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文人畵의 表現 美學

장안봉(微山) 2014. 1. 19. 22:06

                                                                                                                   

文人畵의 表現 美學

徐基植(昔湖)

 

. 들어가는 말

 

. 하고 싶은 말

 

가. 동양예술 미학

 

1) 미의 정의

2) 유가의 미학

3) 도가의 미학

4) 불가의 미학

 

나. 문인의 견해

 

다. 우리나라 문인

 

라. 예술창작론

 

. 마치는 말

 


  . 들어가는 말


  길거리의 돌멩이 하나도 예술가에 의해서 미술관에 전시되면 예술이 된다.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hon cage,1912~1992)의 유명한 “4분 33초!”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정확히 4분 33초 동안만 앉아 있다가 내려오는 작품을 본 관객들은 어떤 여운이 남아 있을까?

  “테크네는 길고 인생은 짧다Ho bios brakushe de techne makra.”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Iife is Short but Art is Iong”라고 말한 사람은 예술가가 아닌 의사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이다

  고대에는 예술을 테크네로 분류되어 “의술은 어렵고 터득이 오래 걸리는데 인간의 생명은 짧으니 젊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 경구의 의미라고 한다. “삶이라는 것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시간적 순간의 하나의 형태이지만 그러나 삶이 그 제 1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하나의 순간에 있다.”고 한 가스통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는 시간의 참된 현실은 순간이며 지속은 어떠한 현실성을 갖지 않은 구정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남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20C 미술을 주름잡던 가장 재능 있는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는 세계적인 입체파Cubism로 현대풍Modernism의 화가이며, 야수파 앙리 마티즈Henri Mattisse(1864~1954)는 현실의 모방에서 분리시켜 추상적인 개념 속에 내포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색체와 형태, 그리고 새로운 생각 자체 속에서 미술 고유의 특성을 찾았고, 중국의 제백석齊白石(1863~1957)은 전통 질서에서 탈출하는 강렬한 마력으로 문인화가로서 일본이 뽑은 세계미술의 삼대 거장이라고 말했다.

  2006년 뉴욕의 미술경매에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누르고 세계를 놀라게 한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의 명작인 「아델레 블르흐 바우어의 초상;原題Bildmis Adeie Bloch-Bauer, 138×138cm, 1907년 작」은 현재가격으로 어림잡아서 ‘이천 억 원’에 팔렸다. 이처럼 한 사람의 창조적인 예술품은 세계인을 충분히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가슴에 담겨있는 영혼을 그려내는 문인화도 언젠가는 세계를 놀라게 할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 날 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신명을 바쳐서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개척하는 창조자만이 역사에 살아남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에는 소피스트sophist들이 있었기에 ‘소크라테스’와 같은 거리의 철인이 나왔고, 현실의 모든 문제를 인생의 근본부터 연구하는 자세 때문에 철학의 종주국이 되어 유럽문화의 모태가 된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깊은 사려는 학문을 낳고, 학문은 곧 예술을 살찌워 우리 사회를 향기로 가득 채운다.

  우리는 아직도 문인화가 서예와 같은 것인지, 또 한국화와 문인화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데도 어느 누구도 학문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지방은 더욱 미술행정의 관리와 시행의 미숙함과 독선으로 지망자들에게 불편을 주고 또, 난립한 공모전으로 문인화가가 아닌 모방 작가 생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Ⅱ. 하고 싶은 말


  가. 동양예술미학

  1) 미의 정의

  ‘美'라는 말은 중국 한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 따르면 “양(羊)+대(大)=美, ‘양대즉미’ 라고 해서 양이 커서 비대해진 것이 ‘미’이다. 이는 미가 감성적 존재, 인간의 감성적 수요 및 향유―맛있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아름다움Beauty은 라틴어의Belles에서 나온 말로서 그 어원은 ‘선’Bonus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krates,(-470~-399)가 처음으로 미와 선을 같은 개념으로 묶으며 ‘미’ 즉 ‘선’, ‘미’ 즉 ‘유용’으로 한데서 비롯되었다. 미학의 학문적 명칭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ieb Baumgarten(1714~1762)에 의해 라이프니츠G.W.Leibniz-볼트H.C.wolff학파의 직관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관념인 표상이론을 수용하여 감성을 다루는 새로운 학문을 내세웠다. 이를 애스테티카Aesthetica, 즉 애스테틱스를 미에 관한 학문Aethetcal Science”이라고 하며 “감성적 인식의 학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으로 정의하였다. 일본은 미학용어를 처음 썼던 때에는 선善․미美․능能․호好를 ‘요시’라고 불렀으며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한편 동양의 철학은 경험주의 사상으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종교와 관련이 있으며 특성별로 유교중심의 도덕주의사상, 도가의 무위자연사상, 불가의 선사상이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의 생활과 예술에까지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양의 서화는 재료도 서양과 비교 될 수 있는데, 서양의 회화는 캔버스Canvas에 유화Oil을 사용하여 바람을 차단하는데, 동양서화는 화선지, 견, 수묵, 석채 등 어느 것이든지 통풍이 되는 즉 숨을 쉬고 있음으로 자연과 잘 어울려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유가儒家의 미학

