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관혼상제

[스크랩] 四禮( 冠.婚.喪.祭)등 고유용어

장안봉(微山) 2014. 2. 14. 00:44

四禮( 冠.婚.喪.祭)고유용어

 

○ 관례(冠禮) 용어

 

 

○ 혼례(婚禮) 용어

 

 

○ 상례(喪禮) 용어

갈장(渴葬), 걸방석, 경야(經夜), 계상(稽顙), 계장(繼葬), 계절(階節), 계체석(階砌石), 고복(皐復) 고석(鼓石), 곡비(哭婢), 곡장(曲墻), 과장(過葬), 권장(權葬), 권조(權兆), 궤연(几筵), 굴건(屈巾) 금정(金井), 나장(裸葬), 노장(路葬), 단갈(短碣), 대상(大祥), 도장(倒葬), 두건(頭巾), 만가(輓歌) 만장(輓章), 망주석(望柱石), 면례(緬禮), 묘갈(墓碣), 묘계(墓界), 묘막(墓幕), 묘비(墓碑), 묘지(墓誌), 묘표(墓表), 반장(返葬), 반함(飯含), 배계절(拜階節), 복제(服制), 봉분(封墳), 부고(訃告)달아매기, 분묘(墳墓), 불삽(黻霎), 비각(碑閣), 비두(碑頭), 비명(碑銘), 비신(碑身), 사성(莎城), 상석(床石), 삼년상(三年喪), 삼부팔모(三父八母), 삼상(三殤), 상복(喪服), 상향대곡(相向對哭), 석등(石燈), 석물(石物), 수상장(樹上葬), 수장(水葬), 순장(殉葬), 순전(脣前), 신도비(神道碑), 영역(塋域), 예장(禮葬), 완폄(完), 용대석(龍臺石), 용미(龍尾), 우제(虞祭), 위패(位牌), 장의(葬儀), 재각(齋閣), 정자각(丁字閣), 제청(祭廳), 점석(苫席), 준석(樽石), 투장(偸葬), 평장(平葬), 허장(虛葬), 향로석(香爐石), 호석(護石), 혼유석(魂遊石), 화장(火葬), 환장(還葬)

○ 제례(祭禮) 용어

감실(龕室), 벽감(壁龕), 신주(神主), 사당(祠堂), 묘지(墓誌), 강신(降神), 참신(參神), 초헌(初獻) 고위(考位), 비위(妣位), 아헌(亞獻), 종헌(終獻), 첨작(添酌), 삽시(揷匙), 합문(闔門), 계문(啓門) 헌다(獻茶), 철시복반(撤匙復飯), 사신(辭神), 철상(撤床), 음복(飮福), 홍동백서(紅東白西), 생동숙서(生東熟西),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포우혜(左脯右醯)


● 관례(冠禮)에 대한 고유 술어 풀이

1) 복두(幞頭)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던 관의 한가지로 모양은 사모(紗帽)와 비슷하고 턱이 지지 않고 위가 편평하여 사각으로 되어 있다. 이 복두는 당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비단으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주저앉아 불편하였으나, 나중에는 속에 나무를 넣어 반듯하게 만들어 모양이 쉬이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부터 이를 수입하여 사용했고 고려 때에는 송나라의 복두를 수입해 사용했다.

2) 복건(幞巾)
머리에 쓰는 건의 한 가지로 헝겊으로 만든다.복건의 위는 둥글고 뾰족하여 양옆에 끈이 달려 뒤로 매게 되어 있고 뒤에 넓은 자락이 길게 늘어진다. 원래 겨울에는 흑단(黑緞), 여름에는 흑사(黑紗)로 만들어 썼으나 근래에는 흑갑사(黑甲紗)만으로 사시에 사용한다. 옛날 중국에서 관을 대신하여 후한(後漢) 때부터 유행되었다. 진.당대에는 은사(隱士)와 도인(道人)의 아복(雅服)으로 쓰이다가 뒤에는 유자(儒者)간에 널리 유행했다. 우리나라는 선조 때 유생들이 많이 썼고, 또 관례 때에도 썼으며 오늘날에는 어린아이들의 돌잔치 때 흔히 씌운다.

3) 초립(草笠)
옛날 사족(士族), 서족(庶族)이 쓰던 갓의 일종이다. 또, 관례를 치를 사람이 쓰던 갓으로 모양은 패랭이와 비슷하고 재료는 해안 지방의 특산물인 풀로 만들며 빛깔은 황색이다. 본래 삿갓.방갓.패랭이에서 변한 것으로 삿갓이나 방갓은 아래로 처졌으나 초립은 위로 치솟았다.

《경국대전》에 사족의 초립은 50죽(竹), 서인의 초립은 30죽으로 정하였는데 이것은 양반의 것은 고운 것으로 하고 천인(賤人)의 것은 굵고 거친 것으로 만들게 했던 것이다. 조선말기부터 폐기되었고, 관례한 소년이 쓴 데에서 초립동(草笠童)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4) 난삼(幱衫)
예복으로 과거 때 생원이나 진사에 합격하면 입었다. 녹색 또는 검은 색으로 깃을 둥글게 만든 公服(공복)에 같은 빛깔의 선을 둘렀다.

