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

[스크랩] 음양오행편

장안봉(微山) 2014. 9. 21. 01:53
第 一 卷

陰陽五行篇


第五部 變 化 論




第一部




易學의 세계(世界)






1. 陰陽五行學




(1) 역학(易學)의 정의(定義)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을 줄여서 간단하게 말한다면 역학(易學)이라고 한다. 역학이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사용하고, 또 그 의미는 각기 이해를 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서 다양하게 인식되는데, 심오(深奧)한 동양철학의 형이상항적인 영역이 역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길흉화복에 대해서 점을 친다는 것을 역학이라고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모두가 사실이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역학이요, 또 동양철학이며, 또 음양오행학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이 학문을 한마디로 역학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것에는 어떤 연유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본다. 물론 일정한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 간에서 서로 연구하고 생각한 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전부인데, 두어가지의 연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부터 그 내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다.


가) 역(易)은 해와 달의 모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론이 있다. 위의 일(日)과 아래의 월(勿)이 모여서 있는 형상이라서 이름하여 역학이라고 하고, 또 음양(陰陽)이라는 의미가 포함됨으로 해서 음양오행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이 학문을 대표하는 글자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위의 날일자는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아래의 달을 나타낸다는 글자가 아무리 봐도 닮지가 않아서 말이다. 누가 봐도 물(勿)자라고 읽어야만이 설득력이 있을 글자여서이다. 물론 이러한 이론을 만드신 선배님인들 그 사정을 몰라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미리 대본을 써 놓고서 그 자리에 억지로 끼워 넣은 듯 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만약에 해와 달을 넣어서 표하고 싶었다면 구태어 역(易)자가 아니라도 명(明)자가 있다. 명학이라고 한대서 과히 나쁠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일월이 함께 있는 글자를 두고서 어색하게 역자를 취한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별로 활용하고 싶지 않은 이론이다.


나) 일체만물은 바뀐다.


또 하나의 이론으로써 나타나 있는 것은 바뀔 역(易)자의 의미에서 찾는 것이다. 원래 한자는 뜻 글자이다. 그러므로 형상보다는 뜻에 비중을 둬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사전적 의미인 ‘바뀐다’ 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명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세상의 이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된다. 태양은 고정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쉬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를 통털어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업력에 의해서 수시로 변화하는 현상’ 이라는 말로 대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업력에 의해서 삼라만상은 쉬지 않고서 업을 쌓아가면서 바뀌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은 낭월이가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던 ‘역학이라는 것은 바뀌는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는 명제를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석존(釋尊)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세상에 불변인 것은 없다고 한다. 항상 쉬임없이 변화를 하고 있고, 그 와중에서 인간도 적응해 가면서 역시 따라서 변화를 한다. 성주괴멸(成住壞滅)의 이치에 의해서 쉬임없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또 추리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이른바 역학인 것이다. 역학이라고 하는 명제(命題)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역학은 쉬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읽어내는 학문’이라고 내려보는 것이다. 물론 자연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라고 본다. 하늘도 자연이고 땅도 자연이다. 그리고 그 중에 살아가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이렇게 광범위 하게 널려있는 자연의 모든 형상을 총 망라해서 역학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취급을 한다고 하면 너무나 방대해진 느낌일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학을 단순히 인간에 국한시켜서 생각을 해볼 적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범주에 들어갈 것이고, 땅이라는 문제를 연구할 적에는 지질학(地質學)이나 토양학에 대해서도 일부 포함을 할것이고, 하늘에 대해서 연구를 할 적에는 천문학(天文學)이나 기상학(氣象學), 또는 우주과학까지도 포함을 해서 역학의 영역이 전개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역학에 입문을 하는 사람은 역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하고 주역이나, 사주를 보려고 생각하고 들어왔다가는 끝도 없이 넓어지는 역학의 영역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잃고서 중간에서 포기를 해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분들에게 뭔가 자신이 공부해야 할 영역에 대해서 어느정도 가늠을 하시도록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이러한 분야의 이야기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정리를 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우선적으로 역학이라고 하는 영역을 정의해보았는데, 이제 그 역학이라고 하는 내면의 세계를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도 좋으니까 탐험해 보도록 하자.


(2) 역학의 분류(分類)


역학의 종류에는 대단히 많은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몇가지라고 잘라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요즘의 풍조에는 걸맞지 않는 감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세상사의 모든 이치도 역시 그렇게 명확하게 분류를 할 수가 없는 것도 또한 현실이므로 역학이라는 영역이 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것이라고 볼적에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분류방법을 택해서 정리를 해야 공부하는 사람이 감을 잡을 수가 있을까?
만약에 대단히 큰 마음을 내어서 이 모든 역학분야에 두루 통달을 해서 역학에 대한 것에는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계획은 아마도 머지않아서 실패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역학의 분야는 한가지에만 파고들어도 그 바닥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낭월이도 사주공부를 간단하게 하고서 또 다른 방면으로 연구를 해보겠다는 다부진(?) 마음으로 시작을했는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명리학의 언저리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 점만 봐도 능히 짐작이 가시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낭월이가 천부적으로 둔재로 타고 났기 때문에 발전성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이 되기는 하지만, 특별하게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중에서 한 두가지의 이치에 좀더 나아갈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괜스레 이것저것 집적거리다가 시간만 헛보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공부인을 보면서 뭔가 기준을 잡아 놓음으로써 자신이 관심갖고 연구해야 할 영역이 어디에 있는지를 미리 안다면 아마도 훨씬 단축해서 깊게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파고 들다가 보면, 다른 이치에도 서로 연관이 되도록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고 본다. 그 바탕에 흐르는 정신은 바로 음양오행(陰陽五行)이기 때문일텐데, 이러한 근본이치를 어느 한가지의 학문을 통해서 맛보기 전에는 무슨 학문을 하던지 장님의 코끼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가) 정신적인 분야(分野)


이 분야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의해서 알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되어서 정신적인 분야라는 이름으로 정리를 해본다. 그러니까 영감(靈感)이라던지, 직감(直感)을 통해서 자연의 예시력(豫示力)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인식하여 삶에 적용시키는 영역이라고 보겠다.
그러니까 이 영역은 다분히 직관적(直觀的)이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계산적이라던지, 논리적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러니까 ‘3일 후에 큰 비가 와서 뒷산이 허물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가정한다면, 어째서 그런가? 하는 질문은 삼가야 한다. 왜냐면 직감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할 것이기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 선생님(혹은 조상님)이 그렇게 일러줬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어떤 영적인 교감에 의해서 자연의 변화를 미리 읽어내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는데, 이러한 영역에서의 달인들은 영매자 또는 무당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옛날부터 오랬동안 특별대우를 받아왔는데, 원시시대에서 부족국가로 변천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절대적인 인물로 신성시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감의 소유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닥쳐올 재난에 대해서 미리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을 낭월이는 정신역학(精神易學)이라는 분야로 나눠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은 역학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그들도 자연의 기운을 미리 감지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볼적에는, 역시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는 영역이라고 정의를 내린 역학에서 크게 위반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지력을 높이기 위해서 각기 인연이 있는 스승에게 전수를 받는다. 그러므로 역시 학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론적인 분야가 상당히 결여된다. 그래서 직접적인 인연을 통해서 구전심수되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력으로 파고 들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많게 된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는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성공을 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크게 말하면 이 분야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선천적으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나서 약간의 손질을 해서 활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약간은 특수한 영역이라고 보겠는데, 이러한 분야에 인연이 있는 사람은 이론적인 공부에는 별로 진전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에게 명리학을 가르쳐봤는데, 한달도 못배우고서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머리도 아프고, 시간도 없고, 하는 것들인데, 실상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신령이 거부하는 까닭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론적인 역학을 배우게 되면 신이 일러주는 것에 대해서도 토(吐)를 달게된다. 그러면 신의 입장에서는 매우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마치 시키는대로 다 하던 노예가 어느날부턴가 주인이 명령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불합리성을 들고 나와서 시비를 가리려고 한다면 주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론적인 공부를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사람은 진작에 책을 집어던지고 정신적인 역학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성공할 확율이 높아진다. 각자는 생긴대로 타고난대로 적응을 빨리 할수록 성공의 기회는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 영역의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배울 수가 없다는점이다. 아무나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선택되어진 사람들만 배우는 것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렇게 이론적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우리들에게는 인연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러한 영역도 역학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는 정도로 이해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분은 그 분야쪽으로 파고 들어보시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성공할 기회를 늦추게 될런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 이론적인 분야


흔히 별다른 부가설명을 하지 않고서 역학이라고 한다면 거의 98%는 이 분야를 말할 것으로 생각된다. 생성되는 기초원리, 전개되는 발전원리, 그리고 귀결되는 변화원리들을 하나하나 연구하고 실험하는 분야라고 본다. 그리고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연유로 출발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결과를 내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을 할 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아직은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설명을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그 원리를 설명해보려고 연구하는 정신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는 설명을 할 수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떤 문제들은 오히려 설명을 할 수가 없이 사실적인 현상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야에서는 정신적인 영역의 힘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론적인 분야에서 정통을 한 다음에, 직관적인 영역을 개발한다면 매우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왕왕 학문을 하면서 한계에 부딧힐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때에는 학문을 한다는 것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그 영역을 뛰어넘어야 할텐데, 이 학문의 체질이 되어놓으면 그 이론적인 바탕이 깔리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 또한 병이라면 병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론적인 설명으로 분석하려고 달려들다가는 나중에 95% 정도의 영역에 도달해서는 이론적인 설명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 것 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하겠다. 대개는 그 학문의 50%도 오르지 못하고서 스스로 물러나버리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어서이다.


이 책에서 다루게 되는 내용은 물론 이렇게 이론적으로 하나하나 가능한 한도내에서는 분석을 하고 그 원리를 규명하게된다. 그리고 원리로써 규명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내용들은 일단 보류를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것들을 잡고서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인생은 늙어가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진 것은 이해를 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또 다음단계로써 익혀나가면 될 것이다. 결국은 이론적으로 100%의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아직은 그러한 원리를 찾지 못해서 설명을 할 수가 없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역학의 분야에서도 이론적인 분야에 대해서 분류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크게 나눠서 정신적인 분야와 이론적인 분야라고 해봤는데, 이렇게만 분류를 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 학문적인 분야에 속하는 것에다가 촛점을 모아서 분류를 해보도록 한다.


(3) 천학(天學) 분야


아마도 이 방면에 문외한이 아니라면 어디서나 흔이 볼수 있는 문구중에서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말을 읽었을 것이다. 천지인을 다른 말로는 삼재(三才)라고도 하는데, 같은 의미이다. 천은 하늘의 이치를 궁리라는 분야이고, 지는 땅의 이치를, 그리고 인은 인간살이의 이치를 궁리하는 영역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는데, 그래서 이 천학에 속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천문학이나 점성학이라는 영역을 다루게 된다. 그 범위는 우주를 논하기 때문에 대단히 넓고, 또 그만큼 심오하고 난해한 영역이기도 하다. 낭월이는 이 분야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기 때문에 아마도 극히 일반인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설명을 드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가) 천문학(天文學)


천문학의 분야에서 대표적인 책이라고 한다면 태을수(太乙數)라는 책이 있다고 들었다. 태을수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숫자의 의미가 포함된다. 이 책은 원래 있었는데, 유실(遺失)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전설로만 존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음양가들이 태을성(太乙星)을 신성시 했다는 설명이 사전에는 나와있을 뿐이고, 태을수라고 하는 책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책이야 있건 말건, 그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고도의 수리학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다. 사실 하늘을 보면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숫자이다. 그리고 숫자 중에서도 광년(光年)이라는 낱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은하계의 궁수자리까지는 3만광년이 걸리고, 오리온 성좌까지는 또 580광년이 걸린다는 등등의 이야기 말이다. 수년전에 칼 세이건의 저서인 ‘코스모스’라는 책을 보면서 우주의 이치에 대해서 신기하게 물두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숫자개념이었다. 그냥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광년이라는 어마어마한 단위로 논하는 것에서 우주의 거대한 영역을 느낄 것 같았던 생각이 난다.
1광년이 빛의 속도로 일년간 달려간 거리라는 것을 생각해 볼적에 우주의 저편에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는지 상상을 불허하는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어마어마한 영역에 발을 벗고 나서서 궁리를 하는 분들이 바로 천문학자들이고, 그들이 다루는 학문이 천문학이다. 그래서 주로 별의 운행에 초점을 모으게 되는데, 운행하는 각도는 아시다시피 수학의 영역인 것이니, 예로부터 하늘애 대한 학문서에는 수(數)라는 글자가 따라다녔던 것이다.
현재 역학서 중에서 전해지는 이름을 보면 태을수(太乙數), 자미두수(紫微斗數), 황극책수(皇極策數), 철판신수(鐵板神數) 등등의 이름이 기억난다. 물론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수(數)가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일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 신수(身數)라는 것도 있다. 여기서도 알 수가 있듯이 수라는 개념이 역학의 초창기부터 매우 깊이 연구되어온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수라고 해서 모두가 천문학을 연구하는 영역은 아니다. 다만 천문과 숫자는 서로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 착안을 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점성술이라는 말로도 대신하면서 서양에서도 상당부분 독자적으로 발전을 했다고 생각이 된다. 천문학에서는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서 이 땅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예언을 한다거나, 실제로 생활에 활용이 되었던 일기예보의 역할도 해왔다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하늘의 모든 별자리에서 어떤 영향력을 보낸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이치를 궁리하는 곳이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달의 밝고 어두운 주기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보고가 있기도 하다.
보름달이 되어가면서 사람의 감정이 격해진다거나, 밝은 별이 떨어지면 인재가 죽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어디서라고 쉽게 만날 수 있는 天文에 대한 일례라고 볼 수 있겠다.
지구의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예측함으로써 지구에 일어날 커다란 변화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개발한 학파는 대단히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고 만들어서 전승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제작되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가 국보로 보존이 되고 있다고 들린다. 하늘의 별자리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둔 것으로 봐서 조선에서도 천문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모두 하늘의 별자리의 이동이라던지 새로운 별의 생성, 또는 보이던 별의 소멸 등에 대해서 이땅에 미칠 영향을 연구하던 것으로 천문학의 분야에서 다루는 학문의 영역이라고 보면 되겠다.
일설에는 태을수를 놓을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밖에 없다는 말이 들린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분이 그러한 학문을 운용한다는 말은 귀가 옅어서 듣지를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래도 천기(天機)를 본다는 말은 예전부터 할아버지들이 잘 쓰시던 말인것으로 봐서 아마도 한반도의 선조들이 이 분야에서 대단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낭월이는 우둔한 관계로 천문에 대한 서적은 전혀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므로 더이상 깊은 이야기는 다른 인연으로 넘기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간다.
(4) 지학(地學) 분야


천문학은 하늘만을 쳐다보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지리학은 땅만 쳐다보면서 산다는 말로 대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에 대해서 그 이치를 궁구하는 학파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해서도 매우 오래전부터 연구되어왔다고 생각되는데, 그 중에서도 제갈공명 선생의 활약이 가장 두드르진다고 하겠다. 이렇게 연구되어온 분야를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가) 기문둔갑(奇門遁甲)


천문학이 하늘의 변화를 읽어내는 연구분야로 본다면 땅에 대한 궁리를 하는 학문은 지리학(地理學)이라고 하겠다. 지리는 땅의 구조와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해서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연구해 나간 분야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기문둔갑(奇門遁甲)과 풍수학(風水學)이 있다. 이 중에서도 기문둔갑은 상당히 독보적인 땅에대한 연구를 하는 분야인데, 이 학설에 의하면 땅의 기운은 네 개의 커다란 리듬을 갖고서 돌고 있다고 본다.
그 네개라는 것은 年을 위주로 하는 년반(年盤)의 흐름이 있고, 月의 흐름인 월반과 일의 흐름인 일반, 그리고 시의 흐름인 시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개의 각기 다른 흐름은 서로 대립도 하고 보완도 하면서 땅의 위를 돌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와중에서 지금의 기운으 어떻게 변하고 있는 지를 읽어내고 내가 어떤 일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할것이며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기문둔갑은 고래로 제왕학(帝王學)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이말은 왕들이 매우 애호한다는 의미인데, 제갈량이 이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본다. 삼국지에 나오는 돌무더기를 쌓아서 당시에 흐르는 기운을 모아서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 조조를 속였다는 이야기도 바로 기문둔갑의 활용으로 이해가 된다.
기문둔갑에서는 개인적인 특성은 없다. 군대에서의 병졸 개개인의 특성이 무시되는 것과 비교가 됨직도 하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유용하게 쓰였지만 태평시대에서는 좀 무리가 따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용으로 변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는데 그러한 와중에서 기문사주(奇門四柱)라는 극히 개인적인 운명학이 발생하기도 했던것 같다.
일본에서 발간된 서적 중에서 ‘기문둔갑 개별용비의(奇門遁甲 個別用秘義)’라는 책을 통해서 제기된 이론에서는 기문둔갑도 개인의 용신(用神-명리학에서 다루는 영역)을 기준으로 길일이라던지 길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어서 흥미롭다. 이 이론을 보면 기문둔갑에서는 甲이라고 하는 한 글자를 제왕으로 받든다고 하겠다. 그래서 갑을 손상시키는 庚이라는 글자가 해당하는 방향은 매우 흉한 방향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래서 기문둔갑에서는 절대로 좋은 결과를 원하는 일에선 사용을 하지 않게 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우리가 배울 사주학문)의 용신론을 먼저 정하고 나서 사주의 용신이 庚金이라고 한다면 기문둔갑에서는 비록 나쁜 방향이라고 하는 암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방향과는 달리 개인적인 길방향으로는 이 사람의 용신방향인 庚에 해당하는 곳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높았다고 임상실험을 발표하고 있다. 기문둔갑은 다른 말로는 방위학문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그만큼 항상 방향에 대한 기운의 흐름에 민감한 학문이다.


기문둔갑의 실례


기문(奇門)은 땅 위를 흐르는 기운을 감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고 생각된다. 그 기운은 크게 네가지의 흐름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가장 큰 흐름을 갖고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은 년반(年盤)이라는 도식에 의해서 읽어내고, 가장 빠른 흐름으로 하루에 열 두 번을 변화하는 움직임은 시반(時盤)이라는 도식으로 읽어낸다. 물론 이러한 각각의 년반, 월반 일반, 시반은 제각이 사용하는 것이 다른데, 그 구체적인 것은 생략한다.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면 1년이상의 큰 일에 대해서 추리를 할 적에는 년반을 위주로 하고, 긴급을 요하는 일에는 시반을 기준으로 본댜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그 길흉의 암시에 따라서 각 방향을 취하는 것인데, 가령 팔문(八門)에 대한 것을 참고한다면, 기도를 할 적에는 생문(生門)의 방향을 취하고, 도망을 갈 적에는 두문(杜門)의 방향으로 도망간다는 것 등이다. 도망을 가는 사람은 두문으로 가야 하고, 맑은 기운이 필요한 사람은 생문을 취해야 하는데, 만약에 생기운을 취하는 사람이 두문의 방향으로 행하면 점점 기운이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팔문에 대한 이야기도 전체의 기문둔갑에 있어서는 한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그외에도 많은 참고사항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인지는 매우 고도의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 시가기문(時家奇門)이라고도 하는데, 시간의 기문형태를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를 골라본다면, 가령 양둔(陽遁) 1국의 을해(乙亥)시에 기운이 흐르는 도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양둔(陽遁) 일국(一局) 을해시(乙亥時)


(기문둔갑응시천기 57쪽의 하단 표식 스켄입력)




나) 풍수지리(風水地理)


일반적으로 풍수라고 하는 이 학문은 한국에서도 대단히 발전을 했다고 보아진다. 또 다른 말로는 감여학(堪輿學)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말이다. 한국에서 땅의 기운을 잘 감지하는 명사로는 도선국사와 무학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최근에는 ‘터’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육관도사 손석우 옹도 있다. 이러한 명사들은 각기 독특한 비법으로 땅의 기운을 감지했다고 생각이 되는데 물론 기초는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완성은 명상과 기도로써 득력(得力)을 했다고 생각된다.
멀리서 바라다 보기만 해도 그 곳의 땅의 형상과 명당의 기운을 감지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영역은 책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만큼 지기(地氣)를 감지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어야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풍수에 대한 학문은 자신의 개인적은 영역은 무시하고 가족단위로써 씨족사회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조상의 시신을 기운이 좋은 자리에 모셔지면 그 자손들이 무병장수하며 명예가 높아진다고 하는 이론이다.
그리고 생전에 덕을쌓지도 못하면서 좋은 자리에 묻으려고 하면 그 명당의 땅이 거부한다는 경계적인 교훈도 아울러서 전해내려온다. 도선국사에 대한 민담이나, 격암유록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는 남사고가 명당터를 탐해서 조상의 시신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욕심사납게 이장을 하다가 헛명당이 보여서 결국 천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혈(穴)’이라는 책에서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땅의 기운이 흘러다니는데 어떤 자리에는 좋은 기운이 흐르고 어떤 자리에선 탁한 기운이 모여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의 시신을 좋은 기운, 맑은 기운이 흐르는 길지(吉地)에 모시고 싶은 조상숭배사상이 한데 어우러진 학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명당(明堂)


명당이라는 개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라고 한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이야긴데, 자연적인 환경의 상황도 여기에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람이 세지않고, 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가문의 족보를 보면 앞쪽에다가 각기 자신의 조상을 모신 산소 주변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되어서 좋은 명당이라는 이야기가 포함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형상들을 살펴보면 대략 여성의 자궁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명당이라는 것도 어린아이가 자궁에 있는 것처럼, 시신이 대지의 자궁에 안치되는 것을 의미하는듯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당도의 그림에서 스켄으로 입력)




󰋮 이론파


풍수학의 이론은 참으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산천의 형상을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참으로 그럴싸 하게 들린다. 그야말로 지리학이론이라는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법하다. 그리고 이론파란 교과서를 위주로 공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금오경이나 청낭경, 혹은 ‘인자수지’라는 서적들은 풍수이론서의 대표적인 책들로 꼽힌다. 그외에도 대단히 많은 서적들이 있는데, 이러한 이론적인 공부를 해서 현장에 대입시키는 파들을 일러서 이론파라고 한다.
이론파는 책으로는 풍수지리에 대해서 달달달 하는데 실제로 산에 가면 깜깜해 진다는 이유로 기감파에서는 무시하는 입장이다. 소위 말하는 ‘책따로 산따로’ 라는 말을 인용하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실제로 산에 가서 그 장소에 해당하는 사고력을 갖어야 하는 것이 항상 중요한데 이러한 것에 초점을 맞춘 내용인지는 몰라도 책 이름이 현장풍수라는 것도 있다.


󰋮기감파(氣感派)


기감파라고 이름을 지어봤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꿩잡는게 매’라는 식이다. 현장에 가보면 그 자리의 기운을 감지한다고 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기감파에서는 이론을 뒷전으로 두고서 우선 땅 속을 파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땅 속의 상황이 어떻게 생겼을 거라는 예언을 하는 것이 기감파들이다. 이론적으로는 정확하게 설명을 할 수가 없더라도 실제로 땅 속의 상황에 대해서 본 듯이 그려낸다면 그 위력은 대단할 것이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청학포란형이라도 현장에 가서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면 전혀 쓸모없는 땅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본인도 이러한 기감파의 이론에 상당히 공감을 하는 입장이다. 이 말은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중요한 것은 현장의 상황이라는 말로 이해가 된다. 그래서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 풍수공부라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인연이 있다면 기감파의 대가들을 한번 만나서 산천여행을 하는 것 만으로 이미 상당한 공부가 될 것이다.


다) 가상학(家相學)


가상이란 집터에 대한 연구를 하는 분야이다. 크게는 풍수에 모두 포함이 되지만 세분하면 사람이 살 터를 본다는 의미에서 가상은 묘터와 약간 달리 설명을 한다. 기본적으로 묘터와 차이점은 묘터는 바람과 물을 중히 보는데 반해서 집터는 日光을 중히 여긴다. 그리고 길도 중요하다.
그리고 집터라는 분야에서는 주택과 공장과 아파트단지 같은 큰 규모의 집터도 포함이 된다. 이러한 건물들도 풍수학의 기본이론을 바탕에 깔고서 집을 지어야 번창한다고 한다. 서울의 대궐터의 방향을 놓고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벌인 쟁론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무학대사는 불교가 융창한 방향으로 잡으려고 했고, 정도전은 불교가 융창하지 못한 방향으로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서 집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방향도 중요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러한 모든 이론은 지리학의 영역에서 다루는 분야이다. 우리 명리학에서는 이 분야와는 또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공부를 해야 한다. 앞으로는 이러한 양택이론이 좀더 활성화되고 이론적인 뒷받힘이 되어서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이 쾌적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보면서 현재 나와있는 이 방면의 서적으로는 ‘가상학입문-전태수 지음’ ‘풍수로 보는 인테리어-사라 로스바크 지음, 황봉득 옮김’ 등이 있는데, 특히 풍수로 보는 인테리어라는 책은 기존의 주택에서도 활용을 할수 있는 영역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활용을 해볼만한 가치가 높은 책이라고 생각이 된다.


라) 방위학(方位學)


방위라는 말은 글자그대로 동서남북의 방위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종류는 그 원류를 기문둔갑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그 중에서 구성학을 끌어내어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본다. 이 분야는 일명 구성학(九星學)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서 보다는 일본에서 매우 많이 응용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나온 달력을 보면 우리 달력에서 음력을 기입했듯이 구성을 매일별로 기록한 것이 특이했다. 용어를 보면, 일백(一白), 이흑(二黑), 삼벽(三碧), 사록(四綠), 오황(五黃), 육백(六白), 칠적(七赤), 팔백(八白), 구자(九紫), 라고 하는 아홉 개의 별에 따라서 그날 그날의 동서남북의 상황에 대한 길흉을 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특히 이사를 할 적에는 매우 중요하게 보는 것이 오황살(五黃殺)방향인데, 이 방향으로 이사를 가면 5년을 재수없다는 식으로 매우 금기시 하는 방향이다.
이 아홉 개의 글자들은 매일매일 이동을 한다. 그 움직이는 방향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데, 기본도는 마방진(魔方陣)의 원리를 채용하고 있으며, 기문둔갑의 구궁(九宮)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마방진은 하도(河圖), 낙서(洛書) 중에서 낙서의 원리를 숫자로 바꾼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마방진에서 가로나 세로나 대각선으로나 어느 곳으로 세 자리를 합해도 모두 합이 15가 되는 것이다.


(낙서의 도표-정역과 일부29쪽 참고, 기문둔갑 개별용비의 111쪽 참고, 를 스켄으로 삽입한다.)


이러한 원리로써 움직이는 것인데, 간단하면서도 응용하기에 편리한 점 때문인지 활용성에 치중을 하는 일본 쪽에서 많이 사용하고 우리나라 에서는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많은 지리 분야의 응용학문이 있겠지만, 그 모두를 다 알 수가 없으므로 대략 생각이 나는대로 언급을 해 봤다.
(5) 인학(人學) 분야


천문이나 지리에 대한 간단한 상식을 더듬어 봤다. 그렇지만 원래 낭월이가 그러한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상식 이하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해볼적에 그 정도만이라도 알아두고 있으면 적당하다는 생각으로 몇마디 말씀을 드려 본 것이다. 원래는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를 해야 제대로 된 선생인데, 참으로 요원한 학문의 세계라고 생각된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인간에 속한 영역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원래가 낭월이의 전공이기도 하므로 이 분야에 대해서만은 약간 길게 말씀을 드릴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도 이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가) 점술학(占術學)


사실은 인간학이라고 하는 별도의 장이 좀 어색하기도 하다. 실은 천문이나 지리나 모두가 인생과 결부되어져 있다. 그런데도 별도로 인간학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은 그 주체로 삼고 연구하는 분야가 인간이라는 점이 특색이라면 특색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분야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많다고 하겠다. 우선 미래의 길흉에 대한 암시로써 점술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주역(周易)이다. 주역은 공자님이 만년에 매우 애독을 해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누구던지 학문에 조예가 깊어지면 자연히 연구하게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주역을 정점으로 두고서 많은 학자들이 점술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래서 여러가지의 변형된 점술이 파생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라면 육효(六爻)가 있고, 또 주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육임(六壬)도 있으며 매화역점이니, 파자점이니 하는 여러가지의 점술이 발생하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임은 약간 그 형태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결국 점을 치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같은 유형으로 봐도 될듯 하다.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고 생각된다. 황극책수라는 점서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중국의 소강절(蘇康節) 선생이 독보적인 존재이며 그분의 이름을 빌어서 가탁된 점술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뭐든지 점술에 대한 책을 보면 소강절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나마 대략 특징적인 점술학들을 열거해 본다. 물론 나름대로 이론을 갖고 있는 점술들이다.


󰋮周易


주역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 알고 있는 이름이다. 주역은 모든 점술의 조종(祖宗)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점술에서 인용을 하고 있다. 주역은 8개의 괘를 서로 겹쳐서 8×8 = 64 로 64괘를 갖고 점단한다. 기본적인 8개이 괘라는 것은 이렇게 생겼다.


一乾天二兌澤三離火四震雷五巽風六坎水七艮山八坤地
卦象☰☱☲☳☴☵☶☷
상징하늘연못불천둥바람물산땅



이러한 기본적인 팔개의 괘효를 서로 겹쳐서 나오는 의미를 갖고 점하는 목적에 따라서 응용을 하게 되는 학문이다. 관계서적으로는 수없이 많기 때문에 특별히 이자리에서 소개를 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六爻


육효라고 하는 것은 가장 주역을 닮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별개처럼 보인다. 별개라고 하는 것은 이름만 사용하고 괘효만 사용할 뿐 설명은 주역의 설명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을 바탕으로 해서 창조된 별개의 점술이라고 보면 될듯 하다.
육효는 주역의 괘를 뽑아 놓고는 다른 뜻을 많이 붙인다. 점하는 날짜에 따라서 달라지고 계절에 따라서도 설명을 달리하는 그야말로 점술다운 점술이라고 하겠다. 하나의 예를 본다면 이렇다.


몽지고괘(蒙之蠱卦)
六親地支卦爻六獸
父寅 ・靑外卦上卦
官子 ‥身玄
孫戌 ‥世白
兄午 × 騰內卦下卦
孫辰 ・命勾
父寅 ‥應朱



이와 같은 점괘가 나온 것에 대한 설명이 붙는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해서 점하고자 하는 질문에 설명을 하게 된다.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잘 숙지하지 않으면 혼란도 있다. 기본은 주역이지만 설명은 전혀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에서 나온 관계서적으로는 명문당에서 나온 복서정종(卜筮正宗)이라는 책이 있고, 동양서적에서 육효학전서(六爻學全書)라는 책이 있다. 그 외에는 어떤 책이 또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야에 책은 좀 부족한 편이다.


