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형세론과형국론)

[스크랩] 東國道學의 源流圖

장안봉(微山) 2013. 2. 2. 15:23

東國道學의 源流圖

 

 

  

 

 

 

  

 

 

 

  

 

주(註): 인물 121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하여 참고가 되도록 번호 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자료는 인터넷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회헌 영정 국보 111

 

 

고려(高麗) 후대(後代)의 명신, 학자로서 충렬왕대(忠烈王代)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王)과 공주(公主)에 호종(扈從)하여 원조(元朝)에 들어갔을 때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筆寫)하여 주자학연구(朱子學硏究)를 시작하여 후에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하여 한국(韓國) 주자학(朱子學)의 원조가 되었다.

 

 

 

 

(2) 국재(菊齋) 권부(權溥) (1262~1346),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27

1301

신축

大德

5

15

성균시에 장원하고, 權溥가 主試한 과거에 급제하다. ○ 菊齋 權溥의 딸과 결혼하다.

 

1

 [ 유적지 순례 1 ] 菊齋 文正公 權溥  一家九封君

종보354호

 

 

 

 

 

 

(3)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78:충렬왕 13년~1367:공민왕 16년)

 

고려의 문신.학자. 시인.초명은 지공(之公)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역옹, 시호는 문충(文忠).검교정승(檢校政丞) 진의 아들.

백이정의 문인,菊齋 權溥의 사위 1301년(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詩)에 장원,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1303년 권무봉선고판관.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등을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제안부 직강(濟安府直講)을 지낸 후 이듬해

사헌 규정(司憲糾正),1310년(충서왕 2년) 선부산랑(選部散郞), 다음해 전교시승.

삼사 판관(三司判官)등을 역임,1312년 서해도 안렴사 (西海道 安廉使)로 나아갔다가

성균 악정(成均樂正).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기마강상도)

 

 

 

 

 

(4)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고려말의 학자이며 다인이다. 

호은 가정(稼亭). 한산인(韓山人)이며, 목은(牧隱)이색(李穡)의 아버지이기도하다.

經學의 대가로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며 시호는 한산군(韓山君)이다.

 

 

      [ 原文 ]                                [시 풀이 ]

 

    - 寒松亭 -                              - 한 송 정 -

 

意專尋勝景 (의전심승경)         뛰어난 경치 찾으려는 마음으로

早出古城門 (조출고성문)         일찍 옛 성문 찾았네

仙去松亭在 (선거송정재)         화랑은 가고 송정은 남았는데

山藏石鼎存 (산장석조존)         산정에는 돌 부뚜막만 있네

人情有今古 (안종유금고)         인정에는 옛과 지금이 있고

物象自朝昏 (물상자조혼)         물상은 스스로 아침 저녁이 있다

不是會來此 (불시회래차)         우연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聞言謂不根 (문언위불급)         들은말 근거없다 하리라

 

 

 

 

 

 

(5)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1396),   

 

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분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의 영정으로 1884년(헌종 10)에 그려졌다.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회색 줄을 사용한, 좁고 긴 모양의 사모 뿔은 당시의 양식을 따랐으며, 살색바탕의 얼굴과 이마, 코, 뺨 등에는 옅은 붉은 색을 넣어 생동감을 나타내었다. 그 외에도 얼굴주름을 나타내기 위해 갈색 선을 사용하고 단순히 먹선으로 표시한 눈,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한 얼굴, 그리고 옅은 먹선의 덧칠 효과로 나타낸 옷주름선 등은 일류 화가의 솜씨임을 잘 보여 준다. 

 

 

 

 

(6) 야은(冶隱) 길재(吉再) : (1353~1419)

 

 

길재항절(吉再抗節

 

두 임금 섬기기를 거절한 길재(吉再抗節)

길재(吉再)는 고려말의 학자로 선산 사람이다. 그는 1386년(우왕 12년)에 전사에 합격하였고, 1387년(우왕 13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태종이 봉상박사(奉嘗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끝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꼽는다. 여말 3은인 이들은 두문동 72현에 들지만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고려 말의 충신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길재는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1390년(공양왕 2년) 봄에 낙향했다. 그의 나이 38세로 벼슬은 종사랑(從事朗) 문하주서(門下注書)였다. 종칠품이었으니 나이에 비해 한미한 직급이었다. 낙향의 명분은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고려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현에 살던 이색(1328~96)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의 전경을 이색은 ‘목은집’에 남겨두었다.

 

 

 야은의 영정

 

 

 

 

 

 

 

(7)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회헌 안향(1243-1306) 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희(文僖).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듸 업다

 

 

져근 듯 비러가다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어,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주럼길로 오매라.

 

 

 

 

(8)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 (1287:충렬왕13년~1349:충정왕1년)

 

선생의 호는 치암(恥菴)이고 자는 자화(子華)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고려때의 상서 박선(朴善)의 후손으로 총랑을 지낸 박장(朴莊)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제공(文齊公)이다.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안렴사로 나갔을 때 간신 박신이 왕에게 아첨만 하면서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는 비행을 자행하자 이를 저지할려고 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외딴섬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무고가 확인되어 감찰사 지평, 예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간신들과는 정사를 볼수 없다면서 병을 이유로 취임을 거부했다. 후일 내서사인, 밀직제학, 개성부윤을 거쳐 충혜왕때에는 지공거(요즈음의 시험 고시관)에 이르렀고 충목왕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왕에게 경연총에서 왕의 몸가짐과 왕도정치를 다룬 정관정요를 강론하였다. 선생은 덕망과 학식이 높아 종일품에 겸하던 삼사의 최고지위인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순성보덕협찬공신이 되어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렬왕때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의 문인인 백이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시 세자이던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연구를 하고 돌아온 후 스승의 뜻을 받들어 이제현과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선생의 학문은 고려말의 이색, 정몽주, 조선의 권근, 정도전을 거쳐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정여창 선생의 도학사상인 실천적 성리학에 이르게 된다. 학자로서 재상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불의와 부정을 몰라 청빈함이 평상시나 다름이 없었으며 굳건히 문인의 길을 간 선생은 노후가 평탄치 않았으나 항상 주역을 즐겨 읽다가 충정왕 1년(1349년)에 영면하였다.예천군의 금곡서원과 남해군의 난곡사당등에 제향되고 있다.  

 

 

(9)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고려 말기 문신·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을 지냈다.

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지냈다. 67년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를 겸임하였으며,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을 지내고, 72년 중국 명(明)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지냈다. 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판서·예의사판서·전법사판서·판도사판서를 지냈으며, 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삼사좌사·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 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에 봉해지고 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지냈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피살되었다.

오부학당·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뛰어났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포은집》이 있다.

14세에 진사가 되었고, 24세에 문관에 올라 공민왕때에 성균관학감이 되어 학문에 진력, 주자가례를 본 받아 조상을 모셨고 또 안으로 5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 가르치며, 밖으로 향교를 베풀어 유학을 크게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으며 내정,외교,교육등에 공적이 많았는데 넘어지는 여조(麗朝)를 떠 받들다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趙英珪)등에 의하여 선지교(善地矯: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문집 포은집이 있으며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丹心歌)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아버지는 고려 수문하시중 일성부원군(守門下侍中 日城府院郡) 정운관(鄭云瓘)공이고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영천이씨이다. 고려 17대왕 인종의 신임을 받은 중신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영일정씨 시조]의 10대 손이다. 모부인(母夫人)이 태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가다가 넘어진 꿈을 꾸고 낳았다 해서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불렀다. 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또 어깨에 검은 사마귀가 북두칠성과 같이 나있어 범상하지 않음을 알았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9세 때 어머니가 낮잠을 자다가 뜰에 있는 배나무에 흑룡 한 마리가 기어올라가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 가보니 뜻밖에도 몽란이가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꿈과 너무나 일치하므로 모부인은 일성군과 수의하여 몽룡(夢龍)으로 고쳤다. 모부인은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교육에 특별한 마음을 써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간곡히 훈계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세울세라,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 시조는 동사절요(東史絶要), 가곡원류(歌曲源流), 일성군 묘비명등에 실려있는 시조로서 너무나 유명한 시조다. 묘비명에 백로가가 백세(百世)에 전송(傳誦)되고 있으니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만이 미담이겠느냐, 고 비명에 새겨있다.

18세때 관례후는 선생의 이름을 몽주(夢周)로 개명을 함. 일성군의 꿈에 주나라 주공(周公)을 만나는 꿈을 꾸고는 개명을 했다 한다.

포은 정몽주 영정

 

 

 

 

 

 

(10) 동암(東菴) 이진(李 瑱) (1244(고종 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憁郞)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 시우산기상시

(右司議大夫 詞林院學士 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 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진사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과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11) 권근(權近) : (1352:공민왕 1~1409:태종 9)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晋), 자는 가원(可遠) 혹은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권부(權溥)이고 아버지는 검교 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이다.고려 말 ·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공민왕 17년(1368)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 ·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친원세력(親元勢力)이 대두하였는데, 이 때 정몽주(鄭夢周) ·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을 주장하였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 대사성(大司成) ·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였는데, 우왕 6년(1380)에는 좨주(祭酒)로서 승보시(升補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홍상빈(洪尙彬) 등 110인을 취하였다. 우왕 9년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서 상소하여 관작(官爵) 및 봉군(封君)의 남수(濫授)의 폐단과 전법(田法)의 부정(不正), 서연(書筵)의 재개(再開) 등을 청하였고, 뒤이어 상소하여 왕이 유악(遊樂)을 일삼고 기거(起居)에 절도가 없으며 도로(道路)에 말을 타고 다니는 행위에 대하여 그 시정을 청하였다. 우왕 14년(1388)에는 명(溟8에 보내는 철령위(鐵嶺衛) 설치의 중지를 청하는 표(表)를 제술하였다. 창왕 즉위년(1388)에 지서연사(知書筵事) ·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지신사(知申事)로서 동지 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진사(進士)를 취하여 이치(李致) 등 33인을 급제케 하였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溟8에 다녀왔는데, 이때 명(溟8의 예부 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귀양갔다가 영해(寧海) · 김해(金海) · 흥해(興海) 등지로 이배(移配)되던 중, 공양왕 2년(1390)에 윤이(尹?) · 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한 때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기도 하였으며, 다시 익주(益州)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충주(忠州)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창을 보게 되었다.태조 2년(1393)에 왕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鷄龍山)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환조릉(桓祖陵))의 비문을 지어 바쳤는데, 이 글들은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 · 곡필(曲筆)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듬해 왕명으로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비문을 지었다. 태조 4년(1395)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 · 도평의사사 사(都評議使司使) ·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 예조 판서(禮曹判書) ·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고, 또 왕명을 받아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를 상정(詳定)하였다. 태조 5년(1396)에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溟8에 다녀왔는데, 이 때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삼오(劉三吾) · 허관(許觀) 등 명(溟8의 학자와 교우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고, 명태조(明太祖)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문명(文名)을 명(溟8에까지 떨치게 하였으며, 귀국 후 개국 원종 공신(開國原從功臣)에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여졌으나 이것으로 정도전(鄭道傳) 일파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태조 7년(1398)에 제1차 왕자(王子)의 난으로 정도전 등이 제거되자, 정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고, 사병혁파(私兵革罷)를 주장하여 그 실현을 보게 됨으로써 왕권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태종 원년(1401)에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 지경연사(知經筵事) ·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 세자 빈객(世子賓客) · 세자 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으며, 태종 7년(1407)에는 최초로 실시된 문과중시(文科重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또 왕명을 받아 경서(經書)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였고, 하륜(河崙) 등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으며, 유학 제조(儒學提調)로서 유생(儒生)의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의팔조(勸學事宜八條)》를 지어 올려 교육정책에 반영케 하였고, 또 왕명을 받아 《대간직임사목(臺諫職任事目)》을 지어 대간(臺諫)의 과실에 죄를 주는 법도를 마련하였다. 그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면서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함께 연찬하였고,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과 교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그의 학문적으로 대표되는 것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 되는데,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까지 하였다. 저서로는 《양촌집(陽村集)》 · 《입학도설(入學圖說)》 ·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이 있고, 작품으로는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2)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 (1269~1343)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호는 매운당(梅雲堂)  

 

 

爲報栽花更莫加 (위보재화경막가) : 알리노니 꽃 심는 것 다시 더하지 말라.

 

                                                   백화헌에 꽃을 더 심으려 하지 말라.

 

數盈於百不須過 (수영어백불수과) : 백화헌에 두어 가지만 채우고 반드시 지나치지 말라. 