5) 심의(深衣)
옛날 높은 선비가 입던 上衣(웃옷)과 下裳(치마)가 붙은 채 몸을 휩싸는 옷으로 대게 흰 천으로 만든다. 소매는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선을 두르는데 웃옷은 네 폭이고 치마는 열두폭이다. 심의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유생들이 이것을 先王(선왕)의 法服(법복)으로서 숭상 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유교가 성하던 조선왕조에서는 한때 深衣制度(심의제도)가 儒學上(유학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심의를 입을 때에는 머리에 복건을 쓴다. 고대 중국에서는 심의가 제후의 평복이요, 선비의 朝祭次服(조제차복)이었고, 庶人(서인)에게는 吉服(길복)이었다.

6) 초례(醮禮)
관혼 의식 절차의 하나로서 관례에서는 삼가 다음의 절차이다. 삼가를 끝낸 관자가 나오면 贊(찬)은 잔에 술을 따라서 관자의 왼쪽에 서고, 賓(빈)은 관자에게 읍(揖)하고 오른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술을 마신 다음, 관자 앞에서 남쪽을 향하여 술을 마신 다음, 관자 앞에서 축사를 읽는다.

축사를 들은 관자는 두 번 절하고 남쪽을 향하여 잔을 받는다. 여기에 빈이 동쪽을 향하여 답례의 절을 하면 관자는 무릅을 꿇고 祭酒(제주)로서 땅에 약간의 술을 붓고 맛을 본 다음, 찬에게 잔을 돌려주고 남쪽을 향해 두 번 절한다. 이에 대해 빈은 동쪽을 향해 답례의 절을 하고 관자가 또 찬에게 절하면 찬은 동쪽을 향해 답례의 절을 함으로써 초례를 마친다.

7) 재가(再加)
관례 때, 시가 다음에 치르는 의식 절차로서 冠者(관자)가 정한 자리에 나오면 賓(빈)이 축사를 읽고 贊(빈을 돕는 사람)이 冠(관)과 巾(건)을 벗기면 빈이 관자에게 초립을 씌운다. 그 다음 관자는 방에 들어가 심의를 벗고 靑袍(청포)에 혁대를 두르고 신을 신는다.

8) 삼가(三加)
세 번째 관례 의식, 관자에게 빈이 축사를 읽고 나면 찬이 초립을 벗기고 복두를 씌운다. 관자는 방으로 들어가 청포를 벗고 난삼에 띠를 두르고 목이 달린 신을 신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9) 사례(四禮)
예제에 있어서 관례,혼례,상례,제례를 가리키며, 줄여서 관혼상제고도 한다. 고려말 불교의 타락과 《주자가례》의 전래로 사대부 계층에만 행해지다가 조선왕조에 이르러 불교탄압 정책과 더불어 세종 때에는 불교에 의한 예법을 금지하고 사례를 시행하게 하였다.

10) 빈자관자(賓字冠者)
관례의식 절차의 하나이다. 삼가와 초가가 끝난 뒤 하는 마지막 절차로서 관자에게 자를 지어 주는 의식이다. 자를 받은 관자는 답사를 읽고 나서 절을 한 다음 사당에 재배하고 나와 부모님과 여러 어른을 뵙는다.

11) 댕기풀이
관례를 지낸 뒤 관자가 그의 친구들에게 한턱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당에 고하고 부모와 존장에게 인사를 끝낸 다음, 친구들을 초청해서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베푸는 것을 댕기풀이라고 한다.


● 婚姻(혼인)에 대한 고유 술어풀이

1) 큰 상
잔치 때나 생일, 회갑, 관혼 등 여러가지 경사일에 많은 음식을 차려 주인공에게 대접하는 상을 말한다. 큰상을 차리는 음식의 가짓수와 담는 칫수는 기수로 하여, 음식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油蜜果(유밀과), 茶食(다식), 강정, 糖屬(당속), 炙(적), 편, 편육, 炒(초), 생실과, 건과 등이 대체로 기본이 되는 음식이다.

2) 연길(涓吉)
혼례를 거행할 날을 잡는 일로서 택일하는 것을 말한다. 혼담이 진행되어 합의가 되면 신부집에서 길일(吉日)을 택해 신랑집에 알리는데 이를 연길서라 한다. 연길서의 봉투는 사주와같고 「奠雁何年何月何日納幣隨時先行(전안하년하월하일납폐수시선행)」이라고 쓴다.

3) 서옥(婿屋)
고구려 때 풍습의 하나로서 혼담이 성립되어 약혼을 하면 신부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다 小屋(소옥)을 짓는 것을 말한다. 신랑 될 사람이 해질 무렵 신부와 동숙할 것을 간청하면 신부집 부모는 서옥으로 안내하여 신부와 함께 살게 한다. 이때 사위는 돈과 패물을 내놓으며,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신랑은 처자를 데리고 본집으로 간다.

