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사군자의 모든 것

장안봉(微山) 2014. 1. 19. 21:14

 

                                                                                                                                                                  

                                                                             

 

              들어가며                                                  

   옛부터 文人들이 餘暇를 利用하여 一筆法의 四君子를 즐겨 그렸는데, 四君子란 본래 繪畵에서 사용하였던 것이 아니라 人物을 가리킨 용어로 才質과 德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戰國時代에 맹상군(孟常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信君),신릉군(信陵君)등 학문이 높은 네 사람의 德望을 높이 받들기 위한데서 기인한 것으로梅, 蘭, 菊, 竹이 高潔하고 志操높은 氣槪가 있어 네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梅花는 雪寒風에도 꿋꿋하게 피어나므로 꽃 중에서 가장 高潔하여 절개있는 선비들이 좋아하였고,은 그 淸楚함이 다른 植物에 비해 빼어나고 아름다워 높은 志氣의 선비들이 좋아했다. 菊花는 찬 서리와 눈에도 그 志操를 지켜 늦가을까지도 피어있으므로 志操높은 선비들이 좋아했으며, 대나무는 君子의 志操와 여자의 貞操를 대표하는 標本이 되었다.

   梅花, 蘭, 菊花, 竹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植物들로 花鳥畵의 일부로 發達하기 始作하다가 文人畵와 水墨畵의 발달로 하나의 독립적인 美術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梅, 蘭, 菊, 竹의 순서는 春夏秋冬의 순서를 맞춘 것이다. 四君子는 그 상징성 외에도 書藝의 技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 士大夫선비들에게는 魅力的인 素材였다. 細密한 筆體와 熟練된 실력을 요구하는 山水畵보다는 비교적 簡單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筆劃자체가 선비의 人品을 반영한다고 보았기때문에 四君子는 人性을 갈고 닦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書畵同源의 脈絡에서 많은 작가들의 연구와 함께 새로운 여러 가지 새로운 方法을 試圖하고 있다.

  梅花, 蘭草, 菊花, 대나무의 네 가지 植物을 素材로 해서 水墨으로 그리는 四君子 그림은 文人畵家들에 의해서 많이 그려졌는데, 그 理由는 이들 素材가 含蓄하고 있는 象徵性 때문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梅花는 맑은기상을,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향기를 퍼뜨리는 난초는 고결함을, 가을의 찬 서리에도 굽히지 않고 늦게까지 피는 국화는 정절을, 그리고 곧은 줄기에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는 변함없는 절개 등으로 참다운 삶의 求道者인 君子의 精神에 比喩되었다.

  四君子 그림은 이러한 象徵性 뿐만 아니라, 종이, 먹, 붓, 벼루와 최소한의 도구만 있으면 場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그릴 수 있기 때문에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글씨를 쓰는 도구에 書藝의 線을 應用하여 그리는 技法的 親近感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四君子 그림이 水墨畵를 배우는 데의 基礎라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蘭 잎에서 線의 變化, 대나무 줄기에서 筆力, 매화 가지에서 構成, 菊花 꽃잎에서 먹 色의 濃淡의 能力을 배울 수 있는 適切한 素材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東洋人들은 德性과 知性을 兼備한 最高의 人格者를 가리켜 君子라 하였다.당시 知的 엘리트였던 文人 士大夫들은 人生의 窮極的 指標를 君子라 設定하고 積極的으로 추구했었다. 四君子 그림은 바로 이러한 文人들의 삶을 擴充, 高揚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表現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四君子 그림은 知識層을 中心으로 갖추어야 할 藝術的 敎養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詩文, 書藝와함께 일상생활화 되었다.

  君子에 대한 認識은 그 身分性 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人格的 가치로서 尊敬되었기 때문에 四君子를 그릴 때도 대상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文人 士大夫들은 四君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다는 水墨의 표현적인 붓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境地를 높게 여겼다. 이와 같이 四君子 그림은 東洋畵와 水墨畵의 中心 思想과 核心的 意味를 지니고 있는 寫意畵의 精髓이면서 東洋 繪畵의 주종을 이루었던 文人畵의 代表的  화목으로서 크게 盛行했으며, 마음을 修養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媒體로 널리 다뤄졌다.

