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가 주목받은 이유
『환단고기』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처럼 한 사람이 저술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원중동이 지었다는『삼성기』,고려시대 행촌 이암 선생이 전한『단군세기』,고려 말 학자인 범장이 전한『태백일사』등 4종의 역사책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삼성기』는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과 신시시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은 7명의 환인들이 통치했으며, 신시시대에는 18명의환웅들이 1565년간 통치했다고 한다.『단군세기』는 47대에 걸친 단군의 통치 기록을 담고 있고『북부여기』는 고구려의 전신인 역사이며,『태백일사』는 태초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1911년 계연수 씨『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4종의 사서를 묶어『환단고기』를 편찬한 뒤,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 경신년[1980년]에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계연수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인에게 피살됐다. 그러나 이때 엮은
『환단고기』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이유립이 1949년 오령기에게 정서시킨 필사본을 토대로1979년 인쇄본이 발간됐다. 이후 임승국 교수가『환단고기』를 번역하면서 桓 자를 한으로 읽어야 옳다고 주장해 임승국 번역본의 제목은『한단고기』가 됐다.단군에 관한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많이 무감각해져 있다.
북한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고,뼈가 출초되었다고 해도 '정말 단군의 뼈인가 알아보자'는 자세 대신 '그런가 보다' '조작했겠지' 라고 가볍게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47대에 이르는 단군이 있었다 해도 별다른 감동이 없고 단군조선 이전에 환국이나 신시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환단고기』이외에도 우리 상고사에 관한 책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부도지』는 신라시대 박제상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부도지』는 우리 민족의 시발지이자 인류의 시원지인 마고대성에서 분거한 후 환궁, 유인, 환인, 환웅, 임검, 부루, 읍루로 이어지는 수만 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환단고기』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한민족의 시원을 기록한 장대한 역사라는 차원에서 본다면『환단고기』는『부도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말『환단고기』영인본이 국내에 배포되었을 때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1982년 이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이후다.
당시 이책의 발간을 찬조하거나 추천한 사람은 700명이 넘었고, 국회의원, 시장,지방자치단체 의원,대학 학장,기업체 사장, 도서관장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어느 한 개인이 출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서 출판한 것이다.일본인들이 이처럼『환단고기』에 열광한 이유는, 이 책에 일본천황[일왕]의 계보가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단군세기』에는 35세 단군사벌 재위 50년[기원전723년]의 기록을 보면,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언파불합은 일본 신무천황의 아버지인고, 웅습은 큐슈 지역에 있던 지명이라고 한다. 어째든 일본에서 출판된 『환단고기』가 거꾸로 한국에 유입되어 이후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국내 역사학계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재야 사서라고 하는데 세부적인 평가에서는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이병도 선생은 최태영 선생에게『규원사화』는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을 햇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환단고기』가『규원사화』보다 더 과장되고 윤색이 심하다고 평가하는 듯하다.
붉은 악마와 치우천자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학자들과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의 태도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많은 국민들이 붉은 악마가 되자[Be the Red's]라고 쓰인 빨간색의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했다. 이때 붉은악마가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이 치우천자이고 치우천자를 앞세운 근거가 『환단고기』였다.『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천자는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한 배달국의 제 14대 천왕이다.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했다. 이 내용은『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에 나온다. 그러나 치우천자는 붉은 악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첫째, 지금까지의 논쟁은 단군이 실존 인물이냐, 단군이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느냐에 초첨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붉은 악마 응원단이 단군을 뛰어넘어 학계에서 논의되지 않던 치우천자를 우리의 대표 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치우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단군은 당연히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된다. 둘째, 치우에 대해서는 중국의 40여 가지 역사책에서 언급되지만『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 역사책에는 치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치우 논쟁을 하려면 『환단고기』등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 세째, 치우를 우리 고대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논거가 마땅하지 않다. 기존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이 송화강과 북경까지 이르고, 단군이 역사적 실존 인물일 뿐 아니라, 기원전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한 것도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라는 주장에 대해 잘못된 민족주의라고 비판해 왔다.