4) 신방 엿보기
우리나라의 특유한 혼인 풍속의 하나로 결혼 첫날밤에 신랑 신부가 취침하기 전후하여 신부집의 친지들이 신방의 창호지를 뚫고 방안을 엿보는 것을 말한다. 특히 평안북도 義州(의주) 지방에 심했으며 요즈음 신혼여행의 유행으로 도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농촌에서는 이 유풍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풍습은 옛날 早婚(조혼)으로 인하여 女家(여가)에서 신부를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5) 삼불거(三不去)
중국 명대의 기본적인 형법전인 《大明律(대명률)》에 규정된 이혼의 불허 조건이다.
①처가 시부모의 喪(상)을 지켰을 경우
②결혼했을 때에는 가난했으나 후에 부귀한 경우
③이혼했을 경우 여자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이상 세 조건의 경우에는 이혼을 불허하였다. 이것은 중국은 물론 조선왕조에게서도 철저히 이행되었다. 단, 처가 간음을 범하거나 악질이 있는 경우에는 삼불거에 구애되지 않고 이혼하였다.

6) 보쌈
조선왕조 때, 일부 상류층에서 행하여졌던 약탈혼(掠奪婚)의 성질을 띤 악습 중의 하나로 이는 과부의 재가 금지와 과부가 재가하게 되면 그 죄가 자손에게까지 미치도록 국법으로 정한데서 생긴 것이다. 즉 귀한 집 딸이 장차 과부가 될 처지에 놓였을 때에 처녀의 집에서 팔자땜을 시키려고 지나가는 미혼남자를 자루에 싸서 납치하여 그 처녀와 동침을 시킨 후 죽이거나 소문이 나지 않도록 잘 타일러서 보내던 일을 말한다. 이와같이 하면 일단 과부가 된 것 같은 결과가 되므로 과부의 액운을 벗어났음을 믿어 안심하고 적당한 곳으로 시집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7) 방친영(房親迎)
나이 어린 신랑 신부가 혼인하여 3일을 치를 때에 신부가 新房(신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도로 나오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혼인 연령이 높아져 이 풍습이 없어졌다.

8) 민며느리
장차 며느리로 삼기 위하여 어린 소녀(10세 안팎)를 데려다가 길러서 성장하면 아들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삼는 것을 말한다. 집안이 넉넉지 못한 집에서 혼인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경우에 행해지던 제도로서, 보통 여자가 남자보다 어린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 남자집이 여자집보다 부유하다. 東沃沮(동옥저)에서는 데려다 길렀던 여자가 성인이 되면 친가로 다시 보내고 여자집에서 금전을 청구하여 그것이 끝난 뒤에 시가로 돌려보내는 풍속이 있었다. 일종의 매매혼의 유풍으로서 결혼 비용을 적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 같다. 미개 시대에는 여러 민족간에 이 풍속이 성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북 지방에 그 유풍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9) 동성혼(同姓婚)

동일한 성(姓)사이에서 행하던 혼인을 말한다. 흔히 미개사회에서 행하여진 혼인 형식으로서 엔도가미(endogamy)라 하며,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다른 씨족사회와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자연 같은 씨족간에서 통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씨족간 접촉이 있은 후에도 서로 투쟁이 다르게 되고 그 결과 정복족과 피정복족의 관계가 생기게 되면 정복족은 우월한 사회적 지위와 혈연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피정복족과의 통혼을 금지시켰다. 고구려와 백제의 혼인제도에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동성혼이 행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먼저 종실의 동성혼을 금하였고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불취동성(不娶同姓)의 유교사상이 관습화되어 동성혼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0) 동상례(東床禮)
혼례가 끝난 뒤 신랑이 신부집에서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로 이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 왕의지(王義之)가 사위를 구하려고 각 서당을 돌아다니다가 동상(동상)에서 헐벗은 서생을 사위로 삼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다 하며, 또 이조때 권율이 동상에서 공부하는 이항복을 사위로 삼아 동료에게 한턱 낸 것이 예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 관습이 남아 있는 농촌지역에서는 신랑의 양발목을 묶어 천장에 달아 메어 놓고 발바닥을 두드리는 풍속이 있다.

11) 데릴사위
아들이 없는 경우에 딸을 시가에 보내지 아니하고 사위로 삼아 데리고 있다가 성장하면 결혼하면 처가에서 산다. 이 풍습은 예부터 전해져 내려와 壻留婦家(서유부가)나 豫壻(예서)와는 다르다.

12) 대반(對盤)
구식 혼인에 있어서 신랑 신부 또는 후행을 대접하는 사람. 신랑의 대반은 신랑과 나이가 비슷한 집안 젊은 사람이 맡고 신부의 대반은 시누이나 집안의 처녀와 갓 시집온 새댁들이 맡으며, 후행 대반은 나이가 지긋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점잖아 家道(가도)에 손색이 없는 언행과 범절을 지닌 사람을 시킨다.

13) 누이바꿈혼
두 사람의 남자가 각기 상대방의 누이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 풍습은 극히 드물지만 신라시대 신덕왕의 누이가 효공왕의 비가 되고 효공왕이 누이가 신덕왕의 비가 된 예가 있다. 이 같은 혼인은 두 남자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형성요인 있는 듯 하며, 결혼이 성립됨으로써 두남자의 사이는 친구 관계 이외의 인척 관계를 형성해 더욱 친밀한 이중 관계를 맺게 된다.