  四君子는 일반적으로 매난국죽의 순서로 소개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의 배열에 맞춘 것이고, 기법의 습득 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난초(蘭)에 대하여                                   

   世上에 수많은 나무와 꽃이 있지만 '君子'로 불리우는 것은 오직 梅, 蘭, 菊, 竹뿐이다. 氣質이 하나같이 꼿꼿한 선비를 닮았다 하여 明나라때 진계유가 '四君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四君子중에서도 蘭은 빼어난 姿態와 品位로 말미암아 安貧樂道를 즐기는 선비들의 조촐한 삶의 반려가 되곤 했다. 請託이나 誘惑이 있을 때면 말없이 蘭 花盆을 내어 놓음으로써 拒絶을 표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한 고고함을 두고가람 이병기 선생은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받아 사느니라."고 노래한 바 있다.

   千里를 간다는 蘭香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蘭의 美德이다. 風浪에 漂流중이던 中國人들이 어디선가 풍겨오는 香氣에 의지해 뱃머리를 돌렸더니 작은 섬의 언덕에 春蘭이 지천으로 피었더라는 傳說이 있을 정도이다. 蘇東波가 이르기를 "春蘭은 美人과 같아서 꺾지 않아도 스스로 香氣를 바친다."라고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官公署나 企業體의 인사철이나 각종 展示會, 會員展등에 값비싼 蘭花盆이 깡그리 동이 난다는 것은 蘭의 品位와 香氣가 여지없이 嘲弄 당하는 느낌이다.

  蘭은 아름다움과 香氣로 인하여 貴하게 여기는 風習이 있으며, 煩雜하지않고 곧게 뻗은 잎의 氣勢와 단촐하면서도 고고한 姿態는 선비의 忠誠心과 절개의 상징이었다. 四君子중에서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간단한 筆致로 그릴 수 있어 四君子를 처음 그릴 때에는 대개 蘭그리는 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蘭草는 예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香氣를 품고 있는 모습이 世俗의 利慾과 功名에 超然하였던 高潔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유곡가인), 幽人등으로 불리었다. 蘭草의 象徵性은 楚나라의 詩人이며 忠臣이었던 屈原이 蘭의 高潔한 姿態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前부터 形成되었다. 蘭草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로 그려지다가 미불에 의해 水墨法에 의한 獨立된 畵題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元나라때는 松雪體로 유명한 조맹부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墨蘭이 流行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菅道昇의 맑고 수려한 蘭花는 馬守卓, 薛素素(설소소)등의 女流 畵家들에게 많은 影響을 주어 이들을 閨秀傳神派(규수전신파)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墨蘭은 高麗 末期에 傳來되어 朝鮮 初期부터 그려지다가 秋史 김정희에 이르러 大成되었고, 그 傳統이 近代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墨蘭은 그 은은한 먹 香氣와 秀麗한 曲線美와 淸楚한 雰圍氣를 통해 高潔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文人畵家들에 의해 繼承, 發展되어 오면서 四君子 그림과文人畵의 發達에 重要한 구실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四君子 그림을 배울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漢字의 體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蘭葉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券氣(서권기)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 고 하여 理論的으로 書體 訓練이 繪畵技術의 基礎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 墨客들이 즐겨찾던 主題의 하나로서 詩, 書, 畵에 능한 三絶, 특히 書藝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蘭草의 種類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이 주로 다루어진다.  春蘭은 草蘭, 獨頭蘭, 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정판교) 와 朝鮮 末期의 김정희, 대원군,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建蘭은 雄蘭, 駿河蘭, 民蘭 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여 곧게 올라간다.  福建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오창석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민영익)이 특히 잘 그렸다.

春蘭은 한줄기에 한송이의 꽃이 핀다하여 一莖單花라 하고, 建蘭은 한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하여 一莖九花, 一莖多花 또는 蕙라고도 한다.

 

                 대나무(竹)에 대하여                                      

    대나무는 모든 植物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싱싱한 푸른 잎을 계속 維持한다. 君子의 人品에 비유될 수 있는 이러한 特性들 때문에 대나무는 剛直性과 志操와 절개라는 象徵性을 갖게 되었으며 四君子중에서 제일먼저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나무는 그 뛰어난 실용성 때문에 예로부터 生活과 藝術에서 必須的인 存在로 인식되어 왔다. 本來는 松竹圖, 石竹圖, 花鳥圖등의 一部로 그려졌으나 그 象徵性과 技法의 特殊性 때문에 文人들이 즐겨 그리게 되어 漸次 文人들의 墨畵에서 脚光을 받게 되었다.

