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안평대군의 松雪體

장안봉(微山) 2014. 1. 19. 21:26

 

 

 

(그림 1) 안평대군 이용, 1450년,

‘재송엄상좌귀남서' 부분

(再送嚴上座歸南序)’ 

견본묵서, 개인소장

우리 서예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15세기이다.

이유는 기존 한자에 또 다른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동시대 문자문화이지만 세종의 훈민정음과 안평대군의

송설체는 표음(表音)과 표의(表意)라는 문자에서부터 다르다.

하지만 한글 전서와 한자 해서라는 전혀 다른 서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류를 따지면 한글이 역리(易理)에 바탕을 둔

제자원리나 상형(象形)을 고전체(古篆體)로 디자인한

글자형태라는 측면에서 상통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15세기 조선의 글씨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한글·한자의 미래를 위해서도

전혀 다른 이 둘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한자인 안평의 조선 송설체를 보기 위해 한글인

훈민정음으로 들어가 보자.

사실 세종이 서예가여도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이 세종 개인의 천재적 산물만이 아니라 15세기 문자문화 역량의 총 집결체라는 점이다.

혹자는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베일에 싸인 비밀 프로젝트라 소설을 쓰고 있지만 명명백백한 사실 하나는 세종은 물론

여러 왕자와 집현전 학사 모두 말에 짝하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문자창제에 필수 불가결한 언어학·자학(字學)·서예이론은 물론 문자역사에 대한 통찰력이나 서사능력이 최고수라는 점이다.

- 훈민정음과 안평대군, 그리고 고전(古篆) -

(그림 2) 문종(1414~1542),

‘칠언절구(七言絶句)’ 행서목판 부분,

개인소장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세종실록 26년(1444) 2월16일 기사를 보면, 송설체만 잘 쓴 줄 알았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즉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 이선로 · 이개, 돈령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안대군 이유 · 안평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세종 22년(1440) 1월10일의 기사에는 문자학에 대한

세종의 독려에 예조에서 마련한 교서관의 자학(字學) 권면 조건이 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 전자(篆字)를 쓰는 능력에 따라 종학박사, 교리, 낭(郞)을 겸임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조에 통보하여 승진과 좌천의 증빙 근거로 삼았다.

▲ 공문서의 도장을 해독하지 못 할 경우 최고 관직을 파면케까지 하고 있다. 

▲ 예조와 교서관에서 취재(取才)를 할 때 전자(篆字)를

쓰지 않는 자 그 가족을 가두고, 세차례나 쓰지 않는 자는 계문(啓聞)하여 논죄한다.

또 관리 선발과목에 대전(大篆)은 비(碑)·갈(碣)에 쓰고,

소전(小篆)은 도서(圖書) 위에 쓰며,

방전(方篆)은 인장(印章)에 쓰는 것이라 모두 뺄 수 없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매양 사맹삭(四孟朔:음력1, 4, 7, 10)이 되면

예조와 그 학(學)의 제조가 시험해 뽑되

대전 · 소전 · 인전(印篆) · 팔분(八分)을 차례로 쓰게 하여 평점 결과를 거관(去官)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사실을 지금 접한 필자부터가 충격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옛 전서체를 모방했다(象形而字倣古篆)’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을 증명해서만이 아니다.

필자의 과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우리 서예가들에게 ‘자방고전’(字倣古篆)은 하나의 설일 뿐이다.

15세기 한국 서예사에서 송설체는 이미 노래가 되었지만

전서가 이렇게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실천되었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다.

‘궁체’를 통한 작금의 빈곤한 한글서예 이론 찾기나 중국 아류정도의 극심한 자기비하 속에 전개되는

한국서예 정체성 모색은 훈민정음에 대한 이러한 피상적 이해의 연장선상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세종은 한자를 극복하기 위해 더 철저히 한자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 조선글씨의 토대 ‘안평체’ -

그러한 경우는 안평대군을 보는 우리의 눈에서도 발견된다.

지금까지 안평에 대한 평가는 청경수려(淸勁秀麗)한 필치(그림 1)로 송설 조맹부를 뛰어넘은 송설체의 대가로 조선의 3대 혹은 4대 서가라는 개인적인 성취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그러나 즉 송설체의 명가는 안평만도 아니고, 송설체의 현장 또한 몽유도원도 발문만이 아니었다.