14) 반보기(中路相逢)
중부 이남에서 성행하던 풍속으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일가 친척 관계의 부인네들이 서로 만나보고 싶을 때, 대게 농한기 때 미리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제각기 음식과 토산물을 가지고 양가의 중간 지점쯤 되는 시냇가나 산마루 같은 적당한 장소를 정하여 함께 하루를 즐긴다. 일반적으로 사돈간의 부인네들끼리 하는데 이는 사정에 의해 근친을 가지 못한 경우에 안사돈 중로 보기라 하여 이 방법으로 친정 식구들을 만났다.

15) 교전비(較前婢)
혼례 때에 새색시를 따라가던 계집종을 말하는 것으로 신부가 출가하여 시가에 가면 처음에는 모든 일에 서툴고 예의범절에 익숙치 못하므로 이런 점에 밝은 계집종을 딸려 보내어 신부를 돌봐 주도록 하였다. 교전비는 주로 귀족이나 부유층에서 성행하였다.

16) 관대벗김
초례를 치른 뒤 신랑이 신부 집에서 마련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는 일로 정혼이 되어 의양단자를 신부 집으로 보낼 때 신랑 옷의 품과 칫수를 적어 보내면 신부 집에서는 미리 옷 한벌을 준비해 두었다가 혼례 때 초례를 치르고 난 신랑에게 갈아입힌다.

17) 관대(冠帶)
구식 혼례 때 신랑이 입는 옷으로 원래는 관리의 제복, 특히 團領服(단령복)을 말한다. 단령은 원래 북방민족간에 생긴 옷으로 중국에서 유행되다가 고려말에 명나라로부터 들어와 公服(공복)이 되었으며 조선왕조 때에 보편화된 관복이다.

18) 혼삼재(婚三災)와 불혼법(不婚法)
①혼삼재 : 혼삼재는 서로 맞지 않는 띠끼리 만나게 되면 혼삼재에 걸리게 되는 바 여기에 해당되면 부부가 生死離別(생사이별)을 하게 되고 가산에 패수가 있으며 병액으로 고통을 받고, 모든 일이 중도에서좌절하게 된다.
호랑이띠(寅), 말띠(午), 개띠(戌)로 태어난 사람이 쥐띠(子), 소띠(丑), 호랑이띠(寅)를 만나면 삼재가 된다.
돼지띠(亥), 토끼띠(卯), 양띠(未)로 태어난 사람이 닭띠(酉), 개띠(戌) ,돼지띠(亥)를 만나면 삼재가 된다.
잔나비띠(申), 쥐띠(子), 용띠(辰)로 태어난 사람이 말띠(午), 양띠(未), 잔나비띠(申)를 만나면 삼재가 된다.
뱀띠(巳), 닭띠(酉), 소띠(丑)로 태어난 사람이 토끼띠(卯), 용띠(辰), 뱀띠(巳)를 만나면 삼재가 된다.
②불혼법 : 이 불혼법은 출생한 날을 상대로 하여 궁합을 보게 되는데 이에 해당하면 부부가 이별하고 자손이 없거나 가난하거나 병액이 이거나 갖은 풍파가 일어나므로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1월생 남자는 6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2월생 남자는 3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3월생 남자는 9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4월생 남자는 5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5월생 남자는 8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6월생 남자는 1월, 7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7월생 남자는 11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8월생 남자는 12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9월생 남자는 11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10월생 남자는 1월, 4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11월생 남자는 2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12월생 남자는 5월생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

 

19) 고과살(孤寡煞)
고과살이란 생년을 맞추었을 때 이 살에 걸리면 부부가 생사 이별수가 있기에 고독하고 과부가 되는 수를 말한다.
①돼지띠, 쥐띠, 소띠를 가진 사람으로서 범띠와 만나면 고독살이 되고, 개띠를 만나면 과부살이 된다.
②범띠, 토끼띠, 용띠를 가진 사람으로서 뱀띠와 만나면 고독살이 되고, 소띠를 만나면 과부살이 된다.
③뱀띠, 말띠, 양띠를 가진 사람으로서 잔나비띠를 만나면 고독살이 되고 용띠를 만나면 과부살이 된다.
④잔나비띠, 닭띠, 개띠를 가진 사람으로서 돼지띠를 만나면 고독살이 되고 양띠를 만나면 과부살이 된다.
이 외에도 하늘이 낸 과부살이 있고 땅이 낸 과부살이 있으니, 어느 달을 말할 것 없이 토끼날(卯日)에 출생하거나 닭날(酉日)에 출생하면 이 살에 걸려 과부가 된다는 뜻이다.


● 상례(喪禮)에 대한 고유 술어풀이

 

1) 갈장(渴葬)
禮月(예월)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지내는 庶人(서인)의 葬禮(장례)로 天子(천자)는 일곱 달, 諸侯(제후)는 다섯 달, 大夫(대부)는 석달, 士(선비)는 한 달 만에 지낸다.

2) 경야(經夜)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近親知己(근친지기)들이 그 棺(관) 옆에서 밤새도록 시신을 지키는 일로 본래 근친자만이 하는 喪屋(상옥)의 생활이다.
또는 부(처)는 처(부)의, 아들은 어버이의 시신과 같은 침상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장례하는 습관도 있다.

