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망주석(望柱石) 만시 9수와 묘도문자 2종

장안봉(微山) 2022. 7. 22. 19:52

작성자 2022717文學博士 金周富 수정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1452~1516) 묘표(墓表, 盧公弼 ) 묘갈명(申用漑 ) 蓮潭李世仁墓 在中東面 洛江東岸; 子左贊成 沆 墓 在塋右.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1452~1516)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원지(元之), 호는 연담(蓮潭)이다.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항(李沆)의 아버지이다. 부제학(副提學)ㆍ황해 감사(黃海監司)ㆍ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냈으며, 곧은 성품으로 사림의 명망을 얻었다. 조선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이다.

 

挽詩九首

慕齋 金安國, 二樂亭 申用漑, 交城 盧公弼, 盅齋 崔淑生, 二相 李長坤, 文城 柳洵, 木溪 姜渾, 止亭 南衮希樂堂 金安老.

 

우측

柳詢, 南衮, 金安老, 李長坤, 金安國

 

9-1

문성(文城) 류순(柳詢, 1441~1517)

嶺南翹楚儘多才 樸直淸獨見推 金馬玉堂身遍到 讜言高議世/

無疵 百齡簪笏人非老 今龍蛇夢忽悲 猶幸傳經留一子 終期黼/

黻贊 明時 文城府院君 柳洵

 

嶺南翹楚儘多才 영남은 인재 보고 재주 있는 이 많아

樸直淸脩獨見推 곧고 맑은 행실 그대 유독 명망 받아

金馬玉堂身遍到 금마와 옥당의 관직 두루 거쳤나니

讜言高議世無疵 곧고 높은 의론 세상에 흠잡지 못해

百齡簪笏人非老 한평생 벼슬살이 아직 늙지 않았건만

龍蛇夢忽悲 올해 용사의 일 문득 슬픈 꿈꾸었네

猶幸傳經留一子 다행히도 글 전한 아들 하나 남겼으니

終期黼黻贊明時 훌륭한 문장으로 밝은 시대 도우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류순(柳洵, 1441~1517)

 

9-2

지정(止亭) 남곤(南衮, 1471~1527)

夙昔儒林幹 治平諫爭臣 群兒多側目 孤憤欲忘身 時望爭歸/

子 榮名獨後人 一官逸議 兩鬢已霜新 弘文館大提學 南衮/

 

夙昔儒林幹 예전에는 유림(儒林)의 간성이었고

治平諫爭臣 평화로운 조정에서 간쟁하는 신하였네

群兒多側目 여러 아이들은 많이들 눈을 흘겼지만

孤憤欲忘身 외로운 충분은 자신을 잊으려 하였네

時望爭歸子 당시 명망은 어찌하여 자식에게 돌렸고

榮名獨後人 영광스런 명성은 오직 남에게 양보했네

一官叅逸議 한 번 관직에 나아가 일의(逸議)에 참여니

兩鬢已霜新 양쪽 귀밑엔 수염과 살쩍이 이미 희어졌네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남곤(南衮, 1471~1527)

 

 

9-3

二相 李長坤

哀我李參議 視我如骨肉 吾亦去毛皮 事之猶伯叔 公家有幹蠱 是我生同甲/

結髮托金蘭 道義相磨琢 平生倚麻蓬 持己有繩墨 名途咸後先 患亂相匍匐 白/

首契愈密 通家義益篤 公常是自 不言而得得 謂焉享期頤 相將保此樂 一疾遞/

生災 天不遺古直 同朝誰不慟 我淚更沾臆 刑曹判書 李長坤/

 

哀我李參議 슬프도다 우리 이 참의공이여

視我如骨肉 나를 피붙이처럼 대우하였네

吾亦去毛皮 나 또한 겉치레 던져 버리고

事之猶伯叔 백부와 숙부처럼 섬겼었네

公家有幹蠱 공의 집안 훌륭한 아들 있어

是我生同甲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네

結髮托金蘭 성년에 금란지교를 맺어서

道義相磨琢 도의로 서로 절차탁마를 했네

平生倚麻蓬 평생 삼과 쑥대처럼 의지하며

持己有繩墨 몸가짐에는 법도가 있었네

名途咸後先 벼슬길에는 앞서고 뒤서고

患亂相匍匐 어려울 땐 서로 도와주었네

白首契愈密 백발 되어서는 더욱 친밀하여

通家義益篤 집안 교분이 더욱 두터웠네

公常是自 공은 항상 이것을 자부하여

不言而得得 말을 안 해도 마음 통하였네

謂焉享期頤 백 살 될 때까지 오래 살아

相將保此樂 이 즐거움 함께 하자 하더니

一疾遞生災 한 번 난 병이 곧 재앙 되어

天不遺古直 하늘이 올곧은 이 데려갔네

同朝誰不慟 조정에 누군들 애통해 않으리

我淚更沾臆 나의 눈물 다시 가슴을 적시네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장곤(李長坤, 1474~1519)

 

 

9-4

김안로(金安老)

??跡箕()? 日 論照玉署 時 餘兪承聲顔 樂而仰襟朝 建必從人 笑 披肝被/

主知 大施終期待 天道從(?)參差 同副承旨金安老/

 

김정민 박사 교정본

()跡箕都日 論思玉署時 顧喩承警欬 樂多仰襟期 違世從人笑 披肝被/

主知 大施終莫侍 天道信參差 同副承旨 金安老/

 

