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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章 도읍풍수와 신앙풍수(都邑風水와 信仰風水)
第1節 都邑風水 槪要
第2節 都邑風水 實際
第3節 信仰風水의 몇가지 例
第1節 도읍풍수 개요(都邑風水 槪要)
1. 양기(陽基)와 양택(陽宅)
풍수(風水)가 이대분(二大分)되어 생자(生者)의 거소(居所)를 취급하는 양적(陽的)인 풍수(風水)와 사자(死者)의 거소(居所)를 다루는 음적(陰的)인 풍수(風水)로 나뉨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류법이다. 이때 음적(陰的)인 풍수(風水)를 음택풍수(陰宅風水)로 부르는데는 이의가 없으나 양적(陽的)인 풍수(風水) 호칭에는 양기(陽基)와 양택(陽宅)이 혼용되어 분명한 개념의 정의가 필요하다.
촌산지순(村山智順)(1931, 조선(朝鮮)の 풍수(風水), 조선총독부 조사자료(朝鮮總督府 調査資料, 31집(輯))은 양택(陽宅)이란 용어를 부정하고 양기(陽基)가 맞는 말임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택(宅)과 기(基)가 모두 사람의 주거(住居)에 관계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택(宅)이 주로 용어(用語)의 관습상(慣習上)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대하여 기(基)는 택(宅)을 포용하는 대지(垈地)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또한 음택(陰宅)의 경우는 사자(死者)를 땅 속에 파묻는 까닭에 택(宅)과 기(基)의 구별이 없어 결국 주거(住居)의 의미로 음택(陰宅)이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자(生者)의 주택(住宅), 즉 보통의 가옥(家屋)은 대지(垈地)와 건축물(建築物)이 이분(二分)되며 이때 생기(生氣)에 감응(感應) 받는 것은 건축물(建築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대지(垈地), 즉 땅의 생기(生氣)에 영향을 받는 것인 만큼 양기(陽基)가 맞다고 보았다.
대지(垈地)가 중요한 것이지 그 위에 조성된 건축물(建築物)의 대소장루(大小壯陋)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양기(陽基)를 주장한 듯한데, 이는 풍수(風水) 전적상(典籍上)에 나타나는 용어(用語)의 용례(用例)를 살펴볼 때 잘못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양물(陽物)의 조영양식(造營樣式)이 중요치 않다고 하였으나 양택풍수(陽宅風水)에 있어서는 기지선정(基地選定) 못지않게 건물(建物)의 방위(方位)와 배치(配置)가 지대한 영향을 거주인(居住人)에 미친다는 일반적인 풍수논리(風水論理)가 인정되는 만큼, 이 점은 논리구성(論理構成)에 있어 잘못된 인식(認識) 출발(出發)이라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양기(陽基)와 양택(陽宅)이라는 용어는 한자(漢字)의 뜻 풀이에 의하여 양자택일(兩者擇一)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잘 알려진 풍수서(風水書)에 의하면 양기(陽基)와 양택(陽宅)은 엄격히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도읍(都邑)이나 군현(郡縣) 등 취락풍수(聚落風水)에 있어서는 양기(陽基)를 사용했고, 개인(個人)의 주택(住宅)에 있어서는 양택(陽宅)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논리적으로도 취락(聚落)의 기지(基地)는 양기(陽基)를, 그리고 주택(住宅)의 경우에는 양택(陽宅)을 쓰는 것이 타당하다.
그에 대한 몇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전5집(全5集)으로 구성된 『지리양택대전(地理陽宅大全)』과 전4권(全4卷)으로 구성된 『양택삼요결(陽宅三要訣)』, 그리고 『민택삼요(民宅三要)』가 모두 대지(垈地)가 아닌 건축물(建築物)의 방위(方位)와 배치(配置)에 내용을 집중시키고 있는 점과 상게(上揭)『지리양택대전(地理陽宅大全)』권지오(卷之五)에는 별도로 양기론(陽基論)을 제시하여 기전(畿甸), 성성(省城), 군(郡), 주읍(州邑), 시정향촌(市井鄕村)의 기지(基地)를 잡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의 권십 양택편(卷十 陽宅偏)에서도 역시 건축물(建築物)에 내용을 집중하고 있으며, 귀후록 양기장(歸厚錄陽基章)에서는 경사(京師), 군읍(郡邑), 촌락시진(村落市鎭)을 말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양택풍수(陽宅風水)는 주거건축물(住居建築物), 양기 풍수(陽基 風水)는 취락 입지(聚落立地)를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양기와 음택(陽基와 陰宅)
양기 음택(陽基 陰宅)과 음궁(陰宮)은 풍수술법(風水術法)이 같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풍수방법론상(風水方法論上) 반대(反對)로 오인(誤認)하는 경우마저 있으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설심부(雪心賦)』에 「양택(陽宅)이 음궁(陰宮)과 다른 점은 그 지세(地勢)가 넓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면(局面)이 좁으면 안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의 해의(解義)에서 양기(陽基)와 음궁(陰宮)의 법술(法術)이 다르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양택(陽宅)은 사람 사는 곳이고, 음궁(陰宮)은 분묘(墳墓)이다. 양택(陽宅)이든 음궁(陰宮)이든 그 조산(祖山), 내룡(來龍), 과(過) ,협(峽), 기(起), 정(頂)과 청룡(靑龍), 백호(白虎), 조산(朝山), 안산(案山), 나성(羅城), 수구(水口) 등이 두루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다른 점은 양택(陽宅)의 경우는 혈장(穴場)이 꽉 짜이게 좁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양지(陽地)는 면(面)이요 음지(陰地)는 선(線)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택(陽宅)은 반드시 그 지세(地勢)가 관평(寬平)하고 명당(明堂)의 규국(規局)이 넓어야지, 그렇지 못하고 가깝게 붙고 좁아서 답답하면 뭇사람의 집을 포용(包容)하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양기(陽基)를 보는 경우 모든 것을 음택(陰宅)보는 방법에 준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고 다만 규국(規局)이 중거(衆居)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지의 여부에만 신경을 더 쏟으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양택대전(陽宅大全)』에서 더욱 분명히 하여 「양기(陽基)의 모든 법(法)이 음지(陰地)의 용격(龍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러나 산수취합(山水聚合)의 규모(規模)가, 큰가 작은가 하는데 따라서 음기(陰基)의 종류(種類)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니 「제일 넓은 곳에는 기전(畿甸)이나 성성(省城)이, 그 다음 규모(規模)에는 군(郡)이, 그 보다 작으면 주읍(州邑)이, 그리고 아주 작은 곳에는 시정(市井)이나 향촌(鄕村)이 들어선다.」고 보았다.
탁옥부(琢玉斧)에서는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용(龍)이 수천 리에 이르면 경도(京都)를, 수백 리면 성군(省郡)을, 백여 리면 주읍(州邑)을 이루는데, 시진(市鎭)과 향촌(鄕村)이라도 반드시 수십 리는 되어야 한다. 이것보다 짧으면 역량(力量)이 중(重)히 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인구부양력(人口扶養力)이나 식수(食水) 및 생활용수(生活用水)의 공급(供給) 그리고 대지(垈地)의 확보(確保)라는 측면에서 이와같은 양기풍수논리(陽基風水論理)는 대단히 합리적(合理的)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양기(陽基)가 평야(平野)인가 산곡(山谷)인가에 따라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평야(平野)인 경우는 득수(得水)가 중요하고 산곡(山谷)인 경우는 장풍(藏風)이 우선된다. (양택대전, 권지오, 양기총론(陽宅大典, 卷之五, 陽基總論)
평야지대(平野地帶)인 경우 관평(寬平)의 욕구는 만족시키지만 대체로 대강 연변(大江 沿邊)에 입지(立地)하는 관계로 그것이 수해(水害)이든 한해(旱害)이든 강(江)의 피해(被害)에 대한 대책이 제일 먼저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명당 수류(明堂 水流)에 관계되는 득(得)이라든가 파(破), 수구(水口), 그리고 수세좌향(水勢坐向) 등 득수법(得水法)에 관한 풍수술(風水術)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산곡(山谷)의 경우는 수해(水害)가 크게 문제시 되는 입지(立地)가 아니기 때문에 득수(得水)에 대한 술법(術法)을 우선시킬 필요는 없다. 이때는 오히려 요풍(凹風)의 두려움 등 국지기후적(局地氣候的)인 영향력의 중요성 때문에 얼마나 안온(安穩)한가 하는, 다시 말해서 주변 산세(山勢)의 환포성(環抱性)을 염두에 두어 장풍법술(藏風法術)에 치중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양기(陽基)는 한 번 결정되어 정지(定地)가 되어버리면 옮겨 가기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지기(地氣)의 쇠운(衰運)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비보설(裨補設)이 등장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된다. 그러나 풍수서(風水書)에는 대부분의 경우 비보(裨補)에 대한 소개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高麗時代) 이래 불력(佛力) 등 신비(神秘)한 힘에 의지하여 지덕(地德)을 비보(裨補)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이는 한국풍수(韓國風水)의 독특한 성격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때에도 양기(陽基)를 비보(裨補)하는 방법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예컨대 고려시대(高麗時代) 비보사탑(裨補寺塔)의 경우 대부분이 중요한 취락(聚落)을 관류(貫流)하는 대하천 지류(大河川 支流)의 합류점(合流點) 부근이나 수구(水口)에 자리잡은 것인데, 사찰(寺刹)에 저장된 인력(人力)과 재력(財力)으로 재해(災害)를 감시 대비코자 하는 의도로 해석할 수 도 있다.
또 하나 양기(陽基)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에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중 해당 부분이 있다. 그러나 『택리지(擇里志)』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과학적 체계화(科學的 體系化)를 이룩한 『인문지리학(人文地理學)』서수인(徐樹仁).『지리적 환경론(地理的 環境論)』노도양(盧道陽), 지리학(地理學)으로서의 이론적 구성(理論的 構成)을 지닌 『근대지리학(近代地理學)』홍이섭(洪以燮)등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풍수설(風水說)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책이다.
이중환(李重煥)은 인간(人間)과 자연(自然)과의 관련성(關聯性)을 기반(基盤)으로 취락(聚落)의 최적 장소(最適 場所)를 발견코자 하는 목적으로 역사적(歷史的), 기술적(記述的), 지역적(地域的), 계통적 접근 방법(系統的 接近方法)을 사용하여 상대적 입지(相對的 立地)와 환경지각(環境知覺)을 중시하였던 매우 희귀)
한 실학파(實學派)의 지리학자(地理學者)였다.
그는 주거(住居)의 입지조건(立地條件)으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네가지를 제시하였는 바, 그 중에서도 지리조건(地理條件)을 가장 중시하여 이것을 다시 여섯 가지로 세분 제시(細分 提示)하고 있다.
첫째, 수구(水口)는 휴소(虧疎)․공활(空濶)하지 않고 반드시 관진(關鎭)이 있고 안으로 평야(平野)가 전개(展開)되는 곳이 좋은데 관진(關鎭)은 이것이 서로 겹칠수록 대길(大吉)의 지세(地勢)라 하였다.
둘째, 야세(野勢)는 무릇 사람이 양기(陽基)를 받아야 하므로 천광(天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광야(廣野)가 더욱 길지(吉地)라 상정하였다.
셋째, 산형(山形)은 주위의 산(山)이 너무 고압(高壓)하여 해가 늦게 뜨고 일찍 빠지며 밤에는 혹간 북두성(北斗星)도 보이지 않는 곳을 가장 꺼리는데 이런 곳은 음냉(陰冷)하여 안개와 장기(瘴氣)와 잡귀(雜鬼)가 침입해서 사람을 병들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들판에 낮은 산(山)으로 둘린 것은 산(山)이라 하지 아니하고 모두 들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빛이 막히지 않고 수기(水氣)도 멀리 통하기 때문이다.
조종(祖宗)되는 산(山)의 산세(山勢)는 누각비양(樓閣飛揚)의 형세(形勢)에 주산(主山)은 수려(秀麗), 단정(端正), 청명(淸明), 연한(軟嫺) 것을 上으로 삼고 내용(來龍)이 단맥(斷脈),눈약(嫩溺), 완둔(頑鈍)하고 생기(生氣)가 없는 산형(山形)은 꺼린다.
넷째, 토색(土色)은 사토(砂土)로서 굳고 촘촘하면 우물물이 맑고 차서 살만한 곳이 된다. 만약 적점토(赤粘土),흑력토(黑礫土), 황세토(黃細土)이면 사토(死土)로 우물물에 장기(瘴氣)가 있어 몸에 좋지 않고 인재(人材)가 배출되지 않는다.
다섯째, 수리(水理)는 산수(山水)가 상배(相配)해야 조화(造化)의 묘(妙)를 다하는 것인 만큼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특히 양기(陽基)는 음택(陰宅)과 달라서 물은 재록(財祿)을 주관(主管)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수(積水)의 빈(濱)에 부후(富厚)의 집과 명촌 성허(名村 盛墟)가 많다고 하였다. 또 비록 산중(山中)이라도 시냇물과 간수(澗水)가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代)를 이어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
여섯째, 조산 조수(朝山 朝水)의 문제인데 조산(朝山)으로는 산(山)이 멀면 청수(淸秀)하고 가까우면 명정(明淨)하여 일견(一見) 사람을 환희(歡喜)케 하고 증오(憎惡)하는 모습이 없으면 길상(吉相)이다. 조수(潮水)는 소천소계(小川小溪)는 역조(逆調)함이 길상(吉相)인데 대천대강(大川大江)에 있어서는 역(逆)으로 흘러드는 것이 결코 좋지 못하다.
무릇 대수(大水)를 역(逆)하는 땅에 정한 양기(陽基)나 음택(陰宅)은 처음에는 흥왕(興旺)하지만 오래되면 패멸(敗滅)하게 마련이다. 물이 흘러오면 반드시 용(龍)과 향합(香盒)하여 그 음양(陰陽)을 합(合)하고 또 꾸불꾸불 흘러서 천천히 가야 하며 직사(直射)하듯 흐르는 곳은 좋지 못하다.
다음 생리(生利)는 재리(財利)를 경영(經營)하여 넓힐 수 있는 인적(人的), 물적 자원(物的資源)이 집중(集中)하여 교환(交換)이 이루어지는 결절지점(結節地點) 즉 site와 situation이 모두 유리(有利)한 장소(場所)를 꼽았고 인심(人心)은 자신과 자녀(子女)의 교육(敎育)을 위하여 지방(地方)의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한 곳을 말했으며,
산수(山水)에서는 장황하게 팔도(八道)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설명하여 풍수(風水)의 실용적(實用的)인 해석(解釋)에 도움을 주고 있는데, 역시 실학자(實學者)답게 산수(山水)가 좋은 곳은 생리(生利)가 박(薄)한
곳이 많음을 주의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안(代案)으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地勢)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집을 짓고 살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십리(十里)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景致)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 매양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留宿)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별장(別莊)같은 것을 장만해 둘 것을 권하기도 했다.
3. 도읍풍수적 사고의 도입(都邑風水的 思考의 導入)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이든 자연부락(自然部落)이든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취락(聚落) 중에서 그 입지(立地)가 풍수적 영향(風水的 影響)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고을은 없는 듯하다. 그 영향(影響)이 긍정적(肯定的)이든 부정적(否定的)이든, 그 결과(結果)가 합리적(合理的)인 것이든 비합리적(非合理的)인 것이든 취락입지(聚落立地)와 풍수(風水)는 깊은 관련성(關聯性)을 맺고 있다는 것은 부정(不定)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나는 평가가 나올 수 있겠지만, 풍수(風水)가 취락입지(聚落立地)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한 이상 지역성(地域性)을 밝히고자 하는 지리학(地理學)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재언의 여지조차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선 도읍(都邑)의 풍수적 영향력(風水的 影響力)과 그 특성(特性)을 정리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한다.
인간 주거지(人間 住居址)로서의 풍수적 사고(風水的 思考)의 도입(導入)은 북반구 중위도 지역(北半球 中緯度 地域)의 경우 일반화된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다른 장의 해당 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이 풍수설(風水說)로서 정착(定着)된 것은 상당히 후대(後代)라 하더라도 인간(人間)의 상식(常識)으로 선택(選擇)할 수 있는 주거(住居)의 입지(立地)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히 난삽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오늘 날의 camp site 선정(選定)이 어떤 기준(基準)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camp장(場) 적지채점표(適地採點表)(국제관광공사(國際觀光公事), 1978, “국민관광 개발(國民觀光開發) 이론(理論) 및 외국(外國)의 개발사례(開發事例)”, p.181)에서 가장 이상적(理想的)이라고 하는 장소(場所) 중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만을 간추리며 「산림지(山林地)에서 전방향 배수(全方向 排水)가 가능하고 표토(表土)는 흙이고, 그 아래는 모래이며 잔디가 깔린 원시림(原始林)으로 땔감이 많이 있거나 수지(樹脂)가 많은 절목(切木)이 있는곳, 완경사지(緩傾斜地)로 청결(淸潔)하고 맑은 물이 근거리에 있는 장소(場所)」가 된다.
원시취락(原始聚落)의 경우는 여기에 식료문제(食料問題)가 결부되어야 하는 만큼 보다 복잡한 입지 양태(立地 樣態)를 보일 것이지만 site로서의 조건(條件)은 위 기술 내용(記述) 內容)에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다만 원시취락(原始聚落)의 경우는 음료(飮料)와 식료채취(食料採取)의 편이(便易) 때문에 해안(海岸)이나 하안(河岸)에 입지(立地)하였다는 증거가 있는 만큼, 우선 물과 입지(立地)와의 관계(關係)는 정립(定立)이 된 셈이다.
그 후 점차 내륙(內陸) 쪽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보이는데 그런 과정(過程)에서 산이 이입(移入)되었을 것이며 결국 산수상보(山水相補)라는 기본적(基本的)인 풍수관념(風水觀念)이 마련되었으리라 본다. 이 점은 고분(古墳)의 입지 추이(立地 推移)에서도 나타나는데, 초기(初期)의 북방식 지석묘(北方式 支石墓)는 강변에 면한 구릉사면(丘陵斜面), 평야(平野) 등에 군(群)을 형성(形成)하고 산악지대(山岳地帶)에는 거의 볼 수 없으나 A.D.2∼3세기경부터는 강변 평지에 묻던 무덤이 산기슭이나 중턱으로 옮겨가고 돌 역시 냇돌이 아닌 산돌을 쓰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풍수적 사고관념(風水的 思考觀念)은 먼저 물과 결부되고 그 후에 산(山)이 이입되는 과정이며, 이것이 후에 풍수설(風水說)로 정착됨에 있어서도 역시 산수(山水) 중 수(水)를 더중시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다.
예컨대 곽박(郭璞)의 『장서(葬書)』에 「풍수지법득수위상 장풍차지(風水之法得水爲上 藏風次之)」나 『감룡경(撼龍經)』의 「제수취즉제산공의(諸水取則諸山拱矣)」, 그리고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에 「산여인지형체수여인지혈맥(山如人之形體水如人之血脈)」이라는 귀절과 「설심부(雪心賦)」의「중산지처시진혈(衆山止處是眞穴) 중수취처시명당(衆水聚處是明堂)」등이 모두 수(水)가 산(山)에 우선(優先)하는 것을 표현한 대목들이다.
4. 도읍취락의 개념과 지역선정(都邑聚落의 槪念과 地域選定)
여기에서 사용한 도읍취락(都邑聚落)의 개념(槪念)은 조선조(朝鮮朝)의 지방제도(地方制度)에 연원을 두고 있다. 현재 인구(人口) 2萬 以上으로 규정되어 있는 읍(邑)과는 별개(別個)의 개념(槪念)임은 물론이다.
2萬人 以上의 人口를 가지고 도시형태(都市形態)를 취하고 있는 곳을 읍(邑), 5만인(萬人) 이상(以上)의 인구(人口)를 가지고 도시형태(都市形態)를 취하고 있는 곳을 시(市)로 규정하여 이 양자(兩者)를 도시적(都市的) 범주에 집어넣는 행정개념(行政 槪念)과 별개(別個)이지만 조선조(朝鮮朝)의 읍취락(邑聚落)도 도시적 개념(都市的槪念)에 귀속(歸屬)시키고 있는 점은 같다.