   대나무는 文人 士大夫들의 가장 많은 愛好를 받으면서 四君子의 으뜸으로 뽑혀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淸節한 姿態와 그 情趣를 志操있는 선비와 墨客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忠臣烈士와 烈女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나무가 그림의 素材로 등장한 것은 三國時代부터였으나, 水墨畵의 技法과 密着되어 文人 士大夫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北宋의 蘇東波와 文同이었다. 蘇東波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本性을 作家의 直觀力으로 體得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胸中成竹論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墨竹畵의 盛行에 크게 기여하였다.

   竹을 그리는데 基本은 墨竹으로 一般化 되었으나 墨竹 이전에 寫竹과 彩色竹의 方法이 있었음을 記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寫竹은 寫生에 의한 대나무의 描寫方法이고 彩色竹은 윤곽을 線描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鉤勒塡彩(구륵전채)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水墨法과 結付됨으로써 비로소 東洋 繪畵의 中心的 創作 思想이라고 할 수 있는 氣運과 精神의 主觀的 表現이 可能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線으로 作用할 뿐 아니라 色彩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作用한다. 문동이나 소동파에 의해 처음 試圖된 墨竹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寫生을 떠난 傳神의 實踐的 方法으로 竹을 그린 것이 되며, 이때의 墨은 현상 세계 너머의 調和力을 暗示하는 것으로 墨線이나 墨面모두 그 氣運을 담는 형식으로 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墨竹과 東洋繪畵가 지니고 있는 寫意 精神은 이러한 創作 思想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墨竹도 墨蘭과 마찬가지로 書法과 密接한 關係가 있다. 예찬은 書法 없는 墨竹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왕불은 書法과 竹法을 同體라고 하였다. 그러나 墨蘭이 짧고 긴 曲線의 反轉을 통해 豊富한 變化를 보이는데 비해 墨竹은 直線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그리는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와 마디, 가지와 잎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줄기를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筆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竹畵法이다. 이 순서는 詩에서의 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의 흐름은 四君子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竹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매화(梅)에 대하여                                    

   梅花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다. 이런 理由에서 梅花는 일찍부터 淸楚한 아름다움과 굽힐 줄 모르는 선비정신의 象徵으로 많이 쓰였다. 墨梅畵가 나오기 以前에는 花鳥畵의 一部로서만 쓰이다가 文人畵의 發達과 함께 四君子畵로서의 墨梅畵가 發展하였다.

   梅花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强忍하면서도 高貴한 韻致를 그 特性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풍기는 梅花의 香氣는 맑고 깨끗한 人品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姿態는 봄을 알려주는 先驅者的인 뜻으로 表現되고 있으며, 이러한 梅花를 가리켜 雪中君者, 淸香, 玉骨, 淸客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梅花가 水墨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 때였으며 창시자는 禪僧인 仲仁이었다. 뒤이어 같은 禪僧(선승)인 妙高(묘고)에 의해 理論的 體系化가 試圖되었으며, 北宋 南宋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圈法(권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墨梅의 이러한 傳統은 元代에 와서 王冕(왕면), 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盛行되었으며, 構圖에서 北方式인 菱形式(릉형식)보다 남방식인 橫貫式(횡관식)이 더 流行하였다. 明代에 와서 畵譜 등의 出現으로 다소 形式化 되었지만, 청대에 이르러 金農등의 個性派 畵家들에 의해 보다 淡彩가 곁들여진 華辭한 모습으로 變化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梅花는 墨竹과 함께 高麗 中期부터 그려졌으며 朝鮮時代에는 각 時期마다 構圖와 技法을 달리하면서 獨特한 樣式으로 展開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高談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後期에는 文人畵의 淡白한 雰圍氣가 강조되다가, 末期에 이르러 趙熙龍(조희룡)에 의해 봄의 華辭한 季節的 情趣와 함께 보다 繪畵性을 짙게 나타내었다.