3) 고복(皐復)
고복은 招魂(초혼)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喪禮(상례) 의식으로서 사람이 죽으면 혼이 몸에서 떠난다 하여 흩어진 혼을 불러 회복한다는 뜻으로 하는 의식인데, 예문에서는 復(복)이라고 하며 지금은 거의 소멸된 풍속이 되었다. 죽은 사람이 평소에 입던 두루마기나 속적삼을 가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서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허리를 오른손으로 잡으며 옷을 휘두르면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복」이라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한다. 복을 세 번 거듭 부르는 까닭은 셋에 이루어진다는 원리와 天(하늘)과 地(땅)과 空間(공간)에서 온다하여 세 번 부르는 것이라 한다. 고복이 끝나면 발상(發喪)을 한다.

4) 금정(金井)
무덤을 팔 때에 굿의 길이와 넓이를 정하는 데 쓰는 것으로 墓穴(묘혈)을 팔 때에 쓰는 祭具(제구)의 하나다. 굵은 나무를 井(정)자 모양으로 만들어 땅바닥에 뉘어 놓고 그 안으로 파서 굿을 만든다.

5) 곡비(哭婢)
葬禮(장례) 때에 상복하여 哀哭(애곡)하면서 행렬 앞에 사는 계집종으로 과거에는 상가에서 곡성이 끊이지 않게 하기위하여 직업적으로 우는 사람을 서서 울게 하였다. 곡비는 보통 두 사람이며 喪輿(상여) 앞에서 울 때에는 服人(복인)들과 같이 울었다. 복인들이 울음을 쉴 때는 곡비가 대신 울어 곡성이 끊이질 않았다.

6) 대상(大祥)
대상은 사망 후 만 2년만에 즉, 小祥(소상)을 지낸 지 1년이 되는 날에 지내며 일명 大朞(대기)라고도 한다. 실제로는 상례의 마지막이 되며 대상 후에 ?祭(담제)와 吉祭(길제)가 있으나 크게 중시되지 않고, 대상이 지나면 상을 벗는다. 소상과 더불어 상제 중에서 가장 큰 제사로 일가친척과 죽은 이의 친구나 상주의 친구들도 이 날 問喪(문상)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사는 저녁과 미명에 지내며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여러 문객들을 접대한다.

7) 만장(輓章)
亡人(망인)을 哀悼(애도)하는 뜻에서 글을 지어 보내는 것으로 장사 지낼 때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서 기를 만들어 상여 뒤에 따르게 한다. 이를 輓詞(만사)라고도 하여 만장의 첫머리에는 謹弔(근조)라 쓰고 본문을 쓴 다음 끝에 자기의 성명을 쓰되 「本貫後人(본관후인) 姓名(성명) 哭再拜(곡재배)」라 쓴다.

8)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으로 묘갈에 새겨 넣은 글을 墓碣銘(묘갈명)이라고 한다.

9) 묘계(墓界)
品階(품계)에 따라 정한 묘지의 구역, 곧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으로 종친은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였으며, 文武官(문무관)은 1품이 90보로 차례로 10씩 적어졌다. 서민은 가장 아래로 사방 10보로 정했는데 이 구역 내에서는 耕牧(경목)을 금하였다.

10) 묘비(墓碑)
무덤 앞에 세우는 장방형의 돌비석, 일명 墓石(묘석)이라고한다. 아래에 盤石(반석), 그 위에 碑身(비신),맨 위에 지붕 모양으로 만든 加?石(가첨석)이 있다. 비신에 죽은 사람의 관직.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등을 새긴다.

11) 묘표(墓表)
무덤 앞에 세우는 표돌로서 일명 表石(표석)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의 품계. 관작. 성명 등을 새긴다.

12)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성명. 관위. 행적. 자손의 성명. 묘지의 지명. 生死葬(사망장) 연월일 등을 새겨 棺(관). 壺(호) 등에 직접 새긴 것도 있다.

13) 굴건(屈巾)
상제가 쓰는 두건 위에 덧쓰는 건. 폭이 세 손가락 넓이만한 베오리를 세 솔기가 지게하고 종이로 배접해서 뻣뻣하게 만든 것으로 두 끝을 휘어 끈을 꿰어서 쓰고 그 위에 首?(수질)을 눌러 쓰게 되어 있다.

14) 노장(路葬)
길 복판이나 길가에 매장하는 장사로서 정상적인 상사법이 아니다. 처녀나 청춘 과부가 사망했을 때 남성들에게 채 풀지 못한 소원을 가지고 죽었으므로 魂靈(혼령)이 악귀가 되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해를 끼친다는 원시적 관념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왕래하는 길가에 묻어 간접적으로나마 남성들과 접촉을 갖게 하여 죽은 혼을 달랬다. 마치 총각과 처녀의 시체를 합장하는 것과 같은 뜻을 갖는다.

일설에는 황진이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나같은 천한 계집은 길가에 묻어 많은 남자로 하여금 짓밟게 하라」고 말하여 그 후부터 노장이 생겼다고는 하나 이 매장방법은 망령을 위안한다는 민속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미신과 결부되어 예부터 전해 오고 있다.