  공자孔子(-551~-479)는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정신의 발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생각한 최고의 미는 최고의 수양에서 얻은 양심과 도덕을 바탕으로 하는 정리正理가 있어야 하고, 예술은 인생의 인격의 수양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는 ‘낙지樂之’는 쾌락과 완전히 다른 계층에 속하는 정신, 곧 “상하로 천지와 더불어 유행한다. 上下與天地同流”孟子盡心章.「孟子」 盡心章, 上.”라고 하는 글 자유, 큰 해방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때의 상태는 “마음대로 해도 이치에 통달하는 상태를 말하고 이 상태를 최고의 경지라 하였다.孔子問居 …耳順從心 無聲之樂之…「禮記」”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견해는 ‘진眞’을 다하고 ‘선善’을 다한 완전한 인격에서 오는 미관美觀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인격미에 상당하는 인격미라고 볼 수 있다. 子夏問曰; 巧笑情兮 美日盻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禮後乎? 子曰;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論語 「八佾篇 」第8章 위의 시에서 인용된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의 소素를 공자는 예禮로 보고서 타고난 모습이나 눈망울이 아리따워도 그 외형상의 아름다움은 완전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내면이 예禮, 즉 소素로써 다듬어졌을 때, 완전한 아름다움인 현絢에 이르게 된다는 뜻으로 이 시를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그림에 비교하여 회사후소라 하였는바,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의하면 고대에는 그림을 그릴 때, 먼저 여러 가지 색을 칠하고 나중에 흰색으로 사물의 윤곽선을 그림으로써 완성하였다. 이에 공자는 소素―흰색―로써 그림을 완성하듯 미인의 정정한 미美도 소素, 즉 예禮로써 완성한다는 뜻에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자하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공자는 이와 같이 정리正理의 예술을 강조하였는데, 정리 예술작용은 인간의 불안정한 감정을 침전시키고 안정시켜 인간의 선한 마음을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미의 정의를 “질이 문보다 앞서면 거칠어지고, 문이 질보다 앞서면 겉치레가 된다. 문과 질이 다 같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난 후에 군자라 할 수 있다.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라고 말하며 여기서 질은 회화의 질을 말하고 문은 문채를 말한다.

  질이 난초의 향기라면 문채는 난초의 모습에 해당한다. 서화는 화면에 나타낼 수 없는 향기까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작가의 사상철학을 작품에 옮겨 표현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孔子가 제나라에서 소韶 음악을 들으시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으시고는 음악연주가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다.(자재제문소, 삼월부지육미, 부도위낙지지어사야,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不圖爲樂之至於斯也)”며 소韶라는 음악에서 ‘미’와 ‘선’을 보았다고 했다

  논어에는 ‘이인위미(理仁謂美)’ 인자스런 풍습이 있는 마을은 아름답다.’고 했는데 여기서 미라고 하는 말은 도덕적인 행동의 실천인 선이다. 논어에 ‘미美’ 자字가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 10번은 ‘선善’, 좋음 ‘호好’의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최고의 미학은 “즐거움―낙지樂之―과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넘지 않은 것이다.(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송宋나라의 주희朱喜(1130~1200)는 이理와 기器의 철학으로 “형이 없는 상자는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형이 하자는 정도 있고  모양도 있다. 이것이 기器이다. 形而上者無形 無影是此理 形而下者 有情有狀是此器” 천지만물에는 그것이 자연이던 인공이던 간에 모든 사물의 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질의 것이 있으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에게는 성정性情이 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이나 성정은 이理이며 그 이理를 담고 있는 그릇이 사물이며 그 모양새가 기器이다.

  원래 미란 덕을 겸비하여야 한다. ‘미美’는 ‘선善’을 내재적 요소로 구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진眞’이어야 한다. 유가미학은 한마디로 ‘자연의 인간화’로 심미사상과 관계가 깊은 감각과 정서로 자연을 통해 사회미를 창조하고 생산하는 과학기술미인 실용적 공리의 미이며, 자연을 형상화한 예술미라고 할 수 있다.


  3) 도가道家의 미학

  도가는 인간과 외계대상 사이의 무위관계, 즉 심미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재적, 정신적, 실질적 심미안이며 예술창조의 바탕적 법칙이다.

  도가는 인생체험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이는 곧 예술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老子. 기원전 4C 춘추전국시대․莊子. 맹자와 비슷하나 生卒미상)의 무위자연은 대표적인  철학사상이다. “무위無爲란 것은 적적하고 고요하며 무성으로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끌어도 오지 않고 밀어도 밀려가지 않는 것이다.

  회남자가 ‘혹일무위자 적연무성 막연무동 인지불래왕惑日無爲者 寂然無聲 漠然不動 引之不來往” 무위란 것은 적적하고 고요하며 ‘아무것도 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은 남종산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노․장자의 미학은 공자의 문채론과 흡사하다. 장자의 “사악의斯惡矣 = 악惡과 사기가 있는 미는 금물이다.”

  음악이 너무 듣기 좋으면 대중가요 밖에 안 되며 그림이 너무 호화찬란하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다. 장자의 「외편 산목론」에서 “미모가 뛰어 난 첩과 추한 첩 둘을 거느린 주인이 추한 첩을 더 귀여워 한 까닭도 미색이 뛰어나면 설치기 때문에 무례하기 일쑤고 추하면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자 겸손하고 조심해서 그 마음가짐이 귀여워서 주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장자莊子의 미학은 득도得道와 깨달음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莊子 「天道”고 하였다.