    蘭草를 曲線美, 대나무를 直線美로 본다면 매화는 屈曲美에서 그 造形的 特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梅花를 그리는 데는 傳統的으로 다섯 가지의 必須的인 方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해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36가지의 병이 있다하여 한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 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강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국화(菊)에대하여                                     

   菊花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무릅쓰고 늦게까지 꽃이 핀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굳은 志操의 象徵으로 여겨졌다. 朝鮮時代 全般에 걸쳐 墨菊畵는 梅花, 蘭草, 대나무에 비해 훨씬 덜 그려졌으나 朝鮮中期이후의 士大夫 文人들의 作品과 朝鮮末期 畵員들의 작품이 다수 傳해진다.

   菊花는 다른 꽃들이 滿發하는 季節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忍耐와 志操를 꽃피운다. 萬物이 시들고 頹落해 가는 時節에 홀로 피어나는 菊花는 現世를 외면하며 사는 隱者의 모습이나 傲霜孤節(오상고절)한 君子를 聯想케 한다. 그래서 菊花는 晩香, 傲霜花(오상화), 佳友(가우), 金華 등으로 불렸으며 菊花는 本性이 四方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쪽 울밑에 흔히 심는 것으로 되어 있어 東籬佳色이라는 別名이 생겼으며, 특히 晉(진)나라의 도연명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詩人 墨客들의 상탄의 대상이 되었다.

   菊花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北宋 때부터 그려졌으나 墨菊만을 專門으로 다룬 畵家는 매우 드물었으며, 청나라에 와서 오창석에 의해 繪 畵性이 강한 彩菊이 많이 그려졌다.

   菊花 全體 모습의 韻致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煩雜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上下左右前後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亂雜하지 말아야 한다.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어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 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끝이 올라가는 게 제격이다. 그러나 둘다 너무 심해서는 안된다.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反葉法, 正葉法, 折葉法등의 畵法이 있다.

   菊花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傲然한 꽃이다. 그러므로 纖細하고 華辭한 봄철의 꽃과는 特性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위에 그려졌을 때 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香氣를 풍기는 菊花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文人畵에 대하여                                            

   士大夫 선비들이 趣味로 그린 그림을 文人畵라 한다. 專門的인 畵家의 그림이 아니므로 때로는 表現이 서툴러 描寫力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各自의 主觀대로 觀念의 世界를 樣式에 구애됨이 없이 그리는 것이 特徵이다. 그림을 그리는 目的은 여러사람에게 보이고 評價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內面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기 위한 精神修養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文人畵에서는 事實보다는 그린 사람의 心性이 더 重要視된다. 따라서 판에 박힌 그림이나 事物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은 그다지 認定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自體로서 또 하나의 틀이 되어 觀念에 얽매인 판에 박힌 그림들도 많았다.

 

                山水畵에 대하여                                      

   韓國을 포함한 東洋에서의 山水畵는 自然의 表現인 동시에 人間이 自然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自然觀의 반영이기도 하다. 따라서 山水畵란 이 두가지 複合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農耕을 主로 하였던 韓國을 비롯한 東洋人들에게 있어서 自然이란 매우 所重하고 絶對的인 존재로서 認識되었다. 이 때문에 自然을 表現한 山水畵는 俗世와 對比되는 의미에서의 理想鄕을 表現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산과 계곡과 강을 그리기보다는 觀念의 世界를 表現하고자 했던 山水畵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中國 山水畵의 影響에서 起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韓國의 산과 들을 사실 그대로 表現하고자 하는 畵風이 생겨나게 된다.

  韓國 山水畵의 역사는 5세기경 三國時代에 人物畵등의 背景的 要素로 그려지기 始作해서 高麗時代를 통하여 純粹 鑑賞畵로서 크게 成長하였다. 構圖나 空間槪念 각 景致의 사물들의 描寫法등에서 中國의 畵風을 攝取하고 이를 토대로 韓國 特有의 獨自的인 畵風을 이룩하였으며, 이러한 特色은 時期를 달리하여 韓國的 畵風의 形成과 展開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한국미술사상 繪畵가 가장 盛行하였던 조선시대를 통하여 山水畵는 韓國畵의 전체의 發展에 主導的인 구실을 하면서 朝鮮後期에는 韓國의 山川을 素材로 하는 實景山水의 전통을 形成하기도 하였다.

