윤경 호장공의 일부 다른 후손들


  저로서는 알길이 없군요.

  족보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시조로부터 9대까지 항렬을 계보형식으로

  목은선조께서 처음 정리하셨다고 하는데 유실되어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한산이씨 문중의 역사를 밝혀주는

  대동보의 효시인 계미보를 시작으로

  경신보와, 병오보, 을사보 및 최근의 대동계보와

  최근의 각 지파별 종중에서 간행된 파보등이

  우리에게 남아 문중의 역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6세 가정공 이후로  호장공의 일부 다른 후손들은

  한산이씨 문중과는 별개의 씨족으로 남았습니다.



목은 선생의 자손


  휘 종덕(문양공),

  휘 종학(인재공),

  휘 종선(양경공)의

  세 아드님이 계셨던건 익히 아는데

  손자들은 몇 명이나 두셨던지요?


  문양공에겐 4명의 아들,

  인재공에겐 6명의 아들,

  양경공에겐 5명의 아들이 계셨으므로

  목은께선 도합 15명의 손자를 보셨습니다.


  그 후 한산이씨 후손들은

  목은의 3명의 아드님과 15명의 손자께로부터

  모두 분가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벼슬, 관직


  문하시중은 고려때의 벼슬로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같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최고의 벼슬입니다.


  좌찬성, 우찬성은 삼정승을 보좌하는

  재상급의 높은 벼슬로 종1품입니다.


  판서는 각 6조의 으뜸 벼슬로 정2품계이며

  종2품의 참판, 정3품의 참의가 밑에 있습니다.


  관찰사(=감사)는 각 도의 우두머리로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며 종2품입니다.


  도승지, 좌승지는 왕의 비서직으로 정3품의

  승정원 소속입니다.


  목사, 부사는 정 3품의 외직으로

  품계에 따라 당상관/당하관으로 구분되며

  찰방은 종4품,

  좌랑과 감찰은 정6품입니다.


  통덕랑과 교리는

  각각 정5품, 종5품의 문반계 벼슬이며

  주부와 현감은 종6품의 외직이고

  박사는 정7품, 직장은 종7품,

  참봉은 종9품계입니다.


  사마시에 합격하면 생원과 진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한산이씨의 현 인구


  '85년도 인구조사에 의하면 12만명에 약간 못 미칩니다

   (대략 11만9천 명 정도 가량).

 

  '85년도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인 근 400명중 1명꼴이 한산이씨라 할 수 있겠군요.


  한산이씨 인구는 김해김씨 3백76만7천명의 3%에 미치고,

  밀양박씨 2백70만4천명의 4.4%,  

  전주이씨 2백37만9천명의 5% 되는 셈입니다.

