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학도라면 한번 공부할 가치가 있는 논문이기에 올려 봅니다..
朝鮮後期 實學的 風水地理思想의 흐름
(A Study on the Stream of Silhak's Poongsoo-jiri Thought
in the Late Chosun Dynasty)
배 상 열*
I. 序論
II. 風水地理思想의 哲學的 논리구조
III. 擇里에 대한 실학적 풍수지리사상
IV. 실학자들의 陰宅풍수사상의 批判과 受容
V. 실학사상에 의한 傳統地理 풍수사상의 부흥
VI. 結論
참고문헌
I. 序論
朝鮮後期의 풍수지리는 獨自的 韓國風水思想의 확립시기인 羅末麗初의 國域風水와 麗末鮮初의 定都 및 도성 축조 등의 國都풍수 등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그 외의 대부분에 걸친 풍수 역사가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개인의 利己的인 욕망과 양반 관료들의 자기 과시 수단으로 전락한 잡술로 변질되어 타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변질된 風水의 개념이 어떠한 연유이든 간에 현실적인 왜곡 속에 正統의 風水地理思想에서 더욱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조선후기 實學者들이 주장한 실학적 풍수哲學을 연구하기 위해서 논자는 ‘擇里學’, ‘陰宅學’ 및 ‘傳統地理學’으로 분류되는 水平的 풍수哲學과 눈에 보이는 땅위에 나타나는 ‘地理’와 그렇지 않은 천지인의 調和로 나타내어지는 氣의 실체인 ‘風水’의 垂直的 풍수哲學의 양면성을 연계하여 검토하고, 이들 분야 중 수평적 풍수哲學의 ‘陰宅學’과 수직적 풍수哲學의 ‘風水’분야에 실학풍수로 불릴만한 실학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실학적 풍수지리사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논자는 우선 風水地理思想의 哲學的 논리구조를 간략히 살펴본 뒤, 전통풍수지리사상의 큰 맥락에 따라 첫째, 陽基 立地觀 및 陽宅論 등의 擇里에 대한 실학자들의 풍수사상, 둘째 실학자들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되었던 음택풍수사상의 비판과 수용에 대한 연구, 셋째 전통지리 실학풍수사상의 부흥으로 나누어 조선후기에 표출된 실학자들의 風水地理思想에 대해 비교하여 硏究하고자 한다.
논자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당시 實學者들의 풍수와 지리에 대한 혼동내용을 검토하고, 그들이 풍수지리를 극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또한 수용하는 二重的 兩面性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硏究하고자 한다.
논자가 본고의 내용을 朝鮮後期의 風水思想으로 한정지은 이유는 정조시대 전후에 타락된 풍수지리 분야의 언급이 많았고, 또한 양택과 양기에 대한 신도시 건설 활성화, 그리고 근대적 지리학의 발달로 地理 著述이 많았으며, 어느 시대에 못지않게 풍수지리 분야에 儒學者들이 폭넓게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학의 용어에 대한 개념은 시대마다 상대적으로 변해 사실상 혼란스럽다. 고려전기 사상에 비하면 고려 말에 도입된 주자성리학도 실학으로 부를 수 있고, 주자성리학에 비하면 조선성리학도 실학이요, 북학사상도 조선후기 성리학에 비하면 실학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견해도 타당하다.
진재교는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모호하고 광범한 외연을 가져서 특정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넓게 보면 거의 모든 학문이 실질적 목적에 봉사하는 실학이며, 종교도 영혼의 구제 내지 마음의 평안을 도모하는 실질적 목적에 봉사한다.”라고 한우근의 예를 빌려와 실학의 범주를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風水學 分野의 실학에 대한 연관성은 어떠한가?
좁게는 陰宅風水學도 부모를 봉양하는 효 사상과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본인의 영혼에 대한 평안을 도모하는 실질적 목적에 봉사하므로 실학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陽宅ㆍ都市陽基風水學과 傳統地理風水學 또한 어떠한가?
‘실학이 무엇인가?’의 論爭에 대한 뚜렷한 개념은 아직도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지만, 해방 전 근대계몽기 지식인과 30년대의 조선학 운동의 주도자들에 대한 실학의 개념 인식에서부터, 광복 이후 70년대, 그리고 80년대와 20세기를 거쳐 오늘날의 한국사 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결과를 고찰하여 실학 연구의 일반적인 흐름을 설정하여 보면, 풍수에 대한 실학적 개념과 대표적인 실학자의 풍수사상을 연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실학사상의 단계별 흐름과 개념에 대해서는 본고의 주제와는 다른 방향이므로 구체적인 논술은 피하기로 한다.
실학의 개념과 시기구분에 따른 실학자 범주를 살펴 볼 때 ‘풍수실학이란 개념 설정이 과연 무의미 하는지’의 물음에 대하여 논자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전통 지성의 존재방식에 비추어 볼 때 풍수학 속에서 사유의 변화 양상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고 생각한다. 건축陽宅學을 포함한 수원 화성건설의 都市陽基學과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傳統地理學이 천관우 교수의 주장인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을 갖는 자유성의 實正, 과학성의 實證, 현실성의 實用과 이용후생학문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실학풍수학문의 범주에 속하게 됨은 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굳이 풍수사적 흐름의 系譜를 통해 實學풍수의 논의대상을 따져 본다면, 國域풍수의 道詵, 國都풍수의 관학파 성리학자와 풍수학인, 실학풍수의 길을 열어 두었던 陽基풍수의 선구자 윤선도를 거치면서, 조선후기 實學풍수의 개척자 유형원은 도시계획ㆍ설정학, 건축양기학 및 전통지리학 등에서, 또한 정약용은 양기건축ㆍ도시건설학 등의 實學풍수에서 논의 되어야할 당연한 조건이 된다.
이는 실용·실증 등 근대사상적 요소를 띠어 가는 조선후기의 새로운 실학풍수학풍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1960∼70년대 후반까지의 실학사상 개념처럼 실학풍수를 전·후기실학풍수로 나누는 것보다, 지두환의 실학 분류방법과 동일하게 조선후기를 실학풍수사상으로 정립하여야 한다.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은 禮訟이나 理氣哲學의 공허한 논쟁이나 벌이면서 실제 민생문제나 사회개혁에 대한 논의는 도외시했다고 규정하는 반면, 실학은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민생 문제나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학문으로 역사에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에 비추어, 실학풍수 역시 공허한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실리적ㆍ실용적ㆍ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민생 문제나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전통적인 학문으로 역사에 부각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논자는 1980년부터 정의되어온 조선후기 실학의 시기구분에 따른 실학자 범주를 탈주자학자와 탈성리학자로 분류하여, 북학사상을 '實學'으로 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의 북학사상가인 담헌 洪大容(1731-1783) 이후의 북학파를 비롯한 그 이후 세대인 연암 朴趾源(1737-1805), 정유 朴齊家(1750-1805), 다산 丁若鏞(1762-1836), 추사 金正喜(1786-1856), 혜강 崔漢綺(1803-1879) 등 근대사상을 가진 탈성리학자 위주로 실학적 풍수사상을 중점 연구하고, 북학사상가들에게 철저히 비판받는 구암 韓百謙(1552-1615), 지봉 李晬光(1563-1628), 교산 許筠(1569-1618), 토정 李之菡(1517-1578), 반계 柳馨遠(1622-1673), 성호 李瀷(1681-1763), 청담 李重煥(1690-1752), 순암 安鼎福(1712-1791) 등의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탈주자학자의 風水思想도 가감하여 연구대상에 포함하였다.
