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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周紀

장안봉(微山) 2015. 9. 12. 05:22

제 1권 주기 (周紀)

위열왕(威烈王)

 

23년(戊寅) 처음에 晉나라의 대부(大夫) 위사(偉辭) 조적(趙籍) 한건(韓虔)을 명하여 제후(諸侯)로 삼았다.

→ 戊寅二十三年이라 初에 命晉大夫魏斯 趙籍 韓虔하여 爲諸侯하다.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천자의 직(職)은 예(禮)보다 큰 것이 없고, 예는 분(分)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분은 명(名)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무엇을 예라고 하는가. 기강(紀綱)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이라 하는가. 군신이 그것이다. 무엇을 명이라 하는가. 공(公)과 후(侯)와 경(卿), 그리고 대부(大夫)가 그것이다. 대저 넓은 사해(四海)와 수많은 백성들이 한 사람의 절제를 받아서 비록 절륜(絶倫)한 힘과 당대에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모두 분주하게 복역(服役)하는 것은 어찌 예(예)로써 기강을 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는 삼공(三公)을 통솔하고. 삼공은 제후(諸侯)를 통솔하고, 제후는 경(卿)과 대부(大夫)를 통솔하고, 경과 대부는 사(士)와 서인(庶人)을 다스린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임하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받들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마치 심복(心腹)이 수족(手足)을 움직이고 근본이 지엽(枝葉)을 절제하는 것과 같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수족이 심복을 호위하고 지엽이 근본을 감싸듯이 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상하가 서로 보존되고 국가가 편히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천자의 직(職)은 예(禮)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문왕(文王)은 《주역(周易)》을 서(序)하면서 건․곤(乾․坤)을 첫머리로 삼았는데, 공자(孔子)가 계사(繫辭)하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이 정해지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베풀어져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자리잡힌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군신(君臣)의 자리란 천지가 바뀔 수 없음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춘추(春秋)》에서 제후(諸侯)를 억제하고 주실(周室)을 높였으며, 왕인(王人)이 비록 한미하더라도 제휴 위에다 두었으니, 이로써 성인(聖人)께서 군신(君臣)사이를 일찍이 조심하지 않음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걸주(桀紂)같은 포악함이나 탕무(湯武)같은 인(仁)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귀부(歸附)하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니, 군신의 분수는 마땅히 절의(節義)를 지키어 엎드려 죽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禮)는 분수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대저 예란 귀천을 구분하고 친소(親疎)를 차례짓고 만물을 헤아리며 여러 가지 일을 절제하는 것이니, 명(名)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고, 기(器)가 아니면 형상되지 않는다. 명으로써 명(名)하고 기(器)로써 구별한 연후에 상하가 찬란히 질서가 있게 되는데, 이는 예의 대경(大經)으로 명기(名器)가 이미 없으면 예가 어떻게 홀로 있게 되겠는가? 옛날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위(衛)나라에 공이 있었으나 고을을 사양하고 반영(繁纓)을 청하자 공자께서 많은 고을을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오직기(器)와 명(名)은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임금의 맡은 바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국가가 따라서 망한다. 위군(衛君)이 공자를 대우하여 정사를 맡기니, 공자는 먼저 명(名)을 바로잡고자 하여 명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을 놀릴 수 없다고 하였다. 대저 반영은 하찮은 물건인데도 공자가 아꼈고 명을 바로잡는 것은 작은 일이나 공자가 먼저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명기(名器)가 이미 어지러워지면 상하가 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分)은 명(名)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 溫公曰 天子之職은 莫大於禮하고 禮莫大於分하고 分莫大於名이라 何謂禮오 紀綱是也라 何謂分이오 君臣是也라 何爲名이오 公侯卿大夫是也라 夫以四海之廣과 兆民之衆으로 受制於一人하여 雖有絶倫之力과 高世之智로도 莫不奔走而服役者는 豈非以禮爲之紀綱哉아

是故로 天子는 統三公하고 三公은 率諸侯하고 諸侯는 制卿大夫하고 卿大夫는 治士庶人이라 貴以臨賤하고 賤以承貴하여 上之使下가 猶心服之運手足하고 根本之制枝葉하며 下之事上이 猶手足之衛心腹하고 枝葉之庇本根 然後에 能上下相保而國家治安이라

故曰 天子之職은 莫大於禮也라 文王序易하여 以乾坤爲首하니 孔子繁之曰 天尊地卑하여 乾坤定矣요 卑高以陳하여 貴賤位矣라하니 言君臣之位는 猶天地之不可易也라 春秋에 抑諸侯하고 尊周室 하여 王人이 雖微아 序於諸侯之上하니 以是로 見聖人於君臣之際에 未嘗不倦倦也라

非有桀紂之暴과 湯武之仁이라도 人歸之는 天命之니 君臣之分은 當守節伏死而已矣라 故曰 禮莫大於分也라 夫禮는 辨貴賤하고 序親疎하고 裁群物하고 制庶事하니 非名不著요 非器不形이라 名以命之하고 器以別之 然後에 上下粲然有倫하니 此는 禮之大經也라 名器旣亡 則禮安得獨存哉아 昔에 仲叔于奚 有功於衛러니 辭邑而請繁纓이어늘 孔子以爲不如多與之邑이라 하니 惟器與名은 不可以假人이니 君之所司也라 正亡 則國家從之라 衛君待孔子而爲政에 孔子欲先正名하여 以爲名不正 則民無所措手足이라하니 夫繁纓은 小物也 而孔子惜之하고 正名은 細務也 而孔子先之하니 誠以名器旣亂 則上下無以相有故也라 故曰 分莫大於名也라.

 

 

「아, 유려(幽厲)가 덕을 잃어 주(周)의 도가 날로 쇠약해지고, 기강이 무너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해 윗사람의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가 정벌을 전담하고, 대부가 정사를 휘둘러 예(禮)의 대체(大體)가 10중 7,8은 없어졌다. 그런데도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제사가 오히려 끊어지지 않고 서로 이어져 온 것은 대개 주나라 자손들이 그 명분을 지켰기 때문이다. 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주왕실(周王室)에 큰 공이 있어 양왕(襄王)에게 수(隧)를 청하였는데, 양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그것은 왕의 제도입니다. 덕(德)은 대신함이 없고, 두 왕이 있는 것은 숙부(叔父)도 미워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숙부도 땅이 있으니 수를 하면 그만이지 청할 것이 무엇입니까?」하니, 문공이 이에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나라의 땅은 조(曹)나 등(滕)보다 크지 못하였고 주나라 백성은 주나라, 거(莒)나라보다 많지 못했으나 수백 년을 거치며 천하의 종주국(宗主國)이 되어 비록 진(晉)․초(楚)․제(齊)․진(秦)나라의 강함으로도 감히 군사로 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한갓 명분이 아직 있었기 때문이다.

노(魯)나라 계씨(季氏)와 제(齊)나라 전상(田常), 초(楚)나라의 백공(白公), 진(秦)나라의 지백(智伯)에 이르러서는 그 형세가 족히 임금을 내쫓고 스스로 임금이 될 수 있었는데도 끝내 감히 하지 못한 것은 어찌 그 힘이 부족하고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명분(名分)을 범하면 천하가 함께 주륙(誅戮)할까 두려워서였다.

이제 진나라의 대부(大夫)가 그 임금을 경멸해 진나라를 분할했는데도 천자가 이미 정토(征討)하지 못하고 또 높은 직질(職秩)을 주어 제후의 열에 끼게 하였으니, 이는 구구한 명분을 다시는 지키지 못하고 모두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선왕(先王)의 예(禮)가 이에서 다 없어지게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때를 당하여 주나라 왕실은 쇠약하고 삼진(三晋)은 강성해서 비록 허락하지 않고자 해도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다. 대저 삼진이 비록 강하다 하더라도 참으로 천하의 주토(誅討)를 돌보지 않고 의(義)를 범하고 예(禮)를 침해하려 했다면 천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을 것이다. 천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다면 패역(悖逆)의 신하가 되었을 것이니, 천하에 참으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같은 임금이 있었다면 반드시 예(禮)와 의(義)를 받들어 정벌했을 것이다. 이제 천자에게 청하자 천자가 허락하였으니, 이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제후가 된 것이므로 누가 토벌하겠는가? 그러므로 삼진이 제후의 열에 낀 것은 삼진이 예(禮)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천자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다.」

→ 嗚呼라 幽厲失德하여 周道日衰하고 紀綱散壞하여 下陵上蚕하고 諸侯專征하고 大夫擅征하여 禮之大體 什喪七八矣로되 文武之祀 猶線線相屬者는 盖以周之子孫이 尙能守其名分故也라 何以言之오 昔에 晉文公有大功於王室이러니 請隧於襄王하니 襄王不許曰 王章也라 未有代德而有二王은 亦叔父之所惡也라 不然이면 叔父有地而隧요 又何請焉이리오 하니 文公於是乎懼而不敢違라 是故로 以周之地 則不大於曹滕이요 以周之民 則不衆於邾莒로되 然이나 歷數百年에 宗主天下하여 雖以秦楚齊秦之彊으로도 不敢加兵者는 何哉오 徒以名分尙存故也라 至於季氏之於魯와 田常之於齊와 白公之於楚와 智伯之於晉은 其勢皆足以逐君而自爲나 然而卒不敢者는 豈其力不足而心不忍哉아 乃畏奸名犯分 而天下共誅之也라 今晉大夫 暴蔑其君하여 剖分晉國하되 天子旣不能討하고 又寵秩之하여 使列於諸侯하니 是는 區區之名分을 復不能守而幷棄之也라 先王之禮於斯盡矣라 或者는 以爲當是之時하여 周室微弱하고 三晋强盛이라 雖欲勿許로되 其可得乎아하나 是大不然이라 夫三晋雖彊이나 苟不願天下之誅 而犯義侵禮 則不請於天子而自立矣라 不請於天子而自立 則爲悖逆之臣이니 天下에 苟有桓文之君이면 必奉禮義而征之리라 今請於天子 而天子許之하니 是는 受天子之命 而爲諸侯也니 誰得而討之리오 故로 三晋之列於諸侯는 非三晋之壞禮요 乃天子自壞之也라

 

처음에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을 시켜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니, 청하기를 「견사(繭絲)해야 합니까, 아니면 보장(保障)을 합니까?」하였다. 간자가 말하기를 「보장을 해야 한다. 」하므로 윤탁이 그 호수(戶數)를 줄였다.

간자가 무휼(無恤)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에 난리가 있거든 너는 윤탁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며, 진양을 멀게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한다.」하였다. 지선자(智宣子)가 죽고 지양자(智襄子)가 정사를 하기에 이르러 한강자(韓康子)에게 땅을 나눠주기를 청하였다. 강자가 1만 가호(家戶)의 고을을 주니, 지백(智伯)이 기뻐하면서 또 위환자(魏桓子)에게 땅 나눠주기를 청하니, 환자(桓子)가 다시 1만 가호의 고을을 주었다. 지백이 또 조양자(趙襄子)에게 채(蔡)에 있는 고랑(皐狼)의 땅을 달라고 하였으나 양자가 주지 않았다.

지백이 노하여 한(韓)․위(魏)의 군사를 이끌고 조씨(趙氏)를 공격하니, 양자가 달아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도망해야 하는가?」하니, 따르던 자가 말하기를 「장자(長子;지명)는 가깝고 또 성(城)이 완전하고 두텁습니다」하였다. 양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힘을 피폐시키면서 완성했는데 또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면 그 누가 나와 함께하겠는가?」하니, 따르던 자가 말하기를 「한단(邯鄲)의 창고가 실(實)합니다」하였다. 양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빼앗아 채운 것인데 또 그것으로 인하여 죽인다면 그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그 진양으로 가야겠다. 진양은 선주(先主)가 부탁한 곳이며 윤탁이 너그러운 정사를 하였으니 백성들이 반드시 화합할 것이다」하고는 이내 진양으로 도망하였다. 삼가(三家)가 나라 사람들로 진양을 모위하여 물을 대어 잠기지 않은 성(城)이 3판(版)뿐이어서 부엌이 물에 잠겨 개구리가 생겼으나 백성들이 배반할 뜻이 없었다.

조양자가 장맹담(張孟談)으로 하여금 몰래 나가 두 사람을 보고 말하게 하기를 「신(臣)은 듣건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이에 몰래 장맹담과 약속하고 기일을 정해 보냈다. 양자가 밤에 사람을 시켜 둑을 지키는 관리를 죽이고 물을 터 지백의 군사에게로 대니, 지백의 군사들이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어지러워졌다. 한(韓)․위(魏)가 양쪽에서 공격하고 양자가 군졸을 거느리고 정면을 공격하여 지백의 군사를 크게 패배시키고는 마침내 지백을 죽이고, 지씨(智氏)붙이를 모조리 없앴다.

→ 初에 趙簡子 使尹鐸으로 爲晉陽하니 詩曰 以爲繭絲乎이까 抑爲保障乎이까 簡子曰 保障哉인저 尹鐸이 損其戶數하다 簡子 謂無恤曰 晉國에 有難이어든 而無以尹鐸爲少하고 無以晉陽爲遠하고 必以爲歸하라 하더니 及智宣子卒하고 智襄子爲政에 請地於韓康子하니 康子 致萬家之邑하니 智伯이 悅하여 又求地於魏桓子 復與之萬家之邑하니 智伯이 又求蔡皐狼之地於趙襄子하니 襄子 弗與하다 智伯이 怒하여 帥韓魏之甲하고 以攻趙氏하니 襄子 將出曰 吾何走乎아 從者曰 長子近하고 且城厚完하나이다 襄子曰 民罷力以完之하고 又斃死以守之하면 其誰與我리오 從者曰 邯鄲之倉庫實하니이다 襄子曰 浚民之膏澤하여 以實之하고 又因而殺之하면 其誰與我리오 其晉陽乎인저 先主之所屬也요 尹鐸之所寬也니 民必和矣라 하고 乃走晉陽하다 三家 以國人으로 圍而灌之하니 城不浸者 三版이요 沈竈産䵷하되 民無叛意하다 趙襄子 使張孟談으로 潛出見二子曰 臣은 聞唇亡則齒寒이라하니 今智伯이 帥韓魏而攻趙하니 趙亡則韓魏爲之次矣리라 二子乃陰與張孟談으로 約하고 爲之期日而遣之하니 襄子 夜使人으로 殺守隄之吏 而快水灌智伯軍하니 智伯軍이 救水而亂이어늘 韓魏翼而擊之하고 襄子將卒犯其前하여 大敗智伯之衆하고 遂殺智伯하고 盡滅智氏之族하다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지백(智伯)이 망한 것은 재주가 덕을 이겨서이다. 대저 재(才)와 덕은 다른 것인데도 세속에서 구분하지 못하고 통틀어 현(賢)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대저 총찰(聰察)하고 강의(强毅)한 것을 재라 하며 정직하고 중화(中和)한 것을 덕(德)이라 하는데, 재란 덕의 밑천이요 덕은 재의 장수이다. 그러므로 재와 덕을 겸전(兼全)하는 것을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재와 덕이 다 없는 것을 우인(愚人)이라 부르며, 덕이 재를 이기는 것을 군자(君子)라 부르고 재가 덕을 이기는 것을 소인(小人)이라 부른다. 대저 사람을 취하는 기술은 참으로 성인과 군자를 얻어서 함께할 수 없다면 소인을 얻는 것이 우인을 얻는 것만 못하다. 왜냐하면 군자가 재주를 지니면 선(善)을 행하고 소인이 재주를 지니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재주를 지녀 선을 행하는 자는 선이 모두 지극하고, 재주를 지녀 악을 행하는 자는 악 역시 모두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어리석은 자는 비록 불선을 행하고자 해도 지혜가 두루하지 못하고 힘이 이기지 못한다. 비유컨대 강아지가 사람을 물려고 덤비는 것과 같아 사람이 제지할 수가 있지만, 소인은 지혜가 그 간교함을 이루기에 족하고 용기가 그 사나움을 결단하기에 족해서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것과 같으니, 그 해됨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나 집안을 망친 아들은 재주는 넉넉하나 덕이 부족하여 패한 자가 많았으니, 어찌 다만 지백뿐이겠는가?」

→ 溫公曰 智伯之亡也는 才勝德也라 夫才與德異 而世俗莫之能辯하고 通謂之賢이라하니 此其所以失人也라 夫聰察彊毅之謂才요 正直中和之謂德이니 才者는 德之資也요 德者는 才之帥也라 是故로 才德兼全을 謂之聖人이요 才德兼亡을 謂之愚人이라 德勝才를 謂之君子요 才勝德을 謂之小人이라 凡取人之術은 苟不得聖人君子而與之로는 與其得小人이 不若得愚人이라 何則 君子挾才以爲善하고 小人挾才以爲惡하니 挾才以爲善者는 善無不至矣요 挾才以爲惡者는 惡亦無不至矣라 愚者는 雖欲爲不善이라도 智不能周하고 力不能勝이라 譬之하면 乳狗搏人이면 人得而制之나 小人은 智足以遂其姦하고 勇足以快其暴하니 是는 虎而翼者也라 其爲害가 豈不多哉아 自古昔以來로 國之亂臣과 家之敗子는 才有餘 而德不足하여 以至於顚覆者多矣니 豈特智伯哉아

 

조양자가 지백의 두개골에 칠(漆)을 하여 음기(飮器)를 만들었다. 지백의 신하 예양(豫讓)이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에 거짓으로 형인(刑人)이 되어 비수(匕首)를 지니고 조양자의 궁(宮)에 들어가 변소를 칠하고 있는데, 양자가 변소에 갔다가 마음이 섬뜩하여 수색해 예양을 붙잡았다. 좌우가 죽이려고 하니, 양자가 말하기를 「그는 의사(義士)이다. 내가 조심해서 피하면 그만이다.」 하고는 이에 놓아주었다.

예양이 또 몸에 칠을 하여 문둥이가 되고 뜨거운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저자를 다니며 구걸을 하니, 그의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벗이 알아보고는 울면서 말하기를 「자네의 재주로 조맹(趙孟)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 반드시 사랑을 받을 것이니,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쉽지 않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하였다.

예양이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다. 이미 자신을 볼모로 하여 신하가 되었는데 또 죽이려고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무릇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러나 이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장차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 된 자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하였다.

양자가 외출을 하자 예양이 다리 밑에 엎드려 있었다. 양자가 다리 밑에 이르자 말이 놀라는지라 수색하여 예양을 붙잡아 마침내 죽였다.

→ 趙襄子 漆智伯之頭하여 以爲飮器러니 智伯之臣豫讓이 欲爲之報仇하여 乃詐爲刑人하여 挾匕首하고 入襄子官中하여 塗厠이러니 襄子如厠이라가 心動索之하여 獲豫讓하니 左右欲殺之어늘 襄子曰 義士也라 吾謹避之耳라하고 乃舍之하다 豫讓이 又漆身爲癩하고 呑炭爲啞하여 行乞於市하니 其妻는 不識也로되 其友識之하고 爲之泣曰 以子之才로 臣事趙孟이면 必得近幸하리니 子乃爲所欲爲 願不易耶아 何乃自苦如此오 豫讓이 曰 不可하다 旣已委質爲臣이요 而又求殺之면 是는 二心也라 凡吾所爲者는 極難耳나 然이나 所以爲此者는 將以傀天下後世之爲人臣하여 懷二心者也로라 襄子出할새 豫讓이 伏於橋下러니 襄子至橋에 馬驚이어늘 索之得豫讓하여 遂殺之하다

 

위사(魏斯)라는 사람은 환자(桓子)의 손자이니 바로 이가 문후가 되었다. 문후가 복자하(卜子夏)와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삼고, 매양 단간목(段干木)의 집 앞을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식(式)을 하니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그에게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

문후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즐기는데 비가 내리므로 수레를 준비하라 명하여 장차 들판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술을 마시어 즐겁고 또 비조차 내리는데 임금께서는 어디를 가시렵니까?」하니 문후가 말하기를 「내가 우인(虞人)과 사냥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비록 즐겁기는 하지만 어찌 한번 가서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가서 자신이 약속을 파하였다.

문후가 악양(樂羊)을 시켜 중산(中山)을 정벌하게 하여 이기자 자격(子擊 ; 자<子>는 존경하는 말)을 봉(封)하였다. 문후가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나는 어떤 임금인가?」하니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임금이십니다 」하였다. 임좌(任座)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중산을 차지하여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였으니 어찌 어진 임금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문후가 노하니, 임좌가 물러갔다. 다음에는 책황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진 임금이십니다」하니 문후가 말하기를 「어떻게 아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바른말을 합니다. 아까 임좌의 말이 곧았으므로 그 때문에 알았습니다. 」하니 문후가 기뻐하며 책황으로 하여금 임좌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친히 당하(堂下)에서 맞아 상객(上客)을 삼았다.