  가. 남종화

   山水畵의 2대 畵風중의 하나로 文人畵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南宗文人畵"라고도 한다. 學識과 敎養을 쌓은 文人들이 餘暇를 즐기기 위해 水墨과 淡彩를 써서 內面世界의 表出에 치중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特徵으로 北宗畵와 對比되는 槪念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文人畵家들 사이에서 發展하였으나 점차 職業畵家들에게까지 널리 파급되었다. 中國畵壇의 이 畵風은 朝鮮中期에 韓國에 傳해져 朝鮮末期에 이르러서는 큰 세력을 누리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傳統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朝鮮後期 남종화풍의 대표적인 畵家로는 심사정을 들 수 있다.

  나. 북종화

   산수화의 2대 畵風중의 하나로 주로 남종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職業畵家들에 의하여 외면정 形寫에 치중하여 그린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工筆畵계통의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종화에 비하여 유입이 빨라 朝鮮初期 및 中期까지 畵壇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代表作으로 안견의 "夢遊桃園圖"와 안중식의 "도원문진도"가 있다.
 

                 花鳥畵에대하여                                     

   東洋畵에서는 山水畵, 風俗畵, 四君子등과 함께 꽃과 새, 나무와 바위등을 그린 그림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그림의 特徵은 꽃만 그리거나 새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꽃이나 풀은 반드시 바위나 곤충과 어울려 그리게 마련이고 새가 있으면 반드시 나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事物 하나라도 서로 어울려 造化를 이루어야만 意味가 있다고 생각하는 東洋 特有의 美意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꽃 그림은 중국의 그림과 달라서 눈부신 현란함이 없고, 담담하고 점잖은 편이다. "지나치게 정교하고자 하면 도리어 졸렬해지기 쉽다."는 韓國人의 藝術觀은 현란한 채색보다는 은은한 아름다움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화려한 彩色보다는 조금은 투박하면서 자연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맛을 주는 것이 한국 花鳥그림의 特徵이 되었다. 호랑이, 개, 고양이, 닭등을 主素材로 해서 그린 朝鮮 後期의 動物그림은 緻密한 묘사력을 基底로하여 完璧한 事實力의 發達은 肖像畵의 發達과 함께 해 온 것이다. 成就度가 높은 朝鮮後期 動物그림의 몇가지는 면상벽의 고양이 그림과 닭그림, 김두량의 개그림, 그리고 作者未詳의 호랑이그림등을 들수 있다.                           

<참고>   한국문인화정신의 현대적 고찰 - 국립박물관
四君子에 대한 고찰 - 中央書藝硏究會
사군자에 대한 이해 - 臨池硏墨會

[출처] 사군자의 모든것|작성자

 

 

 

 

 

임진성의 四君子(梅蘭菊竹) 

 사군자 부분도

 

 

사군자(四君子)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늦가을 모든 꽃들이 시들어갈 때 꿋꿋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이 네 가지 식물은 한결같이 그 생태가 군자의 그것을 닮아,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라 부른다.

“이 사람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 344∼388)가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었던 것은 단금(斷金)의 벗도 아니요,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 대나무였다.

그에게 대나무는 벗과 연인 모두를 아우르는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을 경계하는 규범이었을 것이다. 초(楚)나라의 우국시인(憂國詩人) 굴원(屈原, B.C. 343∼278)에게는 난초가 그러하였고, 동진(東晋)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 365∼427)에게는 국화가 그러하였다.

이렇듯 고전적(古典的) 문인들에 의해 그 상징성이 배가된 사군자는 후세 문인들의 공감을 얻으며 문예(文藝)의 소재로 각광받게 된다. 문학 방면에서의 사군자에 대한 찬미는 곧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져 사군자를 소재로 한 그림이 출현하게 된다.

