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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병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장안봉(微山) 2012. 12. 25. 00:47

병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현황과제

 

이 광 우

(영남대 국사학과 강사)

 

 

1. 병산서원의 연혁 개략

 

屛山書院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西厓 柳成龍(15421607)修巖 柳袗(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안동부의 屬縣豊山縣 치소에 위치해 있던 豊岳書堂이 그 전신이다. 그 이전에는 인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족인 豊山柳氏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사찰이었다고 한다. , 병산서원은 사찰에서 서당을 거쳐 서원으로 발전한 경우로 볼 수 있다. 永嘉誌에 따르면, 1563(명종 8)에 건립되었으며 養正書堂, 伊溪書堂, 芝陽書堂, 佳野書堂, 龜潭書堂과 더불어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서당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지역 사림들의 건의로 국가에서 學田을 지급했다는 영가지의 기록은 당시 풍악서당의 지역적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풍악서당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05(선조 38)이다. 이에 앞서 풍악서당은 1572(선조 5) 南延祿의 주선으로 지금의 병산서원 근처로 옮겨졌었다. 치소에서 가까이 위치하여 번잡한 관계로 학문 공간으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때 류성룡은 示豊嶽書院有司(西厓集1 )를 지었는데, 이 시에는 서당 이전의 뜻이 나타나 있다. 서당 이전에 있어 류성룡의 의중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악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고 만다. 이에 지역 사림들이 서당 중건을 논의하였고, 1605년 지금의 위치로 서당을 옮겨 짓게 되었다. 이 사실을 영가지에서는 이 해 남쪽 묏부리 子坐午向의 터로 서당을 이건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서원 건립 논의는 류성룡 사후 2년인 1607(선조 40)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613(광해군 5) 류성룡의 대표적인 문인인 鄭經世(15631633)를 비롯한 사림의 공의와 安聃壽金允思 등의 노력으로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는 尊德祠를 세우게 되면서, 풍악서당은 지금의 병산서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620(광해군 12) 병산서원은 虎溪書院의 전신인 廬江書院에 류성룡의 위패를 合享 시킴으로써, 한 동안 서원의 기능이 중지되기도 했지만 1629(인조 7)에 다시 위패가 돌아오면서 종전의 서원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류성룡의 3자인 류진도 추향함으로써 지금까지 병산서원은 主享 류성룡, 從享 류진의 구도로 운영되고 있다.

병산서원은 도산서원호계서원과 더불어 안동권의 대표적인 서원이었으나, 서원의 위세와 영향력에 비해 정치적인 문제로 비교적 늦은 시기 賜額이 이루어졌다. 이는 서원의 주향자가 南人의 영수였던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연간에는 그의 정적이었던 鄭仁弘(15351623) 일파가 집권하였기에 사액이 어려웠으며, 이후에는 西人이 집권하였기에 사액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1863(철종 14)이 되어서야 李啓魯 등의 건의가 수락되면서 屛山으로 사액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산서원은 여강서원(1575), 三溪書院(1589)에 이어 안동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었으며, 주향자 류성룡의 정치학문적 업적과 비중, 그 후손인 풍산류씨 가문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교육적 기능뿐만 아니라 안동권과 慶尙左道에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병산서원에 소장된 院任錄」「奉安錄」「執事錄」「焚香錄」「入院錄등의 자료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당대 명사의 이름은 이러한 대외적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병산서원은 조선후기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영남 지역 여론을 집결하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1611년 정인홍의 大北 일파가 文廟에서 退溪 李滉晦齋 李彦迪 위패를 撤享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류성룡의 문인이었던 金奉祖金允安은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晦退辨誣疏를 올렸다. 남인과 서인 간의 禮訟論爭이 치열했던 1666(현종 7)에는 柳元之柳世哲 주도의 服制疏가 병산서원을 거점으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병산서원의 위상은 고종 초 興宣大院君의 서원 훼철기에도 지속되었다. 1863년 사액 될 때와 마찬가지로 류성룡의 후손들이 중앙정계의 인사들과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병산서원은 서원 훼철을 피할 수가 있었다. 당시 안동 지역에서 훼철을 피했던 서원은 병산서원이 유일하였다. 그 결과 서원 건물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존립되어, 1969년에는 병산서원이 사적 제260호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한편, 병산서원의 공식 명칭은 201111월부로 안동 병산서원으로 변경된 상태이다.

