壹蓑正音雅言學會 代表 / 本聯合會 指導委員
兄弟의 妻들 끼리 ‘同壻’ 호칭은 망발
尊敬하는 崔선생님. 필자는 2003년 6월 本誌 제47호 誌上의 崔선생님 玉稿 「同壻와 同媤」 主唱을 拜讀하고, 全幅的 贊同者로서 滿腔의 敬意를 올립니다. 왜냐면, 서울지방에서는 최고 知識人도 「姊兄과 同媤」를 모릅니다. 그 證左가 有名했던 TV史劇 「龍의 눈물」 중에서도 閔無疾 兄弟가 뒷날의 太宗인 李芳遠에게 마땅히 ‘자형’ 해야할텐데. 노상 ‘妹兄, 妹兄’ 했습지오.
‘同壻 / 同時’라는 字句도 그리 오래된 熟語는 아닙니다. 왜냐면, 丁茶山 지음의 『雅言覺非』(180年前)에는 ‘제사 / 축리’만 나옵니다. “같은 집에 시집온 부인네 끼리, 즉 兄弟의 妻들 關係詞”로서 ‘妯/ 娌’라고 했습니다. 丁茶山의 說은 ‘兄의 妻’는 ‘姒’, ‘弟의 妻’는 ‘娣’라고 부연했습니다.
한편 한글문헌에는 오래 전부터, ‘동셔 + 이’(동세)가 보이고, 원 틀은 兄弟의 妻들끼리의 호칭이었는데, 처지가 類似한 남자들끼리, 즉 같은 집에 장가온 남자들끼리(兄夫와 弟夫끼리)에도 準用하여, ‘남진동세’(‘세’는 두점친 자)라고 한 出典은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漢字로 ‘同壻 / 同媤’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開化期 以後에 유독, 合理性이 考慮된 새用語로 登場했던 것이라고 推定할 수 있겠습니다.
1990년대에 조선일보사에서 敬語法과 親族呼稱, 指稱 用語를 再審議하여 連載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필자는 ‘姊兄과 妹夫’, ‘同壻와 同媤’의 區分 確立할 것을 提言했습니다. 그러나 著名한 국어학자, 漢學者들로 구성된 諮問위원단도 ‘자형’만은 採擇하고, ‘同媤(동시)’는 묵살했습디다. 國立國語院의 젊은 학자들은 ‘자형’마저도 끝내 부인한 상태입니다.
妹兄은 年高者 특별대우의 敬稱
知識層의 參照 學殖이 이토록 淺薄합니다. 慶北지역에도 ‘妹兄’이란 用語야 있습니다. 다만, 그 用處가 特殊했습니다. 보통은 여동생 남편과는 서로 許交하는 ‘남매간’ 터수이지만, 어떤 경우는 妹夫(弟妹)가 손위 처남보다 동띄게 年高로, 5~6세나 年上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 손위의 처남이 ‘동생’ 뜻이 짙은 ‘ 제매 / 매부’라 부르기가 면구해서 年上者 대접하는 특별호칭으로 ‘매형’한 것이 특수 用法입지오, 일족간에도 行高(항고)보다는 年高가 優先하는 禮法입니다. 가정교육이 붕괴되고, 都市化 核家族化 풍조로 周禮分別이 傳統되지 못한 탓으로, 올바른 用語가 紊亂타락된 現實입니다.
私事이야기오나, 필자에도 환갑 넘은 姪女(舍伯의 딸)가 있는데, 望八의 叔父를 보고, ‘삼촌’이라고 호칭하니, 매우 忽待感을 느낍니다. “본 바 없는 말씨”라고 핀잔주었습니다.
‘同媤 = 동시’의 典據
그런가하면, 지난 겨울호 「대구달성徐氏(京派)大宗報」에 親族呼稱일람표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형제의 처들끼리 호칭 / 지칭’으로 ‘同媤(동시)’가 실려있었습니다. 崔선생님 說이 贊同된 典據가 될 것입니다. 명색이 連3世 大提學을 배출한 ‘朝鮮 3名門’에 꼽히는 宗報이니, 公信力없다고는 못할 줄 압니다.
그리고, 2008년 2월 103호의 玉稿 「放送과 大衆言語」 중에서 ‘어머니 사랑합니다’의 不當性 告發과 많은 熟語의 長短音 紊亂지적 또한 緊要한 糾正이었습니다. 위의 啓蒙功勞를 다시 讚揚합니다. 그런데, 同誌 2008년 4월 105호 所載의 玉稿인 「世와 代를 정리…」 題下의 論議 結語에서, <“世와 代의 計數方式” 改定하기를 成均館과 국립국어원에 要請> 하셨습디다. 하오나, 아직 아무런 呼應이 없는 듯합니다. 혹은 永遠히 度外視당할지도 모를 듯 합니다.