여기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지방제도(地方制度)를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으나 읍취락(邑聚落)의 개념(槪念)을 명백(明白)히 하기 위하여 그와 관계되는 부분만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朝鮮朝)의 지방행정제도(地方行政制度)는 대체로 1413年(太宗 13年)의 개혁(改革)이 있은 뒤에는 큰 변동(變動)이 없었고 법규(法規)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記錄)이 요강(要綱)을 이루는데, 전국(全國)을 팔도(八道)로 나누고 그 밑에 4부(府), 4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43도호부(都護府), 82군(郡), 175현(縣)을 둔 형태였다.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 등 8도(八道)에는 한성(漢城), 공주(公州), 전주(全州), 대구(大邱), 원주(原州), 해주(海州), 함흥(咸興), 평양(平壤)에 감영(監營)을 두고 각(各) 도(道) 관찰사(觀察使)를 배치하였다. 관찰사(觀察使)는 방백(方伯)이라고도 하여 그 밑의 부윤(府尹), 부사(府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수령(守令)을 총할(總轄)하고 감시(監視)하였다.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계층(階層)은 국가(國家)와 왕실(王室)의 중요성(重要性), 토지(土地)의 광협(廣狹),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로 구분(區分)하였으나 예외도 많은 편이었다. 이들은 모두 도(道) 산하(傘下)에 있는 병렬(竝列) 단위(單位)로서 통례적(通例的)인 명칭(名稱)을 고을(邑)이라 하였기 때문에 府, 牧, 郡, 縣의 청사소재지(廳舍所在地)를 도읍취락(都邑聚落) 혹은 읍내(邑內)라 일컫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中央集權的 官僚國家)로서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향리(鄕吏)가 통치(統治)하던 속군(屬郡), 속현(屬縣),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 각 임내(各 任內)를 모두 폐지(廢止)하고 지방(地方)을 중앙(中央)의 파견관(派遣官)이 직접 관장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도읍취락(都邑聚落)의 개념(槪念)은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청사소재지(廳舍所在地)로 정의하여도 좋고 혹은 중앙관료(中央官僚)의 지방통치 거점(地方統治 據點)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이와같은 취락(聚落)의 수는 기록(記錄)과 시대(時代)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앞서 제시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328개(個)이고, 태종조(太宗朝) 개혁후(改革後)의 초기(初期)에는 약(約) 360개(個)였던 것이 점차 줄어들어 세조조(世祖朝)에는 334개(個)였고 대체로 330개(個) 전후(前後)를 유지하였다.
여기서는 경기도(京畿道)의 양주(楊洲), 용인(龍仁), 여주(驪州), 화성(華城)과 충청북도(忠淸北道)의 옥천(沃川), 보은(報恩), 그리고 충청남도(忠淸南道)의 보령(保寧), 서천(舒川) 등을 선정(選定)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5. 도읍취락의 입지 유형(都邑聚落의 立地 類型)
입지 유형(立地 類型)이라 함은 읍취락 입지구조(邑聚落 立地構造)를 바탕으로 종합적(綜合的)인 지표(指標)를 사용하여 그의 분류(分類)를 행함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형분류(類型分類)의 지표(指標)로 어떤 조건(條件)들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취락(聚落)의 분포(分布) 자체를 해석하기도 복잡한 일이거니와 그의 유형(類型)을 분류(分類)하는 작업은 더욱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전통적(傳統的)으로 지리학(地理學)에 있어서는 분류(分類)의 기준(基準)을 크게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과 인문적 조건(人文的 條件)으로 나누어 왔다.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은 경사도(傾斜度), 고도(高度), 지형상(地形上) 및 지세상 위치(地勢上 位置), 예컨대 연해(沿海)인가 곡구(谷口)인가 하안(河岸)인가 분지(盆地)인가 대지(臺地)인가의 여부, 용수공급(用水供給) 및 하수 처리(下水 處理)를 위한 토지기반(土地基盤), 토양(土壤)의 비옥도(肥沃度), 점성(粘性)의 강도(强度), 일조(日照)를 위한 향(向), 강수량(降水量), 기온(氣溫), 풍향(風向), 풍속(風速), 탁월풍(卓越風), 계절풍(季節風), 무상일수(無霜日數), 강설관계(降雪關係) 등이고 인문적 조건(人文的 條件)은 정치(政治), 행정(行政), 문화(文化), 관습주민(慣習住民)의 의식구조(意識構造) 및 가치관(價値觀), 교통접근성(交通接近性), 시장(市場)과의 거리(距離), 경제적 문제(經濟的 問題), 사회제도(社會制度)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취락(聚落)은 작은 마을이건 수백만 인구(數百萬 人口)의 대도시(大都市)이건 간에 인간행위(人間行爲)와 생활방식(生活方式)의 총체적 결집현상(總體的 結集現像)(total way of life)을 표현 반영한다. 따라서 취락(聚落)은 그 시대(時代)를 풍미하는 주민(住民)의 태도(態度)와 사회적 가치관(社會的 價値觀)을 반영해준다. 사실 시간(時間)은 사회구조(社會構造)의 변화(變化)와 함께 일반적(一般的)인 취락유형(聚落類型)을 복잡하게 하고 특히 개별적(個別的)인 취락형태(聚落形態)를 결정하는데 기여한다.
과거에는 취락입지(聚落立地)의 결정요인(決定要因)으로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역할이 유독 강조되어 왔다. 자연조건(自然條件) 이외의 요인(要因)은 거의 무시될 정도로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중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촌락(村落)의 기지(基地)로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늘어선 촌락유형(村落類型)(spring line villiage patterns)이 나타난다거나 도시(都市)가 입지(立地)하는 곳으로 곡부(谷部)가 중요시된 사실, 방어를 목적으로 한 경우 구릉(丘陵)이 중시된 점, 도하지점(渡河地點)에 많은 취락(聚落)이 몰린 사실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예는 지리학(地理學) 특히 지지분야(地誌分野)에서는 무수히 들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많은 증거(證據)들이 발견되었으나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만으로 입지(立地)를 설명할 수 없는 예(例)들이 너무나 많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이 동일한 경우일지라도 취락입지여부(聚落立地與否)(why here and not there)는 다른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결국 취락입지 요인 (聚落立地 要因)으로서 자연적(自然的) 조건(條件)이란 주민(住民)의 지각수준(知覺水準)에 따라 제약(制約)받는 정도가 다른 것이며, 인간(人間)의 기술(技術)과 지혜(智慧)가 발달할수록 그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筆者)는 지금까지 실시해 온 수회(數回)의 답사결과(踏査結果)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전통취락(傳統聚落)의 입지유형(立地類型)을 분류(分類)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세조건(地勢條件) 및 역사성(歷史性)에 입각하여 크게 다섯가지로 취락(聚落)의 유형(類型)을 분류(分類)하였다. 내륙분지상 지세(內陸盆地狀 地勢)의 취락(聚落), 연해취락(沿海聚落), 평야(平野)의 취락(聚落),
어촌(漁村), 산촌(山村)이 그것이다.
1) 내륙분지상 지세의 취락(內陸盆地狀 地勢의 聚落)
분지(盆地)(basin)란 주위가 산지(山地)에 의하여 둘러 싸인 평지(平地)를 말한다. 단층분지(斷層盆地), 습곡분지(褶曲盆地), 谷(혹은 침식분지(浸蝕盆地)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四方이 완벽하게 山으로 환포(環抱)되어 종전 요지(宗全 凹地)를 이룬 곳은 속칭 펀치볼로 알려진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의 만대리(萬垈里), 현리 일대(縣里 一帶)와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일대, 그리고 석회암 지대의 doline를 제외하면 사전적 의미(辭典的 意味)의 분지(盆地)는 없다. 따라서 분지상 지세(盆地上 地勢)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 하천(河川)의 중류(中流) 상류(上流) 지방(地方)에는 다수의 침식분지(侵蝕盆地)가 형성되어 예로부터 그 지방(地方)의 중요한 생활 무대로 이용되어 지방도시(地方都市)를 발달시켜 왔다. 압록강의 강계, 청천강의 영변, 희천, 태천, 대동강의 성천, 곡산, 그리고 임진강의 철원, 이천, 연천, 한강의 춘천, 홍천, 원주, 충주, 제천, 금강의 청주, 옥천, 공주, 만경강의 전주, 영산강의 광주, 섬진강의 남원, 곡성,낙동강의 여주, 안동과 예천, 상주, 김천,거창, 진주, 대구, 두만강의 회령, 온성 등 조선조 읍취락(朝鮮朝 邑聚落)의 다수(多數)가 여기에 속한다. 게다가 전반적인 읍취락(邑聚落)의 자연적(自然的) 입지조건(立地條件)으로서
도 침식분지상(侵蝕盆地狀) 지세(地勢)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범주는 속하는 취락(聚落)의 특성(特性)은
첫째, 폐쇄공간(閉鏁空間)(closed space)을 이룬다는 점이다. 분지상(盆地狀)이라는 지형인자(地形因子)가 취락(聚落)의 입지구조(立地構造)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도읍풍수(都邑風水)라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이론 도입(理論 導入)을 용이하게 해주고 있다.
둘째, 전통적 입지유형(傳統的 立地類型)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관영취락(官營聚落)으로서의 형식을 크게 존중하는 한편 지세(地勢)와 관련하여 통치(統治), 군사(軍事)라는 2대기능(2大機能)을 수행하기에 편리한 위치를 마련한다.
이 경우도 이론상으로는 풍수설(風水說)을 취하고 따라서 전형적(典型的)인 풍수취락(風水聚落)을 이루고 있음이 특징이다.
셋째, 시가지 구성(市街地 構成)은 관아중심적(官衙中心的)으로 관주도적 성향(官主導的 性向)을 유지한다. 객사(客舍), 동헌(東軒) 등 관(官)의 청사(廳舍)가 읍내(邑內) 어디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중심적 위치(中心的 位置)를 차지함은 물론이거니와 고도제한(高度制限)으로 skyline上에서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청사(廳舍) 앞으로는 포정문(布政門)등 넓은 광장(廣場)을 배설하여 더욱 권위주의적 공간배치(權威主義的 空間配置)가 되도록 하여 놓았다. 본고(本考)의 범위 밖이긴 하지만 이러한 전통(傳統)은 오늘날 시(市), 군청(郡廳)이 배치(配置)에서도 일부 남아있는 듯하다.
넷째, 가로망(街路網)은 전형적(典型的)인 격자망(格子網)을 취한다. 이것은 지세조건(地勢條件)이 분지상(盆地狀)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으나 북문(北門)과 남문(南門),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을 연결(連結)하는 십자도로 중심(十字道路 中心)에 관청(官廳)을 배설하는 경우 역시 관(官)을 돌출(突出)시키는 배려를 할 수 도 있다. 십자형도로(十字形道路)의 좌우(左右)에 측도(測度)를 마련하면 격자상 가로망(格子狀 街路網)이 형성된다.
다섯째, 정치(政治), 행정(行政), 경제 중심지(經濟 中心地)외 기능(機能)을 수행(隨行)한다. 조선조 읍취락(朝鮮朝 邑聚落)의 기능(機能)이 양반(兩班)을 부지(扶支)하기 위한 행정적 보조기관(行政的 補助機關)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고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주민 통할(住民 統轄), 군사적 기능(軍事的 機能), 물산집산지(物産集散地)로서의 역할 수행(役割 隨行)을 위한 기본적 조건(基本的 條件)은 만족시켜 주고 있다. 이때 행정(行政), 경제(經濟) 기능(機能)과 지리적(地理的) 중심지일배후지(中心地一背後地)(central place-hinter land)로서의 기능(機能)은 매우 원활한 편이지만 군사기능(軍事機能)은 매우 미약하여 읍성(邑城)의
경우 성곽은 방어하기에 너무도 초라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주위에 산성(山城)을 동반한 읍성(邑城)이 대부분이란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며 읍성(邑城)의 초토화(焦土化)와 산성(山城)에서의 결사항전(抉死抗戰)이라는 군사전략(軍事戰略)이 이와 같은 읍취락(邑聚落)의 입지구조(立地構造)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여섯째, 따라서 그들의 환경심리(環境心理)는 보수(保守), 폐쇄적(閉鎖的)인 경향이 농후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환경심리(環境心理)는 생활환경(生活環境)의 영향(影響)에 의하여 사물(事物)을 분별(分別), 판단(判斷), 지각(知覺)하는 과정의 문제로 사물(事物)과의 복합적(復合的)인 상호작용(相互作用)의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일곱째, 그들은 전통적인 기성신앙(旣成信仰)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향교(鄕校), 향청(鄕廳), 사직단
(社稷壇), 문묘(文廟) 등이 읍내(邑內) 혹은 읍성(邑城) 바로 주위에 배치되어 있고 주로 부녀자(婦女子)를 상대로 한 사찰(寺刹)이나 칠성각(七星閣), 산신당(山神堂) 등은 성외(城外)에 멀리 떨어져 위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끝으로 읍내(邑內) 주민 구성상(構成上) 소비경제취락(消費經濟聚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양반(兩班), 중인(中人) 등 지배계층(支配階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수공업(手工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천민으로 읍내거주(邑內 居住)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2) 연해취락(沿海聚落)
연해취락(沿海聚落)의 개념 정의는 정확을 요구한다. 이들은 해안입지(海岸立地)이기는 하지만 후술할 어촌(漁村)이 바닷가에 바로 면하여 취락(聚落)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리 바닷가로부터 5∼10리(里) 정도 격하여 입지(立地)하는 특성을 갖는다. 필자(筆者)의 조사(調査)로는 서해(西海), 남해안(南海岸) 쪽에는 진취락(鎭聚落) 이외에는 거의 없고 주로 동해안쪽에서 발견이 되며 울진, 평해, 영덕, 청하, 영해, 홍해 등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 유형(類型)에 속하는 취락(聚落)의 특성은
첫째, 준개방공간(準開放空間)(semi-open space)이라는 점이다. 연해(沿海)이기 때문에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 내륙(內陸)과 융절(隆絶)하면서도 동(東)쪽이 트인 지세(地勢)의 특징 때문에 그러하다.
둘째, 준전통적(準傳統的) 입지유형(立地類型)을 취한다. 이들은 관영취락(官營聚落)으로서의 전통성(傳統性)과 해안지세상(海岸地勢上)의 진취성(進就性)이라는 양면성(兩面性)을 지녀 그것이 입지구조(立地構
造)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 볼 수 있다. 대체로 진취성(進就性)이 억압(抑壓)되고 전통성(傳統性)을 지향(志向)함으로써 연해(沿海)이면서도 해안입지(海岸立地)를 회피하여 취락(聚落) 자체가 무성격적(無性格的)이라는 단점(短點)을 띠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울진은 바닷가 까지의 거리가 9리(里), 평해 7리(里), 영덕 13리(里), 청하 7리(里) , 영해 7리(里) 상거(相距)함으로써 전통적(傳統的)인 읍취락 구조(邑聚落 構造)를 따르기 위한 입지상(立地上)의 무리(無理)가 노출된 것이다. 즉 해안(海岸)에 입지(立地)하는 것이 보다 기능 공간(機能 空間) 유지에 적합했을 것을 전통적(傳統的)인 읍취락 입지 유형(邑聚落 立地 類型)에의
추구(追求) 때문에 내륙(內陸)쪽으로 유인되어 입지상(立地上)의 무리를 드러내었다고 보는것이다.
셋째, 관아(官衙)의 배산입지(背山立地)는 내륙분지상 지세(內陸盆地狀 地勢)의 취락(聚落)과 동일하다. 다만 좌우환포(左右環抱)가 매우 미약하고 전면(前面)이 완전 개방(完全 開放)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중환(李重煥)도 이 지역(地域)을 경치(景致)가 실로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 하면서도 한때 유람(遊覽)하면서 즐기기는 좋으나 영구히 살 곳은 못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연해취락(沿海聚落)이 발달되지 못한 이유였을 가능성도 있다.
넷째, 가로망(街路網)은 “공(工)”자형(字形) 혹은 이중구조(二重構造)이다. 해안(海岸) 평탄부가 해안선을 따라 대상(帶狀)으로 좁게 펼쳐진 관계로 도로(道路) 역시 “일(一)”자형(字形)을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억지로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인 공간배치(空間配置)인 격자상(格子狀)을 취하다 보니 “=”자형(字形)의 직선도로(直線道路)에 그를 관통(貫通)하는 도로(道路)를 합쳐 “공(工)”자형태(子形態)를 취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 기능(機能)은 대부분 단순한 통치(統治), 행정 관할 중심(行政 管轄 中心)이다. 홍해와 같은 물자집산지적(物資集散地的) 성격(性格)을 띤 곳도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예외일 뿐이다.
여섯째, 환경심리(環境心理)는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성(傳統性)을 두루 갖추지 못했다는 지역적 열등감과 연해(沿海)이면서도 해안입지(海岸立地)가 아니기 때문에 기인한 생산적 낙후성 때문에 무성격적(無性格的)이었던 듯하다.
일곱째, 신앙(信仰)은 융화 혼재적(融化 混在的)이다. 즉 향교(鄕校) 등 전통신앙(傳統信仰)과 토속적신당(土俗的 神堂)이 공존(共存)하는 형태(形態)이다. 끝으로 경제(經濟)는 생업종사민(生業從事民)의 읍내 거주(邑內 居住)로 인하여 준소비경제취락(準消費經濟聚落) 형태를 취한다.
대체로 연해취락(沿海聚落)은 전술(前述)한 분지상(盆地狀)의 전통취락(傳統聚落)과 후술(後述)할 어촌(漁村) 사이에 점이적(漸移的)인 구조(構造), 기능(機能), 형태(形態)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 평야의 취락(平野의 聚落)
평야(平野)는 호남평야(湖南平野)와 김해평야(金海平野) 외에는 규모가 크기 않기 때문에 대표적인 평야의 취락은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은 농업생산력(農業生産力)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곳으로 전형적(典型的)인 농촌 생산촌락(農村 生産村落)이 일찍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지세상 개방공간성(地勢上 開放空間性)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조선조(朝鮮朝)의 통치구조하(統治構造下)에서는 대도읍(大都邑)으로 발달도 되지 못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가지도 못한 점이적 성격을 띠면서 개방공간(開放空間)의 특성(特性)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역시 지배층(支配層)의 수탈 대상 중에서는 가장 범위와 규모가 컸던 곳으로 주민(住民)의 환경심리(環境心理)는 폐쇄성(閉鏁性)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도읍(都邑)의 발달은 매우 미약했던 편이다. 지세상 개방공간(地勢上 開放空間)과 환경심리상(環境心理上)의 폐쇄성(閉鏁性)은 대도읍(大都邑)으로의 발달이 차단된 것도 이와 같은 자체 내의 모순이 큰 작용을 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회제도(社會制度)와 통치체제(統治體制)가 취락(聚落)의 입지구조(立地構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예증이 된다.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의 모든 장점(長點)에도 불구하고 대읍취락(大邑聚落)의 입지선호(立地選好) 즉 산(山)을 등지고 산(山)에 환포(環抱)되지 못했다는 인문사회적 조건(人文社會的 條件) 때문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던 곳이 평야(平野)의 취락(聚落)이기 때문이다.
4) 어촌 및 산촌(漁村 및 山村)
이들은 모두 읍취락(邑聚落)이 아니기 때문에 본고(本考)의 범위 밖이며 따라서 특성(特性)만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어촌(漁村)은 바닷가에서 어업(漁業)이란 특수기능(特殊機能)을 수행하기 때문에 개방공간(開放空間)이며 기능공간(機能空間)을 유지한다. 해안(海岸)을 따라 난 한가닥 도로(道路)에 취락(聚落)이 집중(集中)되어 기능 연결성(機能 連結性)이 강한 노촌(路村)을 형성하며, 경제(經濟)는 생산취락(生産聚落)이면서 진취적(進取的)인 환경심리(環境心理)를 나타낸다. 그러나 조선조(朝鮮朝)에서의 어민(漁民)은 상민 내지는 천민으로 수탈 대상이었기 때문에 취락의 발달은 미약하다.
산촌(山村)은 농업(農業) 위주의 우리나라에서는 발달의 소지가 별로 없는 취락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촌(山村)은 화전촌락적(火田村落的) 성격(性格)이 강한 것으로 보면 되고 결국 산촌(山村)의 취락입지구조(聚落立地構造)는 사회사적(社會史的) 입장에서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6. 읍취락 입지와 풍수(邑聚落 立地와 風水)
조선조 취락(朝鮮朝 聚落)은 전근대적 산업방식(前近代的 産業方式)이 위주였던 만큼 입지기반(立地基盤)이 기초(基礎)는 자연적 조건(自然的 條件)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 자연조건(自然條件)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해당 지역의 소기후학적(小氣候學的)인 관측(觀測)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므로 이를 제외하면 지세조건(地勢條件)이 가장 큰 인자(因子)일 수밖에 없다.