  터득이나 체득은 「양생주」의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 도와 기技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요리를 잘하는 포정이 문혜군(양의 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서걱서걱 쓱싹 소리를 내고, 칼이 움직이는 대로 싹싹 철썩 고기 잘라내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아 은나라 탕 임금 때의 명곡인 경수의 음절에도 잘 들어맞았다.

  문혜군은 그것을 보고 매우 감탄하면서 “아, 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포정은 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신은 기술을 넘어 도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소를 다룰 때는 소가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어디에 어떻게 칼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지 겨우 소가 하나의 작은 덩어리로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감각과 지각이 멈추어 진 채 정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천리를 좇아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몸의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 놀림의 잘못으로 티끌  만큼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호박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칼을 든 채 일어서서 둘레를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득의 만연한 채 한없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칼을 씻어 챙겨 넣었다.』(庖丁爲文惠君解牛,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月+桼 之所踦, 砉然嚮然, 秦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却, 道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 滿志, 善刀而藏之)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도와 기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정은 기技밖에서 도를 본 것이 아니라 기技 속에서 도를 본 것으로, 예술 창작이 기술이나 기교를 떠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천지는 만물을 키워주는 큰 공이 있으면서도 말로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天地有大美而不言)”에 있어서의 큰 의미는 즉, 천지자연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것과 같은 대교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말하지 않는 미, 그대로의 미, 이것이 장자가 추구한 미인, 자연미인 것이다. 노자의 미학은 줄임―손損―이다. 허심이고 무욕이며 여백이고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학문은 닦으면 날고 늘고, 도는 닦으면 날로 준다. 줄이고 줄여서 인위적인 것이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가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못하는 일이 없게 된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矣「老子. 四十八章」)”

  여기서 줄임은 정욕이나 지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줄임의 대상은 이런 범위를 크게 넘어선다고 보아야 하며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여야 한다. 장자가 말한 신체를 던져버리고, 눈과 귀의 활동을 물리치며, 형체를 떠나고, 지혜를 버리는 것이 줄임이라고 했다. 법정스님도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 설 수 없다.”고 했다.

  노․장의 최고미학은 ‘인간의 자연화’로 심미상태와 도덕성을 초월하여 자연과 합일하여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지락至樂”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불가佛家의 미학美學

  불교佛敎의 사상은 선禪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의 폭은 넓고 크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선을 예술과 관련지어 생각함으로써 심사, 또는 명상에 대해 알아본다.

  성리학에서도 정관靜觀이라 하여 선과 흡사한 덕목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선학의 발달로 문인화는 그 한계의 폭이 한없이 넓어질 수 있게 되었다. 송대의 문인화가들이 사실미를 추구하지 않고 이상미를 추구한 것은 성리학에 내재하는 선학미 때문이다.

  소식(蘇軾, 號; 동파東坡. 1036~1101)은 형상을 중시하지 않고 상리常理를 중시하여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은 반드시 흉중에 성죽을 먼저 얻어야 한다.(畵竹者 必先得 成竹於胸中)”고 했다.

  불가에도 유가처럼 줄임―손損―과 유사한 개념이 있는데 “모든 상이 진실한 상이 아님을 안다면, 바로 여래를 보게 된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金剛經․如理實見分第五」일체의 상을 떠난 것을 모든 부처님이라고 한다.(離一體諸相 卽名諸佛)「金剛經․離相寂滅分第十四」”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육근이 구성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떠난다는 말이며 이는 장자가  말한 ‘형체를 떠나고 지혜를 버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의지하는 것이 없음―무대無待―을 뜻한다. ‘미’는 ‘선善’과 같은 개념이며, 선은 좋음―호好―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과 같이 보았다. 그러므로  노․장의 미학인 걱정이 없음―무우無憂―, 하늘의 즐거움―천락天樂―, 지극한 즐거움―지락至樂―, 온전한 즐거움―낙전樂全―, 뜻을 얻음―득지得志―이나, 공자의 즐거움―낙지樂之―이란 모두 다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행복이며 미인 것이다.

  근대 중국미의 본질은 ‘자연의 인간화’이다. 자연의 인간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미학이다. 마르크스Marx,Karl Heinrich(1818~1883)는 심미, 취향, 예술적 실천이 아니라 인류의 기본적인 실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인 생산 활동으로부터 미의 법칙에 대해 ‘사회미’를 설명하였고,자연대상에 인간의 상상, 정감, 깨달음에 부여하는데,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인간의 고매한 절개미에 부유 자연대상을 인격의 이상으로 간주하는 등 칸트가 말한 ‘도덕적 상징’을 ‘자연미’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공자의 유가 미와 같은 인격이나 수양미가 아니라, 마르크스는 생산 활동과 같은 일상의 실용미를 강조하였다.