그래서는 敍上의 有功學者에 대한 禮遇가 아닐 줄 생각되옵기에, 僭濫하나, 或 참고가 될까하는 노파심에서 鄙見을 피력합니다. 먼저 <世와 代는 同一하다>한 崔泰淵 씨 說을 以下에는 ‘최설’로 略稱 하오니 海諒주시옵기를 바랍니다. 崔선생님의 提言에 따라서 假定하면,
“‘최설’은 眞理이고, ‘世’와 ‘代’는 다르게 헤아린다 하는 譜學者들과 成均館이 歪曲說이요, 不合理하니 고쳐야한다”하는 重大한 命題宣布입니다. 이를 보고도 온 江湖에서 黙黙 不呼應이면, 이 또한 正常이 아니라고 해야하겠습니다. 아무도 相對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最高眞理 命題라서 좁은 知識으론 접근 못할 高尙難解로 보았던가, 아니면, 完全히 一顧의 의미도 없다고 ‘黙殺 當함’이거나, 둘 中의 하나이겠습니다. 未嘗不, 好誼的인 필자의 拙見도 ‘최설’에 언뜻, 同調하기가 어렵습니다. 최씨의 前記 啓蒙提言 등 卓見으로 보아, 合理性 完璧主義 性向이신줄로 여겨집니다.
하오나, 지금 現在 ‘최설’로 보면 ‘世=代’는 絶對同一物이라고 굳게 확신하시면서도 그것이 眞理인 所以然 立證이나, 普遍 妥當性도 學問的體系性도 아무런 뒷받침이 없습니다. 이래서는 旣成 權威를 克服은커녕, 對抗도 안 되는 것이 學問의 길입니다.
하기야,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가 그 시대의 眞理인 天動說을 뒤엎을 地動說로써 敎皇에 對抗하다가, 종교재판에서 굴복하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自轉 / 公轉) 돌고있다”고 獨白했답니다. 새 眞理는 理性的 論理로 實證하는데도, 좀처럼 認定받기 어렵습니다. 古今이 같은 陣痛입니다. 지금 상식으로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萬有引力의 法則을 발견했다고 다들 알고있는데, 누가 감히 이 眞理에 異議를 달겠소이까? 그렇지만, 뉴턴도 애초에는 ‘케플러’의 연구를 歸納하고, ‘일종의 遠達力’으로 간주했고, 그 힘의 源泉은 해명이 없었답니다. 300년 뒷날인 1915년에야 아인슈타인의 一般相對性 理論의 歸結로서 약간 修整되었답니다. 그 탓인지, 量子力學에서는 뉴턴力學을 古典物理學이라고 일컫습니다.
오늘날 人文 社會과학이 自然과학의 方法論에 힘입고있는 現實인 것과 같이, 萬古眞理로 公認받던 法則도 永久不變은 아니라 합니다. 無所不爲의 實定法을 牽制하는 自然法 철학도 現象學的 見地에 서서, ‘言表’문제로 돌립니다. 訴狀이나 法條文의 意思는 當爲나 事實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의미’ 덩어리입니다. 그 말들(言語記號)이 指示하는 對象槪念도 意味(뜻)表現의 ‘말’입니다.
生物의 靈長인 人間은 限定된 ‘日常言語’로 수십만 單語를 操作하고, 森羅萬象을 象徵 의미합니다. 日常語 속에서 多義性을 濾過해서 專門用語나 學術語를 嚴定하고 되도록 ‘한가지 뜻’만 焦點化하려 합니다. 위트겐슈타인의 論理實證주의를 分析철학이라합니다. 어떤 課題를 걸고, 어느 것이 眞實인가 궁리하다보면, 결국 그 對象의 意味를 限定, 明確化해야 할 語文을 갖고 意味分析으로 빠집니다. 이토록 言語란 것은 深奧微妙한 것인데, 말소리만 적자는 한글전용론자가 얼마나 얄팍하고 유치한 사람들입니까?