󰋮六壬


일명 삼전사과(三專四課)라고도 부르는 참으로 난해한 점술이다. 삼전사과라는 말은 육임의 점과를 만드는 공식의 형태를 일러서 하는 말이다. 예전에 육임이 귀신도 놀라게 만든다는 말에 혹~해서 한번 배워볼거라고 대단히 큰 마음을 내고서 덤벼들었지만, 책으로써는 도저히 될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육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육임이라는 학문은 대단히 오래 되었다고 보여진다. 말로는 5천년 전이라고 하지만, 어쨌던 주역과는 전혀 별개로움직이는 점술의 황제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방법도 이론적인 것만으로는 정답이 상당히 어렵게 되어있기 때문에 아마도 기도라던지 명상을 통해서 감지해야 만이 제대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기도 한다.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특별히 흥미가 있으신 분은 관계서적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육임에 따른 서적으로는 명문당의 육임정의(六壬精義)가 있고, 상지사에서 나온 육임정단법총론(六壬正斷法總論)이 있고, 갑을당에서 나온 육임신단극비전(六壬神斷極秘傳)이라는 책도 있다. 이 외에도 몇권의 책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책을 갖고는 답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단히 결심을 하고 덤벼드시기 바란다.


󰋮梅花易數


매와역수라는 점술은 소강절선생이 창안한 것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어떻게 보면 마음으로 점상을 얻어서 해석하는 요령이라고 보인다. 그래선지 별명으로는 심역(心易)이라고도 불린다. 가령 길을 가는데 말이 슬피 울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상황을 마음으로 생각해서 점괘를 만들어서 해석하는 것이니, 말은 불로보고, 우는 것은 한(恨)으로 볼적에 말은 화(火), 한은 간(艮)의 속 뜻인 산(山)이므로, 합하면 산화비(山火賁)괘가 되는 것 등이다. 그래서 상당히 도사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유용한 점법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초보자에게는 접하기가 쉽지않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가지를 적어본다.




󰋮斷時


단시라는 말은 점을 하는 시간을 잘라서 들여다 본다는 뜻이다. 이 방법은 참으로 간단한데 찾아온 사람의 남녀에 따라서 적용시키는 것이 다르다. 나이와 일진과 시간을 숫자화 해서 이미 만들어진 몇개의 결론에 대입시켜서 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만큼 적중율도 믿을 수가 없는데, 영감이 밝은 사람이 응용한다면 아마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남 태안의 어느 선생은 이 점술만 갖고 평생을 벌어먹고 사는 경우도 보았다. 지렁이괘라던지 묶인 돼지괘라던지 하는 이름으로 봐서 매우 서민적인 환경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학문적으로는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한 실화를 한편 소개하겠다.


[지렁이괘]


낭월이가 어렸을적에 동네에는 단시점을 잘 하시는 정종호라고 하는 아저씨가 계셨다. 이분은 누가 질문을 하면 단시점으로 해석을 해서 걱정거리를 해결해주는 재능이 있으셨던가 보다. 어느 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하루는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자리에서 집에 다녀온다고 간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모인 사람들이 지금 집에 간 사람이 언제 올것인가를 점으로 알아보라고 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도 흥미가 동해서 모두 정씨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럼 어디 한번 점신에게 물어볼까?”
하고는 지금 질문을 꺼낸 사람의 나이와 일진, 그리고 시간을 합산해서는 지렁이괘를 뽑아냈다. 그리고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한마디 결론을 내렸다.
“이사람은 오지 않겠네요. 이따가 해나 빠지면 오겠구먼...”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원래 모임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인데다가, 잠시 소 여물을 주러 갔었기 때문에 10분이내에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는 은근히 점괘과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잔뜩 기다렸다. 그런데 실제로 한시간이 지나도 오지않는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이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급한마음에 아이를 그 사람의 집으로 보냈다. 잠시후에 돌아온 아이가 보고하는 말은 그 댁에서 잠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놀러 나오시지 않느냐고 하니까,
“에구~ 갈라고 했는데, 날이 너무 더워서 이따가 저녁에 시원해지면 나갈려고 잠을 자고 있었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두는 점괘의 적중에 놀라서 어째서 오지않을 것으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기를
“이렇게 날이 뜨거운에 지렁이가 땅위를 돌아다니것소? 천상 이따가 해가 지고 시원해지면 그때서야 슬슬 돌아 다니는 물건이라서 오지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라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하도 신기해서 기억에 저장을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아마 역학에 대한 끼(?)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破字占


파자점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서 한두번쯤 들어 보셨을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문(問)자 풀이는 너무나 유명하다. 같은 물을 문자인데도 거지가 물으면 문앞의 입이니 빌어먹을 팔자라고 해석을 하고, 이성계가 물으니 좌군우군(左君右君)하니 임금의 팔자라고 했다지 않은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전설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자를 풀이해서 점을 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점이니까 그 사람이 어떤 글자를 짚었다면 그에 따르는 풀이는 점술가의 안목에 해당하는 영역일 것이다. 근래에 파자점이라는 책도 본듯 하다.


나) 四柱學


사주학이라는 말은 사람이 태어난 년월일시(年月日時)를 응용해서 일생의 운명을 연구하는 분야는 모두 사주학이라고 한다. 기둥이 넷이라는 이야기인데, 즉 년월일시에 대한 말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설명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자료를 그 사람의 생년월일을 갖고 궁리한다는 점은 동일하므로 사주학이라는 말로 묶는다.


󰋮唐四柱


사주학이라고는 하지만 이 부류도 대단히 많다. 예전에는 당사주(唐四柱)라는 것이 있어서 일천여년 동안 수위를 지키면서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하기도 했다. 지금도 길가에서 보면 칼라플한 그림책으로 된 것을 펼쳐놓은 노땡(도로변 역학영업자)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한글만 알면 얼마던지 찾아볼 수 있도록 색인이 잘 되어있는 책이기도 해서 서민들의 갈증을 달래주는데 대단한 활약을 했던 스타이다.


󰋮紫微斗數


그리고 天文學에서 파생된 사주학인듯 싶은 것이 있는데 이름하여 자미두수(紫微斗數)라고 하는 학문인데 지금도 이 자미두수의 학파만으로도 여러 갈래의 분류를 보이고 있을 정도로 대단히 난해한 학문이다. 대만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대만에서도 자미두수의 학파로써 크게 네가지로 나누는데, 소한파, 태세파, 변국파, 비성파의 분파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각기 중요하게 여기는 주류가 다른데서 오는 이견으로 각기 다른 파로 불리는듯 하다.
대만에서 만났던 학자분의 말씀도 고웅의 자미파(남파)와 대북의 자미파(북파)는 서로 견해를 달리한다고 전해준다. 이러한 자미두수의 학파는 기본적인 원리는 그 사람이 출생한 순간을 기준하는 四柱인데 이 사주를 특이한 이론에다가 대입시켜서 그 사람의 일생동안에 겪을 길흉사에 대해서 풀이를 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육효나 육임과 같은 점술로 일생의 운명을 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四柱學은 아니다. 그래서 사주학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기문사주학(奇門四柱學)


원칙적으로 기문둔갑은 땅의 기운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출생년월일시에 따라서 당시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8아이는 어떠한 생을 살아가게 될것인지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문사주라는 영역이다. 그리고 크게 추리해본다면 자평사주도 기문사주의 바탕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다가 분가를 한 별개의 학문이라고 해도 될법한 생각도 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유는 기문둔갑의 대가이신 유백온(劉伯溫)선생이 자평사주학의 보감이라고 할 수 있는 적천수(滴天髓)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기문둔갑에 정통하신 분이 자평명리학의 핵심이 되는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어쩌면 기문둔갑 이론을 바탕에 깔고 발전한 기문사주보다 독특하게 별도로 새롭게 발전한 자평명리학이 인간에 대한 영역을 연구하는데는 더욱 합리적인 면이 많다고 판단을 했을것도 같다.
그렇거나 말거나 현재에도 기문사주학파는 나름대로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문사주의 장점중에 하나는 시간이 애매한 사주의 경우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정도에 따라서 뚜렷하게 경계선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찾아내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기문사주를 깊이 연구해보지 않은 연고로 책임을 지지 못할 말인듯 해서 이정도로 줄인다. 그리고 기문사주의 영역에서 현재 출판된 책이라면 명문당의 기학정설(奇學精說)이 좋은것 같고, 한반도에 맞게 개선되었다는 동기(東奇-海東奇門)도 활발하게 연구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분야에서는 동기정해(東奇精解)라는 책이 발간되어 있다. 저자는 위의 기학정설을 저술한 분과 동일한 이기목 선생이시다.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


지금 우리가 접근을 해볼 학문이 바로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이다. 이 자평명리학은 지금으로 부터 약 500 ~ 600년 전 쯤에 기본 골격이 형성된 사주학이라고 생각되는데, 특이한 점은 태어난 날을 중시해서 본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도리어 많은 문제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름지기 좀더 발전시켜서 나머지 학문인 의학(醫學), 법학(法學), 교육학(敎育學), 심리학(心理學), 물리학(物理學), 화학(化學) 등과 같이 무궁한 발전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시대순으로 대가들을 나열해 본다면


【戰國時代】낙록자(珞琭子), 귀곡자(鬼谷子)가 있었고,


【漢代】사마계주(司馬季主), 동중서(董仲舒), 동방삭(東方朔), 엄군평(嚴君平)이 이름을 떨쳤다.


【三國時代】제갈공명(諸葛孔明), 관로(管輅)가 있었으며,


【晉代】갈홍(葛洪), 곽박(郭璞)이 있고,


【南北朝】위령(魏寧), 도홍경(陶弘景)이 있다.


【唐代】원천강(袁天罡), 일행(一行), 이필(李泌), 이허중(李虛中)등이 있는데, 여기서 이허중이라는 분은 천하에 유명한 당사주를 만들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 당사주는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적중율에 있어서는 자평명리학에 견줄바가 아니므로 쳐다보지도 않지만, 당시로써는 대단히 획기적인 자료였다고 보아진다.


【五代】진희이(陳希夷), 서자평(徐子平) 등이 있는데 여기서 진희이라는 분은 마의상서(麻衣相書)를 저술한 관상(觀相)의 대가요, 서자평은 너무나 유명한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의 시조격이라고 하겠다. 기실은 여기서 명리학(命理學)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옛적에는 사주를 보고서 운명(運命)을 예언할 적에 年柱의 干支를 위주로 하고 日柱와 月柱의 간지는 보조로 삼고서 오행의 생극(生剋)과 쇠왕(衰旺)을 대입해서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쳤으나 왕왕 맞지 않는 자가 많았다.
이점을 항상 주의깊게 관찰하던 자평선생이 사주팔자는 日干을 위주로 하고 다른 글자들을 보좌로 해서 풀어야 한다는 이론을 세워놓았다.


【宋代】주렴계(周濂溪), 소강절(卲康節), 서대승(徐大升) 등이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오대시절(五代時節)의 ‘서자평이론(徐子平理論)’을 계승한 서대승선생의 ‘사람이 태어난 日干을 주체로 삼고 다른 간지의 오행을 보조로 삼는 방법’을 활용해서 사람의 운명을 예언했던바, 단지 이론적으로 기초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잘 적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이 방법이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명리학문이 발전할게 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일천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수없이 많은 사주의 대가들이 배출되었고 저술은 또한 수풀처럼 많다. 그래서 지금은 상당히 성숙한 학문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러한 연유로 현재까지도 이 사주학을 자평명리학이라고 일컫게 되는 인연이 생겼다고 본다. 그리고 이분이 이야기한 오행은 단순히 서로 생조(生助)만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진일보한 중화론(中和論)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 이론은 앞으로 배우게 된다.


【明代】유백온(劉伯溫), 만육오(萬育吾), 장남(張楠) 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여기서 유백온 선생은 저 유명한 기문둔갑비급대전(奇門遁甲秘笈大典)을 저술한 기문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분은 기문의 대가이면서도 자평명리학에 아주 심오한 이론을 전개하였던바, 그 책의 이름이 만고에 빛나는 적천수(滴天髓)이다. 현재의 모든 영양가 있는 명리서들은 이 적천수의 이론을 어떤 형태로던지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러한 획기적인 이론서는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장남이라는 분은 명리정종(命理正宗)이라는 책을 통해서 서균(徐均)이 지은 연해자평(淵海子平)의 분명하지 않은 부분을 좀더 명확하게 보충했다고 보인다. 수년 전에만 해도 명리학을 공부하려면 어떠한 책을 보는게 좋은가? 라고 질문을 하면 대개의 선배들은 연해자평을 스스럼없이 추천했다.
그러나 기실 알고보면 추천하는 자신도 연해자평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분이었다. 그만큼 권위가 있는 서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겉만 번지르르했을뿐 실속이 없는 다분히 이론전개적인 의미에 그 가치를 두는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 이제는 명리입문서로써 연해자평을 추천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
그리고 장남의 저서라고도 하고 만육오의 저서라고도 하는데, 엄청난 분량의 내용을 갖고 있는 삼명통회(三命通會)가 있다. 책만 구해 놓고서 하도 엄청난 분량으로 인해서 감히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직도 벼르고만 있는 책 중에 유일한 명리서이다. 명문당에서 번역한 책으로 삼명통회가 있지만 분량을 보건데 극히 일부분에 한해서만 번역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면 이 책을 전부 번역하기로 든다면 아마도 열권은 되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분량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한권으로 충실한 번역이 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淸代】자평명리학이 꽃을 피운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이 학문의 골격을 완성하고 그에 따르는 실험도 상당히 방대하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고 또 후학을 위해서 훌륭한 저서를 남긴 분으로써는 진소암(陳素菴), 심효첨(沈孝瞻), 임철초(任鐵樵) 등이 유명한데 어느 하나도 소흘히 할 수가 없는 이름들이다. 그 중에서 진소암 선생은 명리약언(命理約言)이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남겼다. 생전에 정승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사주책을 남긴 용가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그렇게 꼬장꼬장한 성품의 소유자라서인지 현재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육친론(六親論)에서 나를 생해준 오행이 父母라는 원칙론을 고수하기도 한다.
심효첨 선생은 자평명리서의 기본골격이라고 할 수있는 자평진전(子平眞詮)을 남겨서 후학들이 기본골격을 잡는데 매우 유익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자평진전은 전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질서있게 실속적으로 군소리를 빼고 비합리적인 이야기도 걸러가면서 명확하게 이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월지의 비중을 매우 크게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주 전체에서 가장 강한 오행을 용신으로 삼은 후에 일간과의 대립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연구한 면도 보인다.
임철초 선생은 적천수에 주석을 달았다는것 만으로 이름이 유명하다. 스스로 책을 지어도 지을 수 있는 안목의 소유자였는데, 당시까지 난해한 이론전개로 인해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적천수에 주해를 달아서 부활시킨 공로는 새로이 책을 저술한 것보다도 더욱 존경을 받게 된다.
철초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적천수라는 보옥이 땅속에 묻히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나중에 인연이 있어서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아마도 스스로 철초선생님의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주석을 달았던 책은 나중에 출판이 될적에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라는 이름과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라는 다른 이름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된다.


【近代】청대의 꽃을 먹고 자란 학자들이 열매를 수확한 시대라고 보아도 되겠다. 여기서 비로소 자평명리학의 진가를 발휘하도록 한 학자들이 선대의 자료를 배우고 자신들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삼아서 명리학의 완성을 보려고 노력했던 시대일 것이다. 그 중에서는 어느 누가 더 공로가 많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모두 대단한 자료들을 발표했는데, 서낙오(徐樂吾), 원수산(袁樹珊), 위천리(韋千里), 日本의 아부태산(阿部泰山) 오약평(吳若萍-俊民), 양상윤(梁湘潤), 화제관주(花堤館主), 하건충(何建忠), 등등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모두 명리학의 발전에 공헌을 해왔다.
이 중에서도 서낙오 선생은 그야말로 자평명리학의 기강을 바로 세운 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저서와 평주를 남겼다. 특히 낙오선생이 찾아내서 주를 달았던 궁통보감(窮通寶鑑)은 원래의 이름이 난강망(欄江網)이었다는데, 궁통보감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활시켰다고 해도 되겠다. 낭강망의 저자는 여춘대(余春臺)라는 이름의 소유자로 되어 있는데, 무슨 일을 하고 언제 살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위의 화려한 대열에 끼지도 못하지만 궁토보감이라는 이름의 책이 존재하는한 이 이름은 함께 보존될 것이 틀림없다.
궁통보감은 현재 명리학계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3대 보서(寶書)로 공인되다시피 했다. 그 외에서 전천수를 출판하면서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라는 이름을 달았던 본인이기도 하다. 아울러서 징의에서 약간의 도움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적천수보주(滴天髓補註)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자평진전평주(子平眞詮評註)도 낸 것을 보면, 영양가가 있다고 생각한 서적들은 모두 손을 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래서 근대의 대가 중에서는 첫손가락에 꼽아야 될 것으로 본다.
또 원수산 선생은 명리탐원이라는 책을 저술해서 고래로 많은 이론과 학설을 집대성하여 누구던지 어디에서 어떠한 말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데 유익한 서적이 되었다. 그리고 명보(命普)라고 하는 사주모음집을 저술했는데, 이 속에는 중국고래로 많은 명사들이 망라되어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찾느리고 아마도 무진 애를 썼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가 하면 위천리 선생은 실제로 사주를 감정한 자료를 공개하기로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그의 고고집(呱呱集)은 사주를 보는 요령에 대한 힌트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명학강의(命學講義)라는 책은 명저로 꼽히는 서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日本태생인 阿部熹(阿部泰山)선생도 명리학에 대한 많은 저술을 했다. 특히 적천수상해(滴天髓詳解)라는 3권의 서적은 대만의 무릉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데, 적천수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궁리를 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아부태산 전집이 있을 정도인 것으로 봐서 자평명리학에 정통한 학자인 것으로 손색이 없다.
또 빼어놓을 수 없는 분 중에 한분은 화제관주(花堤館主)라는 이름으로 책을 남긴 분이다. 이 책은 명학신의(命學新義)라는 책인데, 여기서 심리학자 융 박사의 이론을 대입하고 있는 장면은 가히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이렇게 용기있는 임상과 대입의 노력으로 명리학은 이제 심리학(心理學)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대단한 학문이 된 것이다. 물론 의학은 적천수에서 포함되었기에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모험적이라면 모험적인 실험정신으로 후학이 뜻을 이어서 연구한 논문있으니 하건충(何建忠)선생의 팔자심리학(八字心理學) 두권이다.하건충 선생은 바로 이 화제관주의 명학신의를 바탕으로 삼아서 전후편의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팔자상에서 추리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은 정말 존경심이 절로 우러러난다고 하겠다. 이 팔자심리학은 앞으로 많은 연구꺼리를 제공하고있다. 너무 이론적인 면에 치우친 감이 있지만, 예전에 자평선생이 이론으로 제시한 일간 위주가 결국은 확실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더라도 아마 여기서 나올 팔자와 심리학에 대한 연결고리는 대단하다고 할만 하다. 본인도 이 팔자심리학을 보면서 좀더 힘써서 연구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준민(吳俊民) 선생의 명리신론(命理新論)도 대단히 훌륭한 책으로 꼽힌다. 두권이거나 혹은 세권인데 내용은 같다. 출판사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듯 하다. 이 명리신론은 공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이색적이라면 이색적이다. 신살이라는 것 중에서 비중이 크다고 하는 空亡에 대해서 다루지 않은 것을 보면서 정말 생각이 많은 학자라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하나하나 임상을 해가면서 비합리적이거나 별로 효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이론들을 제거해 나가다 보면 그야말로 속 고갱이만 남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은 어서빨리 이러한 시간이 와야 명리학이 가일층 발달하게 될것이다.


󰋮韓國에서의 子平命理學


한편 한국에서는 어떤가? 이렇게 중국의 학자들은 각기 독특한 이론들을 전개해가면서 발전시키거나, 고전적인 학문의 이론들을 임상하고 경험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을즈음에 한국의 명리학자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뭣을 했길래 이렇게 명리학이 사회적으로 미신적인 대우를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이름을 떨쳤지만, 이분이 연구한 영역은 수리학 분야이고 자평명리학은 아니니 언급할 것이 아니고, 모두들 형이상학적인 철학에만 연구를 한 나머지 정작 인간의 운명을 궁리하는 명리학은 아녀자들의 당사주를 찾는 정도로써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체면을 중시하던 양반사회에서 점술 나부랭이(?)나 공부한다고 하면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해서 혼자만 배워서 응용하고 공개적인 저술은 하지 않았을 것도 같다. 일제시대에는 그저그렇고, 해방 이후에 몇몇 쟁쟁한 선생님들이 등장을 했다.
대전에서는 박제완 옹이 명리요강(命理要綱)이나 명리사전(命理辭典)이라는 책을 저술하셔서 명리서적이 거의 불모지이다 싶은 시기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셨다. 그런데 이 책의 가격이 대단히 높아서 가난한 학자는 냉큼 구입을 하기가 망설여지는 것도 어쩔수 없다. 부산에서 제산 선생은 부부의 띠를 귀신같이 알아 낸다고 해서 세인을 놀라게 했지만, 결국 저서가 한권도 전해지지 않으니 후학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법하고, 오직 임상시험을 방대하게 하셨던 이석영 선생님은 사주첩경(四柱捷徑)이라는 명리학원의 교재가 전해지니 이 책이 그래도 한국의 명리학 연구서적으로써 자랑을 할 만한 유일한 한국의 명리서적이라고 할만 하겠다. 그리고 입문서로써는 다소 난해하지만 상당히 정리를 했다고 보는 사주정설(四柱精說)이 법조인이었던 백영관이라는 필명으로 나와서 많은 명리애호가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다고 보아진다.
다행히도 이즈음에 이러러서는 대단히 많은 서적들이 범람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한국 명리학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는듯 해서 흐뭇한 감도 있다. 아마 앞으로는 틀림없이 한국의 명리학도 중국의 학문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미롭게 발전을 할 것으로 보지만 아직은 약간 정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드림으로써 명리학의 현주소를 대략이라마 이해를 하도록 해본다.
명색이 대가라고 하시는 분들도 출판하시는 서적을 대하면 견강부회로 짜집기를 한 것이 적지않게 눈에 띄인다. 또 일본에서 출간된 책을 약간의 수정만 해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출판하는 그야말로 저작권을 침해하는 책도 있다고 들린다. 이러한 것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서적들이 먹혀들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자들의 수준이 이러한 쓰레기들을 분별할 정도만 된다면 이런 책들은 발을 붙일 곳이 없을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 된다면 명리학의 서적은 날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책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고 본다.


다) 성명학(姓名學)


앞의 사주학이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숙명(宿命)을 알기 위한 도구로 발전을 했다고 본다면, 이 성명학은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차원에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사주팔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면 이름이라는 것은 언제던지 고쳐서 흉을 피하고 길함을 찾을 수가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기왕에 인간은 이름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이름에도 좋은 이름과 나쁜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좋은 이름은 자꾸 불러줄수록 개운이 되지만, 나쁜 이름은 부르면 부를수록 악화된다. 그러니 좋은 이름으로 고쳐서 사용하고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자. 고 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일 것으로 본다.
물론 전생에 온갖 죄업을 짓고서 이름만 수십만원 들여서 잘 지어갖는다고 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겠지만, 기왕이면 나쁜 이름보다는 좋은 이름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에는 반론을 제기할 생각이 없다.
이름도 예전에는 글자 자체에 의미를 두었으나, 근래에는 글자보다는 발음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다. 성명학은 대체적으로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책 한권만 있으면 대략 이름을 감정하고 길흉을 판단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낭월이가 활용하는 책으로는 정보국 선생의 저서인 작명보감(作名寶鑑)이다. 한국의 특성에 따라서 동사무소에 등록이 가능한 글자들을 모아서 음양오행으로 분류를 해 뒀기 때문에 초학자라고 하더라도 약간만 시간을 투자하면 이름을 지을 수가 있을 것이다. 좋은 이름으로 귀중한 인생을 복되게 산다면 말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주팔자를 무시하고서 이름만 갖고서 온갖 길흉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간 의문이 있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설명을 하다보면 그 수가 정말 대단히 많은 것에 놀란다. 그리고 전설적인 학문들도 많다. 각기 기기묘묘한 이야기를 남긴채로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모를 학문들도 많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학문들은 어쩌면 각기 비밀리에 전승되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각자 인연이 있어서 정말 대단한 학문을 만나기 비는 마음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가 무슨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맞춘다는 월령도(月令圖)라는 책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모두 쫓아 다니다가는 정말로 허송세월을 하기가 십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참고로 역학의 분야별로 정리를 한 책으로는 동학사(東學社)에서 나온 ‘역학돋보기-오상익 저’를 읽어보시는 것도 참고가 되겠다.
이렇게 다양한 동양정신(東洋精神)의 여행에 동행을 하시게 된 인연(因緣)에 감사 드린다.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은 학문이지만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밝혀놓은 것이다. 하나하나 이해를 하다 보면 또한 도달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처음부터 너무 가벼이 여기거나 또한 너무 어렵게 여겨서 중간에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第 二 部




음양론(陰陽論)






이제 본격적으로 음양오행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역학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는 못하다고 해도, 그런대로 대략적인 분위기는 파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서 가장먼저 음양의 이치를 파악해 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음양에 대한 이해를 해보는데, 실은 음양이라고 해서 오행과 분리해서 별도로 존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져서 들숨과 날숨처럼 연결되어져 있으니, 이것을 별도로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줄은 알면서도 이렇게 음양론이라는 항목을 만들어 본 이유는 초학자들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그 형상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이해를 해 놓고 나서는 나중에 다시 한 덩어리로 모은다는 것을 이해하고서 공부에 임해주시기 바란다. 음양이라는 분류를 하기에 앞서서 음양이 생기기 이전에는 어떻한 상황이었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1. 陰陽의 以前




음과 양의 맨 처음 시작은 어디서 부터인지 지식으로는 알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의 시간감각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기실은 옛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원래 음양의 이전에는 두 종류의 기운이 서로 분리가 되지 않고서 엉켜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뭔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분리가 되고 정리가 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자연법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양으로 나누기 이전에도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형태는 음양으로 분류가 되기 이전의 기운일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러한 성분을 혼돈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사실 혼돈이라는 말은 장자에서도 보이는 말이기 때문에 매우 오래전의 우주의 형상이 이렇게 음과 양으로 분리되기 전의 형태로 이해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장자(莊子)의 내편(內篇)에 응제왕의 마지막 대목에 아주 간단한 내용이 있다. 풀어서 적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이 중앙의 왕인 혼돈의 나라에 놀러와서는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답례로 무엇을 선물할까... 하는 의논을 하다가 혼돈을 보니까 보통 사람들은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두 임금은 의논을 한 끝에 하루에 한 구멍씩 7일동안 일곱구멍을 내줬는데, 마지막 구멍을 내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러한 장자의 유명한 우화가 있는데 아직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이런 기회에 한수 익혀 두는 것도 좋겠다. 이 이야기를 볼적에 자연적인 원래 생긴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것인데, 뭔가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망가트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음양이 나눠지기 이전의 모습을 궁리하다가 문득 그 모습은 혼돈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언급을 하였는데, 실로 음양을 나누기 이전의 형태라고 볼적에 혼돈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혼돈이란 뒤죽박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명확하게 나눌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어찌보면 어두컴컴한 상태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 이를 일러서 혼돈의 시간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에는 혈액(血液)을 갖고 실험을 하는 장면이 텔레비젼을 통해서 종종 보이는데, 이 중에서 혈액을 분리하는 장면이 보인다. 그 혈액은 처음에는 그냥 붉은 피인데 실험을 위해서 원심분리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때는 위와 아래로 나뉜다. 이러한 상태의 이전 즉 원형의 혈액을 그냥 혼돈의 상태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렇게 분리가 되어버린 액체는 이미 인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 물체일 것이다. 혼돈이 죽어벼렸다는 말에서 낭월이는 원심분리기 속에 들어있는 혈액을 떠올려보게 된다. 뭔가 연관성이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원형에서 하늘과 땅으로 나뉘기 전에 오행의 기운이 분류되지 않고 뒤섞여서 함께 빙글빙글 돌고 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도 된다. 이를 일러서 음양의 이전이라고 이름한다. 그야말로 전체의 모습도 될것 같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분류를 하기 이전의 천진한 상태가 바로 음양분리 이전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무극(無極)의 상태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陰陽의 分類




원래의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는 한 덩어리의 혼돈이었는데, 어떠한 작용이 개입하면서 음양으로 분류가 되었다고 설명을 한다. 이쯤 오면 이미 상대적인 개념이 형성된다. 크고 작음이나 높고 낮음이나 맑고 탁함 등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이 음양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답고 추한 것이 형성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음양이란 이렇게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을 말한다. 선악은 이미 전체를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최초에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본다. 어쩌면 지금 궁리를 한다고 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을것도 같고, 또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에 살고 있으며 지금의 이 대기에 가득한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는 이상, 지금의 현재의 우주에 대해서 궁리를 해보는 것이 더욱 이익이 많으리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음양으로 분리되어서 커다란 흐름을 만들면서 서로 대립과 보완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쪽으로 치우지면 지구는 그 즉시로 폭발을 해버릴 것도 같은데,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질서있게 흘러가는듯 하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눈에는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고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마음에 대립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이것이 또한 인간의 모양임에 어쩌랴··· 그래서 어쩔수 없이 음양이라는 분리의 대립을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선악의 대립을 불러온다.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면 결국 그정도 밖에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음양의 마음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함이다. 균형은 아름답다. 즉 기울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시이소오의 중심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올라가는 것은 양이고 내려가는 것은 음이라고 한다면 음과 양은 서로 오르락 내리락 할적에 재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둘 중에서 어느 하나의 기운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다면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시이소오를 연상해보라 무슨 재미로 매달려서 놀겠는가? 그렇지만 중심점이 있으므로 두 어린이는 몇시간이고 그렇게 깔깔거리면서 오르락내리락 음양의 균형을 즐긴다.
이러한 상태를 빌어서 음양이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말하거니와 우리가 배울 명리학(命理學)도 실은 기울어져있는 음양의 편차를 어느 곳에다가 중심점을 잡으면 바르게 균형을 이룰것인가에 촛점을 맞춰보는 게임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단 陰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쉽다. 그러면서도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서 짐작을 하면 될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항상 대립의 사이에는 중간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은 영역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바란다.


陽陰陽陰
物質的
또는
精神的단단하다 부드럽다밝다어둡다
유정물(생물)무정물(광물)활발하다침체적이다
여름철겨울철봄철가을철
나무암석불물
남자여자소년(少年)노인(老人)
희망(希望)절망(絶望)미래(未來)과거(過去)
시간(時間)공간(空間)기쁨슬픔
지혜(智慧)우치(愚痴)정령(精靈)사귀(邪鬼)
부자(富者)빈자(貧者)시작(始作)종말(終末)
얼굴뒤통수등부분배부분

표에서 보면 모두는 서로 상반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음양의 구조는 서로 대립이 되는 것으로 우선은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원래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교육을 할 적에도 우선은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의식이 향상되어가면 점차로 확장을 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이 되겠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러한 방법을 활용하여 서로 대립되는 구조를 보여드린다.


