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陵金氏(금릉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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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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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시조) : 金仲龜(김중구)
始祖(시조) 金仲龜(김중구)는 高麗(고려) 高宗(고종)때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守司空(수사공),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等을 지내고 西京留守(서경유수)로 있을 때 나라에 功(공)을 세워 太子太師(태자태사)에 오르고 金陵君(금릉군)에 封(봉)해졌다.
史記(사기)에 依(의)하면 西紀(서기) 562年(新羅 眞興王 23年) 大伽倻(대가야)가 新羅(신란)의 將帥(장수) 異斯夫(이사부)와 斯多含(사다함)에게 征服(정복)되어 新羅(신라)와 倂合(병합)되고,眞興王(진흥왕)이 駕洛國(가락국)에 金官小京(금관소경)을 設置(설치)하여 마지막 王(왕)인 仇衡王(구형왕)의 셋째 아들 金武得(김무득)에게 侍郞(시랑) 兼(겸)總管(총관)을 除授(제수)하고 金陵君(금릉군)에 封(봉)했다고 한다. 金武得(김무득)이 金陵君(금릉군)에 封(봉)해졌으므로,그의 아들 金昌玄(김창현)이 本貫(본관)을 金陵(금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後 世代(세대)의 系統(계통)이 傳(전)하지 않아 後孫(후손)들이 金仲龜(김중구)를 1世祖(세조)로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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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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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文閣提學(보문각제학)을 지낸 金褘(김위:金仲龜의 아들)와 郎將(낭장)金儀(김의)의 父子가 有名(유명)했고, 太子太保(태자태보) 金錫保(김석보)의 아들 金孝鐸(김효탁)은 太子詹事[태자첨사 : 東宮(동궁)에 屬(속)한 正3品(정3품)
벼슬]에 올라 左僕射(좌복야)를 歷任(역임)한 金琯[김관:金錫保(김석보)의
孫子(손자)]과 함께 名聲(명성)을 날렸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參議(참의)를 지낸 金澤(김택)의 아들 金光貴(김광귀)가 楊州牧使(양주목사)를 지냈으며,그의 아들 金規(김규)는 性理學(성리학)에 正統(정통)한 이름난 學者(학자)로 司僕寺正(사복시정)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故鄕(고향)인 金陵郡(금릉군)禦侮面(어모면) 德麻洞(덕마동)에 돌아갔다가 沃川(옥천)靑山(청산)의 淸凉山(청량산)으로 移舍(이사)하여 性理學(성리학) 硏究(연구)에 一生(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金規(김규)의 아들 金珏(김각)은 中宗反正(중종반정)에 功(공)을 세워
靖國原從二等功臣(정국원종이등공신)에 冊祿(책록)되고,德山縣監(덕산현감)을 지냈다.그밖의 人物(인물)로는 縣監(현감)金孟智(김맹지)와 吏曹參判(이조참판)金哲成(김철성)父子가 뛰어났고,金元錫(김원석)은 貧困(빈곤)한 家勢(가세)에도 父母(부모) 奉養(봉양)이 至極(지극)하여 孝行(봉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學者(학자)로 有名(유명)한 金樟(김장)은 金長生(김장생)의 門人(문인)으로 學文(학문)이 뛰어나 "訓蒙書知行方編(훈몽서지행방편)"을 著述(저술)하여,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 金相元(김상원)과 함께 家門(가문)을 代表(대표)했다. |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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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啓陽(김계양) (1669 己酉生) : 武科 肅宗25年(1699) 式年試 丙科 모두 1名의 科擧 及第資가 있다. (武科 1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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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列字(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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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2世孫은
21代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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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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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金陵金氏(금릉김씨)는 1985年에는 摠
985家口 4,327名, 2000年에는 摠
5,565家口 18,158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 |
자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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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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