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가평] 용인이씨(龍仁李氏) 발복지라는 이세응-이보혁-이경호 묘

장안봉(微山) 2013. 11. 30. 12:37

건원릉 참봉 이세응(李世膺)

 

1634년(인조 12)∼1708년(숙종 3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백해(伯楷)이다.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공조정랑(工曹正郞) 이신충(李藎忠)의 후손으로, 고조는 이계인(李啓仁)이고, 증조는 대사간(大司諫)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사경(李士慶)이며, 조부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이후연(李後淵)이다. 부친 파주목사(坡州牧使)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정악(李挺岳)과 모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이세백(李世伯)‧이세방(李世昉)‧이세강(李世綱)‧이세현(李世賢)이다. 부인은 박사(博士) 윤형지(尹衡志)의 딸 남원윤씨(南原尹氏)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두루 익혔다.

1654년(효종 5) 식년시 생원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등을 지냈으며,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령(縣令) 이의진(李宜振)‧이의승(李宜繩)이다.

 

 

[용인이씨 이세응 가계]

건원릉참봉 이세응- 은산현감 이의진-충정공 이보혁-인양군 이경호- 영의정 여고 이재협

 

묘역전경-곡장이 처진 곳이며 우측의 파란철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세응묘(후)-이보혁묘(중좌)-이경호묘(중우)-이면영묘(전)

이세응묘(후)-이보혁묘(전좌)-이경호묘(전우)

이세응 묘 전경

 

 

 

 

 

 

 

 

 

 

 

충정공 이보혁(忠貞公 李普赫)

 

1684(숙종 10)∼1762(영조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 좌의정 세백(世百)의 재종손이다. 음보로 기용되어 벼슬길에 올라 평양부윤이 되었는데 1725년(영조 1) 부정혐의로 관직이 삭거되었다.

그 뒤 성주목사로 기용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으로 영남에서 기병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었으며 인평군(仁平君)에 봉하여졌다.

1733년에 동의금·호조참판을 거쳐, 1736년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738년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재직 중 남형을 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1740년 풍덕부사가 되어 군액과람의 폐를 시정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에 전임되었다. 1748년에 부총관(副摠管), 1753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그 이듬해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보혁묘(좌) 이세응묘(중) 이경호묘(우)

이보혁묘 전경

이보혁묘(좌) 이경호묘(우)

이보혁묘

 

 

 

 

 

 

 

 

인양군 이경호(仁陽君 李景祜)

 

1705(숙종 31)∼1779(정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초명은 경조(景祚). 자는 효석(孝錫). 아버지는 좌의정 보혁(普赫)이다. 정제두(鄭齊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지평현감(砥平縣監)·담양부사를 역임하고, 1753년 충주목사로 있을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장례원판결사·동부승지, 좌·우승지, 병조참지·참의, 형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오위부총관·승문원제조·공조참판·도승지, 호조·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 아버지가 죽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인양군(仁陽君) 작위에 습봉(襲封)되었고, 1767년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추천으로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곧 예조판서에 특배(特拜)되었으며, 비변사(備邊司)·사옹원(司饔院)·혜민서(惠民署)의 제조(提調)에 이어 1773년 수어사(守禦使)·판의금부사에 특배되었다.

1774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하였다. 1778년 정조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간택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였으나, 가례가 이루어지자 가례청당상(嘉禮廳堂上)의 자리에 있다가 곧 병을 이유로 체직(遞職 : 다른 자리로 옮김)하였고, 7월에 명릉(明陵)의 봉심(奉審)을 게을리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경호묘 전경

인양군 이경호묘

이경호묘 전면-뒷쪽은 이세응 묘이다

 

 

 

 

 

 

 

이면영(李冕榮)

 

1832(순조 3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초명은 면광(冕光). 자는 주숙(周叔). 군수 원길(源吉)의 아들이다.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교리·검교 등을 거쳐 대사성·이조참의·승지를 지냈다.

1882년(고종 19)과 그 이듬해에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어 임오군란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 대원군의 심복으로 고관이었던 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 등을 유배가 아니라 사형에 처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여 사사(賜死)되도록 하였다.

인창군(仁昌君)을 습봉(襲封)하였고, 충훈부유사당상(忠勳府有司堂上)으로서 감생청(減省廳)의 충훈부권한축소계획에 반대하였다. 1884년부터 1902년까지는 대사헌·대사간·궁내부특진관·장례원경(掌禮院卿)을 잠시 지냈을 뿐이고 요직에 발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면영묘 전경

 

 

 

 

이세응묘에서 바라본 여고 이재협 묘

여고 이재협묘 원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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