나,  문인들의 견해

  문인화가들의 예술은 시․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었다. 장언원(張彦遠, 815~875)이 제기한 ‘서화동법書畵同法’을 근거로 역사 속의 수많은 문인들은 청절淸節, 고아高雅한 인품과 덕으로 관직 생활의 엘리트집단a group of elite으로 덕을 쌓으며 여기餘技를 즐기고, 또는 은일隱逸한 선비로 살아갔다. 송의 정초鄭樵, 원의 조맹부趙孟頫, 명의 하량준何良俊, 청의 장경(張庚, 1685~1760)과 성대사成大士, 추일계(鄒一桂, 1686~1772) 등은 그림과 글씨는 본래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고, 장언원은 사회 발전에 따른 문화인식을 토대로 제기한 “그 뜻을 전할 도리가 없었기에 글자가 생겨났고 글 모습을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이 생겼다.(無而專其意 固有書 無而見其形 固有畵)”는 화론을 펼쳤다.

  문인화가들은 작품에서 운韻을 찾아야 한다는 황정견과 고의古意를 중시한 조맹부, 한 평생을 매화만 그린 ‘양무구’ 등 문인화가들은 작품의 제작배경까지도 정신적 필요조건들을 강조하였다. ‘운’이라는 것은 남조시대 사혁謝爀(479~535?)의 화육법의 기운생동의 운―운치韻致―이 아닌 그야말로 작품을 감상한 후에 감상자의 가슴에 오랜 시간동안 남아있는 인상이나 여운(餘韻)을 말하는 것이고 ‘고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처럼 옛 사람들의 뜻이 담겨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대 형호荊浩(907~960)는 노장사상의 은일적인 삶을 사는 자연주의로 저서 ‘산수결’이라는 필법기에서 “오도자吳道子의 산수화는 필筆은 있어도 묵이 없고 항용項容은 묵墨은 있어도 필이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장점을 취해서 일가의 체를 이루었다.(語人曰; 吳道子畵山水/ 有筆而無墨/項容有墨而無筆/ 吳當采二子所長/ 成一家之體/)”

  송대 구양수歐陽修(1007~1072)는 소식의 스승으로 다음과 같은 의意, 즉 개념을 형形과 대비했다. “이 옛 그림은 意를 그린 것이지 형을 그린 것이 아닌데, 매요신의 시는―화제― 사물을 읊되 숨겨진 것―은정隱情―이 없네. 형을 잊고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그림 보듯이 시를 보는 것이 낫겠네.”(古畵畵意不畵形/ 梅詩詠物無隱情/ 忘形得意知者寡/ 不若見試如見畵)라고 말한 매요신의 시는 그림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기술하여 그 그림 위상을 설명하였다.

구양수는 시에서 회화적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제자인 소식은 시와 회화가 동등한 예술형태라고 말하였다.

  소식蘇軾은 왕유王維의 그림에 “마힐摩詰의 시를 음미하면 시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詩가 있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라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두보杜甫가 한간韓幹의 말 그림 위에 쓴 시 구절들에 관한 소식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소릉小陵―두보杜甫―의 굴은 형태 없는 그림이고, 한간의 그림은 말없는 시이네.”(小陵翰墨無形畵/ 韓幹丹靑不語詩) 이 대구는 아마도 그 당시 유행했던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태 없는 시이네.”라는 격언을 반영했을 것이다.

  소식의 유명한 형사에 관한 시는 “그림을 형사로 논한다면, 식견이 아동의 식견에 가깝다네./ 시를 짓는데도 반드시 이 시여야만 한다고 한다면/ 정녕코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니네./ 시와 그림은 본래 일률로,/ 태생의 천재―천공天工―와 독창성―청신淸新― 뿐.(畵論以形似/ 見與兒童隣/ 賦詩必此詩/ 定非知詩人/ 詩圖本一律/ 天工與淸新)”

  여기에서 소식은 시의 구성이 어떤 지정된 주제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회화가 자연과 유사함에 얽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황정견黃庭堅(1045~1105)은 문인화가의 평가는 그가 문인이어야 하고 화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황족인 조영양趙令穰은 그 말에 고무되어 그의 예술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즉… “가슴속에 수백 권의 책을 가졌다면 응당 문여가(문동)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使胸中有數百卷書” 황정견은 즉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있다면, 용필에 한 점의 속기도 없을 것이다.(胸中萬卷書/ 筆下無一點俗氣)”

  문동(文同, 號; 與可)에게 써준 「운당공언죽기篔簹谷偃竹記」에서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은 반드시 흉중에 성죽을 먼저 얻어야 한다.(畵竹者/ 必先得/ 成竹於胸中/)”라고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묵군당기墨君堂記」에서도 말하기를 “그 정情을 터득하고, 그 성性을 알았다.(何謂得, 其情而, 盡其性矣).”라고 하였음은 물상이 지니고 있는 성정을 터득하여 눈에 보이지 않은 물상 즉 모양의 내면세계를 마음속에 품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송대 문인전통에서 그림에 종종 사의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던 ‘사의寫意’는 “관념을 그린 것, 또는 적은 것”은 11C「성조명화평聖朝名畵評」에서 서희徐熙의 그림에 적용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유도순劉道醇 역시 거연은 어떤 경치의 정취를 스켓치―사寫―하기를 좋아했다고 썼다. 이러한 논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눈에 보여 지는 것의 관계로서 무한성과 유한성의 문제에 직면한 말이다. 무한은 비물질적인 정신적 존재이고 유한한 것은 사물이다.

