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의 명칭(건물 등급)
전(殿)은 왕, 임금이나 성인, 신(神)이 계신 곳에만 쓰는 건물명이다. 즉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 붙이는 명칭이다. 절의 대웅전 무량수전, 문묘의 대성전(공자를 모신 곳)이 좋은 예이다. 당(堂)은 전과 규모가 비슷하더라도 왕보다 신분이 낮은 분을 모신 건물명이다. 서원의 경우 강학(학문을 강의)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다. 헌(軒)은 대청이 있는 집으로 주로 군 · 현의 현감이 쓰는 건물이다. 동헌은 관아 건물인 객사(客舍. 고려 조선 때 각 고을에 둔 관사)의 동쪽에 있어서 불리는 명칭이다.
재(齋)는 원생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보통 강단의 좌우에 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재 서재가 좋은 예로 동재는 서재보다 선임의 원생들이 기숙했다(산 사람은 동쪽이 상석이기 때문임). 장판각(藏板閣)은 선현들의 사상을 기록한 서적이나 문집, 원생(院生)들의 교재를 간행하거나 목판을 보관 관리하기 위한 건물이다. 장판고, 장경각, 서고 등으로도 칭한다. 누각은 원생들의 독서로 인한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여가를 즐기면서 호연지기를 길러주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서민의 경우 누각은 단순히 누각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정문(출입문)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제기고(祭器庫)는 제향 시 필요한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배향공간 가까이 위치한다. 전사청(典祀廳)이라고도 한다. 더 상세히 기록해 보면 아래와 같다.
전(殿)
궁궐, 향교, 절 등과 같이 여러 채의 건물이 하나를 이룰 때 그 중에서 가장 큰 집을 일컫는 말이다. 임금, 성인, 신이 계신 곳에만 붙인다
묘(廟)
세상에 큰 공적을 남긴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사당)
묘당(廟堂)·묘우(廟宇)·사우(祠宇)라고도 한다. 중국 황제의 조상을 제향하는 종묘(宗廟)·태묘(太廟)에서 비롯되어, 제정일치시대에는 궁궐의 정전(正殿)이나 왕이 나랏일을 돌보는 정당(政堂)의 뜻으로 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의 어머니가 BC 24년에 부여에서 죽자 부여왕이 장례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고, 백제는 BC 2년(온조왕 17)에 묘를 세워 국모(國母)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신라에도 6년(남해차차웅 3)에 시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 사당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에 들어온 성리학이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문화의 꽃을 피우면서 사당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역대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종묘가 궁전 동쪽에 세워졌고, 성균관 대성전을 비롯하여 전국 군현마다 공자를 제향하는 문묘를 세우고, 서원에는 명현사우(名賢祠宇)를, 유명한 가문은 자기들만의 별묘·영당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에는 망제(望祭)를 지내던 뚝신묘[纛神廟]가 있었고, 강원도 삼척의 동해묘(東海廟), 평안북도 경원의 두만강묘(豆滿江廟) 등은 강신(江神)과 바다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다
사우(祠宇)
학문, 덕행, 무공(武功)이 뛰어난 인물의 위업(偉業. 훌륭한 업적)과 그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사당)
삼국시대부터 조상숭배·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시조나 국가적 영웅, 산천신을 제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이중 일부에서는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제사하기도 했다.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사우건립은 주자학의 이념에 입각한 향촌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즉 이전과 달리 일반민에게까지 주자학의 이념과 윤리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일상 의례에서도 불교와 음사(淫祀)를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조선건국 후 전국적으로 사전 (祀典) 정비를 단행했으며, 사대부가는 가묘(家廟) 설치를 의무화하는 한편, 향촌에서는 기존의 무속·불교적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대신 수령과 재지사족의 주도로 이사(里祠)를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제사와 각종 교화정책을 실시하게 했다. 이후로 사우가 대폭 증설되고 제향하는 인물도 변했다. 이전에는 김유신과 같은 국가적 영웅이 주로 제향되었다면, 이후에는 그 지역 출신이나 관련인물 혹은 귀양왔던 명신이나 충의지사, 그 지역에 공이 있거나 절개·효행 등으로 지역주민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제향하는 것이 유행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과 교화의 상징인 기자(箕子)를 제향하는 사우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지역과 관련된 마땅한 중앙관료나 유학자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공자(孔子)나 주자(朱子) 같은 중국인물을 제향하기도 했다. 명칭도 다양해져서 향현사(鄕賢祠)·향사(鄕祠)·사(祠)·이사·영당(影堂) 등으로 불렸다. 이외에도 기존에 제향된 사람과 관계 깊은 인물을 별도로 제향하는 별묘(別廟), 일족의 선조의 위패를 배열하는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성종대 이후로 지방민이 치적이 훌륭한 감사나 수령을 제향하는 것이 허용되면서 살아 있는 인물들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과 유애사(遺愛祠)도 증가했다.
