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일(百日)
백일은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을 말하며, 이 날에 아이를 위해 베풀어 주는 잔치를 백일잔치라고 한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삼칠일(三七日)까지의 모든 행사는 주로 아이를 보호하고, 산모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의례적인 행사로 대부분 금기 사항이 주류를 이룬 데 비해 백일은 갓난아이만을 위한 첫 번째 경사스러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일이 되면 갓난아이가 위험한 고비를 어느 정도 넘기고 사물을 구별할 줄 아는 시기이다. 고개를 가누고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 몸짓을 한다. 이 처럼 갓난아이가 온전하게 자랄 바탕을 마련했다는 뜻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백일날 아침에 삼신상에 흰밥과 미역국을 상에 올리고 삼신에게 빈 다음 아이의 어머니가 이 음식을 먹는다. 백일 음식은 주로 백설기, 수수경단, 인절미 등을 만드는데, 백 사람이 먹으면 장수한다는 믿음에서 이웃에 나누어 준다. 백설기는 흰 빛깔의 정갈함과 신성함은 물론 100(百)이 갖는 온전한 수에 대한 의미도 가진다. 수수경단은 부정을 막고 부정살을 없애는 주술적인 뜻이 있다. 수수는 붉은색이므로 붉은색이 귀신을 물리친다는 생각에서 나온 주술행위이다. 또 수수는 목숨 수(壽)자가 둘씩 들어서 수명이 길기를 바라는 뜻에서 수수떡을 해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절미는 단단하게 자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은 백일 떡을 받은 이웃집에서는 아이가 장수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쌀, 실, 돈을 답례로 보낸다. 이 실을 아이의 목에 길게 걸어 주는데, 이것은 실처럼 끊임없이 길게 장수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울러 이 날에는 갓난아이의 외할머니가 포대기를 선물한다. 이것은 갓난아이가 스스로 목을 추수릴 수 있기 때문에 업고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 첫돌
돌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을 일컫는다. 이 날에는 아이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하는데, 이를 돌잔치라고 한다.
돌상을 차리기 전에 출산, 세이레, 백일 등에 행하는 것과 같이 아이를 점지해준 삼신할미에게 치성을 드린다. 치성을 드릴 때는 흰밥과 미역국 그리고 정화수로 삼신상을 차리고 아기 시루라고 하여 시루떡을 상 옆에 놓는다. 치성을 드릴 때 쓰인 떡은 나가면 아이의 복이 줄어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족끼리만 먹는다. 삼신상을 차려 놓고 치성을 드릴 때는 남자는 참석하지 않고, 할머니나 산모가 드리며, 두 손을 비비고 기원하는 말을 하면서 절을 되풀이해서 한다. 이렇게 치성을 드리는 것은 아이를 점지해 준 삼신에게 감사하고, 삼신의 초인적인 능력에 힘입어 나쁜 인연을 끊고, 앞으로 아이의 무병장수와 복록을 누리도록 보호해 달라는 데 목적이 있다.
돌이 되면 여러 가지 빛깔의 화려한 옷을 만들어 아이에게 입히는데, 이를 '돌복'이라고 한다. 아들일 때에는 연둣빛 또는 색동저고리와 보랏빛 바지를 입히고, 금박이나 은박을 입힌 남색 조끼와 색동마고자, 금박이나 은박을 입힌 전복(戰服), 다홍색 띠, 색동두루마기, 복건, 수를 놓은 누비버선과 복주머니 등을 마련하여 입힌다. 딸인 경우에는 색동저고리와 진분홍이나 다홍색 치마를 입히고, 금박이나 은박을 입힌 조바위, 노란색 단속곳, 연둣빛 마고자나 남색 쾌자, 수를 놓은 버선, 수를 놓은 복주머니와 노리개 등으로 차려 입힌다. 복주머니는 돌 주머니라고도 하며 앞뒤에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목숨 수(壽)자나 복이 많기를 바라는 복 복(福)자를 수놓고 돌띠를 길게 하여 허리를 한 바퀴 둘러서 매어준다.