 

雪梅霜菊情標外 (설매상국정표외) : 눈 속에 피는 매화와 서리 속에 피는 국화의

 

                                                    그 깨끗한 가지 밖에. 이 두 가지 꽃 외에는

 

浪紫浮紅也謾多 (랑자부홍야만다) : 허랑한 자주빛 꽃과 부화한 붉은빛 꽃은       

 

                                    헛되이 많은 것이다. (울긋불긋한 부랑한 꽃은 심지 말라는 뜻) 

 

 

 

(13) 이재(彛齋) 백이정(白正) 

 

본관 남포(藍浦). 호 이재(彛齋). 1298년(충렬왕 24) 왕을 호종하여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에 가서 10여 년간 체류하며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 제자를 가르침으로써 한국에 성리학(性理學)을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 충선왕 때 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고 나중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고려때의 주자학(朱子學)의 권위인 백이정(白이正)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웅천면(熊川面) 성동리(城洞里)에 있다.

그는 호가 이제이며 자는 약헌(若軒)이다. 대사성을 지낸 백문절(白文節)의 아들로서 본관은 남포(藍浦)다.

 

충렬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직생활보다 주자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었다.  

본래 주자학은 만물의 근원을 이(理)와 기(氣)를 뿌리로 하여 해석하는 철학인데 理는 만는 성(性)을 주고 기는 형태를 준다고 했다.

중국에서 송나라때에 주자가 완성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다. 고려문화의 근원을 이루는

불교(佛敎)가 차츰 정치에 관여하고 그 선리의 선비들이 1270년대엔 주자학을 연구하면서 서서히 그 학문의 뿌리를 심게 되는데

백이정(白이正)은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을심는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다. 주자학의 체계대로 기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이(理)를

구명한다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익혀서 구명하여 기(氣)로 나타내야 함으로 사물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현들의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결론인데 그는 학문적으로 체계가없는 우리나라에 우선 국가적인 학문을

주자학으로 뿌리박기 위해서 노력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현의 학문이 희박함으로 더욱 연구하기 위해 충렬왕 24년(1298)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원(元)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10년간 연구를 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제자들을 가르킨다. 그가 원(元)나라에 있을때는 충선왕(忠宣王)과 각별히 친했었다. 충선왕(忠宣王)도 선비기질이 있어서 글을 잘 하였고 그림을 잘 그렸었다. 그들은 주자학에 깊은 연구가 있어서 정치는 현인이 해야 나라가 평온해진다 하였고 현인은 선현의 오랜 체험을 통해서 기록한 그들의 저서의 납득에서만이 얻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나라의 살림은 희박한 지식을 가진자는 다스릴 수 없으며 순간적으로 사람을 구박한다던가 백성을 묶는 정치인은 정치가로서의 기질이 없는 정치가라고도 평했었다.

 

그러기에 그는 선비의 깊은 학문의 이해에서만이 이룩된 인간이라고 역설함으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가르킨 제자가운데는 이재현(李齋賢) 박충좌(朴忠佐)같은 인물이 있었는데 모두가 우리의 현실에 학문적인 뿌리를 심기위해서 노력한 선비들이다.

 

인생을 소요시키는 마음가짐도 휴식한다는 여유보다 휴식에서 얻는 느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쉬는 시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그는 쉬는 시간이야말로 느낌을 정리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자학(朱子學)의 근원이 인욕을 끊고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항상 마음을 조용히 해서 이기(理氣)에 대한 근원을 스스로의 목에 익혀야 한다는 결론을 그만치 정리한 학자도 드물다고 후세의 학자들은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는 충선왕(忠宣王)때 상의회의도감(商議會議都監)이란 벼슬길에 올랐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올랐으나 그벼슬보다 인간으로서 얻은 학문적 지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부친 백문절(白文節)도 문장에 뛰어나 국학대사성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내기도 했다. 우리나라엔 고려때 안향(安珦)이 최초로 받아들인 주자학이 안향(安珦)의 제자이기도 한 백이정(白이正)에의해서 널리 전파되었으며 차츰 우리나라에 뿌리가 내려지면서 조선시대때에는 크게 발달되어 조선시대중엽엔 전성시대를 이루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나라의 학문처럼 등장한 주자학(朱子學)이 이황(李滉)이이(李珥)같은 큰 학자를 갖게 되는데 모두가 고려때의 백이정의 이론으로부터 도움받은 것이 클 것이다. 남포 신안사(新安祠)에 배향하기로 한 학자로서 고려말엽의 대 성리학자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그를 아끼니 왕이 죽을 때도 그를 부르며 눈을 감았다 한다.

 

[출처] 보령 인물- 백이정|

 

 

 

 

(14) 덕재(德齋) 신장(辛藏)

 

 미확인

 

 

 

(15)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1389(공양왕 1)~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선산.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관(琯)의 아들이며, 종직(宗直)의 아버지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1419년(세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을 지냈다. 1436년 경학(經學)에 밝고 바른 행실을 가진 선비를 추천하는 데 첫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뒤 선산교수·개령현감·사재감부정·성균관사예 등을 역임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1456년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갔다. 그는 스승인 길재로부터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자학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아들 종직으로 하여금 잇게 했다. 학업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동몽수지 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외우게 하고, 〈소학〉·〈효경〉·사서오경·〈자치통감〉·제자백가의 순으로 했는데, 이 방법은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16)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 : (1431~149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문신.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효관(孝). 호 점필재(畢齋).

시호 문충(文忠). 밀양 출생.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교리(校理)·감찰(監察)·경상도 병마평사

(慶尙道 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한성부윤·공조참판(工曹參判)·형조판서·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점畢齋集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의 시문집. 목판본. 시집 23권, 문집 2권, 도합 25권 7책.

1640년(인조 18) 전주부윤(全州府尹)이던 한흥일(韓興一)이 수집하여 간행하고,

1649년(인조 27) 중간하였다. 내용은 절구(節句)·율시(律詩)·배율(排律)·고시(古詩)·부(賦)·요(謠)·

악부(樂府)·책문(冊文)·제문(祭文)·서(書)·서(序)·설(說)·발(跋)·기(記)·명(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무오사화로 인한 부관참시(剖棺斬屍) 때 대부분의 저서가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이 문집에도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17)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일두 선생 보다 사년 뒤에 태어난 한훤당 선생은 점필재 문하에서 소학 책을 받고서, 한결 몸 다스리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라 일을 물으면, <소학 책만을 읽은 소학동자가 어찌 큰 뜻을 알겠으랴.>고 했습니다.

 

서른 살이 되고서부터 다른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한훤당이라는 말이 무슨 뜻 인고 하니, <찰한, 따뜻할훤.> 자(字)입니다.

 

일두와 한훤당이 모두 점필재 문인으로 무오사화를 만났습니다.

 

6.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先生)은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 수위首位)으로

조선(朝鮮)의 선비로는 최초(最初)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광해군光海君 2年 경술庚戌(1610) 8月 실록實錄 31卷]

 

일찍이 한훤당(寒喧堂) 선생(先生)은 퇴계(退溪) 이 황(李滉)으로부터 '도학(道學)의 으뜸 스승'(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稱頌)을 받았을 만큼 조선(朝鮮)에 처음으로 도학(道學)의 시대(時代)를 열어 주었다. (퇴계전서退溪全書, 卷 十二書, 答盧仁甫)

 

 

 

 

 

(18)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시대 문신. 김굉필에게 수학한 뒤 사림파의 거두가 됨. 1510년에 진사급제, 1515년에 알성시에 급제함. 수찬, 예조정랑 역임.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여씨 향약을 실시

-부제학 역임시 미신 타파를 위해 중국 도교인 오직 미신같은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함

-1519년 세자부빈객이 되어 현량과 실시(소장학파 등용, 훈구파는 외직으로 전보시킴)

 당시 언관들은  왕과 고위 관료들이  유교적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감시하고 이끄는 파수꾼이라는 의식과,

사대부 계층의 공론(公論)을 대변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광조(1482∼1519·성종 13년∼중종 14년)는 언관으로서 부여된 소명에 최선을 다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조선시대 학자로서 조광조의 문인인 청송 성수침 (成守琛 )선생은 중종 9년(1514) 22세 당시 부친상으로 당하여

파주 향양리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아우 절효(成字琮)와 같이 하였으며 아우 성수영이 적성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중종 39년(1544) 9월에 처가가 있는 우계연변에 집을 짓고 죽우당(竹雨堂)이라하고 지금 파산 서원터에서 훈학을 하면서

파산청은(坡山淸隱) 도는 우계한민(牛溪閒民)이라는 자호를 가졌으며 여러 벼슬을 하명하여도 모두 사은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 명성이 높아 사방의 명사들이 그의 집을 찾았으나 겸손하였다 한다.

 

사후 문정의 시호와 우의정에 증직된 후 율곡선생의 주선으로 청송서원(廳松書院)을 건립 후

파산서원(坡山書院)으로 개칭 사액(賜額)을 받았다.

  

 

(20) 우계(牛溪) 성혼(成 渾)

 

인조6년(1628)에 우계 성혼(成渾)선생은 좌참찬에 비국당상을 겸하여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유명한 학자로서

파산서당에서 64세로 돌아가시니 문간공의 시호와 좌의정에 증직 숙종 8년(1682)에 율곡선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대

 

 

 

 

(21)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 (1478(성종 9)∼1543(중종 38).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 계해 별시와 정묘 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지평·장령·예조참의·경상관찰사를 지내며 실학(實學)과 권선(勸善)·풍속순화와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썼다.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사화로 파직되어 여주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중종 정유 서환되어 삼조(三曹)의 판서·양관 대제학·의정부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고 오산(鰲山)·임강(臨江)·기천(沂川)·빙계(氷溪)·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22) 하서(河西) 김린후(金麟厚) (1510~1560)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23)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본관 : 연일(延日) 시대 및 분야 :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출생.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

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하고,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

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

섯 종류가 알려져 있으나,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

사 文淸公遺詞》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

유고(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

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

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松江亭 / 鄭 澈

 

明月在空庭(명월재공정)  밝은 달빛 빈 뜰 안에 가득한데

 

 

主人何處去(주인하처거)  주인은 어딜 갔는지

 

 

 

落葉掩柴門(낙엽엄시문)  나뭇잎은 떨어져 사립문을 덮고

 

 

風松夜深語(풍송야심어)  소나무에 바람 불어 밤 깊도록 속삭이네.

 

 

 

(24)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4:성종 19 ~ 1548:명종 7)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 본관은 광주(廣州). 충청북도 충주(忠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유배되는 할아버지 세좌(世佐)를 배소(配所)까지 따라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1507년(중종 2) 생원이 되고, 1518년에는 공을 지냈으며, 1519년 현량과에 급제,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로서 경연에 참가하였다. 이때 조광조(趙光祖)를 재상으로 천거하는 등 친분을 쌓았는데 기묘사화 때 이것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그 뒤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조좌랑 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을 지냈으며, 1519년 현량과에 급제,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로서 경연에 참가하였다. 이때 조광조(趙光祖)를 재상으로 천거하는 등 친분을 쌓았는데 기묘사화 때 이것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그 뒤 은거하며 성리학을연구하였고,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25)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20-1546:명종1)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복재(復齋)/화담(花潭) 학자 . 부위(副尉) 호번(好蕃)의 아들이며 모계는 실전(失傳)이다.

 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學脈)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출처 :배움터 사랑터 원문보기 글쓴이 : zoplin

 

 

七언 율시 한편

 

독서유감(讀書有感)

 

讀書當日志經綸(독서당일지경륜) : 책 읽는 당일에는 경륜에 뜻을 두어

 

歲暮還甘顔氏貧(세모환감안씨빈) : 한 해가 다 가는 연말에도 안연의 청빈을 즐긴다

 

富貴有爭難下手(부귀유쟁난하수) : 재산과 권력은 다툼이 생겨 손대기 어려우나

 

林泉無禁可安身(임천무금가안신) : 숲 속 샘물은 금하는 이 없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

 

採山釣水堪充腹(채산조수감충복) : 나물 캐고 고기 잡아 배는 채울 수 있고

 

詠月吟風足暢神(영월음풍족창신) : 밝은 달 불어오는 바람을 노래하니 정신이 맑아지네

 

學到不疑眞快活(학도부의진쾌활) : 배워서 의문이 없게 되면 내 마음 정말 쾌활해지니

 

免敎虛作百年人(면교허작백년인) : 이제야 백년인생이 헛되이 됨을 면하였구나 

 

 

 

(26)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기인(奇人).

본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訣)》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 ·

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2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재실사진

 

조선조 5현의 한분이며 동국 18현중의 한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이신 선생의 자는 백욱, 호는 일두로서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판전농시사를 지낸 정복주의 손자이며 한성부좌윤 정육을의 아들로서 함양군 지곡면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하동이다. 성종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리산에서 4서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실천 철학자로서 독서를 주로하였고 도학으로는 당시 동방의 최고였다. 김굉필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핵심적 부분인 이기론의 꽃봉오리를 맺게 하였다. 안음(안의) 현감 재직시 도학사상을 왕도정치로 실천하여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주력하였다. 1498년(연산4)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영면하였고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1517년(중종12)에 문인으로서는 최고의 직함인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575년(선조8)에 문헌공으로 시호를 내렸다. 1610년(광해2년)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저서로는 무오사화때 모두 소각되었으나 후손들이 편찬한 문헌공실기등에 몇편의 글과 시만 전하여지고 있다.

