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한산이씨의 유래

장안봉(微山) 2013. 4. 16. 22:36

▣ 한산이씨의 유래

        한산이씨의유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李穀)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우탁 이동(易東),포은 정몽주(鄭夢周)와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 등의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아들 목은(牧隱) 색(穡)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塏)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근세인물로는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월남(月南)이상재(李商在)를들수 있                                                                                      
  

▣ 한산이씨의 연원 (淵源)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같은 뿌리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계 (系) 로 이루어 진다.
그 중 하나는 고려 충숙왕 때 원
(元) 나라 과거(科擧)에 급제 (及第) 하여 원 (元) 나라 한림 국사원검열 (翰林 國史院檢閱) 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하여 정당문학 (政堂文學) 과 도첨의 (都僉議) 찬성사 (贊成事) 에 올라 한성군 (韓山君) 에 봉 (封) 해진 이곡 (李穀) 의 5 代祖인 이윤경 (李允卿) 을 시조 (始祖) 로 하는 권지호장공계 (權知戶長公系 ; 보통 戶長公系라 부름) 이고, 나머지 하나는 고려 (高麗) 충렬왕 때 광정대부 (匡靖大夫) 로 도첨의참리 상호군 (都僉議參理 上護軍) 겸교대장군 (檢校大將軍) 에 오르고 역시 한주군 (韓州君 ; 韓山의 別號) 에 봉 (封) 해진 이무 (李茂)3 代祖인 이윤우 (李允佑) 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 (權知公系) 이다.

호장공계
(戶長公系) 의 세록 (世錄) 편에는 시조는 이윤경 (李允卿) 이라 했고 ,그 이전에도 선조가 있겠지만 지금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권지공계 (權知公系) 의 세록 (世錄) 편 에 의하면 시조는 이윤우 (李允佑) 라 하면서 그 이전에 대하여는 전 (傳) 하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권지공
(權知公) 사적 (事蹟) 편에는 이윤우 (李允佑) 는 고려조 (高麗朝) 에 문과 (文科) 에 올라 왕의 신임을 얻어 이름을 떨쳤고 ,그는 아우 이윤경 (李允卿) 과 더불어 각기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두파 (派) 의 시조 (始祖) 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권지호장공계
(權知戶長公系) 의 ' 대동보 (大同譜) ' 에는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 특히 형제사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두 분의 관계가 백숙 (伯叔) 사이인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권지공계
(權知公系) 의 '계미보 (癸未譜) ' 서문 (序文) 에 보면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이윤우 (李允佑) ,이윤경 (李允卿) 형제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여러 대 (代) 에 걸쳐 독자 (獨子) 로 자손이 영세하여 근래 더욱 현달한 분이 없으므로 세상에서는 가정 (稼亭) , 목은 (牧隱) 의 자손 (子孫) 만은 한산이씨 (韓山李氏) 로 알고 우리 파 (派) 는 근근히 대 (代) 를 이어왔음으로 아는 이가 드물다 "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한산이씨
(韓山李氏) 로서는 이곡 (李穀) ,이색 (李穡), 곧 권지호장공계 (權知戶長公系) 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조선조 5 백년을 통해 재상 4 명,대제학 4명, 청백리 5 명, 공신 11명,을 냈고 문과급제자만도 1백98명으로 전체 씨족 중에서 16 위로서 李氏 중에서는 전주이씨 (8백73명) 연안이씨 (2백50명), 다음 가는 명문 거족이다

▣ 호장공계의 연원 (淵源)

 호장공계 (戶長公系) 의 시조는 고려 (高麗) 성종 (成宗) 때 한산군 (韓山郡)의 호장 (戶長) 이었던 이윤경 (李允卿) 이다. 호장 (戶長) 이란 12牧의 향리 (鄕吏) 중 당대 (當代) 의 한 위계 (位階) 로서 풍속을 바로 잡는 직책이었다.
호장 (戶長) 고려 성종 때부터 시작된 제도로서 지방의 명망가 (名望家) 나 호족 (戶族) 출신이 맡았던 것을 보면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선계 (先系) 는 한산 (韓山) 지방에서 크게 세를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호장공계 (戶長公系) 가 관향 (貫鄕) 을 한산 (韓山) 으로 삼게 된 것은 충혜왕조에 진사 (進士) 가 되고 벼슬이 대사성 (大司成),대제학 (大提學) 문하시중 (問下侍中) 등의 요직을 거치고 우리나라 성리학의 유종 (儒宗)인 문정공 (文靖公) 목은 (牧隱) 이색 (李穡 ; 1328~1396) 이 한산부원군 (韓山府院君) 에 봉해진 데에 연유한다.