→ 魏斯者는 桓子之孫也니 是爲文侯라 文侯가 以卜子夏 田子方으로 爲師하고 每過段干木之盧할새 必式하니 田方賢士 多歸之러라 文侯與群臣으로 飮酒樂而天雨어늘 命駕將適野한대 左右曰 今日에 飮酒樂하고 天又雨한대 君將安之이까 文侯曰 吾與虞人으로 期獵하니 雖樂이나 豈可無一會期哉아 乃往하여 身自罷之하다 文侯 使樂羊으로 伐中山克之하여 以封其子擊하고 文侯 問於群臣曰 我는 何如主오 皆曰 仁君이니이다 任座曰 君이 得中山하사 不以封君之弟하시고 而以封君之子하시니 何謂仁君이러이까 文侯怒하니 任座趨出이어늘 次問翟璜한대 對曰 仁君也이니이다 文侯曰 何以如之오 對曰 君仁則臣直이라 하니 嚮者에 任座之言이 直이아 是以如之하나이다 文侯悅하여 使翟璜으로 召任座而反之하고 親下堂迎之하여 以爲上客하다

 

자격(子擊)이 외출했다가 전자방을 길에서 만나자 수레에서 내려 엎드려 뵈었는데, 자방은 예(禮)를 하지 않았다. 자격이 성을 내어 자방에게 말하기를 「부귀한 자가 남에게 교만을 떠는 것입니까, 빈천한 자가 사람에게 교만하겠습니까?」하니 자방이 말하기를 「역시 빈천한 자가 남에게 교만할 수 있지,부귀한 자야 어찌 남에게 교만할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임금이 남에게 교만을 부리면 그 나라를 잃고, 대부가 남에게 교만을 부리면 그 집을 잃습니다. 그 나라를 잃어버린 자를 나라로써 대접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그 집을 잃은 자를 집으로써 대우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선비로 빈천한 자여서 말이 쓰이지 않고 행함이 합하지 않으면, 신을 신고 떠나면 어디 간들 빈천이야 얻지 못하겠습니까?」하니, 자격이 사과하였다.

→ 子擊이 出할새 遭田子方於道하여 下車伏謁이어늘 子方이 不爲禮하니 子擊이 怒하여 謂子方曰 富貴者 驕人乎아 貧賤者 驕人乎아 子方曰 亦貧賤者는 驕人耳니 富貴者 安敢驕人이리오 國君而驕人則失其國하고 大夫而驕人則失其家하나니 失其國者는 未聞有以國待之者也요 失其家者는 未聞有以家待之者也로라 夫士는 貧賤者라 言不用하며 行不合 則納履而去耳니 安往而不得貧賤哉리오 子擊이 乃謝之하다

 

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집안 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금일에 재상을 삼을 자는 위성(魏成)이 아니면 책황인데 이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하니 대답하기를 「평소에는 그 사람이 친한 바를 보고, 부유할 때에는 그가 베푸는 바를 보고, 현달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바를 보고, 궁색할 때에는 그가 하지 않는 바를 보고, 빈한할 때에는 취하지 않는 바를 보아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로써 족히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문후가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집으로 가십시오. 저의 재상은 결정되었습니다.」하였다. 이극이 나오자 책황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불러 복상(卜相)하였는데 과연 누구로 하셨습니까?」하니 이극이 말하기를 「위성이네」하였다. 책황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서하수(西河守) 오기(吳起)는 제가 천거하였으며, 임금께서 안으로 업(鄴;지명) 떄문에 근심하시므로 제가 서문표(西門豹)를 천거하였고, 임금께서 중산을 정벌하고자 하시므로 제가 악양(樂羊)을 천거하였으며, 중산을 이미 빼앗은 후에는 지키게 할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제가 선생을 천거하였고, 임금의 아들에게 사부(師傅)가 없자 제가 굴후부(屈侯鮒)를 천거하였습니다.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바로만 따져도 제가 위성보다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이극이 말하기를 「위성의 식록(食祿)은 천종(千鍾;곡식을 되는 단위. 1종은 6곡<斛>4두)인데 10분의 9는밖에 있고 10분의 1만 안에 있소. 그렇기 때문에 동쪽에서 복자하․전자방․단간목을 얻었는데 이 세 사람은 임금이 모두 스승을 삼았으나 자네가 천거한 다선 사람은 임금이 모두 신하로 삼았으니, 자네가 어찌 위성에게 비한단 말인가?」하니, 책황이 재배하면서 말하기를 「저 책황은 변변치 못한 사람이어서 대답을 잘못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제자가 되겠습니다.」하였다.

→ 文候 謂李克曰 先生이 嘗有言曰 家貧에 思賢妻하고 國難에 思良相이라하니 今所置는 非成則璜이니 二子何如오 對曰 居視其所親하며 當視其所輿하며 達視其所擧하며 窮視其所不爲하며 貧視其所不取니 五者에 足以定之矣니라 問候曰 先生은 就舍하라 五之相을 定矣러라 李克이 出에 翟璜曰 君召卜相하니 果誰爲之오 克이曰 魏成이니라 璜이 忿然曰 西河守吳起도 臣所進也요 君이 內以鄴으로 爲廈어시늘 臣이 進西門豺하고 君이 欲代中山이시어늘 臣이 進樂羊하고 中山을 已拔에 無使守之어늘 臣이 進先生하고 君之子 無傳어늘 臣이 進屈侯鮒하니 以耳目之所曙記로 臣이 何負於魏成이리오 克曰 魏成은 食祿天鍾에 什九는 在外하고 什一은 在內라 是以로 東得卜子夏田子方般干目하니 此三人者는 君皆師之하시고 子所進五人은 君皆臣之하시니 子惡得與魏成으로 比也리오 璜이 再拜曰 璜은 圖人也라 失對하니 願卒爲弟子하노라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인데 노(魯)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제(薺)나라 사람이 노나라를 침범하자 노나라 사람들이 장수로 삼고자 하였으나 오기가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이 의심하니, 오기는 아내를 죽이고 대장이 되기를 구하여 제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오기가 처음에 증삼(曾參)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어미의 상(喪)에 분상(奔喪)을 하지 않아 증삼이 절교했었습니다. 이제 또 아내를 죽여 임금의 장수가 되기를 구했으니, 오기는 잔인하고 행실이 야박한 사람입니다. 또한 작은 노나라가 적을 이겼다는 이름을 얻는다면 제후(諸侯)들이 노나라를 도모할 것입니다」하니 오기가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위문후(魏文侯)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가서 귀순하였다. 문후가 이극에게 물으니, 이극이 말하기를 「오기는 탐욕스럽고 색을 좋아하지만, 용병(用兵)함에 있어서 사마양저(司馬穰苴)도 그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문후가 장수를 삼아 진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성을 빼앗았다. 오기는 장수가 되어서는 가장 낮은 사졸(士卒)들과 의식(衣食)을 함께하고, 누울때에 자리를 펴지 않고, 다니면서는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친히 양식을 싸 지고 다니며 사졸과 노고를 나누었다. 병졸 가운데 종기를 앓는 자가 있자 오기는 그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그 병졸의 어미가 그 말을 듣고는 울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들은 졸병인데도 장군이 스스로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왜 우는가?」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지난 해에는 오공이 그 아이 아비의 종기를 빨아주어, 그 아비가 발꿈치도 떼지 않고 싸우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었소 . 오공이 이제 또 그 아들의 종기를 빨았으니, 나는 아들이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겠소. 그래서 우는 것이오.」하였다.

→ 吳起者는 衛人이라 仕於魯러니 齊人이 伐魯어늘 魯人이 欲以爲將하되 起取齊女하여 爲妻라 魯人이 疑之하니 起殺妻以求將하여 大破齊師하다 或이 譖之魯侯曰 起始事曾參이라가 母死에 不奔喪이어늘 曾參絶之러니 今에 又殺妻以求爲君將하니 起는 殘忍薄行人也라 且以魯國區區 而有勝敵之名 則諸侯圖魯矣리이다 하니 起恐得罪하여 聞魏文侯賢하고 乃往歸之하다 文侯 問諸李克하니 克이 曰 起는 貪而好色이나 然이나 用兵은 司馬穰苴라도 弗能過也리이다 於是에 文侯 以爲將하여 擊秦拔五城하다 起之爲將에 與士卒最下者로 同衣食하고 臥不設席하며 行不騎乘하고 親裏羸糧하여 與士卒로 分勞苦러라 卒에 有病疽者어늘 起爲吮之하니 卒母 聞而哭之하니 人曰 子는 卒也而將軍이 自吮其疽하니 何哭爲오 母曰 往年에 吳公이 吮其父하니 其父戰不旋踵하여 遂死於敵이러니 吳公이 今又吮其子하니 妾는 不知其死所矣라 是以哭之하노라

 

안왕(安王) - 위열왕의 아들 . 재위 26년

 

11년(경인) 전화(田和)가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옮기고 1성(城)을 식읍(食邑)으로 주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庚寅十一年이라 田和 遷齊康公 於海上하고 使食一城하여 奉先祀하다.

 

13년(임진) 제(齊)나라 전화(田和)가 제후(諸侯) 되기를 구하거늘, 위문후(魏文侯)가 그를 위하여 왕 및 제후들에게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 壬辰十三年이라 齊田和 求爲諸侯어늘 魏文侯 爲之請於王及諸侯하니 王이 許之하다.

 

15년(갑오) 위문후가 죽고 태자 격(擊)이 즉위하니, 이가 무후(武侯)이다. 무후가 서하(西河)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중류(中流)에 이르러 오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름답다, 험고한 산하(山河)여! 이것이 위나라의 보배이다.」하니, 대답하기를 「덕에 있는 것이지 험함에 있는게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는 왼쪽에 동정호(洞庭湖)가 있고 오른쪽에는 팽려호(彭蠡湖)가 있었으나 덕의(德義)를 닦지 않아 우왕(禹王)이 멸망시켰습니다. 하(夏)나라의 절왕은 왼쪽에 하수(河水)와 제수(濟水)가 있고 오른쪽에는 태화산(泰華山)이 있었으며 이궐산(伊闕山)이 그 남쪽에 있고 양장산(羊腸山)이 그 북쪽에 있었으나 정사가 어질지 못하여 탕왕(湯王)이 내쳤습니다 상(商)나라 주왕은 왼쪽에 맹문산(孟門山)이 있고 오른쪽에는 태항산(太行山)이 있었으며 상산(常山)이 그 북쪽에 있었고 대하(大河)가 그 남쪽을 지나갔으나 정사가 부덕(不德)하여 무왕(武王)이 죽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 험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 됩니다.」하니, 문후가 「좋다」고 하였다.

→ 甲午十五年이라 魏文侯 薨하고 太子擊이 立하니 是爲武侯라 武侯浮西河而下 中流할새 顧謂吳起曰 美哉라 山河之固여 此는 魏國之寶也로다 對曰 在德이요 不在險이니이다 昔에 三苗氏는 左洞庭이요 右彭蠡로되 德義不修어늘 禹滅之하시고 夏桀之居는 左河濟요 右泰華요 伊闕이 左其南하고 羊腸이 左其北하되 修政不仁이어늘 湯이 放之하시고 商紂之國은 左孟門이요 右太行이요 常山이 左其北하고 大河가 經其南한되 修政不德이어늘 武王이 殺之하시니 由此觀之컨대 在德이요 不在險이니 若君不修德이면 舟中之人이 皆敵國也니이다 武侯曰 善하다.

 

위(魏)나라가 재상을 임명하였는데 전문(田文)을 재상으로 삼았다. 오기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전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그대와 공(功)을 따져보아도 되겠는가?」하니 전문이 「좋소」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사졸(士卒)들로 하여금 죽음을 달게 여기고 적국이 감히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대와 나 가운데 누구이겠소?」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자네만 못하네」하니, 오기가 말하기를 「백관(百官)을 다스리고 백성들과 친하고 창고를 차게 하는 것은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나은가?」하니, 전문이 「자네만 못하네」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서하(西河)를 지켜 진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한(韓)나라와 조(趙)나라가 공경하여 따르게 하는 것은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나은가?」하니 전문이 「자네만 못하네」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가 모두 나보다 못한데도 지위는 나의 위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니 전문은 「임금이 어리어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고 대신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이 믿지 않는 이럴때에 자네에게 부탁하겠는가, 나에게 부탁하겠는가?」하였다. 오기가 묵묵히 한참 있더니 말하기를 「자네에게 부탁할 곳이네」하였다. 오랜후에 위무후(魏武侯)가 의심하자 오기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초나라로 도망하였다. 초도왕(楚悼王)은 평소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있어 오기가 오자 재상에 임명하였다. 오기는 법령(法令)을 밝게 살피고 급하지 않은 관원을 덜며 소원(疏遠)한 공족(公族)을 폐하고 전투할 군사를 기르되 군사를 강하게 하기에 힘쓰고, 종횡설(從橫說)로 유세(遊說)하는 자를 파하였다. 그래서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삼진(三晋)을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가 강해짐을 두려워하고, 초나라의 귀족과 대신들 가운데도 오기를 원망하는자가 많게 되었다.

→ 魏置相할새 相田文하니 吳起不悅하여 謂田文曰 請與子論功이 何乎아 田文이 曰 可하다 起曰 將三軍하여 使士卒로 樂死하고 敵國이 不敢謀는 子孰與起오 文이 曰 不如子로다 起曰 治百官하며 親萬民하며 實府庫는 子孰與起오 文이 曰 不如子로다 起曰 守西河而秦兵이 不敢東嚮하고 韓趙賓從은 子孰與起오 文이 曰 不如子로다 起曰 此三者는 子 皆出吾下而位加吾上은 何也오 文이 曰 主少國疑에 大臣이 未附하고 百姓이 不信하니 方是之時하여 屬之子乎아 屬之我乎아 起黙然良久에 曰 屬之子矣리라 久之요 魏武侯 疑之어늘 起懼誅하여 遂奔楚하니 楚悼王이 素聞其賢이라 至則任之爲相하니 起明法審令하고 損不急之官하고 廢公族疎遠者하여 以撫養戰鬪之士하니 要在强兵이라 破遊說之言從橫者하다 於是에 南平百越하고 北卻三晉하고 西伐秦하니 諸侯 皆患楚之强 而楚之貴戚大臣이 多怨吳起者러라

 

16년(을미)처음으로 제(齊)나라가 대부(大夫) 전화(田和)를 명하여 제후로 삼았다.

→ 乙未十六年이라 初命齊大夫田和하여 爲諸侯하다

21년(경자) 초도왕(楚悼王)이 죽으니, 귀족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하여 죽었다.

→ 庚子二十一年이라 楚悼王이 薨하거늘 貴戚大臣이 作亂하여 攻殺起하다.

 

23년(임인) 제강공(齊康公)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전씨(田氏)가 마침내 제나라를 아울러 소유하게 되었다.

→ 壬寅二十三年이라 齊康公이 薨하니 無子라 田氏 遂幷齊而有之하다.

 

25년(갑진) 자사(子思)가 위후(衛侯)에게 구변(苟變)에 대해 말하기를 「그 재목이 500승(乘)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하니. 위후가 말하기를 「나도 그가 장수가 될 수 있음은 알지만, 그러나 구변은 일찍이 서리(胥吏)가 되어 백성들에게 부세(賦稅)하면서 남의 계란 두 개를 먹었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오」 하였다. 자사가 말하기를 「대저 성인께서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것은 마치 장인(匠人)이 나무를 쓰는 것과 같아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장인은 두아름이나 되는 기(杞)와 재(梓) 같은 나무가 몇 자 썩었다 하여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임금께서 전국(戰國)의 세상에 처하여 조아(爪牙)의 사(士)를 고르면서 달걀 두 개 때문에 간성(干城)의 장수를 버리시니, 이는 이웃 나라가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공이 재배하고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하였다.

→ 甲辰二十五年이라 子思 言苟變於衛侯曰 其材 可將五百乘이니이다 公曰 吾知其可將이나 然이나 變也嘗爲吏하여 賦於民而食人二鷄子故로 弗用也하노라 子思曰 夫聖人之官人이 猶匠之用木也하여 取其所長하고 棄其所短이라 故로 杞梓連拘而有數尺之朽라도 良工은 不棄하나니 今君이 處戰國之世하여 選爪牙之士 而以二卵으로 棄干城之將하시니 此는 不可使聞於隣國也로소이다 公이 再拜曰 謹受敎矣리이다

 

위후(衛侯)가 계책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데도 여러 신하들의 화답하는 것이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았다. 자사가 말하기를 「내가 위나라를 보건대 이른바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신하는 신하가 아니다. 일의 시비를 살피지 않은 채 사람들이 자기를 기리는 것을 기뻐하니 혼암(昏闇)하기 막심하고, 이치의 소재(所在)를 헤아리지 않고 아유구용(阿諛求容)하니 아첨이 막심하다. 임금은 혼암하고 신하는 아첨하여 백성들의 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함께하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나라에 사람이 없어 망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자사가 위후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국사(國事)가 장차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임금은 말을 해놓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도 경대부(卿大夫)들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며, 경대부들이 말해놓고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도 사서인(士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이미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면 여러 아랫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로 현명하게 여기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바로잡으면 거슬리어 화(禍)가 있으니 이렇게 되면 선(善)이 어디를 좇아 생기겠습니까? 시(詩)에 이르기를 <모두 내가 성인이라고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역시 임금의 군신과 같다고 하겠습니다」하였다.

→ 衛侯 言計非是하되 而群臣和者 如出一口하니 子思曰 以吾觀衛하건대 所謂君不君 臣不臣者也로다 夫不察事之是非 而悅人讚己하니 闇莫甚焉이요 不度理之所在 而阿諛苟容하니 諂莫甚焉이라 君闇臣諂하여 以居百姓之上이면 民不與也니 若此不已면 國無類矣리이다 子思 言於衛侯曰 君之國事 將日非矣로소이다 君이 出言에 自以爲是 而卿大夫 莫敢矯其非하고 卿大夫 出言에 自以爲是 而士庶人이 莫敢矯其非하니 君臣이 旣自賢矣어늘 而群下同聲賢之하니 賢之 則順而有福하니 矯之則逆而有禍하니 如此 則善安從生이리이까 詩曰 具曰予聖이어니 誰知烏之雌雄고 하니 抑亦似君之君臣乎인저

 

26년(을사) 왕이 죽고 아들인 열왕(烈王) 희(喜 )가 즉의하였다.

→ 乙巳二十六年이라 王이 崩하고 子烈王喜立하다.

 

한(韓)․위(魏)․조(趙)가 함께 진정공(晉靖公)을 폐하여 가인(家人)을 삼고, 그 땅을 나누었다.

→ 韓魏趙 共廢晉靖公하여 爲家人而分其地하다.

 

 

열왕(烈王)

 

6년(신해) 제위왕(齊威王)이 와서 조회(朝會)하였다. 이때에 주(周)나라 왕실이 미약하여 제후들이 조회하지 않았는데, 제나라만 유독 조회하니, 천하가 이로 말이암아 위왕을 더욱 현명하게 여겼다.

→ 辛亥六年이라 齊威王이 來朝하다 是時에 周室이 微弱하여 諸侯莫朝而齊獨朝之하니 天下以此로 益賢威王하더라.

 

위왕(威王)이 즉묵대부(卽墨大夫)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즉묵에 있으면서부터 헐뜯는 말이 날로 이르기에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살펴보게 했더니, 전야(田野)가 개간되고 백성들이 넉넉하며 관에 일이 없어 동방(東方)이 그 때문에 평안하였다. 이는 그대가 내 좌우의 근신(近臣)을 섬겨 도움을 구하지 않은 것이다」하고는 만가(萬家)를 봉하였다. 아대부(阿大夫)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아(阿)를 맡으면서부터 기리는 말이 날로 이르기에 사람을 시켜 아를 보게 했더니, 전야가 개간되지 않고 백성들이 가난에 굶주렸다. 지난날 조(趙)나라가 견(鄄)을 공격해 올때에는 그대가 구하지 않았고, 위(衛)나라가 설릉(薛陵)을 빼앗을 대 그대는 알지도 못했었다. 이는 그대가 나의 좌우에 있는 자에게 폐백을 후하게 하여 기림을 구한 것이다.」하고는 그날에 아대부 및 일직이 좌우에서 기린 자들을 팽(烹;형<形>의 하나로 삶아 죽이는 것)하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드려워하여 감히 잘못을 꾸미지 못하고 실정(實情)에 힘쓰게 되어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져 천하의 강자가 되었다.

→ 威王이 召卽墨大夫하여 語之曰 自子之居卽墨也로 毁言이 日至어늘 吾使人視卽墨하니 田野闢하고 人民이 給하고 官無事하여 東方이 以寧하니 是는 子不事吾左右하여 以求助也라 하고 封之萬家하고 召阿大夫하여 語之曰 自子守阿로 譽言이 日至어늘 吾使人視阿하니 田野不闢하고 人民이 貧餒하고 昔日에 趙攻鄄하되 子不救하고 衛取薛陵하되 子不知하니 是는 子厚幣事吾左右하여 以求譽也라 하고 是日에 烹阿大夫 及左右嘗譽者하니 於是에 群臣이 悚懼하여 莫敢飾非하고 務盡其情하니 齊國이 大治하여 彊於天下러라.

 

7년(임자)왕이 죽고 동생인 현왕(顯王) 편(扁)이 즉위하였다.

→ 壬子七年이라 王이 崩하고 弟顯王扁이 立하다.

