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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한 채가 곧 마을?… 102칸짜리 ‘선교장’ 아시나요?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15-1>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경북 봉화읍 달실마을에서 다소 시간을 들여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선교장(船橋莊)’으로 향한다. 선교장은 102칸이나 되는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5호로 지정됐다. 2000년 KBS(한국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의 취지는 우리나라의 전통마을을 찾아 그 마을이 가진 의미를 헤아리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긋나게 반가로 알려진 선교장을 다루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규모는 99칸이라고 알려졌다. 검소함을 덕목으로 삼고 있던 조선시대라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예외’가 없다는 말처럼 실제 우리 전통한옥 중에는 99칸보다 큰 집이 존재한다. 102칸짜리 집, 선교장이 그 주인공이다.
고작 3칸 정도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깐깐하기 그지없는 조선시대에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100칸이 넘는 대갓집을 지탱하기 위해 살던 하인의 집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른다. 이처럼 선교장은 현존하는 한옥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크며,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문만 12개가 있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인데다 여러 면에서 다른 전통한옥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다. 우선 이름부터 남다르다. 보통 양반집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이는데 이 집은 유독 ‘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집의 규모가 워낙 큰 ‘장원(莊園)’이기 때문에 ‘장’자를 붙였다는 것. 장원은 한 집이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이르므로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을 뜻하는 차원이 아니다.
선교장은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물건을 만드는 전문인력을 거느렸다. 또 개인이 가진 대규모 토지를 수많은 소작인에게 빌려주고 받은 소작료를 경영했다. 집주인은 단순한 지주의 위치를 넘어 독립 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 즉 성을 통치하는 영주와 비슷했다.
지금은 한 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과거 선교장 주위에는 소작인을 위한 25호 정도의 가랍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면 선교장 자체가 하나의 큰 마을과 다름없다. 실제로 선교장을 구석구석 돌아보려면 작은 마을보다 더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지주가 마을을 운영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소작인과 노비가 필수적이므로 이들이 사는 거주지도 많이 필요하다. 선교장 주변에 있던 가랍집은 일반적인 씨족마을 속의 독립주택이 아니라 철저하게 큰 집에 속했던, 말하자면 선교장의 부속채다. 이런 장원 체계의 마을은 한국에서 거의 유례가 없으므로 전통마을 답사에 포함시킨 것이다.
●‘배다리’라는 이름의 유래… 족제비 떼가 알려준 집터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시켜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유력한 설이 있다. 과거에는 선교장 활래정 바로 앞까지 경포호수의 물이 들어와 나루터가 있었고, 나루터에서 다리를 건너면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집에 ‘배다리(선교)’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설이다.
선교장도 다른 유명한 집들처럼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바로 선교장이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전설이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킨 이내번(李乃蕃, 1693〜1781)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뒤좇아 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니 족제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리둥절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가 놀라운 명당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게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전설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풍수가 삶의 일환이던 조선시대에 이런 대갓집을 세우면서 남다르게 풍수를 고려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행랑채를 정면으로 보면 뒤쪽으로 소나무가 많고 그 아래로는 담이 있다. 가장 큰 소나무 우측 담에 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은 선교장 터를 잡아 준 족제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먹이를 주는 용도라고 한다.
선교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배다리골에 터를 잡은 이내번의 아버지(이주화)는 원래 충북 충주를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죽자 이내번의 어머니인 안동권씨가 아들을 데리고 강릉으로 이주했다. 이주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셋째 부인이었던 이내번의 어머니가 남편이 죽은 뒤 시댁의 차별을 피해 친정 쪽 연고가 있는 강릉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내번 모자(母子)는 배다리 지역에 들어가 충주에서 가져온 재산을 기반으로 인근 땅들을 사들여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착은 통상적인 전통마을 즉 집성촌과 약간 다르다. 조선 초기 혹은 중기에 씨족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은 대체로 처가의 재산을 양도받아 정착을 시작했다. 그런데 후기에는 이내번 모자가 그런 것처럼 땅을 매입하고 축적해서 일가를 이뤘다.
선교장을 포함한 경포대 부근의 지형은 독특하다. 산은 낮고 완만해서 얕은 골짜기를 이루며, 골짜기 안에는 좁지 않은 평야가 펼쳐진다. 그 앞으로 경포호가 자리 잡아 육로나 수로 모두 교통이 편리하다. 넓은 들과 호수 때문에 안산으로 삼을 만한 뚜렷한 봉우리가 매우 멀리 위치해 집과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안대(案臺)를 얕은 골짜기 내의 동산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내번은 현재의 터를 잡으면서 골 안의 앞동산을 안산으로 삼아 좌향을 정했다.