돌상이란 돌이 된 아이를 축하해 주기 위하여 차리는 상으로서 주로 떡과 제철 과일을 주로 차리며, 12가지가 넘게 차린다. 떡은 주로 백설기, 수수경단, 인절미, 무지개떡, 계피떡 등을 얇은 쟁반이나 큰 접시에 듬뿍 담아 놓는다. 과일은 그대로 깨끗이 씻어 한 접시에 9~10개를 네 개씩 한 줄로 하고, 그 위에 한두 개를 더 올려놓는다. 쌀은 돌상의 앞 가운데에 수북하게 담아 놓고, 그 위에 실타래를 놓는다. 이 밖에도 붓, 먹, 종이, 책, 활, 실, 돈, 대추(아들인 경우)와 반 토막 붓, 먹, 종이, 실, 대추, 면화, 자, 부젓가락(딸인 경우) 등으로 올려놓는다. 이처럼 차린 돌상을 대청이나 방에 돗자리를 깔고 놓은 다음 돌을 맞은 아이가 서거나 앉을 자리에는 방석을 깔아 놓는다.
그런 다음에 돌쟁이가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싶은 물건을 돌상 위에서 집게 한다. 이것은 돌잡히기라고 하는데, 돌쟁이의 장래를 점치는 가장 흥미가 있는 풍속이다. 이 때 아이가 붓, 책, 먹 등을 먼저 집으면 공부를 잘 할 것이며, 돈이나 쌀을 집으면 부자가 될 것이며, 활이나 화살을 집으면 무인이 될 것이고, 실을 집으면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돌에 행하는 의례와 차리는 음식 및 아기의 옷 등은 모두 수명의 장수와 액을 물리고 복이 오기를 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돌을 치른 이후의 의례는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 있고,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는 풍속이 지금도 전한다. 최근 생일에는 떡 대신 서양식의 케이크에 촛불을 불어서 끄는 형식이 유행하다가 케이크 대신 떡시루에 촛불을 켜는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아울러 가족과 직장의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친화감을 조성하던 예전의 돌잔치는 번거로움을 핑계로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이를 대신하여 호텔이나 음식점을 빌어서 호사스럽게 잔치를 하는 세태가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2. 성년의례
성년의례는 소년,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으로 진입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는 통과의례이다. 성년식을 치름으로서 불완전한 단계로부터 완전한 단계로 승격하며, 가족의 일원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자격을 획득하고, 남녀의 성(性)이 분명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고유한 성년식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절차가 어떠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단군 신화, 고주몽 신화, 혁거세 신화 등에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의 동굴 속 격리는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입사의식의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주몽 신화에서 유화를 격리시키고 하백이 유화의 주둥이를 잡아당겨 닭의 부리처럼 만들었는데, 금와왕이 그것을 잘라 버린 일련의 행위들은 성년식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부리를 자르는 의례는 박혁거세의 신화에도 보인다. 왕비 알영 부인이 용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났을 때 부리가 있어 알내에서 씻으니 부리가 떨어졌다고 한 것은 유화와 마찬가지다. 유화와 알영부인의 이야기가 모두 혼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 부리가 떨어진 사건은 성년식과 혼인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단군 조선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김교헌의 『단군민사』에서 “고대 조선 사람은 흰 비단으로 만든 띠와 검은 관을 쓰고, 부여의 대가들은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사람들은 새 깃털을 장식한 조우관(鳥羽冠)과 복두를 썼고, 백제 역시 새 깃털로 장식한 조라관(鳥羅冠)을 썼으며, 고구려 사람들은 책()이라는 모자를 쓰고 절풍을 붙였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았으며, 선비는 새 깃털 두 개를 더 꽂았다고 하였다. 고려 광종 16년 봄에 왕자가 원나라식의 복례(服禮)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성년의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 때 이규보는 그와 친분이 있는 이가 관례를 올려야 할 나이임에도 관례를 올리지 못하고 죽게 되자, 애도하는 시를 남겼는데, 이 당시에 관례가 보편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처녀와 총각들은 댕기를 땋아서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관례와 계례를 치르면 관을 쓰는데 백성은 무늬 없는 검은 모자를 즐겨 썼다. 