黜跡箕都日 평안도에 출적되어 있던 시절

論思玉署時 예문관에서 학문을 토론하던 때

顧諭承警欬 돌아보고 유시할 때 말씀을 받들었고

樂多仰襟期 즐거움이 많으니 금기를 추앙하였네

違世從人笑 세상과 어그러져 남의 비난을 받았고

披肝被主知 간담을 드러내어 임금의 알아줌을 입었네

大施終莫侍 큰 경륜은 끝내 펼쳐보지 못했으니

天道信參差 하늘의 이치 참으로 어긋나구나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안로(金安老, 1481~1537)

 

*箕都日: 기도(箕都)는 평양(平壤)의 이칭으로, 이 지역은 옛날 기자(箕子)가 승지(勝地)인 이곳을 도읍으로 정한 이래로 있어온 곳이란 의미이다. 신유년(1501)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에 제수되었다. 대동도는 평안도(平安道)에 있던 역참이다.

*도유우불(都兪吁咈) : 도유(都兪) : 도유우불(都兪吁咈)의 준말이다. 도유(都兪)는 찬성, 우불(吁咈)은 반대를 뜻하는 말로, ()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할 때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기탄없이 개진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뜻이 맞아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것을 뜻한다.

*세전 위에서 분명하게 논사를 하실 텐데(細氈論思洞) 논사(論思)는 임금이 학사(學士)나 중신(重臣)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일을 말한다.

*옥서(玉署) : 예문관(藝文館).

*공자(孔子)께서 유익한 좋아함이 세 가지이고 손해되는 좋아함이 세 가지임을 말씀하시면서 예악의 절도를 분별하기를 좋아하며, 남의 선함을 말하기 좋아하며, 어진 벗이 많음을 좋아하면 유익하다.[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라고 하였다. 論語 季氏

*半世金蘭同臭味一條冰玉仰襟期

한 동이 술로 담소하며 속마음 열어 보이니 / 一樽談笑披肝膽

평범한 한묵의 인연이 아니로구나 / 不是尋常翰墨緣

두 분이 함께 만날 때면 / 마음속 생각을 토로했네 / 追隨當日 吐心披肝

*머리 조아려 정성껏 속마음 토로하매 / 叩顙披肝呈寸誠

 

9-5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群賢彙進中興初 首起湘累薦石渠 幾順下風承緖論 輒從時輩借/

虛譽 華要歷任官猶屈 淸素存心德有餘 一遽成千古隔 攀輀難/

禁涕漣如 右副承旨 金安國/

群賢彙進中興初 중흥 초기 훌륭한 이들 등용할 때

首起湘累薦石渠 가장 먼저 유배지에서 추천되었네

幾順下風承緖論 풍모 바라 가르침 받은 지 얼마인가

輒從時輩借虛譽 나는 시배들 따라 헛된 명예 빌렸네

華要歷任官猶屈 청요직 거치고도 높은 관직 못 올라

淸素存心德有餘 맑은 본성 마음에 두니 덕성 넉넉하네

一朝遽成千古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攀輀難禁涕漣如 상여 부여잡으니 하염없이 눈물 흘러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좌측

盧公弼, 崔淑生, 姜渾, 申用漑

9-6

交城 盧公弼

夫子眞儒者 名聲自少時 歷敡多諫職 出入侍經 直性士/

林許 眞心聖主知 如何壽位薄 天道亦參差 交城府院君 盧公弼

 

夫子眞儒者 그대야말로 참다운 유학자니

名聲自少時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났지

歷敡多諫職 여러 번 간관 벼슬 역임하고

出入侍經 경연에 드나들며 임금 모셨네

直性士林許 강직한 성품 사림이 인정했고

眞心聖主知 진심은 임금께서 알아주셨네

如何壽位薄 수명과 지위 어찌 그리 박한가

天道亦參差 천도 역시 고르지 못하다네

교성 부원군(交城府院君) 노공필(盧公弼, 1445~1516)

 

9-7

목계(木溪) 강혼(姜渾, 14641519)

我同年友 古藤陰下塵 富官惟讜直 到老更淸貧 有子一非/

少 與人都是眞 匡山讀書處 却憶最傷神 晉川君 姜渾

 

我同年友 애석하게 나와 같이 급제한 벗

古藤陰下塵 등나무 그늘 아래 먼지 되었네

當官惟讜直 관직 맡을 땐 곧은 말로 간언해

到老更淸貧 늙어서는 청빈한 삶을 살았지

有子一非少 아들 하나 열 자식 안 부러워

與人都是眞 사람들과 진심으로 대하였네

匡山讀書處 젊을 때 독서 하던 저 광려산

却憶最傷神 문득 떠오르니 가슴 아파오네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 14641519)

 

9-8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 1457~1520) 慶州 子眞 蠱齋, 盅齋

鵬程初接武 玉署久連翹 慶業留賢胤 忠言在聖朝 笑談猶昨日/

痛哭忍今朝 衰病那能久 冥遊亦未遙 成均館大司成 崔淑生/

 

