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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북 부안]고홍건(高弘建) 묘역과 신도비

장안봉(微山) 2012. 12. 20. 15:04

 

 고홍건 묘역

 고희(高曦)신도비

고희(高曦)

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제주(濟州).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수문장이었던 그는 선전관이 되어 왕을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당시 곽산군수이던 이경준(李慶濬)이 왕을 호종하게 됨에 따라 특지로 이경준의 직을 맡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호조판서 김수(金睟)의 천거를 받아 공세전운사(貢稅轉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들의 영접에 진력하였다. 1601년 홍원현감 재직시에도 늙고 귀가 어두운데다가 행정을 향리에게 일임하여 민간의 원성이 높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과 유원첨사를 거친 뒤 풍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04년 호종공신으로 18공신회맹록(十八功臣會盟錄)에 들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어 영성군(瀛城君)에 봉하여졌다.

 고두황(高斗煌)신도비

 

고두황(高斗煌)

1628년(인조 6)∼1713년(숙종 39). 조선 후기 무신. 자는 회중(澮仲)이고, 호는 직곡(直谷)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증조부는 제원군(濟原君) 고사렴(高士濂)이고, 생부는 고홍선(高弘選)이며, 양부는 삼종숙
고홍건(高弘建)이다.옥구(沃溝)에서 살고 있던 고두황의 생부 고부선(高傅選)은 삼종숙의 뒤를 잇기 위해 양자로 보낸 고두황이 21세 때에 광산김씨(光山金氏)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매우 예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고부선은 “의리로는 삼종숙 며느리이지만, 정리로는 내 며느리”라고 하면서 노비와 땅을 광산김씨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내용이 제주고씨(濟州高氏) 집안에 내려오는 〈분재기(分財記)〉에 실려 있다. 〈분재기〉에는 생부를 고부선이라고 하였는데, 고홍선의 자(字)가 부선인 것으로 생각된다.
고두황(高斗愰)은 알성무과(謁聖武科)에 올라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선대의 공훈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고홍건의 조부이신  고사렴(高士濂)신도비

 

 

고홍건(高弘建)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입부(立夫). 증조는 고세호(高世豪)인데, 벼슬이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고사렴(高士廉)인데, 함경남도 우후(咸鏡南道虞候)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제원군(濟原君)에 추증되었으며, 고(考)는 고희(高曦)인데, 호성공신(扈聖功臣) 영성군(瀛城君)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부령 김씨(扶寧金氏)로 김의복(金義福)의 딸이다. 영성군의 아우 성주 판관(星州判官)으로 병조 참의에 추증된 고현(高晛)이 사의(司議)인 한양(漢陽) 조필(趙珌)의 딸에게 장가들어 실제로 공을 낳았지만 영성군이 아들이 없어 공을 후사로 삼았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뒤 1613년(광해군 5) 한양의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으며, 조상의 큰 공으로 무관직 6품에 승진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여 공주에 간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어 영원군(瀛原君)에 책봉되었다. 이어 평안도 희천군수와 여산영장(礪山營將)을 거쳐 5위의 장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가(扈駕)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서쪽 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충청도병마절도사와 오위도총부부총관, 서흥부사 등을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651년(효종 2)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고홍건 신도비와 묘소 전경

 

 

 

 

 趙復陽이 찬하고 李正英이 썼으며 呂聖齊가 전서하였다

 

 

 증조부 고세호 묘소

 

 

 

 양부 고희(高曦) 묘소 전경-생부는 성주판관 고현(高晛)이다

 

 

 

 

 

 고홍건 묘소(중앙)-좌,우측 묘소는 정부인 함양 박씨와 기계유씨 묘소이다

 

 

 

 

 

 

 

고희(高曦)를 모신 효충사(效忠祠)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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