그래서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목은 (牧隱) 을 중시조 (中始祖) 로 받들고 후손들은 목은 (牧隱) 때부터 대수 (代數) 을 헤아려 자기를 "목은 (牧隱) 의 몇 대손" 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여말 (麗末) 삼은 (三隱) 이색 (李穡) 조선조 (朝鮮朝) 에 사육신 (死六臣) 중의 한분인 이개 (李塏) 임란공신 (壬亂功臣) 인 이경류 (李慶流) 한말 (韓末) 사회운동가이신 월남 (月南) 이상재 (李商在) 독립운동가인 수당 (修堂) 이남규 (李南珪) 를 배출한 충절 (忠節) 의 가문이다.

이윤경 (李允卿) 의 5대손인 이곡 (李穀 ; 1298~1351) 은 문인 이제현 (李齊賢) 의 문하 (問下) 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고려 (高麗) 충숙왕 (忠肅王) 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332년 정동성 (征東省) 향시 (鄕試) 에 제 1등으로 합격하고 원 (元) 의 제과 (制科) 에서 제 2갑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원 (元) 에서 중서성좌우사원외랑 (中書省左右司員外郞) 에 임명되었고, 고려에서는 벼슬이 정당문학 (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 (都僉議贊成事) 에 이르고 한산군 (韓山君) 에 봉하여 졌다.

이곡 (李穀) 의 아들인 이색 (李穡) 은 여말 (麗末) "삼은 (三隱) "으로서 태산북두 (泰山北斗) 와 같은 당대의 석학이었으며 정치가였으며 또 문장가요 교육자였다. 그는 충혜왕 복위 2년 (1341)년 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2년 (1353) 년 에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 (鄕試) 에 수석 합격, 다시 회시 (會試) 에 합격하고, 전시 (殿試) 에는 제 2갑으로 합격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문사 (文士) 로서 중조 (中朝) 에서 좋은 성적이었다.

그는 (元) 의 국자감에 유학하면서 중국 (中國)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특히 주자 (朱子) 와 정자 (程子) 의 새 유학 (儒學) 이론에 심취하여 학문적 기저를 성리학적 (性理學的) 유학의 이념에 두고 성리학을 모든 학문의 근간과 치세 (治世) 를 위한 근본학문으로 두어 훗날 우리나라의 성리학 (性理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정당문학 (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 (藝文館大提學) 을 거쳐 58세 때 신하로선 최고의 자리인 문하시중 (問下侍中) 에까지 올라 문하에 권근 (權近), 김종직 (金宗直),변계량 (卞季良) 등을 배출하고 공민왕 (恭愍王) 16년에 성균관 (成均館) 을 창설, 대사성 (大司成) 에 임명되어 김구용 (金九容), 정몽주 (鄭夢周), 박상충 (朴尙衷), 박의중 (朴宜中), 이숭인 (李崇仁) 등을 교수로 채용 성리학 (成理學) 을 장려하여 교육중흥에 힘썼는데 이후 고려사회의 사상적 기조를 성리학으로 개편시키는 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씨족정신은 목은 (牧隱) 의 가학이념 (家學理念) 에서 시작된다. 목은 (牧隱) 이 고려사회에서 유종 (儒宗) 으로 자리하기 까지 그는 아버지 곡 (穀) 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성균시에 합격하자 아버지가 연경 (燕京) 에서 시를 보내어
                  