15) 두건(頭巾)
喪中(상중)에 남자 상제나 어른된 服人(복인)이 머리에 쓰는 巾(건).
일명 孝巾(효건) 또는 巾(건)이라고 하며 삼베나 바래지 않는 천으로 만든다.

16) 만가(輓歌)
우리나라의 구전 민요 중 하나로 상여를 메고 묘지로 갈 때 상여꾼이 부르는 가사로 죽은 사람을 哀悼(애도)하는 구슬픈 가사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이 만가에도 상여를 메고 묘지로 갈 때와 매장한 뒤 흙을 다질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배비장전에 각 1수씩 4수가 전한다.

17) 반함(飯含)
屍身(시신)의 입속에 구슬과 쌀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殮襲(염습)을 마치면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으므로 이 의식은 마지막으로 입에 넣은 것이 되고 이것으로써 시신은 패물이나 음식과도 영원한 告別(고별)이 되는 것이다. 반함한 물건들은 시신의 靈魂(영혼)이 명부까지 가는 동안 노자와 음식이 되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죽은 사람은 고이 잠들 수 있다고 믿는다.

18) 부고(訃告) 달아매기
친척 또는 친지들로부터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訃告狀(부고장)을 받았을 때 불길한 通知(통지)라 하여 대문 안으로 그 것을 들이지 않고 집 대문에 들어서면서 우측에다 새끼에 꿰어 달아매어 두던 풍습을 말한다. 이는 死者(사자)의 혼이 訃告(부고)에 붙어 生子(생자)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이러한 유풍이 남아있다.

19) 불삽(黻霎)
사람이 죽어 發靷(발인)할 때 상여의 앞뒤에 세우고 가는 제구를 말한다. 亞(아)자 형상을 그린 널판지에 자루를 대어 만든 것이다. 《四禮便覽(사례편람)》에 보면 96불삽은 大夫(대부)소용이며, 나무로서 네모나게 만드니 方(방)이 2척, 角(각)이 높으니 角廣(각광)이 2치 높이 4치 합해서 높이가 2자 4치요, 白布(백포)나 두꺼운 종이로 바르고 자색으로 亞形(아형)을 그리는데 그 둘레에는 雲氣(운기)를 그린다고 했다.

20) 삼년상(三年喪)
부모의 상에 있어서 3년 동안 居喪(거상)하는 것. 중국의 고례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에 삼년상이 있었으며, 고려 때에는 부모의 복을 백일로 정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사대부 사이에서는 삼년상이 유행하였으나 군민들은 취역 관계로 여전히 백일상을 지내다가 중종11년(1516)에 貴賤(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삼년상을 행하라는 令(영)을 내려 이때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21) 삼부팔모(三父八母)
服喪(복상)에서 말하는 부모 이외의 三繼父(3계부)와 八母(8모)를 말한다.
삼부란 服制(복제)에 있어서 衰服(최복)인 아버지와 따로 구분하여 일컫는 세가지 繼父(계부)를 말하는 것으로,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계부와, 함께 살지 않는 계부와, 친모가 후살이로 간 곳에 따라가서 섬기는 계부를 말한다.

팔모란 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嫡母(적모)와, 적자가 아버지의 후취를 일컫는 繼母(계모), 양가의 어머니인 養母(양모), 서자가 어머니를 여윈 후 자기를 길러준 다른 첩을 일컫는 慈母(자모), 아버지에게 쫒겨난 어머니인 黜母(출모), 개가한 어머니를 일컫는 嫁母(가모), 아버지의 첩인 庶母(서모)와, 어머니대신 젖을 먹여 준 乳母(유모)를 말한다.

22) 삼상(三殤)
미성년자가 죽었을 때 3가지로 구분한다. 미성년자의 죽음을 삼상이라 하는데, 16세에서 19세까지를 長殤(장상)이라 하고 12세부터 15세까지는 中殤(중상), 8세에서 11세까지는 下殤(하상)이라 하여 세 가지를 三殤(삼상)이라 한다.

23) 수상장(樹上葬)
나무 위에 장사지내는 葬法(장법)의 하나. 시체를 가마니에 싸거나 관 또는 항아리에 넣어서 나무나 기둥에 붙들어 매거나 가지를 달아매어 자연히 肉脫(육탈)되기를 기다려 뼈만 남게 되면 이것을 땅 속에 埋葬(매장)하는 방법이다.

옛날 가난한 賤民(천민)이 묘지로 쓸 토지가 없거나, 유행악질로 죽었을 때 疫神(역신)의 浮散(부산)을 위하여 행하여 졌다.