‘代’의 族譜上 특수 用法은 관습법
‘世와 代’로 돌아와서, ‘兩者는 完全同一物’이라 命題한 ‘최설’에 좀 양보를 청하면서, 잠시 拙見을 한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世가 30년’이라는 典據는 北宋의 邵雍이 出典 嚆矢랍니다. 또한 ‘1代’도 보통 ‘30年間’이라 통칭함도 사실입니다. 흔히 ‘영원한 축복’의 뜻으로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다”같은 말을 잘 듣고 쓰곤 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30년’이란 共通點에 홀리기 쉽지만, 嚴正히 보면 ‘代’에는 또 다른 더 ‘큰 뜻’이 元 主人입니다. 첫째 ‘代替 / 交替 / 交代 / 자리바꿈’의 뜻이나 ‘代身 / 代理 / 代用’ 등의 의미 要素가 그 本領입니다. ‘世代交替’란 祖父가 父親에게 世傳하는 것이며, 父가 子에게 世傳相續하는 그 ‘交替過程’을 ‘한 代’라 셈하는 것이 우리 族譜 = 世譜의 傳來慣習입니다. ‘代’의 ‘30年’ 의미는 極히 곁가지로서 막연한 관용이지, 文獻的 典據도 없습니다. 始祖를 第1世라 하며, 子子孫孫에 序數로써 世數매김함이 慣例입니다.
윗대로는 ‘世와 世’의 ‘사이’를 ‘代數’로 셈하고, 아랫대로는 當世의 사람을 ‘世數’로 表示하는 것이 또한 古來傳統입니다. 그와는 별개로 近代에는 ‘初代 대통령/ 제2代 會長/ 제17代 國會議員’ 등의 用例가 흔하니, ‘제20世孫’하는 용례와 같은 類型입니다. 따라서 ‘世와 代’를 ‘동일물’로 하자는 ‘최설’ 論理가 發想되는 것이 當然한 側面이 있습니다. 하오나, 世上事는 例外란 것이 있습니다.
世界文化중에도 獨步的인 우리 族譜文化는 獨特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안에서 특히 族譜上에서는 世와 代는 別個槪念인 것이 普遍妥當하니, 眞理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누구나 <傳統>을 尊重하고 자랑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各自는 그 傳統慣例 속에서 父母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各其 自己意思와는 無關하게 運命的으로 出生받은 존재이니, 우리 後生들은 先人들의 慣習傳統은 받들고 따라야할 當爲 즉 solen입니다. 여기에는 apriori 演繹(연역)도 論理的 合理性의 論爭이 介入할 분야가 아닙니다. 좀 柔軟한 思考方式으로, 倫理學的 客觀存在的 發想에 轉向해보시기바랍니다.
‘言表’의 多側面과 實際와의 照應
쉬운 例示로 하면, ‘世’는 ‘時刻’이고, ‘代’는 ‘時間’에, 植木算에서 ‘世’는 ‘나무’에, ‘代’는 ‘나무와 나무사이 거리’에 비유됩니다. 요즘 ‘realtime’을 ‘實時間’이라고들 하고있는데, ‘眞刻 / 實時刻’이라야 嚴正한 번역입니다. 1970년대에 종래 ‘現地時間’이라 부르다가, ‘現地時刻’으로 고치는데는 많은 陣痛이 따랐습디다. 그만큼 우리 日常言語는 두루뭉실한 면이 많습니다. 사실, 指示記號가 다르면서도 ‘完全同一物’인 경우도 더러 있습지요. 地球儀의 동날 180도와 서날 180도, 새벽의 샛별과 저녁 때의 明星(長庚星), 12시 20분과 오후 0시 20분 등은 이름(外形 = 能記 = signifiant)은 달라도 그 內容(의미 = 所記 = signifie)은 ‘完全同壹物’입니다. 또는 ‘문닫고 들어오너라 / 七顚八起’라는 말도 냉철히 따지면 모순된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世와 代’가 別個개념인데, ‘철저히 同一物’로 統括정리하고자 하시는 崔선생님의 完璧性向 氣分은 理解합니다마는, “傳統오래인 慣例의 不可侵”인 것을 考慮 海諒하시기 勸告드립니다.
傳統家禮에서 高祖까지 忌祭祀받드는 일을 ‘4代 奉祭祀’라 이르는 것이 일반 常識이고, 또 健全한 사회 通念으로 普遍妥當입니다. 그뿐더러 不可侵의 例證도 있습니다. 東方禮義之國인 朝鮮國 太祖 李成桂의 易姓革命을 美化한 『龍飛御天歌』 첫머리에 “海東에 六龍이 날으샤…”한 語句를 再顧하십시다. 編撰人인 世宗의 立場에서 윗대인 太宗과 太祖와 그 위의 4代祖 즉 ‘穆祖 / 翼祖 / 度祖 / 桓祖’ 등 여섯 분을 이른 것입니다. ‘李成桂의 高祖까지 즉 4代祖’이지요. 이 命題는 오늘날 누구도 고칠 수 없는 神聖不可侵의 權威일 것입니다. 우리는 哲學공부할 때, 眞理與否를 糾明하는 한 方法에 ‘實際에 照應’은 有力한 진리탐구법이라고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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