鵬程初接武 벼슬길에서 처음 서로 만난 뒤로

玉署久連翹 홍문관에서 오래도록 함께 있었네

慶業留賢胤 경사와 가업 어진 아들에게 남고

忠言在聖朝 충성ㅅ런 말 성스러운 조정에 있네

笑談猶昨日 서로 이야기 나눈 일 어제 같은데

痛哭忍今朝 오늘 아침 이 통곡을 어찌 견디랴

衰病那能久 늘고 병든 몸으로 어찌 오래 살리

冥遊亦未遙 저승에서 함께 노닐 날 멀지 않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최숙생(崔淑生, 1457~1520)

 

9-9

이요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 1463~1519)

達人任去來 安得而處順 萬類摠隨化 流芳實賢俊 元之是吾友 於道早篤信/

性稟元直諒 氣岸更勁峻 立身本經術 才譽日登進 天衢雲路迥 鵬翼摶風迅/

薇垣與府 讜論朝綱振 斗舌轉召棠 盤錯恢游刃 入參銓注議 方皐辨駑/

駿 生平有執守 內顧無悔吝 如何望希年 二豎來作疢 終然天不遺 前堂出素殯/

善積還食報 餘慶在祚胤 門高容駟蓋 幹蠱儘忠藎 公逝猶不亡 夜臺藏瑜瑾 哭/

挽朋舊情 耿耿憑誰訊 右議政 申用漑/

 

達人任去來 달인은 죽고 삶 자연에 맡기니

安得而處順 상황에 편히 하고 순리 따르네

萬類摠隨化 만물은 하늘의 조화 따르는 법

流芳實賢俊 그 이름 전하리니 뛰어난 인물

元之是吾友 원지는 나와 친구로 지냈는데

於道早篤信 일찍부터 독실하게 도를 믿었네

性稟元直諒 성품이 본래 곧고도 진실하였고

氣岸更勁峻 기개 더욱 굳세고 우뚝하였네

立身本經術 입신은 경술에 근본을 두었으며

才譽日登進 재주와 명성이 날로 높아갔다네

天衢雲路迥 조정에서 좋은 벼슬자리에 올라

鵬翼摶風迅 붕새처럼 신속히 바람을 탔네

薇垣與사간원과 사헌부에 근무할 때는

讜論朝綱振 곧은 말로 조정의 기강 진작시켰고

斗舌轉召棠 승지에서 행해도 감사로 나가서

盤錯恢游刃 복잡하게 얽힌 일 잘 처리하였네

入參銓注議 이조 참의로 이재를 추천할 때는

方皐辨駑駿 방고처럼 준마와 노둔한 말 구분했네

生平有執守 평생 동안 굳게 절개를 지켜서

內顧無悔吝 내면을 돌아보며 근심이 없었네

如何望希年 어찌하여 일흔 나이 눈앞에 두고

二豎來作疢 병마가 찾아와서 고질명이 되어

終然天不遺 마침내 하늘이 데리고 떠나가서

前堂出素殯 당 앞에서 발인을 하게 되었는가

善積還食報 착한 일 한 사람에 보답한다더니

餘慶在祚胤 남은 경사 자손에게 복이 되었네

門高容駟蓋 가문 번성하여 고관이 배출되고

幹蠱儘忠藎 아들이 가업 이어 충신을 다했네

公逝猶不亡 공 돌아가셔도 가신 것 같지 않아

夜臺藏瑜瑾 무덤 속에 훌륭한 재주 감추었네

哭挽朋舊情 만사로 곡하는 벗의 옛정이니

耿耿憑誰訊 끝없는 이 그리움 누구에 말하리

우의정(右議政)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손암집(損菴集): 손암(損菴) 조근(趙根, 1631~1690)의 문집으로 조카 조영석(趙榮祏)이 편집 간행한 것으로 잡록 풍계만록(楓溪漫錄)에 망주석에 새겨진 만사에 대한 기록으로 尙州萬景山西五十洞勝洞東 有李世仁 墓望柱石 刻挽詩九首 卽金慕齋安國 申文景用漑 盧交城公弼 崔盅齋淑生 李二相長坤 柳文城詢 姜木溪渾 及 金安老 所作 而皆其手筆也 字畫宛然 正德丙子立也(상주 만경산(萬景山) 서쪽 오십리 승동동(勝東洞)에 자리 잡은 이세인(李世仁, 1452~1516) 묘소 앞 망주석에는 만시 아홉 수가 새겨져 있다. 즉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문경(文景) 신용개(申用漑, 1463~1519), 교성(交城) 노공필(盧公弼, 1445~1516),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 1457~1520), 학고(鶴皐) 이장곤(李長坤, 1474~1519), 문성(文城) 류순(柳洵, 1441~1517), 목계(木溪) 강혼(姜渾, 14641519), 지정(止亭) 남곤(南袞, 1471~1527), 안락당(顔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지은 것이다. 모두 손수 쓴 글씨로 자획이 여전히 또렷하다. 정덕 병자년(1516)에 세웠다.)라 적고 있다.

