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진경산수화를 꽃피운 겸재 정선(1676~1759)은 청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금강전도(국보 제217호), 청하성읍도(강서구 겸재정선기념관 소장), 내연산 삼용추, 내연산 폭포도 등 작품을 남겼다.
청하는 진경산수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그림양식이 완성된 진경산수의 고향이다. 진경산수란 조선시대에 중국풍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멋과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현실을 통한 주자학적 자연관과 풍류를 표현한 한국적 산수화풍을 일컫는다. 이러한 진경산수를 창시한 분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겸재 정선은 조선후기 문예 부흥기였던 영조 시대의 화가이다. 그의 예술은 당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족적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의 나이 58세 되는 1733년 이른 봄, 겸재는 청하 현감에 제수되어 1734년까지 청하에 머물렀다. 비록 2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지역의 청하를 빼놓고는 겸재의 예술세계를 논할 수 없다. 이 기간 중에 국보 제217호인 '금강전도'와 '내연산 삼용추'와 같은 우리나라 회화사의 이정표가 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겸재는 주변의 주문 그림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성품 탓인지 그림을 부탁하면 거절할 줄 몰랐다.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고 그래서 조선시대화가들 중 가장 많은 유작을 남겼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고을 청하에서는 외부의 간섭과 방해 없이 오로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고을에서 그리운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술세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환갑을 두해 앞두기는 했지만 아직 중년의 열정이 살아있었고 원숙한 필력과 내연산의 아름다운 풍광은 젊은 시절에 스승 삼연 김창흡과 다녀온 금강산의 수려한 자태를 떠올리게 했다. 또한 바하대와 학소대의 기암절벽은 겸재 특우의 도끼로 쪼는 듯한 필묵법을 실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이런 배경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청하에서 꽃피울 수 있었다. 물론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이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 한다 하더라도, 청하현감 시절은 겸재의 인생과 예술에서 아주 큰 행운과 소중한 기회였음이 틀림없다.
1733년 청하현감으로 부임한 그 해 겸재는 <내연산 용추도>를 그렸다. 굵고 힘찬 적묵법과 강한 흑백의 대비, 과장과 생략, 그 중에서도 겸재 특유의 도끼로 쪼은듯한 강렬한 필법이 그의 작품을 통틀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청하는 겸재의 진경산수풍이 만개한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회화사의 자랑거리인 진경산수가 태어난 무대이다. 이듬해인 1734년 겸재는 내연산에 올라 용추계곡 3단폭포 중 맨 위쪽 상폭바위에 '갑인추 정선'이라는 각자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겸재가 우리 고장의 자연에 직접 남겨놓은 자취이다.
그 해 겨울 청하에서 그는 생애 최고의 역작인 <금강전도>를 그린다. <내연산 삼용추>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진경산수화풍의 장점들이 <금강전도>에서 한껏 펼쳐진다. 청하에서 그린 <금강전도>는 이제까지 그의 금강산 그림과는 아주 달랐다. 36세 때의 <신묘년 풍악도첩>은 반 지도적 성격으로 필력이 어리고, 50대에 그린 고려대 박물관 소장 <금강전도>는 필치는 원숙하지만 구도에서는 박진감이 덜하였다. 그런데 청하의 <금강전도>에서는 금강산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변형과 과장, 필법의 강약, 광선의 대비와 부감법을 맘껏 구사하여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압도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전의 금강산 그림들이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청하의 <금강전도>에 이르러서는 사실에서 사의로 대전환을 이룬다.
겸재가 보여준 진경산수의 사실정신이란 우리가 현대미술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주의, 리얼리즘과는 사뭇 다르다. 겸재가 <금강전도>를 그린 곳이 금강산이 아니라 청하 고을이었고, 금강산에 다녀 온지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가금 속에 담아왔던 금강산을 재구성하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경의 사생화가 아니라 실경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이형사신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내연산 삼용추>에서 진경산수 화풍이 처음으로 나타났다면 <금강전도>는 진경산수화풍의 완성을 의미한다.
일세의 명작을 청하에서 남긴 겸재는 현감의 임기를 오래 채우지 못하고 불과 2년 만에 노모 밀양 박씨의 임종으로 벼슬을 버리고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필력이 한창 무르익은 겸재였지만,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그림을 자제한 듯 이 시기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청하 현감 시절 겸재의 작품활동은 매우 의욕적으로 왕성했다. <내연산 폭포도>와 영남 일대의 58곳의 명승 고적을 담은 교남명승첩을 비롯하여 <내연산 삼용추>,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성읍도>, <금강전도>와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교남명승첩>은 겸재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손자 정황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감이라는 벼슬은 종6품이다. 딱딱이를 치며 돌아다니는 위수 벼슬에 비하면 한 고을의 목민관으로서의 청하시절은 떳떳하고 더없이 평화로웠을 것이다. 비록 벼슬은 말직이었지만 앞 시대의 미미한 사경산수의 전통, 그리고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그림양식을 이룩했다. 대개에 경우 선구적인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사람들은 가능성은 활작 열어두고 그 결실은 다음 세대에 의해 발전되고 꽃피우게 되는데 겸재는 스스로 문호를 열고 스스로 그 결실을 맺었다. 겸재의 진경산수의 무게가 금강산에 편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이 우리 지역의 청하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금도 내연골에는 그 때 겸재가 드린 소나무 두 그루와 상폭바위에 갑인추정선이라는 내연산 탐승 각자가 진경산수의 산 역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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