하지만 실학의 대부 정조에 대한 풍수지리사상은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II. 風水地理思想의 哲學的 논리구조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지리학적 사고가 성숙한 후 중국의 이론적 풍수가 가미되어 발전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문화현상인 풍수지리는 특이한 哲學的 論理體系를 구성하게 되었다. 본장에서는 일반적인 전통풍수 문헌에 의한 風水思想의 論理構造인 龍ㆍ穴ㆍ砂ㆍ水論을 바탕으로, 타당성 있는 최창조 교수의 분류방식을 도입하여, 보이지 않는 분야인 氣的요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氣感應的 이론에 대한 認識體系論을 논술하고, 이어서 보아서 판단할 수 있는 땅에 대한 經驗科學的 기본 理致인 論理體系論을 논술하여 두 종류의 수직적 풍수哲學의 理論體系에 의한 立場과 役割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認識體系論에는 地氣論, 同氣感應과 吉凶論, 所主吉凶論 및 形局論 등이 있고, 論理體系의 形勢論에는 看龍(龍)ㆍ定穴(穴)ㆍ藏風(砂)ㆍ得水(水)法의 논리 구조가 있으며, 또한 理氣論에는 위치와 방향을 결정하는 坐向論 등이 있다. 본장에서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풍수지리 사상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많은 연관성이 있는 同氣感應과 吉凶論을 중심으로 간략히 그에 대한 연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地氣란 땅의 기운을 말하는데 땅위의 모든 물질은 땅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론이 地氣論이다. 郭璞(276-324)은 땅 속에 흐르는 生氣는 모든 생명을 낳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고『葬書』에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무릇 陰陽의 氣는 내뿜으면 바람이 되고, 오르면 구름이 되고, 떨어지면 비가 되며, 땅속을 돌아다니면 즉 生氣가 된다.
라고 하였다. 생기는 땅 밖으로 빠져 나오면 바람, 구름, 비가 되지만 다시 땅에 들어가면 생기가 된다는 이론이다.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名山論』의 “장사를 지내는 것은 음양의 두 기에 의해 형성되는 생기에 의존하는 것이다.”라고 지기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하지만 선학들에 의하면 생기에 의존한다하여 어느 곳이나 장사를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생기로 인한 吉地이지만 이미 발복한 곳에는 다시 무덤을 쓰면 안 된다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의 同氣感應論은 땅 속에 흐르는 生氣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感應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인데, 생기가 고여 있는 좋은 땅에 죽은 조상이 묻혀서 생기에 감응이 되면 그것이 조상과 자손은 같은 기를 나눌 수 있는 같은 몸이므로 살아 있는 자손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것이다.
곽박은 이러한 조상과 자손의 관계를 ‘구리 광산과 鍾의 감응관계’에 관한 비유와 ‘봄에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방에 있는 밤이 싹이 나는 관계’로 예를 들어 설명하지만, 기운이 자손에게 감응하는 구체적인 경로와 방법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공통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구체적이며 확증적인 논리를 증명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곽박의 풍수 생기론의 논리적 전제에 대해 학자들은 同氣相應, 吉氣感應, 親子感應 또는 同氣感應이라고 하는데 조상의 뼈를 통하여 땅 속에 고인 생기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음택풍수가, 살아 있는 사람이 생기를 받아야 하는 양택풍수보다 명당의 생기를 얻는데 더 효율적이라고 보게 되어 사회가 안정되지 못할 때 일수록 음택풍수가 더 성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곽박은 同氣感應과 吉凶論에 대하여 “털끝만한 차이로도 禍와 福이 천리의 거리가 난다.”하였고, 송나라 유학자 程子는『葬說』에서 “마치 부모의 유해(本骸)와 같은 기(同氣)인 자손에게 복을 입힘과 같은 것이니, 이는 모두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라고 하여 나무뿌리를 북돋워 주면 그 가지나 잎이 무성한 이치를 조상과 그 후손과의 동기감응에 비유하였고, 또한 朱子는,
“간혹 정밀하게 땅을 擇하지 않아, 길하지 못한 땅이면, 곧 반드시 물이 샘솟듯이 나오고, 개미나 벌, 地風 같은 무리들이 그 안을 해쳐 육체와 신령을 편안치 못하게 하며 이에 자손도 역시 죽거나 대가 끊기는 우환이 있으니, 대단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中略)···만일 그(죽은 이)의 형체를 온전하게 하고 신령이 편안함을 얻으면, 곧 그 자손은 융성하고 이에 제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라고 同氣感應의 중요성과 정성을 다할 때의 결과까지도 상세히 언급하였다.
朝鮮後期 實學者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陰宅에 대한 동기감응에서 비롯된 후손들의 발복에 대하여 초지일관 질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회정치적인 여러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는 개혁과 변화의 구심점에 타락한 동기감응의 발복을 바로 세워야하는 社會惡의 핵심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星湖는 同氣感應의 논리에 대하여 全州 府尹의 예를 들어 墓地에 의한 親子 사이의 感應에 實證性이 없다고 하면서 “나대경이 그「학림옥로」에서 堪輿를 논설하되, 郭璞이 ‘본 뼈는 기운을 타고 남은 뼈는 음덕을 받는다.’ 했으니, 이 말이 도무지 통하지를 않는다.”라고 하면서 同氣感應의 논리를 부정하였다.
洪犬容의 同氣感應論에 대한 견해는 다른 實學者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陰陽五行論에 대하여 음양이라는 氣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햇볕의 강약을 표시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므로 오행의 數는 원래에 정해진 의론이 아닌데, 術家는 이를 祖宗으로 삼아 河圖와 洛書로써 억지로 맞추고 周易 象數를 파고 들어가···(中略)···끝내 그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라고 만물의 총괄적인 성분인 五行의 구성이 몇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음양오행설을 부인하였는데, 이는 곧 신선 및 풍수설의 부정으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무덤의 길흉과 자손의 화복이 동일한 氣의 感應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 重刑을 당한 죄수의 고통이 그의 아들에게 옮겨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의 혼백에 대한 감응은 터무니없다라고 하여 풍수설의 동기감응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毉山問答』에 반대적인 내용도 서술하였는데,
“비록 그러하나 기술이란 허망하여 본래는 그럴 이치가 없지만, 그런 줄로 믿어 내려온 지 오래고 마음을 모으고 영을 합하면 無를 상상하여 有를 이루나니, 가끔 中人(지관)의 기교를 하늘이 따라준다. 이에 ‘입이 여럿이면 쇠도 녹이고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는 말이 이치가 있는 것이다.···(中略)···地術(풍수지리)에 있어서의 화와 복은 모두 그 이치가 마찬가지다.”