부인들은 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드리우고 천으로 묶었으며, 작은 비녀를 꽂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오례의(五禮儀)』의 「가례편(嘉禮篇)」에 왕세자 관의(冠儀)와 함께 문무관 관의를 제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려 때 왕자 원복례의 전통을 이은 관례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는 관례를 치르지 않은 자제에게는 입학과 혼인 및 벼슬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선왕의 제도를 외복해야 한다며 관례를 중시하기도 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올릴 수 있다.(男子年十五至二十皆可冠)”고 되어 있으며,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5세에 관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무렵부터 남자의 생식기능이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관례의 나이를 고정시키지 않고 15~20세로 한 것은 당사자의 환경에 따라 결정짓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조혼 풍속이 생기면서 10세를 전후해서 관례를 치르는 폐단이 있었다. 결국 혼례를 빨리 치르려고 관례를 한꺼번에 치르다 보니 나중에는 관례와 혼례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례를 하면 총각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리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관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는 혼례를 바로 치르지 못할 형편인데다가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뒤따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례와 계례를 치를 때 땋아 내렸던 머리를 걷어서 얹게 되므로 ‘머리를 얹는다.’는 말을 쓰는데, 후세에 혼례와 혼합되어 혼례를 치르기 직전에 관례를 치르므로 ‘머리 얹는다.’는 말은 혼례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이처럼 관례가 정착된 것은 유학이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예기(禮記)』와 주희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서 관례가 시행되고, 그것이 근세에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은 관례가 사라졌으며, 성년의례를 부활한다고 해서 고례를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투를 틀어 올릴 수도 없고, 관을 쓰고 다닐 형편도 못된다.
1) 관례(冠禮)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보면, 관례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남자의 나이 15세에서 20세까지 모두 관례를 할 수 있다. 반드시 부모의 상이나 1년간 복을 입는 기년상(期年喪) 이상의 상복이 없어야 행할 수 있다. 아홉 달 동안 상복을 입는 대공상(大功喪)에서는 아직 장례를 지내지 않았으면 역시 행할 수 없다. 위에서와 같이 금하는 조건이 없으면 15세에서 20세가 되는 기간에 날을 정해서 관례와 계례를 치른다. 대개 정월달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년례가 어떤 면에서 인생의 출발이며, 정월이 1년의 시작이라는 데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관례나 계례를 치르려면 먼저 식에 필요한 물품과 절차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관례를 할 때는 옷을 세 번 바꾸어 입어야 한다. 첫 번째가 어른의 평상복이고, 두 번째는 어른의 출입복이며, 세 번째는 예복이다. 이에 필요한 옷과 댕기를 땋아 내렸던 머리를 상투를 틀어야 하므로 가위, 빗, 댕기, 동곳, 모자, 갓, 술상 등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관례를 집행하는 데 일할 사람을 정한다. 먼저 주인은 관례를 할 사람의 친권자로서 가장 어른인 조부가 있으면 조부가 주인이 되고, 아버지, 큰 형의 순으로 정하며 이와 같은 친권자가 없으면 문중에서 어른이 주인이 된다. 또 빈객이 있어야 하는데, 빈객은 관례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주례지이다. 주인의 친구나 관례를 하는 사람의 스승 가운데 학문과 덕망이 있고 예를 아는 사람이 한다.
관례의 절차는 3일 전에 주인이 사당에 고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조상의 위패 앞에 간략한 제수를 차리고 ‘누구의 아들(손자) 누가 언제 관례를 행합니다.’라고 축문을 읽어 고한다. 하루 전날 관례를 주례할 빈을 모셔 온다. 당일에 일찍 관모와 의복과 예식에 필요한 기두들을 벌여 놓는다.
