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기(李芑)
1476(성종 7)∼1552(명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자는 문중(文仲)이다. 호는 경재(敬齋)이다. 명신(明晨)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추(抽)이다. 아버지는 사간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성희(成熺)의 딸이다. 좌의정 행(荇)의 형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장리(贓吏)였기 때문에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종성부사·경원부사·의주목사로 전전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했지만, 삼사를 비롯한 철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署經)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가지 못했다. 1522년(중종 17)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2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했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동안 지은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유관은 나중에 보복을 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1543년 의정부우찬성에 이어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尹任)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판중추부사·병조판서로 강등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명종이 즉위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을 하자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윤임·유관 등을 제거하고,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면서 병조판서를 겸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1549년(명종 4) 영의정에 올랐다. 그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가 죽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가 받은 훈록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되었다.
영의정 이기 묘 전경-뒷쪽의 곡장이 아버지 이의무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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