  한산이씨보다 종원수가 많은 집안들은,

  경주김씨 1백52만3천(7.8%),  경주이씨 1백21만7천(9.8%),

  진주강씨 94만1천(12.6%),    경주최씨 87만6천(13.6%),

  광산김씨 75만(16%),         파평윤씨 64만6천(18.4%),

  청주한씨 59만7천(20%),      안동권씨 56만7천(21%),

  인동장씨 53만8천(22%),      평산신씨 46만(26%),

  순흥안씨 41만7천(28.5%),    동래정씨 41만4천(29%),

  대구서씨 39만8천3백(30%),   안동김씨 39만8천2백(30%),     

  남양홍씨(=당홍) 38만2천(31%),

  해주오씨 37만7천(31.6%),    남평문씨 34만 3천(34.7%),

  전주최씨 34만2천(34.8%),    제주고씨 31만7천(37.5%),

  경주정씨 30만(39.7%),       창녕조씨 29만9천(39.8%),

  수원백씨 29만5천(40.3%),    한양조씨 27만3천(43.6%),

  나주임씨 26만2천(45.4%),    문화류씨 25만5천(46.7%),

  밀양손씨 24만3천(49%),      함안조씨 23만1천7백(51.3%),

  진양정씨 23만1천2백(51.5%), 창원황씨 22만(54.1%),

  의성김씨 21만9천(54.3%),    여산송씨 20만(59.5%),

  평택임씨 19만4천(61.3%),

  청송심씨 18만6천(64%),      은진송씨 17만9천(66.5%),

  해주최씨 16만1천7백(73.6%), 강릉유씨 16만1천6백(73.6%),

  창녕성씨 15만8천(75.3%),    연안차씨 15만4천(77.3%),

  단양우씨 15만2천(78.3%),    강릉김씨 15만(79.3%),        

  진주하씨 14만8천(80.4%),    이천서씨 14만4천(82.6%),

  신안주씨 14만2천5백(83.5%),

  하동정씨 14만2천4백(83.6%), 광주이씨 14만1천(84.4%),

  여흥민씨 13만7천(86.9%),    강릉최씨 13만2천(90.2%),

  의령남씨 13만(91.5%),

  현풍곽씨 12만7천(93.7%),    장수황씨 12만6천7백(94%),

  연안이씨 12만6천5백(94.1%), 정선전씨 12만4천9백(95.3%),

  평해황씨 12만4천(96%) 명 등 입니다.


  한산이씨와 비슷한 종원수(+/- 3천명)를

  자랑(?)하는 문중들로는   선산김씨의 12만2천,

  반남박씨의 11만8천8백,   충주지씨의 11만8천4백,

  고령신씨의 11만7천,      영월엄씨의 11만6천명

  등이 있습니다.

  약간 위에 못 미치나 10만명이 넘는 문중들로는 

  양천허씨의 11만4천8백,   천안전씨의 11만4천,

  제주양씨의 11만3천,      전의이씨의 11만2천,

  능성구씨의 11만1천,

  풍양조씨의 10만9천4백,   담양전씨의 10만9천2백,

  함양박씨의 10만3천2백,   풍천임씨의 10만3천1백,

  원주원씨의 10만2천7백,   여양진씨의 10만2천3백명

  등등이 있습니다.


  '85년도 인구조사에 나타난 것을 보아 알수 있듯이

  같은 한산이씨인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더 더욱 인터넷상에서는-그렇게 높지 않다고 할 수 있겠군요.



한산이씨 집성촌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론 태반이 고향을 떠나며

  타지로 많이 이동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서울과 근교 경기도 성남시 등에

  많이 거주하고있습니다.


  태표적인 한산이씨 집성촌은

  강원도 화양군 상북면,

  경기도의 개풍군 광덕면과 고양시, 김포,

           성남시의 수내동,

           수원의 남양

  경남의 하동군 평사리(참고: 소설 "토지"의 무대),

  경북의 안동군 일직면,

  전북 옥강군 성산면,       

  충남의 서천군 한산면/기산면,

         예산군 대술면/봉산면

  충북 청원군 북일면,

       청주시,

  평안도 용천,

  함북 경성군 어랑면,

  황해도 해주군 일원,

         연백군 유곡면,

         송화군 하리면,

         서흥군 용평면 등입니다.


소과(=사마시)와 문과의 시험과목


  과거제도는 일찌기 고려 때에

  원나라의 과거제도 (향시-회시-전시의 3차 시험)를

  모방하여 한국에 도입된 고급 관료 등제 시험으로

  약간의 변천을 거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선

  생원-진사시의 사마시, 즉 소과 와

  문-무과의 대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서삼경및 경서 지식을 시험한 생원시와

  문장과 운문 능력을 시험한 진사시가 소과입니다.


  소과에 합격한 급제자들은  

  성균관 생원-진사등의 자격으로 대과를 준비하거나,

  음관으로 등직하여 지방세력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제직시에 문과에 등제한 경우도 많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당대의 최고 학자들인 대제학-부제학 급의

  학식이 높은 강사들에게 명륜당에서 강론 받으며

  학문을 더욱 높이는데 힘쓸 수 있었습니다.