  원대元代에 조맹부趙孟頫(1254~1322)는 황족으로 일생 과거전통을 지지하고. 원초에 문화의 주도적 인물이며 문인 관료로 다방면에서 천재였다. 서書는 왕희지, 그림은 이공린을 모사하며 시, 서, 화의 전형을 강조한 전통주의자로 송설체宋雪體를 만들었으며 ‘의意’ 즉 ‘관념’, 고의古意를 중요시하였다. "그림을 제작할 때는 고의古意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만약 고의가 없다면 비록 작품이 공교工巧하다고 할지라도 무익할 것이다. 요즘 화가들은 단지 용필을 섬세하게 사용하고 색을 베풀어 농염한 것을 알면 자기들이 유능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고의가 결여되어 있다면 온갖 유형의 병폐가 작품도처에 나타날 텐데, 어찌 그것을 볼만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그린 그림은 요약적이고 거친―간솔簡率―듯하다. 그러나 감식가들은 그것이 고인古人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作畵貴有古意, 若無古意, 雖工無益,今人但知用筆織細傳色濃艶, 便自謂能手; 殊不知古意旣 百病橫生豈可觀也, 吾所作畵, 似乎簡率, 然識者知其近古古以爲佳)" 여기서 고의古意라고 하는 것은 그림에 대한 고인의 의취意趣를 일컫는 말인데 그것은 곧 형사에 묻히지 말고 신운神韻을 기이한 선대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맹견趙孟堅은 겸손하여 형상들의 모습을 연습부족과 떨어진 시력으로 돌렸지만 조맹부는 그의 성취를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였다.“나는 어려서부터 좋아서 매일 수 십장의 수선을 그렸지만, 모두 완벽함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대개 각각의 분야 ―업業―에 전문적인 숙련된 기술이 있겠지만 내가 항상 목표로 한 바는 그것들의 형사를 묘사하고자 한 것이었다.”(吾白少好畵水仙, 日數一紙, 皆不能臻其極,蓋業有專工, 而吾意所寓輒欲寫其似…)

  조맹부趙孟頫 수묵난초와 수묵수선이 유명하였고 서화동법에 의한 회화적 결합이 절대적인 화제畵題로 취해지면서 문인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며 묵매는 승려 중인仲仁이 창안 남송 때는 탕정중湯正仲이며 금의 통치에서 조병문에 의해 그려졌다.


 다, 우리나라의 문인미학

  이 땅에 문인화가 역사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1993년 3월, 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서 발굴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능에 그려진 세한삼우―송松, 매梅, 죽竹―로 보아 고려 초 이전으로 본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조선시대에 선비문화로 사군자를 통하여 맑고 숭고한 뜻을 가시적으로 표현 , 한국 문인화의 계보인 강희안姜希顔(1417~1464, 號; 忍齊)과 김정희金正喜(1786~1856, 號; 秋史)에 이어 조선 후기 이하응李昰應(1820~1898, 號; 石坡)은 청초淸初의 석도石濤의 영향을 받아 운란雲蘭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즉 고법에 벗어난 신묘에 가까운 묘처에 가있다고 했다. 민영익閔泳翌(1860~1914, 號; 園丁)은 안진경체顔眞卿體와 난죽을 배워 국내 화단을 신장시켰고 난죽蘭竹은 개성과 운치로 유명하다.

  김정희는 시詩․서書․화畵 일치로 그림보다 글씨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으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주창하여 한국 서예사에 불멸의 장을 열었다. “난蘭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隸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香氣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는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蘭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趙熙龍을 추종하는 무리’는 나에게서 난蘭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이 없기 때문이다.(蘭法亦與隸近, 必有文字香, 書卷氣然後, 可得且蘭法, 最忌畵法, 若有畵法一筆不作可也, 如趙熙童輩, 學作吾蘭, 而終末免畵法一路, 此其胸中, 無文字氣故也) ; 阮堂全集 卷二”라고 말하며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난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蘭은 화도畵道에 있어 특별한 격을 갖추어 있으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다.”(雖有工於畵者, 未必皆工於蘭, 蘭於畵道, 別具一格, 胸中有書卷氣, 乃可以下筆)

  궁극적으로 난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삼전법三轉法과 같은 기교적 차원도 있지만 정신적 차원에서 난蘭이 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추사는 난은 청아한 신기에서 나와야 함을 강조하면서 화공들이 하는 수응법의 난蘭치는 법을 경계하고 있다. “신기가 쏟아지고 경우가 무르녹아야 참은 글씨나 그림이나 똑같다. 그러나 난을 그리는 것은 더욱 심하다, 만일 화공들이 수응법으로 그리자면 비록 붓 하나에 천장도 그릴 수 있다. 卷二 與佑兒(神氣之相溱, 境遇之相融 書畵同然而寫蘭尤甚, 可由多得也, 若如畵工輩酬應法爲之, 雖一筆千紙可也)”

