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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의(草衣)가 김정희(金正喜)를 위해 봉하(鳳下)라는 글씨를 쓰다

장안봉(微山) 2013. 3. 10. 20:16

                                 초의(草衣)가 김정희(金正喜)를 위해 봉하(鳳下)라는 글씨를 쓰다

                                                                                                                                                      독립큐레이터 이택용

해설 : 초의(草衣) 대선사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위해, 봉하(鳳下)라고 쓴 대자글씨이다. 그는 조선 후기 승려로, 16세 때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득도하고, 대흥사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그가 절친했던 김정희를 위로하기 위해 1843년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훗날 그는 김정희의 죽음을 애도하여 완당김공제문(玩堂金公祭文)을 지었다. 수행과 학문, 예술을 두루 섭렵했던 대선사이다.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는 동 시대에 태어나, 고락을 함께 나눈 지인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유학자와 승려라는 사회적인 신분을 초월한 통유가 그렇다. 따라서 이들의 우정은 금생(今生)의 인연이 아니라 숙생(宿生)의 인연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1815년 겨울, 한양의 북쪽 수락산 학림암(鶴林庵)에서였다. 당시 초의가 무슨 연유로, 상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정학연(丁學淵)과의 내락(內諾)이 있어 상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초의가 상경해 두릉(杜陵)을 찾았던 늦가을, 정학연은 강진으로 부친을 뵈러 떠난 후였다. 당시의 상황으론 운길산 수종사(水鐘寺)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초겨울이 되자, 수종사는 산이 높고 추워 겨울을 지내기 어려웠다. 이 해 초겨울인 10월에 두릉으로 돌아 온 정학연은 초의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초의가 김정희를 만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초의의 해붕대사화상찬발(海鵬大師畵像贊跋)에서 '1815년에 해붕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김정희가 눈길을 헤치고 노스님을 찾아와, 공각(空覺)의 능소생(能所生)에 대해 깊이 토론하고, 하룻밤을 학림암에서 보내고 돌아갔다.' 고 하여, 이들의 첫 해후시기를 정확히 밝혔다.

이 글씨는 전남 해남의 미황사(美黃寺)주지 금강(金剛)스님이 소장한 작품으로, 미황사를 방문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朴東春)소장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박 소장은 이 작품과 관련 글씨 밑 부분이 훼손돼 일부 떨어져 나갔지만, 전체적으로 초의선사의 힘찬 필체를 확인할 수 있고, 초의선사가 남긴 글씨 중에 가장 큰 글자이며, 특히 사용된 낙관(落款)은 처음 보는 것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전제로 봉하라는 것은 '봉황(鳳凰)이 지다'는 뜻으로 아마도 초의선사가 추사 김정희의 타계 소식을 듣고 '봉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로 쓴 글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추정했다. 이와 관련 소장자인 금강스님도 '존경하고 흠모하던 추사 김정희의 타계소식을 들은 초의선사의 입장에서 봉하라는 표현은 충분히 이해가는 것 이라면서 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있어 봉황과 같은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의(草衣)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위해 봉하(鳳下)라는 글씨를 씀-

鳳下.

봉황이 지다. 즉 봉황 같은 추가 김정희가 타계하다.

출처 : 이택용의 e야기
글쓴이 : 李澤容(이택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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