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廣州金氏(광주김씨)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08

 

 

 

 

廣州金氏(광주김씨)

 

▣ 由來

 

 

始祖(시조)  : 金祿光(김녹광)


始祖(시조) 金祿光(김녹광)은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義城君(의성군) 金錫(김석)의 7世孫(7세손)이다.
그는 高麗(고려)高宗(고종)4年 副使(부사)를 지내고 1236年(高麗 高宗23年)

蒙古軍(몽고군)이 侵入(침입)해 왔을때 上將軍(상장군)으로 出征(출정)하여 이를 擊退(격퇴)시켜 廣州君(광주군)에 封(봉)해졌다.
그리하여 後孫(후손)들이 廣州(광주)를 本貫(본관)으로 하고있다.

▣ 人物

 

 

金祿光(김녹광)의 아들 金宏(김굉)이 監察御使(감찰어사)를 지내고,金宏(김굉)의 아들 金萱(김훤)(號는屯村)은 當代(당대)의 名臣(명신)으로 名聲(명성)을 떨쳐 名門(명문)의 地位(지위)를 굳혔다.金萱(김훤)은 高麗(고려)元宗(원종)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1269年(元宗10年)使臣(사신)으로 元(원)나라에 가서 元帝(원제)의 힘을 빌어 權臣(권신)林衍(임연)一黨(일당)의 逆謀(역모)를 沮止(저지)시켰고, 이듬해 金州(금주 : 只今의 金海) 防禦使(방어사)로 나가 三別抄(삼별초)의 亂(란)을 平征(평정)하는데 功(공)을 세워 禮部郎中(예부낭중),都護府使(도호부사) 等(등)을 거쳐 左諫議大夫(좌간의대부),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 門下省(문하성)에 屬(속)했던 正2品(정2품(의 官職(관직)에 이르렀으며, 文章(문장)과 글씨로 名望(명망)이 높았다.
金萱(김훤)의 두 아들 中 맏아들 金南物(김남물)은 安東府使(안동부사)를 지냈으며, 金開物(김개물)은 忠肅王(충숙왕)때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歷任(역임)하고 詩(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能(능)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工曹參議(공조참의)를 歷任(역임)한 金次文(김차문)과 經筵官(경연관)의 參贊官(참찬관)을 거쳐 通政大夫(통정대부)에 追贈(추증)된 金次武(김차무) 兄弟(형제), 尙州牧使(상주목사)金敬寶(김경보)와 江陵府使(강릉부사)金大根(김대근),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된 金希曾(김희증)이 有名(유명)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家門(가문)을 크게 일으킨 人物(인물)은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名將(명장)金太虛(김태허)를 들 수 있다.그는 金希曾(김희증)의 아들로

태어나 1580年(宣祖13年)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고 玉浦萬戶(옥포만호)로 있다가 密陽府使(밀양부사)에 이어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蔚山郡守(

울산군수)로서 逆戰(역전)의 武功(무공)을 세웠고,亂(란)이 平征(평정)된 (

)宣撫1等功臣(선무1등공신)으로 都摠管(도총관),護衛大將(호위대장)을 거쳐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에 올랐다.그의 아들 金守謙(김수겸)도 아버지를 따라 戰功(전공)을 세워 2等功臣(2등공신)에 冊祿(책녹)되고 安東營將(안동영장),中樞府事(중추부사) 等(등)을 歷任(역임)했다.工曺參議(공조참의) 金次文(김차문)의

曾孫子(증손자)金琦(김기)는 壬辰倭亂 (임진왜란)때 判官(판관)으로 義兵(의병)을 일으켜 東萊城(동래성) 戰鬪(전투)에서 府使(부사) 宋象賢(송상현)과함께 壯烈(장열)하게 殉節(순절)하여 禦侮將軍(어모장군), 訓練院正(훈련원정)에 追贈(추증)되었다.襄武公(양무공)金太虛(김태허)의 四寸(사촌)인 金太乙(김태을)은

벼슬을 除授(제수)받았으나 辭任(사임)하고 돌아와 學文(학문)으로 一生(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金壽仁(김수인)도 光海君(광해군)의 悖倫(패륜)을 慨歎(개탄)하여 故鄕(고향)으로 돌아와 嶺南儒學(영남유학)의 重鎭(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金太乙(김태을)의 學文(학문)을 이었다.