즉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한국 고대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데에는 극우적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인사들과 제5공화국 정치 세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붉은악마 서포터스 중에는 당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이들도 많다. 이들은 역사에 심취하기는 커녕 역사라면 암기하는 것이 싫다고 고개를 돌리는 신세대들이다. 이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의 범위를 넘어, 치우가 우리 조상이며 대한민국의 상징이라고 믿고 있으니 기성세대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신세대들은 의식하든 안하든『환단고기』의 내용을 그대로 우리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도『환단고기』문제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종교 계통의 책이라 믿을 수 없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종교적 색채가 강한책이라는 것이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한국의 고유 종교다. 환웅,환검,환인의 삼위일체인 한얼님을 신앙적 대상으로 하는 종교로서 단군교라고도 한다. 단군시대에서 부여시대에는 이 종교의 명칭이 대천[代天]이었고, 고구려에서는 경천[敬天],신라에서는 숭천[崇天]고려시대에는 왕검교[王儉敎]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고삿날'이라는 민속화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설했다.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종교에서는
『신단민사』『천부경』등 단군이나 고대사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펴냈다.
『환단고기』도 대종교 계통의 책이 아닐까 하고 많은 학자들이 의심을 품고 있다. 단군이나 고대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종교적인 영역에서 다룬다면 실제 역사와는 많은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종교 계통의 책인『환단고기』를 글자 그대로 신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천지창조와 예수의 일생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성경』이 오늘날까지 인류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고대 유대지방의 역사적 기록이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가 대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을 전부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신중한 태도가 아니다.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 고대의 역사를 전승시켰을 경우, 전달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원래 기록을 윤색했거나 첨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위서라고 단정지을 근거가 될수는 없다.
연개소문 아들 남생의 기록에 담긴 비밀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내새운 중요한 근거중 하나가 연개소문 아들 남생의 묘지 내용이다. 묘지란 죽은 사람의 이름, 관직, 행적, 자손의 이름, 생일과 죽은 날, 묘지의 주소 등을 돌에 새긴 글을 가르킨다.『환단고기』의『태백일사』중 고구려국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 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고 하며,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하고, 증조부는 광 이라고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이 기록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이 태조,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하는 학자들은 남생의 묘에서 출토된 비석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1923년 이후 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환단고기』서문에 해당하는 범례를 보면 광무 15년[1911년]에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섰다고 편찬 과정을 소상히 적고 있다. 계연수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묘지의 기록을 보고 옮겨 썼다면, 그것은 편찬자 그그로 1911년에 쓰지 않았음을 자백하는 셈이다. 용의주도하게 역사책을 조작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처럼 누가 봐도 금세 알아차릴 만큼 상호 모순되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보다는『환단고기』의 저자가 1923년 남생의 묘 발굴 이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 남산, 남건이 정변을 일으키자 국내성으로 달았다. 남생은 국내성에서 거란, 말갈과 연합전성을 펴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당 군대가 도착하자 주민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 후 그는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제수됐다. 그러니까 남생은 고구려 쪽에서 보면 배신자다. 남생의 묘지가 출토된 중국 하남성은 남생이 생존했을 당시 고구려와 당이 격돌하던 요동 지역보다 훨씬 내륙에 있다. 천남생묘지 탁본 여섯째줄에는 남생의 이름과 그가 '요동군 평양성지역 출신 사람'이라고 적혀있다. 이처럼 기록대로라면 남생은 요동군에 있는 평양성 출신이며,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 외에 요동군에도 평양이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되면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영역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멀리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천남생묘지가 출토될 무렵은 1913년 3.1만세 사건 이후 민신이 뒤숭숭한 때였다. 조선총독부 만세 사건의 원인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에 있다고 보고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창설된 것은 그 일환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1923년 중국 하남성에서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묘지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발굴 유물을 공개해서 얻는 이익이 적고, 도리어 고조선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관리에 신중을 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천남생묘지의 탁본이 엄정하게 관리되었고 그 내용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관리에 신중을 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천남생묘지의 탁본이 엄정하게 관리되었고 그 내용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검토가 끝날 때까지 일반인, 특히 조선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총독부 시절 활동하던 일본인 어용학자들 정도가 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천남생묘지에 대한 내용이 활자화되어 알려진 것은 유물이 출토된 지 10년이 훨씬 지난 1935년 일이었다. 일본인 학자 가쓰라기 스에지가 쓴 『조선금석고』에 천남생묘지에 대한 기록이 처음 실렸다.『환단고기』편찬자가 천남생묘지 발굴 이후 탁본 내용을 적당히 분식해 기록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또 다른 근거로, 천남생묘지 탁본의 소유자가 이마니시 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는 한국의 고대사를 말살하는 데 앞장섰던 어용학자로 지금까지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정황 증거를 통해 남생의 묘지 탁본을 참고해서『환단고기』를 썼을 가능성이 적어진다. 그리고 『환단고기』편찬자가 천남생묘지의 내용을 참고하지 않았다는 결적적인 증거가 있다. 천남생의 묘지 여뎗째 줄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나온다.
