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출생. 성은 아(牙)씨 초명은 원혜(元慧) 법명은 혜근(惠勤)
호는 나옹(懶翁)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왕사 존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고려 충숙왕 7년(1320) 친구의 죽음에 무상을 느껴 문경 공덕산 묘적암 요연선사에 출가 이후 양주 회암사로 가서(1344)
수행정진 충목왕 4년(1348) 원나라 연경 고려사찰 법원사에서 인도승려 지공화상 친견(다른 기록에는 8살에 고려에 왔던
지공에 보살계 받음, 보살계첩이 지금도 전함) 이후 임제종 양기파의 평산처림(平山處林)스님의 불법전수 강남 등을 고행
재차 지공을 뵙고 선지(禪旨)를 받고 법의 불자 범어서신 한 통을 받다. 이후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설법(1356) 후
지공스님을 뵌 후 1358년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228호) 나옹 입적 3년 후인 우왕5년(1379) 조성된 것으로 추정됨
원주 영전사(令傳寺)에도 보제존자의 부도가 삼층석탑(쌍탑) 양식으로 조성 되었으며 1915년 일제가 경복궁으로 옮길시
탑에서 지석이 발견되어 사리탑 조성내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의
이름으로 서있다,(보물 제358호) 나옹화상어록(보물 제697호) 호암미술관
양주 회암사에도 부도가 있으며 문경 공덕산 묘적암에도 나옹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신광사 주지와 구월산과 금강산에 있었으며 청평사에1367년) 있을때 지공의 가사와 서신을 받고 4년 뒤 회암사에서 지공
스님의 사리를 친견했다. 개경 광명사 주석시(1370년) 환암혼수만이 스님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국사이며 화암종 대종사
설산스님을 때린 애기가 어록에 있다. 다음해 8월 공민왕으로 부터 왕사로 책봉되어 금란가사와 법복과 바루를 하사받았다.
이후 4년간 불타버린 회암사 중창에 힘쓰고 우왕 즉위후 대신들의 탄핵으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귀향가던중 신륵사에서
입적하니(1376년 5월 15일) 세수는 57세요 법랍은 36세였다.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짓고 한수가 썻다 해서로 되어 있으며 총높이 2.21m 대리석인 비신은
1.21m 이며 비신폭은 0.61m 며 나머지 돌들은 화강석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귀양가던 도중 입적했다.
스님열반 후 10년 이내에 신륵사외에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용문산, 구룔산, 묘향산, 등 7개소에 목은이색이 찬한 탑비가
세워졌고 원주 영전사에도 탑비(현재 쌍탑의 부도만 존재)가 세워졌다.
회암사지에 회암사지 선각왕사비가 있으며 화재로 보존처리중이다.(보물 제387호)
석등(보물 제231호) 고려 말기 석등으로 조선시대 장명등의 선구적인 모델이며, 화강석을 사용했으나 유독 화사석은 납석(蠟石)
을 사용했다. 화사석에는 비천 또는 용을 새겨 매우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조사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소나무 숲 안이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풍수적으로 명당이라 한다.
나옹화상의 시한수를 끝으로 마침니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1연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2연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
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 宗 師禪敎都摠攝勤修 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는 정도(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와 근수(勤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禪)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고,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삼귀의(三歸依)가 아닌 사귀의를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계목(戒目)으로는 (1)수정신사귀의(受淨信四歸依), (2)참제제삼업죄(懺除諸三業罪), (3)발홍서육대원(發弘誓六大願), (4)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불교의 5계(戒)나 보살계(菩薩戒)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 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1권과 <가송(歌頌)>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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