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조님 영정

장안봉(微山) 2012. 12. 22. 11:01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   

이색 영정 

 이색영정 李穡影幀
지정번호
:
보물 제1215호
지정연월일
:
1995년 3월 10일
  시 대
: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 효종 5년(1654)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 소본(小本) 효종 5년(1654)
                                          대본(大本) 숙종 37년(1711)
        영모영당본(永慕影堂本) 영조 31년(1755)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 헌종 10년(1844)
  규모·양식
:
누산영당본 세로 143cm 가로 85.2cm
        목은영당본 소본(小本) 세로 25.8cm 가로 25cm
                        대본(大本) 세로 149.8cm 가로 81.6cm
        영모영당본 세로 150.7cm 가로 85.2cm
        대전영당본 세로 146.3cm 가로 78.7cm
  재 료
:
비단바탕에 채색
  소 유 자
:
한산이씨 대종회
  소 재 지
:
누산영당본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이리 499
        목은영당본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91
        영모영당본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413
     
대전영당본 대전광역시 중구 옥계동 84

이색영정은 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초상화이다.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두 점이 있었는데 평상복본은 전하지 않고 오직 관복본만이 서천 문헌서원(文獻書院)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樓山影堂)에 모셔져 왔다고 한다. 당시 문헌서원본에는 태종 14년(1414)에 권근(權近)이 쓴 찬문이 있었고 문정공영당본에는 중종 9년(1514)이라는 연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문정공영당본은 문헌서원본을 옮겨 그린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점은 동일한 형태와 크기의 초상화였다고 한다. 이후 문헌서원본은 임진왜란 당시 잃어버렸던 것을 후손들이 일본의 소장가로부터 되돌려 받았는데 오랜 기간의 보관과정에서 훼손이 심해 효종 5년(1654) 두 점을 모사(模寫)하여 문헌서원과 문정공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색의 초상화는 현재 예산(禮山)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 서울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 서천 문헌서원의 영모영당본(永慕影堂本),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으로 총 4본 5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모사본이다.
예산 누산영당 소장본은 가로 85.2㎝, 세로 143㎝ 크기로 작품에 권근의 찬문과 함께 후손 이정기(李廷夔)의 글이 쓰여 있다. 1654년 사대부 화가였던 허의(許懿)와 유명한 화원였던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 작품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주고 있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 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급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서울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비록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반신상이지만 필세에 골격이 감지되고 얼굴표현 역시 섬세하여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높은 품격을 견지하고 있다. 대본은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화폭 상단 오른편에 권근의 찬문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은 1526년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제기(題記)를 썼던 영정을 1711년에 다시 옮겨 그리게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고식을 충분히 따르되 약간씩 내비치는 선염이 이 초상화의 옮겨그린 연대를 말해준다.
서천 문헌서원 내 영모영당(永慕影堂)의 영정은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로 목은영당의 대본과 동일한 형식인데, 화폭 우측상단에 권근의 목은선생화상찬(牧隱先生畵像讚)과 제기가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1755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은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에 비해 수염과 옷 부분의 묘사 등에서 그 표현기법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거듭된 이모(移模)에서 비롯된 것 이외에 화가의 기량 차이에서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로 그림에 쓰여있는 화기(畵記)에 의하면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이다.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로, 허리에 찬 서대(犀帶)와 발을 올려놓은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 그리고 연폭(聯幅)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기량이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옮겨 그려졌음을 시사해준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일급 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비교적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시도유형문화제232호(하동군 금남사)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71호 (안동시)
명     칭 목은영정(牧隱影幀)
분     류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3.06.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시     대
소 유 자 이장원
관 리 자 이장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설     명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자 장단지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여강지역으로 가던 도중 생을 마치었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 영정은 고려 삼은(三隱) 중 한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선생의 초상이다. 작자는 미상이나 조선초의 대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선생의 찬문이 있고 영락(永樂) 갑신(甲申) 구월(九月)이란 연대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1404년(태종 4년) 이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바로는 영정은 당초 은거한 뒤 야복(野服) 차림의 별본(別本)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산서원 서재(西齋)에는 미완성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영정은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으로 사행(使行)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고도 한다.

 

 

 

(충남 예산군 덕산에 살던 후손 기태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정덕갑술'이라고 적혀 있는데, 태조 4년으로부터 정덕갑술인 1514년까지는 118년이나 시간적인 격차가 난다. 그렇다면 기태씨가 소장했던 영정은 태조 4년 이전에 그려진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정덕갑술본'은 서울 제용감 뒤 (지금의 수송동 영당터)에 있던 목은의   손자 휘 맹진(= 맏 아들 휘 종덕 문양공의 4남) 판중추공   가묘에 봉안되어 자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왜장에게 약탈당해   멀리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까지 건너갔다. 
그 후 목은의 외예손인 부산첨사 여우길이 통신사로   에도에 갔을 때 이 영정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654년(효종5)에 후손 휘 단 등이 김명국 화백을 시켜오래 되어 하반신이 없어진 구본을 바탕으로 두 본을 모사하였다. 그 중 한 본은 지금 수송동 영당에,또 하나는 충남 한산의 문헌서원에 모시게 했다.

 

1767년(영종32)에 후손 휘 수옥 등이한산 문헌서원의 구본을 가지고 화백 변상벽, 정선, 조영우 등으로 하여금 두 본을 모사하게 하여 하나는 수송동 영당에,또 하나는 한산 영당에 모시게 했다. 이들 목은 영정은 최근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제1215호)로 지정되었다.

 

1938년 후손 훈구씨가 원규, 조원씨와 더불어 새로 3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해주 영귀정 영당에, 또 한 본은 덕산 누산영당에, 나머지 한 본은서울 수송동 영당에 모셨다.

 

목은의 영당은 서울을 비롯하여 경성, 대전, 덕산, 마전, 상주, 안동, 장단, 청주, 하동, 한산, 해주, 회양, 횡성 등 전국 각지에 있고,이들 영당의 화본은 대부분 수송동 영당의 영정을 모사해간 것이다                                                                            .   

                                                 

홀로피는 연꽃/ 우성 작사 서창업 작곡,,,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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