 

 

현왕(顯王)

7년(기미) 진효공(秦孝公)이 즉위하였다. 이때에 하산(河山) 이동(以東)에 강국이 여섯이고 회사(淮泗) 사이에 작은 나라가 10여 개였는데, 초(楚)․위(魏)는 진(秦)과 경계를 접하였다. 모두 진나라를 이적(夷狄)으로 대우하여 배척하고 중국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효공이 발분(發憤)하여 덕(德)을 펴고 정사를 닦아 진나라를 강성하게 하고자 하였다.

→ 己未七年이라 秦孝公이 立하다 是時에 河山以東에 强國이 六이요 淮泗之間에 小國이 十餘라 楚魏 與秦接界하여 皆以夷狄으로 遇秦擯斥之하여 不得與中國之會盟하니 於是에 孝公이 發憤하여 布德修政하여 欲以彊秦이러라

 

 

8년(경신) 진효공이 나라 안에 명령하기를 「빈객(賓客)과 군신(群臣)으로 기계(奇計)를 내어 진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내가 벼슬을 높이고 땅을 나누어 주겠다.」하였다. 이에 위(衛)의 공손앙(公孫鞅)이 그 명령을 듣고 서족으로 진나라에 들어가 폐신(嬖臣)인 경감(景監)을 인하여 효공 뵙기를 청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을 유세하니, 효공이 크게 기뻐하여 그와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였다.

→ 庚申八年이라 孝公이 令國中曰 賓客君臣에 有能出奇計彊秦者면 吾且尊官하고 與之分士하리라 於是에 衛公孫鞅이 聞令하고 乃西入秦하여 因嬖臣景監하여 以求見孝公하고 說以富國强兵之術하니 公이 大悅하여 與議國事하다.

 

10년(임술) 위앙(衛鞅)이 법을 고치고자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다. 위왕이 진효공에게 말하기를 「대저 백성이란 처음에는 함께 생각할 수 없고 성공한 후에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논하는 자는 속(俗)과 화합하지 못하고,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대중과 모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참으로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옛것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하였다. 감룡(甘龍)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법에 따라 다스리는 것은 관리들이 익숙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깁니다」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보통사람은 옛 풍속을 편안하게 여기고, 학자는 자기가 들은 바에 빠지니, 이 양자는 관에 있으면서 법을 지킬 수는 있어도 더불어 법 밖의 일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지혜 있는 자가 법을 만들면 어리석은 자는 제재를 받으며, 어진 자가 예(禮)를 고치면 변변치 못한 자는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하니, 효공이 「좋다」하고는 위앙으로 좌서장(左庶長)을 삼아 마침내 법 고치는 명령을 정했다. 백성으로 항금 십오(什伍)를 하여 책임지고 살피게 하여 연좌(連坐)시키되, 간사(姦邪)한 자를 고한 자는 적에게 머리를 벤 것과 같게 상을 주고, 간사한 자를 고하지 않은 자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같게 벌을 주고, 군공(軍功)이 있는자는 높은 벼슬을 표준해 주었으며, 사사로이 싸우는 자가 각기 경중에 따라 형을 받게 하고, 상하가 죽을 힘을 다하여 본업(本業)에 힘써서 농사짓고 베를 짜 곡식과 비단을 많이 생산하는 자는 부역을 면제하고, 상업(商業)에 종사하거나 게을러 가난한 자는 들어서 수노(收孥)하고, 공이 있는 자는 현영(顯榮)하고 공이 없는 자는 비록 부(富)하더라도 분화(芬華)함이 없었다.

법령(法令)을 이미 갖추어 놓고 반포(頒布)하지 않고는 백성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세 길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저자 남문(南門)에 세우고 백성 가운데 북문(北門)으로 그걸 옮기는 자가 있으면 10금(金)을 준다고 현상(懸賞)하였다.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못하니, 다시 이르기를 「능히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하니, 어떤 한 사람이 옮기자 마침내 50금을 주고는 법령을 내렸다. 법령을 행한 지 1년이 되니, 진나라 백성이 국도에 와서 새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수천이었다. 이때에 태자가 법을 어기니 위앙이 말하기를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범하기 때문이다. 태자는 임금의 사자(嗣子)이니 형벌을 시행할 수는 없다. 」하고, 그의 부(傅) 공자건(公子虔)을 형벌하고 사(師) 공손가(公孫賈)를 경(黥;형벌의 하나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하니, 이튿날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법령을 따랐다. 행한 지 10년이 되자 진나라는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게 되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백성들이 공전(公戰)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겁내어 향읍(鄕邑)이 크게 다스려졌다. 그러자 진나라 백성 가운데 처음에 법령이 불편하다고 했던 자가 와서는 법령의 편함을 말하자 위앙이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이다.」하고는 다 변경(邊境)으로 옮기니, 그후에는 백성들이 감히 법령에 대해 의논하지 못했다.

→ 壬戌十年이라 衛鞅이 欲變法하니 秦人이 不悅이어늘 衛鞅이 言於秦孝公曰 夫民이 不可與 慮始요 而可與樂成이라 論至德者는 不和於俗하고 成大功者는 不謀於衆하나니 是以에 聖人이 苟可以强國인대 不法其故이니이다 甘龍이 曰 不然하다 緣法而治者는 吏習而民安之니라 衛鞅이 曰 常人은 安於故俗하고 學者는 溺於所聞하나니 以此兩者로 居官守法은 可也어니와 非所與論於法之外也라 智者作法에 愚者制焉하고 賢者更禮에 不肖者拘焉이니이다 公曰 善이라 하고 以衛鞅으로 爲左庶長하여 卒定變法之令하다 令民으로 爲什伍 而相收司連坐하되 告姦者는 與斬敵首로 同賞하고 不告姦者는 與降敵으로 同罰하고 有軍功者는 各以率受上爵하고 爲私鬪者는 各以輕重으로 被刑하고 大小僇力本業하여 耕織 致粟帛多者는 復其身하고 事末利하며 及怠而貧者는 擧以爲收孥하고 有功者는 顯榮하고 無功者는 雖富나 無所芬華러라 令을 旣具未布에 恐民之不信하여 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하고 募民하되 有能徙置北門者면 予十金하리라 民이 怪之하여 莫敢徙어늘 復曰 能徙者면 予五十金하리라 有一人이 徙之어늘 輒予五十金하고 乃下令하다 令行期年에 秦民이 之國都하여 言新令之不便者 以千數라 於是에 太子 犯法이어늘 衛鞅이 曰 法之不行은 自上犯之니 太子는 君嗣也라 不可施刑이라 하고 刑其傅公子虔하고 黥其師公孫賈하니 明日에 秦人이 皆趨令하여 行之十年에 秦國이 道不拾遺하고 山無盜賊하고 民이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니 鄕邑이 太治하더라 秦民이 初言令不便者 有來言令便者어늘 衛鞅曰 此는 皆亂法之民也라 하고 盡遷之於邊하니 其後에 民莫敢議令이러라.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대저 믿음이란 임금의 큰 보배이다. 나라는 백성에 의해 보장되고 백성은 믿음에 의해 보장되는데, 믿음이 아니면 백성을 부리지 못하고 백성이 아니면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날의 왕자(王者)는 사해(四海)안을 속이지 않았고, 패자(覇者)는 사방 이웃을 속이지 않았으며,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그 백성을 속이지 않았고 집안을 잘 다스린 자는 그 친(親)을 속이지 않았다. 착하지 못한자는 이와 반대로 그 이웃나라를 속이고 그 백성을 속이며, 윗사람은 아랫 사람을 믿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믿지 못해 상하의 마음이 벌어져 패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이익된 것으로써 그 손상됨을 치료하지 못하고, 얻은 것으로써 그 망함을 돕지 못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옛날 제환공(齊桓公)이 조말(趙沫)과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고, 진문공(晉文公)은 원(原)을 치는 이익을 탐하지 않았으며, 위문후(魏文侯)는 우인(虞人)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고, 진효공(秦孝公)은 나무를 옮기면 주겠다는 상(賞)을 어기지 않았는데, 이 네 임금의 도(道)는 순백(純白)하지는 못하였고, 상군(商君)은 더욱 각박하다고 일컬어졌다. 또 전쟁으로 공격하는 세상에 살아 천하가 사력(詐力)으로 갔는데도 오히려 믿음을 잊지 않고 그 백성을 길렀는데, 하물며 사해(四海)를 치평(治平)하는 정사이겠는가?」

→溫公曰 夫信者는 人君之大寶也라 國保於民하고 民保於信하니 非信이면 無以使民이요 非民이면 無以守國이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不欺四海하고 覇者는 不欺四鄰하고 善爲國者는 不欺其民하고 善爲家者는 不欺其親하며 不善者는 反之하여 欺其鄰國하고 欺其百姓하여 甚者는 欺其兄弟하고 欺其父子하여 上不信下하고 下不信上하고 上下離心하여 以至於敗하여 所利不能藥其所傷하고 所獲不能補其所亡하고 豈不哀哉아 昔齊桓公은 不背曹沫之盟하고 晉文公은 不貪伐原之利하고 魏文侯는 不棄虞人之期하고 秦孝公은 不廢徙木之賞하니 此四君者는 道非粹白하고 而商君은 尤稱刻薄이라 又處戰攻之世하여 天下移於詐力이로되 猶且不忘信하여 以畜其民하니 況爲四海治平之政者哉아.

 

 

14년(병인) 제위왕(齊威王)과 위혜왕(威惠王)이 교외에서 사냥을 하였다. 혜왕이 말하기를 「제나라에도 보물이 있습니까?」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없습니다」하였다. 혜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나라가 비록 작으나 그래도 수레 12대의 전후를 각기 비출 수 있는 직경 1촌(寸)되는 구슬이 10개가 있는데 어찌 대국인 제나라에 보물이 없겠습니까?」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보배로 삼는 것은 왕과는 다릅니다. 내 신하 가운데 단자(檀子)란 자가 있어 이로 하여금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면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노략질을 못하고, 사상(泗上)의 열두 제후가 모두 와서 조회합니다. 내 신하 가운데 반자(盼子)라는 자가 있는데, 그를 시켜 고당(高唐)을 지키게 하면 조(趙)나라 사람이 감히 동쪽으로 황하(黃河)의 고기를 잡지 못하며, 내 관리 가운데 검부(黔夫)란 자가 있는데 그를 시켜 서주(西州)를 지키게 하면 연(燕)나라 사람들은 북문(北門)에서 제사를 지내고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서문(序文)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사하여 따라온 자가 70여 집이나 됩니다. 내 신하 가운데 종수(種首)란 자가 있는데 그를 시켜 도적을 방비하게 하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니, 이 네 신하는 천 리를 비출 것이지 어찌다만 12승(乘)뿐이겠습니까?」하니, 혜왕은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 丙寅四十年이라 齊威王魏惠王이 會하여 田於郊할새 惠王이 曰 齊亦有寶乎아 威王이 曰 無有로다 惠王曰 寡人은 國이 雖小나 尙有徑寸之珠하여 ㅅ照車前後各十二乘者 十枚로나 豈以齊大國而無寶乎리오 威王曰 寡人之所以爲寶者는 與王으로 異하니 吾臣에 有檀子자하니 使守南城 則楚人이 不敢爲寇하고 泗上十二諸侯 皆來朝하고 吾臣에 有盼子者하니 使守高唐 則趙人이 不敢東漁於河하고 吾吏에 有黔夫者하니 使守徐州 則燕人은 祭北門하고 趙人은 祭西門하고 徙而從者 七十餘家요 吾臣에 有種首者하니 使備盜賊 則道不拾遺하나니 此四臣者는 將照千里니 豈特十二乘哉리요 惠王이 有慚色이러라

 

 

18년(경오) 한소후(韓昭侯)가 신불해(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았다. 신불해란 자는 정(鄭)나라의 미천한 신하였는데 황로학(黃老學)과 형명학(刑名學)을 배워 소후에게 벼슬을 구하니, 소후가 써서 재상을 삼았다. 안으로는 정교(政敎)를 닦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응수하니, 15년 동안 신자(申子)가 죽을 때까지 나라가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하였다. 한소후에게 떨어진 바지가 있어 간직하라고 명하니 모시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도 역시 어질지 못하십니다. 좌우에게 하사하지 않으시고 간직하십니까?」하니, 소후가 말하기를 「나는 듣건대 훌륭한 임금은 한번 찡그리고 웃는 것도 아낀다고 한다. 이제 이 바지가 어찌 다만 한번 찡그리고 웃는 것에 비교되겠느냐. 나는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겠다.」하였다.

→ 庚午十八年이라 韓昭侯 以申不害로 爲相하다 申不害者는 鄭之賤臣也라 學黃老刑名하여 以干昭候하니 昭候 用爲相하여 內修政敎하고 外應諸侯하니 十五年에 終申子之身토록 國治兵强하더라 韓昭侯 有弊袴러니 命藏之하니 侍者曰 君亦不仁者矣로다 不賜左右而藏之하니 昭候曰 吾聞明主는 受一嚬一笑라 하니 今袴 豈特嚬笑哉리오 吾 必待有功者하노라.

 

19년(신미) 진(秦)나라 상앙(商鞅)이 기궐(冀闕)의 궁정(宮庭)을 함양(咸陽)에 짓고 도읍을 옮겼다. 여러 작은 향취(鄕聚)를 합하여 한 현(縣)을 삼고, 현에는 영승(令丞)을 두니 무릇 31현이 되었으며, 정전(井田)을 페지하고 천맥(阡陌)을 개척하였다.

→ 辛未十九年이라 秦商鞅이 築冀闕宮庭於咸陽하여 徙都之하고 幷諸小鄕聚하여 集爲一縣하고 縣置令丞하니 凡三十一縣이라 廢井田하고 開阡陌하다.

28년(경진) 위(魏)의 방연(龐涓)이 한(韓)나라를 침범하였다. 한나라가 제(齊)나라에 구원하여 줄 것을 청하니, 제위왕이 군사를 일으켜 전기(田忌)와 전영(田嬰)과 전반(田盼)으로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손빈(孫臏)을 군사(軍師)로 삼아 한나라를 구하게 하였다. 곧바로 위나라의 도읍으로 달려가니, 방연이 이를 듣고는 한나라를 버리고 위(魏)로 돌아갔다. 위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태자(太子)신(申)으로 장수를 삼아 제나라 군사를 막게하였다. 손빈(孫臏)이 전기에게 말하기를 「저 삼진(三晋)의 군사는 평소 사납고 용감하여 제나라를 가볍게 보아 제나라를 겁장이라고 부릅니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그 형세를 따라 이롭게 이끄는 것인데, 병법(兵法)에 <백 리에서 이익을 얻는 자는 상장(上將)을 잃고, 50리에서 이익을 취한 자는 군사가 반만 이른다>고 하였습니다.」하고는 이에 제나라 군사로 하여금 위(魏)의 땅에 들어가서는 10만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이튿날에는 5만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또 그 다음날에는 2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였다. 방연이 행군한 3일만에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본디 제나라 군사가 겁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땅에 들어온 3일 동안 도망한 군사가 겁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땅에 들어온 3일동안 도망한 군사가 절반을 넘는다. 」하고는 보군(步軍)을 버리고 경예병(輕銳兵)과 더불어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뒤쫓았다. 손자가 그들의 행군을 헤아려 보니 저녁때에는 마땅히 마릉(馬陵)에 이를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은데다가 옆에 막힌 곳이 많아 복병(伏兵)할 수가 있었다. 이에 큰 나무를 깍아 희게 만들어 글을 쓰기를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하였다. 그리고는 활을 잘 쏘는 제나라 군사 1만명으로 길을 끼고 매복하게 하고 해가 저물어 횃불을 들면 일제히 일어나기를 기약하였다. 방연이 과연 밤에 깍아높은 나무 아래에 이르러 백서(白書)를 보고는 불을 밝히고 읽기를 채 마치지 못할 때에 1만 개의 활을 일제히 쏘니, 위나라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 서로 대오를 잃었다. 방연은 스스로 지혜가 다하고 군사가 패한 것을 알고는 이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제나라는 승승장구하여 위나라 군사를 크게 파하였다.

→ 庚辰二十八年이라 魏龐涓이 伐韓하니 韓이 請救於齊어늘 齊威王이 因起兵하여 使田忌田嬰田盼으로 將之하고 孫臏으로 爲師하여 以救韓할새 直走魏都하니 龐涓이 聞之하고 去韓而歸魏하다 魏 大發兵하여 以太子申으로 爲將하여 以禦齊師어늘 孫子 謂田忌曰 彼三晋之兵이 素悍勇而輕齊하여 齊를 號爲怯이라 하니 善戰者는 因其勢而利導之하나니 兵法에 百里而趣利者는 蹶上將하고 五十里而趣利者는 軍半至라 하고 乃使齊軍으로 入魏地하여 爲十萬竈하고 又明日에 爲二萬竈하니 龐涓이 行三日에 大喜曰 我固知齊軍怯이라 入吾地三日에 士卒亡者 過半矣라 하고 乃棄其步軍하고 與其輕銳오 倍日幷行逐之하다 孫子 度其行하니 暮當至馬陵이라 馬陵은 道陿而旁多阻隘하니 可伏兵이라 하고 乃斫大樹하여 白而書之曰 龐涓이 死此樹下하리라 하고 於是에 令齊師善射者로 萬弩夾道而伏하고 期日暮하여 見火擧而俱發이러니 龐涓이 果夜至斫木下하여 見白書하고 以火燭之어늘 讀未畢에 萬弩俱發하니 魏師가 大亂相失이라 龐涓이 自知智窮兵敗하고 乃自剄하니 齊因乘勝하여 大破魏師하다.

 

29년(신사) 진(秦)이 위앙(衛鞅)을 상오(商於) 15읍(邑)에 봉하고 상군(商君)이라 불렀다.

→ 辛巳二十九年이라 秦이 封衛鞅商於十五邑하고 號曰 商君이라 하다.

 

31년(계미) 진효공(秦孝公)이 죽고 아들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였다. 공자(公子) 건(虔)의 무리가 고하기를 「상군(商君)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하니, 관리를 내어 잡게 하였다. 상군이 위나라로 도망하였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진(秦)으로 들여보내니, 상군이 그 무리와 함께 상오(商於)로 갔다. 진나라 사람들이 공격해 죽이어 거열(車裂)하여 조리돌리고 그 가족을 다 멸하였다. 처음에 상군이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법 집행이 엄혹하여, 위(魏)지방에 임하여 죄수를 논할 때에는 위수(渭水)가 다 빨갛게 되어 재상 10년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癸未三十一年이라 秦孝公이 薨하고 子惠文王이 立하니 公子虔之徒 告商君이 欲反이라 하거늘 發吏捕之하니 商君이 亡之魏어늘 魏人이 不受하고 復內之秦한대 商君이 與其徒로 之商於러니 秦人이 攻殺之하여 車裂하고 以徇盡滅其家하다 初에 商君이 相秦에 用法嚴酷하여 嘗臨渭論囚에 渭水盡赤하니 爲相十年에 人民多怨之러라

 

 

조양(趙良)이 상군을 보니, 상군이 묻기를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진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오고대부(五羖大夫)의 현명함과 누가 나은가?」하니, 조양이 말하기를 「천 사람이 맹종(盲從)하는 것은 한 선비가 비판하는 것만 못합니다. 제가 청컨대 종일 바른말을 해도 죽이지 않겠습니까?」하니 상군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조양이 말하기를 「오고대부는 형(荊)의 비루한 사람입니다. 진목공(秦穆公)이 소먹이는 그를 천거하여 백성의 위에 앉혔으나 진나라 사람이 감히 바라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진나라에 6,7년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동쪽으로 정(鄭)을 치고 세 번 진군(晉君)을 세웠으며 한 번 형(荊)의 화(禍)를 구했습니다. 그가 재상으로 있으면서는 수고로워도 수레를 타지 않았고, 더워도 일산(日傘)을 펴지 않아서 오고대부가 죽자 진나라의 남녀가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방아 찧는 자는 장단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대가 정사를 하면서는 공족(公族)을 능멸하고 백성을 해쳐서 공자(公子) 건(虔)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가 이미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대는 또 축환(祝驩)을 죽이고 공손가(公孫賈)를 형벌하였는데 시(詩)에 이르기를 「사람을 얻은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은 자는 망한다」고 하였으니 이 몇 가지는 사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위태로움은 아침이슬과 같은데도 오히려 상오(商於)의 부(富)를 탐내고 진나라의 정사로 굄을 받아 백성의 원망을 기르고 있습니다. 진왕(秦王)이 하루아침에 빈객(賓客)을 덜어서 조정에 서지 못하게 되면, 진나라에서 그대를 징치(微治)할 자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하였으나, 상군이 따르지 않다가 5개월만에 난이 일어났다.

→ 趙良이 見商君한대 商君이 問曰 子觀我治秦컨대 孰與五羖大夫賢고 趙良이 曰 千人之諾諾이 不如一士之諤諤이라 하니 僕이 請終日正言 而無誅可乎아 商君이 曰 諾다 趙良이 曰 五羖大夫는 荊之鄙人也라 穆公이 擧之牛口之下하여 而加之百姓之上하니 秦國이 莫敢望焉이라 相秦六七年而 東伐鄭하고 三置晉君하고 一救荊禍하고 其爲相也에 勞不坐乘하고 暑不張盖하고 五羖大夫 死에 秦國의 男女 流涕하고 童子 不歌謠하고 舂者 不相杵러니 今君之從政也에 陵轢公族하고 殘傷百姓하니 公子虔이 杜門不出 已八年矣요 君이 又殺祝驩而 黥公孫賈하니 詩 에 曰 得人者는 興하고 失人者는 崩이라 하니 此數者는 非所以得人也라 君之危 若朝露어늘 而尙貪商於之富하고 寵秦國之政하여 畜百姓之怨하니 秦王이 一旦에 損賓客而不立朝면 秦國之所以收君者 豈其微在아 商君이 弗從이러니 居五月而難作하다.