 

 

2. 소장 자료의 전래와 현황

 

1) 병산서원은 창건 초기부터 경상도 안동권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던 서원이었던 만큼 많은 책자들을 수집하였고, 사액 이후에는 다수의 內賜本을 소장할 수 있었다. 당시 병산서원 소장 전적들은 서원 강당인 入敎堂 오른쪽에 위치한 西齋 藏書室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병산서원 소장 전적은 그 후 서애 류성룡의 유물 전시관인 永慕閣으로 이전되었다.

영모각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65년 건립되었는데,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하회마을 忠孝堂 옆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관리의 편의를 위해 류성룡 집안 대대로 수집한 전적과 고문서, 각종 유물들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는데, 이때 병산서원 소장 자료도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거기다가 영모각에는 다른 풍산류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서적, 일대 영남 지역 사림 가문에서 보내온 자료들도 소장하고 있다. 즉 병산서원 자료뿐만 아니라, 출처가 다양한 자료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문서의 경우 자료의 성격상 어느 정도의 구분이 가능하나 일반 서책의 경우 모든 자료의 출처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이다. 한편, 영모각에 소장되었던 서책 자료의 목록은 1969國會圖書館에서 간행한 李朝書院文庫目錄병산서원편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총 1,0713,039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 병산서원은 교육과 교화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출판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1788(정조 2)에 만들어진 鏤板考에 따르면 이때까지 병산서원은 모두 3종의 책자를 직접 간행하였음이 확인되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지역 사회 내에서 출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모각 건립 이전까지 서원에서 만들어진 책판들은 입교당 뒤쪽에 위치한 藏板閣 안에 서가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역시 1965년 영모각이 건립되자 다른 전적 등과 더불어 서애 류성룡의 종가인 충효당으로 옮겨져 행랑채에 보관되었다. 이 책자는 수십 년간 방치되다 2004년이 되어서야 대략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문중회의를 거쳐 그해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관리 되었다.

 

3) 병산서원에서 작성된 각종 고문서 역시 전적 자료와 더불어 1965년 영모각이 건립된 후 그곳으로 이전보관되었다. 역시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 보유하였던 다른 고문서와 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일반 전적과는 달리 그 성격이 엄연히 다른 관계로 구분이 비교적 용이하나, 소장처가 불분명한 것도 많아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4) 현재 병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전적 자료 및 고문서, 그 외 현판을 비롯한 각종 동산문화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된 상황이다. 2008년에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필사본, 辰巳錄軍門謄錄등 보물 자료를 포함해 6,174점이 위탁되었으며, 2009년에는 전적 및 현판 3,689점을 위탁하였다. 따라서 과거 병산서원이 보관하고 있다가 영모각으로 이전되었던 책판, 전적, 고문서 등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모두 보관되어 있다.

 

 

3. 자료조사 현황과 기타 기록자료

 

