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강원도)

[스크랩] [강원도 원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 조린(折衝將軍行龍讓衛副護軍 趙?)묘-횡성조씨

장안봉(微山) 2013. 12. 17. 09:50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 조린(折衝將軍行龍讓衛副護軍 趙遴)

 

1542(중종 37)∼1627(인조 5). 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중겸(仲謙), 호는 은은당(隱隱堂). 사과(司果) 철수(哲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양부서윤 준(俊)이고, 아버지는 제용감부정 응세(應世)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7년 사포서별제를 거쳐 의금부도사·전생서주부·사헌부감찰·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1614년(광해군 6) 간신들의 전횡이 심하고 폐모론이 일어나 이원익(李元翼)·홍무적(洪茂績) 등이 쫓겨나 귀양가게 되자 섬강(蟾江)에 은퇴하였다.

서울을 떠날 때 배에다 서책과 기르던 학을 싣고 가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처럼 여겼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뒤 평시서영에 등용되고 이어 장악원첨정이 되었는데, 이 때 나이 80이 넘었으므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김효원(金孝元)·이경중(李敬中)과 한 동리에 살며 깊이 사귀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평하기를, 김효원은 백옥무진(白玉無塵 : 흰 옥에 티끌하나 없음), 이경중은 설월교휘(雪月交輝 : 달빛에 비친 눈처럼 빛남), 조린은 춘풍해빙(春風解氷 : 봄바람이 얼음을 녹임)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하였다.

 

 

 

조린의 신도비-우복정경세(정경세)선생이 짓고 이홍주(李弘胄)가 썼으며 선원 김상용(金尙容)이 전서하였다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조공린/숙인광산김씨지묘

공의 배필은 광산 김씨(金氏)로 광흥수(廣興守) 김세휘(金世輝)의 딸이자 판서(判書) 김개(金鎧)의 손녀이다

 

 

 

 

졸옹 조성립(拙翁 趙誠立)

 

1568(선조 1)∼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졸옹(拙翁). 평양부서윤 준(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용감부정 응세(應世)이고, 아버지는 장악원첨정 인(遴)이며, 어머니는 김세휘(金世輝)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예조좌랑·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609년(선조 37)에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구황어사로 제수되어 현지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방물(方物)의 경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이어 국둔마(國屯馬)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했다.

왕이 윤허하여 점마(點馬)의 담당은 명망이 있는 문신(文臣)으로 가려서 보내되 겸하여 민폐와 수령이 잘하는 지의 여부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에 초야에 물러가 살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지조를 더욱 굳게 가졌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청고(淸苦)하였다고 하며,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성립 묘전경-뒤의 봉분이 아버지 조린의 묘이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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