라고 하여, 정성을 다한 地官의 기교에 따른 화와 복에 대한 동기감응론을 부정하지 않아 긍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III. 擇里에 대한 실학적 풍수지리사상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의식주에 깊이 관여하여 왔다. 남녀노소 및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고 먹는 것 외에도 마음이 편안하고 살기 좋은 곳인 이상적인 거주지를 택해 왔다.
실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쟁과 사화 등 피폐된 사회 전반의 굴레에서 보다 안전하고 마음을 편히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좋은 자리를 가려왔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옛 聖賢들의 예를 직접 들지 않더라도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에 대해 앞 다퉈 그들의 언급이 있어 왔고, 그들의 사상에서 실학자들이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朝鮮後期 實學者들의 대부분은 땅위에 나타나는 地理와 동양사상의 기본인 천지인의 調和로 나타내어지는 氣의 실체인 風水에 대해 分離하여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풍수지리학을 질타하여 사용하였으나, 땅에 대한 지리적 해석과 擇里에 있어서 風水지리학의 本質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擇里’를 언급함에 있어 風水地理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地理와 風水를 混同된 개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陽基란 음기 혹은 음택에 反하여 산사람의 주거지란 의미이며 陽宅과 함께 사용되어진다. 宅과 基는 용어상 주거에 사용되는 문자인데, 가옥이 宅이고, 가옥이 선 땅이 基이다. 때문에 무덤에서는 땅 속이므로 宅과 基가 동일한 개념으로 된다.
땅 위 풍수에서는 가옥의 중요성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지기를 중시하므로 宅屋을 세우는 택지인 陽宅과 陽基가 주거 풍수로 사용되어진다. 여기에는 행복을 추구하는 기준에 따라 자기 일가의 행복 또는 집단생활 전체의 행복을 중요시 여기는지에 따라 個人陽基와 集團陽基로 분류되어진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주거풍수를 3종류로 분류하고자 한다. 개인 가옥의 성격을 갖는 택지나 別業을 좁은 의미의 ‘陽宅’이라 정의하고, 개인의 개념이지만 규모가 크고 가옥의 성격이 포함된 山水 속에 지어진 別墅를 ‘개인陽基’, 국ㆍ도ㆍ읍ㆍ부락 등을 廣義의 ‘집단陽基’라 정의하여, 본장의 ‘擇里’에는 陽宅과 陽基를 포함시켜 논의하고자 한다.
유형원은 나라와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정치가 아닌 학문과 사상의 세계와 바람직한 사회를 구상하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한 결과 위대한 저서『磻溪隧錄』을 탄생시켰다.
『반계수록』에서 보여준 그의 사상적 특징에 대한 개혁 실체는 田制를 개혁하는 公田制 시행, 과거제의 폐지, 신분 차별의 철폐, 관제의 전면 개편 등이었으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도시와 군현에 대한 행정구역 개편과 도시양기 입지관에 대한 주장이었다.
반계가 구상한『郡縣制』개혁안 중에 특이한 점은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기구의 설치, 군사적 방어의 원인으로 邑城을 중시, 道路 등의 체계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水原에 대해서는 廣州의 6개면 일부, 과천의 남면과 서면의 반을 편입하는 것을 주장 하면서, 성에 대한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제시하였는데, 이는 100여년 뒤의 정조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반계가 작성한『반계수록』의 사회ㆍ경제적인 개혁과『郡縣制』의 개혁 내용이 혼합되어, 음택인 화산으로의 천장과 양기인 화성 건설을 추진하는데 크게 일조하게 되었다. 결국 정조는 반계가 지적했던 곳에 새로운 성곽도시인 華城을 건설하였으며, 읍의 중심지도 반계의 당초 의지와 동일한 북평으로 정하였다.
유형원의 사상적 흐름의 맥은 17세기 초반 실학 선구자들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을 계승한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택리의 바탕이 되는 화성 양기 축조와 실학적 지리학이 집대성 되는 발판이 되어 실학을 한층 발전시켰다.
국왕의 명에 의해 제작된 관찬서『동국여지승람』은 국토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정적 파악이 주목적인 반면,『擇里誌』는 이중환의 개인적 입장에서 실제로 답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실증적 태도에 입각해 18세기 전반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저술한 책으로, 전통풍수지리사상과 실학의 영향을 받은 자연지리적 가치를 지닌 훌륭한 종합인문지리서이며, 국토와 문화 경관의 본질을 가장 한국적 시각에서 파악한 전통적 지리서로 평가하고 있다.
『八域志』라는 異名이 생긴『擇里誌』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관심 대상인 ‘자연환경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는 立地 이론이 탁월한 조선시대 최고의 인문 지리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擇里誌』는 대관령에 이르는 산지 개간과 산림의 황폐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 등 인위적인 환경 파괴와 이로 인한 지형 변화 과정에 대한 관찰을 문화생태학적 국토인식 측면에서 작성하였으며, ‘살기 좋은 곳’의 ‘찾기’에서 ‘만들기'로 탈바꿈하여 인간 스스로 노력하면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도출시켜 인문지리적ㆍ생태학적 주거이론이 돋보이는 이중환의 理想鄕 추구는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현실 개혁의 의지라고 권정화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살 만한 마을을 고르는 책’인『擇里誌』는 그 이름이 나중에 붙여졌는데, 그 構成은 서론에 해당하는「四民總論」, 전국 8도 地方誌인「八道總論」, 可居地를 입지조건을 설명한「卜居總論」, 결론 부분의「總論」으로 되어있다.
이중환은 당시의 유명한 地官 睦虎龍과 묘지자리를 찾기 위해서 수개월에 걸쳐 황해도와 경기도 등을 답사한 경험이 있는 등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그의 시문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훗날『擇里誌』저술에 큰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택리지』에서 논하고 있는 풍수는 모두 양택풍수에 속하는 주택과 마을, 그리고 國都에 관한 것에 한정되어 있고, 음택풍수인 묘지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 대하여 故 이찬 박사는 당시 성리학 중심의 사대부 사회에서 풍수는 정통학문이라기 보다는 잡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며, 더욱이 묘자리를 구하기 위해 함께 산을 보러 다녔던 목호룡이 이중환을 신임사화에 끌어넣었고, 그리하여 일생을 고난과 좌절로 보내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설파하였다.