  秋史는 형사적 차원이 아닌 정신적 차원에서 신기를 획득하여 그것을 담아내고 마음속에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팔 아래 손끝으로 발현될 수 없다고 했다. 1848년에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묵란도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 얻을 수 있다.  또 난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종이를 보내 왔으니 너는 아직도 난초 치는 경지와 취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처럼 많은 종이에 그려 달라고 하지만 특별히 싹을 토해 내어 난초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서너 장의 종이를 지나칠 수 없다. 신기가 모여들 분위기가 무르녹아야 하는 것은 서화가 똑같으나, 난초를 티는 데는 더욱 심하거늘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화공들과 같이 화법에 따라 치기로 한다면 비록 한 붓 가지고서도 천장의 종이에 친다고 해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치려면 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때문에 난초를 치는데 있어서 나는 많이 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너도 일찍 보던 바이다. 이제 약간의 종이에 그려 보내고, 보낸 종이에 모두 다 그리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그 묘법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삼전三轉으로 묘법을 삼아야 하는데, 이제 네가 친 것을 보니 붓을 한 번 쭉 뽑고 곧 끝내버렸구나. 꼭 삼전하는 것을 힘써 익혔으면 좋겠다. 대체로 요사이 난을 친다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삼전의 묘법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찍어 바르고 있을 뿐이다.”

  조희룡은 매화를 잘 그렸지만 난도 매화 못지않게 그렸다. “한 붓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은 난 뿐이오, 다른 사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복희씨의 팔괘 그림 등 공백의 의미이니 한 획 가운데 모든 이치가 함축되어 있다. 난의 한 획은 평생토록 수용해도 족하다.(一筆可成, 惟蘭而已, 他物則不能, 此乃羲圖, 空白之義,一劃之中, 衆理涵焉, 蘭之一劃, 爲吾平生受用足矣. 漢瓦軒題畵雜存)” 또 “성난 기운으로 대를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난을 그린다.(怒氣寫竹 喜氣寫蘭)”고 한다.         

  동양서화에서 소동파의 흉중성죽胸中成竹과 황정견의 흉중구학胸中丘壑, 그리고 형호의 의재필선意在筆先을 강조하는데 추사는 이런 사실 이런 점을 예법에 적용하되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미의식을 가미하여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일종의 ‘인품론’과 관련된 ‘서여기인’적 사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라, 예술창작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384~322)는 예술적 행위를 묘사 또는 모방Mimesis으로 보았으며  미를 부피의 대소, 질서, 비례 등에 귀속시켰는데, 실제적으로 형식의 화해를 미로 간주하였고 피타고라스Pythagoras(BC 6세기)는 미란 균제, 대칭, 조화 등의 수적 비례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인의 팔등신 개념도 수적비례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뭔가 모르는 것을 인식하는가? 가령 잭슨폴록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작품을 보았을 때 인식되는 진리가 있던가? 이런 입장에 따르면 미는 인식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외적 형식에 있다.

  잭슨폴록JacksonPollock(1912~1956) 추상표현주위의 선구자로 “…나는 보통 기호가들이 쓰는 도구를 계속 멀리하고 있다.”라 했고, “내 그림 속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림이 끝난 후에 내가 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일종의 서로 ‘사귀’는 기간이다. 그림은 자체적으로 생명을 갖기 때문에, 나는 이미지를 파괴하는데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는다.”며 그림과 접촉할 때 순수한 하모니와 편한 주고받음이 되고 있고 그림은 잘되어 나온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van.Gogh(1853~1890)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별에 갈 수 없고, 죽어서는 기차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쓴 편지는 동생 테오에게 비극적인 짧은 자기의 인생을 예견할 할 만큼 신화적인 상상력을 담아내고 있고, 또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절규’라는 그림은 평소 자신의 병적인 근심, 심리적인 긴장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그의 일기장의 내용대로 그림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문학에서 러시아의 세계적인 대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F.M.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1821~1881) 도 표현주의 예술가로 표현주의는 한마디로 ‘마음 그리기’ 주의이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무어Henry Moore(1898~1986)는 “어떤 것을 닮은 모양일 필요가 없으며, 그 자체의 형태를 갖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문예부흥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화론畵論」에서 “그림을 그 자체의 형태를 갖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미학의 수학적 규범인 비례는 아름다움의 객관적 분석의 가장 기본적 원리라고 했다.

 인체 비례는 아름다움의 객관적 분석의 가장 기본적 원리라고 했다. 황금분할은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 아름다움의 보편적 열쇠이다. 다빈치는 ‘비례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던지 모든 힘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조화적 비례”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고,「화론畵論」에서 “그림은 입술의 시로,  시를 눈동자의 그림으로 보았고 그림이 시보다 낫다. 그것은 그림은 직접 사물의 정확한 형상을 바탕으로 하여 창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긴 곳은 말도  달릴 수 있고, 빽빽한 곳은 바람도 통하지 않는다.(소가주마 밀불통풍疎可走馬 密不通風)”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밀(密)․소(疎)를 화론에 쓴 장언원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동파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쓴 글씨의 의미는 근본일 뿐, 법은 없고 점과 획도 손이 여러 가지를 추구하는데 맡긴다.”며 “스스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옛사람을 밟지 않는다.” 서화書畵 쓰기는 “완숙한 기법을 익히고, 넓은 식견과 실패를 두려워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조시대 양나라 무제는「관종요서법십이의觀鍾繇書法十二意」에서 “일이 어려서 종요의 글씨를 공부하였는데도 형세는 기교가 있고 형체는 빽빽하였다. 그가 스스로 붓을 움직이게 되자 의미는 성글고 글자는 느슨하였다. 마치 초楚나라의 음악이 하夏의 음악을 익혔다 하나 초나라의 것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왕희지도 일찍이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하물며 우리 후배들에게 이어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처음으로 서첩을 떠나서 글씨를 쓸 때 아무것도 의착하지 않고 붓으로 글자를 구성하여야 하므로 글씨가 유치하고 느슨함을 면키 어렵다. 또한 추하고 못쓰게도 되는데 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래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수정하고  고쳐 쓰면 점차 해결된다.