한편 서원에도 교육기능과 함께 선현을 봉사(奉祀)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제향은 학생교육에 부수된 것으로 향촌민 전체가 아닌 학생을 대상으로 하며, 유학에 공이 큰 문신이나 학자를 제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서원과 함께 사우가 남설되면서 서원과 사우의 개념이 혼용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에 정쟁(政爭)이 격화하면서 지역양반층도 크게 분열하게 된다. 또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신흥양반층이 증가함에 따라 향권을 둘러싼 양반층 내부의 대립도 깊어지고, 이들간에 혹은 평민층에 대해 가문이나 집단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서원은 양반층의 경제적 특권과 피역(避役) 수단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서원은 지방양반층이 정파·학파·문벌에 따라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고, 교육적 기능보다도 서원의 배향인물이 서로간에 권위를 비교하는 척도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제향이 서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되기도 했다. 그결과 서원과 사우는 용어상으로도 구별이 없어지거나 사원(祠院)으로 통칭되고 사우건립이 증가했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충렬지사의 사당을 건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족친이나 유생들이 결속, 건립하여 선조나 학파·정파의 인물을 제향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지역과의 사소한 연관성을 내세우거나 하등 관계가 없는 인물을 제향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후로 사우도 서원과 같이 사액되고 사우가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았으며, 강당도 없이 사실상 사우만을 지어놓고 서원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서원·사우라는 명칭은 다만 제향하는 인물의 위상에 따라서 구별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서원이 사우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같은 사우는 서원남설과 함께 조선 후기 사회의 큰 폐단이 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많은 사우가 함께 철거되었다
부조묘(不祧廟)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그 위패를 4대 봉사(즉 기제사. 忌祭祀. 매년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가 끝나도 옮기지 아니하고 영구히 대대로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다(사당). 이 때의 위패를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는 신위)라고 한다. 또는 교묘(郊廟)라고도 한다. 예로 서애 류성룡 선생은 불천위이다
별묘(別廟)
묘(廟)와는 달리 별도로 따로 지은 사당(祠堂)을 말한다
예전
영당(影堂)
한 종파의 조사(祖師. 종파를 세운 분), 한 절의 개조(開祖. 절을 창건한 분) 또는 가문의 시조 중시조 파조 등 그 분들의 진영(眞影. 화상이나 사진)을 모신 곳을 말한다. 봄 가을로 날을 정하여 후손이나 제자 등이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단순히 영정만 모신 영정각보다는 규모가 크고 여러 건물을 종합해서 일컫는 의미가 크다
당(堂)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특별한 목적으로 지은 건물 또는 공청(公廳. 공공 목적의 건물)을 뜻한다. 주로 강학(講學. 학문을 강의하고 익히는 곳)의 목적으로 쓰인다. 예로 성균관의 명륜당이 있다
원(院)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건물과 정원을 뜻한다
정사(精舍)
학문을 쌓고 수양하거나 또는 풍월(風月)을 즐기기 위하여 세운 집이다
서원·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私學)의 하나이며, 불교의 도량(道場)도 정사라고 한다. 정사는 후한(後漢)의 포함(包咸)이 동해에 정사를 세워 후학을 교육한 고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이 보급되던 고려말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고려말 길재(吉再:1353~1419)가 자신의 고향 선산인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강학소를 개설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의 융성과 더불어 정사류의 사학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즉 명망높은 유사가 자신의 고향이나 경치가 좋은 장소를 택해 은거하면서 강학소를 개설하면, 그를 흠모하는 지학(志學)들이 모여들어 수학함으로써 많은 정사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정사는 고려의 12도(十二徒)와 대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12도가 국가의 정책적 배려하에 반영구적으로 존재했던 과거준비기관으로서 문예교육(文藝敎育)에 치중한 데 반해, 정사는 순수하게 학문을 연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서원이 사당을 두어 선현향사(先賢享祀)를 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밀접한 교섭을 갖는 공적인 측면을 지녔던 반면, 정사는 사적·학구적이라는 점에서 서원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정사는 개설자가 죽은 뒤에 문도나 향유들에 의해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 조선 후기에 서원이 양적으로 팽창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사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이의 은병정사, 이황의 농운정사, 김일손의 운계정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존하는 정사건축은 대략 20개소인데,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은 남아 있지 않고, 대개가 조선 중종 이후에 건립된 것들로 특히 선조대(1568~1607)에 건립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다음 전라도와 충청도이며, 경기도와 강원도에는 현존하는 유구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역적인 분포는 문헌상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정사는 하삼도(下三道: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입지(立地)는 민가와 격리되어 산중턱에 위치한 경우, 민가부근으로 산 아래쪽에 위치한 경우, 민가와 격리되어 평지에 위치한 경우, 민가와 더불어 평지에 위치한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에는 주로 민가와 격리된 산간승지(山間勝地)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민가와 가까워지면서 평지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정사가 초창기에는 다소 은둔적·폐쇄적이었지만 점차 개방화·세속화되어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의 서원이나 서당에서도 볼 수 있다.