여하튼 이내번은 176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고, 점점 규모가 커져 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갔다. 선교장의 모든 건물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돼 건설된 게 아니므로 전체 배치는 일정한 법식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건물의 집합이다.
●관동지방 아우른 대표적 유교 문화재
선교장은 건축학도에게 꼭 찾아봐야 할 건물로 알려졌다.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행랑채·사당과 집 앞 정자인 활래정까지 옛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데다 개방적인 남방형 가옥과 추위를 막기 위하여 폐쇄적인 북방형 가옥의 특성을 고루 갖춘 특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 ‘관동지방’의 대갓집 형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전문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유산이기도 하다.
관동지방은 대관령을 경계로 강릉 중심의 동해안 문화권을 이른다. 이 지방은 고려시대 지방호족 세력의 부흥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특별한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등의 외침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아 오히려 선교장과 같은 유교건축과 문화재를 남길 수 있었다.
선교장 주인들은 축적되는 재화로 계속 인근 땅을 구입했는데 그 규모가 대단하다. 당대의 선교장이 관할하는 지역은 지금의 강릉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선교장에서 관리하던 창고 위치로도 알 수 있다. 북창은 주문진, 남창은 동해시와 가까운 옥계, 매년 단오제가 열리는 남대천 부근에 ‘큰터’라고 하는 창고가 있었다. 지도에서 이들 지명을 보면 선교장이 관장하던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것이다.
●차남까지 한집 사는 진정한 ‘대가족 제도’ 운용
선교장이 남다른 것은 진정한 ‘대가족 제도’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대가족 제도는 한국의 전통적 가족 형태로 알려졌지만, ‘할아버지-맏아들-맏손자’의 직계만으로 가족을 구성한 형태는 엄밀한 의미에서 ‘대가족’이 아니라 ‘직계가족’이다.
대가족이란 장남은 물론 차남의 가족 모두가 같은 호구를 이루는 제도를 말하는데, 선교장은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가족제를 견지했다. 후손을 분가시키면서 씨족마을을 이루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이 집안은 한집에서 대가족을 수용하는 ‘모듬살이’를 유지한 것이다. 그 결과 집 규모가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선교장은 큰 틀에서 거대한 본채(대택)로 한정되는 게 아니라 안채 동쪽에 별도로 있는 외별당(소택), 소슬대문 앞에 있는 소실댁, 가랍집도 포함한다.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본채(대택)를 중심으로 선교장으로 설명한다.
화려한 ‘게스트하우스’ 있는 고저택이?
선교장의 특이함은 입구로도 알 수 있다.
집안에 문이 12개나 되며, 가장 중요한 대문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집 앞이 워낙 길어 평대문과 솟을대문이 함께 있기 때문인데, 솟을대문은 사랑채 즉 공공부분으로 통하며 남자와 손님이 드나들었고, 평대문은 안채로 연결돼 가족과 여성들이 지나다녔다. 대문이 두 개라는 점에서 선교장은 창덕궁 낙선재, 연경당과 비슷하다. 연경당 행랑채 역시 사랑채 진입 부분은 솟을대문, 안채 진입 부분은 평대문을 설치했다.
행랑 건물이 줄지어 있어서 ‘줄행랑’이라 부르는 행랑채는 놀랍게도 23칸이나 된다. 행랑방의 앞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처마 서까래 사이에는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민초들이 사는 집은 대체로 3칸짜리인 초가삼간인데, 행랑채는 초가삼간 8채를 붙여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문에 들어가면 또 문이 나오고, 이 너머로 사랑채 공간이 있다. 사랑채는 대갓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남성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선교장의 사랑채도 다른 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선교장을 이해하려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주택이 연결된 독특한 구조라는 걸 파악해야 한다. 동쪽 안채와 동별당(悅話堂)이 ‘가족용 주택’인 반면 서쪽 열화당 부분은 ‘공공 주택’이다. 동별당과 안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택이며, 열화당 부분은 또 다른 주택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두 영역 사이에 서별당 부분이 있다. 이 영역은 본채인 서별당과 이를 감싸는 부속채 연지당으로 이뤄진다. 서별당은 집안의 남녀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서재로 활용하던 곳이다.