(1) 남자는 양(陽) 여자는 음(陰)


우선 설명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누구던지 남자와 여자를 음양의 대표적인 구조로 이해를 하는데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적으로 말하면 성기의 구별이라고 하겠는데, 암컷과 수컷이 그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남녀라는 형태를 빌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를 해보도록 한다. 그래서 과연 남자는 양이라고 할만 하고, 여자는 음이라고 할만한가를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음양오행가의 안목으로 낱낱히 분석을 해봐야 학자다운 이해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되어서이다. 심리적인 면이나 형체적인 면에서 함께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남자여자
성격활발하고 개방적이다세심하고 폐쇄적이다
골격강건하고 굵으며 힘세다부드럽고 가늘며 연약하다
성기돌출되었고 정액이 발산된다함몰되었고 수동적이다
성욕충동적이고 적극적이다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음성굵고 힘차다가늘고 부드럽다
활동외향적이며 밖에서 활동한다내성적이며 집에서 활동한다
취미스릴과 위험한 일안전하고 아기자기한 일
재물즉흥적이며 소비성이다계산적이며 절약성이다
명예남들이 높이보는 것에 흥미남편이 원하는 것에 흥미
기타전반적으로 외향적이고 발산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수렴



이렇게 간단하게 남녀를 대표할만한 구조에 대해서 나열을 해 본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반론이 나올 수도 있겠다. 여자도 얼마든지 명예를 탐하고, 밖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남자도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상식에 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식을 무시하고서 개별적으로 논한다면 어디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보다는 대략적인 구조로써 음양의 대립되는 형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제 시작이다. 수없이 다양한 명리학의 의치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가 보면 얼마든지 다양한 남녀의 구조에 대해서 궁리를 해볼 자료가 대기하고 있다. 지금부터 완벽하려고 서둘지 않더라도 얼마던지 정밀하게 연구하고 추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로만 이해를 해주기 바란다.


(2) 심리적(心理的)으로 보는 음양(陰陽)


이번에는 또 다른 예로써 음양의 대립되는 관계를 이해해 보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물건이기 때문에 항상 알다가고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심리학(心理學)인데, 물론 낭월이도 이 심리의 구조를 사주팔자를 이용해서 한번 파악해 보려고 각고의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한번 도표로써 나타내서 마음의 음양에 대한 구조를 이해해 보도록 하자.


양의 마음음의 마음
과거좋은 것만 기억한다어둡고 슬픈 것들만 기억한다
현재적극적으며 희망적으로 생각소극적이며 부정적으로 생각
미래앞만 쳐다보고 돌진한다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렵다
신앙미래지향적인 종교에 관심내면적이고 정적 종교에 관심
물컵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벌써 절반이나 마셔버렸다
사랑그림같은 집과 알뜰한 가정사랑은 불행의 씨앗인데...
오염아직도 맑은 공기는 많다조금만 있으면 숨도 못쉰다
행동우선 저질러 놓고 본다돌다리도 두드려봐야 한다
재물임자없는 재물이니 열심히아무리 설쳐도 내몫 뿐이다
기타전반적으로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전반적으로 부정적이고
과거집착적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음양의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서는 곤란 하겠다는 생각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3) 음양으로만 나눌 것인가?


음과 양이라는 이분적으로 모든 삼라만상을 나눌 수가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모든 것에 대해서 음과 양으로만 나눌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표면적으로 볼적에는 일단 음양이라는 대립되는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기본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을 창안했던 아인슈타인 선생이 탁월하다는 대접을 받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고, 또한 사실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 역학의 분야에 들어오면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서. 사실 상을 받는다면 주역의 학자들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어거지를 써보기도 한다.
주역이라는 것은 순전히 음(--)과 양(―)으로 표기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표시를 가지고서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삼라만상의 성쇠(盛衰)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음과 양으로 표시되는 상대적인 관계 외에 과연 또 다른 무엇이 없을 것인가를 가끔 생각해보데 된다.
이러한 것이 반드시 있다고 전제를 하고 싶은 마음인데, 이것을 일러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라고 하던지, 또는 ‘음이면서도 음이 아니고 양이면서도 양이 아닌 것’이라는 말로 하던지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음과 양이라는 것 말고 그 사이를 흐르는 중간(中間)이라고 할 수가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음양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어떤 성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고서는 어쩌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낭월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4) 음양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


음과 양은 서로 대립을 하면서도 반목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음과 양은 서로 조화를 이뤄가면서 뭔가를 창조하는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질적인 성분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과연 무슨 힘에 의해서일까?
낭월이는 이러한 성분을 중(中)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음양중(陰陽中)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음양중이라는 형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어떤 형상이 떠올라서 이렇게 나타내 보는 것이다.


(삼태극의 모양을 스켄으로 그려서 삽입)


위의 그림에서 보면 음과 양이 있는 영역의 사이에 어떤 성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성분은 중용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데, 음과 양이 서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중간에 있는 형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음양의 대립되는 구조로만 살펴본다면 전혀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게 된다.
움직이는 성분은 음양이고 움직이지 않는 성분은 중간이라고 생각된다. 보통의 안목으로는 움직이는 것만 살피게 되지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을 살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마음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삼매(三昧)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비로소 움직이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실체륾 드러낼 것이라고 추리를 해본다. 그러니까 이렇게 쉬임없이 흐르고 있는 마음으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러한 결론을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달리 더 명확한 방법을 찾을 방법을 모르겠다.
비록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하려면 도인의 경지에서 삼매에 몰두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상상만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은 알겠으나, 상상을 하는 것조차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영역은 아마도 명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영원한 숙제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어떤 설명을 할 수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바로 인식한다면 비로소 음양의 대립되는 경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좀더 확대해석을 한다면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대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선이나 악이라는 굴레, 혹은 천당과 지옥이라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지를 역학에서는 중화(中和)라고 할 수가 있겠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 혹은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 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도 이 영역에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상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것이고, 이때에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윤회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 하기가 불가능 할것이라는 생각만을 해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만 음양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정도로써 어찌 생각해보면 남의 다를 긁고 있는지도 모르는 중간(中間)에 대한 말씀을 줄인다.
3. 음양의 순환법칙


음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돌고 도는 것을 일러서 음양이라고 한다.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듯이, 달이 차서는 기울고 하는 순환을 되풀이 하듯이, 또 1년의 사계절이 항상 규칙적으로 순환을 하듯이 그렇게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형상●◕󰁋◔◯
상황純陰陰中之陽陰陽中和陽中之陰純陽
오행水金土木火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음양의 비율을 그림으로 나타내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가운데의 음양균형을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그렇지만 사람의 사주에는 그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대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사주이고 또 그에 부합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삼라만상이 모두 이렇게 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정진(精進)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 형상을 본다면 그 이면에는 보이는 것과는 반대가 되는 어떤 형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즉 순양(純陽)의 형태가 겉으로 보인다면 그 이면에는 순음의 성분이 잠자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순양에는 순양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 󰁋


이 그림이 음양이 이상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이 그림을 태극(太極)이라고 부른다. 음과 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태극이라고 부르지, 만약에 음양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아무도 태극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태극은 그래서 매우 신성한 음양의 균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기에서 이렇게 심오한 도형인 태극을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일설에는 음양오행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한반도의 고대사로 접어들게 된다는 글을 읽어보면서 아마도 원래의 태극 사상을 찾아낸 인간도 바로 우리 동이족이라서 그 주인의 자손들이 국기에다가 음양의 상징을 넣어서 사용한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면서도 정작 태극의 국민들은 음양의 참 이치를 모르고 그냥 주역에서 쓰는 팔괘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나보다 하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다.


陰極卽陽生 陽極卽陰生
음극적양생 양극즉음생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양의 기운이 생기고
양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음의 기운이 생긴다.


이러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음양의 순환법칙을 음미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생긴다는 말은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도 된다. 웃음이 너무가 벅차오르면 눈물이 생기는 경우를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겪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인생살이를 통해서 옛어르신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공부라고 본다.
주역에서 표시하는 64괘는 항상 나쁘기만한 괘도 없고, 항상 좋기만 한 괘도 없다고 한다. 오늘 나쁜 의미의 괘상은 내일은 또 좋은 괘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면서 근신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좋은 괘는 내일도 좋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한 방면의 극에 달한 기운은 기울 준비를 한다는 말씀이다. 차면 기우는 법칙은 균형을 이루는 음양의 법칙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공자도 만년에 역경(易經)의 심오한 이치에 젖어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옛 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공을 이룬 후에는 물러갈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법칙이랄지 조화랄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항상 자신의 일을 한 후에는 조용히 물러가고 다음의 타자에게 일을 전해주는 모습이 느껴지는군요. 음양의 이치도 바로 이와 같은데, 그렇게 서로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아마도 자연이라는 말에 어울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자신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서 과욕을 부리고 있을 적에는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1) 음양의 비율


陰과 陽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서로를 돕는다. 이것이 자연(自然)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을 본다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즉 견제를 하는데에도 정도문제가 있는 것이다. 100%의 견제도 있을 것이고, 약간의 겁을 주는 정도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서 그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점을 알기쉽게 표시하는 것이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오행(五行)이라는 것이다. 다섯가지의 원소가 서로 대립과 견제를 하는 기본형인데, 그 상황이란 좀더 설명을 한다면 표와 같다.


음양의 비율五行명칭(名稱)
陰體음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水(陰中之陰)
陽體음의 기운에서 양의 기운으로木(陽中之陰)
陽體양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火(陽中之陽)
中間양과 음의 기운이 균형을 이룸土(陰陽中和)
陰體양의 기운에서 음의 기운으로金(陰中之陽)



이러한 음양의 각기 다른 상황을 오행이라는 말로 설명을 하게 되는데, 그 각각의 비율차이에 띠라서 실제적으로 분명한 차이도 있게 된다. 그 각기 다른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단계로 五行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말은 음양오행에 대한 공부를 하면 사주팔자를 잘 알수 있다는 말도 된다는 뜻이다. 사실 음양의 비율을 잘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 명리학이다. 그래서 음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양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저울질이라고도 하는데, 저울질을 잘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하듯이 음양비율의 정도를 잘 분석하는 학자가 깊이 들여다보고 멀리 내다본다.
표를 봐서 알 수 있듯이 양이 극에 달한 것은 불(화(火)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이 극에 달한 모양을 물(水)라고 한다. 또 양중에서도 음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나무(木)라고 하며, 음 중에서도 양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쇠(金)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주역에서 말하는 사상(四象)이론과도 원칙적으로 부합된다. 사상에서는 괘상의 형태로 나타내는데 표로 만들면 이렇게 생겼다.


四象의 卦象陰陽比率五行分類
太陽󰁍純陽之氣火
少陰󰁎陽中之陰木
少陽󰁏陰中之陽金
太陰󰁐純陰之氣水



여기서 보자면 太陽은 火와 같다고 보겠고, 少陰은 이름은 음이라고 하는 말이 뒤에 있어서 음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글자 그대로 ‘음의 기운이 적음’이라는 뜻인바 그 본체는 양이면서 음의 기운이 적게나마 들어있는 木과 같다고 보겠다. 또 少陽도 같은 이유에서 본체가 음인데 양의 기운이 조금 서린 뜻이니 金과 같다고 하겠으며, 太陰은 글자 그대로 水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게 오행으로 대입을 시켜보면 목화금수의 형태와 흡사하다. 그런데 사상에서는 토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동무 이재마(東武 李濟馬) 님의 사상론이 어쩌면 토에 대한 이론이 빠진 관계로 해서 완성이 되지 못한 것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의사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상의학이 획기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토의 성분이 없이 사상이라는 것만 이용해서는 인간의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염려가 앞서는 것은 오행가의 지나친 염려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팔상론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화금수의 대립을 서로 조절해주는 조절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흙(土)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五行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개성이 없으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 토의 성분이다.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것은 목화금수가 모두 음양의 형태에 따른 기호라는 점이다. 그러고보면 기본은 역시 음양이라는 법칙이라고 하겠다.
기본 구조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들을 인간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대입하게 되는 사주공부를 하다보면 그렇게 만만한 구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필히 들기 마련이다.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사연들은 정말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려고 마음을 낸 초학자(初學者)에게는 대단히 혼란한 이론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하나하나 배워나가다 보면 능히 이해를 하게 되겠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얼른 신통방통한 예언을 해서 족집게도사가 되고 싶다는 허망한(!) 욕심을 갖고 있는 초학자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2) 음양의 변형(變形)


이미 앞의 설명에서 오행(五行)이라는 용어가 등장을 했다. 이 오행이라는 부호는 엄밀히 말한다면 음양의 형상을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음양의 각기 다른 모습을 고정시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음양이라는 것만을 갖고서 그러한 다양한 변화된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그러한 구조를 어떤 부호로 표시해서 간단하게 인식을 하도록 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부호가 바로 오행인 것이다. 남자를 양이라고 하고, 여자를 음이라고 했던 비유를 다시 여기에 끌어온다면,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원래의 음양이라는 형상으로 설명을 할 적에는 남자와 여자를 대표적으로 음양이라는 말로 표시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점차 다양한 형태의 음양이 발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이라고 하는 남자 중에서도 크게 봐서는 모두 양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의 분위기를 갖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한 사람은 남자라고는 하면서도 어딘지 남자 답지 않은 모습에서 또 한번의 분류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류의 남자들에게는 ‘여자같은 남자’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여성다움이 외곡되면서 나중에는 여자이면서도 남자보다도 더욱 억센 형상을 한 여자가 등장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람은 단순히 여자라고 하는 말로만 묶어두기에는 상당히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묶어서 ‘남자같은 여자’라는 말로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분류를 하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볼적에 남자같은 여자의 부류는 겉모습은 여자지만 실제로는 남자의 성격이라고 봐야 할 상황이었다. 또 여자같은 남자도 마찬가지로 겉모습은 남자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나같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류를 하다가 보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부류가 있어야만이 ‘음양의 중간’에 해당하는 성분을 나타낼텐데, 그러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구태어 있다고 한다면 형상에 구애받지 않고, 그 마음이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화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하면 말이 될것도 같다. 아니면 성인(聖人)의 무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세간의 모든 욕망을 떠난 자유인은 성별에 의해서 자신의 욕망이 발동하지 않으므로 구태어 여자니 남자니 하는 말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 봐서 음도 양도 아닌 사람이기도 하고, 또 음이기도 양이기도 한 사람도 되는 사람은 음양이 중간인 성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던 이렇게 해서 기본적인 혼돈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음양이 되었고, 그 음양은 또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더욱 복잡한 형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신 유토피아


두 사람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남자라던지 여자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그냥 즐겁고 천진스럽게 동산을 뛰어놀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한가지의 근원에서 태어난 각기 다른 성분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분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배고프면 과일을 따먹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시고는 다시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그야말로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절은 음양이 구분되기 이전의 혼돈의 시절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이뤄지고 가고자 생각하면 그대로 도달하는 자유로움이 존재하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 두 남녀는 보고 듣는 것이 확장됨에 따라서 분별심이 발생했다. 즉 음식을 먹는데에도 더 맛이 있는 것과 덜 맛이 있는 것을 구분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결정적으로 일러준 것은 한 마리의 여우였다. 이 여우는 두 사람이 노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여보시게, 저쪽으로 가면 아주 맛있는 사과가 있는데, 그 사과를 먹어보라구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몰라.”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그 사과를 먹으면서 여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우는 맛이 있는 것을 얻는 방법과 맛이 없는 것을 가려내는 요령도 일러주었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매우 강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렇게 구분을 해보았고, 또 재미가 있었다. 재미가 있자, 스스로 그렇게 재미있는 일꺼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그 일꺼리 중에서는 서로의 몸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몸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역시 여우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알음알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분별심을 일으킨다는 것이고 분별심은 다시 말하면 음양(陰陽)이라는 구별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말하는 원래의 맑은 불성이 세월을 거치면서 분별심에 의해서 선악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서 취사(取捨)심이 발생하였으니 그 후로는 사람들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보겠다.


그렇게 분별을 하고 나서는 서로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더욱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의 개념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여우가 일러준대로 하다 보니까 자식도 생기게 되고, 사냥도 더욱 많이 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대단히 많은 기준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언제 밤이 되고, 언제 눈이 오는지도 표시를 해 두었다가 활용을 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고, 그 기준에 따라서 크게 다섯가지의 기준을 세웠던 것이다. 그 다섯가지는 바로 음양이 오행으로 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와 같이 원래의 낙원이라는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서 주변에 흐르는 사물에다가 눈을 맞춰놓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은 것 중에서도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나쁜 것 중에서도 좀더 나쁜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다섯가지의 기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행이라고 하는 것이고, 불교로 따진다면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데, 눈으로 봐서 사물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서는 그 자료는 머릿속에 저장이 되는 것을 말한다.


비유가 다소 유치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음양과 오행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마음으로 간단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오행이라는 것도 별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음양이 서로 만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성분들도 또한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각기 자신의 독립된 개체로써의 인격을 주장하게 됨으로 인해서 나중에는 오행이라는 별개의 형태로 대우를 해 주는 것이라고 보자는 생각이다.
이제 음양에서 오행이 발생하게 되는 연유를 설명 드렸으니까 다음단계인 오행의 장으로 넘어가야 할 때가 된듯하다. 그러면 좀더 오행이라고 하는 구조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第三部




오행론(五行論)








음양의 확장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론인 五行을 각기 나눠서 이해를 해본다. 다섯가지의 원소로 설명을 할 수 있는 오행론은 정신적(精神的)인 형상과 물질적(物質的)인 형상을 모두 포함한다. 아울러서 지구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도 五行이라는 다섯가지의 바탕으로 설명을 하려고 연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광대무변한 세계를 단지 다섯가지라는 오행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 좀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나하나 연구하다 보면 그 다섯가지의 바탕으로만 설명을 하는데도 무궁무진한 진리(眞理)의 세계를 관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이 공부에 발을 들인 사람은 냉큼 벗어나지를 못하고 푸욱 빠져들게 되는 요인이 되는가보다.
그렇다면 오행이란 어떠한 구조로 이뤄져있나?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오행의 기본은 간단하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다섯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기본적인 것으로 인간사의 모든 일들의 기초가 되는 사상들을 대입시키게 되는데 의외로 다양한 상황에 의아해 하기도 한다. 과연 어떻한 분류가 가능한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그럼 오행의 기본적이라고 할만 한것에 대한 설명을 해본다.


이 오행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형상이 있는 것을 인용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으로 보고 그렇게 설명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설명을 한다고 해서 오행이 물질이라고만 고정관념이 되어버린다면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이야기이다. 기초적인 공부는 형상적인 오행을 빌어서 설명하겠지만 결국 이러한 설명 뒤에는 반드시 물질을 포함해서 정신적인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오행의 대입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처음에 木이라는 성분을 나무라고 이야기 했더니, 나중에는 金이라는 성분이 도끼라고 고집을 하면서 불이 탈려면 나무만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얄궂은 이론을 전개한다. 그래서 도끼를 구해와야 나무를 뽀개서 불을 붙인다는 정말로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오행을 이해하고 있는 학자들을 만날적에 참으로 씁쓰레한 기분이 든다. 물론 궁통보감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이론(庚金擊甲論)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초학자를 위해서는 몰라도 세련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分類 五行木火土金水
基本形나무불흙바위,쇠물
五行性曲直炎上稼穡從革潤下
十干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
十二支寅卯巳午辰戌丑未申酉亥子
相生木生火火生土土生金金生水水生木
相剋木剋土火剋金土剋水金剋木水剋火
五色靑赤黃白黑
五常仁禮信義智
一年春夏四季秋冬
方向東南中央西北
身體신경계순환계근육계뼈조직계혈액계
五臟肝心臟,心包脾臟肺腎臟
六腑膽小腸,三焦胃大腸膀胱
얼굴눈시력입코귀
입 속맛보기혓바닥입술치아침
혀 위신 맛쓴 맛단 맛매운 맛짠 맛
마음천진난만분노,격정인정,평화실기,의리음모,술수
직업교직자연예인공무원군인,경찰도둑,사기
인생소년기청년기중년기장년기노년기
지역강원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함경도
세계극동적도 부근중국 등지유럽,미국소련
자동차가속기동력기변속기정지기윤활유
엑셀레트엔진기어브레이크오일
비율陽中之陰陽中之陽陰陽中和陰中之陽陰中之陰
발음ㄱㅋㄴㄷㄹㅌㅇㅎㅅㅈㅊㅁㅂㅍ
先天數1, 62, 73, 84, 95, 10
後天數1, 23, 45, 67, 89, 10
五氣風熱濕燥寒
五竅目舌口鼻耳
五惡肝惡風心惡熱脾惡濕肺惡寒腎惡燥
五養酸養骨苦養氣甘養肉辛養筋鹹養脈
氣體酸素窒素??炭素水素



이러한 여러가지의 형상으로 오행을 이해하도록 연구를 해본다. 통찰력이 깊어질수록 사물을 오행으로 분류하는데는 더욱 쉬워진다고 하겠다. 이 오행의 원리는 외운다고 할 경우에는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한계를 느낄 것이다. 그냥 이해를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공부를 하는 데는 암기력과 이해력이 있다는데, 여기서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빨리 앞서가게 된다. 암기력도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암기력보다는 이해력이 앞서기 때문이다. 조용히 오행삼매(五行三昧)에 들어서 오행의 원리를 하나하나 되씹어보다가 오행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멋진 소식도 접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다.


이미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굳어진 오행의 영역으로 접근을 했으니까 이제는 각기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 연구를 해서 이해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오행의 항목을 다 이해하게 될 즈음이 되면 다시 또 이 다섯가지의 오행이 음양으로 분화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그래서 ‘오행의 음양’이 되는 것인데, 그 결과로 열가지의 구조로 확산이 되는 것이다. 이 열가지는 이른바 십간(十干)이라는 형태로 설명이 다시 전개되는데 이렇게 마냥 늘어가기만 하면 언제 끝이 날 것인가를 염려하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이 십간의 영역에서 이해를 마치게 된다면 더 이상의 확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물론 냉정하고도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는 것도 첨가한다.
그러면 이러한 구조를 생각하면서 다음의 표를 참고하자. 오행의 이치로 어디까지 분화를 해 나갈 것인지를 정리해보는 과정으로 생각을 해도 좋겠다.


근본바탕1차 분화2차 분화3차 분화4차 분화
命理渾沌陰陽五行十干사주팔자
周易無極음양四象八卦64괘
佛敎佛性분별심五蘊12인연법육도윤회
人生탄생먹고싸고내것분별사리판단늙어간다



이렇게 간단한 도표로써 나타내 보았는데, 여기서 보듯이 3차로 분화하는 십간의 형상을 바탕으로 해서 삼라만상의 구조를 읽어내게 되는 것이 명리학이라고 본다. 주역에서는 8괘를 의지해서 64괘라는 결론을 얻어내고 그로써 역시 자연의 모습을 읽어내게 되는 것이며, 불가에서는 인과응보를 의지해서 육도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또 아울러서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그렇게 사리판단을 하면서 늙어간다는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분류는 했지만, 이것이 오행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한 것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대략 비슷하리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십간의 구조까지만 속을 썩이면서 궁리를 한다면 그 이후에 전개되는 것은 특별히 색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근본이 되는 오행의 구조에 대해서는 더욱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문을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 그 오행의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본래의 특수한 구조를 설명드린다.
1. 木






나무 목이다. 나무라고 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 한글자를 음미하면서 오행의 20%를 알게되는 것이다.
우선 보기에 가장 변화가 분명하다. 나무의 종류를 보면서 목을 이해한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모두 다는 아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기에 용이한 성분이기도 한 까닭이다. 목은 그 본성이 仁이라는 것으로 꾸며져 있다. 그래서 목의 성분이 강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질다고 한다. 그러나 목이 지나치면 불인(不仁)이 되는 것은 같은 木의 陰陽에 불과하다.


혼돈→양→양중의 음→다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갑을(甲乙)
陽(甲) : 소나무, 은행나무, 대들보, 추진력, 벋어나가는 기운,
陰(乙) : 잔디, 곡식, 잡초, 넝쿨식물, 지구력, 적응성


이러한 기본적인 성분을 갖고 있는 목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린 시절을 나타낸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어려서는 환경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뜻이 여실하다. 그런데 과연 나무라는 구조를 볼적에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낀다. 바위주변에 떨어진 도토리와 기름진 토양에 떨어진 도토리는 그 성장하는 환경에서 얻는 차이점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木이라는 것이 완전히 나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계에서 가장 목을 닮은 것은 나무라고 하는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자평진전(子平眞詮)에서는 양목을 일러서 목의 기운(氣運)이라고 하고, 음목을 일러서는 목의 질(質)이라고 표현했다. 음양을 기와 질로써 구분한듯 한데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본다. 음양이 원칙적으로는 물질과 기운으로 분별을 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구분을 시도하는 것은 음과 양을 어떻게하면 좀더 가까이서 이해를 해볼것인가 하는 생각이 된다.
목은 기본이 발산하는 성분이다. 그 성분이 주변에서는 식물성(植物性)에 가장 많은가 보다. 식물은 자란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볼적에 木이라고 하는 것은 이점이 특별하다고 본다. 이렇게 성장하는 성분은 사람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어린 사람에게 많아고 봐서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을 청춘기(靑春期)라고 한다. 청춘에서는 木이라는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다. 푸를 청은 목의 색깔을 의미한다. 봄 춘도 목의 계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의 木인 청년기에는 항상 미래를 생각하고 기분에 좌우되고 꿈이 많고 육체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하고 있다. 사소한 억압에도 견디기 힘들어하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하는 힘도 부족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木을 닮았다. 그래서 이러한 주변을 보면서 목을 이해하는 것이다.
목은 인내심이 부족한 반면에 순수하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할적에 참가해보면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함이 배어있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순수한 것도 또한 목이라고 한다.
그리고 목은 또 욕심이 많다. 청년들은 뭔가 자신의 목적달성이 이뤄질거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래선지 몰라도 항상 일에 집착을 한다. 그러한 점은 일단은 바람직하지만 역시 적당한 것이 보기에도 좋다. 뭐던지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또한 좌절을 하기도 하는 청춘은 아무래도 좀 덜자란듯 하다. 목의 기본성분이 희망(希望)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의 양은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앞으로만 나가려고 하는 것은 용수철과도 같은 의미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미래에만 관심이 있다. 과거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미래에만 마음이 가는 것은 목의 시기라서 그렇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몇 살 더 먹으면 학교에 가느냐?
몇 밤 더 자면 생일이 되느냐?
항상 이와같은 질문을 입에 달고 있다. 이것도 역시 목의 성분으로 이해를 한다. 목은 언제나 이와 같이 희망을 포함한다. 희망과 욕심이 비례한다는 것도 재미있다. 욕심이 없으면 목숨을 달아놓고 일을 추진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젊음이란 그렇게 한가지 일을 향해서 돌진을 할 적에는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다.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면 이미 木의 성분을 벗어났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사회가 부패했다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앞만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패를 한 이유라던지 사람이 살아가는 여러가지 이유 등을 생각하다 보면, 모든 부조리도 이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조리가 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허구헌날 길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면서 시위에 가담을 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사회가 공평해지지 않으면 굶어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일을 삼아서 떠들고 다니던 친구도 군대를 다녀 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아직 철이 덜 들었군.’하면서 혀를 찬다. 정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목의 기운이 어느듯 火의 기운으로 변해서일까?


