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추사 김정희 / 삶과 작품

장안봉(微山) 2014. 1. 19. 21:17

 

 

추사 김정희 - 그의 일생과 작품

 

 

추사 김정희 싸이트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왼쪽)'과
  '판전(板殿)'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 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神이 오는 듯

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하고 紙筆墨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은

유명한 단계벼루,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

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

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明자의 획을 삐뚜루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었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

           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



 

 
◎ 추사 김정희 삶과 예술 ◎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江上 (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찌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왼쪽)'과

'판전(板殿, 사진위)'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
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은 유명한 단계 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 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 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명(明)자의 획을 삐뚜루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 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었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 간의 만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사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작은 꽃길 / 명상음악

 

    지혜있는 사람은
    힘들여서 착한 일을 하고도
    자기가 한 선행에 매달리지 않는다.

    선행을 하고서도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면
    교만한 마음이 생겨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행을 하고서도
    그것을 잊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모든 번뇌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니
    부지런히 선행을 하되
    마음에 집착을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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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1844) ]
고사 소요란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입니다. 그의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원나라 문인화풍의 간결한 필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데요, 작품의 완숙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느 그림처럼 가슴 속에서 붇받치는 감동에 밀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그려진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입니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 데요,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합니다. 그나 저나 그림에 도장은 참 많이도 찍혀 있네요.

 

 

 

[ 영영백운(英英白雲) (1844)]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는 발문이 오른 쪽에 적혀있네요.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다가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허로움마저 느낄 수 있네요. 제주 유배 중에 기거하던 자신의 집을 그렸습니다. 고고한 모습이죠.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 추사 김정희 서 (1844)]
조선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고 있는 그가 고독한 유배 생활 중에 이루어낸 예술 세계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물욕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자신을 비워 창조해낸 거죠. 조선시대에는 글씨자체의 멋과 아름다움도 즐겼는데요, 글씨도 그림처럼 열정을 다하여 써 내려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묵란도 (1892)]
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입니다. 그는 추사에게 난치는 것을 배웠는 데요, 추사는 이하응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난 그림을 그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치 벼랑에 핀 듯 바위 틈새에 피어 난초와 괴석이 어울린 석란의 모습인데요, 그림 두 폭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대원군이 노년의 병중에 그렸음에도 매우 깔끔하고 고결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방석도산수도 (1850)]
추사가 아끼던 제자 허유가 젊은 시절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그림 위의 발문은 김정희가 썼습니다. 깔끔하고 고매한 정서가 전형적인 문인화의 품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감각 그대로 다소 거칠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태도도 묻어나고 있네요.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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