세종은 물론이었겠지만 문종(그림 2)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강희안 등 집현전 학사 모두

송설체의 대가였다. 훈민정음에 보이는 한자는 그 자체가 또한 송설체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조선화된 송설체, 즉 ‘안평체(安平體)’가 조선의 국서체(國書體)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추사로 마무리된 500년 조선 서예역사의 토대가 되고 기준이 된 것이

송설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단적인 예가 ‘홍재전서’에 보인다. 

‘지금사람들의 글자는 무게가 없고 경박스러워서 삐딱하게 기울어지거나 날카롭고 약해보이지 않으면 사납고 거칠다’고 정조는 당시 서풍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윤순이 열어놓은 순정(醇正)치 못한 이런 서풍을 바로잡고자 서체반정(書體反正)을 단행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된 것이 바로 송설체 진수를 체득한 안평대군의 글씨였던 것이다.

- 예원의 총수이자 강력한 후원자 -

그러나 안평의 존재가치는 예술가만이 아니다.
학예에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 그는 시문(詩文) · 서화(書畵) · 금기(琴碁) 등 쌍 삼절로 불린 풍류왕자였다.

하지만 활자와 법첩제작, 고서화 콜렉션 등에서 조선 글씨문화의 인프라를 구축한 사람이자

당시 집현전을 중심으로 전개된 예원과 문원의 총수로서 교유 인물들의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직접적인 예는 먼저 우리서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인 ‘몽유도원도’제작 현장에서 찾아진다.
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제찬과 제시, 그리고 당대명사 21명의 시문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그림의 가치는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도가사상에 뿌리박고 있는 15세기 또 다른 조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는 데에 있다.

컬렉션의 세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의하면

17세쯤부터 10여 년간 모은 중국서화가 192점인데, 고개지 · 왕유 · 소동파 · 곽희· 조맹부 · 선우추 등

명가명품을 일괄하고 있다.

안평대군은 활자제작에도 가담하였다.

그가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수양대군의 손에 사사(賜死)되면서 무위가 되었지만

경오자(庚午字) 판하본(判下本)을 쓴 것이 그것이다.

서법(書法) 판본의 간행에 대해서는 문종 원년(1450) 11월10일자 기사를 보자.

“안평대군이 ‘역대제왕 명현집’과 ‘왕희지진행초’ 3체와 ‘조자앙 진초천자’ 등의 서법 판본을 바치니,

문종이 명하여 교서관(校書館)에 주어 사람들이 모인(模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요컨대 안평대군은 한 개인으로 천재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15세기 조선 문화 황금기 예원의 총수이자 패트런으로서 조선 초의 문자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15C는 인쇄출판 절정기

 

당대 최고 명필의 붓끝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통일신라와 고려는 주로 구양순체와 안진경체가 유행하였고,

고려말 조선초에는 송설체가 주로 채택된 것이 그 예이다.

따라서 서예와 인쇄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무구정광대탑다라니경 · 직지심경 · 팔만대장경판 등 통일신라~고려의 인쇄문화전통을 이은 조선은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 · 경자자 · 갑인자 · 병진자를 주조하면서 본격 전개되었다.

특히 15세기에 세종의 한글창제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강희안, 정난종 등 조선화된 송설체의 명가들이 등장하면서 또 한번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활자는 안평대군의 경오자, 강희안의 을해자, 정난종의 을유자 등이다.

요컨대 우리역사상 한글과 한자가 공존하면서

예술과 산업 두 측면에서 이렇게 문자문화가 활발하게 전개된 때도 드물었던 것이다.

세종을 시작으로 세조가 수많은 불경을 언해로 찍어낸 15세기 조선 초기는

사실 문예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기틀이 마련된 때이다.

인쇄분야만 보더라도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종 26년(1446)에 반포된 이래

‘용비어천가’가 세종 27년에 활자화되었다.

그 후 동국정운자 병용 한글활자가 주조되어 ‘동국정운’이 인쇄되었고,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본으로 ‘석보상절’이 세종 29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월인석보’(그림 3)는 세조 5년(1459)에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석보상절을 주석글씨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조는 주자소와 교서관을 통합하여 활자본을 간행하는 국가차원의 인쇄출판기관을

발족시키는 한편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능엄경언해’를 세조 7년(1461)에 간행하였다.

세조대에 와서 이렇게 불경언해 중심으로 인쇄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은

어려운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내는 본연의 목적과 함께 조선왕조가 국시가 유교지만

여전히 왕실에서는 개인적으로 불교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또 세조에 의해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죽임을 당하고

단종 복위의 주역인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도륙당한 것도 관계가 깊다.