'증조부는 자유, 할아버지는 태조로 두 분 모두 막리지를 지냈고, 아버지는 개금으로 태대대를 지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해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 이라고 적고 있다. 즉 천남생묘지는 증조부,할아버지, 아버지 순으로 가계를 기록한 반면,『환단고기』는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 순으로 쓴 것이다. 이 묘지는 집안을 설명할 때 3대를 기록해 왔음도 알려준다. 또, 천남생묘지에는 할아버지 자유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나『환단고기』에는 연개소문의 증조부인 광[廣]이 등장한다. 『환단고기』편찬자가 천남생묘지의 비문이나 탁본만 참고했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연개소문이 죽은지 1300여 년이 지나 연개소문 아들의 묘지가 출토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이 광이라는 사실이 기록된 것은 아직까지『환단고기』외에는 없다. 그렇다면 편찬자가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임의로 작명했을까? 만약 연개소문의 무덤이 발굴되거나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이 기록된 편찬자가 역사를 조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렇게 무모한 창작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환단고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제시된 근거가 도리어 『환단고기』가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임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발해 정혜 공주의 묘지와『환단고기』
정혜 공주는 발해 문왕의 둘째 딸이다. 1949년 중국 돈화의 계동중학과 인변 대학 역사과 학생들이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정혜공주의 무덤을 발굴했다. 일설에는 학교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고심하던 중학교 교장이 혹시 부근의 옛 무덤들 속에 보물이 있지 않을까 해서 발굴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글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이 발견되면서 정혜 공주의 무덤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고대로부터의 통신)]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의 둘째 딸이다. 생각건대 고왕, 무왕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은 왕도를 일으키고 무공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이처럼 정혜 공주의 묘지에는 공주의 내력과 윗대가 세운 생전의 공적이 적혀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공주 아버지의 연호가. 다흥은 발해의 3대 문왕의 연호인데 문왕의 연호가 대흥이라고 기록한 책은 『환단고기』밖에 없다. 이쯤 되면『환단고기』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다른 역사책과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어떤 점이 일치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1979년『환단고기』인쇄본이 처음 국내에 배포되고 1982년 일본에서『환단고기』가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번역서가 나와 100만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상당수 이 책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환단고기』는 초보자에게 그리 쉬운 책도, 재미있는 책도 아니다. 고조선 역사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기복적인 지식이 있고 나름대로 견해를 갖고 있어야 문맥을 따라가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 이 책을 읽어보면 한두 사람의 조작이나 창작만으로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환단고기』의 기록을 검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의 기록이 있다면 그것을 베꼈다고 하겠지만, 기록이 없으면 검증 자체를 할 수 없다. 상반된 기록이 나왔을 때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검증하는 것 또한 용이하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환단고기』의 기록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게 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천문학으로 『환단고기』의 비밀 푼다.
1993년『한국상고사학보』에 단군조선시대 천문 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 이라는 논문이 발표됐다. 박창범 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가 쓴 이 논문은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박 교수는 단군조선이 과연 존재했는지, 그리고 존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인가? 라는 의문을 천문 형상으로 풀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된『단기고사』나『환단고기』에 실린『단군세기』가 주 연구 대상이었다. 이 두 책에는 천문 관측 기록이 약60개가 실려 있었고 과학적 계산으로 확인 가능한 기록은 일식과 오행성 결집, 썰물현상 등 12개였다. 박 교수는 그중 13대 단군 50년[기원전1733년]에 기록된 오행성결집 현상에 주목했다.『단군세기』에는 무진 50년에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 부터 약3700년 전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5행성이 모여들었던 진귀한 천문 현상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5개의 별이 한꺼번에 모이는 이른바 오성취루현상은 약 250년마다 한 번 정도 일어난다고 한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 과정과 결과를 보자.