이중환은 ‘사람이 살 만한 마을을 고르는 것’이『택리지』저술의 목적인 것처럼 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발문의 마지막에서 孔子와 莊子의 예를 들면서, 末尾에 가서 “이것은 살만한 곳을 가리려 하나 살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 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한 그의 말을 보면, 이중환의 근본 뜻이 ‘살 곳을 고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앞부분에서 莊子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이유가 분명해 진다며, 그는 자신의 근본 뜻을 감추려했던 것이라고 정두희교수는 보고 있다.
최창조교수는 이중환은『擇里誌』에 서술한 내용과는 다르게 ‘어찌 살 곳을 반드시 가릴 것인가’라며 택리의 불필요성을 미리 감안하고 있었고, 사대부의 희망을 피력한 그의 편향된 사고는 그의 생애와 시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일축하며,
“땅이란 그저 무대일 뿐 그 결실은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작성하였다.···(中略)···사대부들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공연한 폄하와 다를 바 없는 편견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취할 태도가 아니다. 나라에 환란이 들면 나아가 싸우고, 평온한 세월이 오면 낙향하여 자연을 즐기겠다는 원칙에 너무나 어그러지는 사고방식은 擇里에 관한 그의 생각이 일신의 평안만 지나치게 강조한다.”
라고 지적하였다. 이중환이 '택리'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그 마을에 사대부와 그로 인한 당쟁이 없을 것'이었기 때문에『택리지』가 현실 도피와 개인 이기주의로 작성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이다.
이중환은 李瀷의 實事求是 學風을 계승한 실학자로서 人文地理學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실학의 학풍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하여 이상적인 개혁안을 추구하는 다산은 산 사람이 거주하는 양택풍수와 양기풍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음택풍수를 제외한 전통풍수지리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적극적이다. “그러나 士大夫가 좋은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는 것은 上古시대에 諸侯에게 나라가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 다산은 영남ㆍ충청ㆍ전라도 순으로 좋은 길지를 꼽았다.
다산은 특히 한국 전통풍수지리의 도시양기풍수학 분야에 매우 큰 업적을 남겼다. 계획에 의해 설계된 신도시인 수원의 화성 건립은 18세기 끝 무렵에 이루어졌고, 정조의 명을 받은 다산은『기기도설』을 참고하여 독창성을 발휘하고 개선하여 引重, 起重의 기술을 개발하여 지게에서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擧重機ㆍ유형차 등 혁신적 작업 도구를 설계 제작하였다.
'성곽의 꽃'이라 불리는 과학적인 성을 건설하기 위한 설계지침인『城說』에 따라 構造物을 가장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설계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실학적 양기풍수의 건축유산을 탄생하게 하였다.
실학자들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 다산은 성곽 축조에 전통적 방식을 바탕으로 무기의 발달을 고려하여 중국 성제와 유럽 성 등의 장단점을 종합하여 石材와 塼인 벽돌을 혼용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성 기능과 거주 읍성의 기능을 결합하여 방어 시설을 설치하는 등 방어력 강화에 힘썼다.
또한, 4대문과 기타 다양한 구조물, 그리고 行宮을 지어 顯隆園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어 근대화된 실학적 양기건설을 꾀하였다.
실학자 다산은 뛰어난 지략으로 조선 특유의 성을 설계 축조함으로서 건국초기의 도성축조와는 다른 성격의 주거용 도시, 전술적 군사도시, 상업용 도시, 더 나아가 생태자연학적인 성곽과 구조물들을 설계 건설함과 동시에 건축 설계도를 남김으로서 유일하게 순수 신도시 건설의 대표적인 실학적 양기풍수학의 사례가 되었다.
洪大容은 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제도 폐지와 貢擧制 및 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洪大容은 택리에 대하여『湛軒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주는 지방이 천리로 중국이라 일컬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매 바람과 물이 혼후(넉넉함)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비치매 춥고 더움이 알맞고, 물과 산이 靈氣를 모으매 선량한 사람을 탄생시켰다.”
비록 중국의 택리에 대한 표현이었지만, 배산임수와 風水의 넉넉함, 그리고 좋은 산수에는 영기를 모아 좋은 사람이 태어난다는 풍수지리학의 택리에 대한 대표적인 조건을 서술하고 있다.
이중환의 可居地에 대한 입지 조건 중의 하나인 地理는 풍수에서 말하는 陽宅조건으로 이중 네 번째로 土色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최한기도 토질의 중요성을 부각하였는데, 사람의 몸에 신기를 생성하는 요소의 네 가지 중 두 번째로 토질의 중요성을 서술하고 있는데, 서로 주장하는 바의 방향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혜강이 땅에 대해 신기를 생성하는 요소로 표현한 것은 결국, 사람이 살기 위한 요소로서 땅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IV. 실학자들의 陰宅풍수사상의 批判과 受容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풍수를 비판한 배경을 살펴보자면 당시 그들이 처한 사회적 입장과 현실개혁 의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유배 중이거나 파직된 죄인과 야인의 입장에서 사회체제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서 기존의 틀을 바꿔보자는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 중에서 풍수에 대한 견해는 풍수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사대부에 대한 반감의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큰 공적도 없으면서 부귀영화에 빠진 권력자들이 지관을 들여 묘 터를 잡는 꼴이 혁신적 사고를 지닌 그들에게 곱게 보였을 리 없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음택풍수의 폐해가 더욱 극심하여졌고 이에 대한 실학자들의 논리적이고도 양심적인 비판도 높아졌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음택풍수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의 글은 당시 한국의 실학적 풍수지리학 연구에도 크게 도움이 될 전망이다.
1.『星湖僿說』에 나타난 이익의 批判的 實學 風水觀
이익의 주요 업적을 찾고자 하면 단연 그의 자연과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고, 신비주의사상을 비판하면서 과학을 통한 비판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어 조선철학사에서 신비주의사상의 비판은 이익을 기점으로 하여 진행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 본고 II장의 ‘동기감응’에서 논한바와 같이 全州 부윤의 공동묘지 집단 이장의 조사 결과를 예로 들며 동기 감응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히고 있지만, 이중환의 처 사천목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익이 쓴 이중환의「묘갈명』을 보면,
“중환의 처 泗川睦氏는 대사헌을 지낸 목림일의 딸(목호룡과는 13촌)인데, 정숙하고 지조 있는 여인이었다. 계축년(1733)에 졸하여, 이미 염을 했는데, 그 염위에서 빛이 마치 무지개나 달과 같이 일어나 하늘까지 뻗히었다.”
