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낙포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
1332(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이고, 할아버지는 영후(永煦)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년(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 구신이며, 가문이 귀하고 높았으며 마음이 청고해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결단하였다. 대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제정공 신효창(齊靖公 申孝昌)
?∼1450(세종 3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조선 개국 당시 음관으로서 사헌시사(司憲侍史)에 올랐으며, 상장군에 천거되었다. 1394년(태조 3)에 호조전서(戶曹典書)의 직책을 맡았고, 1396년에는 대사헌이 되고 태조가 북행(北幸)할 때에 동행하였다. 1403년(태종 3)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404년 충청도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충청도에서 1년간 있으면서 사욕을 버리고, 선정을 행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405년 동지총제(同知摠制)의 직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고, 1418년 봄에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에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무주로 귀양갔다. 7년간의 귀양생활을 마치고 1425년(세종 7)에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의 손녀가 왕자와 결혼하게 되자 고신(告身)을 환수받았다. 시호는 제정(齊靖)이다.
익원공 김사형 묘소 아래에 있는 김승(金陞)의 단소
익원공 김사형 재실-낙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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