바다에서 육지(陸地) 쪽으로 보아 어촌(漁村), 연해취락(沿海聚落), 평야(平野)의 취락(聚落), 내륙분지상 지세(內陸盆地狀 地勢)의 취락(聚落), 산촌(山村) 순으로 배열이 되며 이때 지세조건(地勢條件)이 취락입지(聚落立地)의 유형(類型) 뿐만이 아니라 입지 구조(立地 構造)와 기능(機能) 그리고 특성(特性)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세(地勢)가 결정적 인자(決定的 因子)가 되지 못함은 평야(平野)의 취락(聚落)이 크게 발달되지 못한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자연조건(自然條件)이 입지(立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지만 보다 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당시의 지리적 가치관(地理的 價値觀)이었던 듯하다. 내륙분지상 지세(內陸盆地狀 地勢)의 취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취락(聚落)의 경우도 입지적(立志的)인 무리(無理)를 해가면서까지 지리적 가치관(地理的 價値觀)에 부합되도록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풍수설(風水說)이 영향이 가장 강력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 관찬지리지(代表的 官撰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모든 읍취락 산천조(邑聚落 山川條)에서 반드시 진산(鎭山)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산(鎭山) 취락(聚落)의 후면(後面)에 위치하여 그 취락을 진호(鎭護) 표상(表象)하는 상징성(象徵性)을 내포(內包)하는 것으로 멀리서도 취락(聚落)을 대표(代表)할 수 있는 장엄(莊嚴)한 산세(山勢)의 산(山)으로 이루어진다. 진산(鎭山)의 의미성(意味性)은 그것이 방어나 계절풍과의 관계에 의한 합리적 이유 이외에도 상징성(象徵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취락입지(聚落立地)에 대한 특이한 풍수사고(風水思考)의 표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진산(鎭山)은 보행인(步行人)이나 취락 외부인(聚落 外部人)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식(標識)(land mark)의 역할을 수행하고, 상징성(象徵性)에 있어서도 매우 복잡한 체계를 갖게 된다.
즉 M.Eliade의 중심개념(中心槪念)에서도 산(山)은 수직적 요소가 되며, 이것을 부연하면 성(聖)과 속(俗), 그리고 중심(中心)의 개념으로 대칭 설명(對稱 說明)이 가능하다. 성소(聖所)는 공간(空間)이 단절(斷絶)되어 있고 Opening을 통해 그것을 상징시키고 있으며 천상(天上)과의 대화는 축(軸)(cosmic axis)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중심(中心)이 바로 이 세상의 중심(中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풍수설(風水說)에 대응(對應)시키면 사신진입(四神進入)이 되고 그 속에 혈(穴)이 있어 국(局)의 중심(中心)을 이룬다고 본다.
진산(鎭山)의 해석(解釋)이 어떠하든간에 그것이 관찬지리서(官撰地理書)에 중시되었다는 것은 결국 도읍입지(都邑立地)가 일차적으로 풍수설(風水說)에 입각했다는 반증이 된다.
第2節 도읍풍수의 실제(都邑風水의 實際)
1. 진산의 의미성(鎭山의 意味性)
진산(鎭山)은 대부분 도읍(都邑)의 북(北)쪽 10리(里) 이내(以內)에 위치하여 풍수적 사고(風水的 思考)를 만족시켜 주고 있으며 간혹 진산(鎭山)다운 산(山)인 북(北)쪽 10리(里) 이내(以內)에 없는 경우에는 남(南)쪽 100리(里) 바깥 쪽의 산(山)을 진산(鎭山)으로 삼는 경우까지 있었다. 즉 진산(鎭山)의 실질적(實質的)인 기능(機能)뿐만 아니라, 도읍(都邑)이면 모름지기 진산(鎭山)이 있어야 된다는 풍수적 사고(風水的 思考)가 그와 같은 무리(無理)를 하면서까지 진산(鎭山)의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진산(鎭山)뿐만 아니라 도읍(都邑)의 내부구조(內部構造)도 풍수사고(風水思考)의 영향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풍수설(風水說)이 도읍(都邑)의 내부구조(內部構造)에 미친 영향은 매우 다양한 편인데 우선 국면(局面)이란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풍수(風水)의 기본(基本) 구성요소(構成要素)인 산(山)과 수(水)는 그 자체로서는 생성(生成)을 이루지 못하며 마치 천(天)과 지(地)가 합하여 인(人)을 생성(生成)하듯이 산(山)과 수(水)가 합하여야 기(氣)가 성립하며 국면(局面)이 생성(生成)되는 것이라 본다.
원초적인 천(天)․지(地)․인(人)의 상(象)이 산(山)․수(水)․기(氣)의 상(象)으로 변환을 이루고 이 산(山)․수(水)․기(氣)가 산(山)-수(水) 국면(局面)이라는 형(形)으로 나타난다. 이와같은 상반(相反)된 양극(兩極)의 결합(結合), 즉 양극(兩極)을 제3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차원 높은 합성(合成)에 대한 원형적 심상(原型的 心象)을 Carl jung은 통합상징(統合象徵)(unifying symbol)이라 한다.
산(山)과 수(水)의 변증법적 변환 또는 통합상징(統合象徵)에 의한 국면(局面)의 형성(形成)은 고대 동양(古代 東洋)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고대(古代) 이집트에서는 이 변증법적인 국면 형성을 위해 나일강변에 피라미드를 형성했는데, 피라미드는 산(山)이 많은 나일강 상류에는 없고 산(山)이 없는 나일강 하류에만 있는 바 이것은 피라미드가 산(山)이라는 건축적 상상력(建築的 想像力)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중미(中美)의 고대도시(古代都市) Teotihuacan에서의 피라미드와 운하, 멕시코 마야 문명의 Chichen Itza에서의 피라미드와 그에 대칭되는 깊은 못에 의한 산(山)과 수(水)의 대비(對比)가 그 예이며 그 산(山)과 수(水) 사이에 도읍(都邑)과 신전(神殿)과 묘(墓)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읍풍수(都邑風水)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산(山)-수(水) 국면(局面)을 형성하면서 사신사(四神砂)에 의한 한계(限界)를 이루어 지리적 전체성(地理的 全體性)을 이루어 주며, 이것은 무질서(無秩序)한 혼돈 가운데서의 질서(秩序)있는 체계를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이때 이 국면(局面)에 담겨지는 제기능(諸機能)도 나름대로의 위계(位階)를 가짐으로써 더욱 확고한 질서(秩序)를 공간(空間)에 부여하게 된다. 그런데 각 지역(地域)의 사회적 위계(社會的 位階)는 지형(地形)의 위계(位階)와 합치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본다.
풍수국면(風水局面)의 가장 높은 위계(位階) 또는 중심(中心)이 되는 것은 혈(穴)이다. 이 곳은 국면(局面)의 중핵(中核)이며 가장 내측(內側)에 위치한 것인 동시에 모든 주위가 이를 위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중심(中心)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지형(地形)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이의 특징은 이른 바 점고형식(漸高形式)이다. 이것은 중심(中心)과 주변(周邊)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人間)의 공간(空間)은 주체(主體)를 축(軸)으로 하여 중심화(中心化)되어 있다.
모든 사물(事物)은 이 중심(中心)의 상징성(象徵性) 즉 Eliade의 지축(地軸)(Axis Mundi)에 참여함으로써 실재적(實在的)인 것으로 된다. 중심(中心)은 다시 성(聖)의 중심(中心)과 속(俗)의 중심(中心)으로 이분(二分)되어 성(聖)은 혈(穴)에, 속(俗)은 국면(局面)의 평면기하학적(平面幾何學的) 중심(中心)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풍수설(風水說)에 의하여 선택된 하나의 자연적 지형(自然的 地形)은 이미 단순한 의미의 세속적 공간(世俗的 空間)이 아니다. 원형적(原型的) 회귀(回歸)를 위한 조건(條件)이 갖추어진 성(聖)스러운 공간(空間)이 된다. 따라서 어떤 외부적(外部的)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용기(容器)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Eliade적(的)인 해석에서 도읍풍수(都邑風水)는 세계모형(世界母型)(image mundi)을 모방하여 소우주(小宇宙)를 창조하려는 의도의 결과가 되며, 도읍(都邑)의 건설(建設)은 바로 우주 창조(宇宙 創造)의 재현(再現)이라는 엄숙(嚴肅)한 의식(儀式)이라고 본다.
도읍(都邑)의 건설자(建設者)들이 상기(上記)한 것과 같은 사고관념(思考觀念)을 가지고 도읍(都邑)을 꾸몄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풍수적(風水的)인 공간 배치 관계(空間配置關係)를 중심 개념(中心 槪念)으로 파악한 건축학(建築學)의 발상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것을 서울의 경우에서 보면 청계천(淸溪天)을 기저(基底)로 하여 북(北)으로는 북악(北岳), 남(南)으로는 남산(南山)으로 연결되는 한 쌍의 향천적(向天的) 흐름을 설정(設定)할 수 있으며 또 외명당(外明堂) 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 관악산(冠岳山)으로 연결되는 한쌍의 향천적(向天的) 흐름을 설정(設定)할 수 있는데 향천적(向天的) 흐름은 인류(人類)의 보편적인 천지교통 욕구(天地交通 欲求)의 공간적 표현(空間的 表現)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도읍(都邑) 뿐만이 아니라 자연부락(自然部落)의 경우도 풍수사고(風水思考)의 영향은 있었다. 물론 이 경우 보다 좋은 곳은 도읍(都邑)이 차지하기 때문에 마을은 그 규국(規局)이 떨어지는 편이기는 하지만 진산문제(鎭山問題)라든가, 마을 경관(景觀)의 스카이라인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있다.
도로(道路)와 주택(住宅) 배치관계(配置關係)에 있어서도 풍수술(風水術)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지세(地勢)를 유기체(有機體)로 지각(知覺)한 좋은 예가 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운곡일리 이실(忠北 槐山郡 淸安面 雲谷一里 槐實) 마을의 연구(김홍식(金鴻植), 1975, 대한건축학회지(大韓建築學會誌) 19卷, 64號)에서 보면 일견하여 매우 불규칙하고 무원칙하게 보이던 도로(道路)와 주거(住居)의 배치(配置)가 이 마을에서 많이 보이는 감나무의 가지와 잎에 대입시켜 놓고 보면, 질서(秩序)를 갖고 동적 구성(動的 構成)으로 배치(配置)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풍수설(風水說)의 발생(發生) 배경(背景)과도 관계있는 일인 듯하다.
2. 용인(龍仁)
현 용인(現 龍仁)은 용구(龍驅)와 처인(處仁) 두 현(縣)을 합한 이름이다. 상당히 희귀한 예인데, 용인현(龍仁縣)에는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代表的) 관찬지리지(官撰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산천조(山川條)에 진산(鎭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역시 대표적(代表的) 사찬지리지(私撰地理志)이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진산(鎭山)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용인(龍仁)은 동(東)으로 이천군(利川郡), 서(西)로 화성군(華城郡)과 수원시(水原市), 남(南)으로 안성군(安城郡), 북(北)으로 광주군(廣州郡)과 접하는 내륙(內陸)의 군(郡)이다. 수리적(數理的) 위치(位置)는 극동(極東) 127도 30분(외사면 백봉리), 극서(極西) 127도 00분(기흥면 서천리), 극남(極南) 37도 05분(이동면 어비리), 극북(極北) 37도 20분(수지면 고기리)이다.
용인군(龍仁郡)은 1914년 당시의 용인군(龍仁郡), 양지군(陽智郡), 죽산군(竹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여 12개 면으로 있다가 1963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통폐합(統廢合) 당시 고삼면(古三面)이 안성군(安城郡)으로 분리(分離)된 이후 현재에 이른다.
1914년 당시의 용인군(龍仁郡)은 1395년에 용구현(龍驅縣)과 처인현(處仁縣)을 병합하여 이루어졌는 바, 용구현(龍驅縣)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구성현(驅城縣)으로 고려 초(高麗 初)에 용구(龍驅)라 개칭되었으며 현종(顯宗) 때 광주(廣州)에 속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현(縣)이 되었으며,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부(水原府)의 처인부곡(處仁部曲)으로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 6년(1397)에 현(縣)이 되었다. 1914년 당시의 양지군(陽智郡)은 본래 수주(水州)의 양량부곡(陽良部曲)이었으나 조선조(朝鮮朝) 정종(定宗) 1년(1339)에 양산현(陽山縣)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13년(1413)에 다시 추계현(秋溪縣)으로 됨과 동시에 충청도(忠淸道)에서 경기도(京畿道)로 이속(移屬)되었으며 후에 이천군(利川郡)에 속하는 양지현(陽智縣)이 되었다가 1895년에 양지군(陽智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인(龍仁)의 자연 지세(自然 地勢)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본군(本郡)의 동단(東端)과 서단(西端) 근처(近處)에는 쥬라기(紀)의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 구성면(驅成面) 일대(一帶)에는 시대미상(時代未祥)의 각섬석(角閃石)이 분포(分布)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地域)에는 선(先)캠브리아기의 호상편마암(鎬狀片麻岩), 화강암질편마암(花崗巖質片麻岩), 단산속군(端山屬群)에 속하는 편암(片岩)이 나타난다.
남북(南北) 주향(走向)의 단층(斷層)들이 발달(發達)되어 있으며 이러한 단층(斷層)에 따라 하천(河川)이 흐르고 낮은 저지(低地)가 형성(形成)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천(河川) 연변(沿邊)에 따라서는 第4紀 충적층(沖積層)이 형성(形成)되어 있다. 광주산맥(廣州山脈)에 속하는 남북(南北)으로 달리는 네 개의 산(山) 줄기에 의해서 본군(本郡)은 구분(區分)될 수 있다. 사측(四側)의 시흥군(始興郡)과의 경계지역(境界地域)에는 광교산(光敎山)(582m), 백운산(白雲山)(560m), 바라산, 형제봉(兄弟峰) 등으로 이루어진 400m 以上의 남북방향(南北方向)의 산릉이 있으며 이 산릉의 동쪽에도 남북방향(南北方向)의 침식저지(侵蝕 低地)를 지나 이
산릉과 평행한 또 다른 산릉이 있다.
이 산릉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부터 뻗어 내리는 산릉으로서 구성면(驅成面), 모현면(慕賢面), 포곡면(蒲谷面) 사이의 경계(境界)를 이루고 기흥면(器興面)과 용인읍(龍仁邑), 그리고 이동면(二東面)과 화성군(華城郡) 동탄면(東灘面)의 자연적 경계(自然的 境界)를 형성(形成)하고 있다. 주요 산봉(山峰)은 법화산(法華山), 무푸레고개, 성산(城山)(471m), 부아산(負兒山)(403m),함봉산(咸峰山)(306m) 등이다.
광주읍 경안리 남측(廣州邑 京安里 南側)에서 정남(正南) 방향(方向)으로 뻗어 내리는 산릉은 용인읍(龍仁邑)의 동부지역(東部地域)을 대분(大分)하는 산릉으로서, 태화산(泰華山)(645m), 노고봉(老姑峰)(579m), 발리봉(發梨峰) 정광산(正光山), 형제봉(兄弟峰), 쌍령산(雙嶺山) 등의 산봉이 솟아 있다. 이 산릉의 동측에는 비교적 고도가 낮은 산릉이 남북(南北)으로 달리고 있는 바, 주요한 산봉(山峰)은 수정산(水晶山), 구봉산(九峰山), 정배산(鼎排山)등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산릉이 남북(南北)으로 달리므로 그 사이의 침식저지(侵蝕低地)와 충적지(沖積地)들도 남북방향(南北方向)으로 형성되어 있다. 가장 서쪽의 저지(低地)는 한강지류(漢江支流)인 탄천(灘川)과 진위천(振威川)의 지류(支流)인 신갈천(新葛川)이 형성한 충적지(沖積地)와 그 주위의 저위침식구릉(低位侵蝕丘陵)으로서 현재(現在)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가 이 저지대(低地帶)를 통과하고 있다.
본군(本郡) 중앙(中央)의 남북방향(南北方向)의 저지대(低地帶)는 본군(本郡)의 중심적(中心的) 기능(機能)을 가진 곳으로 용인읍(龍仁邑)의 여기에 위치(位置)하여 북(北)으로 광주행국도(廣州行 國道)와 남(南)으로 안성행 국도(安城行 國道)가 통과하고 있다.
본군(本郡)의 주요 하천(主要 河川)은 북류(北流)하여 한강(漢江)으로 유입(流入)하는 금령천(金嶺川) 서남(西南)으로부터 평택군(平澤郡)을 지나 분향만으로 유입(流入)하는 구흥천(驅興川), 동남(東南)쪽으로 흘러 남한강(南漢江)으로 유입하는 청계천(淸溪天)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산지(山地)가 많아 강우량(降雨量)은 1,300mm 내외(內外)로 많은 편이나 년강우량(年降雨量)의 편의(偏椅)가 심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年平均 氣溫)은 11.3도C, 1월 평균 기온(平均 氣溫)은 -4.8도C, 8월 평균 기온(平均 氣溫)은 26도C이며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편이다.
조선조(朝鮮朝) 정조(正祖) 때의 실학자(實學者)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편(地理典故篇)의 용인(龍仁)에 대한 기술은 이러하다.
태백산이 서남으로 내러가서 우치산, 마아령, 소백산 중령(重嶺)이 되고 또 불쑥 솟아서 월악, 주흘산 조령, 의양산과 청화산이 되고 속리산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이 되고, 달천을 끼고 동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가다가 삼생산, 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이 되는데,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용인 양지(龍仁 陽智)를 따라 남, 동, 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이 되고 용인(龍仁)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된다. 또 용인(龍仁) 광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다시 북으로 뻗어 수리산, 소래산,문수산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강화부에 이른다고 하였다.
또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충주(忠州) 서쪽이 경기도(京畿道)의 죽산, 여주의 경계이다. 죽산 칠장산(七長山)이 경기도(京畿道)와 호남(湖南)의 경계에 우뚝 솟았고, 그 산에서 나온 맥이 서남쪽으로 가다가 수유(水踰)고개에서 크게 끊어져서 평지된 다음, 다시 솟아나서 용인(龍仁)의 부아산(負兒山), 석성산(石城山), 광교산(光敎山)이 되었다.
광교산의 서북편이 관악산(冠岳山)이고, 바로 서쪽은 수리산(修李山)인데 맥이 서해(西海)에서 끝났다고 했다.
용인(龍仁)의 산세(山勢)가 이렇게 불분명하고 진산(鎭山)의 기록조차 남지 않은 까닭은 그 연혁(沿革)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의 용인읍(龍仁邑) 김량장리(金良場里)를 도읍(都邑)의 중심(中心)에 두면 주위의 산맥세(山脈勢)는 김량장리 북쪽 유방리의 234.8m고지(高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멱조현의 226.7m고지(高地) 부아산(負兒山)(403.6m)을 거쳐 남쪽의 유박산(幽朴山)(350.2m)에 이른다. 거기서 다시 무너미고개를 넘어 동쪽 마평리의 225m고지(高地), 고림리의 220.7m고지(高地)를 거쳐 처음 유방리의 고지(高地)로 이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형적(典型的)인 도읍풍수(都邑風水)의 조건(條件)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양주(楊洲)
이 군(郡)은 현재 양분(兩分)이 되어 있어 부득이 이 두 군(郡)을 같이 언급하기로 한다.
서울의 동부(東部) 및 북동군(北東郡)에 인접하여 남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광주군(廣州郡)에 접속되어 있고 동쪽은 북한강(北漢江)을 따라 양평군(楊平郡)에, 북쪽은 축달산, 수락산을 연결하는 분수령을 따라 포천군(抱川郡)에 각각 인접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이미 한양군(漢陽郡)이라는 지명(地名)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중요성이 인정된 것은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사대경(四大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라 불리워지면서 였다. 그 후에 이 지방은 양주(楊洲)와 광주(廣州) 중심으로 행정구역(行政區域)이 편성되었다 하여 양광도(楊廣道)라 불려졌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도(王都)가 한성(漢城)에 자리잡으면서 양주(楊洲)는 결정적인 발전의 계기를 잡아 경기도(京畿道)의 일등 군(郡)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도시화(都市化)의 일차적 대상이 됨으로써, 군(郡)의 성격은 대단히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추어 1981년 4월에 법률(法律) 第3169號에 의거하여 양주군(楊洲郡)과 남양주군(南楊州郡)의 이군(二郡)으로 분화(分化)가 되고 말았다.
남서방향(南西方向)으로 달리고 있는 광주산맥(廣州山脈)의 말단부(末端部)에 해당하여 북(北), 서(西), 동(東)쪽이 산지(山地)로 폐쇄되어 있는데 반하여, 남(南)쪽 만이 광활한 평야로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서북(西北)쪽의 천마산(天摩山)(812m)을 중심(中心)으로 동쪽의 예봉산(禮峰山)(638m)과 서쪽의 수락산(水落山)(638m)이 각(各) 지점(地點)에 각각 고립(孤立)되고 있으며, 그 사이를 남류(南流)하는 왕숙천(王宿川)과 한강(漢江)이 합류(合流)하는 미금시(渼金市) 일대(一帶)에 삼각상(三角狀)의 평야(平野)가 발달되고 있다. 그리하여 기후(氣候)는 서울과 비슷하여 강우량(降雨量)이 1,400㎜로 다우지(多雨地)에 해당하며 80㎜ 이
상(以上)의 호우(豪雨)가 3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동부(東部)는 북동방향(北東方向)으로 뻗은 추가령 구조곡에 의하여 지형(地形)이 크게 동서(東西)로 양분(兩分)되고 있다. 동쪽에는 왕방산(旺方山)(737m)과 수락산(水落山)(638m)이, 서쪽에는 감암산(紺巖山)(675m)과 박달산(朴達山)(869m)이 주봉이 되어서 복잡한 지형을 이룬다.
