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묘 · 전형美 … 조선시대 서체 門을 열다 - 이 명제는 삼척동자도 알지만 필자는 이 바닥에서 근 20년을 구르고 나서야 새삼 실감한다. 좋은 작품은 당연히 돈도 된다. 이 경우는 굳이 감정을 요하지 않는다. 또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은 수준이 말할 것도 없고 가짜도 없다. 문제는 돈도 되고 가치도 뛰어나지만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모호한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판단기준이 작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사람마다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대개 현장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안평대군 이용이나 석봉 한호가 전자라면 추사 김정희는 후자다.
몇 해 전 일이지만 필자에게는 안평대군 작품만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너무 일찍 고인이 되었지만 몇 글자 출입을 놓고 “이 작품이 안평대군이면 내 목을 내놓겠다”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정색을 하고 단언했던 선배였다. 당시 하도 단호해서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일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 안평대군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고두고 작품을 보는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예겸의 요청 끝에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정작 그는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안평대군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조선 사람이 중국에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고 하면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씨를 구입하려 하오”라고 했다. 이래서 안평대군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이러한 ‘예겸의 눈’은 아직도 안평대군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절실한 것이다. 그나마도 현재 유일하다고 알려진 안평대군의 진적 ‘소원화개첩(국보 238호)’은 2001년 1월부터 도난된 상태다. 나머지 대부분 필적은 ‘해동명적’의 석판이나 목판으로 찍은 병풍이나 서첩으로 전해지니 사정은 더 딱하다. 그가 계유정란의 희생자라는 점과 500년이 넘는 세월과 잦은 전란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유묵 또한 임란 이전이지만 조선을 통틀어 어느 작가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고도 못 보는’ 우리시대 안목이 그나마 남아있는 안평을 죽이고, 또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안평대군의 글씨 이야기 중 가장 통쾌한 지점은 조맹부와 비교될 때이다. 이미 예겸을 통해 중국인의 안평대군 글씨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 “송설옹의 삼매를 얻었다”거나 “당시 어느 작가도 안평대군에게 미치지 못 한다”고 고백할 때 그 우쭐함은 배가된다.
아래는 문종 즉위년(1450) 8월의 실록 기사다. 그러면 그 필적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가. 안평대군의 글씨(그림 1)를 두고 박팽년은 “꽃같이 아름다운 글자 자태가 무궁하고(美質揷花無盡態) 햇살 같은 신채 기이함도 가지가지(神光射日更多奇)”라고 노래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골기가 드러나지 않는 유려한 점획, 균제미가 뛰어난 결구는 안평체의 전형미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점은 조맹부의 ‘증도가’(그림 2)와 비교해 보아도 확인되는데, 동일한 서풍 속에서도 안평대군의 글씨가 증도가보다 더욱 정돈된 필획으로 구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안평대군이 취중에 금니(金泥)를 흑단에 뿌린 뒤에 붓을 들어 그 뿌려진 금니의 점을 따라 초서를 만들었다”고 특기할 정도로 기운생동의 묘가 극에 달할지라도 전형이자 시대양식으로서 안평대군의 서풍은 여전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아는 대로 송설체에서 나왔고, 더 거슬러 가면 그 토대가 된 왕희지에서 찾아진다. 그래서 역사가 조맹부를 두고 한족의 정체성을 왕희지 서법에서 찾은 복고주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지만, 같은 맥락에서 안평체의 ‘고전적인 아름다움’ 또한 그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지 않았다. 요컨대 안평대군의 글씨는 세종대에 절정을 구가한 개창기 문화의 미감과 바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바로 고전에서 전형을 찾아내는 데에 맞추어졌고, 중심 현장은 왕실과 집현전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훈민정음 창제인데 주역과 사물의 형상을 본뜬 제자원리, 글씨의 점과 획을 옛 전자(篆字)에서 착안하였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모토로 한 세종시대 문예의 기조는 주로 고제(古制) 연구를 통해 국가 기틀을 세우고 토대를 다지는 것이었다. 안평대군이 핵이 된 왕실과 집현전 학사들이 조선식으로 재해석해낸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송설체의 단순도입만이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내내 토대가 되었던 ‘난정서’ 등 왕희지 필법이 그 토대로서 동시에 교육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조선왕족실록을 보자.
주자소에 전교하기를, “교서관에 소장한 ‘집고첩’ 중에서 조맹부의 ‘증도가’ ‘진초천자’ ‘동서명’과 왕희지의 ‘동방삭전’ ‘난정기’ ‘설암두타첩’ 등의 서본(書本)을 인쇄하여 이를 성균관으로 보내어 학생들로 하여금 모범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세조 1년 10월 21일자) 안평대군 글씨의 가치 또한 이러한 고전에서 그 전형을 찾아내었다는 데 있다.
조맹부의 송설체는 고려 말 이제현·이암 등을 통해 성리학과 함께 본격 도입되어 조선에서는 각 시기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안평대군과 문종 등의 왕실인사와 박팽년 ·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송설체를 조선화하였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영남학파 도학자나 석봉 한호 등이 도학자의 미감과 성정 기질에 맞는 왕희지 서법의 복고를 직접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퇴계나 석봉의 초기 토대는 송설체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또 다른 국면에서 전개되는 송설체의 조선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즉 조선 전기가 송설체를 주로 하면서 왕희지를 겸했다면, 조선 중기는 왕희지를 주로 하면서 송설체를 수용했던 것이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가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남창 김현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송설체의 명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평양의 ‘숭인전비문’이 대표적이다. 글씨의 전형으로서 일관되게 송설체가 구사되고 장려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성종과 숙종(그림 3)이다. 특히 숙종 대는 미불과 동기창을 재해석해낸 백하 윤순이 나와 소위 ‘동국진체’라는 후기의 글씨문화를 열어젖힐 때임을 감안한다면 왕실문화의 보수성과 정통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안평대군의 필적에 대해 농암 김창협은 “서체(書體)는 조맹부이나 점획은 종요와 왕희지”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안평체의 고전적 규범이 통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원교 이광사는 ‘서결’에서 “안평대군이 조맹부와 우열을 다투지만 오직 조맹부의 필법을 사용하여 속스러움을 면치 못했다”고 혹평을 하였다. 그러나 왕희지의 위본(僞本)을 문제 삼아 원교 이광사를 혹평한 추사 김정희는 정작 “우리나라에 이르러는 통일신라 · 고려 이래로 온전히 구양순체를 익혔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안평대군이 비로소 송설체로써 따로 한 시대를 열었다”고 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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