라고 적혀져 있는데, 후광의 기운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면 氣的 현상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이익의 풍수적 견해는『성호사설』에서,
그 술법이란 죽은 사람을 산에 장사지내면 유해가 지기를 받게 되고 그 여음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이, 마치 나무뿌리가 지기를 받을 때 꽃과 열매가 번성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혹시 그 氣를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후손까지 능히 그 기를 받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風水地理에 대해, 아들에게 동기감응이 이뤄진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어, 풍수에 대한 강경한 비판과는 상반된 일부 긍정하는 혼동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익이 언급한 풍수사상 내용 중「훈요십조」8훈에 나오는 山形地勢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정 반대적이다. ‘公州江’을 ‘錦江’이라 동일시한 해석과 堪輿家의 언급을 빌린 ‘반궁수이므로 松都와 漢陽 두 도읍을 등진다.’라는 역류 개념 및 배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합해보면 금강은 경주를 기준으로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한강을 포함한 이남의 모든 강이 배류수가 되는 엄청난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성호 개인의 주관적 풍수지리관에 대한 판단은 조선 중ㆍ후기 이후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왜곡된 지역감정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조부 이지정의 고손인 이중환의『택리지』에「훈요십조」제8조에 ‘차령 이남은 배역의 땅’으로 서술됨으로서 정착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익의 자연과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조선철학사의 주제를 전환시키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고, 실학자들이 보다 현실적으로 유용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겠다.
2. 홍대용의 災異설의 배척과『湛軒書』의 풍수지리사상 해석
홍대용은 땅에 대하여 살아있는 존재로 표현하며 전통적인 풍수지리설의 근본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듯하나 풍수지리 자체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華夷에 있어서도 중국은 어디까지나 외국이요.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災異설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풍수설의 해독에 대하여 老佛이나 양주학설보다 더 심하다고 하면서 주자의 예를 들었는데,
“더구나 자양(주자)의 山陵議狀이 오로지 術家의 말만 주장한 것이 너무 심한 데도 대사(사관들)가 이 말이 유종(유가의 종주)에서 나왔다 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했다. 이러므로 간사한 말이 거침없이 퍼져서 천하가 미친 듯하여 송옥(소송과 재판)이 들끓고 인심이 날로 무너지게 되었으니, 폐단의 혹독함이 어찌 선학(頓悟)이나 事功(공리론)에 견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풍수설이 주자의 山陸議狀에서 유래되어 유행하게 되었다고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부모가 죽은 후 매장하는 것은 단지 극진히 공경하는 의미밖에 없는데도, 흉지니 복지니 하면서 후세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풍수설을 맹신하는 것에 대해서도 홍대용은 비판하였다.
홍대용은 이렇게 음택풍수설에 대해 비판을 하였지만,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그랬듯이 오히려 긍정적인 입장을 더 많이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의 의무려의 山神을 모신 사당인 북진묘를 평함에 있어 “廟地는 風水가 아주 좋아 큰 들이 앞에 임하고 조공이 엄중하여 名山이 산신묘 다왔다.”라며, 앞에 놓인 명당과 주위 산들이 향응해 주어 명산다운 자태를 보여준다고 풍수에 근거한 형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그 墓자리가 길하지 않으면 바람과 불이 재앙을 만든다면서 그 이치에 대해,
“수화와 風氣는 운행하는 길이 있으니, 實을 만나면 피해 달아나고 虛를 만나면 모이게 된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 그 옳은 방법(道)을 잃으면 재앙이 반드시 이르나니, 해골이 엎어지거나 뒤쳐지거나 타버리거나, 심지어 벌레가 생기고 썩어 없어지기까지 함은 장사를 안전하게 지내지 못한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주자의 산릉의장에 나온 내용과 비슷한 논리를 폄으로서 주자에 대해 반론을 주장했던 의견이 무색할 만큼 정반대로 동조하는 듯한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사람이 부모에게, 살아 계실 때 봉양을 극진히 하고 죽으면 정성을 다하며 남긴 글과 남긴 의복을 높이 받들고 삼가 갈무리하는 것은 공경의 극치인데, 더구나 유해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묘 자리란 유해를 갈무리하는 곳인데, 감히 공경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여 부모의 유해를 잘 갈무리하는 것에 대한 이론도 주자의 이론과 유사한 개념이다.
홍대용의 음양오행, 풍수설, 도교의 신비사상 및 지구중심설 등의 부정과 비판은 그의 역사관 및 사회사상으로 이어져 근대적인 과학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보여 지며, 그 당시 조선사회에 팽배해 있던 소중화 의식을 탈피하고 화이관을 극복하여 주체성을 드높였지만, 그러한 부정과 비판 속에 긍정에 관련된 내용들이 뒤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
3. 정약용의 반풍수론의 특성
다산은 음양오행이론 중에 음양설은 긍정적이었지만, 오행설의 상생상극의 법칙은 비실증성으로 인하여 圖讖設 등과 함께 배격하였다.
특히, 음택풍수에 대해서는 풍수설이나 풍수기법은 옳은 것이 아니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를 배척해야 한다며 여유당 전서의「甲乙論」과「風水論」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내용을 논술하면서 통렬히 비판하였다.
다산은 묘지의 사용에 따라 길흉화복으로 돌아온다는 미신적 믿음과 오직 地氣에만 맹목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의 근본 원리를 망각하게 되어 발생되는 풍수지리의 폐해에 대해 예를 들어가며 지적하고 관가에서 묘지풍수 관련 소송사건들을 올바른 원칙에 의거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산은 때에 따라서는 풍수지리를 배척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엄밀히 말해서 왕권의 산릉이나 인과관계가 있는 윤고산과 관련된 음택에 대한 풍수지리에는 여느 사대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尹善道의 손자 남고 윤규범(1752-1846)에게 보낸 詩를 살펴보면,
“듣자니 지금 화성부에···(中略)···왕릉에 상서로운 기운 서려 있어···(中略)···
탁월한 영감 윤고산은 인품이 속세를 훨씬 벗어났었지···(中略)···
강력히 주장했던 풍수설 때문에도···(中略)···일천 년 두고두고 충신이 되었다오.”
라고 되어 있어 尹善道가 산릉을 선정한 곳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속세를 초월한 인품이 뛰어난 윤고산이 풍수설로 인해 충신이 되었다는 시의 구절로 보아 풍수설을 간접으로 옹호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한 단계 발전된 시의 내용으로는,
“주구에다 새로이 음택 정했네.
성심엔 길지인지 미심쩍지만, 신통한 눈 옛사람 벌써 보았네.
푸른 바다 자라며 거북 모이고, 청산엔 호랑이며 표범 깔렸네.”
‘顯隆園 改葬’에 대한 이 시는 다산이 매우 터부시한 음택풍수에 대한 좌청룡과 우백호의 언급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무를 상징하는 물(水)인 푸른 바다와 거북까지 언급하며, 顯隆園을 윤선도가 보았던 음택의 신묘안적인 길지로 묘사하여 풍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산의 回甲日에 작성된 내용에 “내가 죽으면 집의 동산에 매장하라”면서 “너희가 禮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의 遺言을 위반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孝라고 하겠느냐?”하였다.