첫 번째 의식은 어른의 평상복을 입는 초가례를 행한다. 관자의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운 다음 주례가 축사를 읽고 치포관과 복건을 씌운다. 이때 읽는 축사는 어른이 되었음을 축하하고 어른으로서 덕을 따르라고 타이르는 내용 즉 “좋은 달, 좋은 날을 가려서 비로소 어른의 옷을 입히니, 너는 이제 어린 마음을 버리고, 어른으로서 덕을 좇아 오래도록 장수하며 행복을 누릴지어다.”라고 축사를 읽는다. 이 축사가 끝나면 관자는 방으로 들어가서 어른의 출입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두 번째 의식은 재가례라고 한다. 관자에게 갓을 씌워 주고 축사를 한다. 이때의 축사는 출입시에 거동을 의젓하게 하고 복을 누리라는 당부를 한다. 즉 “좋은 달, 좋은 때 너는 어른의 출입복을 입었으니 삼가 너의 거동을 의젓하게 가질 것이며, 너의 덕을 더욱 삼가 높여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큰 복을 누릴지어다.”라고 축사를 한다.
세 번째 의식은 삼가례로 어른의 예복을 입는 절차이다. 이때는 복두 또는 유건을 씌워 준 뒤에 “성년이 되는 해 아름다운 날에 너는 이제 어른의 옷을 다 갖추었다. 동기간에 우애하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덕을 빠짐없이 이루어 건강하게 오래도록 수를 누려서 하늘이 주는 경사를 모두 받을지어다.”라는 축사를 한다.
이어서 주례자인 빈객이 관자에게 술을 따라 주고 집안의 식솔들이 부를 자(字)를 지어 준다. 이것은 어른이 되었으니 술 마시는 예법을 가르치는 초례(醮禮:술을 땅에 세 번 조금씩 붓고, 천지신명에게 어른으로서 서약)절차이다. 이때도 “술은 맛이 좋고 맑으며 의식에 드리니 향기로우니라. 절하고 받아서 제서 지내고 마실지니라. 술을 마시는 데는 너의 분수에 맞아야 하느니 지나쳐서 몸을 해쳐서는 아니 되느니라. 건강을 잊지 말고 조심할지어다.”라는 내용의 축사를 한다.
자(字)를 지어 주는 것은 어른이 되었으므로 부를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본명은 존귀하게 여겨 아무나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관례를 행하기 전까지는 어릴 때부터 부르던 아명(兒名)으로 불렸고, 관례를 행한 이후부터는 집안에서 자(字)로써 호칭하였다.
관례가 끝나면 어른의 세계에 신참하는 신고를 하는 예를 행한다. 먼저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고하고 마을 어른들을 초청하여 술과 안주로 대접한다. 이때부터 주고받는 말투도 바뀌어 ‘해라.’가 아닌 ‘하게’, 또는 ‘하시게’ 등의 표현을 쓴다. 관례를 치르고 나면 곧바로 외모와 말투에서 어른의 대접을 받으니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관례의 중요한 절차인 초가례, 재가례, 삼가례의 절차를 행할 때 옷을 입었다가 벗고, 관을 썼다가 벗는 절차가 10여 차례나 되므로 관복, 난삼, 대, 화, 조삼, 심의, 청포, 대대, 복건, 초립 등을 준비하는 비용 또한 매우 컸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오면 관례를 생략하거나 관례를 치를 경우라도 삼가례의 절차를 밟지 않고 한꺼번에 망건, 복건, 초립을 쓰며 옷도 관복이나 도포, 두루마기 등 있는 대로 편의에 따라 착용했다고 한다.
1900년대 초에 관례를 치렀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초가에 복건과 심의를, 재가에 사모와 관대를, 삼가에 초립과 도포를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초가에 복건과 심의, 재가에 복두와 난삼, 삼가에 사모와 관대를 착용했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초가는 성인됨을, 재가는 진사(進士)를, 삼가는 벼슬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역식관례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며, 오늘날은 복고풍으로 성균관에서 상징적, 시범적으로 ‘성년의 날’을 택하여 관례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관례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 배경은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관혼상제의 사례 중에서 관례의 비중이 다른 의식에 비해서 그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조혼풍속으로 인하여 10세 전후에 혼례를 치르다 보니 관례와 혼례를 한꺼번에 치러야 하게 되고, 관례는 혼인의 전제가 되는 부수적인 의식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셋째,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상투를 틀고 관을 쓸 일이 없어진 데서 자연히 관례의식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관례의식은 주로 양반층에서 행하던 의식이었고, 서민층에까지 보편화된 의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관례는 그 존재가 미미하게 이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 상으로 상례나 혼례처럼 절대적인 의미를 띠고 국민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 계례(禮)
계례의 경우는 관례보다 절차가 간소하다. 조선조 유교사회에서 남녀에 대해 차별을 두었던 것이 이런 부분에도 나타난 결과이다. 남자의 관례가 동곳을 꽂고 상투를 틀어올리는데 반하여 여자의 계례는 동곳 대신 비녀를 꽂아서 머리를 얹는 것이 다르다. 복색도 배자(背子)라고 해서 소매가 없는 두루마기 같은 덧옷(속칭 쓰개 옷)을 준비하는 것이 고작이다.