(1) 목의 본질(本質)


목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는데,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목에 연결된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우선 목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에 대해서 살펴볼적에, 온갖 모양은 다르지만 각기 그 내부에 흐르는 어떤 느낌이랄지... 그런 것에서 일관된 목이라고 할수 있는 성분의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구조에 대해서 가능한 상세하게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목의 이모저모
분류설 명
형상 나무처럼 생겼다.
나무나무에서는 성장부분인 잎눈이 특히 목의 성분이다.
도형직선이나 곡선이다. 그래서 곡직(曲直)이라는 말을 한다.
수리선천수로는 3과 8이고, 후천수로는 1과 2이다.
음양양의 체이면서 음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인생유년시절을 나타낸다. 성장기이다.
인체신경조직이 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
장기간장(肝臟)과 담(膽)을 목의 배열에 넣는다.
기관시신경의 분야는 목의 기운이 발산되는 영역이다.
방위동서남북에서는 동방(東方)을 나타낸다.
색채삼원색에서는 청색(靑色)을 목의 상징으로 취한다.
계절일년의 사계절로는 봄에 해당한다.
심리학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은 성격이다.
지구
세계지도로 논할 적에는 동북아시아 특히 극동이 해당하고, 한국과 일본이 가장 강하게 목의 성분이다.
한반도한국에서는 강원도를 목기운이 많은 동네로 본다.
자동차스포츠카의 고속위주는 목에 해당한다.
차구조엑세레이터는 앞으로만 나가는 목과 공통적이다.
음성‘ㄱ’ 과 ‘ㅋ’이 목의 소리에 해당한다.
컴퓨터입력장치인 키보드나 마우스 또는 스케너가 해당한다.
s/w저장성보다는 앞으로 진행하는 성분으로 게임종류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주변 사물에서 목에 연관된 것을 찾아본다. 이 분류법에는 목의 특성을 갖고서 찾게 되는데, 어느 물질이던지 그 물질이 독립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중에서는 틀림없이 목에 해당하는 원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면밀하게 살피다 보면 그럴싸~ 한 장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20가지로 종류를 나열해서 목에 해당하는 성분을 찾아 봤듯이, 이제 또 여기에다가 추가로 자신의 종사하는 일에서도 얼마든지 목에 해당하는 구조를 찾아서 넣을 수가 있을 것으로 본다.
이 명리의 공부는 이렇게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하고서는 스스로 또 다른 유형을 찾아서 자꾸 확대해석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뭔가를 얻게 되고 그래서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까 주어진 자료만 갖고서 대입을 시키고 스스로 궁리를 하는 것이 없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 머물러서 더 이상은 발전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궁리하는 마음이 소위 말하는 ‘대가(大家)’라고 하는 대열에 가장 빠른 시간에 진입을 하게 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과연 목의 본질은 무엇일까? 가장 뚜렸한 성분이라고 한다면 처음의 시작에 해당한다는 점과,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향해서 나아간다는 집중감도 포함한다. 그러니까 폭탄이 사방으로 튀는 것과는 다르게 한 방향으로 뻗어가는 불꽃놀이의 폭죽을 연상해본다. 나무도 뭔가 자신의 목적한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성분이 강한 것이지 아무렇게나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벋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산되는 성분이면서도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화(火)의 구조와 비교해서 본다면, 아직은 덜 성숙한 양(陽)이기 때문이라고 하겠는데, 빛이 산지사방으로 발산되는 것과 비교하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성분이 가장 목의 특징다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성장하는 구조가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다섯가지의 오행 중에서 목처럼 생사의 경지를 들락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오행도 없다고 하겠다. 특이하게도 삶이라는 형태를 말할 수가 있는 형태인 목은 다른 네가지에 비교해서 분명한 특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강 이러한 정도로 목의 특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


(2) 목의 마음


목의 형상에 대해서는 설명을 드렸는데, 이번에는 목에 해당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한다면 목의 마음은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으로 대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앞을 향해서 나간다. 그 모델은 20세 이전의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어린아이들이 항상 앞만을 쳐다보고서 가는데, 전후좌우를 살피는 기능은 아예 없다고 본다. 그래서 길을 건널 경우에도 길 저편에 어머니가 있으면 옆에서 차가 오거나 말거나 그냥 내달리는 경우가 있어서 도로사고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보고를 본 기억이난다. 물론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지만, 그 본성은 좌우를 살피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이런 마음이 바로 목의 마음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보면서도 목의 마음을 감지해본다. 나무는 어디에 있던지 위로 자란다. 장마비에 지반이 무너져서 나무가 옆으로 쓰러지게 되면 그냥 그 방향대로 옆으로 자라는게 아니라, 다시 그 위치에서 위로 새순을 만들어서 90도의 각도를 유지한채 그냥 위로 자란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는 ‘위로’라는 말로 해야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다. 복잡한 것을 추리하고 연구하는데에는 선천적으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단순한 일에서 탁월한 진취력을 발휘한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시작을 잘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일을 잘 벌린다. 벌리는 것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마무리가 신통하지 못하다고도 본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재미있어서 놀다가는 갑자기 싫증이 나버리면 언제 그렇게 열심히 놀았냐는 듯이 놀던 기구들을 내팽개쳐버리고는 금새 또 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반도는 지구에서 볼적에 목의 방향에 속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작을 잘 하는 민족이라는 이름을 갖을 수도 있겠는데, 무슨 일이던지 시작은 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을 하는데, 또한 반대로 마무리는 신통치가 못한 경우를 너무나 허다하게 접한다. 스포츠경기에서도 이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가 된다. 특히 축구경기장에서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항상 마무리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 마무리를 강화시킨다고 한 것이 20년도 넘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직도 잘 안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과연 우리 한반도는 마무리에 부족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상품을 봐도 짐작이 간다. 처음에는 멋지고 그럴싸 한 제품이 나온다. 그래서 좋다고 생각하고 무심결에 사용을 하다보면 어느듯 그 상품은 왜곡되기 시작해서 불순물이 삽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완전히 불량품에 가까운 제품으로 둔갑을 하게 되는 것도 또한 한반도의 토양에 의한 영향이라고 하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 될 것 같다만, 어쩌겠는가? 또한 이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담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국산담배는 피워주고 싶어도 짜증이 나고 얄미워서 사주기가 싫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처음에는 맛이 그런데로 피울만 한데 언제부턴가는 서서히 맛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급기야 “이거 담배맛이 왜이래?” 소리가 나오게 되면 머지 않아서 담배값이 인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맛을 보면서 담배값의 움직임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반면에 수입담배는 한번 그 담배의 맛을 들여놓으면 언제라도 항시 그 맛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전매청에서 하는 행동거지가 얄미워서 국산담배를 피우기가 싫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낭월이도 생각해 볼적에, 국산담배를 피운다고해서 특별히 세금에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고, 피울 때마다 불쾌한 기분이 든다면 담배를 피우면서 스트레스르 받는 것이 결코 건강에 좋을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간단하고, 그렇다면 내돈내고 내가 즐기는데 기분조차 나빠가면서 국산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권유를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상투적인 수법이 애국심에 호소를 하는 것인데, 이것도 옛날의 이야기이지 요즘처럼 개방이 되어가는 시대에는 참으로 영양가 없는 잠꼬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을 하는 사람들이 딱하게도 생각되고, 또 한편 역학을 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목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은 잘하고 마무리는 잘 못하는 특성으로 인한 것이겠거니... 하면서 포기를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결국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목의 특성이라는 결론을 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아닌 결론인 듯 하다.
목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서 참으로 한국이라는 특성을 잘 대변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동글동글한 지구에서도 동서남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한반도가 동쪽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만도 아니다. 서양의 사람들도 한반도를 동방으로 보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뭔가 땅의 움직임에서 동서라는 기준이 애시당초에 마련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2. 火






불은 밝음으로서 그 본성을 삼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처리한다. 이를 일러서 예(禮)라고 한다. 그러나 또한 무례하기도 한 것이니, 지나치게 불이 많으면 예도 또한 무례하게 된다고 한다. 즉 지나친 사양은 결례라는 말과도 통한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예와 무례는 같은 종이의 양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혼돈→양→양중의 양→다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병정(丙丁)
陽(丙) : 태양, 폭발력, 난폭, 투쟁적, 예의, 선명함,
陰(丁) : 달, 문명(文明), 학자, 희생, 봉사, 헌신,


불은 언제나 인간의 문명과 함께 해왔다.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래로 다른 동물들과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文化라는 것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적에 인간에게 있어서 불은 꽃이라고도 할만 하다. 우선 불은 그 본성이 밝음이라고 하는데, 사람에게도 가장 사리에 밝은 시절이 있다. 즉 청년(靑年)의 인생을 말한다. 대략 나이로 치면 25세 이후라고 보면 될듯하다. 初年의 少年기에는 모든 일이 어설프고 풋내가 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이 30을 전후하면 이때는 천방지축이 뭔지는 이해한다. 그리고 뭔가 밝은 생각으로 인생을 설계하게 되는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으로 일을 대하기 보다는 보다 사리분별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서 일생동안 업으로 삼을 일을 냉정하게 구하기도 한다. 이 火의 나이가 되어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감정적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일러서 ‘철이 덜든 사람’ 이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누구나 그 나이에 어울리는 생각과 행동이 있는 모양이다. 너무 어린 녀석이 사리에 밝으면 애늙은이라고 해서 징그럽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불의 기운이 발생해야 할 나이에 또 천방지축을 못 면하면 역시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 나이에는 가정을 꾸미고 자식을 얻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애아범이라던지 어어미라는 말에 어울리게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명체에게 없는 오행을 골골루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오행을 골고루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음양오행으로 비추어서 길흉을 판단할 수가 있다고 한다. 다른 동물들은 이렇게 오행을 고르게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운명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난으로라도 집에서 강아지가 태어난 시간을 잡아서 사주풀이에 응용을 해봐도 전혀 맞을 리가 없다고 한다. 사주라는 학문은 오행의 기운을 고르게 받고 태어난 인간에게만 적용해야 한다는 이론을 많은 명리학자분들이 말씀하셨다.


불은 정열이라고 말한다. 정열은 인생의 꽃이다. 그래서 정열은 사랑과도 맞먹는다. 사실 20세 이전에 그렇게 몰려다니면서 시위를하던 친구들도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 이제는 사랑을 찾아다닌다. 사랑을 애인에게 고백할 적에는 뭐라고 말을 하는가? ‘불타는 사랑을 그대에게’라고 말을 해야 뭔가 분위기가 잡힌다. ‘물같은 내 사랑을 그대에게 준다.’고 한다면 이게 무슨 맥주 김빠지는 소린가? 할 것이다.
불과 사랑은 뗄래야 뗄 수가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 장미 꽃은 사랑을 닮았지 결코 죽음을 연상하기 어렵다. 장미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제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모양새가 있는가보다. 이 사랑과 장미꽃은 인생이 불의 시기를 맞이 했을 때에 생기는 일이다.


(1) 화의 본질


불이 폭발하는 성분이라고 볼적에 이것은 가장 화의 구조를 잘 대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가하게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분주하게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성분이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화의 특성이 양중지양(陽中之陽)으로써 극양(極陽)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양은 구석구석에 빛을 전달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다양한 사물의 구조를 통해서 관찰해 봄으로써 이해를 돕도록 하자.
화의 이모저모
분류설 명
형상 불처럼 생겼다.
나무나무에서는 꽃눈이 특히 목의 성분이다.
도형불규칙한 직선이다. 그래서 염상(炎上)이라는 말을 한다.
수리선천수로는 2와 7이고, 후천수로는 3과 4이다.
음양체와 용이 모두 양으로 순양(純陽) 또는 극양(極陽)이다.
인생청년시절을 나타낸다. 결혼기이다.
인체순환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불과 흡사하게 생겼다.
장기심장(心臟)과 소장(小腸)을 화의 배열에 넣는다.
기관안광(眼光) 즉 시력은 화기운이 발산되는 영역이다.
방위동서남북에서는 남방(南方)을 나타낸다.
색채삼원색에서는 적색(赤色)을 화의 상징으로 취한다.
계절일년의 사계절로는 여름에 해당한다.
심리선악을 분별하고, 시비를 가리려고 하는 성격이다.
지구
세계지도로 논할 적에는 적도부근, 인도 등을 생각하고, 인종으로는 흑인을 상징이다.
한반도한국에서는 경상도를 화기운이 많은 동네로 본다.
자동차놀러 다니는 레져용 차량, 관광차량은 화의 성분이다.
차구조
전기부분인 받데리와 연계하는 장치들은 불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라이트장치 등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음성‘ㄴ’ ‘ㄷ’ ‘ㄹ’ ‘ㅌ’는 화의 소리에 해당한다.
컴퓨터보여주는 기능인데, 그 중에서도 모니터가 해당한다.
s/w
계산을 하고 보여주는 형태의 정확성을 요하는 것이다. 즉 스프레드시트 종류인 엑셀이나, 로터스123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종류로써 불에 해한 본질을 이해하도록 한다. 형상별로는 목의 시작하는 분위기가 좀더 진행된 형태라고 보겠다. 목이라는 것이 마음을 음양으로 본다고 하면, 아직은 양이 덜된 구조로 짜여져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목의 마음은 불에 있는 것이지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목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 속에는 불로 나아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봐도 좋겠다.


(2) 불의 마음


이번에는 불의 마음을 헤어려본다. 애초에 불의 마음은 정열적인 청춘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특히 밝음이라고 하는 마음을 빼 놓을 수가 없다고 본다. 불은 그 자체가 빛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을 불이라고 보는 것도, 바로 그 자체가 밝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에 속하는 마음도 침침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것을 말하게 된다. 옳으면 옳고 나쁘면 나쁜 것이다. 불에게 있어서는 아리송한 답변은 없다고 봐도 좋다. 언제나 명확하게 구분을 해야만이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선생님의 성분에서 불의 구조로 되어있다면 그 반의 학생들은 모두 피곤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항상 상과 벌이 분명하기 때문에 달리 토를 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유가 없어 보이는 점도 포함된다.
지금의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가장 현실성이 높은 성분이라고 본다. 목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과 비교한다면 불의 마음은 ‘현재충실형’이라고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판단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인생으로 생각해 본다면, 청춘은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건다고 하는 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오늘을 마셔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서 춤을 추는 것도 청춘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내일 일을 하기 위해서는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도 불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오늘 저녁의 이 파티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서 신나게 밤을 새워서 놀기만 하면 되는 것도 청춘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목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내일을 위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이 밤에 더 강하듯이, 청춘도 밤에 더 강하다. 낮에는 이런저런 허울에 신경이 쓰여서 마음대로 즐기지 못한다고 한다면, 밤에는 그야말로 완전하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얻어서 아무 구애를 받지 않고서 젊음을 불태울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성분이 젊은이들에게 모두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율적으로 볼적에 화의 성분이 많은 시기이니만큼 충동적인 성분이 많고 그래서 또한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구조라고 볼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젊은사람이 ‘만약’이라는 사슬에 매여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남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는 ‘애늙은이’라는 말도 들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실수는 많다고 하더라도 또한 젊었기에 오히려 실수조차도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실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발전을 하기도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항상 조심만 하는 사람의 소심한 마음으로는 뭔가 모험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정신이 결려된다고 본다. 그래서 젊은이는 불의 기운이 펄펄 넘치는게 아름답고, 늙은이는 사려가 깊은 것이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비록 실수를 할 망정 젊은 불은 그렇게 펄펄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서 우쭐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마음이 불의 참마음이라고 생각된다.
3. 土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고, 그래서 흙을 인간의 완전한 고향이라고 하겠다. 토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으니 믿음과도 상응한다. 믿음이란 신용(信用)과도 같은 말이다. 흙은 또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성분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토의 기운이 지나치다면, 자칫 고독하고 페쇄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혼돈→변화하지 않음→음양중립→오행의 항목에서 구체적인 물상(物象)을 얻어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무기(戊己)
陽(戊) : 지리산, 메마른 고원, 고독, 신의,
陰(己) : 문전옥답, 비습(卑濕), 저장성, 사랑,


토는 음도 양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기본 구조가 信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력한만큼 되도려 준다는 말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정직한 토를 보면서 믿음이라는 기본성분을 이해해본다. 목의 산만함고 화의 일직선적인 집중력과 비교한다면 토는 상당히 여유가 생긴 형태라고 하겠다.
음양에서 사상(四象)으로 나뉠 적에는 토라는 개념이 빠졌다. 당연히 토가 있었을 것인데도 빠진 이유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개성이 없다보니까 제외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다섯가지의 기본구조 중에서 土만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없다. 그만큼 토를 이해한다면 이미 고수의 대열에 낀 것이라고 할만도 하다.
하건충(何建忠) 선생은 四象에서 토가 추가되는 이유를 원래 혼돈(전체)이라고 했던 성분이 그대로 하강(下降)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은 혼돈에서 음양으로 분리가 되었을 적에도 이미 원래의 혼돈성분은 토화(土化)되어서 음양의 사이에 자리를 틀고 앉은 것이다. 이것을 中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음양에서는 완전히 빠져버렸던 것이다. ‘陰陽中’으로 태극이 나타나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삼태극(三太極) 뿐이다. 세계의 어디를 봐도 삼태극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이 좁은 한반도에서만 삼대원소인 삼태극의 표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장차 한반도에서 지구를 통솔할 기미가 보인다는 최근 선지자들의 에언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선조대대로 음양이라는 사이에 중간에 해당하는 성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민족이라면 장차 세계통일의 주역이 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土라는 구조로 되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그냥 뒤에 가려져 있다가 五行으로 분화되면서 비로소 스스로 등장을 하는 것이 토의 성분이다. 그리고 토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잘 보이지 않아서 인식하기가 어려웠는데 여기에서 土라고 하는 성분으로 개별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 성분에 대해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피라밋이라는 물건이 자연의 신비한 기운을 모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분야에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서 지금은 피라밋의 기를 이용하는 기구들이 상당부분 외국에서 호황을 누리면서 팔려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피라밋은 면이 4면이다. 서로 대립을 이루면서 모여져 있으면서 결국은 맨 끝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있다. 그러려니까 어쩔 수없이 삼각형으로 생겼나보다. 그런데 이것을 五行이라고 하는 구조로써 설명을 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본다.
네가지의 면은 四行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다. 사행이라는 것은 木火金水를 말한다. 이들은 서로 대립이 되는 형태의 구조로 되어있다. 金木이 서로 대립되고, 水火가 역시 서로 대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대립을 통일시키거나 견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土라는 一行이다. 이 토가 없다면 영원한 대립만이 존재한다.
그러면 피라밋에는 오행 중에서 土에 해당하는 성분이 없는 것일까 하고 궁리를 해봤다. 그런데 피라밋의 내부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우주의 기운이 한자리에 모여서 대단한 파워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워는 바로 四行이 모여서 한 덩어리가 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궁리를 해본 결과 바로 이렇게 사면에서 들어온 기운을 한덩어리로 응축하는 성분이 土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五行論에서도 서로의 특별한 기운이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별 특색이 없는 土라는 것이 어우러지게 하고 조절하는 중화(中和)의 성분이라고 한다. 이로본다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할 것만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피라밋에서도 토의 작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토라는 성분은 이렇게 겉으로 봐서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참으로 신비한 물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토의 성분을 구석구석 이해한다면 당연히 ‘오행도사’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너무 토에 대한 예찬만 늘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토에도 당연히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음양의 이론에 걸맞기 때문이다. 단점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폐쇄성이 아닐까 싶다. 토라는 것은 푸욱 파뭍혀서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생동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처럼 촛점이 뚜렷한 것도 아니므로 옆에서 보는 사람은 항상 답답한 마음이 든다.
누가 시위행열에 가담하기를 권한다면 토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네요. 그렇지만 이렇게 나서서 강제적으로 밀고 간다고 해서 일이 다 되는것도 아니구먼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서 서로 타협을 해보는게 어떨까요?’ 라고 말하기가 싶상이다. 그러므로 성질급한 木이 볼적에는 정말로 한대 후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답답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힘없는 백성을 괄시하고 착취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렇지만 토는 전혀 묵묵부답이다. 참 답답한 인사다.


(1) 토의 본질


토의 본질은 어느 것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오행에서 토를 제외한 다른 네가지의 성분들은 서로 대립을 하지만, 토가 있음으로해서 서로 화평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자평진전에서는 토는 충기(沖氣)로써 발생했다고 하는데, 충기라는 것은 금목(金木)과 수화(水火)가 서로 대립을 하는 과정에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발생한 기운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성분들은 모두 토라고 하는 과정과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서로 창조의 성분이 활용되는 관계를 갖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에서의 변속기인 기어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면서 가속이 되면 기어를 변속해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가 없다. 1단에서 2단으로 변속을 하고, 또 2단에서 3단으로 변속을 해나가면서 가속을 시키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순서를 무시하고서 1단에서 단번에 5단으로 변속을 한다면 자량에는 상당히 무리가 갈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렇게 변속을 하더라도 일단 기어는 필요한 것이다. 기어가 없이 그냥 1단만으로 주행을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재의 자동차 구조임이 분명하다.
혹은 노기어라는 말을 하는 오토밋션을 떠올리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토라고 하는 것도, 그 내부에서는 엄연히 기어가 작동을 하고 있다. 다만 손으로 변속하는 것을 기계장치가 자동으로 해주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자동차를 비유로 해서 생각을 해봤지만, 토의 자신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없어서는 않되는 형태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일러서 토의 본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지지(地支)의 배열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중에 지지에 대한 항목에서 언급을 하겠지만, 참고삼아 말씀을 드린다면 진술축미(辰戌丑未)라고 하는 네 개의 지지는 모두 토로써 각기 계절의 끝에 붙어 있으면서 서로의 오행을 연결시켜주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중간에는 진토(辰土)라는 성분이 변속을 하고 있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서는 미토(未土)라는 성분이 기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술토(戌土)의 작용을 거쳐야 하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데에는 축토(丑土)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이 토의 본질이라고 보겠는데, 다시 표를 통해서 토에 해당하는 성분이라고 생각되는 각각의 기능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토의 이모저모
분류설 명
형상 흙처럼 생겼다.
나무나무에서는 결실부분인 열매의 과육(果肉) 성분이다.
도형동그라미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수리선천수로는 5와 10이고, 후천수로는 5와 6이다.
음양음과 양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조절을 하고있다.
인생중년시절을 나타낸다. 완숙기이다.
인체소화조직이 토와 연결되어 설명된다.
장기비장(脾臟)과 위(胃)를 토의 배열에 넣는다.
기관입은 토의 성분이 발산되는 영역이다.
방위동서남북에서는 중앙(中央)을 나타낸다.
색채삼원색에서는 황색(黃色)을 토의 상징으로 취한다.
계절일년의 사계절 로는 환절기에 해당한다.
심리학완숙한 성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성격이다.
지구
세계지도로 논할 적에는 중앙부위에 해당하며 특히 중국을 토의 성분이 강한 것으로 본다.
한반도한국에서는 충청도를 토기운이 많은 동네로 본다.
자동차대중교통인 버스는 토의 구조에 어울린다.
차구조기아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조절하는 토와 공통적이다.
음성‘ㅇ’ 과 ‘ㅎ’이 토의 소리에 해당한다.
컴퓨터
메모리에 해당하는 램인데, 편견없이 어떠한 프로그램이던지 사용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중용의 개념이다.
s/w
수없이 많은 종류의 자료를 보관하고 활용하는 데이터베이스 종류이다.



몇가지의 형상을 통해서 토에 대한 이해를 도와보려고 만들어 본 표이다. 물론 더러는 엉성한 의미가 있겠지만, 그 바닥에 흐르는 것에서 취상(取象)하였다는 것을 참조해서 음미해 주시기 바란다. 이것은 각각의 오행에 대한 표에 대해서 모두 공통된 말씀이다.


이 정도로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으니 대략 토라고 하는 성분에 대해서 이해를 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요령을 말씀드린다면, 낭월이의 글은 머리로 외우려고 하지말고 가슴으로 느껴보시기를 권한다. 그 바닥에 흐르는 기운을 읽으시는 것이 훨씬 이해를 도울 것이다. 스파르타식으로 열심히 외우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활용성이 떨어지는 단점도 부인을 할 수가 없다. 외우기 보다는 이해를 함으로써 무한히 넓은 활용성을 얻게 되는 장점이,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면에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2) 토의 마음


이번에는 정신적인 면에서 토를 살펴보도록 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실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뒤범벅이 되어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정신적인 면을 고려해서 설명을 드려본다. 토의 본질에서는 대체로 형상적인 면에서 토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데, 토의 정신에는 어떠한 것이 흐르고 있을까?
우선 인생살이로 견주어서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시기를 인생으로 따진다면 아마도 40대 중반이 아닐까 싶다. 대략 40대가 되면 사람의 개성이 서서히 없어진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인 특성 보다는 환경적인 직장의 영향과 가정적인 영향이 서로 어울어져서 형성된 中和(?)적인 분위기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라고 생각이 된다.
木火의 시기에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계획만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면 이때에는 이제 뭔가 생의 과거(過去)를 돌이켜보는 나이가 될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뭘 이뤄놓았는지 조용히 음미하는 나이가 바로 40대의 중반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될일과 불가능한 일을 판단하고 다시 재정비를 하는 심사숙고하는 인생이라고 본다.
이때에 자칫 삐끗하면 인생의 설계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시기를 경과한 사람은 뭔가 생각이 깊은 사람의 냄새가 풍긴다. 그래서 생각컨데 30전에 죽는 사람들은 토와 같은 중후한 맛을 못느끼게 될거라고 생각된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사십지천명(四十知天命)’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이야기가 된다. 그 이전에는 뭔가 시행착오도 해보면서 뭔가 새로운 도전도 해보면서 그렇게 활발하게 실험적인 인생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무슨 업을 타고 났는지 깊이 생각해보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느 것이 타고난 천명(天命)에 순응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나이···· 이것이 바로 土로써 설명을 해보는 中年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중년은 청년과 노년의 교체시기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펄펄 날뛰면서 용기백배하는 젊은과, 뭔가 생각이 깊은 50대의 이후에 느끼는 모습의 중간역할인 40대에는 분명히 뭔가 생각을 할 점이 많을 것 같다. 자신만을 생각하던 시절에서 세상은 혼자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비로소 전개되는 것이다. 이럴 즈음에는 생각도 매우 복잡해진다. 단순한 직선형에서 산만한 분산형으로... 이번에는 다시 융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원(圓)의 형태로 변환되는 과정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동안 배우고 느꼈던 모든 자료들이 이 시기에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정리하는 과졍이라고 보겠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파악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 일과 불가능한 일도 알게 되는 시기에 해당하니까, 공자님도 40에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일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만 되면 전혀 흔들리지 않고서 자신의 길을 갈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사람이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일을 찾지 못했을 때이다. 자신의 몫에 대해서만 분명하게 파악을 했다면 흔들릴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4. 金




가장 강건한 성분이다. 그리고 의리(義理)를 가장 중히 여기는 성분이기도 하다. 뜻이 통하는 벗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운세가 불량할 적에는 자칫 침체가 잘 되는 단점도 있다.


혼돈→음→음중의 양→다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경신(庚辛)
陽(庚) : 바위, 강인함, 인내, 살기, 천진함,
陰(辛) : 보석, 냉혹, 피를 두려워하지 않음, 표현욕구,


금은 금속이 대표적인 물질이다. 그리고 바위와 같은 원석이 양의 금에 해당하고, 가공이 되었다고 보는 순도가 높은 금속은 음의 금이라고 통상 이해를 한다. 그러면 금은 과연 무엇일까? 木을 극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봐서 바위라고 하면서도 살기(殺氣)를 띄고 있는 기운이라고 하기도 한다.
적천수(滴天髓)에서는 금을 일러서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했다. 즉 생명을 죽이는 힘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있다. 가을을 일러서 금왕지절(金旺之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금의 기운이 강하니까 가을에 모든 산천의 초목이 시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金에다가 ‘살기(殺氣)’라는 살벌한 기운을 집어 넣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인생살이에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필요없는 이치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전제할 적에 금의 기운은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금의 맛은 맵다고 한다. 매운 맛이라는 것에서 드는 느낌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꼭 매운 맛을 봐야 알겠어?” 라는 말 속에는 뭔가 상당히 협박적인 분위기가 서려있어보인다. 그것이 바로 金氣의 숙살지기라고 하는 금성분인 것이다. 그러니까 시집살이의 고달픔에 대해서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고추당추 맵다한들 시집살이보다 더 매울까” 하는 말 말이다. 이렇게 매운 맛은 맛의 오행 중에서 금의 맛이다. 가령 목의 맛은 신맛인데, “시집살이가 세콤하다”라는 말을 한다면 어느 누구도 고생한다고 말을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집살이가 맵싸~하다”라고 해야 ‘흠.. 좀 힘이 드는 모양이구먼...’하는 느낌이 든다.


(1) 금의 본질


금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적에는 금속(金屬)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는 광물질(鑛物質)도 생각해봐야한다. 금속이 광물질에 포함이 되기 때문이다. 금속 또는 광물질은 고열(高熱)을 받을수록 단단해진다. 옛날 무림시절(武林時節)에는 칼이나 창이나 철추나 도끼 등등 무기를 생각해 볼적에 모두 철(鐵)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당시에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무기에도 매우 열성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무기 중에서도 좀더 단단한 철로 만든 무기를 원했고, 그 결과로 어느 산에서 나는 철로 만든 칼이 명검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그러면 그 철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또 그렇게 구해서 만들어진 철은 천번의 단금질을 통해서 더욱 강한 쇠로 변해간다. 그렇게 불속과 물속을 드나들면서 단련이 된 쇠는 드디어 강력한 보검(寶劍)이 되고, 이 칼은 수많은 무림에서 쟁탈의 표적이 되었다. 단지 한자루의 검(劍)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스러져간다.
무공의 차이가 난다면 무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대등한 무공이라고 한다면 무기는 대단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무술이 높으면 높을수록 검에 대한 간절한 욕망도 배가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쇠는 단단할수록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아니 구태어 소설적인 명검에 대한 이야기만도 아니다. 한옥집을 지으려면 당연히 주춧돌이 필요한데, 여기서도 단단할수록 좋은 주춧돌이된다. 명색이 돌이라고 한다면 아무렴 기둥보다야 덜 단단하겠는가만, 그래도 주춧돌이라고 한다면 가장 단단한 돌이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면에서 금에 해당하는 성분은 단단해야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고, 그 단단함은 매우 높은 고열을 견디고 나온 다음에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금에 대한 형상은 일일이 열거를 할 수가 없는 고로 역시 표를 이용해서 간결하게 정리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금의 이모저모
분류설 명
형상 금속이나 바위처럼 생겼다.
나무나무에서는 목질의 견고한 부분이 금의 성분이다.
도형모나고 울퉁불퉁한 모양을 같고 있다.
수리선천수로는 4와 9이고, 후천수로는 7과 8이다.
음양음의 체이면서 양의 성분을 담고있다.
인생장년시절을 나타낸다. 마무리 단계이다.
인체골조(骨組)가 금의 오행을 갖고 있다고 본다.
장기폐장(肺臟)과 대장(大腸)을 금에 넣는다.
기관코는 금의 기관이 외부와 연결되는 영역이다.
방위동서남북에서는 서방(西方)을 나타낸다.
색채삼원색에 없는 백색(白色)을 금의 상징으로 취한다.
계절일년의 사계절로는 가을에 해당한다.
심리학중후하고 무게있는 성격이다.
지구
세계지도로 논할 적에는 유럽을 나타내고, 특히 프랑스나 영국, 그리고 미국까지도 금에 속하는 성분이다.
한반도한국에서는 전라도를 금기운이 많은 동네로 본다.
자동차한가지 용도로 쓰이는 차량은 모두 금의 성분으로 본다.
차구조브레이크는 금의 기능으로 본다.
음성‘ㅅ’ ‘ㅈ’ ‘ㅊ’ 이 금의 소리에 해당한다.
컴퓨터롬바이오스와 시모스 등 각인(刻印)된 부분이 해당한다.
s/w고정되어 있는 형태로써 사전종류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금에 대한 것을 이해해본다. 일례로 자동차를 생각해본다면, 브레이크가 금에 해당한다고 보는데, 금극목(金剋木)하는 성분은 나중에 이해하게 되겠거니와, 목의 성분인 엑셀레이터를 강력하게 견제하는 기능인 브레이크, 이것은 완전히 일치를 하는 구조이다. 속도를 낼 수가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분명한데 만약에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다고 한다면 이 차량은 시속 10km도 달릴 수가 없을 것이 뻔하다. 물론 죽을 작정을 한다면 예외이겠지만 말이다.
강력한 제동장치가 있기 때문에 시속 160km로 달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금의 기능은 뭔가 달리는 속도를 멈추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분은 가을이라는 계절에서도 의연하게 살아있다. 아시다시피 가을에는 모든 생명체들이 성장을 멈추어 가는 계절이다. 산천초목이 그렇고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곰이나 개구리는 아예 땅굴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자연에서 생기(生氣)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내년 봄에 다시 생기가 발동하면 뛰어 나올 것을 기약하고서 조용하게 숨어버리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에서 금의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2) 금의 마음


역시 금의 마음도 인생에 견주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金의 기운이 인생으로 따지면 중년을 넘어서 초로(初老)라고 볼 수 있겠다. 나이로 치면 50대라고 보자. 이 때에는 뭔가 일생동안 벌여놓은 일에 대한 결실을 생각하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학자의 길을 걸어왔다면 학문으로써 인정을 받을 시기가 될것이고, 사업가로써 살아왔다면 재물을 상당부분 모았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가정적으로도 자녀가 이미 성장을 하고 머지 않아서 결혼을 시킬 준비도 할 것으로 봐서 분명히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시기라고 하겠다. 그러한 시기에 숙살지기인 金의 기운이 작용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숙살지기(肅殺之氣)는 사방으로 벋어나가는 가지에 대한 작용을 억제시키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이 오십에 무슨 일을 새롭게 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어진다. 특히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정년퇴직을 한 교사이다. 일생동안 교직에 종사하면서 사도(師道)의 길을 걸어온 선생님은 항상 재물에 대한 탐심을 통제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언제나 후학들이 바르게 스스로 목적을 갖고 살아가도록 일생동안 목이 따갑게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그 일이 나이에 밀려서 물러나게 되었고, 교육에 종사했다는 댓가로 얼마간의 퇴직금이 주어진다. 보통은 그렇게 일을 마치고서는 조용하게 시골의 전원생활에 젖어들어서 일생동안 연구하고 싶었던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책으로 저술하면서 보내게 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본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들은 갑자기 큰 돈이 손에 들어오자, 일생동안 넉넉하지 못한 박봉으로 가족들에게 항상 불편을 주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일생동안 교직자로써 인정을 받아왔던 것처럼 이제는 그 돈을 이용해서 재물로 인한 욕구를 채워보고 싶어진다. 안전하게만 굴린다면 아마도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생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서 사업가에게 의뢰를 한다. 역시 돈은 돈의 전문가에게 묻는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업가는 또 일생을 교단에서 고지식하게 바른 길로 살아가는 것만 이야기하던 선생님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사업조언을 해주면 참으로 철이 든 사업가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업가는 돈의 냄새만 맡으면 죽었다가도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선생님에게 돈을 두배 세배 열배로 뻥튀기 할 수 있는 방법을 입에 거품을 물고서 설명을 한다.
물론 사업가의 안목으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가가 볼 적에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선생님 망하도록 조언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말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면서 사업가의 가르침에 따라서 돈을 투자하게 된다. 여기서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마는 것이다. 그 사업가는 거래처에서 돈을 주지 않으면 얼음장도 놓고, 정 안되면 집달리를 시키던지 고소라도 하는것이 사업이라고 생각하겠는데, 이 선생님은 그렇게 어려움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자신의 생각대로 인과의 법칙대로 하나하나 풀려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사업가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로 금새 돈방석에 올라 앉을 것만 같은 것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사업가는 돈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두배가 되고 세배고 된다는 점에 훤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순리로만 흘러서 돈이 모일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업가는 처음으로 돈을 벌어보려고 나선 신출래기 사업후배에게 불길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져 가장 잘 될수 있는 조언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업가의 청사진만 믿고서 일생동안 받은 퇴직금을 모두 집어 넣고는 일을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뭔가 될듯 하더니만 한가지 두가지 서서히 막히기 시작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다시 사업가를 찾아가서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다. 그러면 사업가는 당연히 돈을 주지 않는 거래처에는 강력하게 나가야 그 놈들이 돈을 준다고 방법을 일러준다. 그리고서 그 사업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한다면 성공을 할 확율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업가는 그렇게 할 수가 있어도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퇴직금으로 시작한 사업은 보나마나 실패작으로 끝날 확율이 90% 이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생각해 보건데, 선생님으로 일생을 보낸 학자는 늙으막에 사업을 벌이는 것은 금의 시기라는 하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숙살지기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종자를 뿌리는 봄에나 계획을 새웠어야 할 일을 늙으막의 인생의 가을에 시작을 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은 냉정하다. 인정도 사정도 없다. 자신이 인생의 결실을 생각할 나이가 되면 결실만을 생각하고 마무리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한 살림살이이다. 다시 새롭게 일을 꾸미는 것은 전혀 자연의 이치를 모르고 언제나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철이 들든 사람들이 스스로 실수를 저질러 놓고는 결국 하늘만 원망하겠지만 하늘이 무슨 인정이 있겠는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보면 그러한 말이 나온다. ‘神은 인간을 제사 지낼때 쓰는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대한다. 사람이 제사를 지낼 적에는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잘 모시고 있다가, 제사를 끝내고서는 길바닥에 버린다. 신도 필요할 적에는 인간을 사용을 하고는 필요가 없으면 그렇게 버린다. 신은 자비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대할 뿐이다.
이렇게 자연의 섭리를 알고보면 나이 50에는 금의 기운을 받고 있는 인생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마도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이웃에게나 좋은 일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있어서의 금은 인생에 있어서는 이러한 법문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五行 중에서 金에 해당하는 영역에서 깊이 생각해볼 분야라고 본다.
5. 水




만물을 적셔주는 물은 항상 움직이기를 좋아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니, 머물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기 때문에 얼핏보면 꿍꿍이가 많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음모가 많은 사람이나 사기꾼 등의 오해도 받는다.