 

 

 

 

(28) 노우신(盧友信)

미 확인

 

 

 

 

(29) 노진(盧縝)

 

노진은 조선 중종(中宗)때 남원 출신 문관(文官)으로

저서 <옥계집 玉溪集> 7권 4책(七卷四冊)이 전해오고 있다.그 에 관한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노진이 약혼을 하였는데 결혼 비용을 구하고자

선천(宣川) 부사로 가 있는 당숙부(堂叔父)를 찾아 갔더니

부(府)의 성문(成門)을 열어주지 않아 부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한 어린 기생을 만나 그녀의 안내로 관문(關門)에 들어가 당숙부를 만나기는 했으나

지나치게 냉대(冷待)하여 그곳에서 나와 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 어린 기생을 찾아갔더니 반가히 맞이해 주고 후하게 대접해 주는지라

며칠동안 그곳에서 묵다가 기생이 마련해 준 돈을 가지고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노진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관서(關西) 지방을 순회 시찰하던 중

그 때의 어린 기생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어린 기생은 노진과 그 전날 인연을 맺은 후부터 절로 들어가 수절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30) 濯纓 金馹孫

 

 가계도

 金克一

 節孝先生

 金孟

 執義

 龍仁李氏

 刑曹參議 李讓의 女

 金駿孫

 直提學

 金驥孫

 佐郞

 金馹孫

 

 丹陽禹氏

 參判 禹克寬의 女

 金大壯(金駿孫의 子)  系

 主簿

 禮山金氏

 參奉 金尾孫의 女

기사전거 : 濯纓先生年譜(1903年刊)에 의함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滄波萬頃櫓聲柔 (창파만경로성유)

푸른물 넘실넘실 노소리도 부드러워

 

滿袖淸風却似秋 (만수청풍각사추)

스쳐가는 맑은바람 가을인양 서늘해라

  

回首更看眞面好 (회수갱간진면호)

다시한번 돌아보니 진정코 아름다워

 

閒雲無跡過頭流 (한운무적과두류)

흰구름 두둥실 두류를 넘어가네

 

*******

 

風蒲獵獵弄輕柔 (풍포렵렵롱경유)

갯버들 흔들흔들 부드러이 나부끼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화개맥이추)

사월이라 화개땅에 보리가 누렇고나

 

看盡頭流千萬疊 (간진두류천만첩)

두류산 천만봉을 골고루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流 (고주우하대강류)

섬진강에 배를 띄워 고요히 흘러가네

 

본 시는 탁영선생과 일두선생께서 1489년 4월 지리산을 구경하시고

하산시에 섬진강에서 뱃노리를 하시면서 지은 시임

 

탁영: 26세 (앞장) 일두: 40세 (뒷장)

 

* 종손 김헌수 교장이 갖고 있던 원고 *

 

 

 

(31)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삼족당사진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 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32)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世祖 9~1529;中宗 24, 享年 67歲)

 

孫仲暾을『國朝榜目』捷覽索引에 “成宗 20년(1489) 己酉式年 文科榜에 丙科로 及第하였고, 癸未生이며, 字는 大發, 本貫은 慶州, 父는 孫昭이며, 翰林叅贊을 지냈고, 景節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라고 소개하였고, 本文에는 “叅贊을 지냈으며, 父는 孫昭, 祖는 孫士晟, 曾祖는 孫登, 外祖는 柳復河, 妻父는 洪欽孫과 崔漢男이다”라 하였다.『國朝文科榜目』에는 위와 함께 “月川君에 封爵되었고(月川君은 月城君의 誤記로 보여진다.) , 景節이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享年 67歲로 黙齋 洪彦弼이 撰한 碑碣이 있다”는 것도 소개되어있다.

  嶺 南 樓   孫仲暾 (세조때 문신)

 

靑山斷處 碧江頭 (청산단처 벽강두) 푸른 산 뚝 끊어진 푸른 강 언덕

 

樓壓華堂 堂壓流 (루압화당 당압루) 층층 누각 층층으로 흐름을 눌러

 

小醉未醒 風景暮 (소취미성 풍경모) 거나한 거 덜 깬채 풍경저무니

 

月明湖上 盡堪留 (월명호상 진감류) 달밝은 후수위를 차마 목 떠나.

 

 

 

 

 

(33) 회재(晦齋) 이언적(李彦廸) (1491∼1553)

조선시대 학자인

 

 

 

 

 

 

(34)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

 

옥산 이우(玉山 李瑀, 1542∼1609) 조선, 16세기 말∼17세기 ,율곡의 동생

 

묵란(墨蘭)

 

 

 

 

 (35) 남명(南冥) 조 식(曺 植) (1501~1572)

 

“남명 선생(先生)은 몸으로써 도학(道學)을 창도(唱導)하여 근세(近世) 유학(儒學)의 조종(祖宗)이 되었다."고 극찬(極讚) 하였다.(남명집南冥集, 사우록師友錄)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다.

본관을 창녕에 두고 있는 조식은 어려서부터 경사자집을 서렵하고 천문,의약,병략 등에 널리 능통했으며,

후학양성에 힘쓴 인물로 문하에서 오건,김우옹,정구,정인홍,최영경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한 학파를 형성,

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큰 영향을 받아 은일적 학풍을 지녔고, 정의를 중시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르킨 인물들이 60여명에 다를 정도였고, 대표적인 인물은 정인홀, 곽재우,김면으로 3대 의병에 꼽힐 정도 이다.

광해군 7년인 161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들의 저서를 남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36) 덕계(德溪) 오건(吳 健)

함양오씨의 자랑 

 

 선생의 이름은 건(健)이요, 자(字)는 자강(子强)이며 호(號)는 덕계(德溪)이다. 1521년(중종 16년,신사)4월2일 산음현 덕천리(현 산청군 덕촌)에서 태어 났다. 함양오(咸陽吳)氏의 시조(시조)이신 함양부원군(함양부원군) 광휘(광휘)의 11세손(12세)이며 산청으로 처음 이거(移居)한 덕강공 諱덕수(德秀)의 5세손으로서 함양오(咸陽吳)氏 덕계공(德溪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37)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이 비는 동강(東岡) 김우옹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종 3년(1723)에 세운 신도비이다. 선생은 성주 칠봉리(사도실) 출신으로 한강 정구선생과 함께 영남학파의 두 산맥인 남명 조식, 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전통 성리학의 정맥을 이어 받았다.조선 명종 7년(1552)에 진사가 되고 명종 22년(1567)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 대사간(大司諫), 병조(兵曹).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했다. 그는 속강목과 많은 시문을 저술했으며,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비는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미수 허목(許穆)이 썼다.

자는 숙부(肅夫)이며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중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양관제학·이조참판·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임난(壬亂)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사후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청천·회령서원(會寧書院)에 배향되었다.

 

 

동강김우옹신도비

 

 

 

 

(38)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함조십삼충(咸趙十三忠)의 한분으로 자(字)는 백유(伯由), 호(號)는 대소헌(大笑軒)으로 중종 32년(1537년) 2월 5일에 태어나 명종 13년(1558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 뒤 사도시 직장(司導寺直長),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장례원 사평 등을 역임하고, 선조 16년(1583년)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다. 선조 20년(1587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모집에 진력하였고, 그 해 가을 단성현감을 지냈으며, 선조 29년(1596년)에는 함양군수가 되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안의현감 곽준(郭逡)과 함께 의병을 규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수축하고 성(城)을 지키면서 가토(加藤淸正)가 인솔한 왜군과 싸우다가 그해 8월 18일 정부인전의이씨(貞夫人全義李氏)와 함께 순절(殉節)하시니 향년 61세이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봉(奉)해지고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文集)으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39) 개암(介菴) 강 익(姜 翼) (1523(중종 18)∼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 함양 효우촌(孝友村)에서 출생했다.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근우(謹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 응기(應麒)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1549년(명종 4)진사가 된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1566년 영남유생 33인의 소두(疏頭)가 되어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청하였고, 1552년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제향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다. 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극기와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했다. 뒤에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개암집》 2권이 있다.

 

 

 

 

 

(40)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

 

挽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고산추만엽초비

高山秋晩葉初飛   古山 늦가을에 낙엽이 처음질제

적막모당쇄빈의

寂寞茅堂鎖殯儀   적막한 초옥(草屋)에 빈소문(殯所門)이 닫혀 있네

 

객도문전인불견

客到門前人不見   문앞에 내가와도 사람은 안 보이니

 

석양귀로누쌍휘

夕陽歸路淚雙揮   석양에 돌아설제 두눈에 눈물이라

 

 

 

 

(41)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퇴계종택사진

 

 

퇴계(退溪) 이 황(李滉)은 "동방(東方) 선현(先賢)으로서 도학(道學)에 흥기(興起)된 이가 없었던 것이 아니나 그의 귀결(歸結)은 마침내 절의(節義)나 경서강독(經書講讀)이나 문장(文章)을 짓는 데에 있었고 오로지 닦는 것을 일삼아 참으로 실천(實踐)함으로서 학(學)을 한 이를 찾아본다면 오직 한훤당(寒喧堂)만이 그러하였다."고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券 四十八,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

 

 

 

 

 

(42) 월천(月川) 조 목(趙 穆) (1524~1606)

 

본관 횡성(橫城). 자 사경(士敬). 호 월천(月川) ·동고(東皐). 이황(李滉)의 문인. 1552년(명종 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었다. 1571년(선조 4) 이조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성균관의 천거로 집현전참봉(集賢殿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奉化縣監)을 거쳐 1594년(선조 27)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이듬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전임, 1601년 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평생을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월천집(月川集)》, 저서로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43)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44)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45)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년(명종19)-1633년(인조11)

 

본관은 안동. 자는 행원(行原), 호는 경당(敬堂)퇴계 학문 계승… 講學통해 50년간 후진 양성에 총력

 

 

 

 

 

(46)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년 (인조5) - 1704년 (숙종30)

 

자 翼昇 호 葛庵 시호 文敬

재령 이씨인 갈암은 도학적 경세가로서 퇴계 선생의 적전(嫡傳)이다. 그리고 그는 369 명의 제자를 둔 학파의 중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가학(家學)으로 득력(得力)했다. 소년 시절 그는 부친 석계 이시명과 모친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여덟 살 많은 형인 존재 이휘일로부터 기초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다. 이를 통해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을 거쳐 경당 장흥효로 이어진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정맥(正脈)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갈암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이 경당 장흥효의 제자며 모친이 경당의 무남독녀 외딸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갈암의 학통은 이후 밀암 이재와 대산 이상정, 그리고 정재 유치명에서 다시 학봉의 종손인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져조선의 망국을 맞게 된다.

 

 

 

 

 

(47) 밀암(密庵) 이 재(李 栽) (1657(효종 8)∼1730(영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庵). 아버지는 현일(玄逸)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늑(#늑07)의 딸이다.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徽逸)과 숭일(嵩逸)에게 배웠다. 아버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가서 시봉하였고, 1700년(숙종 26)유배에서 풀려나자 안동군 금수(錦水)에서 살았다.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는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대개 이기란 이물(二物)인데 상리(相離)하지도 않고 상잡(相雜)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이것을 나누어 둘이 되게 할 수도 없고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1704년 정시한(丁時翰)의 은거지 법천우사(法泉寓舍)로 가서 이기사칠지변(理氣四七之辨)·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인물품수지동이(人物稟受之同異)를 강론하였다.그뒤 아버지가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완성하였으며, 《성유록 聖喩錄》·《금수기문 錦水記聞》·《주서강록간보 朱書講錄刊補》·《안증전서 顔曾全書》·《주어요략 朱語要略》 등을 저술하였다.그의 대표적 제자로는 이상정(李象靖)·이광정(李光靖)이 있다.저서로는 《밀암문집》 25권 13책이 있다. 〈梁在悅〉

 

 

 

 

 

(48)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大山 李象靖은 본관은 韓山 字는 景文 號는 大山 諡號는 文敬이다.

퇴계의 嫡傳을 계승한 대학자로 소퇴계로 불리기도 한다.

생전에 수많은 저서가 세인을 놀라게 하였으며 특히 세속을 떠나기 1년 전엔 정조에게 九條疏를 올리니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백미라 하겠다.

정조는 이를 '庸替座右之銘(용체좌우지명) 要作觀省之資(요작관성지자)' '좌우명으로 새겨 반성하는 자료로 사용하겠다'하였으니 그 뜻 또한 깊다 하겠다.

