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도(물형도)

[스크랩] 태극의 기원과 유례

장안봉(微山) 2013. 4. 25. 01:21

태극의 기원

 

 

 

태극(太極)은 고대 사상 중 음양 사상과 결합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의 근원으로 중시된 개념이다. 《주역(周易)》의 <계사 상전(繫辭上傳)>에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생성론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의 태극팔괘도는 복희伏羲)의 '선천 팔괘(先天八卦)'가 아닌 문왕(文王)의 '후천 팔괘(後天八卦)'라고 한다.

 선천 팔괘를 고쳐 만든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는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인간의 치세 원리를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상)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혀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雨師)의 직(職)을 세습(世襲)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경유하여 마침내 진(陳)으로 옮겨 수인(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西土)에서 입호(立號)하였다.

후예들이 풍산(風山)에 분거(分居)하였으므로 역시 성(姓)이 풍(風)이며 후에 마침내 패(佩), 관(觀), 임(壬),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의 8성(姓)으로 나뉘었다. 지금 산서(山西)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구거(舊居)가 아직도 남아 있다.

 임(壬), 숙(宿), 수(須), 구(句), 수유(須臾) 등의 나라가 모두 복희의 후예들이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를 지내고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卦圖)를 지었으며 신시의 계해 역법(癸亥 曆法)을 고쳐 갑자(甲子)로 세수(歲首)를 삼았다.

여와(女媧)는 복희의 제도를 이었다. 주양(朱襄)이 구 문자(舊文子)에 인하여 비로소 육서(六書)를 전하였다.」

 

참고: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 신시본기 제삼(太白逸史, 神市本紀 第三)>에는 삼극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환웅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후의환웅(太虞儀桓雄)이 있었다.

사람들을 가르쳐 반드시 묵념(黙念), 청심(淸心), 조식(調息), 보정(保精)을 하게 하니 이것이 곧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술(術)이었다.

 아들 12인이 있었는데 장자를 다의발환웅(多儀發桓雄)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태호(太皥)라 하였다. 태호는 다시 호를 복희(伏羲)라 하였다.

 어느 날 꿈에 산신이 몸에 강령(降靈)하여 만리를 통철(洞徹)하게 되고 인하여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었는데 삼절삼련(三絶三連)하여 환위추리(換位推理)하면 묘하게도 삼극(三極)을 품고 있어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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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문양의 유래 
 

'태극(太極)' 이라는 어휘는 역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을 뜻합니다. 
태극 문양은 아시아에서 고대부터 유행한 원시적인 종교관에 기인되었다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아시아지역 기원전 유적지 곳곳에서 태극이나 삼태극 도안이 그려진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엔 고대부터 즐겨쓰던 이런 형태의 문양을 한자어를 도입해 태극이라고 불렀으며
각기 이름은 다르지만 계속 전승되었기 때문에 티벳이나 몽골의 국기에도 비슷한 태극 도안이 넣어져 있습니다.

19세기 한국의 태극기 

몽골의 국기에서의 태극

티벳 국기에서의 태극

 

티벳에서는 한국과 똑같은 태극 도형을 사용하는데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의 우주 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합니다. 
.
몽골 국기에서 보이는 태극 문양은 남녀를 상징하며, 또한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지혜와 방심하지 않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백제(百濟)

한국의 태극문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부 살펴봅시다. 

이것에 관한 특별한 어휘는 전해지지 않지만 단군신화를 보면 천부인(하늘의 징표)에 근접하는 유물입니다.

마한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물로 고조선계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 , B.C 300~100

고조선 영역에서만 나오는 거울로 고대의 종교관을 엿볼수있는 유물입니다. 
거울은 작은 삼각형이 모여 소용돌이를 이루고 빛의 방향에 따라서 왼쪽으로 돌기도하고 오른쪽으로도 돕니다.
그야말로 조화롭지만 변화무쌍한 우주 만물의 원리를 실시간으로 볼수있게 디자인한 유물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곡선의 디자인이 나오게 되면서 대략 원시적인 태극 문양이 갖추어 집니다.

마한의 방패유물(신창동 삼한시대 유적)

소용돌이 문양들이 정형화 되는것은 삼국시대입니다. 

백제의 태극무늬 기와들입니다. 마한 시절의 소용돌이 무늬에서 태극문양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집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최고 오래된 태극 문양으로 인정된
나주 복암리 고분의 백제 목간 태극입니다



신라(新羅)

신라에선 한국 전통 문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3태극 문양이 발견됩니다.

가운데 태극은 시계 방향으로 도는것이 재미있죠.

신라 미추왕릉 보검의 3태극 (三太極)  A.D 400~500
중앙아시아 단검형식에 삼태극이 3개  결합한 신기한 보검.


신라 감은사지의 태극 문양 (682年)



팔괘의 유입.