혼돈→음→음중의 음→다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임계(壬癸)
陽(壬) : 바다, 호수, 강, 도량이 넓음, 지혜로움,
陰(癸) : 샘물, 옹달샘, 생수, 유동적, 궁리가 많음,


물은 지혜라고 했다. 지자요수(智者樂水)라고 하는 말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지혜도 흐르는 물처럼 항상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물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도 생각이 훨씬 많은것 같다. 이것도 어쩌면 물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을 해본다.
지구상에서 공기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존재했던 성분이 물이다. 공기에서 물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생명체는 물에서 나타났다고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물질 중에 하나라는 점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역시 지혜의 상징성으로 활용을 해도 될것으로 보인다. 즉 지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두고 연구하고 경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에야 얻어지는 삶의 경험, 그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적에 물의 오상(五常)이 지(智)라고 하는 것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낭월이의 사유방식은 주로 이런 식이다. 혹 이렇게 반문을 하실런지도 모르겠다.
“보쇼! 물이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이오... 원 씨알이 멕히는 말을 해야지.. 않그렇소?”
아마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는데, 낭월이의 생각은 또 다르다. 삼라만상의 일체유정무정물을 통털어서 모두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길가를 뒹구는 돌맹이나 허공중을 나르는 먼지알갱이, 그리고 못이나, 망치에도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라고 대든다면 달리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일체의 유형무형의 물질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고 하는 말에 동의를 하는 마음이다.


전에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난다. 그 책에서 저자는 바위의 자아발전형태를 재미있게 그림을 곁들여서 설명을 했던 장면이 있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바위가 처음에는 그냥 스스로 잠을 자는듯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와서 절을 하고 소원을 빌고, 자꾸 이것이 쌓이면 결국 그 바위는 일종의 신격(神格)내지는 인격(人格)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이론을 전개하는 이면에는 바위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생각이 움직이는 형태를 파장이라는 말로 바꿔서 하기는 했지만, 같은 의미로 해석이 된다.
그리고 물체가 견고하면 생각(또는 파장)도 미미하게 움직이고, 물체가 유연하면 생각도 유연하고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볼 수가 있겠다. 앞에서 나무와 불과 흙, 그리고 금에 대한 생각을 해 봤지만, 각기 생긴대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의 형상대로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고, 불은 또 그렇게 사방으로 활발하게 뻗어나가는 형태의 심성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 가장 활발한 성분이라고 하겠다. 또 바위는 견고한 주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삼을만한 장면인데 여기에서 보이는 물은 그 본성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물의 본질


물은 아래로만 흘러간다고 한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과연 물의 실상은 어떤가 생각을 해볼 일이다. 얼핏 보기에는 아래로만 흘러간다고 생각이 되지만, 실은 아래로 흘러가는게 아니라 응고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응고를 하는데 빈 곳이 있으니까 그곳을 채우려고 움직이는 것이 결국은 아래로만 흘러가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그러니까 물이 흐르는 것은 응고를 하려고 뭉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은 물이 응고하는 성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또 응고를 하는 성분이 종자(種子)를 만들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좀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는 까닭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물을 흐름을 지켜보고 있자니까 문득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응고하고 있는 와중일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것이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흔히 자유자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물의 구조에 연결을 시켜보면 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행의 구조 중에서 물처럼 유연한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건강할 적에는 유연한 것이 기본이다. 어린아이는 그 몸이 유연하기 때문에 높은데에서 떨어져도 여간해서는 잘 다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도 그냥 넘어졌을 때 보다는 술에 취해서 넘어졌을 때가 덜 다친다고 한다. 역시 술이 인간의 굳어진 몸을 유연하게 해 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끌어다 넣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경기도 신갈에 ‘이정운’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다. 이 분은 기술이 하나 있는데, 사람의 굳어진 몸을 주무르면 부드럽게 된다. 물론 병원에서 무슨 디스크라고 하건 말건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심지어는 간암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간 부위가 굳어 있으니까 유통이 되지 않는단다. 그러므로 만져서 부드럽게 해주면 건강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주무르다 보면 굳은 것이 부드럽게 되고, 결국은 치료라고 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는 모양이다.
“완전히 굳어지면 죽어버린 것이고, 만져봐서 아프다는 통증이 느껴지면 아직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냥 주물러 보는 거지요뭐 하하.”
이렇게 깔깔거리고 웃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게 되는데, 이 여성의 사주에서 태어난 날은 바로 물이었다. 낭월이도 선천적으로 굳어지기 쉬운 불건강체(不健康體)의 몸을 타고 났던지 한동안 건강이 불량해서 고생을 했는데, 이 선생을 만나서 몸이 유연해져서는 이렇게 명리학의 연구를 계속 잘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묘한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조그마한 나라지만 이렇게 구석구석에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서 자기 나름대로 중생구제의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비록 당당하게 의료면허증이 없어서 치료를 한다는 말은 못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치료든 건강요법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굳어있는 사람의 몸을 유연하게 풀어주면서 고통을 덜어주고 있으니 낭월이가 보기에는 틀림없는 ‘약손’이었다. 그런데 만져줄 적에 너무나 징그럽게 아픈 것은 참 불만이다.


여담이 길어졌나보다. 이렇게 유연한 것이 건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들어서 잡담을 했다. 그러고 보니까 죽은 사람은 몸이 굳어버린다는 간단한 진리를 읽어내게 된다. 그러니까 살아있더라도 몸이 부분적으로 굳어버린다면 점차로 죽어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유방을 만져봐서 뭔가 단단한 것이 집히면 암을 의심하라고 하는 자가진단법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이렇게 단단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물의 유연함이 자랑스럽게 떠오른다.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동그랗게, 길다란 병에 담으면 병모양으로 삽시간에 변하는 물의 유연함은 그 어떤 물질로도 대신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물에 소속된 형태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관찰을 해보도록 하자. 그동안 도표를 주욱 봐서 아시겠지만, 같은 제목으로 각기 오행의 특징적인 면을 관찰해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물의 이모저모
분류설 명
형상 물처럼 생겼다.
나무나무에서는 수분에 해당하는 것과 씨앗 성분이다.
기하학타원형의 모습으로 표하면서 불규칙한 형상이다.
수리학선천수로는 1과 6이고, 후천수로는 9와 10이다.
음양순음의 체로써 극음(極陰)에 해당한다.
인생노년시절을 나타내며 휴식기이다.
인체70%라는 인체의 수분이 수에 해당한다.
장기신장(腎臟)과 방광(膀胱)을 수의 장기에 넣는다.
기관귀는 수의 정기가 발산되는 영역이다.
방위동서남북에서는 북방(北方)을 나타낸다.
색채삼원색에서는 없는 흑색(黑色)을 수의 상징으로 취한다.
계절일년의 사계절로는 겨울에 해당한다.
심리학깊이 생각하는 현자의 성격이다.
지구
세계지도로 논할 적에는 러시아 부근이고, 알래스카도 수의 기운이 강한 성분이다.
한반도한국에서는 함경도를 수기운이 많은 동네로 본다.
자동차국가기관에서 사용하는 차량이 해당한다.
차구조냉각기관인 라디에터와 오일부분이 물과 공통적이다.
음성‘ㅁ’ ‘ㅂ’ ‘ㅍ’가 수의 소리에 해당한다.
컴퓨터최종 마무리단계인 프린터나 디스켓, 하드디스크이다.
s/w


운영체제인 윈도우즈, 도스, 또는 os/2, 유닉스 등이다. 이들은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지혜로움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들이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들도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물의 마음


다른 것들도 인생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봤으니 이번에도 한번 물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흔히 하는 말이 사람은 늙어봐야 안다고 했다. 젊어서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나이를 먹어보면 그 사람이 젊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우리 명리학도(命理學徒)는 이러한 말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본다. 무엇 하나라도 간과(看過)해서는 안되는 것이 학자인데, 하물며 인생의 운명을 연구하는 명리학자라면 이러한 말의 의미가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정도는 생각하고 파악해둬야 할 것이라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들기도 한다. 그럼 낭월이가 파악하고 있는 ‘늙어봐야 안다.’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리겠다.


노년(老年)의 시기를 오행에서는 물에 해당한다고 보자. 그리고서 물의 형태를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물의 형태는 삼체(三體)의 변신이 모두 가능하다는 간단한 이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삼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만 별 것은 아니고, 기체(氣體), 액체(液體), 고체(固體)의 삼체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가 별것도 아닌 것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것이 낭월이의 특징이니 도리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이렇게 평범하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속에서 의외로 깊이있는 말씀을 듣기도 하므로 가볍게 여길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인생의 늙음을 고체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액체처럼 유연하게 보낼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기체처럼 아예 승화되어 버릴 것인가?’


가) 기체(氣體)의 노년(老年)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을 할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기체처럼 살게 된다면 우리는 신선이라는 말로 불러야 할런지도 모른다. 신선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한다고 하는데, 우화등선이란 날개나 생겨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인가보다. 그렇지만 육신에 날개가 나기야 하랴 싶다. 다만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다는 말로 새겨들어본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일생을 얼마나 피나게 수련했는가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수행을 한 사람의 몫은 기체로 존재하는 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인에게는 꿈도 꾸지못할 영역이므로 접근불가한 대목일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체로 된 물(老年)은 세간에서 살면서도 아무런 속박이 없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다가 간다. 전혀 틀에 매이지도 않고 혈연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늙으막에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는 치욕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잔다.’는 서산대사의 말대로인 것이다. 과연 어떻게 늙어야 이렇게 될것인가... 나 자신도 늙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참으로 고민스러운 대목이라고 하겠다. 너무나 부럽지만 정진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가 없는 경지이기에 평생 게으름이 특기인 낭월이로써는 참으로 가능성이 없는 분야이다.


나) 고체(固體)의 노년(老年)


다음으로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고체를 생각해보자. 늙으면 모든 것이 굳어진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다. 손발도 예전 같지가 않고, 허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뿐이랴, 머리조차도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가 않는 것도 또한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늙어가는 모습의 공통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자식들은 세대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상대를 하지 않는다. 세대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해력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늙은이가 젊은 자식들의 생각을 따라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욱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괄시를 받아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자신의 영역만을 주장하면서 살아온 삶이라면 늙어서도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한 사람이 훨씬 상대하기가 좋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낀다. 도회지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상대를 해본 사람은 이해력이 상대적으로 넓다. 이기적인 듯 해도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남의 입장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도회지의 사람들이다.
반면에 시골에서만 살아온 사람은 어떤가? 흔히 말하기를 시골사람의 순박함을 이야기한다. 물론 사실이다. 도시의 찌들은 상황의 각박함은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해타산에 관계된 일로 의견대립이 되어보라 전혀 말이 들어가지를 않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서 깜짝 놀리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시골사람의 순박함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외골수로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한다. 전에 고물행상을 할 적에, 고물상 주인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골사람이 더 무섭다구, 물세를 내지않는 사람들하고는 싸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구, 이해력이 없어서 설명을 해봐야 몰라, 그러니까 웬만하면 그냥 피하라구 장사하러 다니려면 별별사람이 다 있으니까 말이야.”
하고 조언을 해줬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뭘 그러랴... 싶었는데,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좁은 공간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고력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하는 사람들도 항상 그동네의 그사람들 뿐인바에랴...
물론 시골에 살아도 교제의 폭이 넓은 사람은 예외겠지만, 보통 그렇게 농촌에서 늙은 사람의 사고력은 아무래도 굳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래서 환경도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실은 사주팔자의 형태로써 살펴봐도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격국은 도회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의 격국에 비해서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사주팔자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소위 말하는 ‘전문화의 시대’에 얻어진 부산물이라는 생각도 해보기는 하는데, 사람이 자신의 학교를 나와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만 일생을 일하다가 그 연구실에서 정년퇴직을 한 사람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많은 생각이야 하였겠지만, 그 ‘깊이’에 대해서는 탓을 할 것이 없겠으나, ‘넓이’에 대해서는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 뻔하다. 넓지않은 시야도 고정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일류의 권위를 자랑하지만, 연구실만 벗어나면 모두가 생소한 것들 뿐이라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 생소한 분야로 파고 들것인가? 아니면 도로 연구실로 들어가서 자신에게 익숙한 분야에 대해서나 연구를 할 것인가? 연구실로 도로 들어가버린 사람이라면 이 사람도 아마 고체의 노년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대열에 서야 할 것이다.


다) 액체(液體)의 노년(老年)


액체는 그래도 물의 본연의 모습은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화(氣化)까지는 바라지도 못하겠지만, 얼음덩어리는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몸도 마음도 유연한 노년이라면 그런대로 멋진 인생이라고 할만 하지 않으랴 싶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더불어서 공통의 화제로 한참을 이야기 나눌 수가 있는 여유로움은 물의 특성이다. 여기에서 장자(莊子)의 한토막을 말씀드리고 싶다.


천하의 성군이라는 요임금이 변방을 순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축수의 기원들 드렸다.
“성군이시어, 장수를 누리소서!”
“싫으네, 오래살면 욕된 일이 많아서 말이야.”
“그럼 임금이시어, 부유하소서!”
“그도 싫으네,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지걸랑.”
“임금이시어, 백자천손(百子千孫)하소서!”
“싫으네, 자식이 많으면 골치가 아퍼.”


그러자 국경을 지키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만나보니까 그저 군자(君子)정도밖에 않된다는 것을 알겠군요. 하늘은 만민에게 일거리를 주는 법이거늘 아들이 많은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재물이 많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줘버리면 편안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천하가 편안해져서 다스림이 없이도 잘 다스려 진다면 천년을 살은들 골치아플 일이 뭡니까?”


이렇게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 이야기가 장자의 어느 편에 있었는지는 기억력이 부실해서 잘 모르겠는데, 대략 이야기는 비슷할 것이다. 이야기를 보건데, 요임금도 굳어있었던 모양이다.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력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늙으막에 이렇게 성지기의 말대로 유연한 마음으로 살 수가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정도의 사고방식이라면 기체까지는 몰라도 액체로써는 충분하리라고 생각되어서 한말씀 드려봤다. 장자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내용들이 많아서 열심히 읽었던 책 중에 하나였는데, 그 중에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이야기이다. 벗님은 이렇게 세가지의 노년이 있으니 어느 노년을 맞이하게 될는지 조용히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무익하지많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멋진 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상(五常)에서의 지혜(智慧)가 늙은이에게 해당한다는 말과 일치한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늙은 쥐가 항아리를 뚫는다.’고 하겠는가? 하다못해 한 마리의 쥐도 늙으면 그 단단한 항아리를 구멍낼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는 말이니 하물며 인간이 되어서 이렇게 지혜가 없어서야 정말 어디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하겠는가? 아무래도 젊은 사람의 머트로운 삶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는 늙으막의 유유자적함은 늙어보지 못하고서는 맛보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옛 이야기 중에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고려장 시절에 어느 정승이 중국으로 부터 받은 어려운 퀴즈를 받고 고민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니까 고려장의 시기가 도래했는데도 차마 자식이 아버지를 매장할 수가 없어서 마루아래의 비밀방에서 숨어살으시던 노부(老父)께서 아주 간단하게 정답을 일러주셔서 위기를 모면하고는 왕에게 그 연유를 말씀드리고 결국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없애버린 기가막힌 노인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학교에서 한번쯤 듣고 지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모든 경험을 후학들에게 나눠줄 수가 있는 노년(老年)이 되고, 젊은 제자들이 헛된 길을 헤메는 시간낭비를 줄여주기도 하니 참으로 멋진 노인의 지혜이다. 그렇게 늙었다면 자연의 법리에 잘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마무리를 저녁노을의 장엄한 황혼처럼 물들이는 것이 五行에 있어서의 水에서 배울 공부라고 생각한다. 물은 응고(凝固)하는 성분이다. 그래서 늙은이는 뭔가를 마음에 뭉쳐둔다. 자신의 일생을 정리해서 마음에 묻어 둘수도 있고, 아들 며느리가 자신을 서운하게 했다는 것을 마음에 뭉쳐둘 수도 있다.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저장하는 것이 물이다. 노인네가 꽁하고 서운해 한다고 젊은 사람들은 섭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뭉쳐지는 것이 또한 노인이고 물의 본성이다.
물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인생의 마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五行論을 잘못 배운 것이라고 하겠다. 물이 도둑놈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이렇게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혜라는 것도 여기서 알아 둬야 할 중요한 물의 마음이다. 실제로 물은 쉬임없이 움직인다. 고요하다고 하는 아침바다도 기실은 잠시도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다. 어려서 안면도의 해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다의 구조를 대략 이해한다. 특히 갯펄만 보이다가도 어김없이 푸른 물로 채우는 바다의 조수는 언제나 신비한 대상이었다. 이렇게 쉬임없이 움직이는 물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지혜가 물을 닮았다는 옛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을 하게된다.
또 하나의 물은 다음의 세대로 연결이 되는 통과다리라는 점이다. 물이 응고를 한 자료를 모아서 다음의 세대를 위해서 저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뇌에 축적이 된다고 한다. 대뇌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변화된 뇌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구피질 신피질하면서 구조분석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초창기에 물에서 생명이 발생했을 적에 입력된 생활정보가 뇌에 보존되고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것 같은데, 그렇다고 본다면 이 뇌는 자료보관소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러한 맥락에서 뇌는 오행이 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법하다. 사실 머리 속에는 수없이 많은 신비한 구조가 후학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전생의 기억이 과연 뇌의 어느부분에 저장이 되어 있는지도 참으로 궁금하다.
불가에서 도를 닦아가는 과정에서 숙명통(宿命通)이라는 신통력이 발생하는 시기가 있다. 글자 그대로 과거의 운명을 모조리 알게 되는 신통력이 숙명통인데 이러한 신통력이 생기면 자신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이던지 그사람의 과거에 대해서 거울을 보듯이 훤하게 알아본다고 한다. 이 숙명통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의 이번 생에서의 과거뿐 아니라 전생과 또 전전생의 일생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알게되는 것은 어떤 귀신이 이 도인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의 전생을 일러주는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 속에서 과거의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뇌의 기능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이러한 저장창고의 문을 어떤 지혜의 열쇠로 열기만 한다면 자신의 과거 모든 생에 대한 보관자료를 읽어 볼수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의 보관창고를 여는 열쇠를 얻었다면 다른 사람의 보관창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열쇠로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여섯가지의 신통력 중에서 과거의 기억을 다시 읽어볼 수 있는 숙명통은 참으로 매력적인 능력이라고 하겠다. 요즘 서점가에서는 전생의 여행에 대한 흥미있는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한데, 이러한 것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전생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뇌의 기능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사용하다가 죽는다고 한다. 2%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소숫점 이하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활용성은 대개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정도에서 머무는것으로 생각된다. 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전생의 기억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고 본다. 전생에 한 일은 습관이 되어서 어쩐지 그일을 되풀이하면 오래전에부터 익숙하게 해왔던 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보관소가 바로 뇌라는 구조인데, 이 뇌라는 구조는 이번 생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미 이 뇌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전생의 모든 영상자료를 한부 복사해서 갖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날 전혀 이번 생에는 와본 적이 없는 장소에 도달 했을적에 그 공간이 아주 오래 전에 머물렀던 것같이 편안하고 익숙한 상황이 되어서 당황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행으로 치면 水의 기능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도 저장하는 기능에 포함된다고 생각이 된다.
이 수의 기능이 나무의 씨앗을 만들어서 보관을 하는데 그 응고력이 좋기 때문에 천년묵은 은행나무의 자료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뉴스를 통해서 보니까, 피라밋 속에서 씨앗을 얻어다가 심었는데 그 씨앗에서는 2천년 전의 토마토가 열렸다고 하는 보고를 보면서 과연 씨앗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물의 힘이라고도 느꼈으니 이렇게 구석구석에서 접하는 소식들에서 五行의 참 소식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6.오행의 활용(活用)




이렇게 오행에 대한 항목을 공부했는데, 이 오행이 학문적으로는 이렇게 대단한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기본자료라고 하는 것을 익히 공감하셨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것을 장차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우선 자기 자신이 기본적인 人生의 五行에서 어느 行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해당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주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객체만 알아보겠다고 하는 어거지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서 자연의 일부로써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상당히 안정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에 자신이 경영자의 입장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입장이라면 이 五行論은 더욱 확대되어 활용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는 기본적인 능력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이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맡기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木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초급사원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단히 활발한 창조력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약간의 산만함도 재산이라면 재산이다. 사실 나이가 든 직원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고 어서 집으로나 돌아가서 편안하게 쉬고 싶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목의 기운이 왕성한 젊은 사원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자신의 흥미있는 분야에서 뭔가 성과를 찾아내려고 애를 쓰게 되니까 이러한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순전히 운영자의 안목에 따른 이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火에 하당하는 나이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획단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목은 기획부에서 이리저리 활발한 궁리를 하는데 제격이지만 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뭔가 한가지 일에 집념을 하는 것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획을 마친 상태에서 일을 추진하는 단계로 접어든다면 이렇게 추진력이 산만하지 않은 연령의 사원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추진된 일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 단계로 접어든다면 이곳에서는 교통정리를 잘 하는 직원이 제격이다. 즉 土의 특성을 살려서 정리정돈을 잘 하고, 상벌(賞罰)에도 공정하게 처리해서 아무도 불만이 없는 허리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쯤 된다면 아마도 회사내에서도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40대라면 나름대로 그 일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을 나이라고 본다. 요즘 왕왕 40대의 돌연사라고 하는 이상한 말이 떠도는데 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 해본다. 그리고서 결론은 이렇다. 土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木에 해당하는 일을 시키니까, 제풀에 목의 극을 받아서 죽는 것이라고 말이다. 40은 참으로 어중간한 나이이다. 최첨단의 교육을 받고 올라오는 신입사원들과 구닥다리의 기술만 갖고 스스로 기술자라고 큰소리 빵빵 하는 간부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40대의 인생관은 갈피를 모잡고 흔들리게 된다.
그 나이에 새로운 일의 설계를 맡기면 목의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게 되니 젊은 사람이라면 신명이 나서 설칠 일을 미리부터 주눅이 들어서 시작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활발하게 진행이 되겠는가? 위에서는 아직도 궁리만 하고 있느냐고 족칠적에 이미 젊은 후배들은 계획서를 속속 갖다 올리니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러한 마음이 스스로 몸에다가 병을 만드는 것이다. 인과의 세계에서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일을 하면 틀림없이 몸의 어딘가에 그 찌꺼기가 남아서 독소를 만들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토에 해당하는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일을 주었을 적에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젊은 과장들이 요절을 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대단히 큰 문제이다. 더우기 회사로써는 그 손실이 막대함은 물론이다. 한참 일을 할 나이에 죽어버린다는 것은 사업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적에 정말로 엄청난 피해가 될 뿐이다.
이러한 피해자가 되는 것은 그 사람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일단 운영체계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럼 사람의 나이는 토에 해당하지만 회사의 운영상 그사람이 해야만 할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이것은 운명학적으로 답변을 해야 할 영역인듯 하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태어난 날이 바로 木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시키는 것이다. 비록 나이는 40대이지만 항상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벌리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적성이 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갑을일(甲乙日)에 출생한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렇게 1차적으로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2차적으로 고려를 해야 할 일이 있다.
특히 수백명이나 수천명의 대가족을 거느린 그룹의 인사담당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결국 회사를 위하는 일이고 개개인의 가정을 위하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이 사회가 보다 행복한 사회가 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저 겉으로 전망이 좋은 담당에는 자신에게 잘 보이는 사람을 맡기고, 출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에는 미운 털이 박힌 사람을 앉힌다면 필시 그 회사는 무너지고 말것이니, 생각해보라 이렇게 오행의 이치를 알아서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구성된 회사와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맡은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일하는 회사와의 분위기는 분명히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고보면 정작 인사담당 부서에는 土에 해당하는 사람이거나, 土의 날에 태어난 사람들이 일을 보는 것이 좋을듯 하다. 이 사람들은 항상 사적인 감정보다는 미리 타고난 중용(中庸)의 정신을 발휘해서 공익을 먼저 생각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중국에서도 그러한 고사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 라이벌이면서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의 아들을 개인적인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일을 맡긴 일은 너무도 아름답다.
다음으로 金의 나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떤 일의 결실에 해당하는 부서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략 잡아서 50대가 되겠다만, 이런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내어보라던지 새로운 컴퓨터교육을 받지 않으면 다음 승진에서 잘라버린다고 협박을 하는 일은 참으로 영양가 없는 운영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령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결실에 대한 안목이 있다고 본다. 이것을 높이 사지 않으면 재능을 제대로 활용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겠다. 그래서 항상 최고의 결실을 책임지는 자리에서는 이러한 예비 사장들이 맡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水에 해당하는 연령의 직원들은 元老급에 해당하는 자문기구에 종사하면 어떨까 싶다.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얻은 여러가지의 인생여정을 통해서 木火土金水의 모든 과정을 거쳐온 인생이니 정말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멋진 청사진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현실적인 운영에 도입해야 뿌리가 깊은 운영이 될것으로 본다.
흔히 참모라고 말하는 직책도 이 부근에 해당한다. 그래서 항상 깊이 궁리하고 지혜를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이렇게 원로원에서 전반적인 운영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줄것이다. 중국인민당의 대회를 할적에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그들의 사회주의 체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이기 지긋하게 드신 할아버지들이 단상에 주욱 앉아있는 것은 아무리 할인을 해서 보더라도 저력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이렇게 각자의 나이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운영이 곧 발전하는 회사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이가 같은 중에는 각기 타고난 五行의 기준에 따라서 다시 재배치하는 것이 한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라고 하겠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오행의 원리를 이렇게 응용하기에 따라서는 많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 한다.
第四部


생극론(生剋論)






기본적인 오행의 독립된 상태에서는 간단하지만,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는 또 별개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서로 좋아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혹은 서로 싫어하는 관계도 성립하게 된다. 이름하여 五行生克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생하고 극하는 관계를 음미하면서 사회라는 구조도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木火土金水
相生水가 생함木이 생함火가 생함土가 생함金이 생함
火를 생함土를 생함金을 생함水를 생함木을 생함
木生火火生土土生金金生水水生木
相剋金이 극함水가 극함木이 극함火가 극함土가 극함
土를 극함金을 극함水를 극함木을 극함火를 극함
木剋土火剋金土剋水金剋木水剋火



相生 : 관계에 있어서의 양(陽) - 가정의 분위기를 갖는다. 서로 보호하고 생해주는 의미인데, 대개는 좋은 의미를 나타낸다. 좋은 것이 좋다는 의미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생이 오히려 병이 되는 수도 있으므로 한가지로 집착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相剋 : 관계에 있어서의 음(陰) - 보통 상생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극을 싫어한다. 생의 반대개념으로 극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극도 묘약이 될 수가 있다. 비상을 잘 써야 명의가 될 수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이 극은 비상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음양론을 보게 된다. 생극(生剋)은 바로 관계에서의 음양이기 때문이다. 생은 긍정적인 관계를 의미하고, 극은 부정적인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 생극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므로 어느 한쪽은 좋다고 하고, 어느 한쪽은 싫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둬야 하겠다. 내자식만 이쁘다고 하는 어머니가 자식이 남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시달림을 받는 것이 싫어서 일평생 동안 치마속에다가 넣어놓고 기른다면, 그 자식은 장차 스스로 밥도 떠넣지 못하는 불구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사회에서 부딧쳐서 깨어지기도 해보고, 또 당해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능히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강인함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생(生)만을 좋아하고 극(剋)을 싫어한다고 하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위에서 말한 어머니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이 사회의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게 생겨먹었다.