1) 병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전적 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영모각 건립 이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서원 소장 자료와 문중 소장 자료가 혼재된 채 조사되어, 병산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전적의 규모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다만 조선시대 때 간행된 屛山書院書冊目錄이 전해져, 당시의 소장 규모를 대략적으로 파악 할 수가 있다. 수 차례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1차가 1639(인조 17), 2차가 1673(현종 14), 3차가 1759(영조 35), 4차가 1766(영조 42)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서원 유사가 특별한 분류 방식 없이 편의에 따라 소장 전적명을 기록하고, 그 전적의 현존 유무구비 연도 대출 기록 등을 기재해 놓은 것이다. 130년간의 기록으로 19세기 이후 전적 구비와 관련해서는 알 수 없지만 초창기 병산서원의 전적 보관 규모와 운영형태를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병산서원에서 봉안하고 있었던 懲毖錄』『西厓先生別集을 비롯하여 梧里集』『炭翁集등 일부 서적의 간행 연도와 편찬 연도 및 유통 경로를 파악 할 수 있는 자료이다.(屛山書院書冊目錄에 기재되어 있는 전적 자료의 성격에 대해서는 朴現圭, 屛山書院書冊目錄의 분석과 그 특징」『季刊書誌學報14, 韓國書誌學會, 1994’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2) 병산서원 소장 전적이 영모각으로 옮겨진 후 작성된 첫 번째 전적 조사 목록은 1969國會圖書館에서 간행한 李朝書院文庫目錄이다.(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이 조사의 전적 목록은 屛山書院편에 수록되어 있지만, 사실 영모각에 있던 종가 소유의 다른 전적 자료가 혼재된 것이다. 당시 보고된 책수는 총 1,0713,039책이다.

여기에는 해당 책자의 서지상황과 자료의 가치 등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병산서원이 각종 전적 자료를 소장하게 되는 경위 등도 함께 설명해 놓았다. 다만 영모각의 자료가 문중 자료와 혼재되어 있음을 감안하지 않고 분석해 놓았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3) 병산서원에 소장되었던 전적 자료에 대해서는 1991文化財管理局에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조사목록이 韓國典籍綜合調査目錄5에 수록되어 있다.(文化財管理局, 韓國典籍綜合調査目錄5-安東市郡篇()-, 1991) 이 책자에서는 영모각 소장 자료를 소유자의 성명으로 분류하였는데, 병산서원 소장 자료는 柳寧夏편에 수록되어 있다. 역시 병산서원 자료와 문중 자료가 혼재된 채로 작성되었다.

 

4) 1981李樹健에 의해 한 차례 영모각 소장 고문서가 소개된 적이 있으나, 이는 병산서원이 아닌 풍산류씨 문중과 관련된 자료였다.(李樹健 編著, 慶北地方古文書集成,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1) 영모각 소장 자료 중 병산서원에서 작성되었던 주요 成冊類를 포함한 고문서에 대한 소개는 1994韓國精神文化硏究院(現 韓國學中央硏究院)에서 간행한 古文書集成에서 확인 할 수 있다.(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書集成20 -屛山書院篇-, 1994) 이 책자는 영모각 소장 자료 중 병산서원과 관련된 것을 추려내어 간행한 것으로, 병산서원의 역사와 운영에 관련된 성책류와 고문서가 영인되어 소개되어 있다.

한편, 한국고문서자료관(http://archive.kostma.net)에서는 古文書集成에 소개된 자료의 영인 이미지와 원문 등을 함께 제공하고 있는 중이다. 영모각에 자료를 위탁받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도 명문가의 고문서의 풍산류씨 충효당 편으로 1,439점에 달하는 성책류와 고문서 원문서지이미지해제 등의 정보를 유교넷(http://www.ugyo.net)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5) 병산서원에서 제작된 책판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종택인 충효당의 행랑채에 보관되어 오다 2004년에야 대략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문화재청, 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학술용역, 2004) 그리고 그 해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되면서 좀 더 상세한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보존방안이 모색되었다.(한국국학진흥원, 경북지역의 목판자료(1), 2005) 당시 간행된 책자에는 풍산류씨 충효당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家傳의 책판과 병산서원의 책판이 혼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현판의 경우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위탁되었다. 2004년에 있었던 조사에 따르면 모두 11개의 현판이 조사보고되었다.(문화재청, 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학술용역, 2004)

 

6) 병산서원과 관련된 연구는 해당 자료의 개별 자료에 대한 반출과 열람이 용이치 않은 관계로 상대적인 자료적 가치에 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영모각으로의 이전 이후에는 문중 자료와 혼재되어 그 구분이 쉽지 않게 되었다. 병산서원의 주요 자료가 보고서와 자료집 등으로 소개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그 이전까지는 개별 연구자가 직접 열람을 통해 자료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관련 연구가 미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서원 역사와 운영, 교육과 사상 분야 보다는 건축학 분야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연구 논문과 서적, 보고서, 자료집 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李樹煥, 17, 18세기 安東 屛山書院社會經濟的 基盤; 屛山書院 古文書 分析」『嶠南史學3, 영남대학교 국사학회, 1987.

