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 인설도 (第七 仁說圖)
인설(仁說)
인(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아직 발하기 저에 마음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인"만이 사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함육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니 "애(愛)의 이(理)"이니 "인(仁)의 체(體)"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미 발동하였을 때에는 사단(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에 관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측은이란 두루 흐르면서 관철되는 것이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성(性)의 정(情)"이니 "애(愛)의 발(發)"이니 "인(仁)의 용(用)"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 즉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 이미 발동한 것, 즉 "이발(已發)"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이 체이고, "측은"이 용이다.
"공"이라는 것이 인을 체험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공하며 인하여지고, 인하면 애하여진다. 효제(孝悌)가 그 실제상의 용이고, "서(恕)"가 그 효제를 펴나가는 것이고, "지각(知覺)"은 그것을 아는 일이다.
천지의 마음은 그 덕을 네 가지 가지고 있다. '원(元)·형(亨)·이(利),정(貞)'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들이 운행하면 '춘, 하, 추, 동'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생하는 기운이 제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 의, 예, 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용하면 '애(愛), 공(恭), 의(宜), 별(別)'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애의 정이 다른 정들에 관통된다.
무릇 인이란 도리로서는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 사물에 즉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이 인의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발한 뒤에는 그 인의 용이 한정이 없다. 참으로 인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문(孔門)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찾는 일"에 급급하도록 하는 까닭이다.
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예로 돌아가면 인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사심을 이겨내고 천리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있게 되며 이 마음의 작용이 다 행하여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의 태도를 가지고, 일을 볼 때에는 경의 태도를 가지며, 남을 대할 때에는 충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제(悌)로 형을 섬기고, 서로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운용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서는 앙연(怏然)히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온연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니, 사덕을 포함하고 사단을 관통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의 이른바 애는 정이고 인은 성인 만큼 애로써 인이라 이름할 수 없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정자의 이른바 "애의 발로로서 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내가 논한 애의 이를 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릇 정(情), 성(性)이라 하는 것은 비록 그 구분되는 영역은 다르지만, 그 맥락이 통하는 점에서는 각각 속하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로 떨어져 상관없는 것이겠는가? 나는 배우는 사람들이 정자의 말씀을 외기만 하면서 그 뜻을 구하지 않아, 마침내 판연히 애를 떼어버리고 인으로 말하는 것이 걱정이어서, 특히 이것을 논하여 그 남긴 뜻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대가 정자의 설과 다르다고 하니 또한 오해가 아니겠는가?
혹은 말하기를 "정자의 문도들에는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을 '인의 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것인가 "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답하겠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애"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 "체"가 되는 참된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지각이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인이 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는 알찬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 박시제중의 물음"에 대답한 것과 정자의 이른바 "지각으로는 인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할 수 있겠는가?
퇴계선생 말씀
위의 인설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서, 또한 스스로 도(圖)까지 만들어, 인의 도리를 남김없이 밝힌 것입니다.
[대학]에 말하기를 "임금된 사람은 인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험한 묘리(妙理)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남김없이 쏟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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