24) 순장(殉葬)
고대에 있어서의 殉死(순사)의 방법으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처와 從者(종자)를 함께 매장하던 일. 이것은 죽은 후에도 생사가 재현된다는 관념에서 나온 풍습으로 신하·처·노비를 산채로 묻거나 죽여서 매장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순장의 遺蹟(유적)은 이집트 제 1왕조의 나르베르왕의 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왕의 묘가 유명한데 왕의 아바르기와 비의 슈브아드 묘에는 6인의 신하와 68인의 시녀가 매장되었다. 이 점은 중국 은의 왕묘와 일치한다. 중국에 있어서의 순장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은나라의 양식 및 그 연장이라 생각되는 西周(서주)의 유적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순장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은대의 묘의 대표적인 것은 殷墟(은허)의 대묘가 있다. 여기에서 발굴된 것에는 곽실 상면 주위 동쪽에 17명, 서쪽에 24명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었고, 서쪽의 것은 복식품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측되는 것도 많아 보인다. 어느 것이나 계급 차별이 있는 듯하며 관속에 들어 있는 것과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다. 玉(옥) 등의 장신구 외에는 청동제의 용기, 악기 등도 발견됐다. 중국측의 사료인 〈위지 동이지〉의 기록을 보면 부여 때 귀인에 대한 殉義(순의) 풍속이 있었는데 많은 때는 그 수가 100명에 달했다 하여 《삼국사기》에서는 502년에 순장의 풍습을 금한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도 순장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25) 우제(虞祭)
우제란 갓 돌아가신 영혼을 위안하기 위한 제사로 初虞(초우), 再虞(재우), 三虞(삼우)의 총칭이다. 장사를 끝내고 곧 이어 시대는 제사로 죽은 사람의 형체는 이미 땅밑으로 돌아가고 없으니 그의 영혼은 안정을 못하고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지내는 위안제다. 초우는 장사를 지낸 당일에 행하는데 반드시 날이 저물기 전에 하여 묘지가 멀어 당일에 본집에 도착하지 못하면 여관에서라도 행하여 장사날을 넘지 않아야 한다. 재우는 초우를 지낸 뒤 (柔日; 乙.丁.己.辛.癸의 간지에 해당하는 날)의 새벽에 지내며 제사 지내는 법은 초우와 같다. 삼우는 재우를 지낸 뒤의 (剛日; 甲.丙.壬) 새벽에 지내며 초우나 재우와 같은 의식절차로 지낸다. 고구려 때부터 상례법이 들어오고 이 虞祭法(우제법)도 그 당시에 들어와 현재까지도 행하고 있다.

26)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戒名(계명), 忌辰(기진)을 써서 壇(단).墓(묘).院(원).寺(절) 등에 모셔 두는 신위의 이름을 적은 나무 패를 말한다. 일명 木主(목주),靈位(영위),位版(위판)이라고도 한다. 재료와 형식은 여러가지 있으나 흰 나무 또는 검은 옻칠을 한 나무를 쓴다. 유교의 神座(신좌) 또는 神位(신위)에서 전래된 것으로 중국에서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다. 이것은 항상 모셔 두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낼 때에만 쓰며 대부분의 집에서는 이 위패를 대신해 임시 神主(신주)의 이름을 백지에 적어서 쓰는 수가 많다. 이를 紙榜(지방)이라 부른다.

27) 복제(服制)
복제도(服制度)는 첫째 斬衰(참최) 3년이며, 둘째 齋衰(재최) 3년이고, 杖朞(장기).不杖朞(부장기)는 5개월.3개월이며, 셋째는 大功(대공) 9개월, 넷째는 小功(소공) 5개월, 다섯째는 緦麻(시마) 3개월의 5등급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五服(오복)이라 한다. 원래는 喪服(상복)의 제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服喪制度(복상제도)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상복을 입고 소정의 예식에 따라 이를 행하는데 엄격히 제도화하기는 중국 주희가 쓴 『朱子家禮』를 비롯하였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인조 때 金長生(김장생)에 의하여 정리되었다.

五服(오복)의 이름은 喪服(상복)의 형태에서 나온 것으로 참최는 제복이 굵고 거친 베로 지어 아래를 꿰메지 않으며, 재최는 아래를 꿰어 솔기를 만든 것이고 그 외에는 차차로 고운 베를 써서 지었다.

斬衰(참최) 3년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입는 복이고, 齋衰(재최) 3년은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입는 복이며, 大功(대공)은 종형제와 종자매를 위한 복이고, 小功(소공)은 증조부와 증조고.형제의 손자, 종형제의 아들, 재종형제의 경우에 입는 복이며, 緦麻(시마) 3개월은 종증조부.종증조모.증조의 형제나 자매 그리고 형제의 증손과 증조부.증조모에게 입는 복이다.

이같이 服制(복제)는 봉건적 대가족제도의 근본정신이라 할 남계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고 여기에 嫡庶(적서).長幼(장유) 등의 구별이 존재한다.

28) 喪服(상복)
喪中(상중)에 服人(복인)이 입는 예복, 상옷, 상보기 또는 효복이라고도 한다. 喪事(상사)가 나서 殮(염)이 끝나면 銘旌(명정)을 세우고 靈座(영좌)를 배설한 다음, 상주 이하 여러 복인이 상복을 입는다. 상복은 모두 삼베로 지으며 바느질을 곱게 하지 않고 오라기가 너덜거리게 만드는데 이것은 상을 당한 불효죄인이란 데서 온 것 같다.

