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스크랩] 목은 이색의 부친 이곡은 한산면 죽촌리 고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장안봉(微山) 2013. 5. 27. 17:09

가정 이곡은 한산이 배출한 고려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으므로 혹 빌려서 타는데, 여의고 둔하여 걸음이 느린 말이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채찍질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조심하여 곧 넘어질 것같이 여기다가, 개울이나 구렁을 만나면 곧 내려 걸어가므로 후회하는 일이 적었다. 발이 높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서 잘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의기양양하게 마음대로 채찍질하여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골짜기가 평지처럼 보이니 심히 장쾌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 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랴.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婢僕)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도 혹 잠깐 사이에 그 빌린 것이 도로 돌아가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百乘)을 가졌던 집도 외로운 신하가 되니, 하물며 그보다 더 미약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맹자가 일컫기를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려 쓰고 있으면서도 돌려 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 하였다.
내가 여기에 느낀 바가 있어서 차마설을 지어 그 뜻을 넓히노라.「가정집(稼亭集)」』


이상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에 실린 이곡(李穀)의 차마설(借馬說)의 전문이다. 이 글은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인간의 보편적 도리를 깨우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잘못된 소유 관념에 대해 비판하면서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찾아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글의 저자가 이곡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곡이 우리 고장 서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사람은 드물다.

 

이곡은 1298년 오늘날 서천군 한산면 죽촌리 고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고촌(枯村)은 마를 枯자와 마을 村자로 풀이 마른 마을인데 이곡이 태어나 땅 기운이 모조리 뽑혀 3년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데서 유래한다.

혹자는 목은이 잉태되자 지기(地氣)가 그쪽에 뽑혀가서 마을(村)의 초목이 일시에 모두 말랐(枯)다가 뒤에 다시 소생한 마을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한산 이씨의 인물과 관계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럼 이곡은 누구인가?
가정 이곡은 한산이 배출한 고려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산 이씨는 시조인 이윤경(李允卿)(한산면 지현리 현재의 한산면사무소 곁에는 호장 이윤경의 묘소로 전해지는 유적이 있고, 그는 한산현의 성황신으로 추앙되었음이 읍지에 기록되고 있다)으로부터 세계를 열어 이곳 3형제대에 이르러 크게 문흥을 일으킨 호서지역 대표적인 사림가문이다.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은 한산인으로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라 하였으며, 이자성의 아들이다.

 

일찍이 원 제과에 급제하였고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이 되어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귀국하여 정당문학이 되고 후에 한산군에 피봉되었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삼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유고는 가정집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고려말 삼은의 한 인물인 목은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곡은 국어 책에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국사 책에도 실려있다.

 

「 이곡이 상소하기를,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탄로날 것이 두려워 이웃 사람들도 볼 수 없다고 한다. 사신이 중국에서 올 때마다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닌가, 아내와 첩을 데려가려고 온 것은 아닌가?' 한다.
이런 일이 일년에 한두 번이나 2년에 한번씩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사오십 명에 이른다. 이미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밤낮으로 슬피 울었다. 국경의 헤어지는 곳에 이르러서는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었다.」


이곡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물며 이곡이 서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몽고 침입이후 고려는 처녀를 받쳐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곡이 상소를하여 이를 폐지하게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역사가 혼미할 때마다 우리는 공녀 환향녀 또는 화냥년, 일본군 위안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픈 것이다.


이렇게 이곡은 고등학교 국어, 국사 책에 실려 있을 만큼 좋은 글과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곡과 관련된 유적은 서천에서 한산면쪽으로 가다 한산모시관을 넘기전 돼지고개 좌측편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이 곳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천 2·5풍수회장을 맡고 있는 이돈직씨에 의하면 「광암리 광현골에 들어가면 밖에서 보아서는 전혀 명당이 있는 낌새를 알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감춰져 있다. 서망덕의 덕기 어린 봉우리를 바라보며 돼지골 재로 올라가며 왼쪽을 보면 불현듯 也字形의 형국이 눈에 들어온다. 서망덕이 主산겸 樂山으로 횡룡입수로 된 혈장을 뒤에서 지탱해주고 입수 뒤에 발달한 正鬼孝順鬼가 분명하니 횡입수 형국에 합격된 자리이다.(글 줄임) 앞에서 보면 也字형이요 뒤에서 보면 心字形이니 가히 바람직한 자리임에 틀림없다」라고 한다.

 

한번쯤 답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법하다. 이곳은 우리 나라에서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한번쯤은 다녀간 곳이다. 우리 고장에 있는 유적이라 가볍게 여길 수 있는데 안내를 받아 답사를 한다면 좋은답일 것이다. 신도비 비문은 17대손 좌의정 이경재 찬이고, 추기는 1899년에 송병선이 썼다(전 이용직, 서 이현직). 묘소의 구비는 1351년(공민왕 원년)에 세워졌었고, 1526년(중종 21) 후손 유청에 의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다. 묘하에는 후손인 남강 이임의 묘소가 있고, 묘소의 우측으로 작은 능선을 넘어 배위인 함창군 부인의 묘소도 있다.


나는 얼마 전 서천에서 같이 근무하던 이효현 선생과 같이 속초에 간 적이 있다. 속초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성이다. 고성 앞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세워진 관동 팔경 중에 하나인 청간정에 올라 보니 이곡의 글이 있었다. 그후 고성 문화원을 찾아 이곡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했더니 그 문화원에서는 이미 이곡에 대하여 월간지에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무국장님이 바로 한산에서 오셨군요 하며 반기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가정 이곡을 모르고 있는 사이에 다른 지방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그의 학문을 흠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장 사람들은 이곡을 잘 모르고 있다. 이에 이곡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진실을 우리 고장에서부터 알아주는 역사의 혜안이 필요할 때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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