 

조근(趙根, 1631~1680), 損菴集 卷7, 雜錄, 楓溪漫錄

尙州 萬景山西五十洞 勝東洞 有李世仁墓望柱石刻 挽詩九首卽金慕齋安國申文景用漑盧交城公弼崔盅齋淑生李二相長坤柳文城洵姜木溪渾及南衮金安老所作而皆其手筆也字畫宛然正德丙子立也

 

조근(趙根, 1631~1680), 損菴集 卷8, , 上州 洛江東岸 勝東洞有古直臣李世仁墓卽沆之父也望柱石刻挽詞皆一時名人所作筆亦手蹟也有南衮詩詩格高書法妙眞是罕世奇才而惜其姦兇爲千古罕儔之小人摩挲石刻便起懲創之意詩以識之

筆法秦丞相文章宋半山有才如許備爲性又何奸臭穢流千載古今同一般扶藜看石刻惆悵己庚間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1473~1548)

許國身方倦 銓衡迹已陳 百年惟直諒 萬化一誠純 瑞世雲間鶴 生兒天上麟 甘文首邱地 祭社在斯人

 

許國身方倦 나라 위해 헌신한 몸 한창 피곤해

銓衡迹已陳 이조에서 활동한 행적 옛일 되었네

百年惟直諒 일생동안 오직 곧고도 순수한 행실

萬化一誠純 만사에 한결같이 진실하고 순수했네

瑞世雲間鶴 상서로운 세상의 구름 속 흰 학 같아

生兒天上麟 나온 아들 하늘 위 기린 같은 존재

甘文首邱地 감문(甘文:金泉)이 선조들이 묻힌 고향 땅이니

祭社在斯人 사직에 제사 지낼 이 바로 이분이네

 

千歲王喬墓 飛昇白日間 山河空寂寞 風月更週殘 考德人無所 淸詩鬼亦慳 鄴中諸子裏 不復見波瀾

 

千歲王喬墓 천년 지내 온 왕교의 무덤이여

飛昇白日間 태양 위로 날아간 영혼은 한가로워

山河空寂寞 신하가 텅 비어 적막하기 그지 없고

風月更週殘 풍월도 더욱 형체와 빛을 잃었다네

考德人無所 덕을 찾으려 한들 찾을 사람 없고

淸詩鬼亦慳 청아한 시는 귀신 역시 애지중지하리

鄴中諸子裏 업중(鄴中)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묘표(墓表)

 

18·-세인(世仁·-원지(元之·-연담(蓮潭·文科 黃海道觀察使 吏曹參議 贈 左贊成·後配 贈貞敬夫人廣州安氏合祔·1452-1516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산 21번지-勝嶝谷)

 

이조참의(吏曹參議)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묘표(墓表)

黃海道觀察使 吏曹參議 贈 左贊成

後配 贈貞敬夫人廣州安氏合祔

公諱世仁字 元之 號蓮潭 星山望族 公登第於成化丙午 逮事成廟 歷燕山朝 以及我聖明 筮仕始終 凡三十一年 公持身以簡 莅官以勤/

平生歷敡 極一時淸要 而爲侍從 諫諍之職 居多焉 性亦質直 疾惡如讎 遇事敢言 自成廟朝 蹇然有直聲 而公見忤於燕山主 初謫羅州/

再謫金山 今上之卽位也 以公能直言 卽公配所 特授司諫 旋入弘文館 歷典翰 直提學 丁卯夏仍陞副提學 當靖國之初 剗革廢朝獘政/

及論列柳子光姦邪 其論多出於公 由是士林 益爲歸望 皆以謂當膺超授 而公徘徊於三品班 或爲參議 或爲判決事 至於副提學 大司/

諫 則凡三出入 時論悶然 久滯也 己巳擢公爲左承旨 未幾因事左遷 壬申出爲黃海監司 亦以病遞還 終于吏曹參議 享年六十五 公之/

卒在正德十一年丙子 四月十六日 其葬在是年九月初四日也/

交成府院君 盧公弼 撰/

 

 

有明朝鮮國黃海道觀察使李公之墓

公諱世仁, 字元之, 號蓮潭, 星山望族. 公登第於成化丙午, 逮事成廟, 歷燕山朝, 以及我聖明, 筮仕始終 凡三十一年. 公持身以簡 莅官以勤/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세인(李世仁)의 묘표(墓表)

공의 휘()는 세인(世仁, 1452~1516)이고, 자는 원지(元之)이고, 호는 연담(蓮潭)이며 성산(星山)의 망족(望族)이다. 공이 성종(成宗) 17년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묘(成廟)를 섬기고, 연산조를 거친 뒤 성스러우신 우리 종중 임금을 모시며, 벼슬을 시작하여 마치기까지 31년에 이르렀다. 공은 몸가짐을 간소하게 하고 관무(官務)에 임하면 부지런하였다.

 

平生歷敡, 極一時淸要, 而爲侍從, 諫諍之職, 居多焉. 性亦質直, 疾惡如讎, 遇事敢言. 自成廟朝, 蹇然有直聲, 而公見忤於燕山主, 初謫羅州,/ 再謫金山.

평생 관계를 경력하는데 한때 맑고 요긴한 자리를 다하여, 시종과 간쟁하는 직에 많이 있었다. 성품도 또한 곧은 바탕에 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여기며, 일에 임하면 감히 말을 하였으니, 성묘(成廟) 조정으로부터 곧은 말을 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연산주(燕山主)의 거슬림을 받아 처음 나주(羅州)로 유배당하였다가 두 번째로 김산(金山)으로 유배되었다.

