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의 일기로 건(乾)·곤(坤)의 순서를 단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金晬)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座目 : 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다만 임진기사는 날마다 기록하였고, 1593년에서 1598년까지는 연월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혀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정만록’이라는 책이름이 선조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저자(著者) 이탁영(李擢英) (중종 36, 1541∼광해 2, 1610)
자(字)는 자수(子秀), 호(號)는 반계(盤溪) 또는 이사재(李思齋),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영리(營吏)로서 임란(壬亂)이 발발하자 순찰사(巡察使) 몽촌(夢村) 김수(金晬)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하였을 때에도 수종(隨從)하여 헌책(獻策)한 바가 많았다. 1593년(선조 26)에는 초유사(招諭使)와 경상좌감사(慶尙左監司)를 지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서 초병(招兵) 및 모량(募粮) 등의 방책(方策)을 건의하여 전승(戰勝)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그리고 두 관찰사의 막하에서 대소문보(大小文報)를 대작(代作)한 바가 많은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평란후(平亂後) 논상(論賞)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며 효행이 특출하였다 한다. 숙종(肅宗) 때 평란(平亂)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정조(正祖) 때 충효사(忠孝祠)가 세워졌다.
저서(著書)로는《정만록(征蠻錄)》효사재문집《(孝思齋文集)》이 전한다.
이《정만록(征蠻錄)》은 원래 저자(著者)가 임란시(壬亂時) 진중(陣中)에서《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목(題目)으로 초(草)하여 두었던 것이다. 난(亂)이 평정(平定)된 1601년(선조 34)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시발(李時發)을 시켜 도내(道內)의 사적을 채집케 하였는데 이 때 저자가 이 일록을 재정리하여 제출하였던 바, 이를 어람(御覽)한 왕은 정만록(征蠻錄)이라 명명하여 계하(啓下)하였다. 건권(乾卷) : 표지 이면(裏面)에 임진록(任辰錄) 제하(題下)에 임난 당시의 참전한 영상(領相)이하 군관(軍官)의 좌목(座目)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하(題下)에 월일(月日)을 별행(別行)하여 그날그날의 듣고, 보고, 겪고, 느낀점을 기록하였다. 권말 여백에는 1712년(숙종 38)에 쓴 보만당주인(保晩堂主人) 안연석(安鍊石)의 자작자필(自作自筆)의 후지(後識)가 있는데 저자(著者)의 충효(忠孝)와 재능(才能)을 찬양하고 있다.
곤권(坤卷) : 먼저, 임란(壬亂)의 개황(槪況)과 이 일록(日錄) 및 연혁(沿革)·통문(通文)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謄書)하게 된 연유를 6면(面)에 걸쳐 자세히 적은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敎書)·장계(狀啓)·통문(通文)·첩보(牒報)·치보(馳報)·격문(檄文) 등을 전재(轉載)하고 있는데 당시 조야(朝野)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資料)다. 권말(卷末)에 일본(日本)에 피로(被虜)된 명인(明人) 허의후(許儀後)가 자국(自國)에 진달(陣達)한 기밀봉사(機密封事)를 전재하고 있는데 즉 진일본지상(陣日本之詳)·진일본입구지유(陣日本入寇之由)·진어구지책(陣禦寇之策)·진일본관백지유(陣日本關白之由)·진일본육십육국지명(陣日本六十六國之名) 등 6조로 당시 일본(日本)의 사정을 살피는 자료이다.
임란(壬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는《선묘보감(宣廟寶鑑)》을 비롯하여 이순신(李舜臣) 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柳成龍)《징비록(懲비錄)》, 조경남(趙慶男)의《난중잡록(亂中雜錄)》, 신경(申炅)의《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노(李魯)의《용사사적(龍蛇事蹟)》 등 수십 종(種)에 달하고 자필본(自筆本)으로서는《난중일기(亂中日記)》와《징비록 (懲비錄)》이 대표적인 것임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라 하겠다.
이《정만록(征蠻錄)》은 위의 제기록(諸記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敵情)과 아군(我軍)의 병력배치(兵力配置)를 위시한 전투상황과 조야관민(朝野官民)의 사정을 상술(詳述)하고 있음은 물론 당시의 교서(敎書)·유서(諭書)·격문(檄文)·장계(狀啓)·치보(馳報) 등을 아울러 등초수록(謄초收錄)하고 있어 임란연구(壬亂硏究)에 큰 도움이 되는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영리(營吏)의 신분으로 순찰사(巡察使)의 막하(幕下)에서 적은 일기(日記)이어서 가사의 제약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 임진기사(壬辰記事)는 4월 14일 임란발발일(壬亂勃發日)로부터 기필(起筆)하여 그해 연말(年末)까지 약 10일간(日間) 결기(缺記)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적혀 있어 어느 임진란일기(壬辰亂日記)보다도 충실하고 자세하다. 특히 순찰사(巡察使)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함양(咸陽)에서 출발(出發),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했다가 다시 환영(還營)한 저간(這間)의 역로(歷路)의 일기(日記)는 다른 문헌(文獻)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인 듯하다. 그리고《정만록(征蠻錄)》이란 서명(書名)이 선조(宣祖)의 어정(御定)이란 점에서도 이 자료의 가치(價値)는 한층 더해진다.
'묵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의 간찰 (0) | 2013.10.02 |
---|---|
[스크랩] 朝鮮後期의 閭巷文人畵家와 作品 (0) | 2013.10.02 |
[스크랩] 문경의 `조선요` 계보(조선백자 8대종가) (0) | 2013.10.02 |
[스크랩] 조선시대의 사각호족반(四角虎足盤) (0) | 2013.10.02 |
[스크랩] 사랑하며 부르고 싶은 단 한사람 (0) | 201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