달콤한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희망사항이 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행복한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진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안정된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터에서 쉬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한꺼번에 돈을 왕창 벌어놓으면 될 것이 아니가? 하는 꾀를 생각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왕창 떼돈을 벌기 위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궁리를 해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다. 물론 그 방법의 선악(善惡)은 생각하지 않겠다. 어떻게 하던지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기를 치던지, 강도를 하던지, 그 문제는 간섭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만 재물의 풍요가 행복에 상당한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느 벗님은 명리학은 윤리감이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도둑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운이 좋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물건을 훔칠 수가 있다는 말을 한다는 것에서 윤리감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는데, 윤리의 분야는 종교가 맡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우리 명리학이 윤리에 대한 것조차 언급을 한다면 이것이야 어디 학문이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전천후 종교가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학문이다. 학문이 그 이상의 월권을 한다면 자연히 혼란이 발생을 하게 된다. 학문은 학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영역은 또 다른 분야에서 담당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역으로 남겨주자는 것이 낭월이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학문에서는 길흉에 대해서만 논한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청탁이든 심리문제든 모두 언급을 하게 되겠지만, 크게 나눠서 본다면 길흉에 대해서 논한다고 해서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도둑놈의 길함과, 사업가나 교육가의 길함이 서로 원천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도둑도 도둑나름대로의 최선이 있기 때문에 그 최선에 대해서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에는 명리학적인 해석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도둑질은 나쁘므로 좋은 운이 와도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공자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명리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렇게 공자님의 잣대로써 조언을 한다고 하면, 참다운 카운셀러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가정에서 부인이 남편을 두고서 또 애인을 갖은 경우에도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경우에도 공자님의 답변을 해준다면 그 사람은 명리가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명리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오로지 운명적으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니 만큼 자신의 사주에 따른 답을 들려주는 것이 올바른 상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서 전개되는 음양이라고 본다. 음이 있고, 양이 있는 것이 사회의 현실인데, 그 모두를 다 인정하고 중립적인 마음으로 해석을 해야 올바른 명리가의 안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러한 말씀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회살이를 이끌어 가는데서 모두 필요한 구조들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들 자체의 선악은 생각할 것이 없이...
1.五行의 상생(相生)




五行은 각기 좋아하는 글자가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글자도 있다. 그러면 어느 오행을 얼마나 싫어하고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잘 이해한다면 앞에서 배운 오행의 이치를 좀더 깊이 궁리하는 실마리가 되리라고 본다. 그럼 먼저 相生이라는 것을 놓고서 한번 생각해보자. 상생이라는 것은 글자로 봐서는 서로 생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서로라는 것보다는 일방적인 生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크게 보면 결국 서로 생함이 되기는 한다. 그리고 더욱 깊어지면 이때에는 생이니 극이니 하는 구분조차도 모호해지게 된다. 서로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서 극이 생이 되기도 하고, 생이 극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가기 전에 먼저 기본적인 생에 대한 것과 극에 대한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해 둬야만이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1) 목이 화를 생한다(木生火)


날이 추우면 사람은 불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불을 생각했다면 자연발생적으로 나무를 찾아서 기웃거린다. 진리라는 것이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항상 주변에서 찾는 습관만 길들인다면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노래를 듣게 될것이다. 사람들은 나무 속에는 불이 숨어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목생화가 되는 간단한 이치이다.
너무 단순하다고 불평을 하시진 않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목생화를 살펴본다. 가령 사람으로 살펴본다면 청소년시절에 무럭무럭자라나면 자연발생적으로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 것은 목의 기운이 이미 가득 찼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다 자라고 나서는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니 이 사랑도 바로 불이라고 본다. 사랑의 불길이라는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것이 타당할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자연에서 살펴본다면 나무의 숲이 무성한 산속에서 가끔 산불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등산객들의 실화로 불이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간혹은 자체에서 불이 발생한다고 한다. 원인은 마른 나뭇가지가 서로 부비다가 불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옛적에 나뭇가지를 서로 비벼서 불을 얻어낸 것도 이러한 자연에서 불이 발생하는 원리를 보고서 응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볼적에 역시 목생화라는 이치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몇가지의 사례를 보고서 나무는 불을 만들고 그래서 목은 화를 생한다는 이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다.


가) 나무에서 꽃이 피니...


그리고 또 한가지의 불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그 불은 열기를 갖고 있는 불이 아니라, 열의(熱意)를 갖고 있는 불이다. 소위 말하는 꽃이라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보통 불이라고 하면 뜨거운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도 우리 명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좀 다르게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은 뜨거운 불과, 화사한 꽃을 별도로 구별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한다. 용어를 보면 ‘불꽃’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불과 꽃이 서로 다른데도 함께 묶어서 사용한 것을 보면 뭔가 암암리에 서로 통한다고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무가 불을 생한다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꽃을 피운다는 점이다. 어떤 나무던지 꽃이 없는 나무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생하는 것은 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 사목생화(死木生火) 생목생화(生木生花)


제목이 참 재미있다. 사목생화 생목생화라.. 생화라는 것은 똑 같으니 말이다. 이러한 기준을 잡아본다. 생목은 꽃을 생하고, 사목은 불을 생한다는 것이다. 어느 영화에선가 본 기억이 나는 대목이 있다.
귀신이 생화(生花)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조화를 신에게 바치게 되는데, 실수로 생화를 바치면 귀신이 대노한다는 형태의 이야기가 있었던 기억이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뭔가 의미가 있어보인다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끌어다가 넣으려고 그러는가? 하시겠지만, 어디를 가던지 써먹기 좋은 이야기들이니까 잘 음미를 해보기 바란다.
귀신은 음습한 성분이다. 그래서 낮에는 활동을 못하고 밤에만 활동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낮에는 불이 강한 시간이고, 불은 인간이 활동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밤은 물이 강한 시간이고, 물은 음기운이 강한 성분이며, 음기운이 강한 영혼들은 밤에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도 주로 밤에 당하게 되며, 낮에는 해방이 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연관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귀신은 음성(陰性)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음의 성분인 귀신은 양의 성분인 불을 싫어한다. 불 중에서도 불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는 담배의 진은 더욱 무서워하는 항목 중에서 제1위가 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불을 얼마나 싫어하면 불의 색깔인 붉은 색 조차도 쳐다보기를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귀신은 붉은 색은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당들의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한 차림새를 보면서 넌센스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그렇고, 불을 싫어하는 음계(陰界)의 귀신들은 살아있는 꽃인 생화(生花)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들을 섬기는 제단을 보면, 모두 죽은 꽃의 일색이다. 다만 정령들은 불에 대해서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생화를 바쳐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정령들은 음계와 인간계를 모두 다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死木生火요 生木生花라’ 하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서로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게 되는 것이며 그 근원을 생각하면 완전히 일치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각기 온도는 다르더라도 그 본질적인 것에서 생각을 할 꺼리를 찾으면 공부는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이 바로 목생화의 또다른 이치인 것이다.


(2) 화가 토를 생한다(火生土)


목의 원조로써 불이 생겨났다고 본다면 불은 또 토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순환의 원리가 있다. 화가 어떻게 토를 생할까? 일단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생각해본다. 나무를 의지해서 불이 타고나면 그 자리에는 재가 남는다. 그 재는 결국 기름진 흙으로 변하여 나무를 기를 수 있게 되니 이로써 불에서 흙이 생겨난다는 간단한 이치를 설명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사람에게 대입을 시켜보는 것이다. 젊은 남녀가 다 자란 후에 가슴에 불이 붙어서 사랑을 찾는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렇게 해서 사랑을 만나서는 토를 이룬다. 즉 토라는 것은 음양의 균형이라고 말했는데 남녀가 둘이 만나서 음양의 화합(和合)인 중용(中庸)을 이룬다고 하겠다. 남녀는 음양이 각기 놀다가 이제 결합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음양화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자연히 土라고 하는 중용성을 알 수 있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가) 꽃이 핀 후에는 열매를 보자


나무에서 꽃이 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개는 알고 있다. 꽃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능히 알 일이다. 꽃의 목적은 수정(受精)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열매를 키우는 일이다. 열매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나무의 목적은 씨앗일 것이다. 열매의 과육(果肉)은 씨앗을 멀리까지 운반해 달라는 심부름 값으로 지불될 것이고, 실제로는 자신의 유전인자를 포함하고 있는 열매 속의 씨앗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 작은 씨앗만을 만든다면 참으로 간단할텐데, 수고스럽게도 과일의 육질부분을 만드느라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심부름 값이라고는 했지만 그냥 순수하게 심부름 값만은 아니다. 가령 과일의 육질부분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씨앗 부근만을 키운다면 과연 잘 자랄 수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능히 알 일이다. 그리고 보면 씨앗은 또 육질부분에서 영양분을 흡수해서 씨앗을 키우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열매가 크고 충실해야 씨앗도 결실이 잘 되는가보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서 꽃이 지고난 다음에는 열매가 자라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본다. 그러니까 꽃이 진 후에 자라나는 것이므로 열매는 토라고 보고, 화생토(火生土)의 원리를 대입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적에 살아있는 나무에게서는 어떤 일관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죽은 나무는 불로 화한 다음에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자. 불이 과연 무엇을 만들어 내는것인지? 선뜻 감이 잡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는데, 역시 만만한 부분이 아니다. 그냥 단순히 재를 만든다는 것은 어쩐지 싱겁기 때문이다. 재를 만든다고 한다면, ‘LPG는 어떤가?’ 하고 물었을 적에 대답할 말이 여엉 궁하기 떄문이다. 재는 고사하고 먼지도 남지 않으니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 할텐데, 도무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으니 말이다.


(뭔가 적절한 말이 생각나면 추가한다.)




(3) 토가 금을 생한다(土生金)


토가 금을 생하는 이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암(泥岩)이나 퇴적암(堆積岩)을 보면 실감이 난다. 흙이 쌓여서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 금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이 암석을 보면서 이해를 한다. 이러한 암석들은 토가 변해서 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을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암(熔岩)이라는 것을 본다면 또한 다른 싸이클이 있는 것도 같다. 용암은 火生金하고 金生土하는 순환의 굴레를 갖고 있는듯 해서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해보면 용암은 땅 속에서 강력한 불기운에 녹아버린 바위이다. 그러니까 바위가 녹아서 불기운에 끌려 다니다가 인연이 맞아서 다시 불기운이 사라지고 본래의 금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용암은 불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보이지만 이마 오래전에 토가 만들어낸 바위를 火剋金의 이치로 극을 받았다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土生金의 이치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으로 치면 결혼(土)에서 중화를 이룬 두 남녀는 결실을 보게 되어있다. 자식이 생겨나는 것이 그것인데 만약에 가정을 이룬 후에 10년 세월이 흐르도록 자식이 없다면 아무래도 그 가정에서는 화목한 기운이 제대로 발생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자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것을 식물로 본다면 열매라고 하겠다. 열매는 바로 금의 특성인 결실(結實)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살이에서도 혼자사는 사람은 혼자 사는대로 결실이 있기 마련이고 결혼을 한 사람은 그대로의 토가 만들어낸(土生) 金이 있는 것이다.
요즘 여성들이 자식을 생산하는 대신으로 자신의 재능을 살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土生金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을 한 사람이 결혼만 하고서 자식은 짐이 되니까 낳지 않기로 하고 대신 활발한 창작능력을 발휘하는 경우에 하는 말이다.


(4) 금이 수를 생한다(金生水)


금이 수를 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한다. 바위에서 생수가 나오는데 이것이 금생수의 이치라고 말이다. 바위 중에서도 물맛이 좋은 암석은 화강암지대이다. 화강암이 바닥에 깔린 지역에서 나오는 물은 찌꺼기를 암석의 거친 입자가 걸러내 후에 맑은 물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 물을 먹어도 물 맛이 좋은데 물론 산업공해로 오염된 것은 빼고서 말이다. 이 물은 화강암반이 주축을 이루는 한반도의 특수한 지역에서 생성되는 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중국에서는 아무 물이나 먹다가는 큰일이 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중국사람들이 차를 그렇게 열심히 먹는 것도 알고보면 물이 나빠서 그냥 먹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차를 마시는거라는 슬픈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역시 한국의 물은 정말 복받은 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한국의 차도 맛이 좋을 밖에 더있겠느냐는 이치도 성립한다.
바위가 많은 나라에서 생성되는 물이 맛이 좋은 약수라는 것을 이렇게 한국의 물좋은 것으로 설명을 해보면서 金生水의 이치를 대입시켜보는 것이다.
인생적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해볼것인가.? 인생이 결실을 맺고나서는 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떠한 형상을 일러서 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물은 지혜라고 했으니 나이가 들면 지혜가 자라야 한다. 그럼 지혜라는 것은 지식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 지식은 외부에서 흡수해서 많이 아는 것이고 지혜는 내부에서 우러러나오는 깊이 아는 것이라고 정의를 해본다.
그래서 젊어서는 지식(知識)이 앞서고 늙어서는 지혜(智慧)가 앞서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물이 지혜를 나타낸다고 했으니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 늙어서도 지식만 주워모은다면 정말로 나이값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항상 바깥으로만 달리던 마음이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생각해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서 독특한 지혜가 발생하는 것인가보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金生水의 이치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젊어서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도 생겨날 지혜가 없는 셈이다. 금이라는 것이 뭉치는 성분인데 열심히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뭔가 뭉칠 것이 없을법하니 말이다. 그래서 풍부한 수확을 거둔 인생은 서서히 결산을 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결산을 하고서는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한다. 수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마치 씨앗이 자신의 모든 경험을 갖고서 씨앗으로 돌아가듯이 그렇게 인생의 씨앗을 갈무리하는 것이 노년의 水에 해당하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5) 수가 목을 생한다(水生木)


이제 水生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물은 당연히 나무를 기른다. 나무는 물을 먹어야 살아나는 것이니, 천상 수생목은 나무가 물을 먹고 자라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생적으로 볼적에는 수생목을 어떻게 볼것인지도 생각해봐야 겠다.
인생에서는 수생목의 이치가 참으로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水의 차원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어버리면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물이 목을 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적에 대략 두가지 정도의 수생목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물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나무를 생산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생목의 이치로써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자식은 자신이 기른 것이니까 누가 봐도 그럴싸한 이치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또한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뭐냐면 어째서 목생화에서는 자신이 죽으면서 불을 생하는데도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수생목에 와서만 그렇게 대입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수생목보다는 목생화가 더욱 자신을 죽이고 불을 생한다는 이치에 합당할듯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견이 있다면 다음 생각으로 넘어간다. 다음의 생각이란 자신의 다음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윤회의 사상이 대입되는 것이다. 윤회(輪廻)는 오직 자신의 다음 순환고리이다. 항상 주체가 자신이었다는 일관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수생목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써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인도의 윤회사상은 명리학에서도 그대로 대입이 되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본인은 수생목의 이치에서 인간이 윤회를 한다고 본다. 이번생의 경험은 그대로 수에서 저장을 한 다음에 다음 생의 木으로 갖고 넘어간다. 이것이 다음생의 사주가 될런지도 모른다. 만약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사주라고 하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고서 다른 동물이나, 천계에 태어난다면 그 영역들은 사주로써 기준을 삼을 영역의 바깥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마치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파(音波)는 일정한 범위에 있는 파장이라고 한다.
가청(可聽) 주파수(周波數)는 2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 또는 싸이클이라고 한다. 소리에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범위가 있듯이 사주학(四柱學)이 접근을 할 수 있는 것도 사람에 국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水生木은 다음생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윤회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믿지 않으시는 분은 다음생이라는 것보다는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지만 본인은 분명이 다음생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수생목에 대한 의미를 여기에 비춰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생목의 이유를 설명해 보았지만, 중요한 것은 오행(五行) 상생(相生)을 기억해 달라는 점이다. 이유야 어떤 것을 대입하던 상관이 없다고 본다. 자평명리학에서는 오행상생의 원리가 매우 중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2. 육행(六行)은 무엇인가.




이렇게 오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이번에는 또 웬 엉뚱한 육행을 들고 나오는가? 하고서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좀더 열심히 진리를 찾아다니신 분이라면 ‘아, 그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낭월이가 한참 오행에 대한 이치에 몰두해 있을 즈음에 나타난 서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 ‘진역경(眞易經)’이라고 하는 제목을 하고 있는 책이었다. 제목이 맘에 끌려서 펼쳐봤는데 놀랍게도 오행이 아닌 육행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용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책을 사들고 들어왔서는 열심히 읽어봤던 기억이난다. 그래서 혹 육행이라는 분류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을 하는 것이 공부를 하시는 벗님들게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되어서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다.


(1) 육행의 상생법(相生法)


육행의 상생규칙은 오행의 기준으로 볼적에는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수신명가’라고 하는 단체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고, 또 이렇게 주장을 하는 분은 이진진(李眞進)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박경진이라는 분이 정리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지금부터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대체적인 내용을 설명드려본다. 기존이론의 입장으로 본다면 상당히 황당한 면도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오히려 매우 수긍을 할 수가 있는 면도 있으므로 한번 쯤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오행의 상생설에 대해서 반문을 해보는 것도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드려본다.


수생목, 목생토, 토생화, 화생금, 금생기, 기생수, 다시 수생목,


(2) 목생토(木生土)이지 목생화가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상생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수생목에 대해서는 동일한 원칙이므로 넘어가도록 하고, 다음으로 목생화라고 하는 부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나무에서 토가 되지 나무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본다는 이론이다. 이유인즉 이렇다.


생나무에서 어떻게 불이 나오겠는가? 나무가 죽어서 썩어야 열이 발생하는 것이지, 나무가 불에 탄다는 이론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렇게 나무가 썩는다는 것은 토가 된다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토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라고 한다고 해서 부슬부슬한 토를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생명이 끊어진 동물이나 나무는 모두 토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생토이다. 즉 목생화라고 하는 말은 관찰력이 떨어진 안목이고 목생토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의 흐름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시각의 차이]


여기에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기존의 오행관으로 볼적에는 마른나무나 생나무나 모두 목으로 보는데, 여기서는 생명이 떨어진 나무는 토로 본다는 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하겠다. 오행관으로는 부슬부슬하거나 단단하거나 간에 나무를 심을 수가 있는 형태의 토를 토라고 하는데 반해서 이 이론은 일단 나무가 생명력을 잃으면 토가 되기 때문에 기존의 토에 대한 시각으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고 보겠다.


(3) 토생화(土生火)이지 토생금이 아니다.


다음으로 토가 생하는 것은 불이지 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시체나 나무가 토로 화하면 그 곳에서 열이난다. 열이 나는 것도 자연발생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데, 나무에서 열이 난다는 이론보다는 토에서 열이 난다는 이론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도 보기에 따라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나무가 죽으면 그 나무에서 토가 되고, 즉 죽는 즉시로 토라고 보는 것이고, 그 토에서 열이 나는데, 그 열은 토생화가 된다는 순서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오행관에서는 나무가 썩으면 열이 나는 것이니 이것을 목생화라고 하고, 또 썩고 나면 퇴비는 토가 되는 것이니 화생토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이름은 달라도 결국 나무가 썩어서 토가 된다는 것은 같은데, 나무의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목인가, 토인가를 구분해야 하는 점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는 하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서 일반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4) 죽은 나무는 토인가?


여기에서 잠시 이견을 제시해본다. 나무로 만든 가구(家具)가 있다고 한다면 그 가구를 목제(木製)가구라고 할 수는 있더라도, 토제(土製)가구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상식이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해 본다면 목생토의 설은 일단 모순을 갖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동양이 아닌 서양의 시각으로 볼적에도 죽은 나무라고 하는 성분을 흙의 구조로는 이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흙과 죽은 나무와의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틀린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동설(地動說)이 인정을 받기까지는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나서이다. 그처럼 육행의 이치가 사실은 참으로 자연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줍잖은 낭월이가 여기에서 어떤 것이 옳고 틀리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이론이 있으니까 벗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참고삼아서 알아 두시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야 기존의 오행설을 더 지지하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하는 것도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옳다고만은 볼 수가 없겠기 때문에 잠시 함께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5) 화생금(火生金)이지 화극금이 아니다.


사실은 낭월이가 육행설에 대해서 무시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화생금이라고 하는 이론을 반박하기가 어려워서이다. 화생금이라는 이론은 이미 오행설에도 나와있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상으로 볼적에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아마도 대다수의 벗님들은 이미 자른 책들을 통해서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드린다. 혹 이해가 되시지 않으시면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지지(地支)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나서 다시 와서 읽어보시면 모두 이해가 되실 것이다.
사화(巳火)는 금의 생지(生地)이다. 물론 사유축(巳酉丑)의 금국(金局)을 형성하는데, 맨 처음으로 있는 사화는 금의 생지라는 말이므로 당연히 화생금이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틀리다는 말을 하기에는 꺼림찍하다. 그리고 화와 금과의 관계는 뭔가 서로 명확하게 해명이 되지않은 어떤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미묘한 관계가 있음으로 해서 화생금이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함께 명리학에 공부를 하고 있는 벗인 동해(東海) 선생은 계속 이 화생금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서 궁리를 하고 있기도 하다. 동해선생도 항상 화그금이라기 보다는 화생금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종종 있다고 말을 전해준다. 동해선생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통해서이다.

↗ ↘

金 土 木

↖ ↙

가) 현재의 오행상생도 나) 화생금의 오행상생도

↗ ↘

金 ← 土 木

↑ ↙














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오행의 상생도를 현재의 구조로 연결지어보면 금에서부터 수, 목을 거쳐서 화까지는 잘 연결되다가, 금과 연결되어야 할 자리에서 토로 일단 일그러(동해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졌다가, 다시 금으로 진행하는 모습은 자연스럽지가 않은 형상이다.
그리고 나)의 그림에서는 자연스럽게 화살표가 원을 그리고 있다. 우선 보기에는 당연이 나)의 그림이 편안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소의 의문에다가 진역경에서 화생금이 옳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고서는 매우 흥미를 보였던 것이다. 낭월이가 보기에도 일단 자연스럽다는 점에서는 나)의 도형을 취하고 싶지만, 한가지 수긍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오행의 모형도로써 이러한 그림이 타당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수긍을 활실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이 문제는 이정도로 하고, 진역경에서 보는 화생금의 이유를 들어보면,
지열(地熱)의 강력한 불기운은 화산으로 솟구치는데, 그 화산에서 바위가 형성된다. 이른바 용암이 그것이다. 땅속의 열은 토가 만들어 낸 것이고, 그 열은 다시 금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오행이 흘러간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과학적으로 분석을 해본 견해라고 생각이 되는데, 매우 타당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기존의 오행에서도 화생금의 이치는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격국용신의 항목에서도 나타나지만, 불과 금과의 관계는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무엇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특히 법이라면 법이라고 까지 할만한 이론 중에 하나는 ‘금수상관(金水傷官) 희견관(喜見官)’이라는 말이 명리고서에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참 묘한 관계라고 생각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생각을 해보도록 하고 이만 줄인다.


(6) 금생기(金生氣)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오행이 아니라 육행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오는 항목이다. 금에서 바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일단 기라고 하는 것을 거쳐서 수가 나오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다소 조잡한 맛이 있기도 한데, 어쩌면 이 단체에서 기에 대한 수련을 권장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를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보는이유는 이렇다.
기(氣)라고 하는 것이 금에서만 나오겠는가? 하는 의문이 강력하게 들기 때문인데, 사실은 목기(木氣), 화기(火氣), 토기(土氣) 금기(金氣), 수기(水氣)라고 하는 것이 이미 포함되어 있어야 타당하기 떄문이다. 즉 사물은 기(氣)와 질(質)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지 별개로 기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7) 금생수가 아니라 기생수(氣生水)이다.


금생수가 아니라 기생수라는 이론이다. 금에서 물이 직접 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에서 물이 생한다고 보는데, 이것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보인다. 즉 모든 것은 기운이 서려서 엉기면 물질이 되는 것이고, 금의 성분이 수의 기운을 발생시키고, 그 기운이 응고되면 물이 된다고 봐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떄문이다.
진역경에서 보는 것은 금에서 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그 중에는 진동과 입자, 빛과 소리, 차거움과 뜨거움 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산소와 수소가 모여서 물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오행의 상생설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을 엉거주춤하게 부등켜 안고 있기 때문에 미신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추가하였다. 그리고 상극의 이치에도 언급을 하였는데, 이정도의 소개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더 이상의 소개는 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으시다면 직접 ‘진역경(眞易經)’을 구해서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3. 화생금과 오행배치도의 연구




앞에서 그림을 보여드렸지만, 여기에서 다시 좀더 깊이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다. 왜냐면 이 분야에 대해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좀더 생각했던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각자 연구를 하시는데 참고가 될 듯 싶어서 부연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가) 목화금수와 토의 관계

↗ ↘

金 ⇆ 土 ⇄ 木

↖ ↙


이 그림을 보자. 기본적으로 오행이 서로 자신의 위치에서 있으면서 중앙에 있는 토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형상이다. 수학에서 양방향 화살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느낌상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끌어다가 넣어봤다. 이 그림만으로 보면, 수생목, 목생화, 화생금, 금생수하는 방향은 일방향이다. 서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생해주는 순환의 고리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그리고 토와수, 토와목, 토와화, 토와금의 관계는 상호교류의 형태를 띤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델도 앞서 말했던 동해선생이 제기한 것인데, 음미를 해볼 가치가 있을법 해서 끌어들였다.


나) 토생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도 생각을 해봤지만,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 화생금이라고 하려면 토의 위치가 애매해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하는 문제에 부딧치게 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이다. 도형상으로는 화생금(火生金)이 옳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현재의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에서는 토생금이라고 하는 규칙(?)이 정해져 있고, 여기에 따라서 간지도 배열이 되어있는 것도 난제중의 난제이다. 간지배열이라는 것은 갑을목(甲乙木), 병정화(丙丁火), 무기토(戊己土), 경신금(庚辛金), 임계수(壬癸水)로 되어있는 십간(十干)의 배열을 말한다. 이 배열은 역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정착되면서 매일매일을 적용시키던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것을 바꿔서 갑을무기병정경신임계로 바꿔놓아야 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고, 또 기라고 하는 성분을 집어 넣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지존의 오행관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새법을 만들어야 할으로 생각되는데, 현재의 기준으로는 토생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맘 편하게 소주라도 한잔 마시는게 속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화생금이라는 것으로 고치려고 한다면 기본적인 역학의 체계도 모두 바꿔야 하고, 한의학까지도 모두 수정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토생금에 대한 이론을 수정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가장 여려운 일이라고 본다.


다) 과연 화생금(火生金)인가?


실은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그럴싸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실제로 화생금이 확실하다면 만세력을 다시 쓰는 한이 있더라도 고치는 것이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 진리는 추구하는 사람의 취할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결국은 꿩을 잡는 것이 매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구구한 논쟁을 하더라도 실제로 그 이론이 활용되지 않는다면 전혀 쓸모가 없는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론(空論)은 유사이래로 무수히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다. 특히 진소암(陳素庵) 선생의 ‘아버지를 편재로 본다는 상놈들..’ 운운 하는 이론이 칼날처럼 등장을 했었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진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적용과정에서는 편재가 과연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을 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생아자부모(生我者父母)’라고 하는 고전에 의거해서 자식이 어떻게 아비를 극할 수가 있느냐면서 잘못된 상놈의 이론이라는 강경한 말씀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이 사주감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진선생님의 ‘편재부정설’ 이야기는 죽은 이론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현실은 냉정한 것이다. 실제로 적용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이론도 몇자욱 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를 삼고 있는 이론인 화생금의 이론도 일견 그럴싸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연구하고 발전하면서도 크게 부각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있을 것이다. 물론 화생금으로 적용을 시키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있다. 지금의 만세력 자체가 화생금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만세력이 정확하게 화생금의 이론을 토대로 해서 짜여진다면 100%의 적중율을 나타내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의 명리학에서 100% 인간의 운명을 적중하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과연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변을 할 수가 없다는 면도 포함이 된다. 실제로 100%라고 하는 수치는 계산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낭월이도 생각하고 있다. 사주학의 이론으로 그렇게 정확하게 적용을 시킬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 이유중에 하나가 화생금의 이론을 무시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 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이론으로도 매우 대단한 적중율을 나타낸다. 90%이상은 명리학의 원칙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명리학은 확율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성질의 것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된다.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운명에 사주팔자만이 완전하게 간섭을 한다면 아마도 100%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우선 풍수학적인 의미에서 가족단위의 액난은 개인적인 사주팔자를 능가한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명학이나, 자신의 주거공간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또 가족관계에서 오는 영향도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인 영향인을 없다고 분명히 잘라서 말하겠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현재의 사주학만으로써 90%이상의 적중율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수치라고 생각해도 크게 잘못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다가 사주학만으로 100%가 아니라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봐야 하겠다. 그래서 토생금의 이론으로써 실제로 임상을 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하자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낭월이다.


라) 도표상의 문제


도표는 어디까지나 설명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활용되는 것이고, 또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이다. 평면적인 종이위에 그려진 모습에서 뭔가 잘못된 듯 하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기본원리를 수정해야 한다고 하면, 이것은 ‘빈대한마리를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 화생금에 와서는 그렇게만 몰아세울수만도 없는 이유가 있다. 사화(巳火)는 분명히 금의 생지라고 못을 박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골치를 썩일 것이다.


마) 여름에서 가을? 여름에서 미월(未月)?


계절적인 문제를 놓고 보면 화생금이 타당하다. 여름다음에 가을이 오지 무슨 별다는 것이 없다. 화생금의 이론을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자연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넘어가면서 날씨는 급변한다. 갑자기 쌀쌀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여름에서 가을이 바로 이어진다는 점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와서는 달리 할말이 없다. 그러면서 왜 4계절인지를 모르겠다.
물론 한의학에서는 장하(長夏)라는 계절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모양이다. 미월(未月)을 일러서 그렇게 말하는데, 문제는 아무도 미월을 하나의 계절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인식을 못하는 것이 과연 자연(自然)이라고 볼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생금에 대한 이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도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답변이 궁색하다. 이 한가지만을 놓고 본다면 여름에서 가을이 생긴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라고 하는 말을 쓰기만 한다면 매우 편리할텐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감이 들어서 좀더 두고 연구를 해보자는 말로 얼버무리고 만다.