양주군(楊洲郡)에서는 좀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는 진접면(榛椄面)의 대궐터를 살펴 보기로 한다. 진접면은 본래 풍양현(豊壤縣)의 지역인데 조선(朝鮮)의 네 번째 임금인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에 양주목(楊洲牧)에 편입(編入)되고 그 뒤에 접동면(椄洞面)이 되어서 궁동(宮洞), 와촌(瓦村), 중포(中浦), 전동(全洞), 현창(縣倉)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에 따라 진벌면(榛伐面)의 진벌, 중리, 검단, 수막, 내마산, 팔야, 금곡, 주곡, 후평의 9개 동리와 별비면(別非面)의 내곡, 영지, 동촌, 서촌, 전도리 일부와 건천면(乾川面)의 양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진벌과 접동의 이름을 따서 진접면(榛椄面)이라 하여 진벌, 수산, 팔야, 금곡, 부평, 달평, 장현, 내각, 내곡의 9개 리(里)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63년 1월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수산리를 수동면에 넘겨주어서 현재 8개 리(里)가 되었다. 동쪽은 수동면, 남쪽은 진건면, 서쪽은 별내면과 의정부시, 북쪽은 포천군 내촌면에 닿는다.
대궐터는 이곳 진접면 내각리(內閣里)에 있다. 본래 양주군 정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현창리, 비각리, 봉현리, 내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조선 태조(朝鮮 太祖)가 함흥(咸興)에서 돌아올 때 풍양궁(豊壤宮)에서 머무르는데, 내각(內閣)이 맞이하러 와 있었으므로 내각리(內閣里)라 하여 진접면에 편입되고,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대궐(大闕)터에 있는 풍양궁(豊壤宮)터는 조선(朝鮮) 제2대 정종(定宗)2년(1400) 11월에 왕이 왕위를 그 아우 태종(太宗)에게 물려주고 이곳에 와 있었던 곳이다. 태종(太宗)2년에 태조(太祖)가 사랑하는 세자 방석과 왕자 방번의 참변을 당하고 태종(太宗)을 미워하여 함흥(咸興)에 가 있다가 4년만에 박순(朴淳)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머무르고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내각(內閣)들이 와서 모시고 서울로 올라 왔으므로 더욱 유명해졌다.
대궐터에 있는 비각(碑閣)에는 비(碑)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 하여 영조(英祖) 31년(1755)에 세우고, 또 하나는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라 하여 광무 9년(1905)에 세웠는데 6.25사변 때 소실된 것을 1959년에 다시 지었다.
대궐터 앞으로는 앞섬과 그 동남쪽으로 앞동산이라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옛날 큰 장마에 가평에서 떠내려 왔다 하여 가평군에서 세금을 받아 갔다는 전설이 있다. 또 내각리 앞 왕산내에는 밤섬이란 섬이 있는데 밤나무가 많고 태극정이 있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왕산내는 왕수내, 왕숙천 혹은 풍양천이라고도 불리우는데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抱川郡 內村面 新八里) 수원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서 남양주군 진접면의 복판을 뚫어 풍양들을 이루고, 계속 남쪽으로 흘러 진건면, 별내면과 미금시,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고 한강으로 들어간다.
양주군(楊州郡)의 읍기(邑基)인 관아유지(官衙遺址)는 주내면(州內面)에 있다. 주내면은 본래 양주군의 읍내가 되므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여 서부, 동부, 남방, 어둔, 산북, 마전 등 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1일 군면 폐합에 따라 고주내면(古州內面)의 광암, 삽교, 고읍, 송랑, 회만, 광숭, 삼가대의 7개 리(里)와 천천면(泉川面)의 도덕, 고장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주내면이라 하고 유양, 남방, 어둔, 산북, 마전, 광사, 만송, 고읍, 삼숭의 9개 리로 개편 관할되었다. 동쪽은 포천군 소흘면, 남쪽은 의정부시, 서쪽은 백석면, 북쪽은 회천면에 닿는다. 군청(郡廳)이 고구려로부터 고려 제8대 현종 9년(1017)까지와 조선 태조 6년(1379)에서 제10대 연산 10년(1504) 6월까지는 견주(見州) 옛터인 고읍리(古邑里)에 있었고, 7년동안 비었다가 제11대 중종 6년(1511)에 다시 주가 되어 주청(州廳)을 불국산 남쪽인 유양리(維楊里)에 옮기었다가, 1938년에 10월에 의정부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이상(以上) 한글학회편 한국지명 사전, 17, 경기편, 상)
주내면 유양리 507번지는 매학당(梅鶴堂)이 있던 자리다. 매학당은 삼층 석대 위에 높다란 건물로 목사가 거처하던 곳이다. 구조는 목사의 방이 두 칸, 옆에는 토인 방이 두칸, 넓은 마루 네 칸과 전후의 마루로 되어 있다. 또 동편에는 외동헌(外東軒)과 내동헌(內東軒)이 20여 칸 있으니 외동헌(外東軒)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곳이요, 내동헌(內東軒)은 그 가족이 생활하던 곳이다. 이 당의 출입문을 삼문이라 하는데 중앙은 태극대삼문(太極大三門)이고, 그 옆에 좌문(左門)과 우문(右門)이 있다. 그밖에 문로(門路)가 있는데 문로(門路)는 돌기둥 위에 다락을 짓고 다락에는 큰 북을 달았으며 다락밑은 통로로 되어 있다. 아침 저녁으로 북을 치며 태평소와 소라를 불어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주내면 유양리 504번지 일대는 포중영(捕中營) 자리다. 기포는 강도나 절도를 탐색하여 체포하던 일로 오군문(五軍門), 포도청(捕盜廳)에서 관장하였는데 지방 관서에서는 목사가 중영장이 되고 장병이 300명이었다. 병정 중에 가족이 자기 급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는 구 읍내에 와서 함께 살수 있도록 주택을 마련해 주었고 독신자는 중영에서 숙식을 공동으로하였는데 역둔곡(驛屯穀)으로 급식하였다.
병정의 훈련은 교관이 지휘하며 연병장은 지금의 유양국민학교 자리이다. 중영 북쪽에 육간 대청이 있어 중영장인 목사가 연중 몇차례씩 열병식을 거행하여 정예 병정을 양성하였다. 중영 창고에는 화살, 활, 창, 총, 화약, 등 무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고 집사청(執事廳)에는 사무를 처리하는 무관 약 30명이 항시 집무를 했다. 활터는 과녁을 세우고 항시 궁술을 익혔던 곳인데 지금은 전답으로 혹은 민가로 변하여 유적조차 상고할 길이 없다.
주내면(州內面) 구읍(舊邑) 관아지(官衙址)에는 옛날 길청(吉廳)이 있었는데 길청은 관아에서 아전이 일하는 곳이다. 관아는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工房) 등 여섯명의 아전이 있었다. 당시 양주에는 33개 면(面)이 있었는데 약정(約正)도 33인(人)이었다. 거의가 구읍(舊邑)에 사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는데 옛날에는 납세정신이 희박하므로 약정이 호별 방문하여 징수하였다. 지금과 같이 국세 ,도세가 구분되어 있지않고 동시에 거두어서 상납을 하고 남은 전량(錢糧)으로 목사 이외의 관리들의 녹미(祿米) 등으로 쓰였는데 약정들의 부정으로 공금 횡령에 의한 결손을 내면 지방장관인 목사가 책임을 지고 좌천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주내면 고읍리에는 관아 유지(官衙 遺址)가 있다. 지금은 전답으로 변해 있으나 땅을 두자 가량만 팜녀 주춧돌, 지대석, 기와 조각 등이 수없이 나온다. 흔적은 있으나 규모와 경계는 알 길이 없다. 성황당 샘의 맑은 물은 옛 관아에서 사용하였으며 지금은 농로가 되어버린 홍문거리는 출입하던 문터가 분명하고 옥배미 논은 옛날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자리였다.
주내면 유양리 508번지 부근에는 포청(捕廳)이 있었다. 이곳은 당시 양주의 33개 면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를 처리했다. 사형수(死刑囚)는 포청(捕廳) 앞에 쌍송(雙松)나무가 있어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뒤에 현재 주내 검문소 부근 불곡산(佛谷山) 아래 남향진 곳에 있던 식목소라는 곳에 매장되었다. (이상 역사(以上 歷史)의 요람(搖籃) 전통양주(傳統楊洲), 1982, 양주군,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읍내 남쪽에는 망째고개(망현(望峴))가 있고 북서쪽으로는 수석의 경치가 아름다운 선유동천(仙遊洞天)이 자리한다. 읍내 서쪽 향교말에는 양주 향교가 있었다.
양주향교(楊洲鄕校)는 주내면 유양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조선조 태종 원년(朝鮮朝 太宗元年)인 1401년에 創建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시(燒矢)되었다. 광해군(光海君) 2년인 1610년에 다시 원위치(原位置)에 재건(再建)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대성전(大成殿)은 40평의 팔작집이다. 동서로는 각각 20평의 동무, 서무가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중국(中國)의 공자(孔子)를 비롯한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조(朝鮮朝) 18현(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유림들의 주관으로 봄, 가을 석존제(釋尊祭)를 지낸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정위(正位)로 중앙(中央)에 남향(南向)하고, 안자(顔子)와 자사(子思)를 서향(西向)으로, 증자(曾子)와 맹자(孟子)는 동향(東向)으로 봉안(奉安)하고 공자(孔子)의 문인(門人) 10철인(哲人)과 송(宋)나라 6현인(賢人)을 동서(東西)로 종향(從享)하였고 동서서(東西庶)에는 중국(中國) 선현(先賢) 94위와 우리나라 선현(先賢) 18위를 동서(東西)로 분봉(分奉)하였다. 후원(後園) 북쪽에 계성사(啓聖祀)를 따로 세워 5성(聖)의 아버지를 봉안(奉安)하였으며 매월(每月) 삭망(朔望) 분향례와 춘추(春秋) 2,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존(釋尊)의 의식(儀式)을 봉행하였고 국가에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작헌례(酌獻禮)를 봉행하였다.
1949년 전국(全國)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의(決議)로 5성위(聖位)와 송조(宋朝) 2현위(賢位)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中國 儒賢) 113위(位)를 매안(埋安)했다. 우리나라 18현(賢)을 성묘(聖廟)에 승봉종향하고 춘추석전을 폐하고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3년 뒤에 공문(孔門) 10철(哲)과 송조(宋朝) 4현(賢)을 복위(復位)하는 동시 석전도 춘추로 환원 봉행하여 모든 제도를 혁신하고 윤강부식(倫綱扶植)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양주군지(楊洲郡誌)』에는 풍양궁(豊壤宮)과 대궐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풍양궁은 풍양현의 동쪽에 있다고 한다. 풍양현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신라(新羅)에서 황양(黃壤)으로 고쳐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高麗)에서 풍덕(豊德)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붙이었다가 뒤에 포천으로 이속하였고 조선 왕조(朝鮮 王朝) 세종 원년에 다시 양주로 이속하였으며 현재의 진접, 진건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풍양군의 옛 건물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궁터의 위치 또한 확실치않다. 다만 위『동국여지승람의』 기술과 현 내각리(內閣里) 구궐지의 우치 등으로 볼 때 진접면 내각리 부근인 것만은 확실시 된다. 궁의 용도도 함흥에서 환궁하던 태조(太祖)가 일시 기거하던 곳이다.
옛 대궐터(구궐지(舊闕址))는 진법면 내각리에 있는 옛 대궐터를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는 앞서 언급한 두 개의 비석(碑石)이 3.9평의 비각(碑閣) 안에 나란히 서 있다. 비각 앞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표석(標石)이 있다. 이곳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건설한 태조 이성계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이 벌어지자 왕위를 정종에게 전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함흥에 가버림으로써 함흥차사(咸興差使)란 유명한 일화(逸話)를 남기며 한양(漢陽)으로의 환궁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나중에 뜻을 굽혀 한양(漢陽)으로 돌아가던 중 머물렀던 곳이다. 이에 따라 이 군에는 팔야리, 퇴계원, 의정부 등 이태조(李太祖)의 한양 환궁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그러나 태조는 서울이 가까워짐에 따라 다시 마음이 변하여 이곳에 대궐을 짓고 영영 환궁할 뜻이 없음을 드러내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문무관을 거느리고 이곳까지 와서 조하를 드리게 되어 그로부터 이곳의 지명(地名)도 대궐터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대궐터였던 곳을 지금은 구궐지(舊闕址)라고 부르게 되었다.
4. 여주(驪州)
경기도(京畿道)의 동남부(東南部)를 차지하는데, 동쪽은 강원도(江原道)의 원성군(原城郡), 남쪽은 충청북도(忠淸北道)의 음성군(陰城郡)과 중원군(中原郡), 서쪽은 경기도(京畿道)의 이천군(利川郡)과 광주군(廣州郡), 북쪽은 양평군(楊平郡)에 각각 연접하였다. 우리나라 표준시 자오선 동경(標準時 子午線 東京 127度30分은 거의 본 군의 극서단(極西端)을 지닌다.
여주(驪州)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황효(黃驍)라 고치어 근천현(斤川縣)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高麗) 초(初)에 황려현(黃驪縣)(일명 광리현(廣利縣))이라 칭하다가 고려(高麗) 현종(顯宗) 9年(918)에 원주(原州)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 3年(1305)에는 순경왕후(順敬王后) 金氏의 고향이라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昇格)시키었다.
1,388년 우왕이 폐위되고 이곳으로 옮기자 황려부(黃驪部)로 승격시키었다가 얼마가지 않아 다시 군(郡)이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태종(太宗)은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또다시 여흥부(驪興府)로 승격(昇格)시키고 음죽현(陰竹縣) 수촌(水村) 어남이촌(於南伊村)을 충청도(忠淸道)에서 경기도(京畿道)로 이관(移管)시키어 본군에 붙이고 도도부(都渡府)(단부(單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로 승격시키었다. 예종 1년(1469)에 영릉(英陵)을 이곳 수성산(水城山)에 옮기게 되자 천영현(川寧縣)을 편입(編入)시키어, 지금과 같이 여주가 되어 목사(牧使)를 두게 되었다. 1895년에는 한때 충주(忠州)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폐합시(廢合時)에 여주군으로 복구되고 1읍 9면을 관할하였다. 현재 여주읍(驪州邑) 창리(倉里)에 군청(郡廳)이 있다.
여주의 간략(簡略)한 전체적 지세(全體的 地勢)는 다음과 같다. 북쪽 양평군과의 경계에 경산(543m), 사바산(娑婆山)(230m)이, 광주군(廣州郡)과의 경계에는 천덕산(天德山)(463m)이 남동쪽 충청북도와의 경계에는 오갑산(梧甲山)(609m) 등이 높이 솟았으나 그 외지역은 대체로 노년기(老年期)의 구릉이 여기저기 기복되고 그 사이에 작은 내가 흐르며 그 유역에 평지가 전개되는 식이다. 본군의 지세(地勢)를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다(야평산원(野平山遠))” 라고 동국여지승람에 표현하였는데 사실 그럴듯한 구절이다. 한강(漢江)은 남쪽에서 섬강, 청계천, 양화천, 복화천, 금당천 등의 지류를 합치며, 본군의 거의 중앙부를 서북향으로 관류
한다. 따라서 본군의 지형은 강동(江東)과 강서(江西)로 나뉘어진다.
내륙부에 위치한 만큼 겨울과 여름의 한서의 차가 비교적 크며, 대륙성 기후(大陸性 氣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주군(驪州郡)의 풍수적 지세(風水的 地勢)는 여주읍의 중심부인 창리의 동쪽에 있는 북성산(北城山)(275m을 진산(鎭山)으로(여주의 진산(鎭山)은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 모든 고문헌(古文獻)들이 북성산(北城山)을 지적하고 있다)하여 남쪽의 연하산(200.7m)과 황학산(175.3m)의 연맥을 백호세(白虎勢)로, 북서쪽 영릉(英陵)이 자리잡고 있는 왕대리 일대의 137m고지(高地)연맥을 청룡(靑龍)으로 국면(局面)을 조성하고 있는 형태이다. 앞쪽의 조수(朝水))는 남한강(南漢江)이 비단을 두른 듯 그 역할을 다하고 강 건너 봉미산(鳳尾山)(156.2m)이 조안(朝案) 방향(方向)이 허결함을 막아주고 있다.
한가지 여주읍의 풍수적 허결점(虛缺點)은 북서쪽 남한강(南漢江)이 빠져 나가는 양도(洋島) 방향(方向)이 매우 위태롭다는 점인데 이 역시 싸리산으로부터 북성산에 이르는 연맥(連脈)이 그것을 비보(裨補)해주고 이써 결정적인 흠은 아니다.
앞서 설명된 양주와 여주는 한강변(漢江邊)에 위치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이래 급속한 성장을 해온 읍취락(邑聚落)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오면서 경지(耕地)는 초기(初期)에 국토면적(國土面積)의 10∼15%에 달함으로써 생활 무대의 윤곽은 거의 확정되어진 셈이다. 이때는 한반도(韓半島)의 통치(統治) 중심지가 한강(漢江) 유역(流域)의 한양(漢陽)으로 이미 확정이 되었고 이후 정치적(政治的) 상황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한반도 통치의 중심 기능은 오늘에 이르도록 같은 장소에 누적되어 왔다. 따라서 왕도(王都)의 주변에는 서울의 이웃 고을이라는 뜻의 경기(京畿) 지명이 새롭게 탄생되고 그것은 주로 한강(漢江) 유역(流域)에 펼쳐졌으니 위의 두 고을이 바로 그 대표적 예인 것이다.
각 주군현(州郡縣)에는 지방 통치(地方 統治)를 위한 읍성 취락(邑城 聚落)이 성립(成立)되고 그곳에는 행정(行政)과 군사기능(軍事機能)이 복합되어 갔다. 이러한 기능의 효율적 수행을 위하여 특수한 경관 구조(景觀 構造)가 나타나고 지형 조건(地形 條件)을 고려한 지정 장소(指定 場所)에 입지 선정(立地 選定)이 이루어졌다.
경관(景觀)의 측면에서 정치(政治), 군사(軍事), 교육(敎育), 종교(宗敎)와 관련된 관아(官衙)가 집중(集中)되고 그것은 동헌(東軒)을 비롯하여 객사(客舍), 향청(鄕廳), 옥사(獄舍), 훈련청(訓練廳), 향교(鄕校), 사직단(社稷壇) 등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동헌(東軒)은 군수(郡守)(또는 부사(府使))의 집무실(執務室)로, 객사(客舍)는 공무(公務) 여행자(旅行者)의 숙박소로, 향청은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집회장(集會場)으로, 옥사는 범법자의 수감 장소로, 훈련청은 군사 기능의 수련장으로, 향교는 교육의 전당으로, 사직단은 종교의식(宗敎儀式)의 집행장으로 각각 기능을 달리하고 있지만 읍성취락의 상징이며 중심적 경관요소(景觀要素)가 되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외적 방어를 위하여 취락의 주위를 성곽으로 에워 쌓았고 그 주변에 진산(鎭山)을 두어 통신 연락의 거점으로 삼으니, 이것은 오늘에 남아 있는 읍성취락(邑城聚落)의 대표적 유적(代表的 遺蹟)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읍(都邑)의 공간구조(空間構造)는 몇가지의 상징성(象徵性)을 보유하기 때문에 더욱 그 의미(意味)가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그에 관한 최근(最近)의 연구(硏究) 예(例)를 하나 제시해 보기로 한다.