다산의 아들은 아버지 유언에 따라 여유당 뒷동산에 매장했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라는 내용을 보면 자신의 신후지지에 대한 입장은 매우 강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사망 직전에 작성된 내용을 살펴보면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다산 본인의 장사지낼 땅을 보면서 남긴 시의 내용에는,
“장지를 먼저 경영하여 죽기를 기다리었네···(中略)···뼈 묻는 뒷일을 어찌 남에게 맡긴단 말인가···(中略)···청오를 찾아서 소원을 펴는 게 부끄러워라···(中略)···어느 것이 바로 나의 참인 줄 알 수가 없네.”
라고 되어 있다.
다산은 세상을 떠나면서 지사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맡기는 것을 평소의 소신처럼 거부하고 있지만, 음택풍수를 쫒아 소원을 펴는 것에 대해 못내 부끄러워하는 고뇌에 찬 본인의 참 모습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듯 다산의 풍수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부정론의 대부분이 풍수이론체계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비난이 아니라, 그로 인한 관습과 제도라는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다산이 신랄하게 또는 보기에 따라서는 감정이 격해서 풍수설을 비난한 이유로 임덕순교수는 천주교인으로써의 당시의 엄격한 교회법에 따른 一元의 천주를 근거로 한『天主實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으며, 또 한 가지 이유는 ‘풍수를 따져서 부모의 장사를 지내는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가르치는 내용이 담겨있는『周禮』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또한 다산의 반풍수사상에는 감성적 비판과 반박이 풍수설의 일부인 묘지풍수설 위주로 지나치게 표현되어 있어 국도ㆍ양기풍수설 등의 풍수설 전체를 비난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4. 惠岡의 자연관과 풍수지리
최한기의 자연관은 주자학적 자연관의 바탕 위에 실학적 관념이 가미되면서 형성되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실학자들이 자연 현상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자연학적 또는 존재론적 개념인 음양오행설을 무시했듯이 음양 및 오행의 개념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음양방술에 대하여 해독을 서술한다거나, 음양방술은 누구나 따르는 가르침이 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매우 나쁘다든가, 음양술수는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며 음양술수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최한기는 음양오행을 단일한 기로 환원하고 상생상극을 단일한 기의 단일한 운동, 즉 활동운화로 환원하여 그 자연에서 도덕성과 음양오행에 대한 인식의 틀을 걷어내고 있다.
최한기는 풍수의 葬埋에 대해서, “매장의 제도는···(中略)···水葬이나 火葬 등(이 있지만)···(中略)···오직 매장만이 천하에 通行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장사제도 중 埋葬 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매장을 위한 땅의 조건과 광중의 깊이까지 친히 이르고 있는데,
“그러니 정결한 土品으로 眞氣가 있는 땅을 가려 壙中을 깊게 하고 신체를 용납할 정도로 하되, 堪輿家의 잡설에 구애받지 말고 고금 예법의 손익을 참작하면 된다.”
라고 하여, 地官의 설에 따르지 말고 예법에 따라 장사지낼 것을 권하면서, 풍수지리에 대하여 평소에는 배척한다며 운운하다가도 어느덧 잡술을 따르게 되는 것은 마음에 진실 됨이 부족하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실학자들의 대부분이 풍수지리에 대해 혹평하면서도 때에 따라 수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 반하여 최한기는 풍수학을 논함에 있어 비교적 학자다운 기교를 발휘한다. 그는 吉凶禍福에 대하여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러나 葬地의 화복과 문벌의 훼예에 이르러서는 실제의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므로, 후인들이 잡된 이론을 부회하여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도리어 본래의 뜻을 잃게 되니, 그것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다만 양주ㆍ묵적이나 老佛의 학문에 비길 정도만이 아니다. 장지는 본래 五患을 피하여 백골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뿐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方術이란 것이 자손들의 빈부궁달과 수요성쇠까지 先世의 백골에 책임을 지워 변동시키지 않음이 없고, 심지어는 효도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고 말하면서, 풍수가 五患을 없애고 망자를 편안하게 모시는 본래의 뜻을 잃어 부귀영화에 대한 길흉과 효도로 왜곡되게 행하고 있음을 깊이 우려하기도 하였다. 최한기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현실에 대한 우려의 해결방안도 내어 놓았는데,
“後世의 방술하는 자들은 천루한 데 나아가서 한 가지 기예로써 과시하고 시세를 따르기에 급급하여 명예를 구하고 利를 도모하는 계제로 삼는가 하면, 으레 역옥에도 방술이 참여하고 잠양(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복을 빎)에도 방술들의 간사한 계책이 많았다. 그러므로 역대를 경험해 보면 그들은 백 가지 해로움만 있을 뿐, 한 가지의 이로움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中略)···民生들이 날마다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 종사하는 자 중에 우수한 자만을 뽑아 모든 有司에게 예속시켜서 役使에 이바지하도록 하되 백성 다스리는 관리와는 비교하지 말아야 하며,···(中略)···다만 그들의 입고 먹을 자료만을 공급하여 역사에 이바지하게 할 따름이다.”
라고 하여 방술은 百害無益하나 방술하는 자들 중 백성들이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종사자 중 우수한 자를 뽑아 활용하자는 방안과 관료로 정착화 하는 방안까지 서술하여 완전 배척보다는 방술의 본래의 뜻을 찾아주고 이에 따른 병폐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대부분이 정치에서 소외된 본인의 처지에 반한 이야기나 또는, 유배 생활 동안 겪으면서 보고 느낀 풍수의 폐단에 대하여 처벌하려 하는 꾸짖음만 서술하여 작성한 경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실학사상의 병폐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더욱 현실적으로 모든 백성에게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실학적 개념이 가미된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조선후기 대 실학자 최한기의 사려 깊은 풍수적 혜안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혜강의 뜻에 따라 풍수지리학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관리와 활용이 시급한 韓國전통풍수지리의 나아갈 바를 밝힌 중요한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5. 기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음택풍수사상
실학자 鄭尙驥(1678-1752)는 인생의 화와 복이 ‘하늘에 매였고 땅에 매이지 않았다.’고 보며 지사가 주장하는 것은 ‘길한 사람이 길한 땅을 만난다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사람이 힘을 써서 구한다고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풍수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증험하여 주는 사례로 북적의 화장과 남만의 수장을 예로 들며 그 자손에게 능히 화가 미치지 않는다면서,
“사람의 골육이 이미 갈라졌으면 氣脈이 서로 통하지 못해서 비록 아프고 가려움이 있어도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한다. 다만 풍수가 길하다는 것은 물이 나거나 발레와 개미가 시체를 파먹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라고 정인지의 후손이며 李瀷의 문인인 農圃子는『禁風水』에 풍수의 비판적 시각을 나타내었다.