  쓰기에서 획劃은 힘―역力―과 굳셈―경勁―이 보여야 하는데, 중국의 우우임于右任이 글씨를 쓸 때 무사필無死筆이라 하여 획마다 힘이 있어서 한 개의 죽은 점이나 획이 없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획을 얻었다―득필得筆―며 그렇게 써야 한다고 했다.

  빠름―질疾―과 거칠음―삽澁―은 후한 채옹蔡邕의 「구세九勢」라는 글에서 서예에서 붓 쓰는 법 중에서 아주 높은 경지를 요구하는 것은, 옛 사람들에 의하면 곡삽(曲澁)―둥글고 거침―에는 이른 바 일파삼절一波三折―한개의 물결에 세 번 꺾는 것―이란 것이 있다. 

  손과정은 “획을 하나 긋는데 붓끝의 기복의 변화가 있고 점 하나에도 붓끝에서 꺾고 돌림이 다르다”고 하여 질삽의 또 다른 해석을 했다. 

  강유위康有爲는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서 “서예의 묘함은 모두가 운필運筆에 있고 그 요점을  잡아서 방方과 원圓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석도石濤는 “무법無法을 통하여 유법有法과 무법을 통합,the Synthesis of Nothingness and Somethingness through Non -Differentiation.”하는 데 있다. 또한 말하기를 “지극한 예술가에겐 법이 없다.” 달즉변達則變: 기법의 변화를 추구하고 밝은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 끊임없는 자기변혁을 추구하여야 한다.

  예술적 창조라는 것은 진실로 나의 오랜 수련 끝에 얻어지는 기법의 숙달이 주는 자유와 나의 실체는 살아 움직이는 삶이 산수와 인간세상의 실경을 무수히 체험하면서 얻어지는 인격의 깊이 이라야 한다.

  그렇지만 법을 얻었으면 다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에게 맞는 것만 수용해야 할 것이며, 묵죽의 대가 정판교도 “열 가지 배울 것이 있다면 일곱은 배우고 셋은 버려야 각기 신령한 영감을 얻어 자기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니 버릴 줄 알고 그것을 새로 창조 할 줄 모르면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청나라 양산주梁山舟(1723~1818)는 93년을 살았는데, 청렴하고 기골이 있는 학자로서 세인의 존경과 덕망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인격이나 교양을 흠모하여 그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800세를 살아도 세인의 요청에 다 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덕망이 대단한가?

  명나라 동기창董其昌(1555~1636)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지만 또 배워서 묘처를 얻을 수 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여행하고 나면 마음속에 티글과 혼탁한 것을 벗어버리고 절로 속세를 벗어나 견악鄄卾을 이루어 내어 손가는 대로 그려내니 모두 산수의 전신이 된 것이다.

  미학자 강행원姜幸遠은 “갈삽渴澁한 선질과 습윤濕潤한 먹 맛으로 문인화의 격을 상승시켜야 한다.”며, 송대의 이론가 등춘鄧椿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에는 서권기書卷氣를 담고 있었으며 사의가 공치工緻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창작은 어떠한 형식에도 연연하지 말고“자기적 창의”로 오직 그 순간 한 작품이 태어나는 것이다.

  2008년 8월 8일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올림픽, 개폐식을 총감독한 장예모(張藝謨)는 상상을 초월한 창의력으로 이룩된 것이며 ‘한 사람의 창의력으로 단 번에 후진국의 멍에를 벗어날 지경에 이르렀다. 장예모 감독의 상상력, 그는 아마 창의적인 사고형이며 또 관객이 감동할 수 있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에 대해 남다른 고민을 거듭하였기에 가능하였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8월6일부터 17일까지 내일의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ASYAAF)’가 서울역 구 역사에서 열렸다. “꼭 가 볼만한 전시”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매일 3천 여 명에서 7천 여 명, 총관람객 4만 1366명을 기록했다. “유머가 넘친다. 발상이 신천하다. 놀랍고 흐뭇하다. 아시아 현대미술의 최신경향을 한눈에 보고 많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들이 젊어서 그런지 어른들의 꽉 막힌 사고에 묵혀있지 않고 독창적이다.…”는 것이 일반인 및 전문가들의 평이다.

  우리나라의 국보 제 83 호 ‘반가사유상’이나 ‘생각하는 사람―로댕의 조각, 1880―’은 문화가 다른데도 생각하는 모습에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예술미로 사람들을 묶어 놓는 작품이다.