정사의 건물구성은 정사건물이 단독적으로 세워지는 경우(개천정사·석문정사·빈연정사·양계정사·남간정사·현곡정사 등)가 대부분이며, 정사에 사당(祠堂)이 부속되는 경우(화계정사·고봉정사·노봉정사·용오정사·봉산정사)가 있고, 드물게는 정사에 누각(樓閣)과 장판각(藏板閣) 등의 건물이 부속되어 있는 경우(원지정사·농운정사·송당정사)도 있다. 정사에 강학공간과 더불어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제향공간이 있는 경우의 대부분은 원래 정사건물만 있다가 나중에 사당이 건립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때 정사와 사당의 배치관계는 서원의 배치와 마찬가지로 강학공간인 정사를 앞에 배치하고 제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사와 사당을 나란히 배치하는 경우(고봉정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사건축의 배치유형에 지역적인 편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의 평면은 일자형(一字形)으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며, 대청과 온돌방의 위치관계에 의해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둔 경우(양계정사·개천정사·검암정사·현곡정사 등), 한쪽에 대청을 두고 다른 한쪽에 온돌방을 둔 경우(빈연정사·화계정사·원지정사·고봉정사 등), 대청과 온돌방이 일정한 위치관계를 지니지 않는 부정형으로 된 경우(농운정사·죽곡정사·화수정사·오봉정사 등)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평면유형은 어느 한 유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다만 대청 전면의 형태에서만 지역적인 차이를 보여 개방형은 영남지방에서, 개폐형은 호남지방에서 주로 나타난다. 가구(架構)는 목재를 거의 가공하지 않고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를 보이는데, 이것은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자연과의 합일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형식은 대부분 민도리계이며, 일부 익공형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단층 석축기단이며, 초석은 대부분 막돌초석으로 가끔 다듬돌초석을 사용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 원형초석이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많이 사용했으나 대청의 전면·후면에는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온돌방 부분에서는 방주를 사용하여 방주와 원주를 혼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대청은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고, 온돌방은 종이반자를 댄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지붕은 대부분 팔작지붕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맞배지붕인 경우도 있다. 가구는 대부분 무고주오량(無高柱五樑) 또는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이며, 일부 이고주오량(二高柱五樑)을 사용한 경우도 있는 등 오량집이 많으며, 소규모인 경우에는 삼량(三樑)으로 했다. 학구와 수신생활을 강조하여 대부분의 생활이 정사 내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외부공간은 거의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장으로 외부공간을 구획한 경우가 많으나, 민가와 격리된 산간승지에 위치한 경우에는 담장없이 자연경관을 그대로 외부공간으로 이용하여 별다른 조경처리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재실(齋室)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문중의 모임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지은 집이다. 재각(齋閣)이라고도 한다
재각(齋閣)·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선산·종산·위토의 근처에 세워진다. 재실은 문중 또는 지파의 공유재산이지만 재실의 보존 책임자는 종손이나 직계장손이다. 재실에는 묘직(墓直) 또는 산직(山直)이 살고 있으며, 또 직계장손과 묘직 사이에는 유사(有司)가 있어서 시향제(時享祭) 및 묘사(墓祀)의 준비, 문중 내외의 연락업무, 묘소·위토·종산·선산·재실의 관리 등의 실무를 맡는다. 묘직은 경제적·신분적으로 종손이나 유사에 예속되어 재실의 잡무를 처리한다. 과거 재실은 시향제나 묘사의 준비장소였으며, 제향과 관련된 제반문제를 논의하던 종회장소였고 때에 따라서는 음복과 문중회의가 행해지던 곳이었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동족관념이 희박해지고 묘직이 사라짐으로써 재실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다.
헌(軒)
마루 또는 공청을 뜻한다. 예로 강릉의 오죽헌과 흔히 말하는 동헌(東軒)이 있다
누(樓)와 각(閣)
높다랗게 지은 건물이다. 주위의 건망을 살피거나 연회를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누각이라고 칭한다. 예로 남원의 광한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가 있다
대(臺)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관망이 좋은 곳에 세워진 건물 또는 축대이다. 예로 부산의 해운대, 강릉 경포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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