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공갈못>>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삼한(三韓)시대 저수지.(경북기념물 제121호)
<연밥 따는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줄 줄밥 내 따줄게
이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아가
연밥 줄밥 내 따줌세
백 년 언약 맺어다오
백 년 언약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간다.
이 노래는 ‘영남의 제일 가는 못’인 상주시 공검면 공갈못(공검지)가에 세워놓은 <공갈못 노래비>의 내용이다. 이 노래는 상주 함창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공갈못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민간전래 노동요이다. 옛날부터 연으로 덮인 공갈못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의 줄다리기가 심심찮게 벌어졌으리라.
공갈못은 고령가야국시대(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김제의 벽골제, 제천 의림지 못지않은 오랜 역사를 가진 연못이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장 낮은 분지여서 늘 맑은 물이 모여 들어 ‘십리 평평한 호수 거울같이 맑네’라는 시구가 있고 ‘볶은 콩 한되를 하나씩 먹으며 못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넓었다.
고려 명종 때인 1195년 최정빈이 옛 규모를 따라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영남 제1의 호수가 되었다. 상주의 읍지인 상산지에 못 둑의 길이가 860보, 둘레가 16,647척이었다고 하니 현대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거의 5km에 가깝다. 이 못에 물이 차면 수심이 다섯 길, 서쪽 못 가로는 연꽃이 만발했는데 그 절경을 중국의 전당호에 비길 정도라 했다.
못의 이름이 공갈못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못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었다는 매아설화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는 것을 보고 흉년, 풍년을 예측했다고 한다. 정월 14일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을 이용하여 소들이 못에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수룡에게 시집온 이야기도 있다.
속설에는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였다.
공갈못에는 많은 선비들이 와서 노닐었는데 그중 조선 중기의 퇴계 이황은 공갈못에 있었던 기정(岐亭)에 올라 ‘기정십영(岐亭十詠)’을 지어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18세기 사람 강필공은 ‘검호시(劍湖詩)’에서 “소백 동남에선 이 못이 가장 장해/ 때때로 벼락치는 바람도 인다네/ 절로 못 개천물 모아 호대하고/ 늘 만상 맑은 물에 담그었네”하여 공갈못의 절경과 무쌍한 변화를 예찬하였다.
19세기까지도 위용을 자랑하던 공갈못은 고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이채연의 건의에 따라 둑을 터 논을 만드니 못의 규모가 57,000평쯤으로 줄어들었다. 거기다 1952년에 못의 서남쪽에 대규모의 오태저수지가 완공되어 공갈못의 기능을 대신하니 못은 점점 더 논으로 변하고 마침내 2,000평의 규모로 줄게 되었고 수리 기능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이르러서 역사의 유구함과 중요성이 인정되어 점차 확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제는 지나 날의 전설과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 줄 뿐 예전의 장대한 모습과 풍광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옛 못을 알려주는 비석과 활짝 핀 연꽃으로 옛 정취를 가늠해 볼 뿐이다.
( 상주 모심기노래-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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