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북 상주]?동계 권달수(桐溪 權達手)선생 묘

장안봉(微山) 2013. 5. 11. 08:35

동계 권달수(桐溪 權達手)

 

1469(예종 1)∼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통지(通之), 호는 동계(桐溪). 회(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순(有順)이고, 아버지는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임(琳)이며, 어머니는 이보정(李補丁)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1495년(연산군 1) 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언·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동지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5년 대교(待敎)로서 검열 강징(姜?)과 함께, 왕명을 내릴 때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반드시 참석하도록 건의하였다. 1498년 수찬에 올라 부교리를 역임하고,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종묘에 모시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장(杖) 60의 처벌을 받고 용궁(龍宮)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용궁에서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그는 기개와 절조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93년(숙종 19)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동계 권선생 묘소 전경-난재 채수선생 묘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다

동계선생의 묘비

 

 

 

 

동계선생의 묘갈명-지족당 남곤(知足堂 南袞)이 찬하였디.

 

교동주(喬桐主, 연산군(燕山君))가 왕위(王位)에 오른 지 10년 되던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폐비(廢妃) 윤씨(尹氏)를 추존(追尊)하고자 그 일을 백관(百官)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그때 흉악한 노기(怒氣)가 한창 등등하여 비위를 거슬렸다 하면 피살되어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찼으므로 온 조정이 벌벌 떨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때 교리(校理, 권달수)군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임금을 나쁜 곳으로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의논은 옳지 않다고 하자, 동료의 인사와 어사(御史), 간관(諫官) 등이 교리군의 말을 의롭게 여겨 모두 그의 의논에 따르자 교동주가 모두 쫓아내버렸다. 그 뒤 반년이 되어 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교리군이 말하기를, “반대 의논을 제기한 사람은 나이지, 다른 사람은 간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리군만 저자에서 사형당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였다. 교리군이 체포되었을 때 함창(咸昌)에 있던 그의 부인(夫人) 정씨(鄭氏)가 밥알 하나도 입에 넣지 않고 속이 답답하면 물만 마시고 있다가 교리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나도 그와 같이 한 구덩이에 묻히면 만족하다.” 하고,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아! 교리군 같은 사람은 어찌 옛날의 열사(烈士)가 아니겠는가마는 부인까지 곁들었으니, 정말 절의(節義)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교리군은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무리 중에 우뚝 뛰어났다. 당시 과거 공부를 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 외람되고 비루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고문(古文)에 주력하여 부(賦)를 지을 때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揚雄)을 원조(元祖)로 삼고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상당히 건안(建安) 제가(諸家)1)의 문체를 취하였으므로 그의 저작이 나올 때마다 후생(後生)들이 앞다투어 전하여 외웠으니, ≪문선(文選)≫에 대한 학문이 마침내 세상에 성행한 것은 교리군의 영향력(影響力)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종(成宗) 23년 임자년(壬子年, 1492년) 과거에 합격하여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다. 임금이 문장에 능한 인사를 선발하여 용산(龍山)의 독서당(讀書堂)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교리군과 김일손(金馹孫) 등이 그 선발에 들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재차 연경(燕京)에 가는 사절을 따라가 연산(燕山)에서 중국어(中國語)를 질문하였으며, 돌아와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군은 타고난 자품이 출중하고 흉금이 시원스러워 사람과 사귈 때 천진(天眞)을 털어놓고 진실하게 담소(談笑)를 나누었으므로, 보는 사람이면 모두 그가 화평(和平)한 군자(君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올곧아 자신을 굽히고 남을 따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도량은 감복하면서도 그의 엄격한 것을 꺼린 바람에 결국 화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 주상(主上, 중종(中宗)을 지칭함)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떤 사람이 교리군 부부의 일을 아뢰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의 관작을 추증하고 그곳 관리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정씨(鄭氏)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해주어 그의 정렬(貞烈)을 포상하였다.

교리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유언(遺言)에 따라 그의 형 정랑(正郞, 권민수(權敏手))군의 아들 권소(權紹)를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조정에 요청하자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교리군의 시체를 한양(漢陽)에서 반장(返葬)하지 못하였으므로 부인은 임시 옛날의 거주지 상산(商山)에다 매장해 놓았다. 정랑군이 이리저리 귀양다니느라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다가 귀양지에서 풀려나자 맨 먼저 가산(家産)을 털어 묘소를 잡아 부인이 소망한 대로 한 곳에다 합장(合葬)하였는데, 그곳은 함창현(咸昌縣) 관아 남쪽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자리였다.

교리군의 휘(諱)는 달수(達手), 자(字)는 통지(通之)이고,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증조 권회(權恢)는 서천 군사(舒川郡事)이고, 할아버지 권유순(權有順)은 공주 목사(公州牧使)이고, 아버지 권임(權琳)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이다. 부인 정씨는 상산의 저명한 씨족으로 감찰(監察) 정계금(鄭繼金)의 딸이다. 정랑군의 이름은 민수(敏手)인데, 교리군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공부하여 조정에 벼슬할 때까지 그 명망과 지위가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이루었다. 그의 우애가 독특하였기 때문에 애통도 더욱 심하였으므로 교리군을 위한 일이라면 더욱더 근실히 하였다. 그가 교리군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에게 찾아와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이 남곤(南袞)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차마 그의 묘비명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의 묘비명을 쓰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감히 눈물을 뿌리며 다음과 같이 비석에 쓴다.

지아비는 직언(直言)으로 죽었고 지어미는 정렬(貞烈)로 죽었으니,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의 그 도리가 일월(日月)처럼 나란히 찬란하네. 맺힌 분노 풀리지 않았으니 마땅히 우레로 변화하여, 사특한 간담을 깨뜨려서 궤도로 들어서게 하였겠지. 관작과 정문을 하사한 건 그들의 영광만 될 뿐이겠나? 온 세상에 찾아보기 힘드니 풍성(風聲)을 수립하게 되었었지. 묘소가 길 위에 있으니 나그네들 그 아래로 지나다가, 이마에 손 얹고 추모하거나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겠지. 찬란하게 그 방명(芳名) 들날렸는데 후사를 세우는 데 미치었도다. 후사에 유감이 없으니 선량한 형님이 있었도다. 일편(一片)의 비석을 세우니 만고토록 생존한 것 같도다.

 

 

동계 권달수 묘소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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