 

33년(을유) 추(鄒)나라 사람 맹가(孟軻)가 위헤왕(魏惠王)을 뵈었다. 왕이 말하기를 「어른께서 천리를 멀다 않으시고 오셨으니 또한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하시려는 것이겠지요?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하십니까. 인의(仁義)일 뿐입니다.」하였다. 처음에 맹자가 자사(子思)에게 배웠는데 일찍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는 무엇부터 해야하는가를 무었다. 자사가 말하기를 「먼저 이롭게 해야한다. 」라고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바는 역시 인의일 따름이지 하필 이(利)겠습니까?」하였다. 자사가 말하기를 「인의는 진실로 이롭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어질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위에서 의롭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속이기를 좋아하니, 이는 크게 이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이(利)는 의(義)의 화(和)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利)로써 몸을 편안하게 하여 덕(德)을 높인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 乙酉三十三年이라 鄒人孟軻 見魏惠王하신대 王曰 叟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有以利吾國乎이까 孟子曰 君은 何必曰利이니까 仁義而已矣니이다 初에 孟子 師子思할새 嘗問牧民之道는 何先이니이까 子思曰 先利之니라 孟子曰 君子 所以敎民이 亦仁義而已矣니 何必利이니까 子思曰 仁義는 固所以利之也라 上不仁則下不得其所하고 上不義則下樂爲詐也니 此爲不利大矣라 故로 易에 曰 利者는 義之和也라 하고 又曰 利用安身하여 以崇德也라 하니 此皆利之大者也니라.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자사(子思)의 말도 한가지이다. 오직 어진 자라야만 인의(仁義)의 이로움을 알고 어질지 못한 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양왕(梁王)에게 곧바로 인의를 말하고 이(利)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더불어 말하는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 溫公曰 子思孟子之言一也라 夫唯仁者라야 爲知仁義之利하고 不仁者는 不知也라 故로 孟子之對梁王이 直以仁義 而不及利者는 所與言之人異故也라

 

36년(무자) 처음에 낙양(洛陽) 사람 소진(蘇秦)이 진왕(秦王)에게 천하를 병탄(倂呑)하는 술책을 말하였는데 진왕이 그 말을 쓰지 않았다 소진이 이에 떠나 연문공(燕文公)에게 말하기를 「연나라가 적의 침범을 받지 않고 전쟁의 해를 입지 않는 까닭은 조(趙)나라가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더불어 합종(合從)하여 친밀하면 천하가 하나가 되어 연나라는 반드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문공이 그대로 따라 소진에게 거마(車馬)를 주어 조숙후(趙肅侯)에게 유세하도록 했다. 소진이 말하기를 「지금을 당하여 산동(山東)의 나라 가운데 조나라가 막강하여 진나라에 해를 끼치는 바도 조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은 한(韓)․위(魏)가 그 후면을 도모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진나라가 한나라․위나라를 공격하여도 명산대천(名山大川)의 한계가 없으니 점점 잠식(蠶食)하면 한․위는 지탱하지 못하고 반드시 진나라에 편입되어 신하 노릇을 할 것이니, 진나라에 한․위의 규획(規劃)이 없으면 화(禍)가 조나라에 미칠 것입니다. 대저 연횡(連橫)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제후의 땅을 쪼개어 진나라에 주자고 하는데, 진나라가 성공하면 그 몸은 부귀영화를 누리어 나라가 화를 입어도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한(韓)․위(魏)․제(齊)․초(楚)․연(燕)이 하나로 합종(合從)하여 친밀하여 진나라를 물리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천하의 장수로 하여금 원수(洹水)가 서로 모이게 하여 말하기를 <진나라가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하면 다섯 나라가 각기 정예 군사를 내어 혹 진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구원하되, 만약 맹약(盟約)과 같게 하지 않는자가 있으면 다섯 나라가 함께 치자>고 한다면 진나라 군사가 반드시 함곡관(函谷關)을 나와 산동(山東)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숙후가 크게 기뻐하여 소진을 후대하여 존총(尊寵)하고 상을 내려 제후와 맹약하게 하였다.

→ 戊子三十六年이라 初에 洛陽人蘇秦이 說秦王하여 以兼天下之術하니 秦王이 不用其言이어늘 蘇秦이 乃去하여 說燕文公曰 燕之所以不犯寇被兵者는 以趙爲之蔽也니 願大王은 與趙從親하여 天下爲一 則燕國이 必無患矣리이다 文公이 從之하여 資蘇秦車馬하여 以說趙肅候曰 當今에 山東之國은 莫强於趙요 秦之所害도 亦莫如趙나 然而秦不敢伐趙者는 畏韓魏之議其後也라 秦之攻韓魏也에 無有名山大川之限하니 稍蠶食之면 韓魏不能支하여 必入臣於秦하리니 秦無韓魏之規면 則禍中於趙矣리이다 夫衡人者는 皆欲割諸侯之地하여 以與秦하나니 秦成則其身이 富榮하고 國被秦患이라도 而不與其憂하리다 竊爲大王計하건대 莫若一韓魏齊楚燕趙하여 爲從親以擯秦이니 令天下之將相으로 會於洹水之上하되 約曰 秦이 攻一國이어든 五國이 各出銳師하여 或撓秦하며 或救之하되 有不如約者어든 五國이 共伐지라 하면 則秦甲이 必不敢出函谷하여 以害山東矣리이다 肅侯大悅하여 厚待蘇秦하고 尊寵賜賚之하여 以約於諸侯하다.

 

 

이에 소진이 한왕(韓王)에게 유세하기를 「한나라 땅의 사방이 900여리이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 되며 천하의 강궁(强弓)․경노(勁弩)․이검(利劍)이 모두 한나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가 반드시 의양(宜陽)과 성고(成皐)의 땅을 달라고 할 것인데 이제 이를 주면 명년에 또다시 땅을 떼어주기를 구할 것입니다. 땅에는 한정이 있고 진나라의 구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차라리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뒷구멍은 되지말라>고 하였는데 대왕의 어짊으로 한나라의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도 소의 뒷구멍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그윽히 대왕을 위하여 부끄럽게 생각합니다.」하니, 한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소진이 위왕(魏王)에게 유세하기를 「대왕의 땅이 사방 천 리이고 무사(武士)가 20만이며 창두(蒼頭)가 20만명이요 분격(奮擊)이 20만 명이며 시도(廝徒)가 10만명이요 수레가 600승(乘)이며 기마가 5000필이나 됩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의 말을 듣고 진나라의 신하가 되어 섬기고자 하시니, 원하옵건데 대왕께서는 자세히 살피소서」 하니 위왕이 그 말을 들었다.

소진이 제왕에게 유세하기를 「제나라는 사방이 막힌 나라로 땅의 사방이 2000여리이고 갑병(甲兵)이 수십만 명이며,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임치 거리에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 어깨가 맞닿으며, 옷깃이 이어져 장막을 이루고 땀을 뿌리면 비오듯 합니다. 대저 한나라와 위나라를 매우 두려워하는 것은 진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입니다. 이제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비록 깊이 들어오고자 해도 한나라와 위나라가 후면을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제마라를 해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대저 진나라가 제나라를 어찌 할 수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서쪽으로 향하여 섬기고자 하니, 이는 여러 신하들의 계책이 잘못입니다.」하니, 제왕이 허락하였다.

→ 於是에 蘇秦이 說韓王曰 韓은 地方이 九百餘里요 帶甲이 數十萬이요 天下之强弓勁弩利劒이 皆從韓出한대 今大王이 事秦하시면 秦이 必求宜陽成皐하리니 今玆效之면 明年에 又復求割地니 地有盡而秦之求는 無已리이다 鄙諺에 曰 寧爲鷄口언정 無爲牛後라 하니 以大王之賢으로 挾强韓之兵하되 而有牛後之名하니 竊爲大王羞之하나이다 韓王이 從其言이어늘 蘇秦이 說魏王曰 大王之地方이 千里요 武士 二十萬이요 蒼頭 二十萬이요 奮擊이 二十萬이요 厮徒 十萬이요 車 六百乘이요 騎 五千匹리어늘 乃聽群臣之說하여 而欲臣事秦하시니 願大王은 熟察之하소서 魏王이 聽之하다 蘇秦이 說齊王曰 齊는 四塞之國이라 地方이 二千餘里요 帶甲이 數十萬이요 粟如丘山하고 臨淄之塗에 車轂이 擊하고 人肩이 摩하고 連袵成帷하고 揮汗成雨하니 夫韓魏之所以重畏秦者는 爲與秦接境也어니와 今에 秦之攻齊 則不然하여 雖欲深入이나 則恐韓魏之議其後니 秦之不能害齊 亦明矣라 夫不料秦之無奈齊에 何하고 而欲西面而事之하시니 是는 君臣之計過也로소이다 齊王이 許之하다.

 

 

이에 남쪽으로 초왕(楚王)에게 유세하기를 「초나라는 천하의 강국입니다 땅의 사방이 6000여 리이고 갑병이 100만이며 곡식이 10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이는 패왕(覇王)할 밑천입니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가 약해지고 진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가 약해지는 것은 그 형세가 양립(兩立)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므로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종친(從親)하여 진나라를 고립시키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종친하면 제후들이 땅을 떼어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요, 연횡(連橫)하면 초나라가 땅을 떼어 진나라를 섬겨야 하니, 이 두 가지 계책은 그 거리가 멉니다. 대왕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하니, 초왕 역시 허락하였다.

이에 소진이 종약장(從約長)이 되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고는 북으로 조나라에 보고하니, 수레와 짐바리가 왕자(王者)와 비슷했다.

→ 乃南說楚王曰 楚는 天下之强國也라 地方이 六千餘里요 帶甲이 百萬이요 粟支十年하니 此는 覇王之資也라 楚强則秦弱하고 秦强則楚弱이니 其勢가 不兩立이라 故로 爲大王計하건대 莫如從親하여 以孤秦이니 故로 從親則諸侯가 割地以事楚요 衡合則楚가 割地以事秦이니 此兩策者는 相去遠矣라 大王은 何居焉이시니이까 楚王이 亦許之어늘 於是에 蘇秦이 爲從約長하여 幷相六國하고 北報趙하니 車騎輜重이 擬於王者러라.

 

37년(기축) 진혜왕(秦惠王)이 서수(犀首)를 시켜서 제나라와 위나라를 속여 함께 조나라를 쳐 종약(從約)을 깨뜨리자 조숙후(趙肅侯)가 소진을 꾸짖었다. 소진이 두려워하여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가 반드시 제나라에 보복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소진이 조나라를 떠나자 종약은 모두 해체되고 말았다.

→ 己丑三十七年이라 秦惠王이 使犀首로 欺齊魏하여 與共伐趙하여 以敗從約이어늘 趙肅侯가 讓蘇秦하니 秦이 恐하여 請使燕必報齊라 하다 蘇秦이 去趙하니 而從約이 皆解하다.

 

44년(병신) 여름 4월에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왕이라 일컬었다.

→ 丙申四十四年이라 夏四月에 秦이 初稱王하다.

 

45년(정유) 소진(蘇秦)이 연역왕(燕易王)에게 유세하기를 「신이 연나라에 있으면 연나라를 중(重)하게 할 수 없으나 제나라에 있으면 연나라가 중하게 됩니다」하니, 역왕이 허락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연나라에서 죄를 지은 것처럼 하여 제나라로 도망하니, 제선왕(齊宣王)이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소진이 제왕에게 유세하여 궁실(宮室)을 높게 짓고 원유(苑囿)를 크게 하여 득의(得意)함을 밝히게 해 제나라를 피폐시켜 연나라를 위하고자 하였다.

→ 丁酉四十五年이라 蘇秦이 說燕易王曰 臣이 居燕하여는 不能使燕重이요 而在齊則燕重이리이다 易王이 許之어늘 乃僞得罪於燕而奔齊하니 齊宣王이 以爲各卿이어늘 蘇秦이 說齊王하여 高宮室하며 大苑囿하여 以明得意하니 欲以敝齊而爲燕이러라.

 

 

47년(기해) 진(秦)나라의 장의(張儀)가 재상을 면직(免職)하고 위(魏)의 재상이 되어, 위나라로 하여금 먼저 진나라를 섬기게 한 다음 제후들이 본받게 하고자 하였는데 위왕이 듣지 않았다. 진왕(秦王)이 다시 몰래 장의를 대접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였다.

→ 己亥四十七年이라 秦張儀가 免相하고 相魏하고 欲使魏로 先事秦而諸侯로 效之하니 魏王이 不聽이어늘 秦王이 復陰厚張儀益甚이러라

 

 

48년(경자) 왕이 죽고 아들인 신정왕(愼睛王)이 즉위하였다.

제(齊)의 전문(田文)이 사(嗣)가 되어 설공(薛公)이 되었는데 맹상군(孟嘗君)이라 불렀다. 제후들의 유사(遊士) 및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을 불러들여 모두 후대하므로 식객(食客)이 항상 수천 명이었는데 각자 맹상군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 이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 庚子四十八年이라 王이 崩하고 子愼靚王이 立하다 齊田文이 嗣爲薛公하니 號曰孟嘗君이라 招致諸侯遊士 及有罪亡人하여 皆厚遇之하니 食客이 嘗數千人이라 各自以爲孟嘗君이 親己라 하니 由是로 孟賞君之名이 重天下러라.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군자(君子)가 선비를 기르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어진 이를 길러 만민에게 미치게 한다.>고 하였다. 대저 어진 자는 그 덕(德)이 돈독하게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기에 족하고 그 재능은 기강(紀綱)을 정돈하기에 족하고, 그 밝음은 미세한 것을 밝혀 멀리 생각하기에 족하고, 그 강함은 인의(仁義)를 굳게 맺기에 족하다. 그래서 크게는 천하를 이롭게 하고 작게는 한나라를 이롭게 하니 그러므로 군자가 풍부한 녹(祿)으로써 부유하게 하고, 높은 벼슬로써 높이는 것이니 한 사람을 길러 만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어진 이를 기르는 도리인 것이다.

지금 맹상군(孟嘗君)이 선비를 기르는 것은 지려(智慮)를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는 그 임금의 녹을 훔쳐 사당(祠堂)을 세워 헛된 명예를 떠벌려 위로는 그의 임금을 모욕하고 아래로는 그 백성을 좀 먹었으니 이는 간웅(奸雄)이라 어찌 숭상하겠는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수(受)는 천하에 죄짓고 도망한 자들이 모이는 숲과 못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溫公曰 君子之養士는 以爲民也라 易曰 聖人이 養賢하여 以及萬民이라 하니 夫賢者는 其德足以敦化正俗하고 其才足以頓綱振紀하고 其明足以燭微慮遠하고 其强足以結仁固義하여 大則利天下하고 小則利一國이라 是以로 君子가 豊祿以富之하고 隆爵以尊之하니 養一人而及萬人者 養賢之道也라 今孟嘗君之養士也에 不恤智愚하고 不擇藏否하여 盜其君之祿하여 以立私黨하여 張虛譽하고 上以侮其君하고 下以蠹其民하니 是奸人之雄也니 烏足尙哉아 書曰 受爲天下逋逃主하여 萃淵藪라 하니 此之謂也인저

 

 

신정왕(愼靚王)

3년(계묘) 초(楚)․조(趙)․위(魏)․한(韓)․연(燕)나라가 함께 진(秦)나라를 쳐 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군사를 내어 맞아 싸워 다섯 나라 군사가 모두 패해 달아났다.

→ 癸卯三年이라 楚趙魏韓燕이 同伐秦하여 攻函谷關이어늘 秦人이 出兵逆之하니 五國之師가 皆敗走하다.

 

 

4년(갑진) 제(齊)나라 대부(大夫)가 소진(蘇秦)과 총애를 다투다가 소진을 찔러 죽였다. 장의(張儀)가 위양왕(魏襄王)에게 유세하기를 「양(梁)나라는 사방이 평평하여 명산대천의 한계가 없고 , 병졸이 초․한․제․조나라와의 국경에 수자리를 살아 정장(亭障)을 지키는 자가 10만을 밑돌지 않으니 양나라의 형세는 참으로 전쟁터입니다. 대저 제후들이 약종(約從)하여 원수(洹水)가에서 맹세하여 형제를 맺은 것은 서로 견고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제 친형제(親兄弟)와 동부모(同父母)라도 오히려 전재(錢財)를 다투어 서로 살상(殺傷)을 합니다. 그런데도 반복하여 소진의 남은 꾀를 믿고자 하니 성공치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하니 위왕이 이에 종약(從約)을 배반하고 장의로 인하여 진나라에 강화(講和)를 요청하니 장의가 돌아와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 甲辰四年이라 齊大夫 與蘇秦으로 爭寵하여 刺秦殺之하다 張儀가 說魏襄王曰 梁地는 四平하여 無名山大川之限하고 卒戌楚韓齊趙之境하여 守亭障者 不下十萬하니 梁之地勢는 固戰場也라 夫諸侯之約從에 盟洹水之上하여 結爲兄弟는 以相堅也어니와 今親兄弟同父母라도 尙有爭錢財相殺傷이어든 而欲恃反覆蘇秦秦之餘謀하니 其不可成이 亦明矣니이다 魏王이 乃倍從約하고 而因儀하여 以請成于秦하니 張儀가 歸復相秦하다.

 

 

5년(을사) 소진의 아우 소대(蘇代)와 소려(蘇厲) 역시 유세(遊說)로써 제후들에게 알려졌다 연(燕)나라 재상 자지(子之)가 소대와 더불어 혼인하여 연나라 권세를 얻고자 하였는데 소대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니 연왕 쾌(噲)가 묻기를 「제나라 왕이 패(覇)하겠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는 신하들을 믿지 못합니다」하였다. 이에 연왕이 나라를 자지에게 부탁하니, 자지가 남면(南面)하고 왕의 일을 행하였으나, 쾌는 늙어서 정사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신하가 되어 국사를 다 자지가 결정하였다.

→ 乙巳五年이라 蘇秦은 弟代厲가 亦以遊說로 顯於諸侯라 燕相子之가 與蘇代로 婚하여 欲得燕權이러니 蘇代가 使於齊而還이어늘 燕王噲가 問曰 齊王이 其覇乎아 對曰 不能이러이다 王曰 何故오 對曰 不信其臣이러이다 於是에 燕王이 屬國於子之하니 子之가 南面行王事나 而噲는 老不聽政하여 願爲臣하고 國事를 皆快於子之하다.

 

 

6년(병오) 왕이 죽고 아들인 난왕(赧王) 연(延)이 즉위하였다.

→ 丙午六年이라 王이 崩하고 子赧王延이 立하다.

 

 

난왕(赧王) 상

원년(정미) 연나라 자지가 재상이 된 지 3년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제왕(齊王)이 연나라를 쳐서 자지를 잡아 해(醢;죽여서 그 살로 젓갈을 담는 형벌)하고, 마침내 연왕 쾌를 죽였다.

→ 丁未元年이라 燕子之가 爲相三年에 國內大亂이어늘 齊王이 伐燕取子之하여 醢之하고 遂殺燕王噲하다.

 

 

3년(기유) 연나라 사람들이 함께 태자 평(平)을 세우니, 이가 소왕(昭王)이다. 소왕은 연나라가 공파된 후에 즉위하여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를 위문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다. 자신을 낮추고 후한 폐물(幣物)로 어진 자를 초빙하면서 곽외(郭隗)에게 말하기를 「제(齊)나라는 우리 연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이용해 습격하여 격파하였소. 나는 우리 연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보복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참으로 어진 선비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려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는 것이 소원이니 선생께서는 그럴 만한 사람을 살펴보시오. 나 자신이 섬기겠소」하였다.

곽외가 말하기를 「옛날 임금 가운데 1000금(金)으로써 연인(涓人:궁궐 청소인)을 시켜 천리마(千里馬)를 구한 자가 있었는데 말이 이미 죽었는지라 그뼈를 500금에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크게 노하자 연인이 말하기를 <죽은 말도 사들이는데 하물며 살아 있는 말이겠습니까? 말이 금방 올 것입니다. >하였는데 1년이 못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이르렀습니다. 이제 왕께서 반드시 어진 선비를 오게 하시려거든 먼저 이 곽외부터 쓰십시오 그리하면 곽외보다 더 현명한 자가 어찌 천리 길을 멀다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하여 궁(宮)을 고쳐짓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그러자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는데 악의(樂毅)는 위(魏)로부터오고 극신(劇辛)은 조(趙)로부터 왔다. 소왕이 악의를 아경(亞卿)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 己酉三年이라 燕人이 共立太子平하니 是爲昭王이라 昭王이 於破燕之後에 卽位하여 弔死問孤하고 與百姓으로 同甘苦하고 卑身厚幣하여 以招賢者할새 謂郭隗曰 齊가 因孤之國亂하여 而襲破燕하니 孤가 極知燕小力少하여 不足以報나 然이나 誠得賢士與共國하여 以雪先王之恥가 孤之願也니 先生은 視可者하라 得身事之하리라 郭隗曰 古之人君이 有以千金으로 使涓人하여 求千里馬者러니 馬已死라 買其骨五百金而返이어늘 君이 大怒하니 涓人이 曰 死馬도 且買之은 況生者乎이까 馬今至矣리이다 不期年에 千里馬之至者三이라 하니 今王이 必欲致士인대 先從隗始하시면 況賢於隈者가 豈遠千里哉이리이까 於是에 昭王이 爲隗하여 改築宮而師事之하니 於是에 士爭趣燕이라 樂毅는 自魏往하고 劇辛은 自趙往하니 昭王이 以

樂毅로 爲亞卿하여 任以國政하다.