바) 사유축(巳酉丑)관계에서의 화생금


‘과연 사화(巳火)가 금을 생할까?’ 하는 문제로 많은 시간을 생각해보고 있는데, 그런 기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다른 합에 대해서 모두 짝짓기를 하고 나서 남는 것들로 뭉쳐놓은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거 선현들이 심혈을 기울여 놓은 것에 대해서 너무나 불경스러운 망언을 하는 듯 해서 참으로 송구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화뿐 아니라, 신자진(申子辰)도 그렇다. 과연 셋이 있으면 합해서 물이된다고 하는데, 참으로 바위가 자수를 보면 물이 되어버릴까? 하는 의문도 여영~ 해결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신금(申金)이 바위 그 자체가 아닌 것은 알지만, 금이라고 하는 성분이 자수를 봤다고 해서 물이 되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수를 보면 그냥 금인데 자수를 보면 물이된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오행의 상리(常理)에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론인 듯 하다는 생각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유의 금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중의 병화(丙火)가 유중의 신금(辛金)을 보고서 암합을 한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금으로 화한다는 것에는 역시 의문이 많다고 본다. 병신(丙辛)이 합하면 수가 되는데, 사유가 합하면 왜 금이 되는가? 하는 것도 서로 연관성이 떨어지는 관계이다.
이러한 몇가지의 의문을 정리해보면, 삼합의 이론은 다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삼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재고(再考)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본다. 물론 나중에 삼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만약에 명리하게 완전한 초보의 입장에서 이 부분에 대한 글을 읽으신다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으로 생각되어서 죄송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행의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이 부분에 언급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기회가 마땅치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양해를 구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읽으시면 될 것으로 본다.


사) 결론은 화극금(火剋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봤는데, 화와 금에 대한 관계는 간단하게 짧은 시간에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선은 달리 선택의여지가 없으므로 화극금으로 알고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생금의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않되겠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명확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명확한 결론은 보류하고 싶은 것이 낭월이의 마음이다.
좀더 시간을 두고서 생각을 해보고, 어던 결론이 나온다면 그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공부를 하는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무조건 결론을 내는 것에는 자칫 자연의 이치를 오도(誤導)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좀더 연구를 한 다음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 보다 성실한 연구자세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보류를 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혼자서 끙끙대고 연구를 한다고 해서 쉽사리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듯 하므로 나중에 기본적인 이치를 알고 난 후에 함께 연구하시기도 부탁드리면서 문제만 내어놓고서 결론을 못내려서 죄송하지만, 화생금에 대한 주변의 이야기를 줄인다.
2. 五行의 상극(相剋)




상생의 관계를 가정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상극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라고 한다. 가정적인 관계에서는 이익계산에 대해서 대단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계약관계라는 것이 간혹 있기도 하겠지만, 그 정도는 극히 일부분이고 대개의 일반적인 가정에서의 관계는 서로 봉사하고 헌신하는관계가 대분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가정적인 관계를 ‘상생의 관계’라고 한다면 상극의 법으로 논하는 사회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우선 사회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법칙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가정에서는 약육강식의 이론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힘있는 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법칙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살아있다.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회가 그러하다면 사람의 운을 따지는 명리학에선들 그 이치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하겠지만 사회라는 것은 개인적인 인간이 남들과 겨뤄서 어떻게 생존 하는가를 알 수있는 극명한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극하는 이치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내가 극하고 내가 극받고 항상 주고 받는 이치는 인과법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치를 相剋이라는 말로 대치하면 된다. 사회라고 해서 서로 아끼고 보호하는 이치가 없겠는가만, 그래도 항상 기본적인 흐름은 상극의 구조로 짜여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궁리를 하게 된다. 복잡하다면 대단히 복잡한 사회의 천태만상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 상극의 이치이다.
극을 하는데에도 음양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음양이 모두다 극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왕에 극을 하더라도 정이 있게 극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냥 무정하게 극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가령 두 사람의 종업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중에 한 사람은 항상 최선을 다해서 회사발전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자. 출근도 남보다 먼저하고 퇴근은 남보다 늦게 하면서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원과, 또 한사람은 눈치나 보고 잠시라도 틈이 나면 잡담이나 나누려고 하고 퇴근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총알처럼 달려나가는 사원이 있다면, 이 두사람 중에서는 누가 더 좋아보일런지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만약에 이 두사람이 어느 날 똑같은 실수를 했다면 그중에서도 더 미운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음양이 다른 극(剋)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을 받더라도 음양이 같으면 더욱 심하게 당하고, 음양이 다르면 약간의 사정을 봐가면서 극을 받는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올바른 극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극하는 입장이 될것인가 아니면 극을 받는 입장이 될것인가. 이러한 것을 궁리하는 것이 상극법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相剋에 대한 이치를 궁리하게 되는 것이다.


(1) 목이 토를 극한다(木剋土)


우선 목부터 생각을 해본다. 나무와 흙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나무로써는 위로 벋어 올라가야 하는 성질이 있고,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흙에다가 뿌리를 내려야 가능하다는 간단한 이치 정도는 누구던지 알만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목이 토를 사랑해야 옳지 어떻게 무정한 극을 한다고 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극이라는 말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토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목의 뿌리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하겠다. 토로써는 나무뿌리가 파고 들어오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목으로써는 토가 없으면 곤란하고, 토로써는 목이 없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관계를 보면서 목이 토를 극하고 있다는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목에게 극을 받는 토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목을 극하고 싶어질 것이다. 지배를 받는 노예들도 주인이 밥을 먹여주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노력에 비해서 주인의 대접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마도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토생금(土生金)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토가 목의 극을 받으면서 서러운 마음으로 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금은 어김없이 어머니인 토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헤아리고서 목을 극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금극목(金剋木)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면서 여성들이 그렇게도 아들을 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라고 해서 혹자는 남자들이 아들을 원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어쩔수가 없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딸만 둘을 두었는데, 아내는 항상 아들타령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들을 둘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많은 열성을 보이지만, 정작 남편은 느긋하게 두 딸의 재롱에 취해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시가댁에서도 시아버지 보다는 시어머니가 더 아들손주에 대한 애착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늘상 실제로 상담하는 경우에서 많이 보게된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세간에서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일부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째서 여자가 더 아들을 원하는가에 대한 이유도 생각해봐야 하겠는데, 이것이 바로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다. 남편의 극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법에는 애교를 부리는 방법도 있겠고, 최상의 써비스를 해주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게 노력을 해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아들을 낳아야 자신이 완전하게 보호를 받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라고 본다. 사실 여성이 아들을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들을 키워보고 싶은 욕구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빙자해서 남편이 자신을 버리게 되면 어디에 가서도 하소연을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남편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작용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점은 아들만 있으면 아들은 자신의 보호벽으로써 완벽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다시피 하는 어머니들도 많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서 ‘숭고한 모정(母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상당부분은 모정으로 인한 것일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극의 관계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 항목이 극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만 있으면 남편과의 사회적인 의무에 대한 책임을 완수했노라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가 있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남편이 극제를 하는 가정의 싸움하는 장면을 보면 더욱 명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네집에 들어와서 못해준게 뭐있노! 아들을 못낳아줬나? 밥을 않해줬나! 와 이라노~!!!”
이 정도이다. 일단 어떤 경우던지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줬다는 말은 받드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여성이 아들을 그렇게도 낳고 싶어하는 이유가 또 다른 방어벽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본능적인 의미도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음... 이야기가 약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나? 토의 열받는 마음으로 금을 생한다는 의미를 설명하다보니까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토생금을 하게 되고, 그 금은 금극목으로 아버지를 극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 실제로 생극(生剋)의 이치는 분명하다.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목은 토가 없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부하를 사랑하는 상사라고 하겠다. 그만큼 목에게 있어서의 토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나무가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자랄 수 있는 것은 토가 뿌리를 잡아주기 때문이라는 이치이다. 그래서 목은 부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에 극을 하더라도 유정한 입장이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라는 입장하고는 전혀 다르다.
토는 목이 극하면 극을 받는다. 그리고 토가 두텁다면 필연코 목의 다스림을 요구한다. 토는 목의 뿌리가 잡아 주어야 보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후(戰後)의 한국 산은 모진 포격으로 온통 벌거숭이 산이었다. 포화에 의해서 나무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후에 가장 시급하게 한 일은 산에다 나무를 심자는 운동이었다. 노래까지 만들어서 불러가면서 산에 나무를 심었다. 그 결과로 지금은 온 산천이 녹음으로 덮여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면 산사태도 나고 가뭄이 들었을 경우에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는 산을 떠날 수가 없고 산은 나무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인가보다. 벌거벗은 산은 보기에서 과히 아름답지 않다. 나무가 우거진 숲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토도 목의 극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관계이기에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2) 토가 수를 극한다(土剋水)


토와 수는 또 어떠한가? 흙은 물을 극한다. 물은 항상 흘러가는 것인데 토는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와 물은 그 성분이 상이한 연고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본다. 사이가 나쁘니까 극을 한다. 토의 진중함과 물의 유동적인 변화는 구분이 된다. 그래서 토는 물의 유동성을 극한다. 토가 볼적에 물은 항상 종을 잡을 수가 없겠기 때문일까?
원래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은 움직임이 심한 사람을 싫어한다. 그래서 항상 큰소리로 말한다. ‘제발 얌전하게 좀 있거라!’라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아마도 토는 수를 극하는 이치가 있다고 본다. 만약에 토의 입장에서 나무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물건이라면 굉장히 싫어했을법도 하다.
그렇지만 토가 수를 극하는 이치를 설명하면서 흙으로 둑을 막아서 물을 가두게 된다는 설명은 역시 인위적인 작업이 개입된 설명이어서 약간 찜찜한 느낀이 든다. 원래의 자연모습 그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누가 들어도 믿을만 하다는 생각을 할적에 뭔가 이해를 하는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설명의 방향이 틀렸다고는 못한다. 사실 사회라는 것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극수에서 댐이나, 둑에 대한 비유를 들었다고 해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발생한 가족적인 관계에 비한다면 사회는 참으로 인위적으로 서로의 이익에 의해서 모인 집단인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인 작업을 통해서 물을 다스린다는 설명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모습에 의한 설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을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가령 물이 응고를 하려고 모이는데 토는 방해물로 작용을 한다. 물은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태산준령을 넘어갈 수는 없다. 그렇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산, 즉 토라는 성분은 물이 흘러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을 흡수해버린다. 토는 물이 흡수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하류로 운반을 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흙은 물을 흡수해버린다. 그래서 아예 흘러가지도 못하게 한다. 이렇게 갖히게 되는 물은 썩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이 썩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토는 수를 극한다고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생각해보면 인간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자연계에서도 서로 약점을 보완하는 요령은 필요하다. 土가 만약에 水가 없다면 어떻게 나무를 키울 것인가도 문제이고, 토의 메마름은 생기가 없다. 아라비아 사막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삭막한가를. 그러기에 토는 물이 없이는 되지 않고, 그래서 물을 강제로 잡아두기 위해서 극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물의 입장에서는 또한 토가 움직이지 않고 그자리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맘놓고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떠돌아다닐 수가 있는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둘은 서로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가 없는 상극관계가 형성되는건지도 모르겠다.
또 어머니 이야기를 하자. 토의 극을 미워한 수가 자신의 자식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목이다. 목은 당연히 토를 극하게 되는 것이고, 목의 극을 받은 토는 다시 금을 생산하고, 금은 목을 극한다. 이렇게 서로의 대립은 앞으로 발전을 하면서 반복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이치는 살벌한 현실사회를 꾸며가는 것이다. 어차피 사회는 그런 것이다.


(3) 수가 화를 극한다(水剋火)


이번에는 수화 화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수는 화를 보면 못마땅해 한다. 수는 아래로만 내려가는 성분인데 반해서 화는 위로만 올려가려는 성분이다. 그러니 자신의 성격에 반하는 화를 이뻐하고 싶지가 않는 물이다. 그래서 화를 극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화는 워낙이 가볍다. 수가 토에게 눌리는 마음을 화에게 토한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는 말은 이를 두고서 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화는 토를 생해준다. 그래서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것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수는 토를 생해주는 화가 밉다 그러니 하는 것 하나하나가 곱게 보일 턱이 없는 것이다. 불은 아무리 기세가 등등하다가도 물이 달려들면 꼼짝을 못하고 수그리게 된다. 물론 물의 세력에 따라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드는 수는 있겠지만, 일단 물이 달려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 불과 물의 관계라고 생각이 된다.
주역(周易)의 괘상(卦象)으로 봐도 물(☵)과 불(☲)은 서로 반대로 생겼다. 이것부터가 아무래도 서로는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물은 불을 극하는 것으로 나오고 특별하게 불의 세력이 불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 불은 물에게 지는 것으로 나온다. 불은 물을 만나기만 하면 죽어버리므로 항상 불안하다. 소방대원이 불이 난 곳으로 가장 빨리 싣고 달려오는 것은 다름아닌 물이라는 것만 봐도 알만한 일이다. 기름불이든 장작불이든 일단 불에는 물이 약인 것이다. 이렇게 물에게 터지기만 하고서는 살맛이 나질 않는 불은 토를 만들어서 물에게 대항을 하도록 암시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가 토의 극을 받고서 목을 생조하고, 목은 토를 극하다가 토의 자식인 금에게 두들겨맞고, 그래서 다시 목은 금을 극해달라고 불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렇게 어린아이 싸움이 어른싸움되고, 어른싸움이 동네싸움이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상극법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참 재미있다. 극하는 이치가 사회성이라는 것이 이러한 서로의 관계속에서 통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럼 물은 불을 극하기만 하고 필요로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은 또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은 그 성분이 자꾸 응고하는 성분이다. 그래서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응고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것이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이렇게 물의 마음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또한 맛이 다르다고 하겠다. 물이 응고를 하기 위해서 낮은데로 모이는 것이라···
이렇게 물이 응고만 하면 生生의 묘가 없어진다. 즉 물이 나무를 길러야 하는데 나무는 불이 없으면 생존이 매우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나무가 자라는 이치중에는 광합성이라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이 없으면 전혀 광합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상 미우나 고우나 불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물의 필요에 의해서 불을 극하는 것이기에 水剋火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물이 불을 극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불의 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까마득한 예전에 이 공간에는 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불을 만들게 된것이나 아닐까? 그렇게 필요에 의해서 불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을 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자신이 만든 불인 고로 자신의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누가 뭐라고 할 턱이 없다는 이유이다.
실제로 부부의 관계에서 볼적에 남자의 물과 여자의 불이 결합이 되어서는 크게 가정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본다. 이것은 어쩌면 서로가 당연한 관계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여자가 물(특히 壬水)이고 남자가 불(특히 丙火)가 될 경우에는 90%이상이 가정파탄을 격는다고 생각이 된다. 남자가 극하는 관계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자가 남자를 극하는 관계로 형성되면 어째서 가정이 흔들리는지 곰곰 생각해보는데, 역시 자연적인 흐름에서 남극여(男剋女)는 별 문제가 없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극은 문제가 없는데, 여극남(女剋男)은 머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케이스는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여간해서는 안정을 시키기가 어려웠던 느낌이 있다. 그러므로 궁합이라는 것을 반드시 다 믿을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남병여임(男丙女壬)만큼은 피했으면 하는 것이 낭월이의 생각이다. 특히 이 둘은 서로 양의 성분으로 짜여진 구조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점도 가정이 안정되는데 상당히 어렵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는 지기 싫고 임수도 병화에게 지기 싫은 이 숙명적인 언발란스를 누가 치유할 수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만나는 것도 두 사람의 사주에 나타나는 배우자의 인연이 불량한 소치이기는 하다만.


(4) 화가 금을 극한다(火剋金)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는 무엇일까? 일단 금도 물을 생해주는 작용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다. 불로써는 물이 절대로 곱게 보이지 않을법 한데 그 물을 생조하는 금을 곱지않는 눈으로 보고 싶은것은 어쩌면 기본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금은 나무를 극하기 때문에 불도 금을 극한다고 하면 또 어떨까? 이것도 다른 오행과 동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로는 좀 엉성하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불은 금을 생하는듯 하기도 하다. 용암을 토해놓는 불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들고, 암석이 용광로를 거쳐야만이 진귀한 가치를 갖는 순도가 높은 금속으로 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래도 불이 금을 생한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오행의 상생법칙을 도표로 나타내보면 또 금을 생한다는 일리가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을 보면 오행의 순환상셍에서 잘 흘러가다가 유독 화에서 금으로 가는 그림이 없고 중앙으로 왔다가 다시 금으로가는 일그러진 상생도가 된다. 이것이 현재의 오행의 상생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면 과연 火와 金사이에는 어떤 다리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비록 오행상생법에는 일부 어긋나지만 옛 어른들께서 미쳐 생각하지 모했던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어쨌거나 화극금이라고 명리학에서는 사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본적인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명리학을 연구하는데 여간 곤란하지 않다. 그래서 일단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놓고서 화극금에 대한 이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불은 맹열하게 타오르는 성분이다. 그렇게 타오르고 있는데 금은 결실이라고 볼적에 불의 입장에서는 금의 결실제일주의가 어쩐지 못마땅하다. 과정을 무시하는 금의 마음을 불로써는 곱게 보지 않을법하다. 그리고 불로써 금에게서 취할 것은 무엇일까? 이점도 얼핏 생각해보면 서로 관계가 없을법하다. 그런데 불은 금이 있어야 보존이 되는 이치가 있다. 여름의 맹렬한 불기운은 그대로 두면 이내 사그러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불의 존재는 어디에도 흔적이 없으니 불로써는 미래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금이라고 하는 그릇에다가 불기운을 보존하려고 할 것이다. 이 이론은 【우주변화(宇宙變化)의 원리(原理)】라는 한동석(韓東錫) 선생의 책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는 좀 어려운 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단 불이 금의 그릇에다가 자신의 불기운을 저장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현재로써는 엘피지(LPG) 통이라던지 부탄가스 통을 보면서 불을 보관하는 성분으로써 금이 선택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대단한 화력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봤더니 금속이라고 한다. 사실 물로써 불을 보존하기는 불가능하고, 토로써 보존을 하려니까 화생토의 의미로써 불기운이 스며들므로 불의 효율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이 금인데 이러한 이치로서 불은 금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극을 한다는 말은 상대방은 원하거나 말거나 불이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될것이다.
이러한 이치에 이해서 불은 금을 극하게 되는데 금은 불에게 무엇을 댓가로 받을까도 궁금하다. 그러나 불은 금을 제련하므로써 금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것으로 보상이 된다고 본다. 불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땅 속의 돌덩어리에 불과할 뿐인데 불이 있음으로 해서 금속은 빛이 나는 보옥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중요한 사유라고 하겠다. 그리고 불이 있음으로해서 온갖 도구들이 나왔으니 이점은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 이해를 하실 일이다.


또 사회적으로 친다면 한참 맹렬하게 목표를 위해서 추진하고 있는 불에 해당하는 사원들의 눈에는 그저 놀고 먹는 것으로만 보이는 고급사원들이 항상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특별하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월급은 더 많이 받아가는 간부들이 참으로 못마땅하게 생각이 될법도 하다. 그러나 시회통념상 하극상을 하지는 못하고서 마음으로만 극을 하니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는 극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만약에 중간에서 토에 해당하는 직속상관이 없다면 젊은 친구들은 한바탕 난동이라도 부리게 될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못마땅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잘도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자칫 불의 세력이 강화되면 어김없이 하극상이 전개된다. 구테타라고 하던가? ‘잘되면 충신이요 못되면 역적’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구테타는 죄가 아니라는 결정을 당시의 법원에서도 판정을 내렸던 모양인데, 통치자가 바뀌니까 이러한 결정도 뒤바뀌어서 성공한 구테타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현시대의 주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형이라는 최고형량을 선고받기도 하는 것인 모양이다.
그야 아무래도 좋다. 낭월이는 정치적인 면에는 감각이 둔해서 별로 흥미를 못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화극금의 이치는 바로 하극상의 이치가 자연에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금의 아래에 두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우선 목(木)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용(用)의 차원일 것이다. 만약에 체(體)를 생각한다면 수로 출발해서 금에서 끝이 나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나중에 또 틀림없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을 금의 앞에다가 두는 것은 인생을 기준으로 따져봐도 일리가 있다고 보아서이다.
수를 시작으로 두는 것을 인생으로 견준다면 뱃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볼것인가 하는 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배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본다면 수가 가장 처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타당하다. 뱃속의 아이도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고래로 전해내려온 윤리관에서도 타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태어나면서 한 살이라고 하는 기준이 발생하는 것을 볼적에 당연히 태아도 나이를 10개월간 먹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서양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면서 급속히 깨어지게 된다. 서양에서는 정확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져서 365일이 되어야 한 살이라고 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생일을 물으면 ‘몇살 몇 개월’ 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한다. 이렇게 태어나는 순간이 그 사람의 시작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명리학(命理學)의 기준와 완전히 100% 호환이 된다. 그러고 보면 명리학은 동양적인 사상에서 출발을 했으면서도 실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몇일 몇시에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기 떄문이다. 또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그래서 금이 화보다 뒤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점만 이해를 하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덤으로 이런 주변의 상황까지도 이해를 하면 손해를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생각이 나는대로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이다. 이만 화극금(火剋金)에 대한 이야기를 줄인다.


(5) 금이 목을 극한다(金剋木)


금이 목을 극하는 이치는 물이 불을 극하는 이치만큼이나 명확해보인다. 나무는 도끼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년을 자라온 우람한 巨木도 도끼 한자루면 쓰러지고 만다. 그러니 금극목에 대한 이치는 더이상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잠시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면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과히 어렵지 않다. 무슨 소린가 하면, 도끼가 가만 놔둬도 저절로 나무에게 달려들어서 찍어버리느냐고 묻는다면 일순간에 대답이 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렇게 타성에 젖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뭔가 생동감이 있고, 이치에 합당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금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미 초로(初老)의 인생이다.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시달리고 남을 부려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겪어본 나머지이다. 그러니 어린 친구들이 천방지축으로 동분서주하고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요즘애들은 어떻다고 말하는 세대는 아마도 금에 해당하는 연령층에서 가장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기만 하면 잔소리다. 물론 ‘니네들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말을 꼭꼭 집어 넣는다. 그렇게 잔소리를 하니까 목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래도 하늘 같은 어른들이니 감히 대들 수가 없다. 말인즉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위로하기를 ‘세대 차이’라고 얼버무린다. 그렇지만 사실 살아보노라면 세대차이랄 것도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천년 전에 저술된 종교서적에서도 ‘지금 사람들은 성실하지 못하다’고 푸념을 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을 반드시 첨가하는데, 그 말이 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래도 재연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백년 전에도 마찬가지이고 요즈음에 나온 책들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치는 결국 항상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만약에 천년동안 버릇없음이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쯤은 도덕적이라는 말은 이미 사전에서 조차 없어졌어야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살이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렇게 금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자란 청소년은 그래도 스스로 훨씬 단단한 성장을 하게 된다. 전혀 잔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란 온실의 화초와는 그 기준을 달리한다. 어디에 내어놔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우수한 나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나누는 金剋木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상극의 이치로써 이와 같이 설명을 해보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극을 하게된 이유보다는 극을 하는 원칙을 이해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극을 하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길게 설명을 할 뿐이다. 항상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는것이 학문을 이해하는데 지름길이 될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相生과 相剋에 대한 설명을 드렸거니와, 이제 목이라고 하는 하나의 성분을 좀더 확대시켜서 각기 오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할런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물론 다른 글자들도 참고를 하면 좋을런지 모르겠지만 항상 한가지 이야기로써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기에 그 방법을 사용한다.


(6) 서로 어우러져서 한바탕


가능하면 좀더 자세하게 상극의 이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했다. 여기에서 총론과 결론을 삼아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본다. 각각의 극하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실은 서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거미줄과도 같은 복잡한 사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하면서 이해를 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상극의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야기 중간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서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尖銳)하게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이 상극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극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생에 대해서도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어머니가 자식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모통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내리사랑이 발생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다고 보는 것이다. 뭐든지 우연(偶然)인 것은 없다고 전제를 하고서 이 공부는 진행을 해야 한다. 우연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연구를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가령 부부가 서로 만나는 것도 우연이라고 한다면 궁합의 이야기를 끼원 넣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우연은 없다고 본다. 자연의 이치에는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必然)’에 의해서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우연(偶然)’이라고 하는 낱말은 조작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에 명리학을 공부할 적에는 상생은 매우 좋은 것이고, 상극은 매우 불량한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 이것은 낭월이의 무지한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개의 명리서적들에서는 극을 나쁜 것으로 인식이 되게끔 적혀 있다는 것이 어쩌면 정답일 것이다. 그러한 자료를 의지해서 공부하다가 보니까 극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어떤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한동안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정도의 오행순환법칙(五行循還法則)에 눈을 뜨게 되면 이러한 ‘호생염극(好生厭剋)의 마음이 없어진다. 문자를 하나 만들어서 무슨 말인가 하실는지 모르겠다만, 간단히 말해서 생은 좋아하고 극은 싫어한다는 말이다. 생이나 극이나 그 모두는 지극히 당연한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자연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작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 극의 작용이 나쁘다고 해도, 극의 좋은 역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 생극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 작용은 서로서로 ‘50 대 50’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극의 작용도 없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고인(古人)들도 이 극의 작용을 생의 작용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로 다뤄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역시 어르신들의 통찰력은 대단하게 깊었다는 것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뒤쪽에서 등장을 하게 되겠는데, 우선은 이정도로 극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두고서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해본다. 명칭은 달라지더라도 항상 생극의 이치는 그 이면에 깔려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라고 하는 구조도 또한 그렇게 생과 극을 반복하면서 얽혀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3. 木이 보는 세상모습


이번에는 생극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이미 이 정도의 이야기는 진작에 졸업을 하셨을 수도 있겠으나, 기왕이면 좀더 다양하게 오행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자료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생각이 마련해봤다. 혹 기초적인 자료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의 사고방식이라면 이렇게 나열해보는 것이 아마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여기서는 목과 연결된 주변의 오행들과 관계있는 구조를 생각해본다.


(1) 木이 木을 보면 라이벌이다


같은 목은 아무래도 동질성은 있지만 서로 끌어당기는 맛은 없을 것이다. 목끼리는 서로 경쟁상대가 될 공산이 크다. 형제간에도 항상 경쟁상대이다. 언제나 시험을 봐도 비교가 된다. ‘넌 몇점이냐? 동생은 몇점이냐?’ 로 시작해서 ‘넌 우째그리 못크냐? 언니는 머릿결도 고운데···’ 등등 정말 내용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쟁상대가 된다. 그러니 왠만한 무신경이 아니고서는 이쁠래야 이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모님들이야 선의의 경쟁력을 만들어보려고 하시는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한가지만 봐도 맘에 들지 않는 것이 같은 동기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같은 오행은 서로 밀치는 성분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서로 음양이 다르다면 약간의 변수가 있다. 누나가 남자동생을 돌보는 것이라던지 오빠가 여동생을 돌보는 것처럼 서로간에 친밀한 감정이 발생한다. 같은 목이면서도 이렇게 음양이 달라지면 또한 취하는 행동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이러한 오행간의 기본 구조는 나중에 사주공부를 많이 해서 실제로 감정을 할 적에도 그대로 활용되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같은 형제들은 서로 라이벌이 되어서 항상 경쟁관계가 되지만 이것은 등따숩고 배부를 때의 이야기이다. 만약에 춥고 배고프면 어재의 적들은 오늘의 동지가 되어서 똘똘 뭉쳐가지고 강하게 대항한다. 이때에는 언제 우리가 싸웠냐고 한다. 사실 어려서 친구간에 서로 싸워서 형이 얻어맞기라도 하면 동생이 열을 받아서 함께 달려드는 경우를 왕왕 본다. 이러한 장면도 이제 한자녀 두기 운동에 힘 입어서 앞으로는 그나마 보기 힘들겠지만, 일단 외적이 침입을 할적에는 단결이 잘 되는 것이 또한 같은 오행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나무들 간에도 전개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를 심을 적에는 한 그루만 심는 것 보다는 여러그루를 함께 심는 것이 유리하다고 한다. 서로는 경쟁력이 생겨서 홀로 있을 적보다 더 잘 자란다는 보고가 있다.


(2) 木이 火를 보면 주고싶은 마음이다


옛 말에 이쁜 도둑이라는 말이 있다. 이쁜 도둑이란 물론 딸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 딸자식은 친정에 오면 뭐든지 못가져 가서 안달이다. 그리고 또한 주고 싶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인가보다. 木이 火를 보았을 적에도 바로 이러한 감정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무도 불을 보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발생하게 된다.
실제로 나무가 많은 사주에서 불이 있으면 불은 굉장히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리고 나무가 많은데도 불이 없으면 그 사주에는 희망이 없어보이는 느낌이 묘하게도 든다. 이러한 것은 주고 싶어도 받을 자식이 없는 늙은 재벌의 마음과도 통할듯 하다. 자신이 평생동안 일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이제 늙어서 자식에게 주고 싶은데 그 재산을 받을 자식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木에게 있어서 火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나무에게 있어서는 꽃이라고 하게 된다. 나무에게 꽃은 희망이다. 꽃이 없다면 천상 자신의 자식을 번식시킬적에 포기 나누기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고목에 꽃이 피면 내일처럼 기뻐한다. 포기나누기는 자식이 아니다. 그러니 씨앗으로 나누는 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비능율적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볼적에 나무에게 있어서의 꽃의 의미는 참으로 중요하다. 식물은 종자의 갯수가 많을 수록 고등식물이라고 한다. 특히 난초의 경우에는 하나의 씨 주머니에 약 30만 개 정도의 씨앗을 담는다고 한다. 아마도 식물중에서는 가장 많은 씨앗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난초의 꽃은 더욱 비싼 것일까? 어떤 난초는 한 포기에 수천만원을 홋가한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생각하면서 식물이 꽃이 없다면 그 대우가 또 달라질거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木도 火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좋은 면만 있겠는가? 하고 반문(反問)을 하는 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자세라고 본다. 당연하겠지만 항상 긍정적인 면의 뒤에는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태양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 그림자는 어두워지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이 木과 火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면을 본다면 꽃을 너무 많이 피워서 가지가 찢어진 나무를 생각하면 되겠다. 적당한 꽃송이는 보기에도 편안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꽃이 많은 나무는 성장에 지장을 받는다. 그래서 꽃이 너무 많은 나무는 더이상 자라지를 못하고 시들게 된다. 그러니 이때는 가지를 좀 솎아주는 것이 좋다. 즉 물로써 불을 약하게 해야 하는데, 그 물이 없는 경우라면 정말로 죽을 지경일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쁜 도둑이 아니라 정말로 힘겨운 자식들일 뿐이다. 자식을 보기만 해도 공포심이 엄습한다. 이렇게 되어서는이미 자식이 아닌 것이다. 사람도 가지많은 나무에는 바람이 잘 날이 없다는 말로써 이러한 상황을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을 느끼면서 생하는 중에도 극하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은 나무를 생해주지만 불을 극하는 이치가 있으므로 꽃이 너무 많이 피어서 나무가 힘들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물이 늦서리가 되어서 한바탕 뿌려주면 꽃들이 상당부분 시들어버린다. 그러면 나무는 나머지 꽃들을 키우면서 가볍게 일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농부의 마음이야 아프거나 말거나, 나무로써는 알 바가 없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게 더 좋을런지도 모른다. 사실 과실이 많이 달리는 나무는 그 해의 성장이 떨어진다.
그리고 만약에 서리가 내려서 꽃을 솎아 주지 않는다면 나무는 스스로 낙과(落果)라는 방법을 통해서 솎아낸다. 나무는 열매를 많이 생산하는 것이 목적인 듯 하지만, 실제로의 나무는 언제라도 자신의 생을 위해서 자식인 꽃이나 열매를 솎아 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자꾸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특히 이런 생각을 해본다. 초가을인데 알이 굵어지기 전에 일단 정리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일개의 미물인 식물도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모두 그렇게 어떤 필연성의 의해서 제각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이라고 해서 다 생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가 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생도 나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읽어내는 자료라고 본다.