연지당에는 주로 여자 하인이 기거하면서 외부 손님의 동태를 엿보고 집안 아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열화당을 포함한 세 건물은 마루를 통해 연결된다.
●선교장의 ‘으뜸’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 공간인 열화당을 먼저 설명한다. 이곳은 중요한 손님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선교장 주인이 손님과 토론도 하고 파티하는 장소였다. 한마디로 사교공간이자 게스트하우스다.
열화당은 선교장에 있는 3채의 사랑채 중 가장 유명하고 독특한 건물이다. 이 집은 순조 15년(1815)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했는데,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이다.
선교장 사랑채 중 으뜸사랑인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누마루가 있는 거의 ‘一’자형 평면을 이룬다. 대청·사랑방·침방·누마루로 구성돼 있고, 대청 앞에 반칸 너비의 툇마루가 붙어 있다. 5량가의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대청의 천장은 널판으로 일부 빗천장을 하고 우물천장을 한 것이 특색이다.
7개의 석조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아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대청과 누마루로 된 작은 대청 사이의 방들은 ‘ㄴ’자로 배치됐다.
열화당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공간이 창호로 둘러싸여 한국 전통 창호의 아름다움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또 대청에 있는 T자형 대들보가 외부에 노출돼 목재만 나타낼 수 있는 질감과 구조를 보여준다. 이는 다른 재료가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나타내고 있다.
열화당 건물 앞에는 특별한 게 붙어 여느 한옥이 주지 않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다. 한옥 전면에 차양이 있는 모습은 외국 건물에서 배운 것 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차양을 치는 것도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다.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선교장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고, 서울 종로의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에도 차양을 댄 건물이 있다.
그런데 선향재와 윤보선 고택의 차양은 모두 나무로 만든 데 비해 선교장의 차양은 구리지붕이다. 당대에도 지금처럼 비싼 구리는 구한말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수입해 선물한 데서 나왔다고 전한다.
●손님 등급에 따라 숙소도 달라진다고?
선교장의 사랑채는 쓰임새가 서로 다르다. 손님의 등급에 따라 각각 다른 숙소에 머무를지 정해졌기 때문이다.
열화당 옆에 있는 ‘중사랑’에서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 소위 집사가 판단한 후 어느 사랑채로 안내할지 결정한다. 귀빈은 열화당, 중간급이면 중사랑, 만만한 사람이면 아랫사랑을 내뤘다. 23칸의 기다란 행랑건물이 바로 아랫사랑이다.
열화당과 줄행랑 사이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열화당 마당이 일반적인 주택의 마당이 아니라 ‘열린 공간(open space)’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객과 하인이 북적댔으며, 심지어 수백 명의 소작인 대회를 열어 위안 잔치도 베풀었다.
일반적으로 조선 반가에서 행랑은 하인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는 건물이다. 그러나 선교장에서 행랑은 사랑채 기능을 했다. 이곳에서 열화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선교장이 불러 온 각종 전문 장인들이 머물렀다.
조선시대, 여자를 위한 사적 공간. 있다? 없다?
사랑채 건물이 몰려있는 공간 뒤로 쉼터 건물이 따로 있다. 집 뒷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계단식 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이자 숙소인 ‘초정’이다. 초정은 아이들 교육 장소이기도 한데 대갓집인데도 불구하고 집안에 일부러 초가지붕을 한 것은 평민들의 삶도 이해하라는 뜻이다. 현재 이 정자와 긴 행랑채 즉 아래사랑방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사랑채가 남자의 공간이라면 여자와 가족들의 공간은 안채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평대문을 통해야 하는데 이 앞에 내외벽이 있다. 대갓집은 종종 문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담을 설치하는데, 이곳은 목재로 돼 있다. 내외벽 옆으로 난 공간으로 들어가면 첩첩산간이라는 말처럼 문 안에 문, 그 문 안에 또 문이 펼쳐진다. 한 마디로 안채는 사랑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 이는 건물의 높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채는 선교장의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초에 주거를 정할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 건물은 화강석 2단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뒀으며, 5량가의 민도리집 양식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다. 방은 미닫이 용자살+여닫이 두 짝 세살문의 겹문이고 마루의 전면에는 궁판이 있는 세살문의 네 짝 분합문을 달았다. 조선의 여느 상류 주택처럼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므로 안채의 부엌 공간도 매우 크다.
●선교장의 사적 공간, ‘동별당’
안채 서쪽으로는 중문간행랑채와 연결됐는데 동쪽으로 붙은 건물이 ‘동별당(東別堂)’이다. 동별당은 열화당 같은 사교장이 아니라 주인이 기거하면서 가족과 회의하거나 집안 친척의 접대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소위 선교장의 ‘사적 장소’인 것이다.