 

4년(경술) 장의가 초왕(楚王)에게 유세하기를 「대저 합종(合從)이란 여러마리의 말을 몰아서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대적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왕게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데 진나라가 한(韓)나라를 위협하고 양(梁)나라를 몰아서 초(楚)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는 위태할 것입니다. 」하니 초왕이 허락하였다.

장의가 마침내 한나라에 가 한왕(한왕에게 유세하기를 「대저 싸움에 맹분(孟賁)․오획(烏獲)같은 군사로써 복종하지 않는 약한 나라를 치는 것은 천균(千勻)의 무게로 계란 위를 누르는 것과 다름이없어 반드시 요행이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진(秦)나라를 섬기지 않아서 진나라가 군사를 내어 의양(宜陽)에 둔거하여 성고(成皐)를 막는다면 왕의 나라는 둘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섬기면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하니 한왕이 허락하였다. 장의가 돌아와 진왕(秦王)에게 보고하고는 다시 동쪽으로 사신을 가 제왕(齊王)에게 유세하기를 「합종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대왕에게 유세하는 자는 반드시<제나라는 3진(晉)에 가리워 있고 땅이 넓고 군사가 강하니 비록 백 개의 진(秦)이 있더라도 제나라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진나라와 초나라가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아서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며 한(韓)나라는 의양(宜陽)을 바치고 양(梁)나라는 하외(河外)를 바쳤으며 조왕(趙王)은 입조(入朝)하여 하간(河間)을 떼주어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면 진나라에서는 한․양․조나라를 몰아 공격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비록 진을 섬기고자하더라도 되지않을 것입니다」하니 제왕이 허락하였다

장의가 서쪽으로 가서 조왕(趙王)에게 유세하기를 「대왕께서 천하를 거두어 통솔하여 진나라를 배척하시니, 진나라 군사가 감히 함곡관(函谷關)을 나오지 못한 지 15년이 되어서 대왕의 위엄이 산동(山東)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진나라와 더불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한(韓)․양(梁)나라가 동번(東藩)의 신하를 일컬으며 제나라는 어염(魚鹽)의 땅을 바쳤으니 이는 조나라의 오른쪽 어깨를 자른 것입니다. 대저 오른쪽 어깨를 잘리고도 더불어 싸우고 그 무리를 잃고 외롭게 있으면서도 위태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왕(秦王)과 더불어 얼굴을 맞대고 약속하며 항상 형제의 나라로 지내는 것만함이 없습니다.」하니 조왕이 허락하였다.

장의가 이에 북쪽으로 연왕(燕王)에게 유세하기를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이 출병(出兵)하여 운중(雲中)․구원(九原)을 쳐서 조나라를 몰아 연나라를 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역수(易水)와 장성(長城)은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하니 연왕이 상산(常山)의 끝 다섯 성(城)을 바쳐 강화할 것을 청하였다. 장의가 돌아가 보고하려 하는데 함양(咸陽)에 이르지 못하여 진혜왕(秦惠王)이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무왕은 태자로 있을 때부터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헐뜯어 비난 하는 자가 많았다. 제후들이 장의와 진왕 상예 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연횡(連橫)을 배반하고 다시 합종하였다.

→ 庚戌四年이라 張儀가 說楚王曰 夫爲從者는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니 不格이 明矣라 今王이 不事秦이면 秦이 刦韓驅梁而攻楚則楚危矣리이다 楚王이 許之하다 張儀遂之韓하여 說韓王曰 夫戰에 孟賁烏獲之士로 以攻不服之弱國이 無異垂千勻之重於鳥卵之上이니 必無幸矣라 大王이 不事秦이면 秦이 下甲하여 據宜陽하고 塞成皐則王之國이 分矣리니 爲大王計컨대 莫如事秦而攻楚니이다 韓王이 許之어늘 張儀歸報秦王하고 復使東說齊王曰 從人說大王者는 必曰齊蔽於三晋하고 地廣兵强하니 雖有百秦이라도 將無奈齊에 何라 하나 今에 秦楚嫁女娶婦하여 爲昆弟之國하고 韓이 獻宜陽하고 梁이 效河外하고 趙王이 入朝하여 割河間以事秦하니 大王이 不事秦이면 秦이 驅韓梁趙하여 攻之면 雖欲事秦이나 不可得也리이다 齊王이 許之하다 張儀가 去西하여 說趙王曰 大王이 收率天下하여 以擯秦하시니 秦兵이 不敢出函谷關이 十五年이라 大王之威가 行於山東이어니와 今에 楚與秦으로 爲昆弟之國 而韓梁이 稱東藩之臣하고 齊獻魚鹽之地하니 此는 斷趙之右肩也라 夫斷右肩而與之鬪하며 失其黨而孤居하여 求欲無危나 得乎아 爲大王計컨대 莫如與秦王으로 面約하여 常爲兄弟之國이니이다 趙王이 許之하다 張儀가 乃北說燕王曰 大王이 不事秦이면 秦이 下甲雲中九原하여 驅趙而攻燕 則易水長城은 非大王之有也리이다 燕王이 請獻常山之尾五城하여 以和어늘 張儀歸報할새 未至咸陽하여 秦惠王이 薨하고 子武王이 立하니 武王이 自爲太子時로 不說張儀러니 及卽位에 君臣이 多毁短之어늘 諸侯가 聞儀與秦王으로 有隙하고 皆叛衡하고 復合從하다.

 

5년(신해) 장의가 위(魏)나라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졸(卒)하였다. 장의와 소진이 모두 합종(合從)․연횡(連橫)의 술책으로 제후에게 유세하여 부귀의 지위에 오르니 천하가 다투어 사모하여 본받았다. 또 위(魏)나라 사람 가운데 공손연(公孫衍)이란 자가 있어 서수(犀首)라 불렀는데 역시 유세로 이름이 났고 그 나머지 소대(蘇代)․소려(蘇厲)․주최(周最)․누완(樓緩)의 무리가 분분하게 천하를 돌며 변사(辯詐)로 서로 높은 체한 것이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장의․소진․공손연이 가장 드러났다.

→ 辛亥五年이라 張儀가 相魏一歲에 卒하다 儀與蘇秦이 皆以縱橫之術로 遊諸侯하여 致位富貴하니 天下가 爭慕效之러라 又有魏人公孫衍者하니 號曰犀首라 亦以談說로 顯名하고 其餘蘇代蘇厲周最樓緩之徒가 紛紜徧於天下하여 務以辯詐로 相高하니 不可勝紀로되 而儀秦衍이 最著러라.

 

 

16년(임술) 진왕(秦王)이 초왕(楚王)과 약속하여 무관(武關)에서 회맹(會盟)하기로 하였는데 초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자 진이 잡아두었다.

→ 壬戌十六年이라 秦王이 約楚王하여 會盟於武關할새 楚王이 入秦하니 秦人이 留之하다.

 

 

17년(계해) 진왕이 맹상군(孟賞君)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경양군(逕陽君)을 제나라에 볼모로 삼아 맹상군을 청하니, 맹상군이 와 진나라에 들어오자 진왕이 승상(丞相)을 삼았다. 어떤 사람이 진왕에게 말하기를 「맹상군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으면 반드시 제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를 나중에 생각할 것이니, 진나라가 위험합니다.」하니 진왕이 이에 누완(樓緩)을 재상으로 삼고는 맹상군을 가두어 죽이고자 하였다.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진왕의 행희(幸姬)에게 풀려나기를 구하니 행희가 말하기를 「그대의 호백구(狐白裘:흰 여우털로 된 겉 옷)를 얻고자 합니다.」하였다.

맹상군에게 호백구가 있었으나 이미 진왕에게 바친 뒤라 행희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객(客) 가운데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어 진나라 창고에 들어가 호백구를 도둑질하여 행희에게 바쳤다 행희가 이에 왕에게 말하여 보내주었는데 왕이 후회하여 사람을 시켜 뒤쫓았다. 맹상군이 관(關)에 이르자 관의 법에 닭이 울어야만 손님을 내보내게 되어 있었는데 때가 아직 일렀다. 뒤쫓는자가 곧 이르게 되었는데 객 가운데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있어 들닭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울어서 맹상군이 벗어나 돌아올 수 있었다.

→ 癸亥十七年이라 秦王이 聞孟嘗君之賢하고 使逕陽君으로 爲質於齊하고 以請孟嘗君하니 來入秦이어늘 秦王이 以爲丞相한대 或이 謂秦王曰 孟賞君이 相秦이면 必先齊而後秦하리니 秦其危哉리이다 秦王이 乃以樓緩으로 爲相하고 囚孟嘗君하여 欲殺之어늘 孟嘗君이 使人으로 求解於秦王幸姬하니 姬曰 願得君의 狐白裘하노라 孟賞君이 有狐白裘라가 已獻之秦王하여 無以應姬求러니 客에 有善爲狗盜者하여 入秦藏中하여 盜狐白裘하여 以獻姬한대 姬가 乃爲之言於王而遣之러니 王이 後悔하여 使追之하다 孟賞君이 至關하니 關法에 鷄鳴이라야 而出客이라 時尙早하고하고 追者將至러니 客에 有善爲鷄鳴者하여 野鷄聞之하고 皆鳴이어늘 孟賞君이 乃得脫歸하다.

 

 

조왕(趙王)이 그 아우 승(勝)을 봉(封)하여 평원군(平原君)을 삼았다. 평원군은 선비를 좋아하여 식객이 항상 수천 명이었다.

→ 趙王이 奉其弟勝하여 爲平原君하니 平原君이 好士하여 食客이 常數千人이러라.

 

 

19년 (을축) 초회왕(楚懷王)이 병이 나서 진(秦)에서 죽으니 초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생각하여 마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제후들이 이로 말미암아 진(秦)을 옳지 않게 보았다.

→ 乙丑十九年이라 楚懷王이 發病하여 薨於秦하니 楚人이 皆憐之를 如悲親戚이라 諸侯由是로 不直秦이너라.

 

 

30년(병자) 제민왕(齊湣王)이 이미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는 교만해져 이에 남쪽으로 초나라를 침략하고 서쪽으로 3진을 침략하고 2주(周)를 합병하여 천자가 되고자 하였다.연소왕(燕昭王)은 밤낮으로 그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이에 악의(樂毅)와 더불어 제(齊) 치기를 도모하여 왕이 모든 군사를 일으켜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진(秦)․위(魏)․한(韓)․조(趙)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제나라를 쳤다. 제민왕이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항거하였으나 제서(濟西) 싸움에서 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마침내 진군(進軍)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워져 어쩔 줄을 모르고 제민왕은 도망하였다. 악의가 임치(臨淄)에 들어가 보물(寶物)과 제기(祭器)를 취하여 연나라로 운반하니 연왕이 악의를 봉하여 창국군(昌國君)을 삼고 드디어 그대로 머물러 항복하지 않은 제나라 성(城)을 순행하며 항복시키게 하였다. 제왕이 거(莒)로 달아나니 초나라가 요치(淖齒)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인하여 제나라 재상을 삼았다. 요치가 연나라와 더불어 제나라 땅을 나누고자 하여 이에 드디어 고리(鼓里)에서 왕을 시해(弑害)하였다.

→ 丙子三十年이라 齊湣王이 旣滅宋而驕하여 乃南侵楚하고 西侵三晋하고 欲幷二周하여 爲天子어늘 燕昭王이 日夜로 撫循其人하여 乃與樂毅로 謀伐齊할새 王이 悉起兵하여 以樂毅로 爲上將軍하고 幷將秦魏韓趙之兵하여 以伐齊하니 齊湣王이 悉國中之衆하여 以拒之라가 戰于濟西하여 齊師大敗어늘 遂進軍한대 齊人이 大亂失度라 湣王이 出走어늘 樂毅가 入臨淄하여 取寶物祭器하여 輪之於燕하니 燕王이 封樂毅하여 爲昌國君하고 遂使留徇齊城之未下者하다 齊王이 走莒어늘 楚가 使淖齒로 將兵救齊하고 因爲齊相한대 淖齒가 欲與燕으로 分齊地하여 乃遂弑王於鼓里하다

 

 

악의가 화읍(畵邑) 사람 왕촉(王蠋)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군중에 명을 내려 화읍 주위 3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왕촉을 청하였다. 왕촉이 사양하고 가지 않으니 연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오지 않으면 우리가 읍을 도륙(屠戮)하겠소」하니 왕촉이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소. 제왕이 내 간(諫)하는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물러나 들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었으니 나도 살 수가 없소,. 그런데 또 군사로써 겁을주니 나는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이 죽는것보다 못하오」하고는 드디어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 毅가 聞畵邑人王蠋賢하고 令軍中하여 環畵邑三十里無入하고 使人으로 請蠋이 謝不往이어늘 燕人이 曰 不來면 吾且屠邑하리라 蠋이 曰 忠臣은 不事二君이요 烈女는 不更二夫하나니 齊王이 不用吾諫이라 故로 退而耕於野러니 國破君亡에 吾不能存 而又欲劫之以兵하니 吾與其不義而生으론 不若死라 하고 遂經其頸而死하다.

 

 

연나라 군사가 승승장구하니 제나라 성(城)이 모두 바라보기만 해도 패해 도망하였다. 악의가 연나라 군사를 정돈하여 약탈을 금지시키고 제의 일민(逸民: 節行 절행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서 드러내 예우(禮遇)하고 부렴(賦斂)을 너그럽게 하고 나쁜 법을 없애어 옛 정사를 닦으니 제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의 제사를 교(郊)에서 지내고 어진 사람을 정려(旌閭)하고 왕촉의 묘를 봉해주었다. 6월 사이에 제나라의 70여 성을 항복시켜 모두 군현(郡縣)을 삼았다.

→ 燕師乘勝長驅하니 齊城이 皆望風奔潰러라 樂毅 修整燕軍하여 禁止侵掠하고 求齊之逸民하여 顯而禮之하고 寬其賦斂하며 除其暴令하고 修其舊政하니 齊民이 喜悅이러라 祀桓公管仲於郊하고 表賢者之閭하고 封王蠋之墓하고 六月之間에 下齊七十餘城하여 皆爲郡縣하다.

 

 

32년(무인) 제(齊)나라 요치의 난리때 왕손가(王孫賈)는 민왕(湣王)을 따라갔는데 왕이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그의 어미가 말하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오면 내가 문(門:집의 문)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네가 밤에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閭:마을의 문)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네가 이제 왕을 섬기면서 왕이 도망하여도 너는 그 간 곳을 모르거늘 어찌 돌아왔느냐?」하니 왕손가가 이에 요치를 공격하여 죽였다. 그래서 제나라의 망신(亡臣)들이 서로 왕자(王子) 법장(法章)을 찾아 제왕을 삼고 거성(莒城)을 지키며 연나라에 항거했다.

→ 戊寅三十二年이라 齊淖齒之亂에 王孫賈가 從湣王이라가 失王之處어늘 其母曰 汝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이러니 汝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이러니 汝今事王이라가 王이 走어시늘 汝不知其處하니 汝尙何歸焉고 王孫賈가 乃攻淖齒하여 殺之하니 於是에 齊亡臣이 相如求齊王子法章하여 立以爲齊王하고 保莒城하여 以拒燕하다

 

 

조왕(趙王)이 초(楚)의 화씨벽(和氏璧)을 얻었는데 진소왕(秦昭왕)이 욕심을 내어 15개 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조왕이 인상여(藺相如)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진나라가 성으로써 화씨벽을 구하는데 왕께서 주지 않으면 잘못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화씨벽을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우리에게 성을 주지않으면 잘못이 진나라에 있게 됩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화씨벽을 받들고 가서 진나라가 성을 주지않으면 신이 벽(璧)을 온전히 하여 돌아오겠습니다.」하였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이르렀는데 진왕은 조나라에 성을 줄 뜻이 없었다. 인상여가 이에 진왕을 속여서 다시 화씨벽을 취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진나라에서 명을 기다리니 진왕이 현명하게 여겨 죽이지 않고는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조왕이 인상여를 상대부(上大夫)로 삼았다.

→ 趙王이 得楚和氏璧이러니 秦昭王이 欲之하여 請易以十五城이어늘 趙王이 以問藺相如하니 對曰 秦이 以城求璧而王이 不許면 曲在我矣요 我與之璧而秦이 不與我城 則曲在秦이니 臣은 願奉璧 而往하여 使秦城不入이어든 臣이 請完璧而歸하리이다 相如至秦하니 秦王이 無意償趙城이라 相如乃紿秦王하여 復取璧하여 遣使者懷歸趙 而以身으로 待命於秦하니 秦王이 賢而弗誅하고 禮而歸之어늘 趙王이 以相如로 爲上大夫하다.

 

 

36년(임오) 진왕이 조왕을 하외(河外) 민지(澠池)에서 만났다. 진와잉 조왕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진왕이 조왕에게 비파 타기를 청하여 조왕이 탔다. 인상여가 다시 진왕에게 부(缶) 칠 것을 청하니 진왕이 즐겨하지 않자 인상여가 말하기를 「왕과 저 사이는 다섯 걸음 이내입니다.청컨대 신이 목을 찔러 그 피를 대왕에게 뿌리겠습니다」하였다. 신하들이 인상여에게 칼을 들이대자 인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신하들이 모두 흩어졌다. 진왕이 좋아하지 않으면서 한 번 부를 치고는 술자리를 끝냈는데 진나라가 끝내 조나라를 해치지 못하였고 조나라도 크게 방비(防備)하니 진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조왕이 귀국하여 인상여를 상경(上卿)으로 삼으니 지위가 염파(廉頗)보다 위에 있게 되었다. 염파가 말하기를 「내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욕을 보이겠다. 」하였는데 인상여는 그 말을 듣고는 매일 조회(朝會)때면 항상 병을 핑계하여 열(列)을 다투고자 하지 않고 나와서도 멀리서 보이면 문득 수레를 이끌고 피해 숨으니 그의 사인(舍人)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인상여가 말하기를 「자네들이 보기에 염장군(廉將軍)이 진왕(秦王)에 비해 누가 더 났다고 생각하는가?」하니 말하기를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인상여가 말하기를 「대저 진왕의 위엄에도 나 인상여가 조정에서 꾸짖고 그의 여러 신하들을 욕했다. 나 인상여가 비록 노둔하기는 하지만 유독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오직 나는 생각하건대 강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에 싸움을 걸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이제 두 호랑이가 함께 싸우면 그 형세가 둘다 살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의 급함을 우선하고 개인적인 원수는 뒤로 하기 때문이다」하였다 염파가 이 말을 듣고는 육단(肉袒)하고 회초리를 지고는 문에 이르러 사죄하고 마침내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 壬午三十六年이라 秦王이 會趙王於河外澠池러니 王이 與趙王으로 飮酒酣에 秦王이 請趙王鼓瑟한대 趙王이 鼓之오늘 藺相如 復請秦王擊缶한대 秦王이 不肯이어늘 相如曰 五步之內에 臣이 請得以頸血로 濺大王矣리이다 左右 欲刃相如어늘 相如 張目叱之하니 左右皆靡라 王이 不豫하여 爲一擊缶하고 罷酒하다 秦이 終不能有加於趙하고 趙人亦盛爲之備하니 秦不敢動이러라 趙王이 歸國하여 以藺相如로 爲上卿하니 位在廉頗之右라 廉頗曰 我見相如면 必辱之리라 相如聞之하고 每朝에 常稱病하고 不欲爭列이러라 出而望見하고 輒引車避匿하니 其舍人이 皆以爲恥어늘 相如曰 子視廉將軍이 孰與秦王고 曰 不若이니이다 相如曰 夫以秦王之威로도 而相如 廷叱之하고 辱其群臣하니 相如 雖駑나 獨畏廉將軍哉리오 願吾念之컨대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는 徒以吾兩人이 左也라 今兩虎 共鬪에 其勢 不俱生이니 吾所以爲此者는 先國家之急 而後私讎也로다 廉頗問之하고 肉袒負荊하여 至門謝罪하고 遂爲刎頸之交하다.

 

 

이때에 제(齊)나라 땅이 모두 연나라에 속하고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악의가 즉묵을 포위하여 즉묵의 대부(大夫)가 나와 싸우다 죽으니 즉묵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평(安平) 싸움에서 전단(田單)과 종인(宗人)이 철롱(鐵籠)으로써 완전하였으니, 이는 지혜가 많고 싸움에 익숙해서이다.」 하고는 인하여 함께 장수로 세워 연나라에 항거하였다.

