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용인] ?영의정 문헌공 만절당 박원형(?文憲公 晩節堂 朴元亨)묘-죽산박씨

장안봉(微山) 2013. 11. 30. 12:31

문헌공 만절당 박원형(文憲公 晩節堂 朴元亨)

 

1411(태종 11)∼1469(예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문선(文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충(永忠)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고(翺)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한(瀚)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계공랑(啓功郞),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이 되었다. 1438년 의금부도사를 거쳐, 이듬해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40년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 이듬해 병조좌랑, 1443년 사복시판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고 이듬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453년(단종 1)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이 해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부승지·우승지를 지내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1457년 호조판서로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함길도도순찰사로 나가서는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해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였다. 1459년에는 우리 나라에서 야인(野人)에게 관작을 준 일에 대해 힐책하러 나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 겸 사은사(奏聞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2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1464년 우찬성을 거쳐 1466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함길도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백성을 존무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 : 어린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던 원로 대신)이 되어 승정원에 나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했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영의정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했고, 시문에 능했으며, 과문(科文 : 율법의 조문)에 특히 뛰어났다. 또한 사체(事體 : 사리와 체면)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에는 항상 뽑혔다.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만절당 박원형 신 신도비와 박인영 효자 정려비각

영의정 문헌공 만절당 박원형 신도비

 

 

 

 

박인영 효자정려비각

 

 

 

 

 

 

영의정 문헌공 박원형 묘역 전경

만절당 박원형 묘(후)와 아들 박안성 묘(전) 전경

영의정 문헌공 만절당 박원형 묘 전경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연성부원군시문헌호만절당박공휘원형지묘/배정경부인단양우씨부

신도비-마멸되어 식별이 어렵다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 1월 8일 저녁에 아들 박안성(朴安性)을 등불 아래로 불러 놓고 말하기를,

 “오늘은 너의 생일이니, 술을 들고 나에게 축수(祝壽)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시(詩) 한 수를 불렀다.

 시에


            오늘밤 등불 앞에 술 한 순배 마시니 (今夜燈前酒一巡)
            너의 나이 삼십육세 한창의 청춘이지 (汝年三十六靑春).
            우리 집 보물은 청렴 결백 그뿐이니 (吾家寶物惟淸白)
            잘 유지해 끝없이 사람에게 전파하라 (好把相傳無限人).


고 하였는데, 공의 이 시는 바로 공의 마음이었다. 이달 22일 정축(丁丑)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訃音)을 아뢰니, 주상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와 저자를 3일간 중지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전(祭奠)을 드렸으며 관청의 주도 아래 장사(葬事)를 치렀다.   [문헌공 만절당 박원형 신도비명 중에서]

 

 

 

묘후경

 

 

영중추부사 정안공 박안성( 靖安公 朴安城)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영충(永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翺)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원형(元亨)이며, 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승원(承援)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합격한 뒤 1473년(성종 4)에는 부정(副正)이 되었고, 1474년에는 경차관(敬差官)으로 충청우도와 전라도에 내려가 구휼(救恤 : 빈민이나 이재민을 도와 구제함)을 하였다.

1475년에는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선무사(宣撫使)가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고, 1479년에는 대사간을 거쳐 충청도관찰사·형조참의·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호조판서·전라도관찰사·한성부좌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예조판서 이후 평안도관찰사·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장형(杖刑)을 받고 진잠(鎭岑)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폐위로 방면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좌찬성이 되었고, 그 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정안공 박안성 묘 전경

 

 

 박안성묘(전)와 박원형 묘(후)

 

 

 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영경연사시정안박공휘안성지묘/배정경부인한양조씨부

 

 

 

 

 

 

 

 

 

출처 : 癡叔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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