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순창설씨 부인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4. 1. 19. 21:48

 

 

 

순창설씨 부인 이야기


정부인 순창 설씨

 

'외손봉사'라는 말이 있다. 결혼한 여자쪽의 부모가 남자 자손이 없이 돌아가 제사를 못 지낼 경우 사위되는 집안의 손자(외손)들이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이 '외손봉사'를 귀래정공파 문중에서는 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해오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세종 11년 순창설씨 백민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설씨부인(1429-1508)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와 혼인해 양가의 인연이 맺어졌고, 1508년 여든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 고령신씨 귀래정공파에서는 설씨부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 부모 제사까지 받들고 있다. 31일(음력11월3일) 곡성군 옥과면 광암리 선산에서 설씨부인 500주기 제사를 지낸다. 설씨부인이 신씨 집안에서 그토록 높이 받들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조상이기 보다는 우리나라 규방문학사와 예술사를 고쳐 써야할 만큼 뛰어난 여류문인이기 때문이다.

설씨부인이 그린 '권선문(勸善文)'은 여성이 그린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最古)로 오래된 채색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조 중엽 사임당 신씨보다 50여년 앞선 채색화로 서예 전적부문 보물(72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원래 권문(勸文)이란 군중들을 설득하고 깨우치는 글이다. 아무리 대가집 부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설씨부인은 당당히 계도자로 자인하고 나서는 기개를 보였으니 당연히 선진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설씨부인이 남편과 함께 전북 순창으로 낙향해 있을 때 그 고장의 명승지인 광덕산 (일명 강천산)에 불사를 위하여 신도 대중들에게 시주를 얻고자 '권선문'을 짓고 사찰그림을 그려 돌려보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권선문'은 현재 16폭 절첩으로 14폭에는 '권선문'이, 2폭에는 강천사 풍경으로 보이는 채색도가 붙어있다.

여성 작품으로는 신사임당 그림이 초충 위주임을 감안할 때 여성이 그린 산수화일 뿐 아니라 극히 드문 채색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조선조 여류문인들의 작품이 거의 시조로 단문인데 비해 이 '권선문'은 산문인 장문으로 1200자로 이뤄졌다. 글 중에 '女性'이라는 두 자가 나오는데 불경에서 나온 용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문헌에 '女性'이라는 글자를 쓴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조 뛰어난 여류로서 신사임당이 그림과 글씨의 미를 아울러 갖추고 있으나 문장에 있어서 설씨 부인이 더 솟을 것 같고 또 사임당에 비하면 선배여서 규방학사에 특필할 만한 광채라고 그의 「담원문집」 에서 극찬했다.

설씨는 순창 설씨, 조선왕조 세조때 신숙주가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에 협조하자 동생 신말주가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순창으로 낙향했을 때 부인 설씨도 따라 귀향, 여생을 순창에서 마쳤다. 정부인인 설씨는 항상 근검하고 재산이 넉넉해 친척 중에 외롭거나 빈한하여 늦도록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때는 결혼에 필요한 것을 갖추어 출가시켰으며 이웃에 급한 일이 있으면 몸소 나섰다고 전해진다. 특히 문장과 필법에 능했는데 일찍부터 병이 있어 성종임금께서는 어의를 순창까지 내려 보내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설씨부인 18대손인 신장호 순창고 교장은 "설씨부인의 영향을 받아 11대손까지 예능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후손들이 많았다"며 "조선 초기 문장, 글씨, 그림이라는 세분야에 고루 뛰어난 경지를 보여준 설씨부인이 조선 중엽의 사임당 신씨, 명기 황진이 등과 자리를 다툴 수 있을 정도로 재평가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부인 순창설씨의 삶과 예술세계」 를 발간한 김기곤 순창문화원 원장은 온화한 인덕으로 이타적인 삶을 몸소 살면서도 탁월한 예술세계를 보여준 설씨부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심도있게 조명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문첩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인과법에 의한 글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김 영동/ 명상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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