동별당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은 기단 위에 방형의 초석을 둔 겹처마 팔작기와지붕 형식의 ‘ㄱ’자형 구조물이다. 안채에 가까운 별당으로서 방문객과 분리해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대청은 전면에 네 짝 분합문이 달려 있고 처마의 서까래 사이를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이 건물의 가구나 구조는 안채, 사랑채와 비슷한데 ‘오은고택’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가 선교장에 머물렀을 때 선사한 글씨다. 이 건물은 특이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아치형의 작은 쪽문이 달렸다.
동별당 부엌 아궁이 출입문의 모습. 사람이 아궁이에 드나드는 문을 이렇게 작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종호 제공
건물 아궁이 출입문이다. 사람이 아궁이에 드나드는 문을 이렇게 작게 만들 수 있을까 의문스럽겠지만, 당대의 신분 사회에서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동별당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선교장의 아름다운 장면이 드러난다. 지형에 따라 안채 건물과 지붕의 높이가 삼단으로 꺾이는 모습이 어느 곳보다 시선을 끈다. 안채는 ‘ㄱ’자 형인데 안방마님이 정면을 바라보는 숙소, 그 옆으로 꺾이는 부분이 며느리의 숙소다.
안방마님의 방은 구조가 2겹인데 마님 방의 뒤로 하녀 방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하녀가 마님의 잔심부름을 들기 위해서 바로 옆방에서 잤는데 실제로 하녀가 마님 옆에 자는 주된 이유는 마님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구본준은 하녀가 당대의 ‘인간 텔레비전’이었다고 재미있게 설명했다.
안채 뒤 부엌에서 보이는 돌담도 한옥 특유의 매력을 한껏 풍긴다. 솥 옆에 까만 것이 부뚜막에 박혀 있는데 이는 물을 데우는 공간이다. 불을 땔 때 물을 부어놓아 함께 데워지도록 한 것으로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아이디어다.
●천장, 대청은 높고 방은 낮은 이유
선교장을 보면 한옥이 외국 건축과 다른 특징을 느낄 수 있다. 대청 천장은 높고 방 천장은 낮다는 점이다. 사실 이처럼 당연한 일은 없다. 대청은 넓고 방은 좁기 때문이다. 건축에서 얘기하는 스케일 즉 척도를 감안한 결과다.
보통 광장 앞에 들어서는 건물을 웅장하고 크게 건설하는데 이는 키 큰 사람이 큰 신발을 신는 것과 마찬가지로 척도의 개념이 접목됐기 때문이다. 한옥에서 대청 천장을 굳이 막지 않고 그 구조를 다 드러낸 이유는 여름에 바람을 시원하게 들이려는 목적도 크게 작용하지만 스케일에 맞춰 천장을 높이려는 의도도 한몫 한다.
방과 대청의 천장 높이 차이는 기능적인 면도 있다. 한국인은 앉아서 생활하므로 방 천장을 높일 필요가 없다. 좌식생활에서 보면 낮은 천장이 아늑하고 평안한 느낌을 준다. 한 마디로 방이 작으면 천장이 낮아야 사람이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대청은 좌식생활과 입식생활이 함께 일어나는 곳이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전이공간 즉 좌식의 실내생활과 입식의 실외생활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장 높이를 입식생활에 맞게 높였다. 대청은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꺾임이 많은 한옥에서 가장 장쾌한 공간으로 방과 스케일 대비가 심하기 때문에 효과도 그만큼 커진다.
사모관대를 쓴 양반이 대청에 서서 호령하는 장면이 사극에 자주 나오는데 방에서 쪽문을 열고 큰소리치는 장면과 느낌이 무척 다르다. 대청과 방을 한 채 안에 나란히 두었다는 자체가 인간적인 스케일을 감안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한옥의 진수에 또 한 번 큰 매력을 느낄 것이다.
강원도 유랑하던 선비가 꼭 들르는 그곳은?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 양반의 최고 유람 즉 관광 코스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주인의 환대가 남다른데다 문화적 분위기도 좋았으므로 조선의 명사들은 선교장을 찾아가 머물렀다.
선교장 행랑채가 남다르게 거대한 데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선교장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다고 한다.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는데, 이 때문에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준비됐다.