이 연구(硏究)는 한자 문화권(漢字 文化圈)의 도성공간(都城空間)에 있어서의 지리적(地理的) 랑가쥬(Langage)를 이해(理解)하기 위한 작업이다. 말하자면 옛사람들의 가치 체계(價値體系) 내지는 우주관(宇宙觀)이 도성계획(都城計劃)에 어떻게 나타났으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한 우리의 풍수관(風水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기 위한 연구이다. 접근(接近)의 측면(側面)은 중심(中心)이 무엇을 상징(象徵)하는가, 사분공간(四分空間), 즉 사분적(四分的) 세계관(世界觀)은 어떻게 나타나고 무엇을 상징(象徵)하는가, 양극(兩極)의 대립(對立)과 조화(調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옛 사람들이 남겨놓은 도성(都城) 경관(景觀)에는 당대(當代) 제왕(帝王)의 권위(權威)나 신민(臣民)들의 우주관(宇宙觀)이 극적(劇
的)으로 나타나 옛날의 도성계획(都城計劃)은 기능성(機能性) 못지 않게 상징성(象徵性)도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Topophilia라는 말은 “분석(分析)의 대상(對象)으로서의 공간(空間)”을 “이해(理解)의 대상(對象)으로서의 공간(空間)”으로 보기 위한 새로운 지인관계(地人關係)의 표현이다. 이 개념에는 원형(原型)으로 복귀(復歸)하기 위한 Archaic Spituality가 함축(含蓄)되어 있는데, 원형복귀(原型復歸)의 가장 괄목한 표현이 지표상(地表上)에 만들어 놓은 소우주(小宇宙)이다. 바로 이것을 전통적 문화경관(傳統的 文化 景觀)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둘째, 소우주(小宇宙)의 창조(創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中心)의 상징(象徵)과 중심(中心)의 선정(選定)인데, 옛사람들에게는 중심(中心)이 성산(聖山)(Sacred Mountain), 배꼽, 수미산(須彌山)(Meru), 지축(地軸)(Axis Mundi), 태극(太極)(천극(天極)), 광원(光源), 모태(母胎) 등을 상징(象徵)한다. 한국(韓國)의 전통적 풍수관(傳統的 風水觀)에서는 이를 혈(穴)이라 하며 도읍풍수(都邑風水)에서는 궁궐의 위치가 된다. 이곳은 음(陰)과 양(陽)이 충화(冲和)되고 기(氣)가 충만(充滿)한 곳이며, 지고(至高)의 존재(存在)인 임금은 이곳에서 지심(地心)과 천상(天上)(북극성(北極星))을 연결한다.
중심(中心)이란 반드시 지리적(地理的) 측지적 중심(測地的 中心)이 아니기 때문에 궁궐(宮闕)의 위치가 북편(北偏)할 경우도 있고 남편(南偏)할 경우도 있다. 전자(前者)의 예(例)로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의 장안식 도성(長安式 都城)이 있고, 후자(後者)로는 타일랜드의 역대(歷代) 도성(都城)이 그러하다. 궁궐의 위치가 북편한 것은 북극성(北極星)의 위치(位置) 및 태극(太極)의 해석(解釋)과 관련되는 듯하다.
중심(中心)의 선택(選擇)은 Chaos의 세계(世界)에 형태(形態)와 규범(規範)을 부여(賦與)하여 Cosmos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중심 선정(中心 選定)을 위한 각종 제의(祭儀)는 곧 우주창조(宇宙創造)의 모습을 재연(再演) 하는 상징(象徵)이다.
셋째, 도성(都城)에 있어서의 중심은 동서축(東西軸)과 남북축(南北軸)이 교차되는 곳인데 이곳이 광원이라면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축(軸)은 Spectrum을 상징(象徵)한다. 중심(中心)에 위치한 지고(至高)의 존재(存在)(천자(天子))가 사방(四方)을 지배(支配)한다는 것은 중심(中心)의 생기(生氣)를 사방(四方)에 분배(分配)한다는 뜻이며 이로부터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사분적 세계관(四分的 世界觀)에 적용된다. 특히 행정조직(行政組織)을 비롯해서 성문(城門)의 배치(配置), 건물(建物)의 배치(配置), 음택풍수(陰宅風水)의 형국(形局), 도시풍수(都市風水)의 형국(形局) 등은 중심(中心)과 사분세계(四分世界) 즉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있는 오성좌(五星座)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중국(中國)의 음양(陰陽) 오행사상(五行思想)은 곧 그러한 Archaic Spirtuality를 체계화(體系化)한 지식(知識)이다.
도읍풍수(都邑風水)의 사분세계(四分世界)를 보면 궁궐(宮闕)이 혈(穴)이고 조정(朝廷)이 명당(明堂)에 해당하며 이를 에워싸고 있는 사방(四方)의 산(山)과 수(水)를 사신사(四神砂)라 하여 동물신(動物神)으로 상징(象徵)한다.
전후좌우(前後左右)의 수평(水平) 공간(空間)은 Euclid공간(空間)과 같은 등질공간(等質空間)이 아니라 인간(人間)의 지각면(知覺面)에서는 의미(意味)가 다른 이질공간(異質空間)이다. 그래서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때로는 성좌(星座), 동물(動物), 인체(人體), 색(色)으로 상징(象徵)되는가 하면 때로는 성격(性格), 덕행(德行), 신상(神像), 시간(時間), 계절(季節), 곡물(穀物) 등으로 표상(表象)된다.
넷째, 고대 도읍 계획(古代 都邑 計劃)에 있어서 각종 시설기능(施設機能)의 배치(配置)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이 “대치(對置)와 조화(調和)”를 고려한 점이다.
좌묘(左廟)가 있으면 우사(右社)가 있고 면조(面朝)와 후시(後市)로 정치(政治)와 경제(經濟)가 대칭(對稱)이며 면조(面朝)와 후침(後寢), 일단(日壇)과 명단(明壇), 좌청룡(左靑龍)(동문(東門))과 우백호(右白虎)(서문(西門)), 현무(玄武)(북문(北門))와 주작(朱雀)(남문(南門)) 등이 교묘하게 대칭적(對稱的)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이원적 상징론(二元的 象徵論)은 비단 도성계획(都城計劃)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택 건설(住宅 建設), 마을 조직(組織), 심지어는 사람의 체질(體質)이나 인간문제(人間問題), 사회문제(社會問題)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양극(兩極)은 영구적(永久的)인 대립(對立)이 아니라 음양(陰陽)의 화합(和合)에 따라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루어 마치 변증법적(辨證法的) 합일(合一)에 이르는 것과 같이 된다.
양극(兩極)의 대립(對立)과 조화(調和)는 세계 도처의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 관찰되는 사실이나 서양인(西洋人)들은 이를 변증법적 논리(辨證法的 論理), 동양인(東洋人)들은 이를 음양(陰陽)의 논리(論理)로 체계화(體系化)한 것이다.
지상(地上)에 투영(投影)된 소우주(小宇宙)는 곧 원형(原型)에의 복귀(復歸)로서 범문화적 현상(汎文化的 現像)이다. 다만 그 지방(地方) 주민(住民)의 집단(集團) Fantasy가 무엇으로 표상(表象)되었느냐가 다를 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전통풍수(傳統風水)의 깊은 이해(理解)와 더불어 각종 표상(表象)의 사례(事例)를 많이 수집하여 비교고찰(比較考察) 함으로써 전통문화(傳統文化)의 심층(深層) 언어(言語)를 옳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화성(華城)
경기도(京畿道)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북으로 시흥군, 동으로 수원시 및 용인군과 접하고 남으로 평택군과 인접하여 서쪽은 황해(黃海)에 면한다. 수리적 위치(數理的 位置)는 극동 동경 127도 50분(동탄면 신리), 극서 동경 126도 30분(우정면 입파도), 극남 북위 37도 02분(양감면 고령리), 극북 북위 37도 08분(반월면 속달리)이다.
고구려 시대(高句麗 時代)에는 매홀군(買忽郡)이라 했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이라 개칭했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 17년(934)에는 수주(水州)로 승격(昇格)되었으며 성종(成宗) 14年(995)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年(1005)에 혁파(革罷)된 바 있었다. 이 때 별호(別號)로 한남(漢南) 또는 수성(隨城)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현종(顯宗) 9年(1018)에 지수주사(知水州使)를 두면서 정송(貞松), 광덕현(廣德縣) 외에 쌍부, 용성 2개 현을 영속시켰다. 원종(元宗) 12年(1271)에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3年(1310)에 수원부(水原府)로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11年(1362)에 군(郡)이 되었다가 3년 후에 다시 부(府)로 되돌아 갔다.
조선 태조(朝鮮 太祖) 3년(1394) 한양 천도(漢陽 遷都)로 인하여 양광도(楊廣道)에서 경기도(京畿道)로 편입되었다. 태종(太宗) 13年(1413)에 다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가 되었으며 世祖 때에는 판관의 도임지인 진(鎭)이 되어 경도(京都)의 수호(守護)를 튼튼하게 하는 보제도(輔制度)중의 한곳이 되었다. 정조(正祖) 13年(1789)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墓所)를 양주(楊洲)에서 수원(水原) 화산(花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화산(花山)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八達山)으로 옮겼으며 17年(1793)에는 수원부(水原府)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켜 이 소경(小京)에 유수(留守) 2인을 두어 1인은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가 겸하고 1인 전관유수(專官留守)로 겸무케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수원으로 천도할 계획으로 18年(1794) 화성(華城) 성역(城役)을 착공하여 20年에 완공하였다.
순조(純祖) 2年(1802)에 장용외사(壯勇外使)를 없애고 총리부(總理府)를 새로 두었고 고종(高宗) 때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 시(改革 時) 유수(留守)를 파하고 1896年 대한(大韓) 13도(道)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으로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 1896年 경기도(京畿道) 관찰부(觀察府)의 소재지(所在地)가 되었다가 순종 4년(1910)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서울로 이전되었다. 1914年 전국 행정구역 재편성(全國 行政區域 再編成)으로 수원군(水原郡)은 도서지방을 제외한 남양군(南陽郡)을 폐합(廢合)하고 1931년 수원면(水原面)을 읍(邑)으로 승격(昇格)시켰다. 1949년 읍(邑)이 시(市)로 승격(昇格) 분리(分離)됨에 따라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하였다. 1960년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일왕면이 시흥군과 수원시로 편입되고, 대장, 안룡면의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어 그 남은 지역은 태안면으로 개칭하여 1읍 16면이 되었다. 1970년 수원시 북수동에 위치한 군의 옛 청사가 오산읍 원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화성의 도읍풍수는 수원을 살펴보는 것이 정상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화성군의 서남부 해안지대 및 도서들은 편암, 서북부는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와 동부지역에는 반상 변정질 편마암과 호상편마암이 나타나며 황구지천과 발안천 유역 그리고 만으로 이루어진 지역에는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광주산맥의 영향을 받아 북부와 동부에는 수리산(修理山)(474m), 칠보산(七寶山)(243m), 태행산(太行山)(266m), 태봉산(泰峰山)(228m), 무봉산(舞峰山)(215m)등이 솟아 있으며, 남부와 서부는 비옥하고 저평한 평야지대를 이루어 수원 평택평야의 일부가 되고 있다. 농경지는 전체 면적의 41.5%에 달하며 임야는 46.6%이다.
남양, 군자, 분양의 3개 만을 끼고 있어 해안선의 출입이 많아 간척, 염전, 수산양식에 적합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대륙성기후와 영향을 받아 한서의 차가 심하다.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고 연중 맑은날은 98일 쯤 된다.
한편 수원(水原)의 북부(北部)에는 광교산(光敎山)(582m)의 연맥이 미쳐 산지를 이루고, 서북부에는 여지산(麗妓山)(80m)과 지지 대고개, 중앙부에는 팔달산(八達山)(128m)같은 100m 내외의 구릉지가 있으나 그 외지역은 대부분 넓고 평탄한 옥야다. 진위천의 지류 황구지천은 수원의 동쪽을 남북으로 흐른다.
여기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수원 화성 건설(水原 華城 建設)의 이념(理念)과 방법(方法)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손정목(孫禎睦), 1977, 조선시대(朝鮮時代) 도시사회연구(都市社會 硏究), 일지사(一志社))
정조대(正祖代)까지의 수원(水原) 읍치(邑治)(수원도호부 청사 소재지(水原都護府 廳舍 所在地))는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현재의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松山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곳이 이른바 구수원(舊水原)이고 서울에서 서해(西海)의 남양만(南陽灣)으로 가자면 과천(果川)과 이 구수원(舊水原)을 거쳐 갈 수 있어 당시로 봐서는 상당한 요지에 위치하였고 읍내(邑內)는 연장 4035척의 허물어진 토성(土城)으로 둘리워져 있다.
그리고 읍내(邑內)의 주산(主山)은 바로 뒷산인 화산(花山)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구 수원도호부조(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九 水原都護府條)에는 주산(主山)의 표시가 없고 재부남이리(在府南二里)에 있는 발점산(鉢岾山)이 진산(鎭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영조(英祖)때 편찬된 수원읍지(水原邑誌)에 화산본부주산(花山本府主山)이라 기록되어 있고 진산(鎭山)인 발점산(鉢岾山)은 체점산(體岾山)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 화산(花山)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에 의하여 명산이라 지칭되어 오고 있었으며 왕릉(王陵)의 후보지(候補地)로 책정되어 산 기슭에 국릉후보지(國陵候補地)라는 표식(標識)이 세워져 있었다. 또 국내에서 국릉후보지(國陵候補地)로 봉묘(封墓)된 곳 중에서도 화산(花山)은 원릉(元陵), 영릉(寧陵)과 더불어 자고이래로 있던 삼처최길지(三處最吉地)의 하나로 지목되어 왔으며(실록(實錄) 정조(正祖) 13年 7月 乙未條), 효종(孝宗) 사후(死後)의 능묘(陵墓) 결정시에 이곳이 유력한 후보지가 되어 조신(朝臣)과 술사(術師)가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을 적극 추천한 바도 있는데, 그 상세한 내용은 윤선도(尹善道) 문집(文
集) 중의 『산릉의(山陵儀)』에 소개되어 전해오고 있다.
양주(楊洲) 배봉산(拜峰山) 기슭에 있던 장헌세자묘(莊獻世子墓)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읍치(水原邑治)의 바로 뒷산이며 읍치(邑治)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으로 옮길 것을 정한 것은 정조(正祖) 13年(1789) 7月 11日(을미(乙未))이었다. 양주 배봉산 묘원(楊洲 拜峰山 墓園)은 그 형국(形局)이 얕고 좁아 원침(園寢)의 모습이 초라하였으므로 정조(正祖) 즉위(卽位) 직후부터 다른 장소를 골라 옮길 생각을 해왔으나 연운(年運)과 산운(山運)과 묘지(墓地) 자체가 지닌 운(運)으로 봐서 기유년(己酉年)인 정조(正祖) 13年이 가장 길하다고 판단되었으므로 이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새 능원(陵園)의 후보지(候補地)로서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을 정하기까지에도 곡절이 많았으나 화산(花山)을 실지 답사(實地 踏査)하고 온 여러 중신(重臣)들과 지사(地師)들이 모두 이곳이 최길지(最吉地)이며 천금만전(千金萬全)으로 흠이 없다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 되었으므로,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 혹은 대주향공형(對珠向空形)이라는 화산(花山)으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다음은 세자(世子)의 능침(陵寢)을 옮길 자리 바로 앞 마을 즉 수원(水原) 읍치(邑治)를 어디로 옮길 것이며 성내외(城內外)의 읍민(邑民)들을 어디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왕(王)은 능원(陵園)의 조영(造營)과 읍치(邑治) 이전(移轉), 읍민(邑民) 대책(對策) 등을 신속 적절히 처리토록 하기 위해 능원(陵園) 천봉(遷奉)을 결정한 그날 그 자리에서 경기관찰사(京畿 觀察使)와 수원 부사(水原 府使)를 경질하고 옮길 길일(吉日)이 멀지 않으니 현재의 급선무(急先務)는 백성을 안심시키고 읍을 옮길 계획을 세울 일이라고 하교(下敎)한다.
당시 읍치(邑治) 소재지(所在地)에 거주(居住)한 읍민(邑民)의 수(數)는 약 200여호라는 설과 1000호에 가깝다는 기술이 있으나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정조(正祖) 13年 구수원(舊水原) 읍치(邑治) 소재지(所在地)인 용복면(龍伏面)의 호구(戶口)를 찾아 보았더니 호(戶) 221,구(口) 676으로 기록되고 있으니 약 200여호가 옮을 것이며 1000호라는 견해는 인근 촌락까지 포함한 도호부 관내 전체(都護府 管內 全體)의 숫자인 것 같다.
수원부(水原府)의 읍치(邑治)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陵)을 옮기기로 결정한 정조(正祖) 13年 7月 11日로부터 4일 후인 7月 15日에 오늘의 위치, 즉 팔달산(八達山) 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곳 팔달산(八達山) 밑을 읍치의 땅으로 결정한 것은 새로 부사로 임명되어 부임한 조심태(趙心泰)의 장계에 의한 것으로 그는 「팔달산 아래의 땅이 국세(局勢)가 크게 트여 가히 큰 고을을 조성하는데 마땅한 곳」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화산(花山) 및 구읍치(舊邑治)에 소재(所在)했던 민가(民家)의 철거(撤去)와 그 신읍(新邑)에의 이전(移轉)은 10월의 천능일(遷陵日)에 맞춰 거의 끝났다.
신읍치(新邑治)의 우월성(優越性)은 이미 그 100년이나 이전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쓴 군현제(郡縣制)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 반계는 「북쪽의 들 가운데 임천(臨川)한 곳의 지세(地勢)를 보고 판단하건데 현 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에 있는 들은 산이 크게 굽고 태평(太平)하여 현 읍치에 비하여 천지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지가 깊고 넓을며 규모도 굉원(宏遠)하여 성(城)을 쌓아 읍치로 하게 되면 실로 큰 번진(藩鎭)이 될 수 있는 기상(氣象)이며 읍내외(邑內外)에 가히 만호(萬戶)를 수용할 수 있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正祖)는 신읍치(新邑治)를 화성(華城)이라 명명(命名)하고 팔달산에 올라 축성(築城)할 자리를 두루 살펴 본 다음「선친의 능원(陵園)자리는 화산(花山)이오. 이 고을은 유천(柳川)이라 화인(華人)이 왕(王)을 축복(祝福)했다는 뜻을 따서 이 성(城)을 화성(華城)이라 이름지었으니 화(花)와 화(華)는 통하여 화성(華城)은 화산(花山)이라는 뜻이 되고 팔백(八百)이나 되는 산봉우리가 한 뫼를 둘러 보호하였으니 화성(華城)이란 이름이 화변(花辨)을 일컫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하고 고을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6. 보은(報恩)
본래 신라(新羅)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35대 경덕왕 때 삼년(三年)으로 고치고 고려초(高麗初)에 보령(保齡)으로 고쳤다가 변하여 보령(保令)이 되고, 고려(高麗) 제 8대 현종(顯宗) 6年(1015)에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다가 제18대 명종(明宗) 2年(1172)에 감무(監務)를 두게 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6年(1406)에 보령현(保寧縣)의 음(音)과 서로 같으므로 보은(報恩)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는데, 같은 13년(1413)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로 편입되었으며, 고종(高宗) 년(1895) 군(郡)이 되어 13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상주군(尙州郡), 남쪽은 옥천군, 서쪽은 청원군과 충남 대덕군, 북쪽은 청원군과 괴산군에 닿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나 『대동지지』등의 문헌에 의하면 보은에는 진산(鎭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읍의 북쪽으로는 중동리, 풍취리, 교사리 등이, 서쪽으로는 장신리, 내북면 봉평리, 수한면 후평리 등이, 남쪽으로는 수정리, 지산리, 수한면 발산리, 성리 등이 동쪽으로는 이평리, 성주리, 대야리, 삼산리, 죽전리, 어암리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마을의 산세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산의 이름으로 보아 보은이 기댈 수 있는 주산(主山)은 그 방향이 마을의 북쪽이 아닌 서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사봉(國師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사봉은 읍의 서쪽으로 항건산, 수리티재를 거쳐 노성산, 피난봉, 좌월산 등의 연맥을 거느리고 있는 산으로 해발 고도는 551.6m에 이르는 산이다. 화남면 금곡리, 노성리, 신추리와 회북면 송평리와 수한면 차정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300여년 된 노송이 있다. 역시 산 꼭대기에 좌월대가 있는데, 이는 고려 때 최영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아마도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믿은 듯한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피난봉(避難峰)은 궁터골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봉 조헌 선생이 가족들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가구(家具)를 아침이면 이 산으로 옳기게 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피난봉의 바로 아래는 궁터골(궁기(宮基))이라는 지명(地名)도 있고, 국사봉 아래 조곡리는 본래 회인군 남면 지역으로 노성산과 호점산성 사이가 되므로 새실 또는 조곡(鳥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곡리라 해서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조곡 동쪽에는 마전사(麻田寺)라는 곳이 있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이곳 절에 와서 비에 젖은 옷을 빨아 입었다는 전설이 있다.
읍의 북쪽에 있는 중동리는 본래 보은군 산내면의 지역으로 동안이라는 마을이 중간이 되므로 중동안이 또는 중동(中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동리와 하동리를 병합하여 중동리라 해서 읍내에 편입된 것이다. 건너말, 능급들, 동안이들, 바우배기,황사쟁이 등의 지명(地名)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비교적 들이 넓은 곳이다.