 

 

 

 

 

(49)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1744 - 1809)

 

남한조 <BR>조선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령. 자는 종백. 호는 손재. 상주 출생. 9살 때 고아가 돼 외삼촌인 김진동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한번 들으면 모두 외웠다고 한다. 성품이 소탈하고 대범해 사물에 집착함이 없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탄식하면서 사람이 무엇이라도 능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습관이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뒤에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lt;거습잠&gt;을 지어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고 한다. 이상정을 찾아가 학문하는 방법을 배운 뒤 경서등 여러 서적을 탐독, 거경궁리에 힘썼다. 벼슬에 뜻이 없었고 오직 초야에 은둔해 문경의 선유동에 옥하정을 지어놓고 후진교육에 힘썻다. 여러번 도백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50)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년(정조1)-1861년(철종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청렴한 목민관… 문하생 600여 명 달한 대학자

정재는 퇴계 적전(嫡傳: 학문적 정통성을 이은 학자)을 이어받은 대학자다. 문하생이 600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위상이 높았다.

1805년(순조5)에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정언을 거쳐 대사간을 지냈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855년(철종6) 장헌세자를 추존(追尊)하는 문제로 상소했다가 탄핵을 받고 8개월여 동안 평안도 상원과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가의대부에 올라 춘추관동지사에 이르렀고, 85세의 수를 누렸다.

그는 종증조부인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에게 수학했고, 뒤에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에게 학문을 익혔다. 강학에 힘써 <독서쇄어(讀書鎖語)>, <예의총화(禮疑總話)>, <가례집해(家禮輯解)>, <주절휘요(朱節彙要)>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정재집(定齋集)> 27책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양대 학파 가운데 하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는 이황(李滉)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을 가리킨다. 즉 이와 기(氣)가 어디까지나 두 가지이지 한 가지가 아니며, 기는 결코 상존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는 항존불멸하는 것으로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이며, 능동성을 가진 이가 발동하여 기를 주재한다는 주장이다.따라서 심성론(心性論)의 주요 논제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설명함에 있어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인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이 처음 주장한 것을 이황이 집대성하였고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유치명(柳致明), 이진상(李震相), 이항로(李恒老) 등에 게 계승되었다.

 

 

 

 

 

(51)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순조 27)∼1899.)

 

한말의 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안동출신.김성일(金誠一)의 주손(胄孫).

아버지는 능주목사(綾州牧使) 진화(鎭華)이며, 어머니는 이원상(李元祥)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초록하여 《제훈집설요람 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李滉)·이상정(李象靖)·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가정과 사우로부터 보고 들은 바를 모아서 《곤학록 困學錄》을 편성하고,

또한 〈초학잠 初學箴〉·〈외천설 畏天說〉을 지었다.

 

 

 

(52) 석포(石圃) 김동진(金東鎭)

 김동진의 호는 원래 '석포'였습니다만 나중에 그의 스승이 지은 ‘정산‘으로 더 많이 불리어졌습니다. 

정산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며.  영남지역의 대표적 유림 중 한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국권회복에 헌신한 그분은

항일 독립운동에 연관돼 투옥되어서까지도 관대를갖추고 학문을 강론해 옥지기들도 선생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선생은 구국의 지사이지만 쇠퇘해진 유학을 일으켜 세우는데 생애를 바친 대학자이자 퇴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영남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신 대표적유림 중 한분 입니다. 또한, 소수서원 원장을 세 번 역임하시기도 하셨지요.

그분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우신 ‘도강서당’은 문화재(시도기념물 제 131호 영주시)로 지정되어

그의 증손 김수항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영주시 부석면 도탄마을)


인터넷 참조: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 1827~1899)은 서후면 금계(西後面 金溪) 출신이다. 정재(定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학파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한말의 마지막 거봉(巨峯)이 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취하였으나 사칠론(四七論) 등의 순수 이론보다는 도덕적 인격 완성을 위하여 자기성찰에

힘쓰는 실천적 학문태도를 위주로 하였다. 그러므로 「팔학오도(八學五圖)」를 지어 도학정신에 따른 학문방법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밝혔다. 또한 경학(敬學)에 심취하여 「경재잠집설도(敬齋箴集說圖)」를 작성하여

내면적 수양에 힘썼다. 그의 문인은 권상익(權相翊), 조긍섭(曺兢燮), 김동진(金東鎭), 이상룡(李相龍) 등이 저명하며

그 중에서 석포 김동진(石圃 金東鎭)이 그 학파(學派)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외세(外勢)가

밀어 닥치는 한말(韓末)의 상황에서 학문전념의 길을 버리고 구국(救國) 활동으로 항일의병(抗日義兵)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고운님 자료 보완-

 

 

 

(53)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동네사진

19세기 후반 성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중류지역에서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등장, 한 학파를 열며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이번에 승격되는 성주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공이 이거한 후 형성된 마을로 성산이씨 집성촌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로서 광해군 때에 문과에 급제한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을 배출하였고 이후 대과 급제자 9명, 소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하여 조선후기에 양반마을로 발전하였으며 19세기에 공조판서 응와 이원조(李源祚)와 대유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배출되면서 마을 위상이 한층 높아졌고 이후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이주희(李澍熙), 이기형(李基馨), 이기정(李基定), 이기원(李基元) 등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등 500여년의 문화와 전통을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성주 한개마을

 

 

 

(54)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마음을 다잡는 글[處困箴]《면우집(俛宇集)가난은 네가 검소함 빛내 청렴을 떨치라는 것병은 네가 섭생 잘해 생명을 잘 지키라는 것貧欲汝之昭儉而振淸 / 病欲汝之攝生而養命<해설>이 글은 구한말의 유학자 면우 곽종석(1846 ~ 1919) 선생의 처곤잠(處困箴)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어려움에 처하면 편안함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저자는 편안히 처하는 데 독이 있으며, 슬픈 일도 복되고 경사스러운 데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업신여겨도 그것은 네 언행을 다듬으라는 것이며, 어려운 일이 부딪쳐 와 마구 뒤흔들어대도 그것은 네 덕성을 튼튼히 하라는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거립니다.그리고 만 마리 말이 날뛰듯 어지럽게 부딪쳐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홀로 굳건히 중심을 잡으면 지혜로운 통찰이 날로 깨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을 추스립니다.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단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으며 언행을 다듬고, 덕성을 기르고, 청렴을 떨치고, 생명을 지키는 능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고통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웃으며 이야기할 날도 오지 않을까요?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55)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동방(東方)의 인사(人士 선비)들이 모두 문장(文章)을 일삼았는데 성리학 (性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증자(曾子) 주자(朱子)의 도통(道通)을 찾은 것은 한훤당(寒喧堂)으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진왜정주문(陳倭情奏文)’과 ‘진적정주문(陳賊情奏文)’은 왜국의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권6~9는 서장(書狀), 계사(啓辭), 정문(呈文), 서(書)이다. 권10~12는 서(書)로, 이를 통해 당시 퇴계 문인의 인맥과 학문 등을 엿볼 수 있다. 권13~16은 잡저이다. 상례(喪禮)와 장례(葬禮)의 의문 사항에 대한 것, 국방에 관한 문제와 방책을 논한 글, 성리학 관계된 글, 우리나라와 중국의 인물평이나 정치 관계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실려 있다. 맨 끝에는 장현광(張顯光)과 이준(李埈)의 발(跋)이 각각 있다. 별집의 체제 또한 원집과 비슷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조선 중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년(중종37) ~ 1607년(선조40))의 문집이다. 1631년 저자의 아들 유진(柳袗)이 문집 간행을 도모하여 해인사에서 판각, 인쇄하여 1633년 원집 20권, 별집 4권의 목판본을 내었다.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의 저본은 원집과 별집에 증보된 연보(年譜)를 합편하여 하회(河回)의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중간본이다. 원집 권1~2는 시(詩)이다. 220여 제(題)가 실려 있다. 초기의 작품에는 부친의 임소인 정주(定州)와 형 유운룡(柳雲龍)의 임소인 인동(仁同), 기타 옥연서당(玉淵書堂)과 남계서당(南溪書堂)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으며, 정유재란 때 호서와 경기를 순시할 때 지은 시, 하회에서 독서 후 감상을 적은 시, 풍경을 읊은 시, 차운시 등이 있다. 권3~5

는 주문(奏文), 소(疏), 차(箚)이다. ‘하였다. (서애집西厓集, 무오당적戊午黨籍)

 

 

(56)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상주 청리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감. 이로써 그는 영남학파에서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 가운데 류성룡의 학맥을 잇는 수제자가 됨. 30세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관직에 나아가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을 지냄. 학문에서만 머물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였던 그는 예를 중심으로 한 수양론과 경세론을 정립하여 기호학파의 김장생과 함께 17세기 조선 사회의 사상적 중심에 섬  

 

(57) 수암(修巖) 류 진(柳 袗)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를 낳음으로서 단연 으뜸의 명문세가(名門世家)로 기반을 굳혔다.

그 후손에서 수암 류진(修岩 柳袗: 1582~1635: 상주(尙州)로 이거(移居)), 졸재 류원지(拙齋 柳元之: 1598~1674),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 1763~1837), 계당 류주목(溪堂 柳疇睦: 1813~1872)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집(文集)이나 유고를 낸 학자는 40여 명에 이른다.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류진은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 반양명학(反陽明學),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재난인 임진왜란에서 국가를 구한 명재상을 길이 추앙받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세째 아들이다. 류진 역시 청렴한 목민관으로서 열화 같은 우국충정의 지사(志士) 교육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개결한 인품과 선정(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군민들이 합천군 황강(黃江) 기슭 함벽루(涵碧樓) 옆에 세운 만고인청비(萬古仁淸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전해오고 있다. 본관이 풍산(豊山)인 류진은 선조 15년(1582) 아버지 류성룡의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제외하고 생애의 절반을 하회(河回)에서 보낸 그는 37세 때 일가 독립하여 상주의 가사리(佳士里)로 이거하였다. 이 곳은 팔공산의 물줄기가 북으로 흐르는 위강(渭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팔공산과 일월산, 속리산의 맥이 이곳에서 끊어져 풍수가에서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류진의 호 수암도 마을 앞산의 봉우리인 수암에서 연유한다. 류진의 어린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8세때 모친인 정경부인의 상을 당하자 그는 어린나이에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두 형과 함께 거상하는 것이 어른 못지않았다고 연보에 기록돼있다. 

[출처] 수암(修巖) 류진(柳袗) - 김성규객원기자 | 안동넷

 

 

 

 

 

(58)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선조 31)∼1678(숙종 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경현(景顯).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손자로, 장령 여(#여02)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군자감정 세찬(世贊)의 딸이다. 할아버지 성룡과 작은아버지 진(袗)에게서 수학하였다.일찍이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안동지방의 의병장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활약하였다.학문에 열중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에 능하였으며, 특히 성리(性理)·이기(理氣)·상수(象數)·천문·지리·예설 등에 통달하였다.이기설에 있어서 주로 이황(李滉)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이이(李珥)의 설을 반박하였으며, 예설에 있어서는 효종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宋時烈)이 의정(議定)한 기복제(朞服制)를 부인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다.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졸재집》 14권 7책이 있다.

 

 

 

 

 

(59)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 (1636(인조 14, 병자)∼1690(숙종 16, 경오).

 

    본관 豐山. 자는 爾能. 호는 寓軒.

    연산현감 元履의 子. 외조는 安東 權直養• 高敞 吳淦. 妻父는 咸昌 金堯翊.

     再從叔인 柳元之의 문하에서 수학.

 

    1660년(현종 1) 진사시 합격. 1675년(숙종 1) 增廣文科 급제.

     江原都事•弘文館校理•直提學 역임.

     이황 이후로 理氣論의 엇갈린 학설을 柳元之가 절충했고

     柳元之의 문하에서 傳受된 道學의 뜻이 世鳴에게서 밝아졌다고 함.

   

  저서:『寓軒集』. ▣참고:「墓碣銘」(柳台佐 撰)  󰋫집필:권진호

 

 

 

 

 

(60) 주일재(主一齋) 류후장(柳後章) (1650(효종 1, 경자)∼1706(숙종 32, 병술).

 

본관 豐山. 자는 君晦. 호는 主一齋. 元之의 손자.

柳元之•柳世鳴•洪汝河에게 수학. 易學에 밝음.

李滉의 道學이 전수되어, 30여 세에 이미 士林의 推重을 받음.

健元陵參奉•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저서:『主一齋集』.

 서애 문충공의 현손이다. 안동 하회에 살았다.