먼저 계례를 치룰 계자가 주례에게 4번의 예(절)를 드린다. 수모가 계자의 머리를 빗겨서 올리면, 주례는 가계축사(加祝辭, 비녀를 꽂고 어른의 옷을 입힌 다음 어른스러워지기를 당부하는 축사)를 하고 머리에 비녀를 꽂아준다. 그러면 계자는 잠시 방으로 들어가 성인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면, 주례는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계자(字, 이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항시 부르는 이름인 당호(堂號)를 지어 주는 것)를 내려준다. 그리고 수모가 다례상(茶禮床)을 주례 앞에 놓으며, 관례의 초례의식과 같이 다례의식을 행한다.
이와 같은 여자의 계례는 성년식의 절차인 관계로 대부분 혼례를 치른 다음 시어머니가 계레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으로 정착되었다. 즉 신행이후 시부모에게 예를 올리는 현구례(見舅禮) 즉 폐백이 끝나면 시어머니는 신부를 대청에 앉히고 갖은 예물을 준비하고 관례인 계례를 시킨다. 시어머니가 빗치개로 머리를 갈라놓으면 수모는 이성(二姓)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는 뜻에서 머리를 두 줄로 땋아 쪽을 진다. 이어서 시어머니는 연두 곁마기 다홍 겹치마 열두 폭 대무지기, 여덟 폭 풍무지기, 여섯 폭 연봉무지기, 모시 분홍 속적삼, 노랑 속저고리, 저고리 삼적과 당의 원삼 등을 신부에게 내주면서 입히고, 예물로 주는 노리개 대삼작과 소삼작을 차고 처음으로 낭자족두리를 하고 어른께는 원삼을 입고, 동행에는 당의를 입고 평절을 한다. 이렇듯 계례절차가 끝나면 시댁에서는 신부에게 큰상을 차려준다. 이러한 의식은 여자의 경우 혼례를 치러야만 성인이 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3. 수연(壽宴) : 회갑례(回甲禮)
1) 회갑례(回甲禮)
회갑례는 유가의 예법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는 들지 않으나. 중요한 일생의례의 하나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생활의 리듬으로 삼아 온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갑자가 시작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이 35세 정도 밖에 되지 못했던 시절에 60세를 넘긴다는 것은 크게 복을 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회갑은 60년 만에 간지(干支)가 돌아온다는 뜻으로 주갑(周甲) 또는 환갑(還甲) 그리고 열 십(十)자가 여섯 번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화갑(華甲)이라 부르며, 이날의 잔치를 회갑잔치, 수연(壽宴)이라고 말한다. 장성한 자녀들이 폐백을 드리며, 큰 잔칫상을 준비하고,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헌수배례(獻壽拜禮)도 올린다. 그리고 친척과 친지는 물론 부모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라도 사갑제(死甲祭)를 지내고,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추모하기도 한다.
회갑날은 큰상을 차린다. 우리나라 풍속에 큰상을 차리는 경우는 혼인과 회갑 때이다. 회갑 때는 혼인 때보다 더 큰상을 괴어서 올리는데, 요즈음은 회갑 때만 큰상을 차리고 있다. 상에 음식을 괴는 높이는 5치, 7치, 1자, 1자 1치, 1자 5치처럼 홀수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홀수는 양의 수이고, 신(神)의 수이며, 짝수는 음의 수이고, 귀(鬼)의 수이기 때문이다.