풍취리는 바람부리라 하는 곳으로 본래 보은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산 모퉁이가 되어 바람이 새므로 바람부리 또는 한자로 하여 풍취(風吹)라 하였는데,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주지리, 산직리, 신기리를 병합하여 읍내에 편인된 것이다. 바람부리 서북쪽에 있는 진설 마을에서 신함리 감동으로 넘어가는 은고개 동북쪽에 병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병목이라 하는 지명(地名)이 있는데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곳은 보은읍의 서북쪽으로 틔어져 있는 곳이라 겨울철 북서풍의 맞바람을 맞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풍수 이론상으로는 황천살이 낀 방향이 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풍취리에는 산제(山祭)를 지내던 산지당이 있고, 은고개에도 서낭이 있었다고 한다.
교사리(校士里)는 본래 보은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교동, 사례리, 정현리, 보촌을 병합하여 교동과 사례의 이름을 따서 교사리라 이름한 곳이다. 사랫골(사례(士禮))은 많은 선비들이 이 마을에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사랫골 남쪽에는 정문고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충신들의 정문을 건립했다고 하며, 정문고개 북쪽 향교골에는 유림에서 건립하여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는 보은 향교(報恩 鄕校)가 있다.
장신리는 본래 보은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 피촌과 수한면의 운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신리라 했다. 이곳에 있는 비룡소는 전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내북면 봉평리는 본래부터 내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사막리, 외사막리, 도촌리를 합하여 오늘의 봉평으로 된 것이다. 특히 사막(士幕)마을은 봉평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선비가 많이 살던 곳이라 한다. 수한면 후평리는 우리말로 뒷들이라 하는 곳인데, 보은 읍내 뒤쪽 들이 되므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후평 동북쪽의 왜수마을(혹은 와야마을)은 옛날에 기와집이 많아서 허물어진 기왓장으로 이곳에 있는 못을 메울 정도였다고 한다.
남쪽의 수정리는 본래 보은군 서니면의 지역으로서 큰 우물이 있으므로 수정(水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정리라 해서 읍내에 편입되었다. 바깥수정 마을 동쪽에는 범의산이라는 산이 마치 호랑이의 형세를 하고 앉아 있고 그 고개 이름은 사당고개이다. 또한 바깥수정에서 지산리 수묵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쑥고개이다. 지산리는 본래 서니면의 건지산(乾芝山) 밑이 되므로 지산(芝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천곡리, 두지리, 홍개리, 개경리를 병합하여 지산리라 해서 읍내에 편입시킨 것이다. 지산 북쪽에 지형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의 홍갓들(홍평(鴻平))이 있고, 문평공 괴애 김수온의 사당인 김씨사당인 김씨사당이 이 마을에 있어 이채롭다.
보은읍의 남쪽을 받쳐주고 있는 수한면 발산리는 뒤쪽에 염주봉(念珠峰), 앞쪽에 노승봉(老僧峰)이 있어서 이곳이 바릿대처럼 되었다 하여 바리미 또는 발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천리 일부를 합하여 발산리라 하였다.
성리(星里)는 벼랑이 있으므로 비라라 하였는데 그것이 별리가 되고 한자화(漢字化)하여 성리(星里)로 음전한 것이다. 발산리로 넘어가는 땅고개, 소계리로 넘어가는 말꼬지고개는 어떤 전설이 있을 듯 싶으나 확인은 되지 않았다.
동쪽의 이평리는 지형(地形)이 배처럼 생겼으므로 뱃들 또는 주평(舟平)이라 하였는데 수렁이 많다고 해서 생긴 쑤안들을 비롯해서 도장골, 뱀군 등의 지명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지세의 허약함을 상징하고 있는 지명이 있다. 바로 인근 삼년성(三年城)이 있는 성주리(城舟里)도 이곳이 배를 매어 놓는 자리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곳이다. 성주리 성밑마을에서 배다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청룡고개인데, 이곳에는 청룡혈(靑龍穴)이 있다고 한다.
대야리는 본래 보은군 사각면의 지역으로서 큰 산 밑이 되므로 대미 또는 대야라 하였다.
이웃 삼산리는 보은 군청(報恩 郡廳)이 있으므로 보은군의 옛 이름인 삼산(三山)의 이름을 따서 삼산리(三山里)라 했다는 것이다. 삼산리에서 으뜸되는 왕산미(王山尾)마을은 뒷산 형국이 왕자형(王字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보은읍의 남쪽에 남산(南山)이 있고 남산의 남쪽에 죽전리(竹田里)에서 가장 높은 왕자봉(王子峰)이 있다. 죽전은 대밭이 있으므로 대밭골 혹은 죽전이라 불리웠다. 아마도 이 일대가 보은읍의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암리는 본래 보은군 사각면의 지역으로 어룡(魚龍)골 혹은 어암(魚巖)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어암리 남쪽의 맘마루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소식이 늦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룡골 동남쪽에는 산제(山祭)를 지내던 산지당터도 있고, 상여집이 있던 생여 바위도 있으며, 이곳에 있는 흰 소나무인 백송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7. 옥천(沃川)
옥천군은 본래 옥천(沃川)과 청산(靑山)을 합한 곳으로 본디 신라(新羅)의 고호산군(古戶山郡)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관성군(管城郡)이라고 고쳤고 고려(高麗) 현종 때에 경산부(京山府)(오늘의 경상북도 성주군(慶尙北道 星州郡))관할로 하였다가 인종 때에 현(縣)이 되어 현령을 두어 다스렸고 명종 12년에는 주민들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민란(民亂)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죄로 군(郡)이 폐지(廢止)된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 5년에는 주(州)로 승격(昇格)되어 옥천(沃川)라 하고 지주사(知州事)를 두고 경산부 성주의 소속인 이원, 안읍, 양산의 3현을 분리하여 옥주에 소속시키고 군서면(郡西面)(시구미) 금천성(金川星)에 있던 관청(官廳)을 현(現) 구읍 죽향리(舊邑 竹香里)로 이전(移轉)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年(1413)에 비로소 옥천(沃川)이라 고치고 경상도(慶尙道)의 관할에서 충청도(忠淸道)로 옮기게 되었다.
옥천(沃川)의 진산(鎭山)은 대부분의 기록에 읍(邑)의 北쪽 2里에 있는 마성산(馬城山)이라고 나와 있다. 인간은 자연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조건 여하에 따라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의 여러 측면이 달라지고, 사고(思考)와 행동(行動)과 생활양식(生活樣式)도 독특한 지역성(地域性)을 나타낸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여러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나 그중 토지(土地)의 기복(起伏)을 나타내는 지형(地形)과 인간 생활(人間 生活)과 동물(動物)의 생활(生活)에 결정적(決定的)인 영향(影響)을 미치는 기후(氣候)로 나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풍수(風水)는 바로 지형(地形)과 기후(氣候)에 관한 우리 조상(祖上)들의 지혜(智慧)의 집적(集積)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옥천의 지형(地形)을 개관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옥천읍을 중심으로 원형분지(圓形盆地)를 이루고 있는 옥천분지는 지형상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협곡에 끼어 있는 지역으로 구릉(丘陵)이 많고 주위에는 월이산, 마니산, 대성산, 마성산, 서대산 등 험준한 산이 포위하고 있어 완전한 산간 분지를 이루고 있다.
옥천군의 지질 구조(地質 構造)는 태고시대(太古時代)의 향사부(向斜部)의 심해부(深海部)로 이것이 장구한 시일에 걸쳐 隆起되어 융지화(隆地化)한 것으로 옥천군을 중심으로 북동부에 분포되어 있는 옥천지향사(沃川地向斜)라고 일컫는다. 하천(河川)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장수(長水)에서 발원(發源)하여 진안, 무주를 거쳐 충남의 금산에서 북류(北流)하면서 학산분지를 지나 심천에서 송천(松川)과 합류하여 또 다시 북류하여 보은군 속리산에서 출발한 보청천(報靑川)을 청성에서 합류한 후 협곡을 따라 옥천분지를 지나는 금강(錦江)은 옥천에서 전형적인 곡류천(曲流川)을 이루면서 북류하고 있어 하천의 공격사면에는 200m이상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또 하나의 소지류인 군서천(郡西川)(서화천)도 북류하여 군북면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여기서 금강은 대 하천을 이루어 충청남도(忠淸南道) 도계(道界)를 따라 북서쪽으로 계속 곡류하다가 충남 연기에서 북으로부터 남류하는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하여 유로를 서쪽으로 바꾸게 된다.
이와 같이 긴 금강 상류부에는 뚜렷한 평야부를 형성하지 못하고 소규모의 산간 분지만이 몇 곳에 발달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감입곡류(嵌入曲流)의 하천(河川)이 이곳에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이곳이 전형적인 산악지대라는 반증이 된다.
옥천의 기후(氣候)는 대체로 대륙성 기후(大陸性 氣候)이며 따라서 여름철에는 무덥고 겨울철에는 몹시 춥다. 강수량(降水量)은 비교적 적은 편인데, 이처럼 강수량(降水量)이 적은 원인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 쌓여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여름철에 불어 오는 동남(東南) 계절풍(季節風)이 늦어지면 대신 북동풍(北東風)인 놉새바람의 내습으로 극단적인 과우현상(寡雨現像)이 일어나서 격심한 한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지(山地)에 산림(山林)이 울창하여 계곡(溪谷)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흘러 한해(旱害)를 입는 일은 많지 않다.
옥천(沃川)은 마성산(馬城山)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청룡(靑龍)의 맥세(脈勢)는 용봉(龍峰)과 양수리, 삼양리, 서정리, 죽향리의 뒷산을 지나 섯바댕이, 며느리재를 거쳐 금강 연안의 장계리에 이르는 상당히 긴 맥세(脈勢)로 구성되어 있다. 백호(白虎)의 맥세(脈勢)는 사목재와 도덕붕, 그리고 가풍리, 세산리, 적하리 뒷산을 지나 금강에 닿는 형세이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두 개의 산세(山勢)로도 이미 요형(凹形)의 지세(地勢)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그 앞으로는 동이면 일대의 철봉산, 탑산 등이 앞을 가로막아 그야말로 금성철벽(金城鐵壁)을 만들어 주는 위에, 금강이 띠를 둘렀으니 가히 금상첨화(錦上添花)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다만 현재는 대청호(大淸湖)의 완공(完工) 이래 안개끼는 날이 많아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 옥천읍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옥천의 마성산은 두군데가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바로 옥천읍 마암리, 삼청리와 군서면 금산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23m의 산이고, 또 하나는 산의 모양이 일자(一字)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자봉이라고도 불리우는 옥천읍 교동리와 동이면 수복리 경계에 있는 410m의 마성산이 그것이다. 옛 기록에 마성산이 읍의 북쪽 2리라 한 것을 보면 교동리의 그것이 맞겠고 현지민들의 생각도 그러한 듯하나, 진산(鎭山)의 기본(基本) 개념(槪念)에 의하여 미루어 보건대, 또한 이 마을의 터를 잡은 당대의 지리가(地理家)의 안목(眼目)을 추측컨데 삼청리의 동남쪽에 있는 산이 마성산일 것이라 여겨진다.
옥천 도읍 명당(沃川 都邑 明堂)의 핵심지(核心地)는 아마도 금구리(金龜里)가 아닐까 한다. 금구리는 본래 옥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지형(地形)이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라 하여 붙은 지명(地名)이다. 읍 뒤로 삼성산(三城山)이 있고 꼭대기에는 석성(石城) 터가 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 국경선(國境線)이었다 하며 약 1㎞쯤 남아 있다. 옥천시장과 옥천역도 이 마을에 있다.
남쪽 가풍리에는 산 모양이 가재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재골(혹은 가척)이라는 마을이 있고, 교동리는 옥천향교(沃川鄕校)가 있으므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옥천향교는 조선 태조(朝鮮 太祖) 7年(1398)에 창건(創建)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로 인하여 소실(燒失)된 것을 재건(再建)한 것이다. 조선식 목조 와가로 된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그 뒤 대성전(大成殿)과 이를 중심으로 동서문(東西門)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옥천은 충청의 명군으로 영재가 많이 나는 지방이라 기록되어 있듯이 명륜당은 창건 이래 지방의 영재를 수용하여 윤리(倫理) 도덕(道德)을 강명하고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최고(最高) 학교(學校)로서 교화(敎化)의 원천(源泉)이었다.
그 서쪽의 정강계 집터는 옛날 강계(江界) 원을 지낸 영일 정씨 선조가 되는 사람이 지은 99간의 큰 기와집으로 봄이면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상춘객이 끊일 새 없는 옥천의 명소이다. 정 효자 정문도 서 있다.
옥각리는 원래 옥천군 군서 일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곤리, 각신리 일부와 군북일소면의 백석리 일부를 병합하여 옥곤과 각신의 이름을 따서 옥각리라 하여 군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다시 옥천읍에 편입된 지역이다. 이곳 옥곤리의 은행나무가 수백년 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을의 유래는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 옆 죽향리도 오래된 잣나무가 울창한 잣밭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개묘(開墓)는 오래된 마을이었을 것이다. 교동리 옆 마을인 수북리는 북쪽에 금강이 있기 때문에 수북(水北)이라 하였는데 꽃개리, 화계(花溪) 등의 지명(地名)으로 보아 매우 운치있는 곳으로 짐작된다. 이 마을에 있는 군남교회가 옥천 청룡(靑龍)의 절맥처(節脈處)이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만나는 명당구(明堂口) 위치(位置)의 매화리(梅花里)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고, 하계리(下桂里)가 그 위 북쪽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양수리(兩水里)는 청룡(靑龍)의 맥세(脈勢)가 끊어진 곳이기 때문에 전통(傳統) 촌락(村落)의 발달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8. 보령(保寧)
옛 기록에 보령이 진산(鎭山)은 당산(唐山)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산명(山名)은 없고 그 산은 이름인 진당산(鎭堂山)으로 바뀌어졌다. 진당산은 주포면 보령리와 마강리 그리고 청라면 옥계리와 장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 351m의 옛날 보령읍(保寧邑)의 진산(鎭山)이 되며 성터가 있다.
도읍(都邑)은 진당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서쪽인 바다쪽으로 명당을 펼쳐 놓고 있는 형세이다. 이 산은 차령산맥(車嶺山脈)이 서해(西海)를 향하여 힘차게 들어가는 소위 풍수상(風水上) 절맥처(節脈處)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오서산(烏棲山)에 그 줄기를 대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에서 뻗어 내린 산맥은 묘향과 태백의 등골을 따라 내려 오다가 속리산에 그 정기(精氣)가 엉긴다. 이 대간맥(大幹脈)은 북으로 틀어 올라 되뻗어 내리는데 이것이 차령산맥(車嶺山脈)이며 이것이 보령(保寧)에 와서 성주산(星住山)과 위 오서산(烏棲山)에서 스러진다는 것이다. 오서산과 성주산의 사이에 끼인 지역을 오성지간(烏星之間)이라고 부르는데 원효는 오성지간을 산 모습 물 기운이 가장 뛰어나 나라 땅의 내장(內臟)과 같은지라 가로대 내포(內浦)라 한다고 하였다.(내포평야)
원효는 또 이르기를 속리산의 바른 큰 맥이 북으로 꺾여 내포에 스러지니 이곳에 성인(聖人) 묻을 곳 의당 있을지어다 라고 하였으며, 그때면 동방(東方)의 예악과 문물의 이 정기에서 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토정 이지함은 이 오성지간에 혈에 반해 흙집을 짓고 그의 방랑벽을 이곳에다 정착시켰다고 한다. 오서산의 정령을 우러러 그 옆을 지나 다닐 때면 반드시 큰 절을 한 다음 부채로 산을 가리고 걸어다닐 정도였다는 것이다.
서천 지방에서 표랑하던 복지겸도 유명한 도참가요, 무학대사도 내포 출신이다. 비결(秘訣)로 유명한 북창정렴도 내포를 헤매며 그 인맥을 형성하여 토정 이지함에게 계승시킨 바 있다.
내포(內浦)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양대란(兩大亂)에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지역인데 차령산맥(車嶺山脈)의 대간룡(大幹龍) 덕으로 알고 있다. 이 지방(地方)에 부자(富者)가 많이 난 것도 이 영기(靈氣)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日帝) 때 사만석(四萬石)의 동덕여학교주학봉 이석구(同德女學校主學峰 李錫九)는 바로 이 보령(保寧) 태생(胎生)이며 종근당(鍾根堂) 재벌, 한진(韓進) 재벌도 내포 태생이라고 한다.
럭키 금성 재벌인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선조(先祖) 묘(墓)도 당진(唐津) 신암산(申庵山)에 야자형(也字形)의 혈(穴)을 잡고 있다. 그 조상(祖上)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으로 중국(中國)에 갔을 때 한 대장간의 풀무 부는 낙방 서생에게 돈 5백냥을 세차례에 걸쳐 대줌으로서 급제, 대관이 된 다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중국의 명풍수(名風水)를 보내어 잡아 준 혈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또 조선팔도비밀지지(朝鮮八道秘密地誌)에 보면 호산(湖山) 경치(景致)가 최승(最勝)하여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바로 갖춘 미모(美貌)의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총독부 조사자료에 전의 이씨 시조인 이 도에 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이 도는 금강의 나루지기로 매우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 걸승(乞僧)이 그의 선행(善行)에 감동(感動)되어 그의 아버지의 묘지(墓地)를 잡아주려 매장할 때 석회로 굳혀 못 파헤치게 할 것과 다음의 글을 돌에 새겨 묻으라고 하였다.
“남래요사박상래(南來妖師朴相來) 단지일절지사(單知一節之死) 미지만대영화지지(未知萬代榮華之地)”
이 걸승의 말대로 하니, 그 몇대 후에 박상래하는 지관이 이 산을 답사하다가 내용(來龍)의 절맥(絶脈)이 중단(中斷)되어 있으니 일시(一時) 발복(發福)일 뿐 어느 시기(時期)에 이르러 일족(一族)이 멸족(滅族)할 우려가 있다고 이장(移葬)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파헤치다가 앞서 말한 그 석문(石文)을 발견하고 이장(移葬)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이 묘지(墓地)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명풍국(名風國)으로 지금도 이 이씨의 이름을 따서 이도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손들은 모두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되었음은 물론이다.
오성지간(烏星之間)의 혈맥(穴脈)을 찾아 이루어진 인맥(人脈)을 내포인맥(內浦人脈)이라고 한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의 선조 묘는 지금 한산면 사무소 옆 건지산(乾止山)에 있다.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이 호장(戶長)이었는데 관가(官家) 현감이 앉은 널빤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알았다. 그가 죽었을 때 관가 마루 밑에 암장을 하였다. 그 후 발각되었으나 관가를 현 면사무소 자리로 옮겨 주었다. 목은 이색 및 상신(相臣) 넷, 판서(判書) 열, 공신(功臣) 열둘을 냈고 최근의 월남 이상재 선생도 그 맥이다.
오성지간으로 불리운 보령의 성주산 전면에는 십년(十年) 독산(獨山)으로 유명한 남인(南人)의 수령(首領) 채제공(蔡濟恭)의 조모(祖母) 산소(山所)가 있고 그 후면 북쪽 가지에는 부여의 김해 김씨의 산소가 백마세족형(白馬洗足形)의 혈(穴)을 잡고 있다. 대원군(大院君)은 젊은 명품(名品) 정만인(鄭萬仁)으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산소를 잡게 한 곳이 바로 내포에서 가장 크고 높은 예산군 덕산면의 가야산(伽倻山)이었다. 그 자리는 원래 절터로 진혈(眞穴)은 탑이 서있는 바로 그 아래였다. 정만인은 내포에 명당(明堂)이 두 개 있는데 북유이대천자지지(北有二代天子之地)요, 남유만년영화지지(南有萬年榮華之地)라고 했
다. 대원군(大院君)은 북쪽인 가야산의 혈을 선택했다. 그리고 도굴(盜掘)의 누가 있다는 지상(地相)을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암반(巖盤)을 한길이나 파고 석회(石灰)만도 삼백표(三百俵)로 단단히 다져 놓았다.
이 지상(地相)은 맞아 들어 이대 천자(二代 天子)로 영화(榮華)가 멎고 독일 상인(商人) 오페르트가 도굴 미수 사건을 빚었다(1868). 대원군(大院君)은 남유만년영화지지(南有萬年榮華之地)의 정만인이 꼽은 오서산을 나라 돈으로 구매하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중종 반정으로 공을 세운 영의정 광주 김씨 김극성의 묘 만이 그 산에 있을 뿐 대원군(大院君)이 국책(國策)으로 무덤을 못쓰게 하여 많은 암장(暗葬)과 그로 인하여 빚어진 설화(說話), 노래 등이 남아서 전해지게 되었다.