文化財管理局, 韓國典籍綜合調査目錄5-安東市郡篇()-, 1991.

朴現圭, 屛山書院書冊目錄의 분석과 그 특징」『季刊書誌學報14, 韓國書誌學會, 199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古文書集成20, 1994.

文熙春, 屛山書院晩對樓에 보여지는 視覺體系와 그 意味에 관한 硏究,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송지성, 병산서원에 나타난 한국디자인의 조형적 특성」『디자인학 연구집5, 서울디자인포럼학회, 1999.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서원 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아서, 예문서원,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古文書集成63 - 정서본 屛山書院篇-, 2002.

崔敏龍, 屛山書院配置形態에 관한 硏究, 금오공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권성진, 조선시대 서원건축에 관한 조사 연구」『論文集21, 서라벌대학, 2002.

안동하회마을보존회, 병산서원, 2003.

하헌정, 유인호, 屛山書院配置形態空間構成에 관한 硏究」『大韓建築學會 論文集19-1, 大韓建築學會, 2003.

김우영, 예악사상(禮樂思想)의 조형개념(造形槪念)에 관한 고찰 : 조선시대(朝鮮時代)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朴轍淳, 유교의 시간과 공간관에 의한 조형개념연구 :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문화재청, 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학술용역, 2004.

한국국학진흥원, 경북지역의 목판자료(1), 2005.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소장 병호시비 관련 미공개 자료 해제」『2007 한국국학진흥원 한국학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7.

한국서원학회, 屛山書院歷史文化」『2008년 한국서원학회 하계 학술세미나, 2008.

 

7) 병산서원은 높은 지역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내의 사림을 비롯해 중앙정계의 많은 인사들과 인연을 맺을 수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많은 문자들을 병산서원과 주고받았는데, 각종 文集에 산견되고 있는 병산서원 관련 문자들을 채록하면 다음과 같다.(‘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文集解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8’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한국고전번역원 제공참조)

 

權斗經, 蒼雪齋集4屛山書院夜坐 同荷塘從兄賦

權訪, 鶴林集3 屛山書院請額

權復興, 五慕齋實紀1玉山書院答通

權準羲, 友巖集5屛山立敎堂重修」「屛山書院立敎堂

金奉祖, 鶴湖集3代屛山書院儒生祭西厓先生文

金宗圭, 獨山集3屛山敬老案

金允安, 東籬集2九月到屛山書院, 5祭文 屛山書院儒生生員李渫等

柳氵奎, 臨汝齋集1屛山書院請額, 4通諭屛院儒生文」「屛山書院敬老會續案

柳成龍, 西厓集1 示豐嶽書院有司, 別集 卷1 屛山書院 奉別金鶴峯還朝」「屛山 與諸君校先師文集 有感呈鶴峯兄侍者」「戊子夏 與士純諸友 會屛山 編退溪先生文集 今十三年 而諸君復會院中 輯年譜 感舊興懷 吟一律錄呈 幸各和之 以記一時之事, 年譜3屛山書院奉安文

柳袗, 修巖集年譜 卷2祭文 屛山儒生李慶俊等」「屛山書院從享文 洪汝河

申佐模, 澹人集8奉審屛山書院 敬述

安慶一, 聾窩集4屛山竹島

安鼎呂, 晦山集7屛山書院謁西厓柳先生祠

李家淳, 霞溪集8屛山卞孝子廷八行錄

李能允, 谷圃集5屛山書院

李象靖, 大山集15答屛山書院洞主

李象辰, 下枝集4屛山書院通各院文

李鍾祥, 定軒集15屛山書院

李惟樟, 孤山集1屛山書院 與諸友修正西厓先生年譜」「病中聞諸友會屛山 有感而作

李埈, 蒼石集2舟過屛山 訪先生遺迹, 11答屏山山長」「與屏山書院士友」「答屏山書院士友」「與屏山書院士友」「答屏山書院士友, 13屛山尊德祠復享記, 續集 卷6 屛山常享祝文