韓末(한말)에 와서도 廣州金氏(광주김씨)는 金振聲(김진성),金錫昌(김석창),金相潤(김상윤)을 비롯한 많은 抗日鬪士(항일투사)를 輩出(배출)하여 忠節(충절)의 傳統(전통)을 이어 家門(가문)을 더욱 빛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來龍(김내용) (1871 辛未生) : 文科 高宗28年(1891) 增廣試 丙科
金益昌(김익창) (1614 甲寅生) : 文科 孝宗3年(1652) 增廣試 甲科
金秉鍵(김병건) (1824 甲申生) : 文科 哲宗14年(1863) 庭試 丙科
金浚(김준) (1563 癸亥生) : 武科 宣祖16年(1583) 別試 乙科
金莫龍(김막룡) (1610 庚戌生) : 武科 仁祖 15年(1637) 別試 丙科
金貞信(김정신) (1603 癸卯生) : 武科 仁祖 15年(1637) 別試 丙科
金馹孫(김일손) (1603 癸卯生) : 武科 仁祖 15年(1637) 別試 丙科
金太虛(김태허) (1555 乙卯生) : 武科 宣祖13年(1580) 別試 丙科
金成立(김성립) (1596 丙申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金麗興(김여흥) (1627 丁卯生) : 武科 孝宗3年(1652) 增廣試 丙科
等 모두 75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3名, 武科 45名, 司馬試 27名)


▣ 行列字(항렬자)
 
22世
상(相)○
동(東)○
23世
○환(煥)
○섭(燮)
○희(熙)
24世
재(在)○
기(基)○
재(載)○
강(堈)○
25世
○진(鎭)
○수(銖)
○련(鍊)
○정(鋌)
26世
태(泰)○
영(泳)○
홍(洪)○
호(浩)○
27世
○주(柱)
○표(杓)
○걸(杰)
○근(根)
28世
병(炳)○
열(烈)○
형(炯)○
현(炫)○
29世
○곤(坤)
○배(培)
○지(址)
○식(埴)
30世
용(鎔)○
탁(鐸)○
기(錡)○
건(鍵)○
31世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3世孫은 22代孫)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京畿道 廣州


廣州(광주)는 서울 南部一帶(남부일대)와 京畿道(경기도)中部(중부)를 統稱(통칭)하는 옛 地名(지명)으로 [百濟溫祚王13年(백제온조왕)13年]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이라 불리어졌으며, 371年[近肖古王(근초고왕)25]까지 이곳을 漢城(한성)이라 하여 376年間百濟(년간백제)의 都邑地(도읍지)이었다. 553年(聖王31)新羅(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新羅(신라)의 漢山州(한산주)가 되었다가 756年(新羅景德王15)漢州(한주)로 改稱(개칭)하였다.940年(高麗 太祖23)에 廣州

(광주)로 고치고, 983年(成宗2) 廣州牧(광주목)이 되었다.995年(成宗14) 12節度使(정도사)를 둘때 奉國軍節度使(봉국군절도사)로 고쳐 管內道(관내도)에 隸屬(예속)시켰다.1012年(顯宗3)에는 按撫使(안무사)로 고쳤으며 1018年 牧使(

목사)를 두었다. 1395年(太祖4) 廣州牧(광주목)으로 京畿左道(경기좌도)에 編入(편입)되었다.1505年(燕山君15)州(주)를 廢(폐)하였다가 1618年(光海君10

)에 廣州府(광주부)로 昇格(승격)하였다.1895年(高宗32) 地方制度改正(지방제도개정)으로 廣州郡(광주군)이 되었다.1979年 廣州面(광주면)이 邑(읍)으로 昇格(승격)한 以後(이후) 1989年 東部邑(동부읍)과 西部面(서부면)이 河南市(하남시)로 統合(통합),獨立(독립)하는 等(등)規貌(규모)는 縮少(축소)되었다.

2001年 廣州郡(광주군)이 廣州市(광주시)로 昇格(승격)하였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廣州金氏(광주김시)는
1985年에는 摠 4,989家口 20,815名,
2000年에는 총 6,845家口 21,926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자료 더보기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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