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을 찾는 이유
명당 자리가 있을까 없을까 하는 이야기는 허황 하고도 막연한 얘기 같으면서도조상을 명당이라는 자리에 매장하고 나면 후련한 심정은 왜일까?조상의 묘를 잘 모셔야만 후손들이 부귀와 영화를 잘 누린다는 얘기보다명당자리에 모신다는 것은 효심[孝心]이기도 하고또한 이왕에 묘를 쓸 바에는 산세의 여러 모양과 전망을 살펴 본 다음매장 함은 인간의 상애[相愛]요 또한 자식이 부모의 대한 예의인 것이다.옛부터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뺨 맞는 법이 없다고 했거늘그 부모 또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부모의 마음이다.무덤속에 들어가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바다. 자식이 잘 되고 대대 손손 덕망이 높고 학식이 겸비한 후손이 태어남은곧 명당의 덕이라 하여 누구나 명당을 찾아 헤메는 것이다.어느 한 선비가 벼슬을 내어놓고 하향하여 충남 아산 어느곳에 정착어느날 이웃동네를 다녀오다가 길거리에 왠 거지가 쓸어져 있는 것을 발견 하고그 거지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근 한달 동안이나치료를 한 탓으로 무사히 병은 완쾌 됐다.거지는 선비께 은혜를 어떻게 갚을길이 없습니다.그러하오니 제가 평소 풍수를 조금 알아둔 것이 있으니저를 따라 오시면 자리를 하나 잡아드리겠습니다.하고 선비를 데리고 산으로 올랐다.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도 끝이 없는지라 죽으면 아무데나 쓸어 묻으면 될걸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니느냐 했더니 묘는 아무데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따라만 오십시오 하며 또 산 하나를 넘더니 무릅을 탁치면서 여기가 명당이요착하시고 어지신 선비님이 돌아가시면 이곳에 묻어 달라 하십시오[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하고 거지는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그 이후 윤씨의 가문은 윤치영 .윤치호.윤일선 윤보선 씨등 수 많은 학자가 쏟아져 나왔으니당대의 유명인을 찾아볼 수 있는 전설아닌 비화가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조상의 묘를 잘 못써서 벼슬길서 귀양길로 바뀐 선비도 있었고지금도 시골에는 산꼭대기에 묘를 써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무리 과학의 문명이 발달하고달나라 여행을 하더라도 명당 자리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풍수학설의 유래풍수학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왔는가는 아직도 아는 사람은 없다.다만 문헌에 따를면 고대 중국에서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진나라 시대 때에 주선도[朱仙桃]라는 역리학자가 내놓았다는수산기[水山記]는명당자리 보는법으로 당시에는 아무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구동성으로 미친 사람이라고 놀렸다고한다.그러나 수산기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자 진시황제는 수산기를 보고 일반인가운데 왕이 나오면어떻게 되느냐고 염려하여 황실에서만 비치하여 명당을 쓰도록 령을 내렸다.그리고는 진시황제는 왕의 계승을 염려하여 주선도를 엉뚱한 죄를 씌워 죽였던 것이다.이 소문이 전하여져서 한나라 에서도 장자방이 청오경 [靑烏經]과청낭정경[靑囊正經]을 저술했는데 역시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세상을 떠났고당나라에 와서도 최성왕이 금남경[錦囊經]을 저술하여 이를 황실에서는비단주머니에 넣어 대대로 응용하였다.그후 역리 학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당나라 황제는 만약 민간중에서 왕이 태어난다면9족을 멸망하리라는 명령이 내려진 만큼그 오묘한 이치는 동양 철학[東洋哲學]에 기이한 것이며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논리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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