▣참고:『嶠南誌』 󰋫집필:권진호

 

 

 

 

 

(61) 백원(百源) 신석번(申碩蕃) (1596(선조 29)∼1675(숙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연(仲衍), 호는 백원(百源). 선무랑 근(謹)의 아들이다. 상주출신. 정경세(鄭經世)의 문인.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41년에 대군사부(大君師傅), 1644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역임하고 효종 때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현종 때에도 사복시주부·공조정랑·상운도찰방(尙雲道察訪)·종부시주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1668년(현종 9) 이후로 진선(進善)·장령·사업(司業)의 벼슬에도 부임하지 않았고, 숙종 즉위년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79세로 병까지 들었으므로 역시 사퇴하였다.이듬해 당상관에 올랐으나 교지가 도착하기 전 죽었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흠모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밝았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백원문집》이 있다.

 

 

 

 

 

(62)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숙종 39)-1782(정조 6)

 

 상서공 휘 선의 24세 손으로(문원공파)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南野).

공(公)은 학행(學行)으로 교관에 천수(薦授)되어 덕망이 높으신 분으로

8세 문제공충좌(忠佐) 15세 행정공 눌(訥)과 함께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곡서원(金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13年10月12日에 지평 성옥(持平 成玉)의 아들로  탄생(誕生),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비범한 재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도덕과 학문은 날로 높아져 정조 정유년(正祖 丁酉年177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도내 유림(道內儒林)이 1753년(영조 29) 조정에 천거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 제수(除授)되었으나

친노(親老)를 이유(理由)삼아 나아가지않으시고

2년후 기해년(己亥1779)에 암행어사 황승원(暗行御史 黃昇源)이 다시 문학이 유림종사(儒林宗師)가 될만하다 하여

계(啓)를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았으나

부모을 모시기 위해 모두 오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도천참봉(道薦參奉)’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논어정의절약(論語精義節約)>, <주서강록차의(朱書講錄箚疑)>, 문집 10권 5책이 있다. 

묘는 예천군 서쪽 지내 매봉산 자와(池內梅峰山子坐)에 있고,

1802년(순조 2)에 사림에서 상금곡리에 회산사(晦山祠)를 세우고 제향하였으나,

대원군 때 훼철(1868) 되었다가 상금곡리의 금곡서원(金谷書院, 1984)을 다시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천성이 순하고 학문에 정통하여 당시 모두 스승으로 모셨다. 

청빈한 가운데서도 학업에만 전념하였고, 특히 한시(漢詩)를 좋아하여 23세 때 시로써 이르기를 "가을 바람이 온 집안을 단장하니/

 하룻밤 사이에 뒤뜰 수풀이 사치롭더라/

 홍합 무더기는 이슬이 서리가 되고/

비단 장막 첩첩한데 잎이 꽃으로 변했도다/

싸인 기운은 새벽에 푸른 바다 햇빛을 이루었고/

가벼운 빛은 해질 때 저녁 노을을 이루었다/

상쾌하게 내가 단청 속에 앉아서/

세월이 흘러감을 잊었도다"라고 하셨다. 

 

 

 

 

 

(63) 입재(立齋) 정정로(鄭宗魯)

 

유휘문은 조선 후기 학자.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 본관은 전주(全州). 유장원(柳長源)의 문인이다. 유장원이 죽은 뒤에는 남한조(南漢朝)에게서 《근사록(近思錄)》 《통서(通書)》 등을 배웠으며 정종로(鄭宗魯)에게서도 수학했다.

16세기 전반기의 士人 申季誠(1499∼1562)의 遺文약간과 行蹟 등을 모아놓은  實記로 후손 顥仁 등이 1815년(純祖15)에 수집, 간행했다. 卷末에 宋煥箕(1805년),  鄭宗魯(1815년) 金坊(1809년), 李우(1809년)등의 跋文이 수록되었다

 

 

 

 

 

(64)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1762(영조 38) ~ 1830(순조 30).

 

조선시대 학자. 자는 상원(象元), 호는 강고(江皐).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성룡(成龍)의 후손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병파(屛派)의 학통을 지켰다.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지내고 익위(翊衛)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왕에게 경연(經筵)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으며, 30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독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강고집(江皐集)》이 있다.

 

 

 

 

 

(65)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2-?)

 

본관은 풍산, 호는 계당(溪堂), 아버지는 후조(厚祚)이다. 문사에 능했으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가업을 돌보는 한편, 젊은 선비들을 지도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인간성에 역점을 두고 <소학>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계당집(溪堂集) 16권 8책이 있다.

 

  

(66) 한강(寒崗) 정 구(鄭 逑)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 대가면 칠봉동 유촌(柳村)에서 태어나 78세로 1620년(광해군 12년) 팔거현

사양정사(泗陽精舍 : 지금의 대구시 칠곡 사수동[泗水洞])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로 대장군 의(毅)의 후손이며 복재 총(復齋 摠)의 6대손이요, 사중(思中)의 셋째 아들이다.

1573(선조 6년), 31세 때에 조정에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7년 동안

건원능참봉(建元陵參奉), 의흥(義興), 삼가(三嘉), 지례(知禮) 등의 현감 발령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창평산(蒼坪山)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580년(선조 13년), 38세에 다시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발령되어 비로소 부임, 1년 반 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여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령됨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작고 작은 산앞에 조그만 집을 지어뜰 가득 매화·국화 해마다 늘어나네.

구름과 물을 더하여 그림 같은 자연속이 세상에 내 생애 가장 사치스럽네

(小小山前小小家 滿園梅菊逐年加 更敎雲水粧如畵 擧世生涯我最奢)

 

 

(67) 미수(眉叟) 허 목(許 穆) (1595∼1682)

 

허목(許穆) 의 82세(1676년)때 모습을 그린 보여주고 있다. 서문에 의하면 기사계첩은 모두 12부를 완성하여 1부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全身)초상화이다. 허목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관직에 맞게 오사모(烏紗冒)에 서대(犀帶)와 담홍포(淡紅袍)를 착용하고 있다. 담홍포의 뒷자락을 들고 앉아서 옷자락 끝이 뻗치는 모양은 17세기 보여주고 있다. 서문에 의하면 기사계첩은 모두 12부를 완성하여 1부는 공신(功臣)초상화의 특징적 요소로, 허목 생존시에 유행했던 도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현재 허목의 초상화는 이 작품 외에 국립중앙박물관과 충남 도강영당(道江影堂)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세 작품은 전신과 반신의 차이는 있으나 얼굴과 의관의 모습이 모두 똑같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본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75세 때인 1794년에 쓴 발문을 통해, 화원 이명기(李命基)가 원본을 따라 옮겨 그린 이모본(移摹本)임을 밝히고 있어 확실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 이 초상화에도 화면 오른쪽 위에 채제공이 75세 때 쓴 표제(標題)가 있지만, 표제의 바탕과 그림 바탕의 질이 서로 달라 표제 부분을 화면에 이어서 붙인 것이 분명하여 제작 시기 추정의 증거로 삼기에는 충분치 않다.

 

 허목의 영정

 

 

 

 

(68) 성호(星湖) 이 익(李 瀷) (1681~1763)

 

星湖 李瀷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69)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1736(영조 1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녹암(鹿庵), 교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근(近)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흠(歆), 동생은 일신(日身)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1777년(정조 1)부터 경기도 여주 앵자산(鶯子山)에 있는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김원성(金源星)·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蘗)·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의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가지면서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철학·수학·종교 등을 연구하였는데, 이를 기연으로 해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그리고 사회적 명망에도 주저하지 않고 암브로시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혹은 珍山事件)로 동생 일신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지만 직접적인 포교에 관여하지 않고 학문과 교리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주위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그리고 학행(學行)으로 많은 동향인들을 천주교에 입교하게 하였다. 교우들이 형벌에 못이겨 교를 배반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반평생의 업적이 무익해졌음은 물론, 순교의 영광스런 화관을 잃었다고 애통해하기도 하였다.1799년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에 의하여 정약종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피소되었지만, 정조는 오히려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면서 서학사건을 거론하지 못하게 하여 다시금 화를 면할 수 있었다.그러나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가 집권하게 되자, 1801년 혹심한 형벌을 받는 중에도 조금도 변색하지 않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신문에 임하였고, 정약종·홍낙민(洪樂敏)·이승훈·홍교만(洪敎萬)·최필공(崔必恭)·최관천(崔冠泉, 혹은 昌顯) 등과 같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의 집행에 앞서 1801년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이익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서학파(西學派)의 대가로 손꼽힌다.저서로는 동학이자 선배였던 홍유한(洪有漢)에 대한 《추도문》이 있다.또한 홍유한과 교유한 여러 통의 친필 편지가 남아 있다.

 

 

 

 

 

(70)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선생은 1762년 오늘의 경기 양주군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四男으로 태어났다. 다산은 남다른 지혜와 넓은 세계관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이며 정치가였으나 우리에겐 역사상 가장 많은 유배생활을 한 학자로 더 많이 각인되어 있는 분이기도 하다. 19년이란 긴 유배생활이 다산 자신에게 있어 고통과 좌절의 긴 시간이었지만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심신을 경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소멸된 우리 전통인 차 문화르 f역사상에 재등장시키는 배경이 되었다는 쿤 업적을 가지고 있다. 다산 선생의 학문과 사상의 근본은 바로 차마음, 차 정신에 있다고한다. 차의 깨끗함.차의 향기로움, 차를 음미하는 자세등이 다산 선생의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중정과 평화의 다정신속에서 백성들을 사랑했고, 제자들은 사랑으로 길렀다고 한다. 이러한 다산 선생의 사상의 근본은 혜장스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어 진다. 다산은 1805년 봄에 백련사에서 10살 아래인 혜장스님을 만나 차에 심취하게 된다. 4년의 유배생활에서 우연히 만나 나눈 차 한잔의 인영으로 다산의 많은 업적들의 배경이 태동하게 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고성사에 보은산방이라는 곳에 기거하면서 두 사람의 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71)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雲山吟     구름과 산

 

 

 

백운유기멸白雲有起滅  흰 구름은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청산무개시靑山無改時  푸른 산이야 모습 바꿀 때가 없지

변천비소귀變遷非所貴  이리저리 변하는 건 좋은 게 아니야

특립사위기特立斯爲奇  우뚝한 그 모습이 아름다운 거라

 

 

 

(72)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 1750(영조 26)∼1827(순조 2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길(耳吉), 호는 하려(下廬).아버지는 이곤(以坤)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로 경채(景采)의 딸이다. 안정복(安鼎福)을 사사하였다.형 덕일(德壹)과 함께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어 15, 16세 때 벌써 학예(學藝)로 이름이 높아 친구가 많았다.이때 어머니로부터 “명리(名利)를 좋아하는 사람과 교유해서는 안된다.”라는 훈계를 받았는데, 그 뒤로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배워 일상생활의 윤리로부터 성명(性命)·이기(理氣)의 근원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따라서, 그의 학문은 해박하고도 요점을 얻었으며, 간략하고도 충실하여 조화의 근원을 꿰뚫고 사물의 이치를 밝혔다. 거처를 ‘하려(下廬)’라 이름하고 세로(世路)에 인연을 끊은 채 학문탐구에만 몰두하였다.저서로 《방언 放言》·《일용집요 日用輯要》·《동현학칙 東賢學則》·《도학원류찬언 道學源流纂言》과 《속찬언 續纂言》·《삼자실기 三子實記》·《사례요의 四禮要儀》·《가례익 家禮翼》·《동유예설 東儒禮說》·《경훈사교록 經訓四敎錄》·《사서집록 四書輯錄》·《수사연원록 洙泗淵源錄》·《도동연원록 道東淵源錄》·《증보성현군보록 增補聖賢群輔錄》·《척견록 摭見錄》·《어류찬語類纂》·《초학편初學編》·《소대연편 昭代衍編》·《고사상고 古史詳攷》 등을 남겼는데, 모두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내용의 책으로, 옛 성현의 뜻을 계승하여 후세의 학문을 열어주었다. 

 

 

(7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명종 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74) 성재(性齋) 허 전(許 傳) 1797(정조21)∼1886(고종23)

 

허전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아버지는 정언 형(珩)이고 포천 출생이다. 안정복(安鼎福)·이익(李瀷)·황덕길(黃德吉)을 이은 성호학파(星湖學派) 계승자이며, 기호(畿湖)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을 지냈다. 183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좌랑·함평현감·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한성부좌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경연(經筵)에 참가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강하는 한편, <사의(士儀)>·<종요록(宗堯錄)> 등을 저술하여 학자적 관료의 면모를 보였다. 1862년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조세 및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농민항쟁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삼정책(三政策)>을 올렸다. 1864년(고종1)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鄕約)을 강론했으며 유림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기도 했다.