  문과는 대체적으로 시대조류에 맞는

  일정한 시제가 주어져서

  응시자들이 본인의 주관과 생각을

  뚜렷히 논리정연하게 시험지에 옮겨 적은

  주관식의 시험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소과 합격자 4만 7천 748명의 생원-진사들 중

  겨우 15.6%에 달하는 7천 438명만이

  문과급제의 기쁨을 안은만큼

  문과급제는 각 가문의 영광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참고:한산이씨는 총 소과급제자 550여명 중에

        35%인 19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제도 중 특히 사마시는,

  양반신분을 대대로 세습화하고 지배계급층이 

  지방에서 그 세력을 확고히 다지는데 큰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습니다.


  문과는 3년에 한 번씩 거행되는 정시 식년시와

  국가에 경사가 생겼을 때 특별히 치뤄졌던

  각종의 별시가 있었습니다.

 

  소과는 3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던 식년시와

  별시인 증광시가 있었습니다.


  무과는 물론 활쏘기, 말타기 등의

  무예를 시험한 무관 등제 시험입니다.


  문과 응시 특권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양반의 자제들에게만

  특정적으로 주어졌었고

  소수의 양반자제들이 무과에 응시하여

  훌륭한 업적을 이룬 무관이 되기도 했으나 

  상류 하급층과 서얼계급이  무과등제로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당파싸움이 한창 심했던 조선중기에 한산이씨 선조들의 소속 당파


  한산이씨는 일반적으로 노론벌족으로

  잘 알려진 집안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딱 짤라서

  노론이였다고 규정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상 선조대 이후론 크게 봐서

  서인의 노론과 동인의 남인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서인의 원래 사상적 배경은 율곡 이이로부터 

  전승되었는데, 서인내에서 우암 송시열(=노장)과 

  그의 제자 윤증(=소장) 및  젊은 대신들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분당되며 노론과 소론으로 당파를 이뤘습니다.

  서인이란 당명은 선조초에 외척으로 정계를 주름잡던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었음에 비롯됩니다.

  

  서인과 맞섰던 동인은 강경파의 북인과 온건파의

  남인으로 또 각각 분당되었는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상공 휘 산해는 북인의 영수 였습니다.

  남인의 사상적 시조는 퇴계 이황으로서 아계공과

  대응했던 서애 유성룡 선생은 남인의 영수였습니다.

  동인이란 당명은 심의겸과 대항하며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김효원의 집이 동쪽 동대문 시장 부근에

  있었음에 비롯 됩니다.


  죽마고우의 친우들 사이라도 당파가 생기면서 그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 예가 율곡 이이

  선생과 아계공이라 할 수있겠습니다.

 

  한 지붕 밑에서 사는 부자-형제지간이라도 정치이념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시대때는 당색이 대대손손

  가승되어 내려져 왔었습니다.

  부인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 등이 소속한 당파에 따라

  각기 달랐고, 노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다리를 옆으로

  비껴가며 길을 돌아 갔던 소론 사람들의 얘기는 유명합니다.

  심지어는 집안에 키우던 꽃-화초색깔도

  당색에 맞췄다 합니다.

  같은 당파가 아니면 집안끼리 몇 백년 동안 통혼도

  아예 안했습니다.


  이렇게 당색은 사생활 깊은 곳까지 침투하였습니다.

 

  당쟁이 피비린내 나게 치열할 때에 실권하면

  목숨을 잃거나 귀양가는 경우가 보통이었습니다.

 

  목은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집성촌을 이뤘던 만큼,

  그 지역적 배경과 학문적 계승이 다양하여  

  당색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당쟁에 뜻을 두지 않은 선조들 또한 많았습니다.


  당쟁은 임진왜란을 초래하게 한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 입니다.

 

  대표적인 노론 가문으로 알려진 집안들은

  광산김씨, 안동김씨, 은진송씨, 청송심씨, 연안이씨,

  양주조씨, 남양홍씨 등등 입니다.


  대표적인 남인가문은 안동권씨, 의성김씨, 순흥안씨,

  풍산유씨, 진성이씨 등등 입니다.

 


 

 
 
출처 : 한산이가네(청주미원 다락동)
글쓴이 : 무릉도원(무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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