  고대의 테크네techne 때는 순수 기능술, 또는 어떤 규칙이나 학문성으로 예술을 이해되었다. 중세기에는 시녀가 되어 거기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해명할 수 있었고 르네상스 때에는 일종의 과학성으로 그렇게 하였다 18세기에 와서 프랑스 미학자 바뙤A Charles Batteux(1713~1780)에 의해 ‘순수예술Fine Art’개념이 설립되었을 때는 심미성과 결합함으로써 그것을 빌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모더니즘’이후 자신만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결과적으로 예술의 자기 소외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창조이다. 어떤 경우에도 예술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될 수 없으며, 예술작품은 무엇인가를 모델로 해서 나온, 그 모델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8C 장조張璪는 글을 잘하고 팔분체八分體인 서예에 능하였으며 산수화를 잘 그려 삼절로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밖으로는 자연이 스승이었으며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영감의 터득일 뿐이다.(外師造化 中得心源)”며 회화를 하나의 도로 보며 “의경意境”을 깨달은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제백석도 “참다운 서예가 되려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형태미를 함유하고 있어야 하고, 참다운 그림이 되려면 서예의 생동미를 함께 융합해야 최고의 화경에 이를 수 있다.書至畵爲高度 畵至書爲極則.”고 했다.



. 마치는 말


   “나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운항방법을 배우는 중이거든요!”-KBS TV에「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놀라운 사실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과연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미국 택사스주에 살고 있는 존 브람 불리트,John Bram Bliet (36세)는 1급 시각장애자로 앞을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작품을 구상해서 이미지 그림을 그리는 운명적인 화가인 그는 손가락으로 유화물감을 비벼보고는 색깔을 정확히 알아내어서 그림을 그려낸다. 그야 말로 설명이 필요 없는 세상에 언제나 단 한 점 밖에 없는 신이 내린 창작 예술품이다.

  문인화는 ……  과연 어떤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장언원의 대표적인 저술「역대명화기」에서 제기한 ‘서화동체’와 ‘서화용필동법’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원의 조맹부가 ‘서화본래동’이라는 관점을 갖고 펼친 창작이론 많은 서화가들이 이론으로 작품으로 증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書)와 화(畵)가 ‘동법’이므로 문인화는‘서예필법으로 써 간다.’고 하고 서예는 ‘그린다.’고 하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같은 재료와 같은 필법인데… 그래서 세상 속에다 문제를 던져놓는다.

  문인화는 회화를 창조한 그 사람의 자질과 함께 주제와 구도를 생각하는 것은 반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문인화가는 자신이 인생의 도리와 우주의 이치에 깊은 파악이 있어야 하며 인격 수양에 힘을 기르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여행을 통해서 자연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소동파의 흉중성죽胸中成竹처럼 대를 그리려고 하면 ‘대가 가슴속에 이루어져 있어야’ 그림이 되고, 시가 되며, 황정견의 일구일학一丘一壑처럼  ‘하나의 언덕과 하나의 골짜기’를 가슴속에 담아야 산수화를 그릴 수 있다는 말에 누가 공감하지 않겠는가?

  시詩, 서書, 화畵에 숙달된 양무구는 평생 매화와 인연이 있어, 매화를 그렸는데, 형(形)의 필요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단지 즐기기 위해서 그렸다고 주장하지만 세 가지 예술 모두 매화그림 전체에 기여했다고 보여 지며, 남송의 조희곡은 서예의 숙달을 포함한 문인의 교육이 예술적 기법 훈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슴속에 만 권 서書가 있은 후에야 이전시대―전대前代―의 명작名作을 받아들이고, 또 천하의 반을 여행한 후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수 있고 서화의 본질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찌 자연을 가슴에 담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문인화가는 시인이어야 하지만 꼭 한시漢詩가 아니라도 우리말과 글로 화제畵題를 남기고 낙관을 하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송대 소식에서부터 명대 동기창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문인들은 대부분 시․서․화에 뛰어 났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서예를 잘하고, 서예를 잘 하는 사람은 그림을 잘 그렸다. 옛사람들의 여기餘技가 이러하니 어찌 그림 ―화畵― 옆에 글씨가 ―서書―없고 시詩가 없어서 되겠는가?

  지난 세월이 과거로만 흘러 보낸 것의 안타까움과 《가스통바슐라르》의 ‘시적 순간 형이상학적 순간’이라는 책에 정지된 시간, 척도에 따르지 않은 시간, 즉 강물이나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보통 일반적인 시간과는 구분되는 「수직적 시간」에 대해 말한다. 이 ‘수직적 시간’은 밋밋하게 선으로 이어지며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일상생활의 ‘수평적 시간’과는 달리 높이와 깊이가 있는 수직성을 지닌 시간을 가리킨다. 수직적 시간이야말로 “삶을 부동화 하고 기쁨과 고통의 변증법을 그 자리에서 사는 것에 의해 삶 이상의 것이 되게 하는 창조적 생성의 용솟음치는 시간”인 것이다.

  예술가는 표현할 사물에 대하여 오묘함을 얻고 심상을 갖추고, 작품제작에 필요한 기술이 체득되어 “손과 마음이 응하는[心手相應]”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문인화가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도가사상의 절대 자유를 통하여 신묘神妙한 자연을 가슴에 담아와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맞는 화제를 짓고 써서 그림 속에 고의古意가 담겨있고 운―운치韻致 즉 여운―이 오래도록 살아있으며 고통과 기쁨이 살아 숨 쉬는 품격 높은 선비문화를 이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행복은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한 불국사 스님 말이나, “웃지 못한 날은 실패한 날이다.”라고 한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1889~1977)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기분이 좋고 웃을 수 있도록 실천해야 할 삶의 미학이다.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