 

 

 

(75)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76)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본관 광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 선조 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남양(南陽)·양근(楊根)·안성·익산·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 )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사업(司業)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최명길(崔鳴吉)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이후원(李厚源)·신민일(申敏一)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77) 신독재(愼獨齋) 김 집(金 集)

 

 김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의 차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 김장생의 문하에서 오직 성리학과 예학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610년 참봉이 되었으나 실직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의 계축화옥에 서숙인 김경손, 김평손 등이 연루됨에 따라 더욱 벼슬길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선영이 있는 연산에서 내려와서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도덕정치가 강조되고 산림을 중용하는 정치 기풍이 진작되었다. 이에 따라 김장생을 필두로 하여 산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집 또한 학행으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의 헌관으로 부르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여 지방관이 제수되었다. 부여현감에 부임한지 4년만에 사임하였고 이후 임피 현령이 제수되는 등 여러 관직이 주어졌으나 연로한 부친 간병을 위해 모두 사퇴하였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야 지평집의 등을 수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집은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천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인조가 이미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상경하여 진위하고 돌아왔다.

 

 효종 초에 공조 참의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가 이판에 등용되는 것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을 실현하고자 한 효종의 북벌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김자점 등을 축으로 하는 공서파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재야의 기풍을 가지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청서파 계열의 산당과는 정면으로 충돌 되었다. 당시 김집은 청음 김상헌과 함께 산당의 거두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김육과 불화가 일어나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특히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한 사건이 있은 후 더욱 정계 진출의 뜻을 잃었다. 이후로는 조용히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예서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부친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의 성립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예학자로서 평가되고 있다. 사후에는 사림들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문묘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이며 저서로는 『신독재유고』『의례문해속』이 있다.

 

 

 

 

 

(78)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노론의 영수로 생원시를 장원으로 합격 후 학문적 명성을 널리 떨쳤고, 후일의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효종의 신임아래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으나 효종이 죽은 후 재야로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과정에서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으나 노론이 집권함에 따라 다시 복권되었다. 송시열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서 조광조, 이이의 학통을 이어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어 후대에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 작품은 송시열이 74세때의 초상으로 화면 우측에 '後學安東金昌業寫 副護軍 秦再奚摹'라고 적혀있다. 현재 제천 황강영당에 또 한폭의 74세 초상이 전하고 있는데 복식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얼굴은 거의 동일하므로 두 작품의 선후관계가 좀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해는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올랐던 때이며, 김창업이 초상화를 기초하고 화원이 이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이 작품이 바로 기록상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얼굴은 살색으로 칠한 후 중요한 주름만 필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옅은 선염으로 음영을 가했다. 이렇게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 巾)을 쓴 모습은 재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벽은(僻隱) 진재해秦再奚(?∼1735이전)는 화원으로 숙종의 어진을 주도적으로 작업하였고 산수도 잘 그렸다. 특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칭송받아 여러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송시열 영정

 

 

(79)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 (인조19년 1641∼경종원년 1721)

 

권상하(權尙夏)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의 수제. 현종원년에 진사가 되었고 우의정·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시호는 문순(文純). 저서로 한수재집(寒水齋集)이 있다.

  

 

(80)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조선시대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한 호론(湖論)의 대표적 성리학자.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영조 1년에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소론(少論) 배척운동을 펴다가 면직되었다.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간(李柬)의 낙론(洛論)에 대립한 호론의 영수였다.

저서에 『남당집(南塘集)』『퇴계집차의(退溪集箚疑)』『장자변해(莊子辨解)』등이 있으며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는 송시열의 작업을 이어받아 50년 만에 완성한 퇴계의 이론에 대한 비판서이다. ⇒호락논쟁

 

(81)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

 

선생의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1624년에 진사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으며,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웠다가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논의,

그 공로가 인정되어, 우참찬,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性理學者로서 禮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며 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중의 한분이다. 

 

 

 

 

(82) 장암(丈巖) 정 호(鄭 澔) 1648(인조 26)∼1736(영조 12).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으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정경연(鄭慶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처음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나 여러 형제들의 권유로 숙종 8년(168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한림에 뽑혀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사간원 정언이 되자 오도일(吳道一) 등의 소론을 탄핵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도 함경도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제거된 후 지평 · 수찬 · 교리 · 집의 · 사간 등을 지내고 1699년 동래 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은(銀) 12만냥을 왜인들에게서 사들인 일로 파직되었다.1701년 광주 부윤으로 기용되고 승지 · 부제학 · 함경도 관찰사 · 대사간 · 대사헌을 지내다가 1710년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 · 갑산 등지로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임용되어 송시열의 문묘 종사를 주청하였다. 1715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쓰고 이듬해 《노서유고(魯西遺稿)》의 훼판과 윤선거(尹宣擧) · 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추탈을 주동하였다. 숙종 43년(1717) 세자의 대리청정을 관철시키고 예조 판서를 거쳐 이조 판서에 올랐다. 경종 1년(1721)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종사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영조 1년(1725)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29년 기로소에 들어가고 영중추부사로 죽었다.청빈하고 강직하였으나 당파의식이 철저하여 일생을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장암집(丈巖集)》 26권이 전하고 편서로 《문의통고(文義通攷)》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83) 미암(迷菴) 김위재(金偉材)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에 있는 서원. 1693년(숙종 1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신보(鄭臣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정인경(鄭仁卿)·유방택(柳方澤)·윤황(尹璜)·유백유(柳伯濡유백순(柳伯淳)·유윤(柳潤)·김적(金積)·김위재(金偉材)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84)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1599(선조 32).

 

조선 전기의 학자.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아버지는 천문학관 사련(祀連)이다.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처겸(處謙)을 역모자로 고변(告變)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귀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성혼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西人)의 모주(謀主)'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동인(東人)의 질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동서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1586년(선조 19) 마침내 그의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은인인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해 세력을 굳히려 하자 시로써 풍자한 것 때문에 이산해의 미움을 사서 극지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沔川)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하다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그후 제자들이 신원소(伸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51년(영조 27)에야 신원되어 통덕랑사헌부지평(通德郞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사변적인 이론보다 실천 윤리인 예(禮)를 통해 이(理)에 접근할 것을 중시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은 그의 제자이다. 문학적으로는 시․문에 다 능해 시는 성당시(盛唐詩)를 바탕으로 청절(淸絶)했으며, 문은 고문(古文)을 주장하여 논리가 정연한 실용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제율곡문 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이며, 〈은아전 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 저서로 문집 〈구봉집〉이 있다.

             

 

 

                         望月  망월   달을 바라보며          宋翼弼  송익필 1534~1599

 

未圓常恨就圓遲   미원상한취원지   둥글지 않았을 때 항상 더딤을 한스러워 했는데 

 

圓後如何易就虧   원후여하역취휴   둥근 뒤 어찌 이리 쉬 이그러지는고

 

三十夜中圓一夜   삼비야중원일야   서른 밤, 둥근날은 단 하루 뿐

 

世間萬事摠如斯   세간만사총여사   세상 만사 모두가 이와 같은 걸

 

 

(85)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

(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해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

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를 명에 의해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

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

≪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

≪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農巖集(金昌協),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54). 

 

 

(86) (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숙종 28)∼1772(영조 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 운루(雲樓)이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승지 김제겸(金濟謙)의 아들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하여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알려졌다.조선 후기의 학자 · 문신으로 숙종 45년(1719)

진사가 되었으나 경종 2년(1722) 신임사화 때 종조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의 4대신으로

사사(賜死)되고 생부(生父) 제겸(濟謙)을 비롯하여 친형인 성행(省行) · 탄행(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어머니 배소에 따라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 할아버지와 아버지 · 형 등이 신원되었으나 시골에 머물며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영조 16년(1740) 학행으로 천거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 1750년 위수(衛率) ·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1759년 왕세손 교육을 맡도록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후에 공조 참의 · 사성 · 찬선(贊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일찍이 종조부 김창흡(金昌翕)에게 배웠고,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당시 성리학에 있어서 낙론(洛論) ·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김창협의 이론을 이어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인 이간(李柬) · 이재(李縡)가 중심이 된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입장이었다. 즉 심(心)은 이(理)와 기(氣)의 중간에 처하여 이(理) · 기(氣)를 겸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야에 큰 영향력을 미친 학자로 문하에서 많은 성리학자와 실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홍대용(洪大容) · 박윤원(朴胤源) · 오윤상(吳允常) · 황윤석(黃胤錫)과 그의 아들

김이안(金履安) 등이다.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미호집(渼湖集)》 20권 10책이 있다. 

 

 

(87) 증소(巢) 김신겸(金信謙) 1693(숙종 19)∼1738(영조 1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존보(尊甫), 호는 증소(橧巢). 아버지는 진사 창업(昌業)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익풍군(益豐君) 속(涑)의 딸이다. 숙부인 김창흡(金昌翕)을 사사하였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큰아버지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거제도로 유배될 때 연루되어 함께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강원도 영월의 산중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는 당시의 석학인 민우수(閔遇洙)·유숙기(兪肅基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명덕설(明德說) 등을 강론하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백육애음 百六哀吟〉이라는 사우(師友)들 106명의 행적을 읊은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는 전국 각지의 명승고적·명산·바다·도서 등지를 두루 구경하고 사적·풍속·지리·산물 등을 소개한 기행문을 많이 남겼다.

 

       이조판서 겸 좨주(祭酒)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증소집≫ 10권 5책이 있다.

 

 

 

 

 

(88)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좌의정 정구(廷龜)의 손자로, 대제학 명한(明漢)의 아들이다.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장원,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대교·봉교·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사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밝혔으며, 전라도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하였다.그뒤 효종이 죽고 정국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를 지냈으며,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다.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어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고 스스로 관직을 떠났다. 홍명하(洪命夏)·송준길(宋浚吉)·조복양(趙復陽) 등이 학문과 덕행을 인정, 경연관(經筵官)에 추천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양주 동강(東岡)으로 은퇴하였다.그뒤 승지와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을 겸하였으나 곧 사양하고 물러났다.1680년(숙종 6)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兩館提學)이 추증되었고, 다시 이조판서로 증추되었다. 문하에서 아들인 희조(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정관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靜觀齋集, 宋子大全, 文谷集(金壽恒). 〈李章熙〉 

 

 

 

(89) 삼연(三淵) 김창옹(金昌翁) (1653∼1722)

 

어린 겸재는 이들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 이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그는 이웃인 三洲 金昌翁(1653∼1722)과 老稼齋 金昌業(1658∼1721)형제들의 영향으로 정통 畵道修練에 몰입

 

 

 

 

 

(90)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현종(1665)~영조 24(1748).조선 문신.

 

자는 상보, 호는 여호(黎湖), 본관은 반남, 절에서 스승도 없이 학문으 닦아 이름을 떨쳤다.

숙종 43년(1717) 재상 송상기(宋相琪)의 천거로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가 된 후

지평, 장령, 진성, 집의 등을 역임한 후 후에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냈다.

말년인 영조23(1747)부터 이듬해 무진년(1748)년까지 충렬서원 원장으로 재직하였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충렬서원원장록>, 금병윤

 

 

(91) 지암(止菴) 김양행(金亮行) (1715-1779)

 

박준원(1739~1807)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평숙(平叔), 호는 금석(錦石)이다.

김양행(金亮行)의 문인으로 정조 10년(1786)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것)로 주부(主簿, 각 관아의 당하관 벼슬의 하나)가 되고 이듬해 딸이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 수빈이 되자 건원릉참봉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다.

 

 

 

 

 

(92) 수산(睡山) 이우신(李友信) 1778(정조 2)∼1849(헌종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휴(伯休) 호는 능호(菱湖). 아버지는 덕리(德利),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창렬(昌烈)의 딸이며, 김려(金鑢)·이우신(李友信)의 문인이다

순조조 4. 9월. 경연관을 선발한 다음 서연관(書筵官)을 겸임시켜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銅龍門)의 강석에 출입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정부와 전조(銓曹)가 오희상(吳熙常)과 이우신(李友信)을 천거하였는데, 상이 하유하여 부르고 돈독히 신칙하였으나 오희상과 이우신 모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르지 않았다. 상이 비답을 내려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93)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정조 16)∼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포천출신.회장(晦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의집(義集)의 딸이다.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 天皇地皇辨〉을 지었다.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 書傳》을 배웠다.1808년(순조 8) 반시(泮試: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고,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의 사찰을 옮겨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그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1864년(고종 1) 당시의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그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그러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한 바도 있는데, 이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당한 뒤 낙향하였다.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중국의 나흠순(羅欽順)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고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그 기초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저서로는 《화서집》·《화동역사합편강목 華東歷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 檗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항로의 영정

 

 

 

 

(94)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1819(순조 19)∼1891(고종 28).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세거지는 경기도 포천. 아버지는 성양(聖養)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십구사략 十九史略》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대략 이해하였다.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상당히 온건하였다.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을 많이 따랐으며, 특히 이항로가 본심(本心)이 이(理)라고 하는 데 비해, 예지(睿智)를 이(理)라고 하여,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는 심(心)은 기(氣)라는 입장을 취해 명덕(明德)을 이로 보고 있었는데 이런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켰다.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 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1881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다가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1900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미원서원(迷原書院) 및 보산서원(寶山書院)에 봉향되었다.저서로는 《중암선생문집》 및 별집·《중암고 重菴稿》·《근사록부주 近思錄附註》·《학통고 學統考》·《천군편 天君編》·《대곡문답 大谷問答》·《치도사의 治道私議》·《해상필어 海上筆語》·《경장문답 更張問答》·《붕사잡록 鵬舍雜錄》·《해상록 海上錄》·《삼강문답 三江問答》·《구곡문답 龜谷問答》·《벽산심설연원 壁山心說淵源》·《척양대의 斥洋大義》·《남정기문 南征記聞》·《우촌수담 雨村手談》·《노강수록 鷺江隨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95)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자양-서사(紫陽書社)【고적】장담, 공전리 414번지에 있는 서당. 조선 고종(高宗) 26년(1889)에 성리학자 성재(省齋), 유 중교(柳重敎)가 이 곳에 살면서 서당을 세우고 창주정사(滄洲精舍)라 하였다가, 그 후 자양서사로 고쳐 후진들을 양성하였슴. 그의 당질 의암(毅庵) 유인석(柳寅錫)이 의병 창의(倡義)의 비밀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함.