 

今上之卽位也, 以公能直言, 卽公配所, 特授司諫. 旋入弘文館, 歷典翰, 直提學. 丁卯夏, 仍陞副提學. 當靖國之初, 剗革廢朝獘政,/ 及論列柳子光姦邪, 其論多出於公. 由是士林, 益爲歸望, 皆以謂當膺超授, 而公徘徊於三品班, 或爲參議, 或爲判決事. 至於副提學 大司/. 則凡三出入時論, 悶然 久滯也.

지금 중종 임금이 왕위에 등극하자 공이 곧은 말을 잘 한다하여 즉시 공을 적소에서 사간(司諫)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얼마뒤 홍문관에 들어가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정묘년(1507) 여름에 부제학에 올랐다. 정국(靖國)의 처음을 당하여 폐주 연산군의 낡은 정책을 가다듬어 개혁하고,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한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논박하였다. 그 의논이 거의 공에게서 나온지라 이로 말미암아 사림에서 더욱 선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모두 이르기를 차서를 밟지 않고 제수함에도 공이 삼품(三品) 반열을 오르내리며, 혹은 참의가 되고 혹은 판결사가 되었다. 부제학과 대사간에 이르렀다. 무릇 세 번이나 들락날락하니, 시론이 오래 체직(滯職)됨을 민망스럽게 여기더라.

 

己巳, 擢公爲左承旨, 未幾因事左遷. 壬申出爲黃海監司, 亦以病遞還. 終于吏曹參議, 享年六十五. 公之/, 在正德十一年丙子, 四月十六日, 其葬, 在是年九月初四日也./

交城府院君 盧公弼 撰./

기사년(1509)에 공이 뽑히어 좌승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임신년(1512)에 외직으로 나아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가 병 때문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이조 참의로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공은 정덕(正德) 11년 병자년(1516) 416일에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그해 94일에 있었다.

교성 부원군 노공필(盧公弼, 1445~1516)은 짓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신도비(神道碑)

星州姓譜李爲最著在高麗朝有諱能一者以功名顯官至司空後至諱汝良才學優贍以能直言選授司諫院正言早卒有兄二人曰汝忠汝信皆策名科第母夫人呂氏以三子登科封爵一時榮之正言有子曰諱時官至山陰縣監贈安東大都護府使是生諱孝純授武職宣略將軍贈承政院都承旨承旨生諱璧成均進士贈吏曹參判是爲公考自正言至進士公官雖不達皆以文學著名進士公之配安東權氏林川郡事諱需之女漢城府尹諱遜之孫亦名閥世家

성주 성보(星州姓譜)에 이씨(李氏)가 가장 저명하기는 고려조에 있어 能一이라는 분이 계시었는데, 공명(功名)과 들 난 벼슬로서 사공(司空)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여량(汝良)이라는 분에 이르러 재덕과 학식이 뛰어나게 넉넉하였으며, 곧은 말을 잘한다 하여 뽑히어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일찍이 죽고 두 이 있었는데, 여충(汝忠, 여신(汝信)이라 부르니 다 과제(科第)에 책명(策名)하였다. 어머니 탁()씨가 세 아들이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에 해 짐으로서 한때 영화롭게 지내시다. 정언의 아들이 있으니 ()라 벼슬은 산음현감(山陰縣監)이며, 사후(死後)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증직(贈職)되다. 이분의 아들 효순(孝純)이라, 무직(武職)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제수 되었으며, 승정원(承政院도승지(都承旨)를 증직하였고, 승지의 아들의 는 벽()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이조참판을 증직하였다. 이분이 바로 의 선고(先考)이라, 정언으로부터 진사공에 이르기 까지 벼슬이야 비록 영달(榮達)하지 못하였으나 모두 문학으로서 저명(著名)하였으며, 진사공의 배()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임천군사(林泉郡事)()의 딸이오, 한성부윤에 는 손()의 손녀이며, 명벌세가(名閥世家)이다.

 

以景泰壬申月日生公公諱世仁字元之幼有至性早喪怙恃零丁孤苦沈沒鄕閭門戶幾不振篤志刻意不以家事自累游學京師蔚有聲望戰藝文場儕輩推爲先登而屢擧不中成化丙午公年三十有五始中司馬選又登龍榜人皆稱其久屈選補權知承文院正字累轉爲博士弘治壬子陞禮賓寺主簿歷軍資監主簿司憲府監察司諫院正言兼承文院校檢時成宗虛懷納諫方重選言官又以宦寺傳言中多有遺凡臺諫所奏竝令書啓公操筆立書辭直意盡往復論難應對不窮物論多之甲寅遷禮曹佐郞是年十二月成宗昇遐公以稽制郞凡喪制典故搜檢無遺應辦詳鍊事無稽缺拜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注官承文院校理時三公有缺卜相非其人公與諸僚力諫遞之