李好閔, 五峯集15 屛山書院奉安西厓先生祭文

張顯光, 旅軒集4屛山士友」「答屛山士友別紙

鄭經世, 愚伏集13 答屛山文會」「答屛山院長」「答三書院, 16屛山書院享祝」「屛山書院西厓先生位版再奉安」「屛山書院西厓先生位版再奉安祭文

鄭逑, 寒岡集續集 卷7屛山院生

鄭象履, 制庵集4屛山書院請額

鄭宗魯, 立齋集別集 卷8 祭文 安東屛山書院儒生柳璧祚

鄭侙, 愚川集2忝屛山院任 謁廟後口占」「在屛山書院 與諸友會話」「屛山院下 小舟告成 喜賦 示同事朴汝完 李子承」「與諸友 會屛山書院 座上走筆, 3辭屛山洞主

崔孝述, 止軒集4屛山會中

洪汝河, 木齋集5屛山用一獻禮, 7屛山書院修巖奉安文

洪柱世, 靜虛堂集屛山書院

 

 

4. 전승 자료의 내용과 특성

 

고서 현황

자료의 특성상 병산서원의 자료와 영모각 소장 자료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屛山書院書冊目錄이 전해져 18세기 이전의 소장 자료에 대한 대략적인 구분이 가능한 정도이다. 일단 영모각 소장 자료에 대한 일괄적인 조사는 1969李春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때 屛山書院편으로 총 1,0713,039책이 보고되었다. 그리고 책종 별로 經書 71, 歷史 52, 傳記 174, 儒家 54, 天文 3, 醫家 4, 道家 1, 類書 8, 文集 693, 其他 11종이 있는 것으로 분류해 놓았다.(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이와는 달리 1991년 문화재관리국에서의 조사에서는 이를 소장자이자 종손인 柳寧夏편으로 수록하였으며(文化財管理局, 韓國典籍綜合調査目錄5-安東市郡篇()-, 1991), 이 자료를 위탁받은 한국국학진흥원은 웹사이트를 통해 풍산류씨 충효당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춘희의 조사 목록을 바탕으로 영모각 소장 책자를 판본으로 구분하면, 鑄子本으로는 甲寅字本531책으로 가장 많다. 그 외 活字本으로는 乙亥字, 甲辰字 26102책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618(광해군 10) 改鑄戊午子本(書典大全8), 광해군 때에 만들어진 訓鍊都監木活字本8종 보유하고 있어 임진왜란 직후 창건된 서원의 특색을 확인 할 수 있다.

병산서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사액이 이루어진 관계로, 철종 연간 이전의 內賜本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조 1823년 각 서원에 下賜論語集註大全10여 종의 丁酉字本은 금일 현존하는 사액서원에서 쉽게 확인되는 주자본임에도 영모각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영모각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자료 중 희귀, 귀중본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은 단연 서애 류성룡에 의해 남겨진 필사본이다. 대부분이 임진왜란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란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희귀, 귀중본

•『懲毖錄, 柳成龍 箸, 筆寫本, 1(국보 제132)

•『辰巳錄, 柳成龍 箸, 筆寫本, 3

•『亂後雜錄, 柳成龍 箸, 筆寫本, 2

•『芹曝集, 柳成龍 箸, 西厓親筆本, 2

•『中興獻芹, 筆寫本, 萬曆 21(1593) 42874, 1

•『軍門謄錄, 柳成龍 箸, 筆寫本, 1

•『政院傳敎, 承政院 篇, 筆寫本, 萬曆 20(1592) 129, 2

•『唐將詩畵帖, 筆寫本, 1

•『唐將書帖, 王必迪 等 箸, 筆寫本, 1(이상 보물 제140)

 

고문서 현황

고문서 역시 문중 자료와 서원 자료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나, 자료의 특성상 고서 보다는 구분이 용이하다. 영모각 소장 병산서원 관련 주요 자료에 대한 소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古文書集成을 통해 서원 운영과 관련된 주요 자료를 영인하여 출간한 적이 있다.(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書集成20 -屛山書院篇-, 1994) 여기에서는 성책류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주요 성책 및 고문서류는 다음과 같다.