 

 

 

 

 

(96)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 (1833~1906)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지사(志士)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찬겸(贊謙)이다. 그리고 호는 면암(勉庵)이며 경기 포천(抱川) 출생이다.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즉,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의정부 찬정(贊政) ·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이 때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1904년 러 ·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 ·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디. 즉,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뒤 쓰시마섬[對馬島]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였다 . 또한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97)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영숙(永叔),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부는 증 이조판서 필리(弼履)이고, 아버지는 판관을 지내고 증 좌찬성에 오른 사석(師錫)이며, 어머니는 기계(杞溪) 유씨(兪氏) 증 참판 수기(受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특이하고 재주가 뛰어나 말이나 배울 나이에 벌써 글자를 알았다.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여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8년(178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자 오재순(吳載純)이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1792년 다시 선공감의 감역에 제수하였으나 역시 사임하였으며, 정조 22년(1798) 국가에서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고 인재를 등용함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천거하였으나 병을 칭하고 사임하였다. 헌종 11년(1845) 대사헌 겸 좨주(祭酒)에 증직되었고, 철종 14년(1863)에 이조판서로 가증되었으며 문헌(文獻)의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은 안동(安東) 김씨 처사(處士) 시관(時管)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하리 운만산(雲滿山: 현 과천시 과천동 우면산)에 있다. 

 

(98) 매산(梅山) 홍필직(洪直弼) 1776(영조 52)~1852(철종 3).

 

문신 자는 백응(伯應) 호는 매산(梅山) 본관은 남양(南陽) 동지돈 령부사 이간(履簡)의 아들 박윤원(朴胤源)의 문인 사마시에 실패한 후 학업에 정진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1814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장흥고 봉사를 지내고 사퇴 1838년 다시 천거되어 지평 부사직을 거쳐 1845년 재주를 지냈고 1851년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지돈령부사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유학자로 문장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경 ※저서 매산집이 있음※ .

 

홍직필 영정

 

 

 

(99)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1836년(헌종 2)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떨어지자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했다. 1839년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홍직필(洪直弼) 등을 찾아갔으며, 1842년 홍직필의 제자가 되었다. 1858년(철종 9)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효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사양했다. 1861년 경연관에 뽑혔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1862년 김평묵(金平默)과 서신으로 성리설에 관해 논쟁을 했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원정 등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없애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거듭 부당함을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했다.

 

 그는 낙론(洛論 : 人物性同論) 계열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심시기(心是氣)·성즉기(性卽氣)·명덕즉기(明德卽氣)를 주장했다. 그는 주희(朱熹)가 "태극이 스스로 동정(動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理)가 기(氣)를 주재(主宰)한다는 말이라고 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은 곧 주재의 이이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동정을 기로 돌렸으며, 발하거나 유행하는 것도 모두 기라 하고 이에서는 주재성만을 논했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가 기를 낳는다"는 것도 기의 동정에 우선하여, 동정하는 까닭인 이가 있다고 한 말이라고 했다. 또 이가 비록 기의 운동을 주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기의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심성(心性)에 대해서도 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여기서 성이 곧 기라 할 때 기와 성이 같은 것은 아니며, 다만 성과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뜻한 말이라고 했다. 또한 명덕(明德) 역시 기라고 했는데, 명덕은 사람이 하늘의 기로부터 얻는 것이며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물에 감응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명덕이 갖춘 것은 이지만 그것을 갖추게 한 것은 허령한 기라고 하여, 이 역시 기를 위주로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수양을 한다는 것도 다만 기질의 침전물을 융화할 뿐이고 그 성을 수양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인은 기의 지정지수(至正至粹)한 것을 얻었고, 범인은 그 얻은 기가 성인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동식물과는 다르기 때문에 수양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명덕은 기'라는 그의 주장은 '명덕은 이'라고 하는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김평묵(金平默) 등과 대립,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천주학(天主學)도 극력 배척했다. 문인으로 전우(田愚)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전재집〉·〈고산집〉·〈속고산집〉 등이 있다. 죽은 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 연기 숭덕사(崇德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00) 간재(艮齋) 전 우(田 愚) (1841~1922)

 

 

본관은 담양(潭陽), 야은(埜隱)의 후손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또는 구산(臼山)

 

 

주요문집은  간재집(艮齋集), 간재사고(艮齋私稿), 추담별집(秋潭別集) 등

 

1841년(헌종7년) 전주 청석동에서 출생(부 : 호는 聽天 휘는 在聖 모 : 양씨)

 

1855년(헌종21년) 14세 때 1855년 부친(재성)을 따라 서울로 상경

 

1862년(헌종28년) 거유 신응조의 소개로 아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로 들어가 성리학연구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주장

                         

 

 

1882년(고종19년) 선공감감역· 강원도도사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1883년(고종20년) 순흥부사· 중추원찬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1894년(고종31년) 사헌부장령으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1905년(고종42년) 을사조약 반대 상소

 

1910년(고종47년) 한일합방으로 부안 앞바다 거처를 왕등도로 옮김

 

1913년 72세에 계화도(계화도)에 정착하여 후학을 양성

 

1922년7월4일 계화도에서 84세로 사망

 

 

                     삼천여명의 제자와 조문객이 참여한 유교식 장례

 

 

                     9월 전북 익산시 삼기면 현동에 안장

 

 

제자 :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 송기면(宋基冕)· 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 등 3,000여 명

 

 

제향 :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

 

간재집 : 시문집으로 59권 31책(본집 43권, 속집 16권)-규장각, 국립도서관에 소장

             진주본(晋州本:연활자로 인쇄) -1927년 문인 김정호가 편집

             신도본(新都本:목판으로 인쇄)-이인구가 편집

             최익현, 김평묵, 유중교 등과 교유하면서 주고받은 편지가 4,224편에 이르는데

             경전 예학설 성리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깊이 있는 논의되고 간재의 학문은

             이이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으며 성사심제독계어(性師心弟獨契語)의 심성학설은

             간재의 독특한 견해가 정리된 글이다.

             인변란소(因變亂疏)-을사조약 체결후 조약에 서명한 오적신은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문이고 경세문(警世文)은 나라 잃은 것을 통탄해서 국권회복을 도모하 자는 내용이다.

 

추담별집 : 일제 침략을 비판하는 글들을 모아 1929년 중국에서 간행

 

 

 

 

 

(101) 영재(寧齋) 오윤상(吳允常)

 

미확인

 

 

 

 

 

(102) 노주(老洲) (吳熙常) 1763(영조 39)∼1833(순조 3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로서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의 아들이다. 예조 판서 오재소(吳載紹)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 24년(1800)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된 후

장릉 참봉(長陵參奉) · 돈녕부 참봉 · 한성부 주부 · 황해도 도사 · 사어(司禦) 등을 지냈다.

1818년 경연관 ·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그 후에도 지평 · 장령 · 집의 · 승지이조 · 형조 · 공조참의에 임명되고, 1829년에는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형 오윤상(吳允常)에게 글을 배우며 학문의 방법을 스스로 닦고 터득하여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학문의 경향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충적인 것을 취했으며,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에 있어서는 주리설(主理說)을 옹호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독서수기(讀書隨記)》 · 《노주집(老洲集)》 등이 있다.

  

(103) 봉첩(鳳棲) 유신환(兪莘煥) (1801-1859),

 

기계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급제 84명, 태상신 3명, 판서 12명을 기록했다. 뿐만아니라 기계인은 학문과 서화에서도

쟁쟁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학문에 있어 시남 유계(市南 兪棨)를 비롯하여 겸산 유숙기(兼山兪肅基)ㆍ

대재 유언집(大齋兪彦鏶)ㆍ봉첩 유신환(鳳捷兪莘煥) 등은 후계유씨 일문(一門)의 4대유학자(儒學者) 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찬연한 업적을 남긴 석학들이다.

 

(104)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1776(영조 52)∼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아버지는 참봉 이수(履鏽), 어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로 종주(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이간(李柬)과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대산집≫·≪대산공이점록 臺山公移占錄≫·≪주자대전차문목표보 朱子大全箚目問標補≫·

 

≪궐여산필 闕餘散筆≫·≪열세시기 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105) 과재(過齋) 김정묵(金正黙)

 

이유태의 초려집 이렇게 수습된 家藏 遺稿는 다시 저자의 5대손(이름 未詳)이 任聖周, 金砥行과 함께 校正하였고,

다시 過齋 金正默의 손을 거쳐 17책으로 刪定되어 간행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역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채 상..

 

 

(106)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1759(영조 35)∼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아버지는 환명(煥明)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덕(思德)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아,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을 비롯,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그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그러나 72세가 되던 1830년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찬선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838년(헌종 4) 80세의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저서로는 《강재집》이 있다.

 

 

 

(107)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서간(書簡)

한국 조선

1852년

송달수(宋達洙)

 

 

 

 

 

(108)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헌종 2)∼1905(광무 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 · 연재(淵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조선 후기 문인으로 충남 회덕 출생이다. 순국지사로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송달수가 죽은 뒤 가학(家學)이 기우는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송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여가에 조광조(趙光祖)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송시열(宋時烈) 등 거유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고종 15년(1878) 태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고종 17년(1880)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小功) · 시마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당시의 의제변개(衣制變改)에 대하여서만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비답(批答)이 없으므로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으며 이듬해 옥주(沃州)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珪)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그해 음력 12월 30일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1914년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이 문충사는 1970년 충청남도 대전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불린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09)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헌종 5)∼1912.

 

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충청남도 회덕출신.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으며, 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1888년(고종 25) 묘당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뒤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송병선이 이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하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그해 11월에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1914년 병선의 사당인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병향되었으며, 1970년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일명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한다.1973년에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10) 도암(陶菴) 이 (李 縡) 1680(숙종 6)∼1746(영조 22).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 한천(寒泉)으로 진사 이만창(李晩昌)의 아들이다.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한성부 성밖 아현(현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성밖 아현에 이도암(李陶菴)의 옛집이 있는데 취백당(翠白堂)이라는 현판이 있다’ 하였다. 숙종 28년(1702)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 ·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어 《단종실록(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문학 · 정언 · 병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709년 헌납 · 이조 좌랑 · 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711년 이조 정랑 · 홍문관의 수찬 · 부교리 · 응교 · 필선 · 보덕을 지내고 집의가 되었다. 1712년 장악원 정 · 수원 부사를 지냈고, 1715년 병조 참의 · 예조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 · 호조 참의 · 부제학이 되었다.이 때 《가례원류(家禮源流)》로 시비가 일자 노론(老論)의 입장에서 소론(少論)을 통박하였으며,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719년 형조 참판 · 승문원 제조 · 부교리 등을 지내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의 직을 가지고 영남 균전사(嶺南均田使)로 파견되어 당면한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1721년 예조 참의 · 도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소론이 집권하여 삭직당하고, 이어 신임사화로 중부(仲父)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여 인제(麟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영조 1년(1725)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부제학에 복직되어 대제학 · 이조 참판을 지내다가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이듬해 다시 이조 참판 ·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을 거쳐 영조 16년(1740) 3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1741년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이후 임명되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그는 이간(李柬)의 인(人) · 물(物)의 성질은 모두 동일하다는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계승하여 낙론(洛論)을 이루어, 사람과 물질의 성질이 다르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과 대립하며 논쟁하였다. 또한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老論)의 준론(峻論)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윤봉구(尹鳳九) · 송명흠(宋明欽)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예학에도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순조(純祖)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용인(龍仁)의 한천서원(寒泉書院), 온양(溫陽)의 외암서원(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 《도암과시(陶菴科詩)》 · 《사례편람(四禮便覽)》 ·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111)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숙종 23)∼1757(영조 3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 광암(廣岩)으로 문경공(文景公) 박충원(朴忠元)의 6세손이다.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종 1년(172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영조 4년(1728)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자 ·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을 반대하여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풀려났다. 세손강서원 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했으며, 참판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심성론에 입각하여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으며 예서(禮書) 연구에도 힘썼다.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예의류집(禮疑類輯)》 · 《돈효록(敦孝錄)》 · 《보민록(保民錄)》 · 《돈녕록(敦寧錄)》 · 《겸재집(謙齋集)》 등이 있다.  