선교장에서 환대받았던 명사들은 떠날 때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의 글씨와 그림은 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사다리꼴 건물 배치로 시각효과 노려
선교장 평면은 조선시대의 정통 건축 개념과 다소 다르다. 행랑채 건물이 뒤쪽 건물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개념으로 똘똘 뭉친 조선시대에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은 게 다소 의아하다. 더욱이 대지가 적지 않은데도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데서 더 그렇다.
하지만 이는 한국인의 유연함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 한옥 중에도 한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 구성을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사람이 정확하게 각을 잡고 정확한 대칭 구조를 만드는 걸 선호하지 않은 이유로는 시각적 효과가 꼽힌다.
선교장의 경우를 보면 행랑채를 열화당 쪽으로 더 좁아지게 배치해 중사랑 쪽 마당이 너무 탁 트이게 보이는 걸 막았다는 것이다. 이런 배치는 창덕궁의 인정문 앞마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지형적 요인을 시각적으로 보완한 것인데 실제로 인정문 앞마당에서 보면 양쪽 끝의 거리가 멀어 자연스럽게 공간 구획이 평행으로 이뤄진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다양한 공간의 공존… ‘선교장은 문화 교과서’
선교장은 규모가 크지만 복합구조를 갖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선교장의 특징으로 ‘남성 공간과 여성 공간’, ‘손님 공간과 가족 공간’, ‘주인 공간과 하인 공간’, 그리고 ‘산자의 공간인 생활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인 제사 공간’이 공존하는 점을 꼽았다. 곧 선교장은 건축 교과서인 동시에 조선 시대 반가의 생활상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문화 교과서라는 설명이다.
선교장 사당의 모습.
‘주자가례’에 따라 동쪽인 선교장의 우측의 넓은 대지 안에 별도로 건설됐다. 이종호 제공
선교장에 사당이 없을 수 없다. 사당은 ‘주자가례’에 ‘사당을 안채의 동쪽에 두라’고 한 예에 따라 선교장의 우측의 넓은 대지 안에 별도로 건설됐는데, 다른 공간과 달리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의 삼각형 벽면 합각에는 비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풍판(風板)이 부착됐고, 전면에 낮은 마루가 있다. ‘오재당’이라는 현판은 일중 김충현이 썼다. 일중 김충현은 여초 김응현의 형으로 형제가 우리나라에서 서예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참고로 열화당과 그 옆 행랑채에 1984년에 건설된 민속자료 전시관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한말에 이르는 유물 8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은 담배함과 문갑 등 가구자료, 제2전시실은 다기(茶器)와 제사용기 등 식생활 용구, 제3전시실은 저명학자들의 서한문과 고서, 제4 전시실은 각종 복식류와 장신구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3000여 점의 고서와 서화 자료를 별도 소장하고 있다.
정자(亭子)의 멋이란 바로 이런 것!
선교장의 아름다움은 대문 밖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 ‘활래정(活來亭)’에서도 느낄 수 있다.
활래정은 순조 16년(1816) 이근우가 건설했다. 그의 스타일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활래정을 중건한 것은 물론 안채 일부를 헐어내고 현재의 동별당을 건축했고, 행랑채 대문 앞에 소실댁도 세웠다. 또 경포해수욕장 부근에 조성된 이씨 별장, 방해정을 중수하기도 했다. 큰 틀에서 선교장의 범위는 본채, 활래정, 방해정을 포괄하는 방대한 영역이다.
이근우는 특히 활래정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름은 ‘주자’의 시구에서 차용한 것으로 ‘활수(活水)가 계속 들어오는 정자’란 뜻이다. ‘ㄱ’자형으로 방과 누마루로 구성됐으며 팔작지붕이며, 처마에는 부연을 달았다. 난간을 설치하고 분합문을 달아 계절에 구애 없이 사용하면서 선교장 본채와 전원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이 정자는 허식 없이 소박한 구조와 양식으로 처리해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자 인기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뒤쪽은 연못 가장자리 땅에 기대고 있고, 앞쪽은 돌기둥에 의지해 연못 위에 올라서 있다.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창덕궁 부용지 연못가의 부용정을 연상시킨다.
한 변의 길이가 32m인 연못 가운데에는 폭 7m 크기의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산을 인공적으로 쌓아 만들었다. 여기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운치를 더한다. 지금도 활래정에선 전통차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멋진 경치와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솟을대문 앞에 있었던 ‘소실댁’이다. 당대에 양반이 소실을 두는 것이 그다지 책잡힐 일이 아니지만 안방마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만무다. 이에 안채와 활래정 사이에 회화나무를 심고, 주인과 소실이 활래정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아예 보지 않으려 했다.