문종(文宗2년 임신(壬申월 일에 을 낳으니 는 세인(世仁)이요, 는 원지(元之)이며, 는 연담(蓮潭)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가졌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의지 할 곳이 없어서 시골에서 침몰(沈沒)함에 문호(門戶)가 거의 부진(不振)할 지경인데 도타운 뜻으로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애쓰며, 가사(家事)는 돌보지 않고 스스로 자주 경사(京師)에 유학하여 우뚝한 성망(聲望)이 있었고, 재능(才能)을 다투는 글 자리에서 제배(儕輩)들이 선등(先登)하리라고 말하였으나, 누차 과거(科擧)에 합격하지 못하다가, 성종(成宗17년 병오(丙午)의 나이 서른다섯에 비로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또 용방(龍榜)에 오르니 남들이 다 그 오래 글하더니 뽑히었다고 하였다.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으며, 여러 번 옮겼다가 박사가 되었다. 성종(成宗23년 임자(壬子)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올랐으며,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얼마 뒤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배수(拜受)하고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였다. 때에 성종(成宗)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하여 간()함을 받아 들였고 바야흐로 언관(言官)을 뽑고 또 환시(宦侍)들의 전언(傳言)중에 빠진 것이 많이 있으니 무릇 대간(大諫)의 아뢰는 바를 아울러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니 이 붓을 잡고 서서 쓰는데 말이 곧고 뜻을 다 하였으며, 왕복하는 논란(論難)과 응구(應口첩대(捷對)함이 궁하지 않으니 물론(物論)이 아름답다 하더라. 성종(成宗25년 갑인(甲寅)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뽑히었다. 이해 12월에 성종이 승하하시니 계제랑(稽制郞)으로서 모든 상제에 전고(典故)를 수색검안(搜索檢按)하고 응변(應辯)과 연사(練事)에 유실과 결함이 없었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배수(拜受)되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과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하였다. 때에 삼공(三公)의 자리가 비었는지라 복상(卜相)을 뽑는데 적임이 아님으로 이 모든 동료와 더불어 힘써 싸워서 이것을 갈아 치웠다.

 

丙辰拜禮曹正郞時方理成宗祔廟之儀禮曹官長喜得公爲郞事乃無欠戊午春轉掌樂院僉正拜司憲府掌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勘時奸臣柳子光因史局挑起禍端一時名士指爲朋黨恣行殺戮侍從臺諫亦多遠竄道路側目子光威勢益張無所顧忌嘗奉使北方採海錯傳驛供進以固恩寵公與同僚疏其姦邪諂諛盡其情狀雖不得竟置於罪士林稱快

병진(丙辰)년에 예조정랑에 배수 되었다. 때마침 성종의 부묘의(祔廟儀)를 행할 제 예조관장이 기꺼이 을 얻어서 낭()을 삼으니 일이 이에 결함이 없었는지라. 무오년 봄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전직 되었다가 가을에 사헌부장령지제교(司憲府掌令知製校)를 배수하고, 춘추관편수관승문원교감(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勘)을 겸하다. 때에 간신(奸臣유자광(柳子光)이 사국(史局-史官들이 역사를 초하여 쓰는 곳)으로 하여 화단(禍端)을 긁어 일으켜 놓고 한때의 명사들을 가리켜 붕당(朋黨)이라하며, 제 멋대로 살육(殺戮)을 자행(恣行)하고, 시종(侍從)과 대간(大諫)들을 또한 많이 멀리 귀양을 보내니 길거리에서 곁눈질을 하는지라 자광(子光)의 위세(威勢)가 더욱 벌어져서 돌아보아도 꺼리 낄 바가 없었으며, 일찍이 어명(御命)을 받들어 북부지방에 심부름을 가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구하여 역으로 전달하여 올려 바쳐서 은총(恩寵)을 굳게 하는지라. 이 동료들과 더불어 글을 올려 그 간사하고 아첨한 정상(情狀)을 다하였으되, 마침내 죄를 주는데 까지 얻지 못하였으나 사림(士林)에서 쾌()하다고 일컫더라.

 

己未陞內贍寺副正知製敎兼承文院參校庚申拜司諫院司諫時朝廷奉帝勑搜括海島逃民以田霖爲使選文臣有武才者爲之副海路險遠莫不憚行有勢力者雖贍武才皆巧爲謀避直講李坫以迂儒與選公言李坫不習弓馬恐誤國事時有一相屢被臺駁方懷嫌恨及聞是言托謂挾私論事啓請置罪燕山主震怒卽下臺諫于詔獄皆罪之窮推先發言謫公于羅州居一年遇赦放還公孤立危言觸怒權臣遠謫南荒士論悶鬱辛酉授大同道察訪甲子燕山主追怒前臺諫盡言逮公於詔獄決杖謫金山正德丙寅九月今上卽位推恩國內被謫臺諫竝皆登庸授公爲成均館直講未離謫所卽拜司諫院司諫俄拜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丁卯春陞直提學又論柳子光誤國奸邪之罪臺諫亦論執不置竟竄子光于遐裔陞副提學階通政未幾特拜刑曹參議移拜兵曹參議戊辰春拜司諫院大司諫