→ 是時에 齊地 皆屬燕하되 獨莒卽墨이 未下라 樂毅 圍卽墨하니 卽墨大夫 出戰而死어늘 卽墨人이 曰 安平之戰에 田單宗人이 以鐵籠으로 得全하니 是는 多智習兵이라 하고 因共立以爲將하여 以拒燕하다.

 

악의가 두 읍(邑)을 포위하여 3년이 되도록 항복시키지 못하니 어떤 사람이 연소왕(燕昭王)에게 참소하기를 「악의는 지혜와 꾀가 남보다 뛰어나 제나라를 쳐 단숨에 70여 성을 빼앗았습니다. 지금 항복하지 않은 성이 둘인데 이는 항복시킬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군사의 위엄을 보여서 제나라 사람을 복종시켜 남면(南面)하여 왕 노릇하고자 해서 입니다.」하였다 .소왕이 이에 술을 장만하여 크게 사람을 모으고 말한 사람을 끌어다 참(斬)하고 국상(國相)을 보내어 악의를 세워 제왕(齊王)으로 삼으니 악의가 두려워하여 받지 못하고 배서(拜書)하여 죽음으로써 맹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에 복종하고 제후들은 그의 신(信)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모반(謀叛)하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에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였다.

혜왕은 태자(太子)때부터 일찍이 악의를 불쾌하게 생각해왔는데 전단(田單)이 그런 말을 듣고는 이에 반간(反間)을 놓아 말하기를 「악의가 연나라 신왕(新王)과 틈이 있어 죽일꺄 두려워하며 감히 돌아가지 못하면서 제나라를 치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 있다.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이 다른 장수가 오면 즉묵(卽墨)이 격파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연왕이 이미 의심하던 터에 제나라의 반간을 듣고는 기겁(騎劫)으로 대신 장수를 삼고 악의를 소환하니 악의가 조(趙)나라로 도망하였다. 연나라 장사(장사)가 이로 말미암아 분개하여 불화(不和)하게 되었다.

전단(田單)이 이에 자신이 판삽(版鍤)을 잡고 군사들과 함께 일을 하고 처첩(妻妾)을 항오(行伍)사이에 편성하고 음식을 다 흩어서 군사를 먹였으며 갑졸(甲卒)로 하여금 모두 매복하게 하고 노약자와 여자로 하여금 성(城)에 올라가 지키며 항복을 약속하게 하니 연나라 군사가 더욱 게을러졌다. 전단이 이에 성안을 수색해 소 1000여 마리를 모아 붉은 옷을 입혀 오색(五色)으로 용무늬를 그린 다음 소의 뿔에다가 칼을 묶고 꼬리에다가는 기름을 칠한 갈대를 묶어서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성에다 수십개의 구멍을 뚫어서밤에 소를 내보내고 장사(將士) 5000명이 그 뒤를 따르니 꼬리가 뜨거워진 소들이 성을 내어 연나라 군사를 향해 돌진하였다. 연나라 군사가 크게 놀라 소를 보니 모두 용의 무늬이고 부딪치면 모조리 죽거나 상처가 나고 성안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며 뒤따르고 노약자들이 모두 동기(銅器)를 두들겨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연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자 제나라 사람이 기겁(騎劫)을 죽이고 도망한 자를 뒤쫓고 패배자를 쫓으니 지나가는 성과 고을이 모두 연나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다시 제나라가 되어 제의 70여 성이 모두 회복되었다. 이에 거(莒)에서 양왕(襄王)을 맞아다가 임치(臨淄)로 들어오니 전단을 봉하여 안평군(安平君)을 삼았다.

→ 樂毅 圍二邑三年에 未下러니 或이 讒之於燕昭王曰 樂毅는 智謀過人하여 伐齊呼吸之間에 剋七十餘城하고 今下不者 兩城爾는 非其力不能拔이요 欲久仗兵威하여 以復齊人하여 南面而王爾라 한대 昭王이 於是에 置酒大會하고 引言者하여 斬之하고 遣國相하여 立樂毅爲齊王하니 毅 惶恐하여 不受拜書하고 以死自誓라 由時로 齊人이 復其義하고 諸侯 畏其信하여 莫敢復有謀者러니 頃之요 昭王이 薨하고 惠王立이라 惠王이 自爲太子時로 嘗不快於樂毅러니 田單이 聞之하고 乃縱反間曰 樂毅 與燕新王으로 有隙하여 畏誅而不敢歸하고 以伐齊爲名하니 齊人이 唯恐他將이 來면 卽墨이 殘矣라 한 대 燕王이 已疑러니 得齊反問하고 乃使騎刦으로 代將 而召樂毅어늘 毅遂犇趙하니 燕將士 由時로 憤惋不和러라 田單이 乃身操版鍤하여 與士卒로 分功하고 妻妾을 編於行伍之間하니 盡散飮食하여 饗士하고 令甲卒로 皆伏하고 使老弱女子로 乘城約降하니 燕軍이 益懈어늘 田單이 乃收城中하여 得牛千餘하여 爲絳繒衣하되 畵以五采龍文하고 束兵刃於其角하고 而灌脂束葦於其尾하여 燒其端하고 鑿城數十穴하여 夜縱牛하고 壯士五千人이 隨其後하니 牛尾熱하여 怒而犇燕軍한대 燕軍大驚하여 視牛하니 皆龍文이요 所觸이 盡死傷 而城中이 鼓譟從之하고 老弱이 皆擊銅器爲聲하니 聲動天地라 燕軍이 大敗走어늘 齊人이 殺騎劫하고 追亡逐北하니 所過城邑이 皆叛燕하고 復爲齊하여 齊七十餘城이 皆復焉이라 乃迎襄王於莒하여 入臨淄하니 封田單하여 爲安平君하다.

 

 

전단이 장차 적(狄)을 공격하고자 하여 가서 노중련(魯仲連)을 만났다. 노중련이 말하기를「장군이 적(狄)을 공격해도 항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전단이 말하기를「신(臣)이 즉묵(卽墨)의 패망(敗亡)하고 남은 군사로 만승(萬乘)의 나라인 연(燕)을 격파, 제나라의 옛 성을 회복하였는데 이제 적을 공격하여 항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이오」하고는 수레에 올라 사례(謝禮)하지 않고 갔다. 드디어 적을 공격했으나 3개월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니 전단이 두려워서 노중련에게 물었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즉묵에 있을 때에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들었으며 군사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를 당하여 장군에게는 죽을 마음이 있었고 사졸에게는 요행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연나라를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군에게 동쪽에 야읍(夜邑)의 봉(奉)이 있고 서쪽에는 치상(淄上)의 즐거움이 있으며 황금 띠를 두르고 치민(淄澠)사이를 달립니다. 그래서 사는 즐거움만 있고 죽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전단이 말하기를 「이 전단의 마음을 선생께서 잘 아셨습니다.」하고는 이튿날 이에 힘을 돋우어 성을 순시하고 시석(矢石)이 떨어지는 곳에 서서 북채를 쥐고 북을 울리니 적인(狄人)이 이에 항복하였다.

→ 田單이 將攻狄할새 往見魯仲連하니 仲連이 曰 將軍이 攻狄에 不能下也리라 田單이 曰 臣이 以卽墨破亡餘卒로 破萬乘之燕하고 復齊之墟어늘 今攻狄而不下는 何也오 하고 上車弗謝而去하다 遂攻狄三月에 不克하니 田單이 乃懼하여 問魯仲連한대 仲連이 曰 將軍之在卽墨엔 坐則織蕢하고 立則杖鍤하고 爲士卒倡하니 當此之時하여 將軍은 有死之心하고 士卒은 無生之氣하니 所以破燕也어니와 今엔 將軍이 東有夜邑之奉하고 西有淄上之娛하고 黃金橫帶 而騁乎淄澠之間하여 有生之樂하고 無死之心하니 所以不勝야니라 田單이 曰 單之有心을 先生이 志之矣로다 하고 明日에 乃厲氣循城하여 立於矢石之所하여 援抱鼓之하니 狄人이 乃下하다.

 

 

45년(신묘) 위(魏)나라 사람 범수(范睢)가 도망하여 진(秦)나라로 들어가 징왕에게 유세(遊說)하기를 「진나라의 큼과 사졸로써 제후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컨대 한로(韓盧)를 달려 다리 저는 토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관(關)을 닫은 지 15년 동안 감히 산동(山東)에 군사를 쓰지 못한 것은 양후(穰侯)의 진나라를 위한 모책(謀策)이 불충(不忠)하였고 대왕(大王)의 계책 역시 잘못된 바가 있어서 입니다.」하니 왕이 꿇어앉은 채 말하기를 「원컨대 잘못된 계책을 듣고자 하오」하였다. 범수가 말하기를 「대저 양후가 한(韓)․위(魏)나라를 넘어서 제(齊)나라를 공격한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이제 왕께서는 먼 나라는 사귀고 가가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한치의 땅만 얻어도 바로 왕의 땅이되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왕의 땅이 됩니다. 이제 한나라와 위나라는 중국의중심에 있어 천하의 추기(樞機)입니다. 왕께서 만약 패(覇)하고자 하시면 반드시 중국(中國)과 친하여 천하의 추가 되어 초나라와 조나라를 위협하여 초나라와 조나라가 다 붙좇으면 제나라도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요 제나라가 붙좇으면 한나라와 위나라를 포로(捕虜)로 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좋다」하고는 이에 범수를 객경(客卿)으로 삼아 함께 나라 일을 도모하였다.

→ 辛卯四十五年이라 魏人范睢 亡入秦하여 說秦王曰 以秦國之大와 士卒之勇으로 以治諸候 譬如走韓盧而搏蹇兎也어늘 以閉關十五年에 不敢窺兵於山東者는 是는 穰候 爲秦謨不忠 而大王之計 亦有所失也로소이다 王이 跽曰 願聞失計하노라 睢曰 夫穰候 越韓魏而攻薺 非計也라 今王이 不如遠交而近攻이니 得寸이라도 則王之寸也요 得尺이라도 則王之尺也라 今夫韓魏는 中國之處 而天下之樞也니 王若欲覇인댄 必親中國하여 以爲天下樞하여 以威楚趙이니 楚趙皆附면 薺必懼矣리니 薺附則韓魏를 因可虜也리이다 王曰 善이라 하고 乃以范睢로 爲客卿하여 與謀國事하다.

 

55년(신축) 진(秦)나라 좌서장(左庶長) 왕흘(王齕)이 한(韓)나라를 쳐 상당(上黨)을 공격해 빼앗았다. 상당 백성들이 조나라로 도망하니 조의 염파(廉頗)가 장평(長平)에 군사를 뱇해 놓고 상당 백성들을 안무(按撫)하였다. 왕홀이 그를 인해 조나라를 쳤는데 조나라 군사가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염파가 벽(壁)을 굳건히 하고 나오지 않으니 조왕(趙王)이 「염파는 잃어버린 군사가 많고 게다가 겁이나서 싸우지 않는 것이다.」라고 여겨 노햐여 자주 꾸짖으니 응후(應侯)가 사람을 시켜 반간(反間)하기를 「진(秦)나라가 두려워하는 바는 오직 마복군(馬服君)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 염파는 대하기가 쉽고 장차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니 조왕이 드디어 조괄을 염파 대신 장수로 삼았다. 인상여(藺相如)가 말하기를 「왕이 명성만으로 조괄을 임명하셨으니 교주고슬(膠柱鼓瑟)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한갓 그의 아비의 서전(書傳)이나 읽었을 뿐 응변(應變)을 모릅니다」하였으나 왕이 그말을 듣지 않았다.

→ 辛丑五十五年이라 秦左庶長王齕이 伐韓하여 攻上黨拔之하니 上黨民이 走趙어늘 趙廉頗 軍於長平하여 以按據上黨民하니 王齕이 因伐趙한대 趙軍이 戰數不勝이라 廉頗 堅壁不出이어늘 趙王이 以頗로 失亡이 多而更怯不戰이라 하여 怒數讓之한대 應候 使人으로 反間曰 秦之所畏는 獨畏馬服君之子趙括이 爲將爾니 廉頗는 易且與요 且降矣리라 한대 趙王이 遂以趙括로 代頗將하니 藺相如曰 王이 以名使括하시니 若膠柱鼓瑟이로소이다 括은 徒能讀其父書傳이요 不知合變也니이다 王이 不聽하다.

 

 

처음에 조괄이 어려서부터 병법(兵法)을 배웠는데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겼다. 일직이 그의 아버지 조사(趙奢)와 함께 전쟁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조사가 어렵다고 여기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잘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으니 조사가 말하기를 「전쟁은 사지(死地)인데도 괄이 쉽게 말을 한다. 존라가 만약 괄을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사를 깨뜨릴 자는 반드시 괄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괄이 장차 행군하려고 하는데 그의 어머니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괄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결정하였다.」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만약 직임에 맞지 않더라도 첩(妾)은 청컨대 수좌(隨坐)하지 마소서」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 初에 趙括이 自少時로 學兵法하여 以天下 莫能當이라 하다 嘗與其父奢로 言兵事에 奢不能難이나 然이나 不謂善이어늘 括母 問其故한대 奢曰兵은 死地也어늘 而括이 易言之하니 趙若將括이면 破趙軍者는 必括也리라 하더니 及括이 將行에 其母 上書言 括을 不可使라 한대 王曰 吾已決矣로라 母曰 卽有不稱이라도 妾은 請無隨坐하소서 王이 許之하다.

 

 

진왕은 조괄이 조나라의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몰래 무안군(武安君)으로 하여금 상장(上將)을 삼고 왕홀로 비장(裨將)을 삼아서 군중(軍中)에 명하되 감히 무안군이 장수가 되었다는 것을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참(斬)하겠다고 하였다.

→ 秦王이 聞括爲趙將하고 乃陰使武安君으로 爲上將하고 而王齕로 爲裨將하고 令軍中하되 有敢泄武安君將者면 斬하리라.

 

 

조괄이 군(軍)에 이르러 약속을 다 고치고 군리(軍吏)를 바꾸고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무안군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두 기병(奇兵)을 두어 겁을 주니, 조괄이 이긴 틈을 타 뒤쫓아 진벽(秦壁)에 다다랐으나 굳게 항거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병이 조나라 군사의 뒤를 끊으니 조나라 군사는 식량이 끊어진 지 46일에 모두 안에서 몰래 서로를 죽여 먹었다. 조괄이 몸소 날랜 군졸을 내어 박격(搏擊)하니 진나라 군사가 쏘아서 죽였다. 조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40만 명이 모두 항복하거늘 무안군이 이에 속임수를 써서 다 땅에 묻어 죽이고 어린 군사 240인만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 趙括이 至軍하여 悉更約束하고 易置軍吏하고 出兵擊秦이어늘 武安君이 佯覇而走하고 張二奇兵하여 以劫之러니 趙括이 乘勝하여 追造秦壁하니 堅拒不得入하고 奇兵이 絶趙軍之後하니 趙軍이 食絶四十六日에 皆內陰相殺食이라 趙括이 自出銳卒하여 搏戰하니 秦人이 射殺之한대 趙師 大敗하여 卒四十萬人이 皆降이어늘 武安君이 乃挾詐而盡坑殺之하고 遣其小者二百四十人하여 歸趙하다.

 

 

56년(임인) 진(秦)나라가 처음 조나라를 칠 때에 위왕(魏王)이 대부들에게 물으니 모두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는 것이 위나라에 편하다. 」고 하였다. 공빈(공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진나라는 탐포(貪暴)한 나라이다. 조를 이기고 나면 반드시 다른 나라를 구할 것이니, 나는 그때에 위나라가 그들 군사를 받을까 두렵다 선인이 말하기를 <연작(燕雀)이 새집에 있으면서 새끼와 어미가 서로 먹이를 먹여주고 즐거워하며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더니, 굴뚝에서 불꽃이 올라와 집이 장차 불에 타려해도 연작은 모습을 변치 않고 화(禍)가 곧 자기에게 미칠 줄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제 자네는 조나라가 깨어지면 화가 곧 자기에게 미칠 줄을 깨닫지 못하는데 사람으로서 연작과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산동(山東)의 나라가 약해서 떨치지 못하고 3진(晉)이 땅을 떼어주어 편안함을 구하고 2주(周)가 끊어져 진나라로 들어갔으며, 연(燕)․제(齊)․초(楚)나라는 이미 굴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보건대 20년이 못되어 천하는 다 진나라가 될 것이다. 」하였다.

→ 壬寅五十七年이라 秦之始伐趙也에 魏王이 問諸大夫한대 皆以爲秦伐趙는 於魏에 便이라 하거늘 孔斌이 曰 不然하다 秦은 貪暴之國也라 勝趙면 必復他求이니 吾恐於時에 爲受其師也일까 하노라 先人이 有言하되 燕雀이 處堂하여 子母 相哺呴呴焉相藥也하여 自以爲安이러니

竈突炎上하여 將焚 하되 燕雀이 顔不變하고 不知禍之將及己也라 하니 今子 不悟趙破에 患將及己하니 可以人而同於燕雀乎아 當今山東之國이 敝而不振하고 三晉이 割地以求安하고 二周 而入秦하고 燕薺楚 已屈復矣니 以此觀之컨대 不出二十年하여 天下 其盡爲秦乎인저

 

57년(계묘) 진나라가 왕릉(王陵)으로 한단(邯鄲)을 공격하니 무안군이 말하기를 「한단은 실(實)하여 공격하기가 쉽지 않고 또 제후들의 구원이 날로 이르러 반드시 진나라 군사를 깨뜨릴 것이다. 」하고는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고 가지 않자 이에 왕홀로써 왕릉을 대신하였다. 조왕이 평원군(平原君)으로 하여금 초나라의 구원을 얻게 하니 평원군이 그 문하(門下) 식객(食客)으로 문무가 겸비된 자 20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19명은 얻었으나 나머지는 뽑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모수(毛遂)가 평원군에게 스스로를 천거하니 평원군이 말하기를 「대저 어진 선비가 처세(處世)하는 것은 비유컨대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아 그 끝이 서서 밖으로 나타나거늘 이제 선생은 저 승(勝:평원군의 이름)의 문하에 3년이나 있었으나 승이 들은 바가 없으니 이는 선생이 가진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하였다.

모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제 오늘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저 모수로 하여금 이찍이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송곳 자루까지 비어져 나왔을 것이지 단지 그 끝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하니 평원군이 이에 함께 가기로 하자 19인이 서로 눈짓을 하며 웃었다.

평원군이 초(楚)나라에 이르러 초왕과 함께 합종(合從)의 이해(利害)를 말하는데 해가 뜰 때 말하기 시작하여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결정 되지 않았다. 모수가 칼을 들고 계단을 거쳐 올라가 평원군에게 말하기를 「합종의 이해는 두 마디면 되는데 이제 해가 뜰 때 말하기 시작하여 대낮이 되도록 결정하지 못함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초왕이 노하여 꾸짖기를 「왜 내려가지 않는냐 내가 너희 임금과 말하는데 너는 어떤 놈이냐?」하였다.

모수가 칼을 들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하기를 「왕께서 이 모수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 군사가 많다고 해서인데 이제 열 발짝 안에 있으니 많은 군사는 믿을 것이 못되므로 왕의 생명은 이 모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임금을 앞에 두고 꾸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제 초나라가 강대하여 천하가 대항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백기(白起)는 하찮은 어린아인데도 한 번 싸워 언영(鄢郢)을 빼앗았고 두 번 싸워 이릉(夷陵)을 불태웠으며 세 번 싸워 왕의 선인(先人)을 욕보였으니 이는 백세의 원수이고 조(趙)나라도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데 합종책은 초나라를 위함이요 조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초왕이 말하기를 「그렇소 참으로 선생의 말씀과 같다면 삼가 나라를 가지고 따르겠소」하였다.

모수가 초왕(楚王)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닭․개․말의 피를 가져오시오」하였다. 모수가 구리쟁반을 받들어 꿇어앉아 초왕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왕께서는 마땅히 삽혈(歃血)하시고 합종책을 정하소서 다음은 우리 임금이요 그 다음은 저 모수 차례입니다.」하였다 . 마침내 전상(殿上)에서 합종을 결정하였는데 모수가 왼손으로 피 담은 쟁반을 들고는 오른손으로 19인을 불러 당(堂) 아래 삽혈하며 말하기를 「공(公)들은 호락호락하여 이른바 사람을 인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들입니다.」하였다. 평원군이 이미 합종책을 정하고 돌아와 조나라에 이르러 말하기를 「저 승(勝)이 다시는 천하의 신비를 상(相)보지 못하겠습니다.」하고는 마침내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그래서 초왕이 춘신군(春申君)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하도록 하였다.

