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출생.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홍철유(哲裕)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홍승유에게 입양되었는데 양부는 홍승유, 양모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그는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재동(齋洞)으로 옮겨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여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문단 활동으로는 박종화(朴鍾和)·정백 등 휘문 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曙光社)에서 『문우(文友)』를 창간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中)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를 기획하였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동명(東明)』·『여시(如是)』·『불교』·『삼천리』·『매일신보(每日申報)』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묘장(墓場)」·「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붉은 시름」 등 수편이 있다.
소설로 「저승길」·「뺑덕이네」·「봉화가 켜질 때」, 희곡 「할미꽃」·「출가(出家)」·「제석(除夕)」 외에도 수필 및 평문이 있다. 극단 활동으로는 1923년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박진(朴珍)·이소연(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다. 또 1930년홍해성(洪海星)·최승일(崔承一)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써서 직접 출연하는 등 연극 활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그 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지병인 폐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감을 형상화한 초기의 사설적(辭說的)인 장시(長詩)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관념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일련의 시작들은 장시를, 그리고 「봄은 가더이다」·「해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 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에서 보인 ‘어머니’와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향리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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