옛 보령현의 도읍 터는 현재의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다. 보령리는 본래 보령군 주포면의 지역으로서 보령군청이 있으므로 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당리, 사청리의 각 일부와 장척면의 상리, 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보령군의 옛 이름인 신성(新城)을 따라서 신성리로 하였다가 1962년 11월에 보령리로 고쳤다. 여기에 보령군청이 있었는데 1914년 대천으로 옮겨 갔다.
이 도읍 터의 대체적인 지세(地勢)와 지명(地名)은 다음과 같다.
객사(客舍)터 : 성재 가운데에 있는 전 보령군의 객사 터. 1914년에 보령군청이 대천으로 옮겨 가고 주포 국민학교가 되었음.
고상재 : 당산 밑 서쪽에 있는 고개.
농바위 : 향교산에 있는 바위. 농처럼 생겼음.
다반: 하리 서쪽에 있는 마을.
당산밑 : 상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 당산(唐山)의 밑이 됨.
돌탑; 성재 동쪽 탑산 밑에 있는 탑. 높이 6자 가량만 보이고 그 밑은 돌무더기에 쌓여서 보이지 아니하며, 뚜껑은 없어졌는데 그 솜씨로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추정됨.
동헌(東軒)(군청(郡廳)터); 성재 북쪽에 있는 전 보령군 동헌(東軒)의 터. 1914년 보령군청이 대천으로 옮겨 가고 현재 중학교가 되었음.
방죽안 ; 상리 중앙에 있는 논.
배재산(주계산) ; 성재 남쪽에 있는 산. 이 산 밑까지 바다가 되어서 이곳에 배를 매었다 함.
보령교 ; 중리 중앙에 있는 다리.
보령성터 ; 성재 둘레에 있는 전 보령읍성(保寧邑城)의 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109자,
높이가 12자가 되었는데, 많이 허물어지고 일부분만 남아 있음.
보령향교 ; 향교말 동쪽에 있는 보령향교.
보령향교나무; 보령 향교에 있는 회화나무. 둘레 4∼5아름.
삼시랑 당굴 ; 질재 밑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삼신을 위하는 신당이 있음.
상리 ; 보령리 동쪽에 있는 마을.
성재마을 ; 보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보령읍성이 있었음.
역구렁목 ; 하리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다리들 ; 다반 서쪽에 있는 들. 예전부터 다리가 있었음.
장승배기(팽이나무젱이) ; 중리 북쪽에 있는 길. 장승이 박혀 있었음, 팽나무 정자가 있음.
주포장 ; 성재에 있는 주포면의 시장.
중리 ; 보령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중리교 ; 중리 복판에 있는 다리.
질재 ; 보령리에서 청라면 장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매우 길다. 이 재의 이름의 뜻
을 따서 장척면(長尺面)이 있다가 1914년에 주포면에 편입되었음.
탑산; 상리 동쪽 진당산 밑에 있는 산. 돌탑이 있음.
하리 ; 성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
해산루(海山樓) ; 성재 북쪽에 있는 고적(古跡).
향교산 ; 향교말 뒤에 있는 산.
향교말 ; 성재 동남쪽에 있는 마을. 보령향교가 있음.
화려안 ; 하리 끝에 있는 논.
9. 서천(舒川)
서천의 도읍 터는 현재 서천군 서천읍 사곡리, 군사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의 옛기록에는 서천의 진산(鎭山)이 오산(烏山)이라고 나와 있는데, 오늘의 오석산(烏石山)이 바로 그곳이다. 오석산은 서천읍 오석리, 사곡리, 화금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온 산의 돌이 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높이 127.1m로 이 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산의 남쪽에 마을이 자리잡았으나 서쪽이 바다쪽으로 트이고 동쪽도 감싸이지 못하고 허하여 풍수상 좋은 입지처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서천읍 일대의 지세(地勢)와 지명(地名)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구암리 ; 본래 서천군 장항면 지역으로 거북바위가 있으므로 거북바위 혹은 구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암리라 해서 남양면에 편인됨.
거북바위 ; 구암 뒤 산에 있는 바위.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음.
본모루 ; 소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송동 ; 구암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오산교 ; 구암리와 종천면의 경계에 있는 마을.
군사리 ; 본래 서천군 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변리, 하루리,
교촌과 동변리, 상루리, 사동, 화산리, 신리의 각 일부와 서부면의 동죽리 일부와 판산면의
황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천 군청이 있으므로 군사리라 해서 남양면에 편입됨.
갯골 공동묘지 ; 향교촌 북쪽에 있는 공동묘지.
구장터 ; 동편리에 있는 시장.
동문재 ; 동편리 북쪽에 있는 고개.
동방죽 ; 군사리와 화금리 사이에 있는 저수지.
동편리 ; 웃다락말 동쪽에 있는 마을.
생교굴(향교촌(鄕校村)) ; 동편리 동쪽에 있는 마을. 서촌향교가 있음.
새장터 ; 동편리에 있는 시장. 새로 생겼음.
서문재 ; 서편리 서쪽에 있는 고개.
서방죽 ; 군사리와 사곡리 사이에 있는 저수지.
서천역 ; 생교굴 동쪽에 있는 역.
서천읍성(舒川邑城) ; 군사리에 있는 조선시대(朝鮮時代) 때 서천의 읍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 3,525자, 높이 10자가 되며, 안에 샘이 다섯, 못이 둘이 있었음. 예전에 여자 100사람은 이 성을 쌓고 장사 1사람은 돌로 홍여다리를 놓기로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였는데 성쌓기가 막 끝나자마자 장사가 급히 홍여다리의 마지막 돌을 끼워 똑같이 끝이 나서 아무 일이 없었으나 그 돌 하나가 제대로 끼이지 못하고 솟아 있음.
서천평야 ; 웃다락말 남쪽에 있는 들.
서편리 ; 웃다락말 서쪽에 있는 마을.
솟은다리(홍여다리, 홍여교, 장다리) ; 군사리 중앙에 있는 다리, 돌로 홍여를 만들었음.
아랫다락말 ; 웃다락말 밑에 있는 마을.
웃다락말 ; 군사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인살뫼(인산) ; 웃다락말 남쪽에 있는 마을.
남산리 ; 본래 서천군 서부면의 지역으로서 남산 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봉하리, 동죽리, 계룡리, 화동의 각 일부와 개곡면의 신리, 상루리, 동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남산리라 해서 마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서천읍에 편입됨.
말음매재(마음티) ; 남산에서 마선면 봉남리 한적골로 넘어가는 고개.
벼락바위 ; 산정말과 남산 사이에 있는 바위. 여러 조각으로 되어 있는데 벼락 맞은 것이라고 함.
부채모랭이 ; 산정말 동쪽에 있는 모롱이. 전에 부처가 있었음.
산정말(신리) ; 남산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신선샘 ; 벼락바위 밑에 있는 샘. 물이 좋아서 이 물을 많이 마시면 신선(神仙)이 된다 함.
용방죽 ; 산정말 동쪽에 있는 못. 용이 살았다 함.
동산리(동살매) ; 본래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으로서 동산 밑이 되므로 동살매 또는 동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산리, 유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리라 해서 남양면에 편입됨.
골동매 ; 동살매 남쪽에 있는 광산.
동살미보 ; 동살매 동남쪽에 있는 보.
발송매 ; 원동산 서쪽에 있는 마을.
백토고개 ; 원동산 북쪽에 있는 고개. 백토가 많이 있음. 북쪽에는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다.
부엉재 ; 동살매 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부엉이처럼 생겼음.
안솔매 ; 원동산 서쪽에 있는 마을.
원동산 ; 동산의 원 마을.
두왕리 ; 본래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모동, 선왕리와
옥갈리, 삼수리, 온수리, 정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두모와 선왕의 이름을 따서 두왕리라 해서 남양면에 편입됨.
가재굴 공동묘지(共同墓地) ; 선왕절 앞에 있는 공동묘지(共同墓地)
각각뫼논 ; 두왕리에 있는 논.
김석환 효자비(孝子碑) ; 돈담매 입구에 있는 김석환의 효자비(孝子碑)
돈담매 ; 두왕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산수동 ; 돈담매 남쪽에 있는 마을.
선왕절 ; 돈담매 북쪽에 있는 마을.
선왕절방죽 ; 선왕절 남쪽에 있는 못.
소룡굴 ; 선왕절 앞에 잇는 골짜기.
오정굴 ; 돈담매 서쪽에 있는 마을.
옥갈매 ; 돈담매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정장매 ; 돈담매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는 시장터였음.
청용산(매미재) ; 돈담매와 산수동 사이에 있는 산.
황새바위 ; 청용산 밑에 있는 바위. 모양이 황새처럼 생겼음.
효자모랭이 ; 돈담매 밑에 있는 모랭이. 김석환 효자비가 있음.
둔덕리 ; 본래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둔덕으로 되었으므로 둔더기 또는 둔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학리와 월지리 동산리의 각 일부와 문장면의 백양리, 우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둔덕리와 해서 남양면에 편입됨.
강새미 ; 둔더기 동남쪽에 있는 논. 겨울에 물을 저장했다가 농사철에 씀.
구례보 ; 둔더기 서남쪽에 있는 보.
용학 ; 둔더기 서남쪽에 있는 마을․지형이 학같이 생겼음.
월고산 ; 둔더기 남쪼게 있는 산.
사곡리 ; 본래 서천군 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곡리, 사동, 금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동과 유곡의 이름을 따서 사곡리라하고 남양면에 편입됨.
느릇(유곡) ; 절굴 북쪽에 끝에 있는 마을.
사직단터 ; 서낭당 터 옆에 있는 사직단의 터.
서낭당터 ; 절굴 뒤에 있는 서낭당 터.
아홉모랭이 ; 용바위 서북쪽에서 오석리로 가는 모롱이.
용바위 ; 느릇 서쪽에 있는 바위.
절굴 ; 사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삼산리 ; 본래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길산리와 고산리, 황산리, 삼수동, 옥갈리, 갈산리의 각 일부와 개곡면의 화산리 신리의 각 일부와 한산군 서하면의 월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삼수와 길산의 이름을 따서 삼산리라 하고 남양면에 편입 됨.
가릇매 ; 질메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고살메(고산) ; 질메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
새텃말 ; 질메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질메다리(길산) ; 삼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철건너 ; 질메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장항선 철로 건너가 됨.
신송리 ; 본래 서천군 장항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송리, 신장리 , 중소리 일부와 비인군 일방면 장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장과 하송의 이름을 따서 신송리라 하여 남양면에 편입됨.
구개 ; 신송리에 있는 옛 내.
동청절 ; 하송 뒤 서쪽에 있는 절
사기점골 ; 하송 뒤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사기점토가 있음.
섭다리 ; 장마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송동 ; 신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송동산 ; 중송 서쪽에 있는 산.
왕소나무 ; 하송 뒤 송도산 기슭에 있는 큰 소나무.
장마루(신장) ; 중송 서남쪽에 있는 마을. 장이 섰었음.
중송 ; 송동 중앙이 되는 마을.
하송 ; 송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
오석리 ; 본래 서천군 장항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기동, 고룡리, 외장리, 구암리 일부와 비인군 이방면의 외산리, 하화리의 각 일부를 이곳에 있는 오석산(烏石山)의 이름을 따서 오석리라 하여 남양면에 편입됨.
고룡 ; 오석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뒷산이 용처럼 생겼다 함.
기동 ; 고룡 동남쪽에 있는 마을.
여수고개(외장티, 외장재) ; 고룡 서북쪽에 있는 고개. 구불구불 돌아서 여수(여우)에게 홀린 것 같다 함.
태월리 ; 본래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 장성리와 온수동, 유산리, 월지리의 각 일부와 장항면 어은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월리라 하고 남양면에 편입됨.
도룡골 ; 양지뜸 서북쪽에 있는 마을.
붓데미 ; 싸르메 서쪽에 있는 마을.
사고개 ; 태월리에서 화금리로 넘어가는 고개.
싸르메 ; 태월리 중앙에 있는 마을.
양지뜸 ; 테메 북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
월지 ; 싸르메 북쪽 월고산 밑에 있는 마을.
음지뜸 ; 테메 남쪽 밑에 있는 마을.
장선 ; 싸르메 서북쪽에 있는 마을.
적은 온수골 ; 싸르메 남쪽에 있는 마을.
절터 ; 월지 북쪽에 있는 절터.
테메(태산) ; 싸르메 서남쪽에 있는 마을.
화금리 ; 본래 서천군 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과 금산리, 화산리의 각 일부와 판산면의 갈산리, 온수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산과 금산의 이름을 따서 화금리라 하고 남양면에 편입됨.
갈뫼 ; 이불매 동남쪽에 있는 마을. 갈모처럼 생긴 산이 있음.
갯굴 ; 이불매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다.
김길곤 효자문 ; 방죽재 안에 있는 김길곤의 효자 정문.
논동골(금산) ; 이불매 서쪽에 있는 마을.
당거래산 ; 갈뫼에 있는 산.
동방죽 ; 방죽재와 논동굴 앞에 있는 논.
방죽재 ; 동방죽 위쪽에 있는 마을.
사우고개 ; 화금리에서 태월리로 넘어가는 고개. 모양이 새우처럼 생겼다 함.
새뜸 ; 이불매 남쪽에 있는 마을.
새석굴 ; 논동굴 서쪽에 있는 마을.
서밧텡이 ; 논동굴 서남쪽에 있는 마을.
서방죽 ; 논동굴 서쪽에 있는 논과 보.
안굴 ; 논동굴 안쪽에 있는 마을.
약바위 ; 이불매 뒤 동부쪽에 있는 산.
옥녀봉 ; 논동굴 서북쪽에 있는 산. 옥녀처럼 단정하게 되었음.
온숫골 ; 논동굴 북쪽에 있는 마을.
이불매(화산) ; 화금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중동바위 ; 이불매 뒤에 있는 바위. 산이 높고 바위가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중외논 ; 서밧텡이와 논동굴 사이에 있는 논.
참샘 ; 새석굴 아래에 있는 샘.
태봉 ; 안굴 북쪽에 있는 산.
틀깬얌 ; 화금리에 있는 대.
화성리 ; 본래 서천군 장항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북리, 화리, 어은동, 화호리 일부와 비인군 이방면의 담화리 일부를 병합하여 화리와 성북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고 남양면에 편입됨.
구석이 ; 웅굴 서쪽에 있는 마을.
남생이 ; 응굴 옆에 있는 마을. 남생이의 형국이라 함.
대마굴(담화) ; 화성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동뫼 ; 응굴 동쪽에 있는 마을.
들장보 ; 응굴 남쪽에 있는 보. 전에는 못이 있었음.
목용탕 ; 응굴 북쪽, 사발봉 중복에 있는 샘 바위 속에서 나옴.
사발봉 ; 응굴 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사발처럼 생겼음.
새뫼 ; 응굴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매처럼 생겼다 함.
시루굴(화리); 대마굴 서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시루처럼 생겼다 함.
어은방죽논 ; 응굴 서남쪽 앞에 있는 논. 겨울에 물을 저장했다가 농사철에 씀.
응굴(어은) ; 대마굴 북쪽에 있는 마을. 사방이 막혀 있음.
잣디 ; 남생이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산의 뒤가 됨.
적은 두람배미 ; 큰 두람배미 동쪽에 있는 논.
큰 두람배비 ; 어은 서남쪽 앞에 있는 논.
텃굴 ; 응굴 동북쪽에 있는 마을.
화성 공동묘지(共同墓地) ; 시루굴 북쪽에 있는 공동묘지(共同墓地).
第3節 신앙풍수(信仰風水)의 몇 가지 예(例)
1. 풍수지명(風水地名)
지리학(地理學)에서 지명(地名)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연구량(硏究量)이나 업적(業績)은 대단히 미흡하다. 오히려 국어국문학(國語國文學) 쪽에서 지명(地名) 연구(硏究)가 활발한 편이다.
지명(地名)은 지역(地域)의 성격(性格)을 강하게 반영한다. 자연환경(自然環境) 뿐만 아니라 인문적(人文的)인 여건까지 표출하는 것이 통례이다. 지명(地名)은 인류(人類)의 출현(出現) 이래 어떤 형태로든 땅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붙여지는 것이므로, 자연지명(自然地名)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객관적(客觀的)인 것은 없고 개인(個人) 혹은 집단(集團)의 의지(意志) 주관(主觀)에 따라 명명(命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地域)의 특성(特性)에 관심을 기울이는 지리학(地理學)에서 지명(地名)을 중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국립지리원(國立地理院) 통계(統計)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지명(地名)(1986년 8월 15일)은 법정(法定) 지명(地名)에 자연부락(自然部落) 지명(地名)을 합하면 8만 7천819개가 되고, 여기에 곡(谷), 평야(平野), 산(山), 저수지(貯水池) 등 자연 지명(自然 地名) 및 인조적 지명(人造的 地名) 약 46만5천개를 합하면 대략 55만개 가량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北韓)의 지명(地名)까지를 보태면 우리나라의 지명(地名)은 약 100만개로 추계(推計)되는 셈이다. 여기에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고려(高麗)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들어설 때, 그리고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하여 강압적(强壓的)으로 저질러진 지명 개칭(地名 改稱)
에 의하여 없어진 고지명(古地名)까지를 포함시킨다면 도저히 정확한 수를 알 수 가 없다.
따라서 지명(地名)의 유래(由來)를 알아 낸다는 것은 더욱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 연구의의(硏究意義)는 충분하다고 믿는다.
지명(地名)의 유래(由來)는 매우 다양하다. 크게는 자연조건(自然條件)을 반영하는 지명(地名)과 인문조건(人文條件)을 표출시키는 지명(地名)으로 이대분(二大分)되나 실제는 그 복잡성은 분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착종(錯綜)스럽다. 한국(韓國)의 지명(地名)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資料)를 정리한 이영택(李泳澤)에 의한 지명분류(地名分類)는 다음과 같다.
첫째, 풍토(風土), 얼 지명(地名)에는 기상 현상(氣象 現像), 바람, 비, 눈, 구름, 얼음 등 기상 요소(氣象 要素)/동서남북(東西南北), 전후좌우(前後左右), 초중측(初中側)등 방위(方位)/ 암음(暗陰), 양지(陽地) 등 음양(陰陽), 명암(明暗) 지명(地名)/ 태양(太陽), 사람, 제사(祭祀), 정신(精神) 등 얼 지명(地名)이 있다.
둘째, 종교(宗敎), 동성 지명(同姓 地名) 셋째, 자연 지명(自然 地名) 넷째, 산업지명(産業地名) 다섯째, 교역지명(交易 地名), 여섯째, 방어지명(防禦地名), 일곱째, 궁(宮), 관직(官職), 행정지명(行政 地名), 그리고 음운(音韻), 오용(誤用), 특수 지명(特殊 地名)에도 무수한 세분류(細分類)의 지명 유형(地名 類型)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풍수 유래 지명(風水 由來 地名)은 풍수사상(風水思想) 자체의 특성상(特性上) 가장 정교(精巧)한 환경표출(環境表出) 기능(機能)을 가지는 바, 비록 그 지명(地名)이 직접적으로 풍수설화(風水說話) 유래(由來)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자연발생(自然發生) 촌락(村落)들이 풍수(風水)와 관계(關係)되는 얘기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천착해 볼 수 있는 필요 요건(必要 要件)의 충족(充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국론(形局論)은 풍수술법(風水術法) 중에서 지세(地勢)의 외관(外觀)에 의하여 그 감응(感應) 여부를 판단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풍수설화(風水說話) 중 가장 많이 들먹여지는 내용이고 풍수(風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지명(地名)에는 가장 흔히 등장되어진다.
형국(形局)은 오성(五星)에 의하여 인(人), 물(物), 금(禽), 수형(獸形)으로 사대분(四大分)되는데, 『설심부정해(雪心賦正解)』라는 지가서(地家書)에 의하면「목성(木星)과 화성(火星)은 주로 사람의 모양에, 금성(金星)은 조류(鳥類)의 모양에, 토성(土星)은 짐승의 모양에, 그리고 수성(水星)은 용(龍)과 뱀의 모양에 많이 대비시킨다. 이때 목성(木星)은 산의 모양이 곧고 모나지 않으며 우뚝 솟은 것, 화성(火星)은 불꽃같이 뾰족하고 날카롭게 생긴 것, 금성(金星)은 둥근 모양을 한 것, 토성(土星)은 반듯하고 옆으로 뻗어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것, 수성(水星)은 물이 흐르는 듯 큰 굴곡없이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뻗어간 것이다.