 

院案要覽(3) : 1841, 1853, 18831896년 서원운영에 걸친 지침을 수록

屛山書院記事 : 院中可行條件, 院規, 節目 등 서원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것을 적은 문서로 1718李浹이 작성

上樑文 : 류규가 1771년에 지은 병산서원 重修上樑文

上疏(2) : 1851, 1595, 1665년의 상소문을 엮은 것으로 李啓魯의 서원 賜額疏額外儒生의 제한 등 향교운영의 폐단과 그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수록

院任錄(4) : 15921640, 15921716, 1592년 이전1807, 16521671년 서원 운영을 담당한 임원 즉 院長有司 등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자료

奉安錄 : 16101614년 류성룡의 서원 봉안을 전후해서 임명된 여러 집사자와 有司의 명단 및 이때 작성된 祭文을 수록한 자료

執事錄(4) : 16141639, 16581664, 16661698, 17231735년 병산서원의 春秋享祀 때의 집사자 명단

焚香錄 : 18231826朔望 廟宇焚香한 인물들의 명단

入院錄 : ?1718년 새롭게 서원 원생으로 들어온 사람의 명단을 수록

居齋案 : 17811792入院者들이 서원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한 인물들의 명부

講案 : 1789년 서원에서 원생들이 을 한 뒤 , 등 점수를 매겨 기록한 자료

傳與記 : 丁亥己丑 연간 임원 교체 시 서원업무와 관계되어 주고받은 인수인계 문서

院奴婢(推刷)(7) : 1663, 16661669, 1738, 1739, 1750, 1756, 1762년 병산서원 소유 노비와 그 부모, 소생, 거주지, 收貢與否 등을 조사한 뒤 작성한 推刷案

祭文(2) : 1629년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봉안 할 때 작성된 제문

祭器 : 16151617前後 院任 간에 이루어진 祭器의 인수인계 문서

祭需物目 : 류성룡과 류진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기록

通報 : ‘屛山掌務에게 豊山書堂會中에서 보낸 削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자료

敬老會案 : 18041811년에 작성된 豊山縣의 경로회 참여자의 명단

 

고문서 정보 제공 현황

영모각 소장 고문서에 대해서는 이를 위탁받은 한국국학진흥원 웹사이트인 유교넷(http://www.ugyo.net)명문가고문서’ - ‘풍산류씨 충효당항목에서 모두 1,439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국고문서자료관에는 古文書集成20(1994)에 수록되었던 고문서와 성책류 58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책판 목록

2004년까지 하회마을 류성룡 종가인 충효당에 보관되어 오다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된 책판은 모두 251,907매이다. 여기에는 陶山及門錄辨訂51, 陶山及門錄追辨1, 童蒙須知5, 文純公退陶李先生墓碣銘1, 文純公退陶李先生言行通錄3, 西厓先生年譜구판 18, 西厓先生年譜신판 74, 西厓先生文集구판 46, 西厓先生文集신판 418, 西厓先生別集구판 11, 西厓先生別集신판 83, 聖學十圖6, 修巖先生文集67, 修巖先生年譜31, 修巖集48, 永慕錄54, 梧里先生文集140, 梧里先生別集48, 梧里先生續集98, 梧里先生遺筆2, 愚伏先生年譜49, 臨汝齋先生文集224, 拙齋先生文集183, 懲毖錄244, 訓子拜學帖2매가 포함되어 있다.