큰상을 차리는 음식과 방법은 집안의 형편과 가풍, 지방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본이 되는 음식은 대개 있으며, 형편에 따라서 항목별로 어느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이상의 것을 차린다. 즉 큰상 차림은 다식(흑임자, 송화, 녹말, 밤 등), 건과(대추, 호도, 은행, 잣, 곶감 등), 생과(사과, 배, 밤, 감 등), 정과(청매, 연근, 모과, 생강, 유자 등), 유과(약과, 강정, 빈사과 등), 편(흰떡, 꿀떡, 찰떡 등), 당속(팔보당, 졸병, 옥춘당 등), 포(어포, 문어포, 전복포, 육포, 건적포 등), 적(쇠고기 적, 닭고기 적, 화양 적 등), 전(생선적, 갈남, 고기전), 초(전복초) 등을 다섯 치나 한 자 높이로 괸다.
이상과 같이 차리는 상을 망상(望床)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먹기 위해서 차리는 상이 아니라 보기에 좋도록 괸 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큰 상 옆에 실제로 먹을 수 있도록 차리는 곁상이 따른다. 이 상을 장국상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신선로, 편육, 식혜, 나박김치, 초간장, 화채, 구이, 편청 등을 차린다. 옛날에는 가세의 정도에 따라서 망상을 명 자 몇 치로 괴었는가를 따졌다. 서로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서 상을 괴느라고 지나친 비용을 들이는 허례허식의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2) 기타 수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장수를 누리는 것은 부러움을 사는 일이고, 축복을 받는 일이 분명하다. 고려시대부터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의 모임인 기로회(耆老會)라는 것이 있었다. 나이 70세가 되는 것을 기(耆)라 하며, 이는 나이가 많고 덕이 두텁다(年高厚德)는 뜻이고, 나이 80세를 노(老)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것을 물려받아 기로소(耆老所)라는 연로한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한 기구가 있었다. 기로소에 등록된 문신들을 위해서 매년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큰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이는 음양사상에 따르면 홀수를 ‘양(陽)의 수’라 하고, 짝수를 ‘음(陰)의 수’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긴 데서 유래되었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 삼짇날(3월 3 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를 길수로 여기는 기수민속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양의 수가 중첩된다는 의미에서 다 중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삼짇날은 봄이 오는 회춘의 시절이고, 중양절은 양이 겹치고 겹치는 중양(重陽) 또는 중광(重光)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나이가 많을수록 잔치는 계속되는데, 회갑 이듬해를 진갑(進甲)이라 하여 돌잔치처럼 잔치를 베풀기도 한다. 그리고 칠순(七旬, 팔순(八旬), 구순(九旬)에도 잔치를 베푼다. 칠순은 일명 고희(古稀), 희연(稀宴)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예부터 사람은 일흔까지 살기 힘들다.(人生七十古來稀)’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71세를 ‘망팔(望八, 팔십을 바란다.)’, 81세를 ‘망구(望九)’, 91세를 ‘망백(望百)이라고 부르며 장수를 축수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에서는 66세를 미수(美壽), 77세를 희수(喜壽), 88세를 미수(米壽), 99세를 백수(白壽)라고 칭한다. 이것은 일종의 파자(破字)의 의미이다. 즉 ‘아름다울 미(美)’를 파자하면 ‘六+六’이 되어 66세, ‘기쁠 희(喜)’를 초서로 쓰면 ‘七+七’이 되어 77세, ‘쌀 미(米)’를 파자하면 ‘八+八’이 되어 88세, ‘흰 백(白)’은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빼면 99가 되어 99세로 각각 쓰는 것이다. 이것들 모두는 파자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서 장수를 좋아하는 일본 즉 일본식 조어를 그대로 들여와 쓰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연세가 높이신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많이 하는 것은 늙은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려는 것이 큰 목적이기도 하다. 또한 자손들이 가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구심적 역할을 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효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잔치를 통해서 혈족간의 유대를 강화함은 물론 마을과 이웃 간의 유대도 강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력이 쇄약해진 노인들이 갖기 쉬운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북돋우는 역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