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와 강설(南窩 姜渫)
조선 후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 할아버지는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강부(姜符)이고, 아버지는 군자감 참봉 강해로(姜海老)이다.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아들로 강여구와 강여호를 두었다.
강설(姜渫)[1583~1651]은 1583년(선조 16) 지금의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에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터득하고 학문이 높아 사림이 추중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후 1616년 대과에 응시하러 상경하던 중 과거 시험장이 부정으로 얼룩졌다는 소문을 듣고 “과거가 사람을 욕되게 한다. 청백리의 후예로서 시험에 응할 바가 아니다.”라며 그 길로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25년(인조 3)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廬墓)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창의(倡義)하여 성이 함락되자 고향에서 김산 기동[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으로 은거하였다가 뒤에 강평[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으로 다시 옮겼다. 1634년(인조 12)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김산향교의 명륜당과 대성전을 중수하는 데 주역으로 일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작고하였고, 유훈을 받은 아들이 뜻을 이루었다.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있다.
강설의 아들들이 김산향교의 중수를 마침으로써 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김천의 흥학(興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부자의 문덕을 추앙하던 안동 병산서원장 이제를 비롯한 영남 유림 555명의 발의로 1804년(순조 4)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에 자동서원(紫東書院)이 세워졌다.
남와 강설 묘소 전경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㦿)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강여호(姜汝㦿)[1619~1683]는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원헌납·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사헌부집의·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고, 1675년(숙종 1) 홍문록에 선발되어 예장원판결사를 지냈다. 진주목사, 나주목사, 횡성부사, 종성부사를 거치면서 백성의 소송을 공정하고 바르게 처리하여 현민을 덕으로 교화하여 백성들이 감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횡성부사로 재임할 때에 집안에 혼사가 있어 쌀 넉 섬을 변통해 달라는 전갈을 받고 “사사로운 내 집의 결혼 비용에 국고를 덜 수는 없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위해 애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왕에게는 극간을 서슴지 않았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왕의 직언에 응해 시폐(時弊)에 대해 수천 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 소지품이 침구(寢具)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년에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김산향교 중건에 힘써 고장의 흥학을 육영하였다. 1683년(숙종 9)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있으며, 이헌경(李獻慶)이 비문에 찬하였다.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에 아버지 강설과 강여호를 추향하는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또한 강여호는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에 위치한 자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기재 강여호 묘소(전)와 남와 강설 묘소(후)
재실 모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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