실학자 박제가도『북학의』에서
"관이 뒤집혔다거나 시체가 없어졌다거나 하는 일로써 영험이라 하지 않는 자가 없거니와, 이것은 무덤 속에 예사로 있는 현상이고 인간의 화복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朝鮮後期 實學者들의 한결같은 陰宅發福에 대한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풍수관은 타락한 묘지풍수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로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주로 정상적인 관료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한직이나 파직된 혹은 초야로 내몰려진 자들의 푸념이나 원망을 음택풍수의 後孫發福에 집중되어 경멸의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점이 본인들 스스로가 현실에서 도태 당한 장본인이기에 상대적으로 더욱 발복에 대해 타깃을 삼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학자들이 행하였던 음택풍수의 비판에 대한 문제점은 보다 나은 合理的 사고와 實證的인 비판을 내 세우지 못하고 겉치레적인 비판으로 흘렀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에 처해진 조선사회의 형태와 과학수준 등으로 미루어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 어려웠다는 점과 왕권정치와 유교사회의 큰 기둥인 주자 등의 가르침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기를 내세우지 못한 점 등으로 풀이되지만, 이들이 풍수의 本質을 멀리한 채 묘지 터 잡는 타락된 술수에 혈안이 되어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일관된 비방과 비판만을 일삼지 않고 진심어린 우려와 걱정을 하였다면, 崔漢綺의 예와 같이 보다 건실한 해결 방안이나 대응책이 마련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이는 실리적, 실용적,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민생 문제나 사회개혁을 추구하려했던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한계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家門과 個人의 영달을 위해 기인된 문제 많은 타락한 음택風水를 士大夫들이 믿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의 물음에 대하여 최창조 교수는 “朱子가 山陵을 논의하는 데에 風水說을 말한 것에 기인하여 士大夫들이 풍수術法을 學業으로 삼아 연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고 정동유의『서영편』에 있는 예를 들면서 “邪道에 대하여 그 시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思考의 限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同氣感應 論理가 결국은 風水를 利己的으로 만들어버려서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社會惡에 대하여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그들이 同氣感應을 논박한 것은 당연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風水가 추구하는 본연의 자세란 風水地理學의 기본 취지인 ‘천지인과의 調和를 추구하여 땅에 대한 소박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것’인데, 여기에 吉凶禍福만을 부각시킨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가미되어 풍수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되어 철저히 타락되고 부패한 개인의 부귀영달을 꾀하려는 풍수로 변질되어 사용되는 어리석음으로 변모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風水地理가 본연의 자세로 사용되지 않고 타락되어 分離 사용되고 있는 風水와 地理에 대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실학자들은 陰ㆍ陽宅의 풍수 원리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풍수를 떼어서 분리시켜 자연스럽게 절름발이 풍수지리학을 생성시켰던 것이다.
타락한 음택풍수를 홀가분하게 떼어버린 결과 한국풍수에는 미묘한 변화가 이뤄졌는데, 그 첫째로는 나머지 풍수지리학 분야인 현실적 실용의 陽宅ㆍ陽基學 부분과 실학적 지리학 분야 등에 있어서 한층 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지며, 둘째,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풍수와 지리의 이분화 된 사용과 타락한 풍수의 비판으로 빚어진 관심은 또 한편으로는 한국전통의 풍수지리학이 한국풍수문화 속에서 퇴조되어 사라지지 않는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근대화 물결과 열강의 침탈 속에서 동학과 천도교 등으로 무장된 宗敎的 精神으로 탈바꿈되어 민간풍수로 스며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V. 실학사상에 의한 傳統地理 풍수사상의 부흥
조선전기 지리서와 지도에는 산경 개념의 산맥을 그려 넣어 우리나라 지형 표현의 전통기법으로 자리 잡은 <혼일강리대역국지도(1402)>·『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1488)』등의 현존하는 관찬지리서와 산수를 강조하여 그린『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등이 있다.
이제까지의 전통지리풍수학에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관찬지리서인 지리학은 조선의 정치사 분야에서 16세기의 士林派 시기, 17세기의 붕당기와 18세기의 탕평기에 대한 조선성리학 시기, 19세기 세도정치기의 북학사상 시기를 거치면서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강조된 자유성, 과학성, 현실성의 학문은 전통지리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서양의 과학적 지리사상이 반영된 이수광의『지봉유설』, 유형원의『반계수록』에 서술된「郡縣制」와「地理群書」, 자연지리학설의 개념인「지구론ㆍ지운론ㆍ조석론」이 반영된 이익의『성호사설』, 지도 역사상 우리나라 최초의 축척인 百里尺을 사용한 정상기의〈동국지도〉, 인문지리서인 李重煥의『택리지』,「山經表」의 근간인 신경준의『여지편람』, 정약용의『대동수경』과 수계 중심의 역사지리서인『대한 강역고』, 16만 분의 1의 축척으로 현 지도책 성격을 띄는 김정호(?-1864)의〈청구도〉, 산맥과 령 및 하천을 표시한 김정호의〈대동여지도〉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실학자 신경준은 전통지리학과 18세기 후반 정약용과 김정호의 실학적 지리학의 교량 역할을 하여 한국 전통지리풍수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전북 순창에서 출생한 실학자 여암 申景濬(1712-1781)은 유ㆍ도ㆍ역사ㆍ음운ㆍ문자학 외에도 지리학 분야에『道路考』,『강계고』,『山水考』,『가람고』,『여지편람』,『동국문헌 비고』에 실린「여지고 27권」,『동국여지도발』,『동국팔로도소식』등의 많은 연구와 저서를 남겼다. 국어학자로 널리 알려진 신경준은 성호 이익과 이중환의 지리적 지식을 토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적 지리 개념과 인식을 체계화하여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민간의 개인 신분 차원에서가 아닌 官에서 주도한 공신력 있는『여지편람』,『동국문헌비고』등의 관찬지리지를 편찬함으로써 실학적 전통지리풍수학의 의의가 크다 하겠다.
그의 실학적 지리관은 한국풍수사상의 기본인 용맥이 생기를 공급받아 지맥까지 이어져 내려간다는 기본 논리로 무장되어 있고, 산에 대한 맥의 흐름을『산수고』에서는 經과 緯로 표현하였던 것이「산경표」에는 대간, 정간, 정맥 및 지맥의 줄기로 묶어 산의 맥에 대한 흐름을 표현했다. 신경준에 이르러 전통지리풍수학 부분이 현대화한 실학적 전통지리풍수학으로 변화하였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겠다.
조선후기 실학파의 마지막 인물인 혜강은 인간인식의 '형식'과 '내용'을 테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인식론적 논술저서인『氣測體義』를 저술하였는데, 氣의 원론을 논한「神氣通」과 기의 응용을 논한「推測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은 1850년대 초 중국 베이징의 출판사 人和堂에서 호화 활자판으로 출간됐다.
정약용의 뒤를 이은 최한기는 고증을 위한 고증이나 지식의 백과사전식 나열로 발생한 실학사상의 병폐를 극복하는 데 힘썼다. 최한기는 지리학의 大家인 金正浩와 규장각 검서관의 서얼 출신인 오주 李圭景(1788∼?, 이덕무의 손자)과 친밀히 지냈는데, 그는 김정호와 함께 淸國本의 지구도를 대추나무에 판각하였고 김정호가 제작한〈靑丘圖〉에 서문을 써 주었다.