 - 신묘 · 전형美 … 조선시대 서체 門을 열다 -

고서화의 진위 문제는 작품 가치나 작가 지명도와 정비례한다.

이 명제는 삼척동자도 알지만 필자는 이 바닥에서 근 20년을 구르고 나서야 새삼 실감한다.

좋은 작품은 당연히 돈도 된다. 이 경우는 굳이 감정을 요하지 않는다.

또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은 수준이 말할 것도 없고 가짜도 없다.

문제는 돈도 되고 가치도 뛰어나지만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모호한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판단기준이 작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사람마다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대개 현장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안평대군 이용이나 석봉 한호가 전자라면 추사 김정희는 후자다.

그림 1)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

석각 첩장, 개인 소장

몇 해 전 일이지만 필자에게는 안평대군 작품만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너무 일찍 고인이 되었지만 몇 글자 출입을 놓고 “이 작품이 안평대군이면 내 목을 내놓겠다”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정색을 하고 단언했던 선배였다. 당시 하도 단호해서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일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 안평대군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고두고 작품을 보는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 귀신같은 예겸의 눈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미 안평대군의 시대에도 있었다. 김안로가 쓴 ‘용천담적기’를 보자.

중국에서 온 사신 예겸(倪謙)이 신숙주가 들고 있는 책표지에 ‘泛翁(범옹, 신숙주의 字)’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정자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신숙주가 강희안이 쓴 것이라 둘러댔다.

예겸의 요청 끝에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정작 그는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안평대군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조선 사람이 중국에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고 하면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씨를 구입하려 하오”라고 했다.

이래서 안평대군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이것을 보면 예겸이 안평대군의 작품 감정은 물론 그를 중국 최고 작가로 데뷔시킨 주인공인 셈인데,

이러한 ‘예겸의 눈’은 아직도 안평대군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절실한 것이다.

그나마도 현재 유일하다고 알려진 안평대군의 진적 ‘소원화개첩(국보 238호)’은 2001년 1월부터 도난된

상태다. 나머지 대부분 필적은 ‘해동명적’의 석판이나 목판으로 찍은 병풍이나 서첩으로 전해지니

사정은 더 딱하다.

그러면 천하의 안평대군 진적이 왜 이렇게 희귀할까.

그가 계유정란의 희생자라는 점과 500년이 넘는 세월과 잦은 전란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유묵 또한 임란 이전이지만 조선을 통틀어 어느 작가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고도 못 보는’ 우리시대 안목이 그나마 남아있는 안평을 죽이고,

또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소

그림 2) 조맹부(1254~1322)

‘증도가(證道歌)’, 1316년,

석각 탑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

안평대군의 글씨 이야기 중 가장 통쾌한 지점은

조맹부와 비교될 때이다.

이미 예겸을 통해 중국인의 안평대군 글씨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 “송설옹의 삼매를 얻었다”거나 “당시 어느 작가도 안평대군에게 미치지 못 한다”고 고백할 때 그 우쭐함은 배가된다.

 

아래는 문종 즉위년(1450) 8월의 실록 기사다.

사신 정선(鄭善)이 궁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예겸과 사마순(司馬恂)이 안평대군의 친필을 바치니 황제께서 말하시기를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맹부다’ 하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급기야 황제까지 나서니 당시 안평대군의 필명이 하늘을 찌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필적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가.

안평대군의 글씨(그림 1)를 두고 박팽년은

“꽃같이 아름다운 글자 자태가 무궁하고(美質揷花無盡態)

햇살 같은 신채 기이함도 가지가지(神光射日更多奇)”라고 노래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조형적으로도 보통 해서의 기준작품으로 치는 ‘몽유도원도’ 발문을 보면

골기가 드러나지 않는 유려한 점획, 균제미가 뛰어난 결구는 안평체의 전형미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점은 조맹부의 ‘증도가’(그림 2)와 비교해 보아도 확인되는데, 동일한 서풍 속에서도

안평대군의 글씨가 증도가보다 더욱 정돈된 필획으로 구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안평체’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은 해서뿐만 아니라 행서나 초서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것은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안평대군이 취중에 금니(金泥)를 흑단에 뿌린 뒤에 붓을 들어

그 뿌려진 금니의 점을 따라 초서를 만들었다”고 특기할 정도로

기운생동의 묘가 극에 달할지라도 전형이자 시대양식으로서 안평대군의 서풍은 여전한 것이다.