나는 이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기원전 1733년을 전후로 하여 약 550년간의 시간 범위에 걸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수성,금성,화성, 목성, 토성 등 다섯 행성의 위치를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 다섯 행성이 하늘에서 매우 가깝게 모이는 때는 ① 기원전 1953년 2월 25일 새벽[2.3도 이내]과 ②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초저녁[10도 이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기록이 나오는 기원전 1733년의 현상과 가장 근접한 것은 ②번이다. 계산으로 확인된 기원전 1734년의 행성 결집은 해 질 녘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이 늘어서고 초승달도 함께 모여 장관을 이뤘을 것이다. 기록에 쓰여 있는 기원전 1733년과 비교하면 불과 1년 차이로 실제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혹시『환단고기』편찬자들이 중국 기록을 베끼지 않았을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오성취루 현상과 관련된 중국 최초의 천문 기록은 기원전 700년대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환단고기』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 5개별이 모이는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웃 나라를 싸워 무찔렀다는 등과 같은 무용담이 아니라 그러한 천문 현상이 있었다 는 기록이기 때문에 조작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이들이 이 연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으나, 진서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봤던 이들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됐다. 오성취루 현상 다음으로 박 교수가 연구한 것은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밀려난 현상이다.『단군세기』에서 29세 단군 마휴 재위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무인 원년[기원전943년]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8년[기원전935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34년[기원전91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임승국 한단고기』
남해의 썰물에 대한 연구 과정을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편, 오생성의 결집에 이어 썰물에 대한 기록도 검증해 보았다.[중략] 해와 함께 조석력을 일으키는 중요 요인인 달은 불규칙한 궤도운동을 하며, 일기의 변화로 인한 영향 때문에 조수 간만의 정도는 항상 다르게 마련이다. 이 기록을 본 후 큰 썰물이 기록된 기원전 935년을 전후한 200년간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하고,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의 세기를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 4년 후인 기원전 931년에 가장 강한 조석력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이 썰물 기록이 사서에 임의로 삽임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는 확률은 계산해 보니 0.04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옛 기록과 실제 현상이 이 정도 맞아 떨어지기란 역시 어렵다는 얘기다.[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 교수는『환단고기』에 나오는 오성취루와 남해의 큰 썰물 현상은 검증했지만 일식 기록은 검증하지 못했다. 단군조선시대2000년동안 조금이라도 일어난 부분일식까지 모두 합하면 한반도와 만주, 중공,몽고에 걸쳐 나타난 일식이 무려1500여 회에 이르는데『환단고기』에 기록된 일식 기록은 10개뿐인데다가 기록 연대를 서력으로 환산하는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진척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식 기록을 분석할 수만 있다면 그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곧 단군조선의 강역 안일 것이므로, 단군조선이 어디에 있었을까와 같은 오랜 의문점을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재야 사서의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1933년『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 현상을 검증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환단고기』논쟁은 다른 차원으로 확대됐다. 역사학계의 논쟁을 벗어나 일반인들이 큰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10월 2일 kbs의 역사스폐셜 프로그램 『환단고기』열풍을 방영했고, 그 후 대학마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상고사 연구 동아리가 생기는가 하면 천문학 전무가가 참여한 학회도 결성됐다. 2002년 박창범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바탕으로 일반인이 읽기 쉽게 쓴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를 펴내자 2004년 7월 1일 kbsTV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소개해 다시『환단고기』논쟁에 불을 붙였다.학문의 세계에서 토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토론이 없는 학문은 엄격한 의미에서 학문이라고 하기 어렵다. 대학원이나 박사과정에서 토론과 논쟁이 장려되는 것도 토론을 통해 논리적이지 못한 주장들이 정제되고 새로운 논리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환단고기』진위 논쟁은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쪽이든,『환단고기』가 우리나라 상고사를 더듬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주장하는 쪽이든, 서로 귀를 열고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고 새로운 검증 기준을 찾아내는 비판적『환단고기』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가필의 흔적이 있다, 다른 문헌과 기록이 불일치하다, 책의 성격이 사료라기보다는 종교 서적에 가깝다 등의 이유로『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나 연구 결과로도 『환단고기』를 재검토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환단고기』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가필되고 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대목이 가필이고 윤색인지 밝혀내는 것은『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몫일 수도 있다.
고조선 사라진 역사 - 성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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