태극기는 그 형태가 팔괘를 참고하고 있어 도교와 관계가 깊지요.
북한의 낙랑유적에선 기원전후 부근 漢나라의 팔괘유물(나침반)이 발견?다고 하는데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팔괘같은 주역이론이 한반도에 존재했음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 시대부터 살펴봅니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벽화에서 신선이 팔괘(八卦)를 긋는 모습

도교는 고구려때 성행하여 오늘날 고분 벽화를 통해서 잘 볼수있습니다.
또한  연개소문이 정식으로 당나라 도교를 수입하여 장려하려 했습니다.

한국 태극기에서 팔괘는 ? (하늘)  , ? (땅)  , ? (물) , ? (불)  4가지만 사용하는데  위치로 보면 동서남북 4방위를 뜻합니다.
고구려에선 음양론으로 해(삼족오와)와 달(토끼,두꺼비)를 사용했고 팔괘보다는 사신도를 선호했기 때문에 태극이나 팔괘 유물을 찾기 힘들죠.



고려시대 - 高麗
몽골내습도(고려,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는 고려 병사들의 방패에 삼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진에서 몽골군 깃발은 붉은 바탕에 노란 태양.


현무,주작,청룡,백호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팔괘나 태극은 여러 유물에서 발견됩니다.  etc



조선시대 - 朝鮮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券) -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나라 화가 작품

조선 수군 배에 조선군 식별을 위한 태극 깃발이 달려있습니다.
정식 태극기가 사용되기 전에 이런 형태의 태극 깃발들이 많은데
태극무늬는 널리 석조 문양, 서원 대문, 별전,  장신구, 여러곳에 활용됩니다



삼도수군조련도 (三軍水軍調練圖 )

師 깃발을 달고있는 판옥선 꼭대기에  펄럭이는  태극 기발

조선시대 태극 배갯모
배개에 세겨놓을 만큼 널리 쓰였다.
조선시대 열쇠고리,  수복십이지장 개금패(開金牌) -대전 화폐 박물관



조선시대의 윷놀이 판에서는 북극성 자리에 태극이 박혀있습니다.






정식으로 조선의 국기가 된 박영효의 태극기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淸)이 자기나라 국기인 용기(龍旗)를 약간 변형하여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즐겨 사용해 오던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 도형기'(太極 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종전의 '태극 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이 국기를 지니고 일본으로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을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바로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다.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고종은 다음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천안=뉴시스】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28일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을 공개했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의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42.41㎝, 세로 115.14㎝, 태극의 지름 81.81㎝이다.






 

 1882年 미해군이 발행해 소개된 세계의 국기들.
Bureau of Navigation

 
 
1882년 출판 정식 세계의 국기편 영문판.
 지금까지는 이게 1등 태극기 였지만 박영호 태극기 원본이 나왔으니 2등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이 태극기는 데니가 귀국할 때 가져 갔고, 그의 후손인 윌리엄 랜스턴이 한국에 기증했다.  데니 태극기(1890)는 실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1883년 조선의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을 때 9월 27일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는 한국의 태극문형을 '상형문자와 같은 상징'으로 '행복'을 의미한다고 그대로 소개하였다.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나 12살까지 어린시절을 평양에서 보낸 미국인 미스터 핑씨의 태극기  유품

일제 치하 3.1운동때 쓰던 태극기 인쇄용 목판입니다.




-참고-

대청국속 태극기(大淸國屬)는 1886년작
조선의 자립을 막으려던 청나라 짱개 이홍장의 개인저서 通商章程成案彙編 에 수록
편저자(한자)  李鴻章(淸) 編  판본사항 古活字本 간행지 鐵城 책권수 30卷 12冊, 彩色圖
편저자(한글) 이홍장(청) 편 간행연도 [光緖12年(1886) 序] 간행자 廣百宋齋藏 책크기 19.8×1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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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태극과 중국 태극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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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태극은 11세기에 최초로 그 이론이 정립되어 도형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동심원 형태로 한국이나 티벳에서 유행하던 물결무늬 태극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중국쪽이 상당히 늦은감이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 태극문양은  1070년 제작된 주돈이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태극'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일까? 국내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이 애용해 온 전통적 고유문양이자 음양 사상을 표현한 민족 부호라는 것이다. 김원모 교수는 "서기 1070년 나온 중국의 《태극도설(太極圖說)》보다 388년 앞서 서기 682년에 건립된 신라의 감은사 주춧돌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고려시대 허재(許載) 석관의 태극무늬(1144)와 충주 예성 신방석 태극무늬(1277), 종묘 정전 나무기둥의 삼태극문양(1608) 등으로 계승됐다. 모양도 중국과는 다르다. 중국의 태극이 동그라미가 겹쳐 있는 것인 데 비해 한국은 처음부터 좌우 상하로 휘감긴 문양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태진 교수는 "태극팔괘도는 정조 대왕의 정치이념인 '군민(君民) 일체설'의 표현이었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출처:다음카페, 해혹복본을 꿈꾸는 빛의 공동체

 

 

출처 : 주목 (목향 )
글쓴이 : 천리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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