# 개창기 조선문화의 전형으로서 안평체

그러면 안평대군 글씨의 이런 전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이미 아는 대로 송설체에서 나왔고, 더 거슬러 가면 그 토대가 된 왕희지에서 찾아진다.

그래서 역사가 조맹부를 두고 한족의 정체성을 왕희지 서법에서 찾은 복고주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지만, 같은 맥락에서 안평체의 ‘고전적인 아름다움’ 또한 그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지 않았다.

요컨대 안평대군의 글씨는 세종대에 절정을 구가한 개창기 문화의 미감과 바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정책을 기조로 사대부들이 주도해나간 조선 초기 문치주의의 지향점은

바로 고전에서 전형을 찾아내는 데에 맞추어졌고, 중심 현장은 왕실과 집현전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훈민정음 창제인데 주역과 사물의 형상을 본뜬 제자원리,

글씨의 점과 획을 옛 전자(篆字)에서 착안하였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모토로 한 세종시대 문예의 기조는

주로 고제(古制) 연구를 통해 국가 기틀을 세우고 토대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글씨분야만 해도 그 근본을 왕희지에서 찾아낸 송설체를

안평대군이 핵이 된 왕실과 집현전 학사들이 조선식으로 재해석해낸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송설체의 단순도입만이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내내 토대가 되었던 ‘난정서’ 등 왕희지 필법이

그 토대로서 동시에 교육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조선왕족실록을 보자.

 

주자소에 전교하기를, “교서관에 소장한 ‘집고첩’ 중에서 조맹부의 ‘증도가’ ‘진초천자’ ‘동서명’과 왕희지의 ‘동방삭전’ ‘난정기’ ‘설암두타첩’ 등의 서본(書本)을 인쇄하여 이를 성균관으로 보내어 학생들로 하여금

모범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세조 1년 10월 21일자)

여기서 조맹부와 왕희지 법첩이 조선 초기 글씨의 기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안평대군 글씨의 가치 또한 이러한 고전에서 그 전형을 찾아내었다는 데 있다.


3단계로 발전 ‘송설체의 한국化’

 

조맹부의 송설체는 고려 말 이제현·이암 등을 통해 성리학과 함께 본격 도입되어

조선에서는 각 시기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안평대군과 문종 등의 왕실인사와 박팽년 ·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송설체를 조선화하였다.

그림 3) 숙종(1661~1720), ‘춘효(春曉)’, 1684년,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


그런데 조선 중기에는 송설체의 전형미에도 불구하고 연미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영남학파 도학자나 석봉 한호 등이 도학자의 미감과 성정 기질에 맞는

왕희지 서법의 복고를 직접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퇴계나 석봉의 초기 토대는 송설체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또 다른 국면에서 전개되는 송설체의 조선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즉 조선 전기가 송설체를 주로 하면서 왕희지를 겸했다면,

조선 중기는 왕희지를 주로 하면서 송설체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송설체를 중심으로 글씨를 구사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가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남창 김현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송설체의 명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평양의 ‘숭인전비문’이 대표적이다.

한편 왕실에서는 ‘열성어필첩’에서 확인되듯이 시기에 따라 다소 부침은 있지만

글씨의 전형으로서 일관되게 송설체가 구사되고 장려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성종과 숙종(그림 3)이다.

특히 숙종 대는 미불과 동기창을 재해석해낸 백하 윤순이 나와 소위 ‘동국진체’라는 후기의 글씨문화를

열어젖힐 때임을 감안한다면 왕실문화의 보수성과 정통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조선화된 송설체는 후대 평가 또한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특히 안평대군의 필적에 대해 농암 김창협은 “서체(書體)는 조맹부이나 점획은 종요와 왕희지”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안평체의 고전적 규범이 통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원교 이광사는 ‘서결’에서 “안평대군이 조맹부와 우열을 다투지만 오직 조맹부의 필법을 사용하여

속스러움을 면치 못했다”고 혹평을 하였다.

그러나 왕희지의 위본(僞本)을 문제 삼아 원교 이광사를 혹평한 추사 김정희는 정작

“우리나라에 이르러는 통일신라 · 고려 이래로 온전히 구양순체를 익혔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안평대군이 비로소 송설체로써 따로 한 시대를 열었다”고 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 2006년 09월 01일/ 09월 08일 경향 [서예가 열전 7, 8]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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