최한기는 ‘地理學’이라는 용어 대신 ‘地志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地志’란 풍토ㆍ산물ㆍ古今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地圖’란 郡의 형태를 그린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인간은 토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지도와 지지를 버리고서는 지리를 알 수 없다며 ‘地志學’의 유용성과 그의 지리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지구의 運化는 여러 천체로 부터 이루어지고 인생의 도리는 지구의 運化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으로 설명하여 천ㆍ지ㆍ인의 三者를 유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최한기의 자연과학에 관한 사상이 분명 지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진다.
李圭景이나 崔漢綺 등은 당시의 유교 집권세력의 朝鮮西學에 대한 탄압 하에서도 명ㆍ청대 서양전교 신부들의 손에 의해 저술된『한역서학서』와 청국지식인들이 저술한『청래양무서(태서신서)』를 접하며 西學의 脈을 이어갔다.
이를 통해 최한기는 세계지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합리적인 자연지리 인식으로 자연ㆍ인문의 종합지리서인 l3권 6책으로 된『地球典要』를 탄생시켜 조선 최초로 西歐地理學을 수용한 지리학자로 지목되고 있다.
이원순교수는 崔漢綺의 실학적 지리인식의 기반이 ‘氣’의 철학인 점, 실용정신에 입각하여 편술한 점, 세계지리에 대한 인식 태도가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실증적인 점, 지리 인식의 방법이 매우 다각적이며 경험적 구조를 가진 점, 우리나라 최초로 別冊으로 된「世界지권첩」을 제작한 점을 들어 독창적인 運化氣의 이론 위에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을 이루어 놓은 최한기의 선각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실학자 다산은 개인적으로 지리에 대한 고증에 심취하여『여유당전서』에「地理策」,「대동수경」등의 지리적인 내용을 실은 것으로 판단된다. 땅을 중시한 지리학자인 그는 20편의 지리학 분야를 저술하였고, 김정호, 이중환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리학자라 평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전통지리 분야에는 거의 모든 실학자들이 빠짐없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지리서 등이 편찬되었다. 본고의 한정된 지면 속성상 일일이 실학자들의 전통지리학의 풍수적 사고에 대해 논하는 것은 줄이기로 한다.
地理를 著述한 대부분의 實學者들에 대한 地理觀은 風水와 지리가 다소 뒤섞인 혼동된 개념으로 접근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사대부라는 지위로서 드러 내어놓고 풍수를 논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 대체 개념인 ‘地理’와 ‘擇里’ 분야에 힘을 쏟아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학자에 따라서는 풍수학문에 대한 지식을 타락된 풍수가 아닌 現實的이고 실용적이며 合理的인 ‘地理’에 덧씌워 자신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주관적인 입장과 생각을 포장하여 피력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하지만 실학자들이 편찬한 귀중한 지리서들은 결국 한국 전통지리 분야의 풍수학사에서 빛나는 황금시기를 이루게 되었다.
VI. 結論
傳統風水地理學問에 대한 조선후기실학자들이 주장한 實學哲學을 수평적 풍수哲學의 논리구조로 연구해본 결과, 양택ㆍ양기ㆍ지리학 분야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음택학 분야는 서로 경쟁하듯 한 목소리로 그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음택학 분야에 있어 조선후기실학자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풍수학문 자체의 본질을 왜곡하여 타락한 풍수의 분리작업을 통해 음택풍수를 전통풍수지리학에서 따로 떼어내려 한 점, 수직적 풍수哲學의 논리구조인 눈에 보이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양분화한 결과로 인하여 실학적 擇里學과 地理學분야가 반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한 점 등의 비판, 긍정, 그리고 수용이 혼재된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考察해 보았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비판을 가하는 풍수학에 대하여 그 폐단의 원인, 비판을 가하는 연유,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점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음택풍수학에 대한 폐단의 원인은, 묘지의 사용에 따라 길흉화복으로 돌아온다는 미신적 믿음과 오직 지기에만 맹목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수덕을 도외시하는 경향으로 변질되었음을 경계함이다.
둘째, 풍수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는 연유에 대하여, 대부분 당쟁에서 패배하여 초야에 묻혀 살면서 남인학자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몰락한 사대부의 한과 이상향에 대한 절실한 꿈과 기존의 틀을 바꿔보자는 진보적인 주장, 개인적인 政治的 歷程으로 사대부에 대한 반감의 표현, 당시의 엄격한 교회법과 반풍수적인『周禮』의 영향, 성리학 중심의 사대부 사회에서 풍수는 정통학문이라기 보다는 잡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 등으로 학계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셋째, 실학자들의 혹평에 대한 문제점으로는, 풍수이론체계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비난이 아니라 그로 인한 관습과 제도라는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풍수설의 일부인 음택풍수설 위주로 지나치게 표현되어 있어 국도ㆍ양기풍수설 등의 풍수설 전체를 비난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일관된 비판을 떠나 실학사상의 병폐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서 더욱 현실적으로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실학적 개념이 가미된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실학적 풍수문화 흐름에 대한 사상적 특징과 의의를 들면 크게 3종류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택리 부분에 있어서는 定都나 國都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개인의 주거지로서 가거지의 적용과 신도시 양기 건설을 이룩한 實學風水의 ‘擇里實用化’를 둘 수 있다.
둘째, 지리 부분에 있어서 과거의 官撰化에서 꾸준히 발전하여 私撰化 및 世界化를 이룬 實學風水의 ‘地理近代化’를 꼽을 수 있다. 셋째, 음택부분에 있어서는 본질의 변화로 인한 타락한 풍수에 대하여 공격적인 批判을 하였으나, 한편으로 그들 대부분은 풍수문화의 본질을 受容하는 實學風水의 ‘陰宅兩面化’로 정리되어진다.
이처럼 實正, 實證, 實用적인 연구를 통해 민생 문제나 사회개혁을 추구하려했던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실용의 陽宅ㆍ陽基學 부분과 실학적 지리학 분야 등의 풍수지리학 분야에 있어서 한층 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점은 높이 살만하다 하겠다.
실학적 풍수지리사상의 흐름을 연구한 결과 陽基 立地觀 및 陽宅論 등의 擇里學과 전통지리학에 대한 풍수사상은 다분히 실학적이었음에는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의식을 갖는 이용후생학문으로 정의되는 실학적인 개념에 음택학을 포함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논자는 반성적 사유와 탈근대의 논리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는 ‘민족주의’, ‘근대기획’과 ‘근대주의’의 20세기 실학개념에서 떠나, ‘실학의 본질은 성리학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일컫는 오늘날의 실학의 개념과 음택학의 상관성에 대해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 놓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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