" 너는 지금부터 마땅히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 하리니"
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그는 아버지의 교훈을 평생의 지침으로 사고 그의 자손들에게 전훈 (傳訓) 하여 가업을 계승토록 철저히 교육하는데, 그의 교육은 "존천리 (存天理) 알인용 (遏人慾)"  이라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지상의 목표를 충(忠) 과 효 (孝) 의 실천에 두고 다음에 화목 (和睦) 을 강조하였다.충 (忠)과 효(孝) 는 그가 성균관에서 문생들을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하였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자손들에게 영원토록 서로 화친할 것
(아지자손 백대지친 我之子孫 百代至親)  내 자손은 백대가 지나도 친하게 지내라 )을 가르치고, 시와 예를 대대로 전하여 충과 효로서 입신하라  (시예전가 충효입신,詩禮傳家 忠孝立身) 고 정훈 (庭訓) 하였으며, 몸을 단정히 하고 (형단,形端) 마음을 맑게 가져 (源潔,원결),천명 (天命) 으로 태어난 자기 몸을 천명에 어긋나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이 가르침은 그의 세 아들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 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활철학으로 실천하게 아였으며, 그것은 (맹유,孟유), (숙야,叔野), (계주,季疇) 등 15명의 손자를 거쳐, 후대에 (개,塏), (파,坡) 등에게 계승되고, 조선중기에는 (산해,山海), (지함,之涵),(상정,象靖), (광정,光靖)등에게 이어져 그의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가학을 빛나게 했다. 즉, 그의 손자인 (맹균,孟畇) 과 (계전,季甸) 이 대사성 (大司成) 과 지공거 (知貢擧) 를 역임하고 조선초기 학맥형성과 정치질서 확립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 한 예이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또 다른 씨족정신은 한산이씨 (韓山李氏) 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름의 글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세 아들의 이름을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 으로 한 것은 덕을 배양하고 (種德), 학문을 익혀 (種學) ,지선에 이르도록 함 (種善) 으로서 중화의 덕을 실현하고 본연지성 (本然至性) 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또 (곡穀) ,(색穡) .(종種)은 모두 벼 곡식을 의미하며, (가家),(목牧),(직稙) 등은 곡식을 심는 것을 의미하며, (유), (야野), (주疇) 등은 밭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벼이삭, 벼 이름,벼 익은 등을 의미하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연주의적 사상 및 존천리 (存天理) 의 교육이 념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개국 후 이성계는  민심수습을 위해 목은 (牧隱) 을 한산백 (韓山伯) 에 봉하는 등 우대하며 여러 번 새 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지만, 목은 (牧隱) 은 끝내 거절하고 야인으로 일생을 바쳐 불사이군 (不事二君) 의 곧은 절개와 고매한 품성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6,000 여수가 넘는 그의 시(詩) 에 대하여 흥여하 (洪汝河) 는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 (崔致遠) 이 근원이며 다음에 이규보 (李奎報) 가 다듬어 윤을 내고, 이제현 (李齊賢) 이 절도에 맞도록 잘 고르고, 마지막 이색(李穡) 에 와서 집대성 시켜 후세에 떨치게 했다고" 평할 만큼 그 문학성은 그 시대의 대표로 인정하고 있다.

목은 (牧隱) 의 세 아들인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 은 각각 여말에 첨서밀직사 (簽書密直事), 지중추원사 (知中樞院事) 를 지냈으나 고려의 큰 기둥이던 이색 (李穡) 이 개국 세력에 의해 밀려나는 와중에서 종덕(種德)은 (장살杖殺) 당했고, 종학(種學) 은 교살 당하였다. 그러나 태종조에 복권되어 이종덕(李種德) 의 아들 이맹균(李孟畇) 도 성균관 대사성, 집현전대제학, 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이종학(李種學) 의 넷째 아들 이숙무(李叔畝) 는 형조판서,지중추부사,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이종학(李種學) 의 막내인 이숙치(李叔畤) 는 세종조에 대사헌 (大司憲) 을 거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을 지냈다.그러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역모로 몰려 일찍 세상을 따나게 되니 그후 막내인 이종선 (李種善) 의 후손들이 주로 조선조에 와서 크게 현달할 수 있었다.

이종선 (李種善) 의 아들 이계린(李季疄) 은 세조조에 좌익공신(佐翼公臣) 으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고, 그의 동생 이계전(李季甸) 은 세조조에 정난(靖難) 좌익공신 (佐翼公臣) 으로서 영중추원사 (領中樞院事) 를 지내고 한성부원군 (韓城府院君) 에 봉해졌으며,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축 (李蓄) 의 아들 이훈 (李塤) 은 성종조에 좌리공신 (佐理公臣) 에 참여하여 참찬 (參贊) 이 되어 한성군 (韓城君) 에 봉해졌으며, 이계전 (李季甸) 의 아들인 이우 (李堣), 이파 (李坡), 이봉 (李封) 은 각각 대사성 (大司成), 의정부좌찬성 (議政府左贊成), 현조판서 (刑曹判書) 를 지냈다.

목은 (牧隱) 의 증손 이개 (李塏) 는 단종에게 충절을 지킴으로써 한산이씨 (韓山李氏) 를 빛낸 사육신 (死六臣) 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부터 시문에 뛰어나 세종 (世宗) 18년 문과에 급제했고, 뒤에 중시 (重試) 를 거쳐 호당 (湖堂) 에 뽑히고 벼슬이 직제학 (直提學) 에 이르렀으나 성삼문 (成三問) 등과 같이 단종 (端宗) 의 복의를 모의하다 세조 (世祖) 의 권력으로 사형 당했다. 그는 가족까지도 몰살 당하는 큰 화를 입었으나, 오늘날은 충 (忠) 과 효 (孝) 을 하나로 보는 한산이씨 (韓山李氏) 의 가학정신에 따라 충절의 대표로 칭송받고 있다.