혈(穴)을 취함에 있어서는 사람은 심장과 배꼽과 음부(陰部)에, 날짐승은 날개와 등우리와 볏에, 길짐승은 그 짐승들의 중요 부분, 예컨대 성기(性器)나 유두(乳頭)에, 그리고 용사류(龍蛇類)는 코와 입와 귀와 배와 머리와 꼬리에 빗대어 행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들의 어휘 구조는 인(人), 물(物), 상(象) 등의 표현주체(表現主體)와 그들의 형자(形姿) 설명(說明)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외적(例外的)으로는 복호형(伏虎形), 와우형(臥牛形)처럼 형자(形姿)의 표현없이 주체(主體)인 인(人), 물(物), 상(象)만으로 형국(形局)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고, 무수형(舞袖形), 행주형(行舟形)처럼 주체(主體)없이 형자(形姿)만을 내세우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 주체(主體)에 형자(形姿)를 덧붙이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편이다.
여기서는 경기도(京畿道) 해당지역(該當地域)의 풍수(風水) 및 풍수지명(風水地名) 설화(說話)의 몇 가지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시흥시 신관동(始興市 新官洞)에 살고 있는 지관(地官)인 한 노인에 의하면 포리의 인근 방산리는 지력(地力)이 좋아서 그 부락엔 군인(軍人) 중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대장도 나왔고 부락의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포리(浦里)에서는 멀리 군자군의 오이도(烏耳島)에 있는 도둑봉(도덕봉)이 보이는데 이것이 보이는 집이라면 집안에 도둑이 잦고 액운을 맞는다고 하여 이곳의 집들은 그 도둑봉을 피하기 위해 응달에 세운다고 하였다.
포리(浦里)의 뒷산 언덕에는 도당(都堂)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이전에는 위의 학미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데에는 역시 풍수설이 관련된 것 같다. 즉 그 산의 중인은 이 도당의 자리가 진혈(眞穴)이라고 믿고 이 당에 불을 질러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바로 그 자리에 그의 조상을 묻었다고 부락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풍속(風俗)과 자연(自然),『내 고장의 전통』,1984, 경기도(京畿道))
화성군 정남면 발산리(華城郡 正南面 鉢山里)에서는 산제사(山祭祀) 또는 당제사(堂祭祀)라고 불리우는 부락제(部落祭)를 매년 음력 10월 초에 한번씩 지내고 있다. 마을 뒷산 꼭대기에 약 100년생의 참나무가 있고 그 옆에 당집이 있다. 이 발산리의 산제는 이 부락민의 것은 아니다. 즉 이 산제는 인접한 세 개의 행정부락(行政部落)인 발산1리, 계향리 그리고 신리가 공동으로 지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세부락이 모두 당집이 있는 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 같다. 발산리에는 전체 가구의 거의 반수가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어서 산제에 대한 관심은 약하고 오히려 가장 작은 마을인 계향리의 사람들이 아마도 당집에서 가깝고 당우물도 그 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탓인지 산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다.
이곳의 산제 준비는 매년 10월 초에 동리의 유지들이 모여 산제를 지낼 임원을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임원은 3명으로 당주(堂主), 제관(祭官) 및 축관(祝官) 각 한명씩으로 구성되는 바, 대개 당주는 매년 다른 사람으로 뽑는다. 이 임원들은 당집과 당우물 가까운 계향리의 사람들로 구성되며 이에 대해 다른 두 부락의 사람들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임원을 뽑을 때에는 생기 복덕(生氣 福德)을 맞추어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나 부인(婦人)들이 생리(生理) 중에 있는 등 부정(不淨)을 탄 사람들을 피하여 뽑는다. 당주는 산제의 집행을 위한 전반적인 상황들을 관할하고, 제관과 축관은 산제를 지내는 당일의 제사에만 참여하여 당주를 돕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 세사람의 임원들이 모두 계향리 사람들로 정해지는 또 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다른 두 부락과는 달리 신작로에서 외지니까 아무래도 외부와의 접촉이 적고 부정이 적다는 점이라고 부락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산제를 위한 비용은 매년 부락 주민들의 추렴에만 의존하고, 따로 산제를 위해 마련된 재산은 없었다. 1976년의 경우 가구당 쌀 두말 또는 현금 5천원 정도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자금 염출 방법은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만약 산제를 지내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비용은 내지 않아도 된다.
제삿날 당집에는 부정타지 않은 소위 깨끗한 사람만이 올라와 참관한다. 여자는 절대로 이에 참여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당주, 제관 그리고 축관은 새로운 신을 신고 정장 차림으로 올라 간다. 이분들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며 옷은 새로 해입을 필요는 없으나 평소에 입던 것을 깨끗이 정성스럽게 손질하여 입는다. 당집에서 제사의 모든 과정이 전부 끝나고 난 후에는 각 마을의 모든 집에서 각기 한 뭇씩 거두어 들인 짚으로 당불을 피우는 관습이 있는데 아마 이것도 의례적인 정화 작업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날에는 집집마
다 두 뭇의 짚을 거두어 당집의 지붕을 해마다 갈고 나머지로 당불을 피웠으나 지금은 지붕개량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 한 뭇씩만 거둔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당집의 역사는 200여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양식으로 당제사를 올리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화성군(華城郡) 화산 밑의 융건릉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朝鮮)의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는 그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산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移葬)을 하고 산소 참배에 자주 행차를 하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처럼 능참봉(陵參奉)을 하나 얻어 하니까 한달에 임금님의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다. ”라고 하던 능참봉(陵參奉)의 넋두리도 그럴듯한 말이며 그러나 어찌 한달에 스물 아홉번씩이나 임금님이 행차를 하실 수 있었겠는가. 다만 자주 다니셨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정조께서는 산소를 모신 화산은 물론이거니와 지지대고개에서부터 수원성 일대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 소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호두나무 등 여러 수종을 1년에 두 번씩 식재나 파종을 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것을 20년 동안이나 계획성있게 해서 산들이 푸르렀고, 소나무들의 숲이 울창하기만 했다. 앞을 내다 보고 여유있게 사는 마음, 우아하고 넉넉한 선인들의 도량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지금도 화산에도 우뚝 솟아 있는 노송지대가 이 고장의 상징이 되다시피 되었다. 능 일대의 조림(造林)은 전국 각지에서 종묘나 씨앗을 채취해 와서 인공적(人工的)으로 계획조림(計劃造林)을 했다는 것이며 도내 장정들을 동원하여 사역했다고 한다.
정조께서는 그 할아버지이신 영조에 의하여 애처롭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를 양주 배봉산에 모시어 영우원(永祐園)이라 했던 것을 왕이 된 뒤 수원 땅으로 이장(移葬)해 모시기로 하였다. 문제는 풍수상(風水上)의 길지(吉地)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된 곳이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華城郡 泰安邑 安寧里)로 옛 수원부의 도읍지였던 땅이다. 그래서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한 것이다.
미금시 평내동(渼金市 坪內洞) 산 97번지 백봉산(栢峰山)(잣봉) 서쪽에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중형인 의안대군 이 화의 묘소가 있고 같은 산 54번지에는 옛 궁터가 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전 태조가 등극한 뒤에 본인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죽은 후의 묘소를 미리 정해 놓아야 하겠는데, 이를 결정하지 못하여 근심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날 형인 의안대군과 함께 무학대사를 데리고 저곳이 능소(陵所)로서 명당지지(明堂之地)라고 지세(地勢)를 설명하니 태조가 보기에도 그러한지라 과연 대사의 말대로 거기가 좋겠군 하고 흡족히 여겼다.
옆에서 무학대사와 아우 태조의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안대군이 “그럼 내 자리는 어디가 좋은가”하고 물으니 무학대사가 태연하게 말하기를 그 자리도 다 보아 놓았다면서 “지금의 백봉산의 사좌(巳坐)올시다”하고 말하였다 한다.(그러나 이 자리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자리임)
그 당시 태조는 무학을 대사로 존경하고 대우를 잘 하였는데 의안대군은 이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 아우 태조가 등극하자마자 중들을 4대문 밖으로 몰아내는가 하면, 일반 사람을 만나면 “소승 문안드립니다”라고 하며 절을 해야만 되도록 제도적으로 탄압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평소 의안대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지내오던 무학대사는 의안 대군의 묘소를 좋은 곳에 잡아 줄 리가 없었고 백봉산에 마치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산세에다 잡아 주었다는 것이다.
이후 의안대군을 태조 등극 이후 모든 공을 아우인 태조와 조카인 정종과 태종에게 돌리고 지금의 평내리 54번지에 궁을 짓고 여생을 즐겼다고 하며 단종 사화로 인하여 이 궁은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편 의안대군이 별세하자 태종은 중부의 장례를 국장으로 엄숙하게 치르게 했으며, 유해는 역시 미리 잡아 놓았던 백봉산 사좌(巳坐)에 모셨다. 그 후 삼대(三代)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역시 소실되었으나 숙종 때 이르러 재건하였으며 구한말까지 나라에서 제물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의안대군의 묘소는 얼핏 보기에는 명당 자리같아 보이나 실은 그렇지 못한 자리다. 단종사화 때 의안대군의 손자인 하령군 이하 열여섯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280년간이나 의안대군의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오던 중 숙종대왕이 의안대군과 아들 완친군의 공을 높이 여기고 신원(伸寃)을 하였다. 현재 의안대군의 묘 아래 궁평마을은 옛 궁터이며 대군의 후손이 살고 있다.(제보자 : 이규복(李圭福))
여주(驪州)의 영릉(英陵)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그의 왕비(王妃)를 함께 모신 합장릉(合葬陵)이다. 처음에는 광주 헌릉(廣州 獻陵)에 있었으나 예종 1년(1469)에 현재의 능인 여주군 왕대리로 천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리는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라 하여 선정된 것이었지만 이곳에 영릉을 천장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100년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일러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한다. 이 영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원래 이 능 자리는 어떤 대가집 산소가 있었다고 한다.(일설에는 공주 이씨의 묘가 있었다고 함. 그 대가집 산소 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여기에 묘를 쓰되 봉분(封墳)도 만들지 말 것이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석이나 비각을 세우지 말 것을 미리 예언해 주었다. 그러자 그 후손들을 그 산소를 쓴 뒤부터는 재산이 불어나고 자손들이 번창하자, 어찌 양반이오 세도가의 집안에서 조상(祖上)의 산소(山所)를 봉분(封墳)도 모우지 않고 비석도 안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가 되는 일이라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시 지관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분상을 모아 버젓하게 산소를 만들었고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도리어 화를 입게 될 줄이야.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영릉을 천장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어 각처에 지관을 풀어 명당(明堂) 자리를 찾고 있던 중으로 한 지관이 명당(明堂)을 찾아 이곳 능서면 왕대리까지 오게 되었다. 때는 찌는 듯한 삼복 더위 하절기였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관은 더 이상 산을 볼 수가 없어 한 곳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젖은 옷 걱정을 하고 있는 참에 소낙비는 지나가고 시원한 마음과 함께 주위가 밝아짐에 따라 저 건너 편에 한 기의 분묘(墳墓)가 바라보이는 것이었다. 그 분묘(墳墓)를 바라보는 순간 지관은 어떤 예감과 함께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는 명당 자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주변 산세와 지맥 등 다시 한번 보아도 이 묘자리는 명당(明堂) 중의 명당(明堂) 자리였으므로 지관은 위치(位置)와 방위(方位)를 다시 확인한 다음 쏜살같이 대궐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먼저 사람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고 묘지(墓地)를 노출시켜 이장(移葬)의 고역을 치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대가집의 묘를 이장(移葬)함에 있어서도 여사한 얘기가 전해져 온다. 즉 이곳에서 연을 날려 그 연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기 때문에 그곳이 연라리 혹은 연하리가 되었다는 지명 설화(地名 說話)이다.
2. 풍수설화(風水說話)
모든 문학 작품(文學 作品)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학 작품 속에는 작자(作者)의 사상이 융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풍수설화(風水說話) 역시 설화라는 한 장르에 포함되는 문학 작품으로 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설화는 민중적(民衆的), 민족적(民族的)인 문학이기 때문에 그 사상 역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풍수 설화는 어떤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
풍수 설화는 그 명칭에서도 의미하듯 풍수 사상을 중심으로 담고 있는 설화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구비문학(口碑文學)이 그러하듯이 설화도 오랜 시일에 걸쳐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볼 때 설화라 하여 반드시 풍수 사상만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이 가졌던 갖가지 사상이 용해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1982,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 나와 있는 보령군 대천읍(현 대천시)의 몇가지 풍수 설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야기 내용은 지극히 간략하게 간추렸음을 밝혀 둔다.
1) 유복자 삼정승 날 명당
아버지가 죽어 묘자리를 보게 되었다.
삼정승이 나고 상제 둘이 죽을 자리였지만 그냥 장사 지냈다.
큰 상제와 작은 상제가 죽고 셋째 상제는 길을 떠났다.
어느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여자 주인이 자기 딸 마중을 가고 딸은 집에 돌아왔다.
딸은 아랫목 이불 속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이불 속에는 어미니가 아니라 한 총각이 있었는데 강간을 당했다.
이튿날 총각은 죽고 딸은 총각이 일러 준 곳을 찾아 갔다.
그후 세 쌍둥이를 낳았다.
그 세 아들이 장성하여 삼정승이 되었다.
2) 부부 동침한 자리가 명당자리
아버지가 죽었다.
작은 아들이 원래 유명한 지관이지만 장사는 지내지 않고 돈 삼백냥을 요구했다.
삼백냥을 장만하고 동생을 부르니까 동생이 “형님은 시신을 지고 형수님은 3일 먹을 양식을 지고 따르라”했다.
산중턱에 이르니 형님 내외를 산에서 자라고 하고 자기는 마을로 갔다.
벙거지 쓴 놈이 와서 우리 대왕 왕림하셨다고 하고 갔다.
이튿날 역시 그곳에서 자고 밤에 벙거지 쓴 놈을 만났다.
3일째 드디어 묘를 썼다.
형수가 잉태하여 장군을 낳았다.
3) 꼬마한테 창피 당한 지관
구산(求山)하는 분이 있었다.
하루는 어디를 가면서 지관이 오면 기다리고 아들에게 당부를 했다.
지관이 와서 아들과 글 내기를 했다.
지관을 헐뜯어 지은 글이므로 지관이 화가 나서 갔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 글을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전처럼 구산하러 나서지 않았다.
4) 조상의 묘 지킨 꼬마의 기지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아들이 연유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정경부인 묘자리를 써서 앓아 누웠다고 일러 주었다.
아들이 글을 지어주고 나라에 바치라고 했다.
그 후로 정경부인의 묘를 당장에 파갔다.
5) 오이 먹고 잉태한 무학대사
무학대사 어머니가 빨래하러 갔다가 떠내려 온 오이를 주어 먹었다.
시집간 날 첫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
친절한 남편이 뒷 시중을 들어 주고 그 아이를 밖에 버렸다가 밝은 날 주워다가 다른 사람에게 키워 달라고 맡겼다.
장성한 후에 찾아 와서 형제들과 인사했다.
자기 어머니가 없음을 알고 중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찾아와 통곡을 했다.
묘자리를 잡아준다면서 시키는대로 하라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시신을 배에 떠내려 보내니 아우들은 시신을 잃어버린 줄 알고 슬퍼했다.
후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 어느 섬에 들렀는데 꿈에 아버지가 현몽했다.
주모에게 물어보니 자기 아버지 묘가 이 섬에 있었음을 알았다.
6) 이토정 일화 Ⅰ
아버지가 산소를 쓰라고 기도를 했다.
마지막 날 밤 꿈에 승주산 팔모란 데를 보았는데, 노가지나무가 무성하고 모란 꽃이 막 피어나는 곳이었다.
실제로 성주산에 가서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한탄하며 내가 정성이 부족했구나 하고 옥천에 묘를 썼다.
7) 이토정 일화 Ⅱ
아관이라고 동네에 터를 닦고 자손 대대로 살았다.
죽을 때 유언을 하기를 철마가 이 동네를 지나거든 떠나라고 했다.
과연 철마가 동네를 지나가니 자손이 가난해지고 떠나게 되었다.
8) 도선이와 박상이
도선이와 박상이가 묘자를 보러 다니다가 시장하여 원두막에 갔다가 참외를 대접받고 은혜로 묘자리를 봐주고 열흘 후에 온다고 했다.
이튿날 전날과 똑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이 사람은 사흘 후에 온다고 했다.
사흘 후에 묘를 썼는데 열흘 뒤에 온다는 사람이 왔다.
발복이 늦으니 좌향하라 하여 그렇게 고쳐서 묘를 썼다.
지관을 대접하려고 산 너머 과수집에 쌀과 돈을 꾸러 갔다.
과수댁은 지관을 모셔 오라 했다.
과수댁과 같이 살게 되었다.
십년마다 시신의 머리를 달리 하라고 일러 주었다.
9) 명당 얻어 부자된 숯장수
숯장수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지게에 지고 가서 아무렇게나 장사를 지냈다.
잿마루에서 한 지관이 그 자리를 보니 철모자 쓴 사람이 쳐다 봐야 하고 사람을 죽이면 명당이 될 자리였다.
숯장수는 아무렇게나 파고 장사를 지내는데 솥뚜껑을 빌려 이어 가던 여자가 가까이 와서 숯장수 하는 일을 들여다 보았다.
시신을 넣고 발로 꾹꾹 밟고 골머리를 죽였다.
지관이 생각한대로 일이 묘하게 되어 명당이 되었다.
몇 년 후에 와 보니 숯장수는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0) 때가 있으면 산다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받았다.
형님은 잘 챙겨서 부자로 살고 아우는 글만 읽으니 가난하게 살았고 자식 또한 많았다.
하루는 아내더러 형님 집에 가서 아버지가 쓰시던 쇠주머니를 가져 오라고 했다.
그것을 가지고 길을 떠나와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노파를 만나 인도되었다.
그집 아들이 병이 들어 유명한 의원이 다 모였으나 못고쳤다.
그 동생은 주인이 보기에는 아는 것이 없어 아무 말 없이 얻어 먹기만 하나 가장 잘 고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니 주인이 화를 냈다.
자기 몸의 때를 벗겨 주인 집 아들에게 먹이니 그것을 먹은 아들이 토해 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부자가 되어 있었다.
11) 산모를 구한 적덕으로 얻은 명당
옛날에 한 사람이 결혼하여 부모님과 구차하게 살고 있었다.
친정집은 부유하여 먹을 것을 얻으러 가다가 산 중턱에서 산모를 발견하고 주막집에 맡겼다.
처가에 다녀와서 얻은 돈을 모두 그 여자를 위해 주막집에 맡겼다.
산모가 후일 찾아와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 남자 어머니가 냉이국이 먹고 싶다고 하여 산모가 냉이를 캐러 갔다.
홀연히 대사가 나타나 명당 자리를 알려 주고 사라지니 집에 돌아와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다.
그 남자는 금강산으로 구암대사를 찾아 떠나고 몇 달 며칠을 걸려 택일을 해 왔다.
그 어머니의 묘를 그 자리에 썼다.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다.
12) 밭 머리에 묻고서도 명당
아침에 오줌통을 지고 밭에 가니 송장이 있었다.
작대기로 굴려서 건너편 밭에다 두었다.
상대편 밭 주인도 오줌통을 지고 와 보니 송장이 있어 밭둑에 잘 묻어 주었다.
후일 알고 보니 부자 노인인데 객사한 것이다.
후손들이 와서 땅을 사 주고 해서 금방 부자가 되었다.
13) 잘못 쓴 명당
남의 집 신세를 지고 묘자리 하나를 봐 주었다.
돌아와 자기 선생님에게 물어 보니 잘못 썼다는 것이다.
찾아가 보니 과연 선생님 말씀대로 그 집안 식구가 앓고 있었다.
이장시켜 주니 괜찮았다.
14) 목만 잘라 묻는 명당
삼형제가 아버지의 임종을 하는데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유언대로 아버지 목을 베어서 강을 건너가니 바위가 있고 바위를 떠 들고 아버지 머리를 넣은 후 북으로 행진했다.
비가 내려 갈 수가 없어 인가를 찾으니 불 하나가 있었다.
왠 처녀가 나오면서 맞이했다.
처녀는 죽은 사람으로 자기를 소생시킬 방법을 일러 주었다.
아침에 날이 새서 보니 서울의 어느 정승 집이었는데 처녀 집인줄 알고 사실을 말 하니 하옥시켰다.
저녁에 서광이 있어 옥에서 풀려 나와 처녀의 편지를 보게 되었다.
무덤을 파고 처녀가 준 병의 약을 차례로 바르니 소생되었다.
셋째 아들과 결혼하였다.
나라에서 지혜 많은 사람을 구했는데 셋째 아들이 뽑혀 대국의 천자가 되었다.
P 46
다음 :
第2章 충청남북도 지역의 풍수지리
(忠淸南北道 地域의 風水地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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