 

 

(112) 력천(轢泉) 송명흠(宋明欽)

 

정조의 스승이었던 력천 송명흠(泉 宋明欽)선생,

 

동춘당 송준길의 현손(玄孫)으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할 때에 찬선(贊善)의 벼슬로

 

목숨을 걸고 만류하다 파직되어 낙향한 선비적 기상을 지닌 인물이다.

 

사후에 복관(復官)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다.

 

송준길의 가학을 이어받은 송명흠은 『동춘당연보』의 간행에 앞장섰으며, 유고에 『늑천집(泉集)』이 있다.

 

낙론학파(洛論學派)의 핵심적 인물로 산림이자 18세기 대전을 대표하는 송명흠의 선비적 기상을 기리고자 열리는

 

학술대회에서는 ‘늑천 송명흠선생과 한국의 의리정신’이란 류승국 학술원회원(前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의 기조발표와 함께

 

세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된다. 송명흠은 경상남도 함양에 있는 성천서원(星川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금번 행사는 은진송씨동춘당문정공파종중(대표 송좌빈)에서 주최하고 행사는 한남대학교 충청학연구소(소장 한기범)가 주관하게 된다

 

 

 

 

 

(113) 추양(秋陽) 송계간(宋啓)   1764(영조 40)∼1841(헌종 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직경(直卿), 호는 추양(秋陽)으로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며 찬성 송시연(宋時淵)의 아들이다.조선 후기의 학자로 어려서 할아버지 명흠(明欽)에게 글을 배웠다. 정조 20년(1726)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그의 학행을 천거하여 부사용(副司勇)에 제수되었다. 그뒤 대사헌 이직보(李直輔), 홍문관 교리 이지연(李止淵),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추천으로 형조 참의 · 성균관 좨주(祭酒) · 사헌부 대사헌 등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그는 항상 경전(經傳)의 요어(要語)를 초서(抄書)하여 스스로 반성하며, 학자로 자처하지 않았으므로 그 학문의 조예와 경향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 예조 좌랑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추양유고(秋陽遺稿)》가 있다. 

 

 

(114) 금곡(錦谷) 송내희(宋來熙) 1791(정조 15)∼1867(고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칠(子七), 호는 금곡(錦谷). 군수 계정(啓楨)의 아들이다.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어 이후 장령·집의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다.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저서로는 《금곡문집》이 있다. 

 

 

 

(115)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숙종 37)∼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청풍(淸風)출신.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청주에 거주하다가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 1750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승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1758년 공주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에 은거하여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초년에는 스승의 학설을 신봉하여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으나 중년에 이르러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고 호락(湖洛)의 양론을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입장에서 종합하여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였다.저서로 《녹문집》 26권이 있으며, 그 가운데 〈녹려잡지 鹿廬雜識〉·〈산록 散錄〉 등이 중요하다. 당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 분열되었다.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정주(程朱)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이일분수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기정진(奇正鎭)이 분수지리(分殊之理)의 개별성의 논리적 근거를 이일지리(理一之理)에 정초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보편성의 근거를 기 자체에서 찾고 있다.그는 우주의 본원적 일기(一氣)를 제시하여 그것을 원기(元氣)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장재(張載)가 말한 태허태화(太虛太和) 및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해당된다. 보편적 일자(一者)가 현상계의 개체로 나타날 때 띠는 특수성을 그는 생의(生意)를 본질로 하는 기의 자기원인적 전개로 보고 자연이연(自然而然)한 내재적 법칙을 도(道) 또는 이(理)라고 하여, 기와 논리적으로 일단 구별된 소이연자(所以然者)를 이로 보려는 주희(朱熹)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한다.이와같은 일원적 이기론의 구조로써 이일분수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일분수설을 제시한다. 그는 태극으로부터 음양오행, 만상(萬象)으로서의 전개를 원기가 분수지기(分殊之氣)로 개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보고, 기에 특수성만을 인정하는 이일분수설을 비판하여 이의 보편성은 곧 기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그는 이일분수설은 주리적(主理的)으로 말한 것이므로 분수도 이에 속하여야 하며, 주기적(主氣的)으로 말한다면 기일분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성론(人性論)에 있어서 성즉기(性卽氣)를 주장하고 있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도 구분하지 않고 인성의 선(善)은 곧 기질의 선이요, 기질 이외에 선한 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기질의 본체는 담일(湛一)한 것으로 천지의 본원적 기와 상통하는 것인데, 기기(氣機)가 움직일 때 사재(渣滓)가 용사(用事)함으로써 심성이 흐려져 본래의 선성(善性)이 엄폐된다고 하였다. 인성주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16)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은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117)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조선말기의 항일 의병장.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생.

 

1881년(고종 18)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湖南) 소수(疏首)라 불렀다.

 

1896년에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의병을 모아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으나 고종의 의병 해산령을 받고 해산시켰다.

 

그해 5월 장성에서 다시 기병하였으나 왜병에 잡혀 옥고를 치르고, 1908년 순천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종신토록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세금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저서에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18)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 1843(헌종 9)∼1911.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방훈(邦勳)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은 1879년에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계속되었다.

 

 

당시는 국권이 서서히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860년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정부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 : 지금의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후 일제가 저명인사에게 주는 은사금을 물리쳤다.

 

1911년 오랑캐의 침략이 서서히 이루어져 빠져 들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1903년 〈납량사의기의변 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 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 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 49권이 있다. 

 

 

(119) 율계(栗溪) 정 기(鄭 琦)

 

* 정지지(鄭之智) (교리(校理)) 정서(鄭恕) (헌납(獻納)) 정무(鄭懋) (장령(掌令)) 정신(鄭晨) (교리(校理)) 정기(鄭琦)

 (호판(戶判)) 정환(鄭?) (참의(參議)) 정효본(鄭孝本) (감사(監司)) 정세현(鄭世賢) ...

 

 

(120)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

 

정의림의 자는 季方, 호는 日新, 또는 日新齋, 본관은 光山이다.

 

화순 능주 대덕리에서 출생하였다. 24세에 노사 선생을 찾아가 유학공부를 하였다.

 

58세때 노사선생의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辨田愚所著 蘆沙先生 納凉私議記疑>와

 

<辨田愚所著 蘆沙先生 猥筆辨>을 써서 노사의 학설을 옹호하였다.

 

60세 때 을사조약에 체결되자 울분에 겨워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소장을 작성하였다.

 

일신은 노사가 <외필>과 <납량사의>에서 율곡학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곡의 실수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음양의 동정 문제에 대해, ‘動靜은 氣의 동정이 아니라 理의 동정인데, 다만 理의 동정은 조작이나

 

작용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위의 爲, 또는 不使의 使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노사스승의 입장을 따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理라고 하였다.

 

理氣, 偏見의 문제에 대해, 간재가 理氣 偏全의 문제에 대해 分을 一과 상대시켜 말한 것을 옳으나

 

分과 偏全을 대립적으로 설명한 것은 잘못이라 하여, 분과 편전을 일관된 논리로 파악하였다.

 

문집으로는 『日新齋集』이 있다.  

 

 

(121)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순조 24)∼1904(광무 8).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皋). 경상남도 진주 출신.

 

아버지는 동몽교관에 증직된 광식(匡植)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석신(錫信)의 딸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1883년(고종 20)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1902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성리학적 처지에서 기정진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적극 지지하여 많은 연구를 거쳐

 

기정진에게 질문하자, 기정진은 81세 때 이에 대한 답설로 〈외필 猥筆〉 1편을 지었는데,

 

그 뒤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연재학파(淵齋學派)로부터 성리학의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월봉산(月峰山) 밑에 취수정사(取水精舍)를 짓고 후진교육에 전념하면서

 

최익현(崔益鉉정재규(鄭載圭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한말의 급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부정척사론 扶正斥邪論〉을 지어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였다.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고문집≫ 20권 10책이 있다. 

 

 

  

 

東國道學의 源流圖 (가나다 순)

 

姜翼-介菴-(39)

郭鍾錫-俛宇-(54)

權 近-陽村-(11)

權 溥-菊齋-(2)

權尙夏-遂巖-(79)

權哲身-鹿庵-(69)

金 集-愼獨齋-(77)

金宏弼-寒喧堂-(17)

金大有-三足堂-(31)

金東鎭-石圃-(52)

金邁淳-臺山-(104)

金誠一-鶴峰-(44)

金叔滋-江湖-(15)

金信謙-巢-(87)

金安國-慕齋-(21)

金亮行-止菴-(91)

金宇顒-東岡-(37)

金元行-渼湖-(86)

金偉材-迷菴-(83)

金麟厚-河西-(22)

金馹孫-濯纓-(30)

金長生-沙溪-(76)

金正黙-過齋-(105)

金宗直-畢齋-(16)

金昌翁-三淵-(89)

金昌協-農巖-(85)

金平黙-重菴-(94)

金興洛-西山-(51)

奇大升-高峰-(43)

奇宇萬-松沙-(117)

奇正鎭-蘆沙-(116)

吉 再-冶隱-(6)

南漢朝-損齋-(49)

盧 縝-(29)

盧友信-(28)

柳世鳴-寓軒-(59)

李 栽-密庵-(47)

朴聖源-謙齋-(111)

朴孫慶-南野-(62)

朴胤源-近齋-(97)

朴忠佐-恥菴-(8)

朴弼周-黎湖-(90)

白頣正-彛齋-(13)

徐敬德-花潭-(25)

成 渾-牛溪-(20)

成守琛-聽松-(19)

孫仲暾-愚齋-(32)

宋啓幹-秋陽-(113)

宋達洙-守宗齋-(107)

宋來熙-錦谷-(114)

宋明欽-轢泉-(112)

宋秉璿-淵齋-(108)

宋秉珣-心石-(109)

宋時烈-尤庵-(78)

宋翼弼-龜峰-(84)

宋俊吉-同春堂-(81)

宋穉圭-剛齋-(106)

辛 藏-德齋-(14)

申碩蕃-百源-(61)

安 珦-晦軒-(1)

安鼎福-順庵-(71)

吳 健-德溪-(36)

吳允常-寧齋-(101)

吳熙常-老洲-(102)

禹 倬-易東-(7)

柳 袗-修巖-(57)

柳成龍-西厓-(55)

兪莘煥-鳳棲-(103)

柳尋春-江皐-(64)

柳元之-拙齋-(58)

柳疇睦-溪堂-(65)

柳重敎-省齋-(95)

柳致明-定齋-(50)

柳後章-主一齋-(60)

李 穡-牧隱-(5)

李 瑀-松齋-(34)

李 珥-栗谷-(75)

李 瀷-星湖-(68)

李 縡-陶菴-(110)

李 瑱-東菴-(10)

李 滉-退溪-(41)

李穀-稼亭-(4)

李端相-靜觀齋-(88)

李象靖-大山-(48)

李彦廸-晦齋-(33)

李延慶-灘叟-(24)

李友信-睡山-(92)

李齊顯-益齋-(3)

李兆年-梅雲堂-(12)

李之菡-土亭-(26)

李震相-寒洲-(53)

李恒老-華西-(93)

李玄逸-葛庵-(46)

任聖周-鹿門-(115)

任憲晦-鼓山(99)

張顯光-旅軒-(73)

張興孝-敬堂-(45)

田 愚-艮齋-(100)

鄭 逑-寒崗-(66)

鄭 琦-栗溪-(119)

鄭 澈-松江-(23)

鄭 澔-丈巖-(82)

鄭經世-愚伏-(56)

鄭夢周-圃隱-(9)

丁若鏞-茶山-(70)

鄭汝昌-一蠹-(27)

鄭義林-日新齋-(120)

鄭載圭-老栢軒-(118)

鄭宗魯-立齋-(63)

趙 穆-月川-(42)

曺 植-南冥-(35)

趙光祖-靜菴-(18)

趙性家-月皐-(121)

趙宗道-大笑軒-(38)

崔永慶-守愚堂-(40)

崔益鉉-勉菴-(96)

韓元震-南塘-(80)

許 穆-眉叟-(67)

許 傳-性齋-(74)

洪直弼-梅山-(98)

黃德吉-下廬-(72) 

출처 : 한국참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融芝(주정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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