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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북 의성]밀양박씨 찬성공 박신생(贊成公 朴信生) 묘역

장안봉(微山) 2013. 1. 21. 00:26

박신생(朴信生)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부친은 박침(朴忱)이며, 중종 대에 선전관(宣傳官)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박영(朴英)이 그의 고손이다.

1429년(세종 11) 첨총제(僉摠制)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경창부윤(慶昌府尹)호조참판(戶曹參判)호조우참판(戶曹右參判)호조좌참판(戶曹左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34년(세종 16)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에 천추사(千秋使)중국에 다녀왔다. 1435년(세종 17)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재직하던 중 선위사(宣慰使)황주(黃州)평양(平壤)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437년(세종 19)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고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있으면서 기우(祈雨)에 공을 세워 왕이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1440년(세종 22)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사후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밀양박씨 찬성공 박신생 묘역 전경

 박신생 묘소 전경

봉분의 크기가 일반 묘에 비해 많이 커서 문인석이 왜소해 보인다

 

 박신생 묘소에서 바라본 박호문 묘소-박호문은 박신생의 아들이다

 

 

 

 

 

 

 

 

 

정무공 박호문(貞武公 朴好問)

 

?∼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무신.

 

1419년(세종 1)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1430년에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직첩을 삭탈당하였다. 1433년 직첩이 환급되고, 2월에 전 소윤으로서 호군 박원무(朴原茂)와 함께 함길도 변경에 출몰하는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의 실정과 파저강(婆猪江)일대의 산천·도로·촌락의 대소를 정찰하고 돌아와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파저강일대의 여진을 정벌하였다.

6월에는 봉상시윤(奉常寺尹)이 되었으며 8월에 대호군을 지냈다. 1434년에는 상호군으로서 겸사복윤(兼司僕尹)이 되었다. 1436년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使)가 되어 야인의 변경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1440년 회령절제사였을 때 야인과 교결(交結 : 교류하여 연결함)하여 형제를 칭하고 군신간을 이간시키고 여진의 세력이 커지자 병을 칭하고 군무를 태만한 죄로 8월에 장(杖) 100에 처해지고, 여연(閭延)으로 유배되었다.

1447년 삭주절제사(朔州節制使)로 발탁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 다음해에는 진하사(進賀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평안좌도 도절제사에, 다음해에는 평안우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에 의하여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이징옥(李澄玉)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징옥에게 살해되었다. 1454년 정월, 의정부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박호문 묘소 전경

 

 

 

 

 

 

 

 

 

 

 

 

 박신생 묘소 앞의 박돈인 묘소 전경

 

 

 박돈임 묘소 석물

문인석인지 동자석인지 눈웃음 짓는 얼굴이 귀엽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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