그중 가장 이른 것은 대나무로 그 기원은 당대(唐代)부터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북송(北宋)대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였다. 매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전 작품이 없어 그 자취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의 뒤를 이은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해간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가 문인들에게 창작되고 완상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니는 군자적 상징성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그 기법적 특징과도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송의 문인사대부들에 의해서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사군자가 그려지던 즈음, 고려에서도 사군자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이나 고려 모두 과거제도를 통해 문인사대부층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는 시대 분위기 또한 양자가 동궤(同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에 의해서 묵죽(墨竹)이, 정지상(鄭知常, ?∼1135)에 의해서 묵매(墨梅)가 그려진 후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는 크게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서는 고려의 정홍진(鄭鴻進), 정서(鄭敍), 안축(安軸, 1282∼1348)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강희안(姜希顔, 1417∼1464), 신잠(申潛, 1491∼1564), 유진동(柳辰仝, 1497~?)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인종(仁宗) 등 군왕을 비롯하여 화원이었던 안견(安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나 조선 전기 사군자는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그 기량이나 양식적 특징을 고찰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전기 화원들이 그린 몇몇 청화백자(靑華白磁)에 시문(施紋)된 대나무 그림에서 고려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였을 원대 이간(李, 1245~1343)의 묵죽 화풍의 유향(遺響)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실제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군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선조(宣祖) 연간에 이르러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묵죽에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묵매에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 1566∼?)을 들 수 있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인 이정은 소재의 다양성과 복합적 운용,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으로 한국 묵죽화의 전형을 확립하였고, 어몽룡 역시 압축적이고 간명한 화면구성과 빠르고 강한 운필로 매화의 강직하고 청신한 기운을 기품 있게 그려내 한국 묵매화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한국 사군자의 비조(鼻祖)라 할 만한 이 두 사람이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고유의 이념으로 계승 발전시킨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계 문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묵죽과 묵매의 양식적 전통은 당대는 물론 조선 후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묵죽은 위빈(渭濱) 김세록(金世祿, 1601∼1689)과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 등이 이정을 계승하였고, 묵매는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오달진(吳達晉, 1597∼1629) 등이 어몽룡을 계승한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그중 오달진의 〈묵매〉는 빠르고 격정적인 필치로 강인한 매화의 상징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며 부러진 주간(主幹)은 병자호란 때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그의 동생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절개와 충의를 연상시켜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한편 홍진구(洪晋龜, 1650년대∼?)는 비록 수묵화는 아니지만 구륵과 몰골을 적절히 구사하며 담채(淡彩)의 국화를 그려 묵국(墨菊)의 단초를 열어놓는다. 본격적으로 묵국이 그려진 것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 의해서다. 이번 사군자전에서 우리나라 묵국의 시초에 해당되는 이 두 사람의 국화 그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조선 말기에 화단의 주류로 떠오른 사군자

묵국이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사군자가 하나의 화목(畵目)처럼 통칭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조선 화단에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사군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正祖)연간 예원(藝苑)의 영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정이나 그를 계승한 유덕장과는 사뭇 다른 유연한 필치로 문아(文雅)한 느낌의 난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경),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 1765∼?),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등에 계승되면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

김홍도의 〈백매(白梅)〉는 김홍도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놓고 있어, 강인함을 강조한 기존의 묵매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다. 어렵게 받은 그림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기던 단원의 마음속에 있던 매화는 기세등등한 매화가 아니고 이 〈백매〉와 같이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였나 보다.

반면 임희지와 신위는 기존 양식을 비교적 충실히 계승하며 유려(流麗)하고 습윤(濕潤)한 느낌의 필치로 격조 높은 난죽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을 만큼 묵죽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사군자가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여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등 그 문도(門徒)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청대(淸代) 문인화풍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사실성보다는 탈속한 이념미(理念美)를 추구하였다.

국망(國亡) 이후에도 사군자에 대한 애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35∼1939),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같이 국망의 통한을 한묵(翰墨)으로 자오(自娛)하며 지내던 많은 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살았던 민영익은 당시 상하이 화단을 압도한 당대 제일의 사군자 대가였다.

일제 이후에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1) 등이 방일(放逸)한 붓질로 난죽을 그려 남기고 있지만, 기법이나 양식적인 진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홍 매화

 

 

 

 

 

 

 한란

 

 

 

 

 황국화

 

 

 

 

 

대나무

 

 

 

 

                                                

 

 한란 

 

 

 

 

 

 

 

 

 

 

 

 

 

 

 

 

 

 

 

 

 

 

 

 

 

 

대 줄기 그리기 

 

 

 

 

혜란1

 

 

 

 

 

춘란꽃 그리기

 

 

 

 

 

춘란 꽃

 

 

 

 

 

안면도 춘란1 

 

 

 

 

 

안면도 춘란2

 

 

 

 

 

혜란2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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