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2일 (토)
3호선 종착지인 대화역 4.5.6번 출입구로 나가 시내버스 150번을 타고 30분 정도 가서 원당리에서 하차
하면 앞에 굴다리가 보입니다.해병전우회 막사에서 좌회전해서 개천가로 갑니다. (굴다리 지나면 안됨)
개천가를 따라 조금 걸으면 또 굴다리가 나옵니다. 이 굴다리를 통과 하면
바로 앞에 사당이 보이죠.
교하향사, 파평윤씨 정정공파 선산입니다.
파평윤씨 시조가 이땅에서 나 터를 잡은지 1,111년이 지났습니다. 천년 넘도록 그들은 이땅을 지켰습니다.
교하신도시가 건설되며 일부 땅이 수용되여 사당이 새로 지여 졌습니다.
사당을 묘 바로 밑에 건립 했네요.
사당에는 다섯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15세손 정정공 윤번. 16세손 양평공 윤사흔. 17세손 공양공 윤계겸. 18세손 윤욱. 19세손 정평공 윤지임.
사당 바로 뒤에 있는 묘 군 입니다.
이곳에서 좌측에 있는 커다란 신도비가 단연 돋 보입니다.
정평공 윤지임의 신도비지요. 480년 전인
중종29년(1534년)에 세운 비라 많이 마모 되였습니다. 이사구가 짓고 윤안인이 해서체로 썼습니다.
윤지임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아버지입니다.
윤지임은 부인 전의이씨와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는데
1윤원개 2윤원량 3윤원필 4윤원로 5문정왕후 6윤원형입니다. 이중 원로와 원형은 소윤의 대표인물이되죠
윤지임의 묘 앞에는 세째아들 윤원필 부부의 묘가 함께 있습니다.
윤지임과 부인 전의이씨의 묘입니다.
묘비도 많이 마모 되였네요.
윤지임의 묘에서 본 사당입니다.
돈 이라면 못할짓이 없는 인간들이 2008년 11월 중장비까지 동원해 윤지임의 묘를
도굴 했었습니다. 그때의 사진입니다. (펌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윤지임의 묘에서 위로 더 오르면 그의 막내아들 윤원형의 묘가 있습니다.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권력으로 사욕을 채우며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죠.
그의 묘 오른쪽 뒤에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 정난정의 묘가 숨은듯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20여년간 막강한 권력으로 서울시내에만 13채의 저택을 보유했던 윤원형의 재산은 나라보다 많았다고
했습니다.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문정왕후가 죽자 파직되고 유배까지 가게 됩니다.
윤원형의 첩에서 정경부인까지 올라갔던 정난정의 묘입니다. 그도 천민으로 강등 됐습니다.
유배지인 황해도 강음에서 금부도사가 온다는 말을듣고 자결한 정난정은 <명종20년(1565년)>
죽어서도 윤원형 곁에 있네요. 윤원형도 보름후 자결 했습니다.
하얀 눈을 함께 덮고 있는 정난정과 윤원형의 묘를 떠납니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영수인 윤임일파 100여명의 목숨을 뺐었지만 두분은 가까운 인척
입니다. 윤번의 둘째아들 윤사윤의 증손자가 윤임이고요. 윤번의 세째아들 윤사흔의 증손자가 윤지임
입니다. 윤원형은 윤지임의 아들이니까 윤임의 조카입니다. 권력 앞엔 형제도 인척도 없습니다.
윤사흔의 신도비입니다.
윤번의 세째 아들로 세조비 정희왕후의 동생이지요. 윤지임의 증조부입니다.
윤사흔의 신도비는 아름답고 세련되기가 조선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 해줄것을 청원 중 이라고 합니다.
파평윤씨 정정공파 선산에는 부원군 3분 (세조비 정희왕후의 부 윤번, 중종계비 장경왕후의 부 윤여필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부 윤지임)의 묘와 7명의 정승 8명의 판서 30명의 참판을 포함 900기의
묘가 70만평의 땅에 있었는데 현재는 40 만평으로 이중 20만평만 문화재로 지정되여 있답니다.
윤사흔의 묘입니다.
원래의 비석은 마모되여 글자를 알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묘 앞에 서있는 문인석이 홀쭉하네요.
아름다운 신도비를 다시 보며 윤사흔의 묘소를 내려 왔습니다.
잘 안보이지만 길 맨끝에 있는 집이 사당입니다.
선산 가운데쯤 있는 성재암입니다.
이 건물이 대웅전인데요, 성재암의 연혁은 아래와 같습니다.
550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는 샘물 성재정입니다.
세조비 정희왕후가 창건하고 조성 했다는 목불입니다.
파평윤씨의 선산 대부분은 확실치는 않지만 정희왕후가 윤씨 문중에 내린 땅 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선산답게 고려시대의 네모 난 묘도 있습니다.
고려 판도판서 윤승례의 묘입니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이곳 파평산에 들어와
은거하며 길재등과 함께 고려를 그리워 하며 노후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들인 번의 딸 즉 손녀딸이
세조의 비로 책봉되여 조선의 영의정으로 추증 되였으니 인생사 알수 없기는 그때나 이제나 같네요
성재암 좌측 언덕에 있는 108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여기에도 많은 묘가 있습니다. 발자국은 짐승의 것 입니다.
발목까지 눈속에 빠지고 길도 없는데 미끄럽기 까지 합니다. 연초부터 남의 문중 산을 헤메고 다니는
이유야 여러가지 겠지만 젖어 버린 양말속의 발이 동상이라도 걸리면 그 이유가 통하지 않을것 같네요
건너편에서 본 교하향사입니다.
향사뒤로 윤지임의 묘가 보입니다. 19세손이죠.
이곳으로 오르면 15세손 윤번의 묘가 있습니다.
윤번의 묘역입니다.
앞의 묘는 윤번의 부인인 인천이씨의 묘이고 뒤쪽이 윤번의 묘입니다.
부인의 묘가 윤번의 묘 보다 더 크고 석물도 더 웅장합니다.
윤번의 묘입니다.
부인인 인천이씨의 묘 보다 작은 것은 딸이 세조비로 책봉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
윤번의 묘 아래가 부인은 묘입니다.
윤번의 묘의 장명등은 작지만
부인 묘의 장명등은 상당히 큽니다. 묘의 장명등으론 조선 최고라고 합니다.
딸이 왕비로 책봉된후 사망해서 남편보다 묘역을 크게 조성 했습니다.
파평윤씨 묘역에선 지난 2002년 9월 무연고지 묘를 정리하려 파던 묘에서 미이라를 발견 했습니다.
고려대학에 기증한 미이라는 검사 결과 아기를 낳다 죽은 20대의 여성으로 밝혀 졌습니다. 신원도 확인
됐어요. 파평윤씨 윤소의 딸이였어요. 윤소는 윤원량의 아들입니다. 친정으로 아이를 낳으러 왔다가 난산
으로 죽은 가련한 여인 그의 뱃속의 아이는 남자였답니다. 그아이도 미라로 남아 엄마와 함께 있답니다
끝.
'여행이야기(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충남 천안] 천안전씨 시조 환성군 전섭(歡城君 全攝) 단소 (0) | 2013.09.16 |
---|---|
[스크랩] ◈삼학사(三學士)이야기◈ (0) | 2013.09.12 |
[스크랩] 史跡 巡禮 (1) (0) | 2013.06.11 |
[스크랩] 홍서봉 묘 (0) | 2013.06.10 |
[스크랩] 김두한 묘 (0) | 2013.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