→ 癸卯五十七年이라 秦이 以王陵으로 攻邯鄲하니 武安君이 曰 邯鄲實하니 未易攻也요

且諸候之求 日至니 破秦軍이 必矣라 하고 使疾不行한대 乃以王齕로 大王陵이어늘 趙王이 使平原君으로 九救於楚한대 平原君이 約其門下食客文武備 具者二十人하여 與之俱할새 得十九人하고 餘無可取者러니 毛遂 自薦於平原君이어늘 平原君이 曰 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 中하여 其未이 立見이어늘 今先生은 處勝之門下 三年於此矣로되 勝이 未有所聞하니 是는 先生이 無所有也로다 毛遂日 臣이 乃今日에 請處囊中爾니 使遂로 蚤得處囊中이면 乃穎脫而出이요 非持其未見이이라 하거늘 平原君이 乃與之俱하니 十九人이 相與目笑之러라 平原君이 至楚하여 與醋王으로 言合從之利害할새 日出而言之하여 日中不決이어늘 毛遂按劒歷階而上하여 謂平原君왈 從之利害는 兩言而快爾어늘 今에 日出而言하여 日中不快은 何也이까 楚王이 怒叱曰 胡不下오 吾乃與而君言이어늘 汝는 何爲者也오 遂 按劍而前曰 王之所以叱遂者는 以楚國之衆이어니와 今十步之內에 不得恃衆也리이다 王之命이 懸於遂手하니 吾君이 左前에 叱者는 何也오 今에 以楚之强을 天下弗能當이라 하나 白起는 小竪子爾로되 一戰而擧鄢郢하고 再戰而燒夷陵하고 三戰而辱王之先人하니 此는 百世之怨而趙之所羞어늘 而王이 弗知惡焉하니 合從者는 爲楚요 非爲趙也니이다 楚王이 曰 唯唯라 誠若先生之言인대 謹奉社稷以從하리이다 毛遂 謂楚王之左右曰 取鷄狗馬之血來하라 毛遂奉 銅盤而跪進之楚王曰 王은 當歃血而定從하소서 次者는 吾君이요 次者는 遂라 하고 遂定從於殿上하고 毛遂 左手로 持盤血而右手로 招十九人하여 歃血於堂下曰 公等은碌碌하니 所謂因人成事者也로다 平原君이 已定從而歸하여 至於趙曰 勝이 不敢復相天下士矣라 하고 遂以毛遂로 爲上客하니 於是에 楚王이 使春申君로

將兵救趙하다.

 

 

제2권 주기(周紀)

 

 

난왕(赧王) 하

 

58년(갑진) 위왕(魏王)이 진비(晉鄙)로 하여금 조나라를 구하게 하니 진왕(秦王)의 사신이 위나라를 말하기를 「우리가 위나라를 조석 사이에 항복시킬 것이니, 감히 구원하는 제후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를 이동시켜 먼저 공격할 것이다」하였다.

위왕이 뒤려워하여 진비를 중지시켜 업(鄴)에 벽(壁)을 쌓게 하고 또 장군 신원연(新垣衍)으로 하여금 조왕에게 유세하여 함께 진나라를 존중하여 제(帝)를 삼아 그 군사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노중련(魯仲連)이 그 말을 듣고는 가서 신원연을 보고는 말하기를 「저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제일로 삼는 나라입니다. 저들이 함부로 제가 된다면 이 노중련은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고 말지언정 그들의 백성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제 진나라도 만승(萬乘)의 나라요 양(梁;魏)나라도 만승의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따라서 제를 삼으면 진나라가 장차 천자(天子)의 예(禮)를 행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제후의 대신을 바꿀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장차 그들이 불초(不肖)하다고 여기는 자는 빼앗아 그들이 현명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주고 그들이 미워하는 자는 빼앗아 그들이 사랑하는 자에게 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양왕(梁王)인들 어찌 편안하겠습니까?」하니 신원연이 일어나 두 번 절하면서 「제가 이제야 선생께서 천하의 선비임을 알았으니 감히 다시는 진나라를 황제(皇帝)로 삼자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甲辰吳十八年이라 魏王이 使晉鄙로 救趙할새 秦王使謂魏曰 吾政趙하여 旦暮에 且下니 諸侯 敢救者면 必移兵先擊之하리라 魏王이 恐하지여 止晉鄙壁 하고 又使將軍新垣衍으로 說趙王하여 欲共尊秦爲帝하여 以卻其兵이어늘 魯仲連이 聞之하고 往見衍曰 彼秦者는 棄禮義而上首功之國也라 彼卽肆然而爲帝 則連은 有蹈東海而死耳언정 不願爲之民也하노라 今秦도 萬乘之國也요 梁亦萬乘之國也라 從而帝之면 秦이 將行天子之禮하여 以號今於天下하고 變易諸侯之大臣하리니 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하며 奪其所憎而與其所愛하면 梁王은 安得晏然而已乎아 衍이 起再拜曰 吾乃今에 知先生은 天下之士也로니 不敢復言帝秦矣리이다.

 

처음에 위(魏)의 공자(公子) 무기(無忌)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비를 예우(禮遇)하여 식객 3000명이 모여들었다. 위(魏)에 후련(後羸)이라는 은사(隱士)가 있었는데 나이 70에 집이 가난하여 이문(吏門)지기가 되었다. 공자가 술을 장만하여 큰 모임을 열고 빈객(賓客)을 청해 자리를 정할 때 공자가 따르는 수레의 왼쪽 자리를 비워두고는 스스로 후생을 맞았다. 후생이 도착하자 이끌어다가 윗자리에 앉히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조의 평원군의 부인은 공자무기의 누님이어서 평원군의 사자(使者)들 관개(冠盖)가 서로 위나라에 연달아 가서 공자 무기를 꾸짖기를 「나 승(勝)이 스스로 붙어 혼인한 것은 공자의 높은 의리가 능히 남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이제 한단(邯鄲)이 조석 사이에 진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는데도 위나라의 구원이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하였다.

공자 무기가 자주 위왕에게 청하기를 진비를 칙(勅)하여 조나라를 구하게 하라 하고 빈객(賓客)․변사(辯士)가 각가지로 유세하였으나 위왕이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 무기가 빈객에게 부탁하여 수레 100여승을 마령하여 전쟁터에 달려가 조나라에서 죽고자 하였다. 지나다가 후생을 찾아보니 후생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아무런 단서가 없이 진나라 군사에게 달려가려 하시는데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하였다.

공자가 두 번 절하고 계책을 물으니 후생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진비의 병부(兵符)가 왕의 침소 안에 있고 여희(如姬)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니 훔칠 능력이 있는데다 또 공자께서 일찍이 그의 아비 원수를 갚아주었으니 여희가 공자를 위하여 죽더라도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한번 입만 벌리면 호부(虎符)를 얻어 진비의 군사를 빼앗을 것이며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물리칠 것이니 이는 5패(覇)의 공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공자가 그 말대로 하여 병부를 얻으니 후생이 말하기를「장수가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을 받지 않는 법이니 만일 진비가 의심하여 다시 청하면 일이 위태롭게 됩니다. 신(臣)의 문객 주해(朱亥)는 역사(力士)이니 함께 데리고 가서 진비가 듣지 않거든 쳐 죽이게 하소서」하였다.

공자 무기가 업에 이르니 진비가 부절(符節)을 합쳐보고는 과연의심하여 손을 들어 공자를 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에 진을 치고 있으니 나라의 중임(重任)인데 이제 수레 한 대로 와서 교대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하니 주해가 소매 속에 있던 40근되는 철퇴를 꺼내어 진비를 때려 죽였다.

공자 무기가 명령하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비가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며 외아들로 형제가 없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하고는 정병(精兵) 8만명을 골라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왕흘(王齕)이 오랫동안 한단을 포위하여 빼앗지 못하고 제후들이 와서 구원해 자주 싸워 불리하였다. 무안군(武安君)이 그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왕이 내 계책을 들어주지 않더니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하였다. 진왕이 이 말을 듣고는 노하여 무안군을 파면시켜 사졸을 삼아 음밀(陰密)로 옮겼는데 두우(杜宇)에 이르자 사자(使者)를 시켜 칼을 하사하였다. 무안군이 드디어 자살하였는데 이에 진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위(魏)의 공자 무기가 한단 아래에서 진나라 군사를 크게 파하니 왕흘이 한단의 포위를 풀고 도망하였다. 공자 무기가 이미 조나라를 구하고는 마침내 감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수로 하여금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 初魏公子無忌 愛人下士하여 致食客이 三千人이라 魏有隱士하니 曰候 이라 年七十에 家貧하여 爲夷門監者러니 公子 置酒하고 大會賓客하여 坐定에 公子 從軍騎虛左하고 自迎候生하다가 候生至에 引座上座하니 賓客이 盖驚하더라 及秦이 圍趙하얀 趙平原君之夫人은 公子無忌之姊也라 平原君의 使者冠盖相屬於魏하여 讓公子曰 勝이 所以自附於婚姻者는 以公子之高義로 能急人之困也라 今邯鄲이 旦暮에 降秦니어늘 而魏救不至라 한대 公子數請魏王하여

敕晉鄙救趙하고 及賓客辯士가 遊說萬端하되 王이 終不聽이어늘 公子乃屬賓客하여 約軍騎百餘乘하여 欲赴鬪以死於趙라가 過見候生하니 生이 曰 公子 無他端而 慾赴秦軍하니 如以肉으로 投餒虎니 何功之有리오 公子再拜問計한대 生이 曰 吾聞秦鄙兵符 在王臥內하고 而如姬最幸이라하니 力能竊之요 且公子 嘗爲報其父仇하니 如姬 欲爲公子하여 死無所辭라 誠一開口 則得虎符하여 奪鄙兵하리니 北救趙하고 西 秦이면 此는 五伯之功也니이다 公子 如其言하여 得兵符하니 候生이 曰 將이 在外하면 君令을 有所不受라 有如鄙 疑而復請之 則事危矣리니 臣의 客朱亥는 力士라 可與俱러거 鄙不聽이어든 使擊之하소서 公子 至鄴하니 晉鄙合符하고 果疑之하여 擧手視公子曰 吾擧十萬之衆하여 屯於境上하니 國之重任이어늘 今單車來代之는 何如哉오 亥 袖四十斤鐵椎라가 椎殺鄙하다 公子 下令曰 父子俱在軍中者는 父歸하고 兄弟俱在軍中者는 兄歸하고 獨子無兄弟者는 歸養하라하고 得選兵八萬人하여 將之而進하다 王齕이 久圍邯鄲하되 不拔하고 諸侯 來救하여 數戰不利어늘 武安君이 聞之하고 曰 王이 不聽吾計러니 今何如矣오 秦王이 聞之하고 怒하여 免武安君하여 爲士伍하고 遷之陰密할새 至杜郵 하여 使使者로 賜之劒한대 武安君이 遂自殺하니 秦人이 憐之러라 魏公子無忌 大破秦師於邯鄲下하니 王齕이 解邯鄲圍走라 公子無忌 旣存趙하얀 遂不敢歸魏하고 使將으로 將其軍以還하다.

 

 

진태자(秦太子)의 아들 이인(異人)이 조나라로부터 도망하여 진나라로 돌아왔다. 태자의 비(妃)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이라 불렀는데 아들이 없었고 하희(夏姬)가 아들 이인을 낳아 조나라에 볼모로 보냈던 것이다 진나라가 자주 조나라를 치니 조나라에서 예우하지 않아 곤궁하게 지내면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양적(陽翟)의 큰 상인(商人) 여불위(呂不韋)가 한단에 가서 그를 보고는 「이는 기화(奇貨)이니 차지할만 하다」하고는 이에 말하기를 「왕이 늙었고 태자는 화양부인을 사랑하나 아들이 없습니다. 그대의 형제 20여 명 가운데 그대가 중간이라 매우 사랑을 받지 못하니 태자가 즉위하더라도 그대는 사위(嗣位)를 다툴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이인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여불위가 말하기를 「적사(適嗣)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화양부인뿐이니 나 여불위가 비록 가난하지만 청컨대 1000금을 가지고 그대를 위하여 서쪽으로 가 그대를 후사로 세우겠소」하였다.

여불위가 이에 500금을 주어 빈객을 사귀게 하고 다시 500금으로 기이한 물건과 노리개를 사 자신이 받들고는 서쪽으로 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서 부인에게 바치게 하고 인하여 이인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를 「빈객이 천하에 두루 있으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자와 화양부인을 생각하며 <저 이인은 부인을 하늘로 여긴다>」고 하니 화양부인이 기뻐하였다. 여불위가 그 언니로 하여금 말하게 하기를 「부인은 사랑을 받되 아들이 없으니 한창때 일찍이 스스로 여러 아들 가운데서 어질고 효성스러운 자를 결연(結緣)하여 적자(適者)로 삼자 않았다가 미색이 쇠하여 사랑이 식으면 비록 한마디 말을 하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이제 이인은 현명하고 스스로 중자(中子)여서 적자가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때에 뽑으면 이는 이인에게는 없는 나라가 생기는 것이요 부인에게는 없던 아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동안 진나라의 사랑이 있게 됩니다.」하였다 화양부인이 그렇게 여겨 기회를 틈타 말하니 태자가 부인과 함께 옥부(玉符)를 새겨 사자(嗣子)로 삼기를 약속하고는 여불위를 청해다가 부(傳)로 삼았다.

여불위가 한단의 절세미인을 아내로 삼아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인이 보고는 달라고 하니 여불위가 짐짓 노한체 하다가 얼마 후 바쳤다. 1년이 되어 아들 정(政)을 낳으니 이인이 마침내 부인으로 삼았다.

한단이 포위될 때 조나라 사람이 이인을 죽이려고 하니 여불위가 지키는 사람에게 뇌물을 써 벗어나게 하여 진나라 군중으로 도망해 마침내 돌아왔다.

이인이 초(楚)나라 옷을 입고 화양부인을 뵈니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사람이니 마땅히 내가 아들로 삼겠다.」하고는 이름을 초(楚)라고 고쳤다

 

→ 秦太子之子異人이 自趙로 逃歸秦하다 太子妃는 曰 華陽夫人이라 無子하고 夏姬 生子異人하여 質於趙러니 秦이 數伐趙하여 趙不禮之하니 困不得意라 陽翟大賈呂不韋 適邯鄲하여 見之하고 曰 此는 奇貨니 可居라 하고 乃說之曰 秦王이 老矣요 太子 愛華陽夫人而無子하고 子之兄弟二十餘人에 子居中하니 不甚見幸이라 太子卽位라도 子不得爭爲嗣矣리라 異人曰 奈何오 不韋曰 能立適嗣者는 獨華陽婦人耳니 不韋雖貧이나 請以千金으로 爲子西遊하여 立子爲嗣하리라 異人이 曰 必如君策인대 秦國을 與子共之하리라 不韋 乃與五百金하여 令結賓客하고 復以五百金으로 買奇物玩好하여 自奉而西하여 見夫人姊而以獻於夫人하고 因譽異人之賢하되 賓客이 遍天下하여 日夜에 泣思太子及夫人曰 異人也以夫人으로 爲天이라한대 夫人이 喜라 不韋 因使其姊로 說曰 夫人이 愛而無子하니 不以繁華時로 蚤自結於諸子中賢孝者하여 擧以爲適이라가 卽色衰愛弛면 雖欲開一言이나 尙可得乎아 今異人이 賢而自知中子 不得爲適하니 誠以此時로 拔之면 是는 異人이 無國而有國이요 夫人이 無子而有子면 則終身有寵於秦矣리이다 夫人이 以爲然하여 乘間言之러니 太子 與夫人으로 又刻玉符하여 約以爲嗣하고 因請不韋하여 博之하다 不韋 娶邯鄲姬絶美者하여 與居라가 知其有娠이러니 異人이 見而請之어늘 不韋 佯怒라가 旣而오 獻之하여 期年而生子政하니 異人이 遂以爲夫人하다 邯鄲之圍에 趙人이 欲殺之어늘 不韋 賂守者하여 得脫이라 亡赴秦軍하여 遂歸하다 異人이 楚服而見夫人하니 夫人曰 吾는 楚人也니 當自子之라 하고 更名曰楚라 하다.

 

 

59년(을사)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쳐서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빼앗아 4만 명을 참수(斬首)하고 조(趙)나라를 쳐서 20여 개의 현(縣)을 빼앗아 9만 명을 참수하였다. 난왕(赧王)이 두려워하여 진나라와의 약속을 어기고는 제후들과 더불어 합종하기를 약속하여 진나를 치고자 하였다. 진나라가 장군 규(樛)로 하여금 서주(西周)를 치게 하니 난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죄를 받아 그의 36개 읍(邑)과 인구 3만을 다 바치니 진이 그 헌납을 받고는 난왕을 주(周)로 돌려보냈는데 이해에 난왕이 죽었다.

 

 

→ 乙巳五十九年이라 秦이 伐韓하여 取陽城負黍하니 斬首四萬이요 伐趙하여 取二十餘縣하니 斬首九萬이라 赧王이 恐하여 倍秦하고 與諸侯로 約從하여 欲伐秦이어늘 秦이 使將軍樛로 攻西走하니 赧王이 入秦하여 頓首受罪하고 盡獻其邑三十六과 口三萬이어늘 秦이 受其獻하고 而歸赧王於周러니 是歲에 赧王이 崩하다.

 

 

동주군(東周君)

 

원년(병오) 주(周)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도망치니 진나라가 보기(寶器)를 취하고 서주공(西周公)을 탄호취(憚狐聚)로 옮겼다. 진(秦)나라 승상(丞相) 범수(范睢)가 면직(免職)하였다.

 

→ 丙午元年이라 周民이 東亡이어늘 秦이 取其寶器하고 遷西周公於憚狐聚하다 秦丞相笵睢가 免하다.

 

2년(정미) 진나라가 위나라를 쳐서 오성(吳城)을 빼앗았다. 한왕(韓王)이 진나라에 들어가 조회(朝會)하였다.

→ 丁未二年이라 秦이 伐魏하여 取吳城하다 韓王이 入朝於秦하다.

 

 

5년(경술) 가을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죽고 아들 효문왕(孝文王) 주(株)가 즉위하였다. 조나라 공자(公子) 승(勝)이 죽었다.

→ 庚戌五年이라 秋에 秦昭襄王이 薨하고 子孝文王柱立하다 趙公子勝이 卒하다.

 

6년(신해) 10월에 진왕(秦王) 주(柱)가 즉위하여 3일만에 죽고 아들 초(楚)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蔣襄王)이다.

→辛亥六年이라 十月에 秦王柱 卽位三日에 薨하고 子楚立하니 是爲莊襄王이러라.

 

 

연(嚥)나라 장수가 제나라 요성(聊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어떤 사람이 연왕에게 참소하니, 연나라 장수가 요성을 지키면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제나라 전단(田單)이 공격하여 해가 지나도록 항복하지 않으니, 노중련(魯仲連)이 이에 글을 써서 화살 끝에 매달아 그걸 성안으로 쏘아 연나라 장수에게 이해(利害)를 진술하니, 연나라 장수가 그 글을보고는 3일 동안 울다가 마침내 자살하자 요성이 어지러워졌다. 전단이 요성을 이기고는 돌아가 왕에게 노중련의 말을 하여 벼슬을 주려고 하니, 노중련이 바닷가로 도망하면서 말하기를「내가 부귀(富貴) 때문에 남에게 굽히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살면서 세상을 가볍게 보며 내 뜻대로 하겠다」하였다.

→ 燕將이 攻齊聊城하여 拔之하니 或이 譖之燕王한대 燕將이 保聊城하고 不敢歸라 齊田單이 攻之歲餘에 不下어늘 魯仲連이 乃爲書 約之矢하여 以射城中하여 遺燕將하여 陳利害러니 燕將이 見書하고 泣三日에 遂自殺하니 聊城이 亂이라 田單이 克聊城하고 歸言魯仲連於齊王하여 欲爵之어늘 仲連이 逃之海上曰 吾與富貴而詘於人으론 寧貧賤而輕世肆志焉이라 하더라.

 

 

위(魏)나라 안희왕(安釐王)이 자순(子順)에게 천하의 고사(高士)가 누구냐고 물으니, 자순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지만 그 다음에 해당되는 사람은 노중련인가 합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노중련은 억지로 그렇게 하는 자이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하였다. 자순이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다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어서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이에 군자가 되고, 노력하여 변치 않으면 습관이 되어 몸과 더불어 이루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魏安釐王이 問天下之高士於子順한대 子順이 曰世無其人也어니와 抑可以爲次는 其魯仲連乎인저 王曰 魯仲連은 彊作之者이니 非體自然也이니라 子順이 曰 人皆作之하니 作之不止면 乃成君子요 作之不變하여 習與體成則自然也이니라.

 

 

7년(임자) 진나라가 여불위(呂不韋)를 상국(相國)으로 삼아 문신후(文信侯)를 봉하였다.

→ 壬子七年이라 秦이 以呂不韋로 爲相國하여 封文信侯하다

 

동주군(東周君)과 제후들이 진나라 칠 것을 모의하니, 진왕이 상국 여불위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 멸망시키게 하고, 동주군을 양인취(陽人聚)로 옮기자 주나라가 드디어 망하였는데, 주나라가 망할 때 모두 7읍(邑)이 잇었다.

→ 東周君이 與諸侯로 謀伐秦히어늘 秦王이 使相國呂不韋로 帥師滅之하고 遷東周君於陽人聚하니 周遂不祀하다 周比亡에 凡有七邑이러라

 

 

진기(秦紀)

 

장양왕(莊讓王)

 

계축년 일식(日食)이 있었다.