상상은 앞이 3폭이고 뒤가 4폭이다. 머리 위는 纓(영)이 달린 삼벽이 있는 관을 쓰고 신은 짚신을 신으며 허리에는 마승을 두르고 죽장을 짚는다. 상복은 탈상할 때까지 입는다. 한의 정현의 말에 의하면 상복을 입는 것은 至痛(지통)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斬衰(참최).齋衰(재최)는 裳(상), 苴絰(저질), 杖(장), 絞帶(교대), 繩纓(승영), 菅屨(관구) 등이다. 이것이 의례에 나오는 상복의 원칙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준하여 만들었다. 참최나 재최는 상복의 아랫자락을 자른 것(참최)와 자르지 않는 것(재최)으로 구별하며, 苴絰(저질)은 일종의 끈이고 杖(장)은 상장이며, 絞帶(교대)는 상복을 쓰는 삼대, 繩纓(승영)은 굴건에 장식하는 갓끈 같은 것의 종류이고, 菅屨(관구)는 신는 짚신이다. 이러한 종류의 복식으로 상복을 표시한다. 왕실에서는 達(달)을 日(날)로 바꾸어 봉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당나라 예를 사용하였으니 중국의 복상법이 들어온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때 《輿服志(여복지)》에 상복 없는 것을 보면 제도는 미상하나 의종 때 한 것을 보면 상복이 있었다. 고려 말기 주자학이 들어오므로 명나라의 상복을 사용하여 이것이 조선 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복은 의례에 소정한 것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 제례(祭禮)에 대한 고유 술어풀이

1) 감실(龕室)
祖上(조상)의 位牌(위패)를 넣어 祠堂(사당)에 두는 상자를 감실이라 하는데 이것은 여덟 짝의 문으로 4代(대)를 따로 모시도록 만들어졌다.

2) 벽감(壁龕)
사당을 따로 두지 못하는 집에서는 대청 뒷벽이나 마루 끝에 감실(龕室)을 달아 위패(位牌)를 모시기도 한다.

3) 신주(神主)
죽은 조상들의 위를 베푼 나무 패이다. 대게 밥나무를 쓰며 길이는 8치, 폭은 2치 정도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만든다.

4) 사당(祠堂)
사당은 조상의 혼백(魂帛)을 모셔두는 곳으로 신주(神主). 제상(祭床). 향로(香爐) 등이 갖추어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3년간은 상청(喪廳)에서 조석 상식을 하지만 3년이 지나면 신위(神位)를 사당으로 모신다.

5) 묘지(墓誌)
묘지는 죽은 이의 성명.경력(經歷).공덕(功德).생사장(生死葬)의 연월일등을 기록한 글로 사기판(砂器板)이나 돌 등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것을 말한다. 뒷날 무덤이 유실(流失)되었을 경우 자손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이다.

6) 강신(降神)
제사 지낼 때에 신이 내리게 하는 뜻으로 향을 피우고 술을 잔에 따라 모사(茅沙)에 붓는 것을 말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위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고, 술을 따르는 것은 아래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다.
7) 참신(參神)
신주에게 절하여 뵙는 것을 뜻하는데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두 번 절한다.

8) 초헌(初獻)
제사 지낼 때에 첫 번으로 술을 신위(神位)에 드리는 것을 말한다.

9) 고위(考位)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그 이상 각 대(代)의 할아버지 위(位)를 말한다.

10) 비위(妣位)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 이상의 대대(代代)의 할머니의 위(位)를 말한다.

11) 아헌(亞獻)
아헌이란 둘째 번 잔을 올리는 것으로 주부(主婦)는 이때 4번 절한다.

12) 종헌(終獻)
제사 지낼 때에 초헌과 아헌 다음, 셋째 번으로 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13) 첨작(添酌)
종헌 드린 잔에 다시 술을 가득히 채우는 것을 말한다.

14) 삽시(揷匙)
제사 지낼 때에 숟가락을 밥그릇에 꽂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때 숟가락 바닥이 동쪽으로 향하게 꽂는다.

15) 합문(闔門)
유식하는 차례에서 문을 닫거나 병풍으로 가리는 것을 말하는데 참사자 모두가 방을 나와 바깥에서 삼사 분 정도 기다린다.

16) 계문(啓門)
합문 뒤에 문을 여는 제사의 의식이다. 이 때 문을 열기 전에 제주는 기침을 세 번 한다.

17) 헌다(獻茶)
갱을 내리고 대신 숭늉을 바꾸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18) 철시복반(撤匙復飯)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匙?에 거두고 메 그릇에 뚜껑을 덮고 「이성」을 고하는 것을 철시 복반이라고 한다.

19) 사신(辭神)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고 지방일 경우에는 축문과 함께 불사르는 것을 말한다.

20) 철상(撤床)

모든 제수를 물리는 것을 철상이라 하는데 철상할 때는 제수를 뒤에서 물린다.

21) 음복(飮福)
조상께서 내려 주신 복된 음식이란 뜻으로 제사가 끝나면 제관이 제사에 쓴 술이나 다른 제물을 먹는 것을 말한다.

22) 홍동백서(紅東白西)
제수 진설 때에 생과(生果)나 숙과(熟果)의 붉은 것은 동쪽, 흰 것 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23) 생동숙서(生東熟西)
제사상에 생채(生菜)는 동쪽, 나물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24) 어동육서(魚東肉西)
제사상에 생선은 동쪽, 육은 서쪽, 적(炙)은 어와 육의 중간에 놓는 것을 말한다.

25)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을 제사상에 놓을 때에도 격식이 있는데,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여 놓는 것을 말한다.

26)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놓고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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