 

병산서원 소장 자료의 가치

- 병산서원에서 소장되었던 자료는 훗날 지어진 영모각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하회마을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 종택의 자료와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자료의 출자를 구분하는데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병산서원 소장 전적 자료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단연 배향자인 서애 류성룡이 저술한 것들이다. 특히 국보로 지정된 징비록과 보물로 지정된 난후잡록』『진사록』『군문등록등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던 류성룡이 전란 때 겪었던 사건과 군사 정책 등을 수록해 놓은 자료이다. 이는 전란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으로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대부분 서원의 경우 원래의 교육적 기능보다는 지역 사림들의 사회적 활동, 배향자 후손의 문중활동,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경제적 운영과 관련된 자료를 다수 남긴데 비해, 병산서원에는 비교적 서원의 교육적 기능과 관련된 자료들이 상세하게 남아 있다. 그 중에서 居齋案講案등은 서원에서 공부를 하는 원생들의 면모와 평가 방법 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 병산서원은 안동권 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남인계 서원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곳의 임원으로 임명되는 원장과 서원은 붕당기 영남 지역 재지사림의 동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병산서원에는 원장과 유사를 비롯한 역대 임원과 각종 집사들의 명단을 기록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의 자료는 당시 영남 지역 사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5. 향후 활용의 과제

 

이상으로 소략하나마 병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과 가치 등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병산서원에는 징비록등과 같이 일찍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자료도 다수 소장하였었다. 아울러 영남 지역의 핵심 서원이었던 만큼, 당시 지역 사회에서의 위상과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관려하여 향후 필요한 연구 및 조사와 이를 활용한 각종 사업 방향들을 간략히 제시해 보도록 한다.

 

1) 연구사업의 추진

병산서원은 그 사회적 위상과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다양성에 비하여 연구 성과가 비례하지 못하고 있다. 서원 운영과 관련된 사례 연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으나, 종합적인 연구는 현재 이루어진 것이 없다. 그나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별 연구의 경우 자료에 대한 분석 보다는 건축학적, 공간적 특징을 다룬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병산서원이 보유하고 있는 개별 자료, 특히 병산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성책류 및 고문서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일차적으로 요구 된다고 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영모각 소장 자료에 대하여 유교넷에서 원문이미지텍스트해제 등을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고문서집성에 수록되었던 자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후속되는 연구에 있어 큰 일조가 되고 있다. 다만 영모각 소장 자료가 문중과 혼재되어 있는 까닭에 이 자료에 대한 분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연구 성과를 배출하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 지원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한 정기적인 학술대회의 개최와 세미나, 전문 학술지 간행 등도 요구된다.

 

2) 자료집의 간행

병산서원 자료 중 징비록과 같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자료는 일찍이 여러 종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에 비해 다른 주요 자료에 대한 영인본 및 번역서 발간은 미흡한 편이다. 병산서원에는 서원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징비록을 제외한 임진왜란 자료도 확인된다. 이러한 자료에 대한 영인과 번역은 단순히 연구를 위한 기본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3) 분산 자료의 종합

병산서원은 당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만큼, 여러 인사들이 작성한 문자에서 확인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承政院日記등을 필두로 한 관찬 사료와 개인 문집 등에서 정책과 개인적인 관계로 작성된 각종 문자들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병산서원에서는 대외적 교류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대외 관계 중 작성된 通文을 비롯한 여러 문서들이 다른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산견되는 병산서원에 대한 목록화와 색인 및 추출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병산서원 자료의 경우 오래전부터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관리해 왔기에 외부로의 유출이 적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러한 자료 역시 관심을 가지고 종합해 볼 필요가 있다.

 

4)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에 분포한 여러 서원 중 가장 탁월한 자연적 경관을 보유하고 있는 서원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 논문과 교양서적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이에 천혜의 자연환경과 병산서원이 소장한 다양한 자료를 매개로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병산서원에서 작성된 서원 교육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 서원에서 공부를 하던 원생들의 생활 방식과 학습 방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병산서원에 소장되었던 교육관련 자료는 현재 여러 서원에서 계획 중인 서원 스테이와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 개발에 좋은 소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한국서원이야기
글쓴이 : 박성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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