목은 (牧隱) 의 6代 孫인 토정 (土亭) 이지함 (李之涵) 은 조선조 화담 (花潭) 서경덕 (徐敬德) 의 문하로서 재물을 탐내지 않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며, 천문,지리, 의약, 음양, 복술에 통달하여 많은 기행과 예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청하 (淸河 ; 지금의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강의 범람을 예고하여 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그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으며, 선조 11 년 아산현감 (牙山顯監) 재직시에는 자기도 가난하면서 " 걸인청 " 이란 것을 만들어 관내의 많은 거지들을 돌보아 주기도 했다. 오늘의 토정비결 (土亭秘訣) 은 바로 토정이 한 예언서로 전해지고 있으며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조선조의 왕가와도 통혼이 많은 씨족이다.이색 (李穡) 의 손자 이숙무 (李孰畝)  ; 이색 (李穡) 의 2남인 종학(種學) 의 4 남) 는 태조 (太祖) 의 맏아들인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 (李芳雨) 의 사위이며, 그의 조카 이훈 (李塤) 은 세종 (世宗) 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 의 사위가 되는 등이 그러하다.

목은 (牧隱) 의 15 代孫 대산 (大山) 이상정 (李象靖) 은 갈암 (葛庵) 이현일 (李玄逸) 의 외종손이며 밀암 (密庵) 이재 (李載) 의 외손인데 퇴계설을 계승, 273 명의 문인을 배출하고 52 권 27 책이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긴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그는 율곡파와 퇴계파의 학설을 통합하여 퇴계학설로 집대성하여 조선조 중기 유학의 대종을 이루었으며 그 통일종합철학은 그의 선조인 목은 (牧隱) 의 유불선 (儒佛仙) 사상융합 철학 정신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아우 소산 (小山) 이광정 (李光靖) 은 형의 뜻을 이어 많은 벼슬을 물리치고 참된 학문의 길이 도학 (道學) 에 있음을 알고 일생을 오로지 학문에 분발하여 13 권 7 책의 문집을 남겼으니 형과 함께 한산이씨의 가학 정신을 빛낸 사람이다.

한산이씨 (漢山李氏) 는 한말 (韓末) 에 독립운동가이자 청년운동의 선구자인 언론인 월남 ( 月南) 이상재 (李商在) 를 배출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朴定陽) 을 따라 미국에서 청 (淸) 의 종주국 행세를 물리치고 단독 신임장을 제정케 하였으며, 1896 년 서재필 (徐載弼), 이승만 (李承晩), 윤치호 (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민중계몽에 앞정섰다. 그 뒤 기족청년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1927 년 좌, 우익이 합작하여 만든 신간회(新幹會) 의 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임란(壬亂) 때 조방장변기종사관 (助防將邊璣從事官) 으로 상주전투 (尙州戰鬪) 에서 전공 (戰功) 을 세우고 순절 (殉節) 하여, 직제학 (直提學), 도승지 (都承旨) 로 증직 (贈職), 왕 (王) 의 특명 (特命) 으로의관장 (衣冠葬) 으로 장사를 치른 경기, 광주 출신 이경류 (李慶流) 와 학문 (學問) 과 덕행 (德行) 이 뛰어난 참판 (參判) 궁내부특진관 (宮內府特進官) 으로서 일본공사 대조규개 (大鳥圭介) 가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는 무도함을 규탄,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일본군에 연행되어 아들 이충구 (李忠求) 와 함께 살해된 충낭 (忠南) 예산 (禮山) 출신  이남규 (李南珪) 등 애국 충신들이 모두 한산이씨 후손들이다.

한산이씨 (韓山李氏) 는 중시조 목은 (牧隱) 의 고매한 학문의 뜻을 이어 오늘날 어떤 분야보다도 상대적으로 교육계, 특히, 대학에서 교수 (敎授) 및 학자로 활동하는 후손들이 매우 많다. 그래서 씨족중에 유일하게 한산이씨 (韓山李氏) 대학교수회 (大學敎授會) 가 조직되어 있으며, 목은 (牧隱) 의 사상 연구를 위해 철학,역사,문학,사회 분야의 사계 전문학자들로 구성된 목은연구회 (牧隱硏究會) 가 조직되어 매년 국내외에서 학술발표회로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출처 : 청주청원한산이씨삼파종중뿌리연구회
글쓴이 : 산(이맹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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