●강원도 내 최초 근대식 학교 ‘동진학교’를 집 안에
선교장 옆에 있는 창고 건물도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선교장의 독특한 건물에 견주면 별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른 역사의 현장이다. 강원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장 주인이었던 이근우는 봉건지주임에도 사재를 털어 동진학교를 세웠다. 조선이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던 1908년의 일이다. 그는 이 학교에 한국 근대사를 풍미했던 몽양 여운형과 이시영 등을 교사로 초빙하고, 학생에겐 숙식과 교복 등을 모두 무료로 지급했다. 그러나 동진학교는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자마자 문을 닫는 비운을 맛본다. 민족의식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답사에 동행한 김천일 선생이 선교장 후문에서 표지석을 읽어보고 다소 놀라며 읽어보라고 한다. 표지석에는 ‘1908년 지방사학의 효시인 동진학교가 있던 곳으로 선교장의 주인인 이근우에 의해 설립되어 신학문으로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라고 적혀있다. 앞에 말한 창고 건물이 아니라 이곳에 동진학교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진짜 동진학교가 있었는지 헛갈리지 않을 수 없지만 두 곳 모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해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근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전국 부자들을 모아 만든 중추원 참의를 맡는 등 친일 흔적도 갖고 있다. 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으로 유명하다. 동진학교를 운영할 때 인연을 맺은 여운형 등을 도왔다. 구본준은 이근우가 독립지사를지원한 방법이 그야말로 상상을 초래한다고 소개했다. 사람을 시켜 집안 사당에서 위패를 몰래 훔쳐가게 한 뒤 난리를 치고, 위패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독립운동 연락책에게 돈을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창고 건물 즉 동진학교 건물 옆에 소위 너와집 형태의 조그마한 집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하인의 가랍집이다. 이 집 지붕은 너와나무가 아닌 청석으로 만들었고, ‘자미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기본적으로 대갓집 안에는 가랍집을 두지 않는데, 이 집 주인은 특히 주인과 돈독한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문화 살롱’
선교장은 당대의 문화의 장소 소위 문화인들이 찾는 살롱이나 마찬가지다. 선교장을 거쳐 간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영의정 조인영, 추사 김정희부터 거물급 정치인인 몽양 여운형,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등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쟁쟁한 명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셈이다.
이 집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의 단골 촬영장소기도 하다. 원로 감독 이두용의 ‘물레야 물레야’, ‘식객’, ‘음란서생’ 등 영화와 ‘황진이’, ‘일지매’, ‘전설의 고향’ 등 TV드라마는 물론 KBS ‘1박 2일’, ‘공주의 남자’, SBS ‘짝’ 등 예능 프로도 선교장을 촬영장소로 활용했다. 이들 영향으로 강릉 선교장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탐사 코스가 됐음은 물론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선교장 자체가 지나치게 관광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입장료를 받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선교장의 멋과 정취를 진정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주객이 전도된 상태라 더욱 씁쓸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선교장을 관리 운용하는 일부 직원들의 위세다. 소위 장사가 잘되는 곳에서 이런 일이 자주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남다른 한국의 유산을 보기 위해 방문했다가 불쾌한 위세를 보면 유산의 매력이 반감돼 아쉽기 그지없다.
강릉은 조선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머나먼 외진 지역이지만 문화사적으로 보면 매우 독특하다. 특히 불교와 유교 두 문화 축에서 의미가 크다. 우선 불교 면에서 보면 성지 오대산이 가까워 다양한 불교 유적들이 많다. 유교 면에서 보면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강릉에서 배출됐다. 조선 3대 여류 시인 중 2명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강릉 사람으로 오죽헌은 이들의 정취가 남아있는 곳이며 매월당 김시습의 한(恨)도 배어 있다.
강릉을 찾았으면 강원도에 있는 유일한 국보건축물인 객사문(국보 51호)을 지나치지 말기 바란다. 물론 강릉지역의 수많은 명소와 해수욕장들을 찾아가려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의 건축』, 김봉열, 공간사, 1985
『한국의 정자』, 박언곤, 대원사, 1990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2)』, 김봉렬, 돌베개, 2006
「휴먼 스케일」, 임석재, 네이버캐스트, 2010.06.22
「100칸 넘는 조선 살림집의 비밀은 족제비?」, 구본준, 한겨레, 2012.06.15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