기미년에 내첨시 부정지제교(內瞻寺副正知製校)에 올라서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다. 경신년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에 배수되었으며, 때에 조정에서 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해도(海島)로 도망한 백성을 수색 할 제 전림(田霖)으로서 정사(正使)를 삼고 문신중에서 무예(武藝)가 있는자를 뽑아서 부사를 삼으려하니 바닷길이 멀고 험하여 가기를 꺼리지 않는이가 없는지라, 세력 있는자는 비록 무예가 넉넉하다 하더라도 다 교묘하게 꾀를 써서 피하거늘 직강(直講이점(李玷)이라는 실정에 어두운 선비를 뽑게 되었는데, 이 가로되 이점은 궁마(弓馬)에 익숙하지 못하여 저으기 국사를 그르칠까 하옵니다 하였더니 때마침 한 재상이 있어 여러번 대간의 반박을 받고, 바야흐로 혐의로 한()을 품고 있던 참에 미쳐 이러한 말을 듣고 빙자(憑藉)하여 이르되, 사심(私心)을 끼고 일을 논한다 하여 글을 올려 하니, 연산주 크게 성을내어 곧 대간을 옥으로 불러 들여서 모두 죄를 주라 하고 먼저 발언한 자를 추궁하여 나주(羅州)로 귀양을 보내고, 귀양살이 일년만에 용서를 받고 돌아왔다. 이 혼자서 바른말을 하여 권신(權臣)들의 노여움을 사서 멀리 남쪽 황무지에서 귀양살이를 하니 사론(士論)이 몹시 답답해하더라. 신유년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갑자년에 연산주의 성남이 전 대간이 함부로 주상께 말한다. 하여 좋아서 을 옥으로 불러서 장형(杖刑)을 치르고, 김산군(金山郡)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병인년 9월에 중종(中宗)이 등극(登極)하자 국내의 귀양살이 하는 대간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모두 등용할 때 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 제수하였다가 적소를 떠나기에 앞서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배수하고 잠깐 있다가 홍문관전한지제교(弘文館典翰知製校)를 배수하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게 하였다. 정묘년 봄에 직제학에 오르다. 또 유자광이 나라를 그르친 간사한 를 논박하니 대간도 또한 의논을 같이하여 자광을 먼 벽지로 귀양을 보냈다. 여름에 부제학이 되고 한급 올라서 통정(通政)이 되었다. 얼마 뒤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배수하고 겨울에 병조참의로 배수하고 무진년 봄에 사간원 대사간에 배수하였다.

 

是時朝廷中興未久事多因循草創燕山朝濫授官爵及靖國時原從濫資猶未改正公謂爵賞所以待賢能酬勳勞今庸常之人無功而冒占高爵非所以激礪士習遂與同僚累月力爭卒得允兪擇仍其可用之人而汰其宂重拜副提學公久侍經幄深懼不任求爲外補己巳夏出爲全州府尹政府啓李某宜在侍從保養君德不可遠置外邑遞爲僉知中樞府事尋拜掌隷院判決事又拜司諫院大司諫拜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庚午秋坐事遷僉知中樞府事壬申夏拜戶曹參議出爲黃海道觀察使勤謹職務盡心字撫勞瘁失調遂患疾?轉益沈綿乃辭職甲戌春遞爲僉知中樞府事轉拜吏曹參議自黃海來病常在己沈痼不差證勢漸緊百藥無效丙子四月十六日卒于家享年六十五以是年七月某日以禮窆于金山郡某里某坐某向之原金山是公桑梓鄕也公天性勁直秉心無私與朋友信處官事謹歷事三朝揚歷臺諫侍從二十餘年直言敢諫不顧一身之利害據古諷今期以誠意格君立朝三十餘年家無餘資

이때 조정이 중흥한지 오래 되지않아서 일이 구습(舊習)에 젖어있고 초창함이 많을뿐더러 연산조가 함부로 관작을 준것과 정국시(靖國時-中宗때에 朴元宗等 17反亂平定)에 그대로 쫒아 남자(濫資)함을 오히려 개정하지 않았는지라 이 이르되 ()과 상()은 어진사람과 유능한 사람을 우대함이요 공로자를 보수 할 바이어늘 이제 예사 사람이 아무 공로도 없이 높은 작위를 차지하여 범하였으니 이래서야 사기(士氣)의 풍습을 격려 할 바가 아니라하고 동료와 더불어 여러달을 두고 힘써 다투어 마침내 재가(裁可)를 얻어서 그 쓸만한 사람을 가려쓰고 필요치 않은 사람은 토태시켰다. 여름에 거듭 부제학을 배수하다. 이 오래도록 경악(經幄)을 뫼시다가 감내하지 못할까 깊이 두려워하여 외직을 구하였더니, 기사년 여름에 전주부윤이 되다. 정부에서 글을 올려 이세인(李世仁)은 마땅히 시종(侍從)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덕()을 도와 길러야 하오니 가히 먼 외읍에 두어서는 아니된다 고 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조금있다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배수하고 가을에 또 사간원 대사간을 배수하였다. 겨울에 승정원 좌승지로 배수하고 경연참찬관 수찬관을 겸하게 하였다. 경오년 가을에 일에 연좌되어 첨지중추부사에 옮겼다가 임신년 여름에 호조참의로 배수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감사가되어 직무에 근근(謹勤)하며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애무하느라고 지친 피로로 조리를 읽고 드디어 병환이 되어 점점더하여 짐으로 이에 사직을 하였다. 갑술년 봄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옮겨 이조참의에 배수되었다. 황해도로부터 병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병세는 깊어갈 뿐 차도가 있기는 커녕 점점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이라. 병자년 416일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이 65세라, 이해 칠월 모일에 김산군 모리, 모좌, 모향의 원에 예장(禮葬)하니 김산은 본래 부모가 살던고향이다. 의 천성이 굳세며 곧고 마음먹은 것이 사()가 없으며, 붕우와 더불어 신()이 있고 관사(官事)는 삼가서 처리 하였으며, 성종(成宗, 연산(燕山, 중종(中宗)의 삼조(三朝)를 거치도록 대간과 시종을 지내기 20여년에 곧은 말로 구테여 간하는데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옛일에 의존하여 이제를 간직하며, 성의로서 임금을 올바르게 하려고 기하였으며, 벼슬살이 삼십여년에도 집에 남긴자산이 없었다.

