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沈의 書集傳序
[蔡沈(1167~1230년)은 蔡元定의 셋째 아들로 字는 仲默, 號는 九峰, 諡號는 文正이며 建陽(지금의 福建) 출신이다.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白鹿洞書院에서 朱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즈음 주자는 당시 재상인 趙汝遇의 천거로 남송 제4대 황제인 寧宗의 經筵官이 되어 개혁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慶元 원년(1195년)에 반대파인 韓侂胄(한탁주) 등이 득세하면서 이른바 ‘慶元黨禁’을 일으켰는데 먼저 조여우를 유배 보내 죽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道學을 배척하여 僞學이라 하고, 조여우와 주희를 따르는 무리들 59인을 逆黨이라 하면서 귀양 보냈다. 이때 蔡元定도 연루되어 蔡沈은 아버지를 따라 官道州(지금의 湖南道縣)로 유배를 갔는데 짚신을 신고 삼천리 길을 걸어갔다. 그곳에서 蔡沈은 문을 닫아걸고 글을 읽으며 무리들에게 강학했다. 아버지가 죽자 운구하여 고향땅으로 돌아온 뒤에 九峰山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尙書』를 익혔다. 수십 년 만에 그윽하고 은미함을 열어 밝혀 아버지와 스승의 설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왕왕 선유들이 미치지 못한 바를 발명했기에 학자들은 그를 ‘九峰先生’이라 일컬었다. 朱子는 만년에 蔡沈에게 『書集傳』을 짓도록 했다. 그는 邵雍의 『皇極經世』, 이른바 ‘先天數學’으로 『尙書』 홍범편을 해석했다. 天地와 人物은 다 數로 말미암아 파생되니, 天地가 시초가 되는 까닭은 數이고, 인물이 생하는 바도 數이며, 만사가 얻고 잃는 까닭도 數라고 인식했다.]
慶元己未冬에 先生文公이 令沈으로 作書集傳하라하시고 明年에 先生이 歿하시다 又十年에 始克成篇하니 總若干萬言이라 嗚呼라 書豈易言哉리오 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이 皆載此書하니 而淺見薄識이 豈足以盡發蘊奧리오 且生於數千載之下하여 而欲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亦已難矣라
경원(남송 제4대 황제인 寧宗의 연호) 기미년(1199년) 겨울에 문공(朱子의 詩號) 선생께서 나에게 『書集傳』을 지으라고 명하시고 이듬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10년만에야 비로소 편을 다 지었으니 대략 만 여 글자이다. 아아, 『書』를 어찌 쉽게 말하리오. 2제3왕이 천하를 다스린 대경대법이 다 이 글에 갖춰졌으니 본 것이 얕고 아는 것이 박한 자가 어찌 족히 온오함을 다 발했겠는가. 또한 수천 년 뒤에 태어나 수천 년 전에 대해 밝게 강론하고자 했으니 또한 매우 어려웠다.
然이나 二帝三王之治는 本於道하고 二帝三王之道는 本於心하니 得其心則道與治를 固可得而言矣리라 何者오 精一執中은 堯舜禹相授之心法也요 建中建極은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일새라 曰德曰仁曰敬曰誠은 言雖殊而理則一이니 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라 至於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이오 言民則謹其心之所由施니 禮樂敎化는 心之發也요 典章文物은 心之著也요 家齊國治而天下平은 心之推也니 心之德이 其盛矣乎로다
그러나 2제3왕의 다스림은 도에 뿌리하고 2제3왕의 도는 마음에 뿌리 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도와 다스림은 진실로 가히 얻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미롭고 한결같이 하여 中을 잡으라 함은 堯舜禹가 서로 준 심법이고, 中을 세우고 極을 세움은 商湯과 周武가 서로 전한 심법이기 때문이다. 德이라하고, 仁이라하고, 敬이라하고, 誠이라고 한 것은 말은 비록 다르지만 이치인즉 하나이니, 이러한 마음의 묘함을 밝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말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이 나오는 바를 엄하게 하고, 백성을 말하는 데에서는 그 마음이 말미암아 베푸는 바를 삼가니, 예악과 교화는 마음의 발함이오, 법도와 문물은 마음의 드러남이고, 집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치하는 것은 마음의 미룸이니, 마음의 덕이 그 성대하도다.
二帝三王은 存此心者也요 夏桀商受는 亡此心者也요 太甲成王은 困而存此心者也라 存則治하고 亡則亂하나니 治亂之分이 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라 後世人主 有志於二帝三王之治인댄 不可不求其道요 有志於二帝三王之道인댄 不可不求其心이니 求心之要하며 舍是書면 何以哉리오
2제3왕은 이 마음을 보존한 자이고, 하의 걸과 상의 수(紂王)는 이 마음을 잃은 자이고, 태갑과 성왕은 곤하면서도 이 마음을 보존한 자이다. 보존하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지니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의 나뉨이 그 마음을 보존하느냐 보존하지 못하느냐의 여하에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후세의 임금이 2제3왕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고, 2제3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의 요체를 구하면서 이 글을 버린다면 무엇으로써 하리오.
沈이 自受讀以來로 沈潛其義하고 參考衆說하여 融會貫通에 廼敢折衷하니 微辭奧旨는 多述舊聞이오 二典禹謨는 先生이 蓋嘗是正하사 手澤尙新이로다 嗚呼惜哉라 集傳은 本先生所命이라 故로 凡引用師說을 不復識別이라 四代之書를 分爲六卷이라 文以時異나 治以道同하니 聖人之心이 見於書猶化工之妙著於物하니 非精深이면 不能識也리라 是傳也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엔 雖未必能造其微이나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書엔 因是訓詁면 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리라 嘉靖己巳三月旣望에 武夷蔡沈은 序하노라
내가 배워 읽은 이래로 그 뜻에 깊이 잠기고 여러 설을 참고하여 융화 관통함에 이에 감히 절중하니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은 대부분이 옛날에 들은 것을 기술했고, 2전(요전편, 순전편)과 우모(대우모편)는 선생(주자)께서 일찍이 바로잡으셔서 손때가 아직도 새롭도다. 아아, 슬프도다. 『집전』은 본래 선생이 명한 바이다. 그러므로 무릇 인용한 스승의 말씀을 다시 구별하여 기록하지 아니했다. 4대(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글을 나누어 6권(제1권 虞書 5편, 제2권 夏書 4편, 제3권 商書 17편, 제4권 周書 13편, 제5권 周書 8편, 제6권 周書 11편)으로 하였다. 글은 때로써 다르나 다스림은 도로써 같으니 성인의 마음이 글에 나타난 것은 화공(천지조화의 이뤄냄)의 묘함이 물건에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정미롭고 깊은 자가 아니면 능히 알지 못하리라. 이 『傳』이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의 마음에 대하여는 비록 반드시 그 은미한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의 글에 대하여 이 훈고를 따른다면 또한 가히 그 가르치는 뜻의 대략을 얻을 것이다. 가정(남송 寧宗 15년) 기사년(1209년) 삼월 보름날에 무이 채침은 쓰노라.
衷 속마음 충, 여기서 음은 ‘중’ 識 앞은 ‘기록할지’, 뒤는 ‘알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