→ 癸丑日食하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쳐서 태원(太原)을 평정해 37성을 차지하였다.

→ 秦이 伐趙하여 定太原하고 取三十七城하다

 

 

갑인년 몽오(蒙鰲)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치니, 위나라 군사가 자주 패하였다. 위왕이 걱정하여 이에 사람을 시켜 조나라에 있는 신릉군(信陵君)을 청하니, 신릉군이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돌아가려하지 않았다.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이 신릉군을 보고 말하기를 「공자가 제후들에게 소중하게 된 것은 오직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위나라가 위급한데도 공자께서 돌보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진나라 사람들이 대량(大梁 ; 위<魏>나라)을 이기고 선왕(先王)의 종묘를 부수면 공자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겠습니까?」하니, 말이 끝나기 전에 신릉군이 안색이 변하여 수레를 재촉해 위나라로 돌아갔다. 위왕이 신릉군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상장군을 삼으니, 신릉군이 사람을 시켜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제후들은 신릉군이 다시 위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군사를 보내 위를 구하니, 신릉군이 다섯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는 하외(河外)에서 몽오를 패배시켰다.

 

→ 甲寅 蒙驁 帥師伐魏하니 魏師數敗라 魏王이 患之하여 乃使人으로 請信陵君於趙한대 信陵君이 畏得罪하여 不肯還이어늘 毛公薛公이 見信陵君曰 公子 所重於諸侯者는 徒以有魏也라 今魏急 而公子 不恤이라가 一旦에 秦人이 克大梁하고 夷先生之宗廟면 公子 何面目으로 立天下乎리오 語未畢에 信陵君이 色變하여 趣駕還魏하니 魏王이 持信陵君而泣하고 以爲上將軍이어늘 信陵君이 使人으로 求援於諸侯하니 諸侯 聞信陵君 復爲魏將하고 皆遣兵救魏하니 信陵君이 率五國之師하여 敗蒙驁於河外하다.

 

 

5월에 진왕(蓁王)이 죽었는데, 즉위한 지 3년이었다. 그의 아들 정(政)이 즉위하여 상국(相國) 여불위를 봉하여 문신후로 삼고, 중부(仲父)라 칭하였다.

 

→ 五月에 秦王이 薨하니 立三年이라 其子政이 立하여 封相國呂不韋하여 爲文信侯하여 號稱仲父라 하다.

 

 

후진기(後蓁紀)

 

시황제(始皇帝) 상

정사년 조왕(趙王)이 이목(李牧)을 장수로 삼아 연나라를 쳐서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차지하였다. 이목은 조나라 북쪽 변경의 훌륭한 장수인데, 일찍이 대안문(大鴈門)에 살면서 흉노(匈奴)를 방비하여 편리할 대로 관리를 두고 시조(市租)를 모두 막부(幕府)에 수송시켜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봉화(烽火)를 조심하며 간첩(間諜)을 많이 두고는 약속하기를 「흉노가 들어와 도둑질을 하거든 급히 가축을 데리고 들어와 지키고, 감히 포로가 된 자가 있으면 참하겠다」라고 하였다. 흉노가 매양 들어오면 봉화를 조심하고 문득 들어와 지키면서 싸우지 않았는데, 이렇게 몇 해를 해도 읺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흉노가 모두 겁을 내고 변방 군사들이 날마다 상사(賞賜)를 얻고도 쓰이지 못하자 모두 한번 싸우기를 원하게 되었는데, 이대에 크게 격파하여 흉노 10여 만 기(騎)를 죽이고 담람(襜襤)을 멸망시키고 동호(東胡)를 깨뚜리니, 선우(선于)가 도망하여 10년 동안 감히 조나라 변경 가까이 오지 못했다.

→ 丁巳 趙王이 以李牧으로 爲張하여 伐燕取武遂方城하다 李牧者는 趙之北邊良將야라 嘗居代鴈門하여 備匈奴할새 以便宜로 置吏하고 市租를 皆輸入莫府하여 爲士卒費하고 日擊數牛하여 饗士하고 習騎射하고 謹烽火하며 多間諜하고 爲約曰 匈奴 卽入盜어든 急入收保하고 有敢捕虜者면 斬하리라 하니 匈奴 每入에 烽火를 謹하고 輒入保不戰하니 如是數歲에 亦不亡失이라 匈奴 皆以爲怯하고 邊士 日得賞賜而不用하여 皆願一戰이어늘 於是에 大破殺匈奴十餘萬騎하고 滅襜襤破東胡하니 單于犇走하여 十餘歲를 不敢近趙邊하더라.

 

 

이때 천하에는 예의(禮義)의 나라가 7개국이었는데, 3개국이 오랑캐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진나라가 의거(義渠)를 멸하고 농서(隴西) 북지군(北地郡)과 상군(上郡)에서 시작하여 장성(長城)을 쌓아 호(胡)를 막고,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북쪽으로 임호(林胡), 누번(樓煩)을 격파하고 장성을 쌓되 대(代)로부터 음산(陰山)을 아울러서 아래로 고궐(高闕)에 이르러 요새를 삼았다. 그후에 연나라가 호동(胡東)를 격파하여 천여 리를 내쫓고 역시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는데, 전국(戰國)시대 말기에 이르러 흉노가 비로소 강대해졌다.

→ 是時에 天下冠帶之國이 七而三國이 邊於戎狄이라 秦은 滅義渠하고 始於隴西北地上郡하여 築長城以拒胡하고 趙武靈王은 北破林胡樓煩하고 築長城하되 自代並陰山하여 下至高闕하여 爲塞하고 其後에 燕이 破東胡卻千餘里하고 亦築長城하여 以拒胡러니 及戰國之末 而匈奴始大하다.

 

 

경신년 초(楚)․조(趙)․위(魏)․한(韓)․연(燕)나라가 합종(合從)하여 진나라를 쳤다.

초왕이 합종의 장(長)이 되고 춘신군(春申君)이 권한을 잡아 수릉(壽陵)을 차지하고 합곡관에 이르렀으나 진나라 군사가 나오니 다섯 나라 군사가 모두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초왕이 춘신군의 탓으로 여기어 춘신국이 이 때문에 더욱 소원(疎遠)해졌다.

→ 庚申 楚趙魏韓燕이 合從以伐秦할새 楚王이 爲從長而春申君이 用事하여 取壽陵하고 至函谷이러니 秦師出에 五國之師 皆敗走하니 楚王이 以咎春申君이라 春申이 以此益踈러라.

 

 

갑자년 종실(宗室) 대신(大臣)이 간하기를 「제후(諸侯)의 사람으로 들어와 벼슬한 자는 모두 그의 임금을 위하여 유세하여 간첩 노릇을 할뿐이니, 청컨대 모조리 쫓아내소서」하였다.

그래서 크게 수색하여 객(客)을 축출하였는데, 객경(客卿)인 초나라 사람 이사(李斯) 역시 쫓겨나는 사람 가운데 있었다. 가면서 또 글을 올려 이르기를 「옛날 목공(穆公)이 선비를

구할 때 서쪽으로 융(戎)에서 유여(由余)를 얻었고, 동쪽으로 완(宛)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었으며, 건숙(騫叔)을 송(宋)에서 맞이하고,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진(晋)에서 구하여 20개 나라를 합병하여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覇者)가 되었습니다.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의 법을 써서 제후들이 복중하여 지금까지 다스려 강하고, 혜왕(惠王)은 장의(張儀)의 계책을 써서 여섯 나라의 합종책을 깨뜨리어 그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으며, 소왕(昭王)은 범수(范脽)를 얻어 공실(公室)을 강하게 하고 사문(私門)을 막았으니, 이 네 임금은 객(客)의 공이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객이 진나라에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신은 들으니 태산(太山)은 흙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지 않기 때문에 깊어지게 되며, 왕자(王者)는 대중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덕(德)이 밝아지는 것이라 하니, 이것이 삼왕오제(三王五帝)가 무적(無敵)이 된 까닭입니다. 이제 백성을 버려 적국에게 주고 빈객(賓客)을 물리쳐 제후의 공업을 이루게 하니, 이는 이른바 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준다는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이에 이사를 불러 그 벼슬을 다시 주고 객을 내쫓는 명령을 거두었으며, 모책(謀策)을 서서 천하를 통일하였다.

→ 甲子 宗室大臣이 諫曰 諸侯人來任者 皆爲其主遊間耳니 請一切逐之하소서 於是에 大索逐客하니 客卿楚人李斯 亦在逐中하여 行且上書曰 昔에 穆公은 求士하여 西取由余於戎하고 東得百里奚於宛하고 迎蹇叔於宋하고 求丕豹 公孫支於晉하여 幷國二十하여 遂覇西戎하고 孝公은 用商鞅之法하여 諸侯 親服에 至今治彊하고 惠王은 用張儀之計하여 散六國之從하여 使之事秦하고 昭王은 得范睢하여 彊公室杜私門하니 此四君者는 皆以客之功이니 由此觀之컨대 客何負於秦哉잇고 臣은 聞太山이 不讓土壞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 不擇細流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 不卻衆庶故로 能明其德이라 하니 此는 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라 今에 乃棄黔首하여 以資敵國하고 卻賓客하여 以業諸侯하니 所謂藉寇兵而齎盜糧者也로소이다 王이 乃召李斯하여 復其官하고 除逐客之令하고 卒用李斯之謀하여 兼天下하다.

 

 

무진년 한왕(韓王)이 땅을 바치고 번신(藩臣) 되기를 청하고, 한비(韓非)를 사신으로 삼아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한비란 자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公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형명학(形名學)과 법률학(法律學)을 잘하였는데, 한나라가 침략을 받아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자주 글로써 한왕에게 건의하였으나 한왕이 쓰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비가 세난(說難)․

고분(孤憤)․오두(五蠹)․설림(設林) 등 56편을 지었는데 10여 만 마디였다.

→ 戊辰 韓王이 納地하여 請爲藩臣하고 使韓非로 來聘하니 韓非者는 韓之諸公子也라 善刑名法律之學하여 見韓之削弱하고 數以書로 干韓王하되 韓王이 不能用하니 於是에 韓非 作說難 孤憤 說林 五十六篇十餘萬言이라.

 

 

기사년 처움에 연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일찍이 조나라의 볼모가 되었는데, 왕과 친하게 지냈었다. 왕이 즉위하자 단이 진(秦)나라의 볼모가 되었는데, 왕이 예우하지 않았으므로 단이 노하여 도망쳐 돌아왔다.

→ 己巳 初에 燕太子丹이 嘗質於趙하여 與王으로 善이러니 王이 卽位에 丹이 爲質於秦하니 王이 不禮焉이어늘 丹이 怒亡歸하다.

 

 

신미년 내사(內史)인 승(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韓王) 안(安)을 사로잡고 그 땅에다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하였다.

→ 辛未 內史勝이 滅韓하여 虜韓王安하고 以其地로 置穎川郡하다.

 

 

계유년 왕전(王翦)이 조나라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마침내 한단을 이겨 조왕 천(遷)을 사로잡았다.

→ 癸酉 王翦이 擊趙軍하여 大破之하고 遂克邯鄲하여 虜趙王遷하다.

 

 

연나라 태자 단이 진왕(秦王)을 원망하여 보복하려고 하는데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죄를 지어 연나라로 도망오니, 태자가 받아들여 관사(館舍)를 주었다. 태자가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는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 만나보기를 청하여 그를 사신으로 보낸 진왕을 위험하여 침략한 제후의 땅을 돌려주게 하고, 되지 않으면 인하여 찔러죽이려고 하였다. 형가가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 믿게 하는 증거가 없으면 진나라와 친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번오기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독항(督亢)의 지도를 얻어 받들고 가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이 반드시 기뻐하며 신을 만나줄 것입니다. 그러면 신이 이에 보복할 수가 있습니다」하고는, 사사로이 번오기를 만나 말하기를 「듣자하니 진나라에서 장군의 목을 금(金) 1000근과 1만 가호의 고을로 산다고 합니다. 원컨대 장군의 목을 얻어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이 반드시 기뻐하며 신을 만나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신이 왼손으로는 그의 옷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른다면 장군의 원수도 갚고 연나라가 당한 모욕의 부끄러움도 씻을 수가 있습니다」하였다.

번오기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마음을 썩히는 바입니다」하고는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그래서 함에다 그 목을 담았다. 태자가 미리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구하여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약(藥)에다 붇게 하여 그걸로 사람에게 시험해 보니 피가 가늘게 뿜어나와 즉시 죽지 않는 사람이 없자 이에 진나라로 들여 보냈다.

→ 燕太子丹이 怨王欲報之러니 將軍樊於期 得罪하여 亡之燕한대 太子受而舍之하다 太子 聞衛人荊軻之賢하고 卑辭厚禮而請見之하여 欲使劫秦王하여 反諸侯侵地라가 不可어든 因刺殺之러니 軻曰 今行而無信 則秦을 未可親也니 誠得樊將軍首와 與燕督亢之地圖하여 奉獻秦王이면 秦王이 必說見臣하리니 臣이 乃有以報라 하고 乃私見樊於期曰 聞購將軍首를 金千斤邑萬家라 하니 願得將軍之首하여 以獻秦王이면 秦王이 必喜而見臣하리니 臣이 左手로 把其袖하고 右手로 揕其胸則將軍之仇를 報而燕見陵之愧를 除矣리이다 樊於期曰 此는 臣之日夜에 切齒腐心也라 하고 遂自刎이어늘 以函盛其首하고 太子 豫求天下之利匕首하여 使工으로 以藥焠之하여 以試人하니 血濡縷에 人無不立死者어늘 乃遣入秦하다.

 

 

갑술년 형가가 함양(咸陽)에 도착하니, 진왕(秦王)이 크게 기뻐하여 조복(朝服)을 입고 구빈(九賓)을 베풀고는 만났다. 형가가 지도를 받들어 왕에게 진상하는데, 지도가 다 나오자 비수가 드러났다. 이에 왕의 소매를 잡고 찔렀으나 몸에 닿기 전에 왕이 놀라 일어나니, 소맷자락이 끊어졌다. 형가가 왕을 뒤쫓으니, 왕이 기둥을 돌다가 도망해버렸다.

진나라 법에 여러 신하가 전상(殿上)에서 모시는 자는 작은 병기라도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신하들이 맨손으로 함께 공격하면서 또 말하기를 「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소서, 칼을 등에 지소서」하니 왕이 드디어 칼을 뽑아 형가를 쳐 그의 왼쪽 팔을 자르고 마침내 그 몸둥이를 도막내어 조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더욱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쳐 역수(易水) 서쪽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연왕이 단(丹)을 참하여 왕에 게 바쳤으나, 왕은 다시 진군하여 공격했다.

→ 甲戌 荊軻 至咸陽하니 王이 大喜하여 朝服設九賓而見之어늘 荊軻 奉圖하여 以進於王이러니 圖窮而匕首見이어늘 因把王袖而揕之라가 未至身하여 王이 驚起袖絶하니 荊軻 逐王한대 王이 環柱而走하다 秦法에 群臣侍殿上者 不得操尺寸之兵이라 左右 以手로 共搏之하고 且曰 王은 負劍負劍하소서 王이 遂拔劍하여 以擊荊軻하여 斷其左股하고 遂體解以徇하고 於是에 益發兵伐燕하여 戰於易水之西하여 大破之하니 燕王이 斬丹獻王이어늘 王이 復進兵攻之하다.

 

 

왕이 장군 이신(李信)에게 묻기를 「내가 초나라를 차지하고자 하는데 장군이 헤아리기에는 몇 사람이나 써야 족하겠는가?」하니, 이신이 말하기를 「불과 20만 명을 쓰면 됩니다」하였다. 왕전(王翦)이 말하기를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장군은 이제 늙었소. 어찌 겁을 내는가?」하고는 드디어 이신과 몽염(冡恬)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게 하였다.

→ 王이 問於將軍李信曰 吾欲取荊하노니 於將軍度에 用幾何人而足고 李信 曰 不過用二十萬이니이다 問王翦한대 王翦 曰 非六十萬人이면 不可라 하니 曰王 將軍이 老矣로다 何怯也오 하고 遂使李信蒙恬으로 將二十萬人하여 伐楚하다.

 

 

22년(병자) 왕분(王賁)이 위(魏)나라를 치니, 위왕 가(假)가 항복하자 죽이고 드디어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초나라 사람이 이신을 크게 패배시키니, 이신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왕전이 말하기를 「반드시 부득이하여 신(臣)을 쓰려거든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하여, 이에 60만명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쳤다.

→ 丙子 王賁이 伐魏하니 魏王假降이너늘 殺之하고 遂滅魏하다 楚人大敗李信하니 李信이 犇還이어늘 王翦이 曰 必不得已用臣인댄 非六十萬人이면 不可라 한대 於是에 將六十萬人하여 伐楚하다.

 

 

무인년 왕전이 초왕(楚王)이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그 땅에다 초군(楚郡)을 설치하였다.

→ 戊寅 王翦이 虜楚王負芻하고 以其地로 置楚郡하다.

 

 

25년(기묘) 왕분(王賁)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연왕(燕王) 희(喜)를 사로잡았다.

→ 己卯 王賁이 攻遼東하여 虜燕王喜하다.

 

 

온공(溫公)은 논(論)한다.

「연단(燕丹)이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호랑(虎狼) 같은 진(秦)나라를 범했으니, 생각이 경솔하고 모책이 깊지 못하였다. 그래서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화(禍)를 재촉해 소공(召公)의 사당에 갑자기 제사가 끊어지게 했으니, 어떤 죄보다 크다. 그런데도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이 혹은 어질었다고 말하기도 하니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능있는 사람을 벼슬에 임명하고, 예(禮)로써 정사를 펴고 인(仁)으로써 품어주고 신(信)으로써 교린(交隣)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官)에는 제 사람을 얻고, 정사가 절도있고, 백성들은 그 덕(德)을 생각하고, 사방 이웃은 그 의(義)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국가가 반석처럼 튼튼해지고 불꽃처럼 빛나서 부딪히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타서 비록 강포한 나라가 있더라도 오히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연단은 이것을 놓아둔 채 하지 않고 도리어 만승의 나라에 필부(匹夫)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도적 같은 꾀를 시행하다가 공이 타락되고 몸은 죽고 사직(社稷)은 폐허가 되었으니 비참하지 않은가. 대저 그가 무릎으로 기고 포복(蒲伏)한 것은 공손함이 아니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한 것은 믿음이 아니며, 금(金)을 허비하고 옥(玉)을 흩은 것은 은혜가 아니며, 목을 지르고 배를 가른 것은 용기가 아니다. 용컨대 모책이 멀지 못하였고 행동이 의롭지 못했으니 그는 초(楚)나라 백공(白公) 승(勝)의 무리였던가? 형가가 그를 환양(豢養)한 은혜를 생각하고는 7족(族)이 멸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1자 8치 되는 비수로 연(燕)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秦)나라를 약하게 하려 했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 溫公曰 燕丹이 不勝一朝之念하여 以犯虎狼之秦하여 輕慮淺謀하여 挑怨速禍하여 使召公之廟로 不祀忽諸하니 罪孰大焉고 而論者或謂之賢하니 豈不過哉아 夫爲國家者는 任官以才하고 立政以禮하고 懷民以仁하고 交隣以信하니 是以官得其人하고 政得其節하고 百姓懷其德하고 四鄰親其義라 夫如是則國家安如盤石하여 熾如焱火하여 觸之者碎하고 犯之者焦하리니 雖有彊暴之國이라도 尙何足畏哉아 丹釋此不爲하고 願以萬乘之國으로 快匹夫之怒하여 逞盜賊之謀하여 功隳身僇하여 社稷爲墟하니 不亦悲哉아 夫其膝行蒲伏은 非恭也요 復言重諾은 非信也요 糜金散玉은 非惠也요 刎頸快腹은 非勇也라 要之컨대 謀不遠而動不義하니 其楚白公勝之流乎아 荊軻懷其豢養之私하여 不願七族하고 欲以尺八匕首로 彊燕而弱秦하니 不亦愚乎아.

 

 

처음에 제(齊)나라가 진나라를 삼가서 섬기고 제후들과도 믿음이 있었다. 제나라 역시 동으로 바닷가로 국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진나라가 밤낮으로 3진(晋)과 연(燕)․초(楚)를공격하자 다섯 나라가 각자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제왕(齊王)․건(建)이 즉위한 지 40여 년이 되도록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 후에 제나라 제상과 빈객들이 진나라의 간금(間金)을 많이 받아서 왕에게 권하니 진나라에 조회할 것을 권하고, 공격하여 싸울 준비를 않았으며 다섯 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에도 돕지 않아서, 진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 初에 齊事秦謹하고 與諸侯信이러니 齊亦東邊海上이라 秦이 日夜에 攻三晋이어늘 燕楚五國이 各自以救하니 以故로 齊王建이 立四十餘年에 不受兵이러니 後에 齊相及賓客이 多受秦間金하여 勸王朝秦하고 不修攻戰之備하고 不助五國攻秦하니 秦이 以故로 得滅五國하다.

 

 

 

 

 

 

 

출처 : 慶州 日新書堂 & 日新古典飜譯院
글쓴이 : 日新書堂[6K5YHX]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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