 

公之前夫人信川康氏蔚珍縣令諱應謙之女侍講院弼善諱愼之孫全州府尹李堰之外孫弘治庚申先公卒亦葬于金山郡有子曰沆登某年科有文名出入經帷憲臺今以刑曹參議遭憂生子弘時未成名後夫人廣州安氏父諱仲善尙衣院直長祖諱信司醞直長外祖柳自漢承文院判校有女二人皆幼旣葬公之胤嗣爲書屬于議政府右議政申用漑銘于神道欲昭公行治于後世用漑自未釋褐與公交好遂相心許至今敬而仰之知公之實最詳雖不忍銘公亦在所不敢辭嗚呼公平生無疾病神旺氣健人稱壽骨心誠事正位望亦大而年未鮐耇官不滿德遽乘大化痛哉幹蠱之重充閭之慶方遠而未艾天將以福後嗣而更大其門也必矣遂爲銘曰

의 전부인 신천강씨(信川康氏)는 울진 현령(蔚珍縣令諱 응겸(應謙)의 딸이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諱) ()의 손녀이며, 전주부윤(全州府尹이언(李堰)의 외손녀이다. 경신년에 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김산군에 입장하였다. 아들 항()은 무오년 문과에 오르니 문명(文明)이 있어 경악(經幄)과 대간을 나들다가 지금은 형조참의로서 엄친의 상()을 당하였고 손자에 수홍(守弘, 수견(守堅)이 있으나 아직 이름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후부인 광주안씨(廣州安氏)는 중선(仲善)인데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이요, 는 신()인데 사온직장(司醞直長)이오, 外祖는 유자한(柳自漢)인데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이다. 딸이 자매(姉妹)가 있으나 어리다. 장례 의 사자(嗣子)가 글로 써서 의정부우의정 신용개(申用漑)에게 신도비명을 부탁하여 의 행금치적을 후세에 길이 밝히고자 하니 용개가 벼슬을 하기 전부터 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마음을 터놓고 허여를 하던 터이라 이제까지 우러러 존경하였으니, 의 실상(實狀)을 이는데 가장 자세한지라 비록 차마 명()은 못하겠으나 도 또한 부탁이 있었던바 감히 사양하지 못할 지라. ! 슬프다. 이 평생에 질병도 없었으며, 정신도 왕성하고 기풍이 건장하여 남들이 모두 수골이라 하였고, 마음이 성실하고 매사에 바르며 위망(位望)이 크다 하였더니 나이 장수를 못하였고, 벼슬은 에 차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승화(乘化)하다니 아프도다. 간고지중(幹蠱之重)과 충여지경(充閭之慶)이 바야흐로 원대하며, 다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장차 후사에게 복으로서 다시 그 문호를 크게 할것이 반듯하리라. 드디어 하여 가로되

 

惟天於人福善以慶人食厥報壽年爵命猗乎元之吾久而敬受天賦畀全我善性事有職務心兼言行本之經術外內修正氣無累雜身不知病人期耆耇物望卿相天胡不憖二豎作妄位乏宰省年未朝杖乘化還原冥然吾喪彼蒼茫茫予奪難量于氏有後門慶自釀神錫祚胤蔚有衆望公猶不亡天厚陰騭蔚茲幽堂永世保吉

신용개(申用漑, 1463~1519), 二樂亭集 卷15, 碑碣, 吏曹參議李公墓碣銘.

오직 하늘이 선()한 사람을 복되게 함에 경사로서하고 사람이 그 갚음을 먹음에 하고 벼슬하기 마련이니 거룩하도다. 원지(元之-世仁)・・・ 내 오래 존경하였는지라 하늘에 받은 품성이 우리의 선성(善性)을 온전히 하였으며, 일에 직무가 있고 마음은 선행을 겸하였으며, 경술을 근본 삼고 안팎을 닦아 바르게 가지고 기는 누하고 잡됨이 없었으며 몸에 질병을 모르고 남들이 장수하기를 기대하였고 경상이 되기를 물망하였으니 하늘이 어찌 돌보지 않고서 병마가 망녕을 부리어 위()가 재보(宰輔)에 미치지 못하고 나이 아직 시기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혼()은 구름을 타고 화하였고 백()은 구원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어둠 속으로 나의 벗을 잃었으니 저 푸른 하늘이 아득하구나. 하늘이 주고 뺏는 것을 헤아리기 어렵도다. 우씨(于氏)에도 뒤가 있으니 문호에 경사가 스스로 빚어질 것이며, 신이 도와 아들을 복되게 하니 성하게 물망이 있도다 은 오히려 없어지지않았으며, 하늘이 두터이 음으로 보호하사 울울(鬱鬱)한 저 유당(幽堂)이여・・・ 영세토록 길함을 보전하소서.

 

서헌(洛西軒) 이항(李沆, 1474~153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좌찬성과 우의정을 지냈다.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호는 낙서(洛西) 또는 낙서헌(洛西軒), 자는 호숙(浩叔)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강직했으나, 말년에 심정(沈貞김극핍(金克愊)과 국정을 전횡하여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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