(3) 木이 土를 보면 아끼는 부하다.


나무에게 있어서 토는 반드시 있어야 할 물질이다. 토는 나무의 뿌리를 잡아주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를 보면 나무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토가 되기를 원한다. 딱딱하지 않고, 부슬부슬해서 뿌리가 내리기에 좋아야 하고, 또 반면에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적당히 단단하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수분을 적당하게 머금고 있을 것까지 요구한다. 그래서 이렇게 나무의 입맛대로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천년을 두고 곧게 자란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무 즉, 메마른 흙에 자갈이 잔뜩 박히고 또 수분도 없는 상황에서 흙조차 단단하다면 나무로써는 제대로 생명을 이어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목은 토가 자신의 맘대로 움직여 주기를 항상 원하는 것인가보다. 그리고 인간 생활에서는 木에게 土는 종업원에 해당하기도 한다. 예전으로 치면 머슴에 해당될것이다. 머슴은 언제나 주인의 요구에 따를 뿐이다. 그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이유를 대면 좋지 못한 土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러면 대우가 형편없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무의 상황도 모두 같지는 않다. 그래서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은 자라다가 말라 죽어버리고 기름진 토양에 떨어진 나무는 남보다 더 높이 자라나니 그래서 나무는 환경을 중시하는 모양이다. 사업가도 그와 같아서 종업원들이 잘 협조하는 환경에서는 흑자를 내고 기업이 커가지만, 종업원들의 목소리만 높고 일은 하지 않는 회사에서는 고생만 하다가 도산되고 마는 것이다.
나무가 토를 극한다는 이야기는 앞의 목극토의 항목에서 설명을 드렸으니 다시 길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해본다면 참으로 소중한 토이기에 언제나 옆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겠다. 내가 극을 하면서도 각기 오행의 주체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앞으로 네 가지의 오행이 극하는 입장은 같지만 그 속의 사정은 약간씩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관찰해 보시면서 공부하시기 바란다.


(4) 木이 金을 만나면 단단해진다


목은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금의 견제를 피할 수가 없다. 금은 목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이다. 심리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목의 성분이 자유분망하게 뻗어나가는 성분이라고 할적에, 동서남북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금이 톡톡 잘라버린다면 정말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면 금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 잘 피해가는 것이 상책일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木은 金보기를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오행에 관계된 인연으로 서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목와 금이 서로 좋은 관계가 성립되기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목이 일반적인 것으로는 금의 간섭을 싫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목이 워낙이 많아서 자기네들끼리 서로 치고 받게 되는 상황이라면 이때는 금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금은 이러한 경우에 가장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될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대들보 깜’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는 나무의 위용이 웅장하다는 뜻이겠는데 이렇게 나무가 웅장하게 자랐을 적에는 물의 도움은 별로 필요치 않고, 도끼로 잘라서 들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목이 세력이 이미 성장을 마치고 노년기로 접어 들었을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때는 금의 간섭으로 잘라서 목재로 만드는 것이 앞으로 천년을 더 살게 되는 방법이다. 대들보가 되어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받들고 있으면 역시 천년동안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오히려 물을 만나는 것을 대단히 꺼린다. 마른 나무는 물을 만나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좋아하는 것이 바뀌기도 하는 것도 오행의 작용에서 반드시 고려를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오행은 상호간에 서로를 위해서 유용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또 문제가 있는 이야기라는 토를 달아야 하겠다. 금이 나무에게 좋은 작용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도끼로 잘라서 다듬는다는 말은 역시 인위적인 노력이 가해지는 상황으로 설명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물론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결과만 통하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누가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반격을 한다면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이 따분할 것이다. 그러한 염려를 해서 자연스럽지 않은 원리설명도 좋지만, 가능하면 자연적인 상황을 생각해 봄으로써 누가 생각을 해봐도 타당하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앞에서 이끌어 가는 입장이라고 생각해본다.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같은 上官이면서도 유익하게 잘 인도하고 도와주는 상관도 있고, 그야말로 못살게 구는 맛에 산다는 듯이 마구 부려먹는 무정한 상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 앞으로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시간이 온다. 우선은 이렇게 상생과 상극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자연계에서는 나무에게 있어서 금의 작용은 계절로 다가온다. 나무가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가을철의 냉기운은 나무가 성장하는데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푸르기만 한 잎도 누렇게 또는 붉게 색이 변해서는 떨어지고 마는 그야말로 가사(假死)의 상태(狀態)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금은 목을 극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의 벌목회사에서 나무를 베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체험 삶의 현장‘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였는데, 나무 하나의 규모가 참으로 대단했다. 한국에서 그 정도로 나무가 자라게 되려면 적어도 500년에서 1000년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불과 몇 년만 지나면 다시 그정도로 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반도에서는 육림사업은 애초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金剋木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렇지, 금의 기운이 없는 곳에서 나무사업을 해야지 금의 극을 받지 않고서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마구 자라게 되는 것이지 한국에서처럼 자랄만 하면 금의 극을 받고 있는 동네에서는 될 리가 없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극목은 나무를 못자라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또한번 확인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모든 사물을 보면서 그 생극의 원리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명리학을 숙성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금극목이 좋은 역할을 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다. 한국의 나무는 극을 받으면 성장을 중지한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중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테를 보면 가을에 자란 부분을 보게 된다. 즉 진한 색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무는 가을에도 자라기는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여름에 자란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가을이 있음으로 해서 나무는 단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테가 한 살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 나이테는 단단하다. 단단한 나무는 오래간다. 즉 열대림이 과연 500년이나 1000년을 살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생각컨데 아마도 불가능 할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자라다가는 속이 다 썩어서 결국 죽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나무들은 여건만 좋다면 500년은 거뜬하다. 그 이유는 가을에 금이 나무를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장수를 할 수가 있는 것은 필히 금의 도움을 받아서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 수가 있다는 것은 나무의 입장에서는 매우 장점에 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야 얼른 자리지 않는다고 성화를 대거나 말거나 말이다. 흔히 농담삼아 하는 말이 ‘굵고 짧게’ 라는 말을 하는데 열대림이 바로 굵고 짧게 사는 것이고, 한국림은 가늘고 길게 사는 꼴이다. 그러나 그 장단은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는 자신의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5) 木이 水를 만나면 生氣가 솟는다.


나무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싶어도 물의 뒷받침이 없다면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 잠시라도 물을 떠나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무는 물을 절대로 의지해야 한다. 四柱의 오행에서도 물이 없다면 정말 나무로써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신속하게 물을 찾지 않으면 어떠한 계획도 쓸모가 없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오직 물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이치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나무는 물에서 나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끼의 형태였다던가? 그렇게 시작된 생명의 출발은 수억만년이 흐르면서 고등동물로 진화를 했다고 하는 것이 진화론(進化論)에서 말하는 이론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수생목이 있음으로 해서 지구에 생명이 시작되었노라’ 하는 말을 해볼 수도 있겠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는 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무는 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니,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인 것이다. 즉 활동력을 얻기 위해서 물이 잠시라도 없어서는 않되기 때문에 나무의 입장에서 보는 물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부작용이 있기는 마찮가지라고 해야 하겠다. 물이 너무 많으면 나무가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물 속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면 또 문제는 다르다. 이러한 경우에는 미역이라던지 다시마 등의 해초류로 되겠기 때문이다. 일단 지상에서 살아가는 나무를 기준해서 볼적에는 물이 많다는 것이 참으로 큰 문제가 될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이치는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 균형이 무너지게 되면 이 나무는 물에 잠겨서 죽어버리게 된다. 생이라고 해서 다 좋아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장면이다.


인생살이에서도 이러한 경우는 얼마던지 만날 수가 있다고 본다. 요즘같이 자식을 많이 두지 않는 시대에는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큰 사회문제가 될 소지가 발생한다. ‘마마보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수의 과잉공급이 빚어낸 비극이다. 지나친 어머니의 사랑(정확히는 간섭)이 자식을 스스로 자립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자칫 자식의 앞길을 막고서 결국은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니 이것이 목의 입장에서 보는 물의 부작용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자식이 많을 적에는 일일일 살펴볼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과잉공급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데,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어머니의 에너지가 남아도는 상황이 되다 보니까 아이가 학교를 가고 오는데에도 자가용으로 싣고 다닌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돌보느라고 자식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겨를이 없겠지만, 이렇게 일부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귀하신(?) 자식들은 왕왕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서는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지는 정신적 불구자의 형태로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겠지만, 우리 명리학자는 이러한 것이야말로 정확히 ‘수의 과잉공급 현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주팔자에서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형태도 존재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물어보면 실제로 어머니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고 하는 답변을 듣는다. 그래서 이렇게 생긴 어머니가 자식의 앞날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으로 질문을 할 적에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을 할 경우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우선 듣기에는 서운하겠지만 결국은 이러한 조언이 필요하고 이러한 말을 해 줄수 있는 사람이 명리가를 제외하고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이 되기도 해서 어떤때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듯한 착각으로 스스로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자위를 하기도 한다.
4. 화(火)가 보는 세상모습


목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나머지는 목의 상황에 미뤄서 짐작을 하시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완전히 초보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궁리를 해본다는 것이 무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소 번잡하기는 하지만 일일이 상황설명을 해드림으로써 장차 더 깊이 연구를 해 들어가는데 밑거름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체적으로 설명을 하기로 한다.
그럼 이번에는 화를 기준으로 삼아서 다른 오행과의 상황을 가능한 한 현실적인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해보도록 한다.


(1) 화가 화를 만나면 동지가 된다.


‘불과 불이 서로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나무와 나무가 서로 만나면 라이벌이라는 생각을 갖는다고 했는데 불도 같을 것인가?’ 이렇게 궁리를 하는 것이 오행학자요 명리학자라고 생각이 된다. 불의 형상을 살피건데 불끼리는 잘 융화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종류의 불이던지 서로 만나기만 하면 하나로 어우러진다. 그리고 얼마던지 많이 모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원래가 불의 성분은 당(黨)을 만들어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성분이기도 하다.
나무는 자신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불은 그렇지 않다. 항상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쉬임없이 움직인다. 이렇게 활발한 성분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를 가리지 않고서 나서는 것이 본성이다. 그 형상적인 면에서 볼적에, 다섯가지의 오행중에서 가장 형상이 변화무쌍한 성분이다. 혼자 있으면 밝고, 둘이 있으면 뜨겁고, 셋이 모이면 태워버린다. 이것이 불의 성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이 불을 만나면 서로 융화를 한다고 보는 것이다.


(2) 화가 토를 만나면 자비심이 생긴다


불이 토를 만나면 객기(客氣)가 자비(慈悲) 변한다. 셋만 모이면 세상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불도 일단 토를 만나면 그 본성이 나긋나긋해진다. 그래서 적천수(滴天髓)에서도 ‘불이 토를 만나면 자비심이 생겨난다.(土衆生慈)’고 했던 것이다. 어느 누군들 자신의 자식을 보면서 성질만 낼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특별히 불이라는 성분은 자식에 대해서 애착이 많은 것이다. 자칫 일생을 자식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어머니의 입장이라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불에 속하는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간다면 불의 아버지는 뭘 위해서 일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갖을 수도 있겠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일단 남자의 입장에서 토에 해당하는 것은 능력-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이라고 본다. 능력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남자는 화의 성분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변에서 조금만 깊은 관찰력을 갖고서 살펴보면 그런 사람이 있다. 별것도 아닌 재주를 가지고 대단한 능력인양 하고 소란스럽게 광고를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사람은 아마도 불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또 반대로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꾸 감추고 스스로 부끄러운 잔재주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불이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스스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란다. 이렇게 궁리를 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사고력이 깊은 곳까지 관찰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불이 토를 만나면 인정이 많다. 뭐든지 주고싶어하고 심지어는 간과 쓸개까지도 빼어 줄려고 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자비심이 생겨난다는 말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자연계에서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우선 불은 흙 속에 잘 빨려들어간다. 여름날에 땅을 만져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따끈따끈하다. 발을 대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흙이 뜨거운 것은 불의 기운을 잘 흡수해서 그런 것이다. 하긴 바위도 뜨겁고 물도 뜨뜻하다고 한다면 말이 되기는 하지만, 물들은 해만 떨어지면 이내 다시 식어지고, 바위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본다. 다만 흙은 열기를 잘 빨아들여서 이듬 해의 봄까지 그 열기를 보관한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넌센스일까? 그렇지만 사실일 것이다. 여름에 토가 열기를 잘 흡수하고서 보관하기 때문에 겨울에 땅속에서 잠을 자보면 훈훈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밖이 춥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온도계로 측정을 해봐도 겨울의 지하는 여름보다 온도가 높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3) 화가 금을 만나면 엿쟁이 마음이다


이번에는 불이 쇠를 만났다. 불은 금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항목이다. 불이 금을 만나면 통제를 하려고 할 것이다. 강력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금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겠다. 즉 이러한 현상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은, 모든 금속은 불의 제련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형체를 갖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불이 금을 보면 무조건 통제를 하려고 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주물러야 속이 시원하다. 시키는대로 듣지 않으면 따귀라도 오려 부친다. 아무래도 좀 거친 상관인 듯 하다. 원래 불은 인내심이 부족하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남이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속에서 불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남이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참으려고 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강제로 억압을 하는 형태가 성립한다. 불은 금에 대해서 그렇게 군림하는 것이다.
자연계에서는 어떻게 설명이 될 것인가를 살펴본다. 금을 서리라고 보자. 서리는 가을에 금기운이 강화될 적에 발생하는 것으므로 전혀 엉터리가 아니다. 가을에 아직 결실을 다 보지 않았는데, 서리가 내리면 농부들은 큰일이다. 그래서 서리가 내린다는 주의보를 들으면 즉시로 농장으로 달려가서는 밭고랑에 불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불은 틀림없이 나무를 살리는 불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일러서 명리학의 말로 하면 ‘아능구모(兒能救母)’라고 한다. 자식이 능히 어머니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도 금(서리)은 불의 힘 앞에서는 별 수없이 물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이러한 대목이 실감나는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프렌치키스’ 던가 싶다. 그 영화에서도 포도농장에서 서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는 모두 불을 피우는 장면이 참으로 볼만 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급기야 그 불이 과해서 농장을 모두 불태워 버려서 딱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낭월이는 항상 어느 곳에서 오행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이다. 그래서 많은 것을 찾아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흐름도 무시한채로 오행궁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4) 화가 수를 만나면 못마땅하다


물과 불의 관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 불은 그 본성을 위로만 향하고 올라가는 성분이고, 물은 그 본성이 아래로만 향해서 내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의 입장에서 볼적에는 참으로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엄청 많다. 불의 특성 중에서도 제 일호라고 할만한 ‘가자 앞으로’가 도무지 멕혀들지를 않는 것이 우선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다. 이 물이라는 녀석은 자꾸 뒤로만 빠지는 것이 여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쥐어박으려고 해도 이게 또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물에게 주먹이 다가가는 순간, 이미 불이 불이아니다. 죽어버리는 것이다. 수극화를 한다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데, 실은 수화는 서로 겨룰만 하다고 생각이 된다. 다만 화는 공격적이고 수는 방어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제풀에 지친 불이 결국은 항복을 하게 되는 것이겠고, 그래서 결국은 수극화라고 하는 말을 하게 되지만, 우선 노는 모양을 보면 물은 불에게 있어서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불은 물을 보기만 하면 싸우려고 덤빈다. 물론 싸움은 될 턱이 없다. 물이 항상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다. 수화상쟁(水火相爭)을 하게 되면 천상 싸움을 말리는 도리밖에 없는데 이때 말리는 적격자로는 목이 나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제는 게편이라고 목은 또 불의 편을 들기가 일쑤이다. 원래가 목화는 같이 노는 구조로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불은 물을 보고서도 겁을 내지 않는다. 참 고약한 친구이다. 상사를 공경해야 하는데 이 친구에게는 상사라고 하는 존재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능력이 있어야지 밥그릇 수만 가지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의 최선이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관이던 임금이던 시원치 않으면 갈아치워야 한다고 항상 술자리에서 큰소리를 친다. 그래서 소극적인 사람은 이 사람의 옆에 가기를 꺼린다. 이런 사람 옆에 있다가 충동질을 받으면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 잘 되면 또 모르지만, 자칫 자신의 목줄이 떨어질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적질도 장단이 맞아야 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불이 물을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5) 화가 목을 만나면 정성을 다한다


불이 나무를 만나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실은 불이 기세좋게 떠드는 것도 알고 보면 뒤에서 목이 받혀주기 때문이다. 목이 힘을 주지 않으면 불이야 무슨 힘으로 나서서 큰소리를 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불에게 있어서의 나무라는 것은 절대로 빠져서는 않되는 성분인 것이다. 그래서 불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불의 별명이 ‘예의(禮儀)’이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이렇게 온갖 정성을 다해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성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낭월이가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그런다. ‘너무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시는거 아뇨? 그냥 천성이 순박하고 착해서 그런다고 봐줘도 될 것을 그렇게 호벼파야 하겄소?’ 라고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래서 웃는데, 실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이 명리학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다 못해서 효도를 하는 것에도 그만한 돌아옴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처의 말대로 ‘인과응보(因果應報)’에도 부합이 되기 때문에 당당하게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특히 맹열한 성분의 불이 효도를 한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문이 들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봤던 기억이난다. 그 결과 불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는데, 오직 한가지 있다면 나무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뭇가리에 대해서만은 무엇보다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 성분이 결국은 효도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데 만약에 주변에서 금이 있어서 목을 극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대항을 할 것인지를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알 수가 있을 것같다. 이 정도로 불은 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불이 보는 목의 구조라고 이해를 하자.
5. 토(土)가 보는 세상모습




원래가 그 개성이 없는 것으로 개성을 삼을 정도로 애매하다면 애매한 성분이 토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기에서는 그 기본적인 형상에서 다른 오행을 어떻게 바라다 볼 것인지를 음미해보도록 한다. 어쩌면 개성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헛소리(?)를 하기에 수월할 것도 같은데,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못하는 것이 또 낭월이의 천성이라 토에 대해서 궁리를 할 적에는 항상 조심스럽다.


(1) 토가 토를 만나면 무덤덤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목이 목을 보았을 경우와, 화가 화를 보았을 경우게 약간은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다. 그렇다면 토가 토를 보았을 경우에도 당연히 뭔가가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
우선 토가 토를 만나게 되었을 경우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서로는 그저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산에다가 산을 하나 더 보태봐야 결국 산이기밖에 더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가 토라고 하는 성분이 산뜻하게 표현을 하는데 서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한 구조가 별다른 생극의 관계도 없는 토를 만나면 그냥 덤덤하게 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생긴대로 살게 두면 서로는 아무 문제도 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이 간섭을 하는 것이다. 토라고 하는 성분은 간섭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어느 누군들 간섭하는데 좋다고 노래를 부를 사람이야 있으랴만, 그래도 토는 남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 것도 실은 남들이 자신에게 간섭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토가 조용하게 있는 것을 보고서는 뭔가 집적거려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러라 저래라 하고 말도 많다. 이렇게 되면 꾹꾹 눌러 참지만 내심 무척이나 못마땅하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어야 한다느니, 친구간에 그렇게 무관심 할 수가 있느냐? 느니 하고 모두는 자기의 생각대로 마구 지껄인다. 사실 토의 구조상 형제관리나 친구관리를 하는 요령이 서투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토는 피곤해진다. 그래서 참고 있다가는 한마디 한다.


“아, 그냥 냅둬~! 나도 생긴대로 살다 죽을껴~!”


(2) 토가 금을 만나면 억년의 사랑이다.


무덤덤하던 토가 이번에는 금을 만났다. 그러면 서서히 다가앉는다. 뭔가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와락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러한 급속한 행동은 토라고 하는 구조상으로 볼적에 어울리지 않는다. 은근하게 마음이 쓰이는 존재가 토생금이다. 실지로 토에서 금이 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추리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수십만년, 혹은 수백만년의 세월이 경과해서야 비로소 토에서 금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자연이라면, 토가 금을 보고서 얼른 정을 주는 것에 서툴다는 것도 자연이다. 이러한 것을 서로 연관해서 이해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점차로 마음을 쓴다는 말로 나타내 보는데, 은근하게 꾸준하게 마음을 쓴다고 하면 적절할 것이다. ‘은근한 관심’ 이라는 말도 가능하겠다. 뭔가 이러한 느낌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얼핏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실은 토가 은근하게 마음을 두고서 금에게 정성을 기울인다는 형태로 이해를 해보는 것이다. 화가 토를 보고서 갑자기 자비심이 생긴다고 할 정도로 마음을 쓰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토의 사랑은 은근하고 꾸준하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그냥 관심이 없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금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정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토가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바위밖에 더 있겠는가 말이다. 곡식을 만드는 것은 토의 영역이 아니다. 그냥 목의 뿌리를 잡아준 것이 전부인 것이다. 공간을 제공해 줬다고 보는 것이 더 근사할 듯 싶다.
이렇게 굼뱅이도 구르는 제주가 있다고 하는 말대로, 토로써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론 시간은 그렇게 걸리지만 일단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 생산품은 천년 만년을 가는 바위이다. 역시 오랫동안 궁리를 하고 연구를 한 자료는 하루아침에 불타버리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자연현상이다.


(3) 토가 수를 만나면 이용만 하려고 한다(?)


제목을 적어 놓고도 자연스럽지가 않아서 물음표를 추가했다. 이것만 봐도 토에 대한 항목은 뭔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겠다. 토는 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곡식을 길러야 하기 때문에 토에게 물을 주어야 하겠지만, 토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째서 물을 필요로 할 것인지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반드시 뭔가의 서로 피치못할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서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궁리를 하다 보면 참으로 기발난 생각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이런 궁리를 어떨까?
토는 그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불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불이라는 성분이 아시다시피 자꾸 위로만 올라가는 성분이니 토로써는 얼른 땅 속으로 입력을 시키기가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가벼운 불을 땅 속으로 가두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궁리를 한 끝에 물을 끌어다 넣을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은 아래로만 흘러가는 성분이고 상당히 무거운 구조이면서 불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성분이다. 이러한 성분으로 불의 기운을 땅 속에게다 가두면 되겠다는 토다운(?)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던지 약간의 불기운이 땅을 데우면 즉시로 물의 기운을 부른다. 물은 원하거나 말거나 토로써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불의 기운을 땅 속에다가 저장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空論’이라고 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이론을 위한 이론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또 그러면 어떤가? 결론은 토극수라고 하는 이치만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낭월이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항상 접근을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상이 전혀 엉터리라고 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받데리를 보면 속에 물이 들어있다. 그 물은 분명히 전기를 가두는데 이용될 것이다. 물이 적으면 충전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 물은 증류수로 대체된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구조를 보면서 토가 저장을 하는데에는 반드시 물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속에 끌려 들어온 열은 물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토 중에서도 습기가 없는 열토보다는 축축한 습토가 열기를 잘 끌어들인다. 이것만 봐도 역시 토는 습기를 포함하고 있어야 열기를 잘 흡수하여 저장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엉성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설을 세워 놓음으로써 나중에 이 분야에 대해서 특출한 인걸이 나타날 적에는 이러한 자료들을 모두 활성화 시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명리학이 발전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면 또한 한참 끙끙대면서 궁리를 했던 것이 보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것으로 연관을 시켜보면 토는 물이 반드시 있어야만 불의 기운을 끌어당기므로 무조건 수를 극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을 할 적에 촉매제(觸媒制)라고 하는 성분이 있어야만 실험이 가능한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보면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토는 물을 촉매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수는 단순히 이익도 없이 이용만되므로 토의 극을 일방적으로 받는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바로 토극수의 이치인 것이다.


(4) 토가 목을 만나면 멸공! 충성! 한다


토는 그 기본적인 사명이 목을 키우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목과 토는 뗄래야 뗄 수가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고 봐야 하겠다. 어떻게 보면 나무는 위대하다. 이 지구라는 별을 토라는 오행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지구의 비율을 보면 토가 차지하는 것이 가장 많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어렵겠지만, 크게 물과 비교를 해본 자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자료에서는 물이 토의 73분의 1이라는 설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물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니 얼핏 볼적에는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망망대해를 볼적에는 지구 전체가 그냥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말이다.
실제로는 물이 토위에 고여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토극수를 하는 것일까? 서양의 정확한 과학자들이 그렇게 발표를 했다고 하니까 그런갑다 하기는 하면서도 과연 물이 그렇게 적은 양일까 하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은 인간적인 느낌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아마 적어도 7분의 1은 될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나머지 오행들도 각기 7분의 1씩을 차지하게 되어야 할 것 같고, 토는 3분의 1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결론은 지구에는 토가 가장 만은 오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목은 그 강력한 토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또 토의 입장에서는 목이 있음으로 해서 나머지 삼라만상들이 각기 생명을 얻게 되는 먹이사슬이 생성되고 그래서 토가 지향하는 중화의 세계가 전개되므로 해서 토는 목을 괄시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토는 목의 지배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목에게 충성을 하기 위해서 목이 원하는 물이 흘러가버리면 곤란하므로 물을 가둬둔다. 사실 토가 물을 머금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나무의 뿌리를 적셔주기 위함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한 것도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물론 유효하다.
사실 목에 해당하는 어린아이들은 흙을 그렇게도 좋아한다. 항상 흙을 가지고 놀기는 좋아하고 지칠 줄을 모른다. 어려서 유아기를 흙과 더불어서 자란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이 되어 있다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그와 반대로 도회지의 빌딩 숲 속에서 회색의 콘크리트만 밟고 자란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면이 많이 발견된다는 보고도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목극토를 해보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항상 패배감에 젖어 있다는 억지를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내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생각하기에도 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되어준다. 자동차, 집, 그리고 인형 등등 뭐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대로 지배를 할 수가 있는 물질이 있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비교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도회지에서 사는 아이들은 뭐든지 장난감이 생긴대로 그냥 가지고 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수동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뭔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은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궁리를 해본다면, 도시의 아이들은 그냥 팽개쳐버리고 말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토를 밝고 사는 사람은 건강하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한다. 그리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혹 생각을 한다고 해도,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발바닥에 흙의 감촉이 자극을 주므로 해서 그럴 것이라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여기서 오행가로써 생각을 해본다면 토를 극하므로 해서 용기를 얻는다고 볼수는 없겠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기살리기’인 것이다. 미리 토를 극하는 자신감이 배어 있음으로 해서 사회에서 만나는 역경에 대해서도 부딧혀 갈 마음이 난다는 것이다. 다소 억지의 소리일까?


(5) 토가 화를 만나면


화생토라고 했으니 흙이 불을 만나면 무조건 기운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토의 성분에서 습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화의 기운을 많이 흡수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을 한 대로이다. 토는 화의 도움을 원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다른 오행도 상황에 따라서 동일한 입장이 되는 것은 같다고 하겠지만, 특히 토는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자칫 토의 본성이 다른 네가지의 성분을 감싸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행들이 모두 토의 균형잡힌 사고방식을 믿고서 모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토는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진데,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토가 불로부터는 열기를 흡수하면서 또한 열기를 보관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흡수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인체에서 관상동맥(冠狀動脈)의 역할과도 같다고 하겠다.
초창기에 해부학자들은 관상동맥의 역할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했다고 한다. 참고로 관상동맥이라는 말은 심장의 주변을 모자 쓴 것처름 생겨서 한바퀴 돌고 있는 동맥혈관을 말한다고 한다. 이 혈관이 과연 무슨일을 하려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서 심장을 모자쓴 모양으로 한바퀴 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갖고서 궁리를 해보니까 심장이 자신의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 공급선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관상동맥은 그래서 심장이 쉬지않고 혈액을 운반하도록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화생토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토는 먹고 살기 위해서 화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신의 중앙에서 모든 오행의 원활한 흐름을 제어하고 유통시켜주기 위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유지할 정도의 불기운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의 모든 ‘화의 에너지’ 는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목금수가 서로 필요하다고 할적에 적절하게 공급을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인체로 치면 화는 심장에너지이다. 불교에서는 움직이는 기운이라고 했다. ‘움직이는 기운’과 ‘화’와 ‘심장’은 서로 통한다. 인체에서 일생을 두고 잠시도 쉬지 않고서 움직이는 것은 심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움직이는 운동은 과해서도 않되고 부족해서도 않되도록 되어있다. 화의 성분은 자칫 열받기 쉽게 생겼다. 그래서 세상을 살다가 열을 받으면 심장이 대번에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토가 그 열을 흡수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냥 열을 받게 두면 심장은 폭발을 할런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다른 흐름도 모두 정지가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실로 심장이 멈추면 다른 기관도 움직일 재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토의 작용이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심장이 열을 받으면 과열을 흡수해서 저장해 두는 작용을 하는 것이고, 또 심장이 열을 빼앗겨서 힘이 떨어지면 이번에는 저장해둔 열을 다시 심장으로 보내줘서 기운을 돋궈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시고 싶은 벗님은 추운 겨울날에 내복을 벗고서 마당에서 30분만 서있어 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토가 어떻게 약해진 열을 보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즉 ‘달달달’ 떨리는 작용이 바로 열기를 돋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떠는 것과 열을 돌려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생각되신다면, 떠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시면 간단하다. 바로 근육이 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육에 평소에 저장을 해 두었던 열의 창고를 열고서 움직이는 ‘화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리적으로는 지방을 태워서 열을 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오행학자의 안목으로 이해만 하면 되는 것이므로 더 복잡한 이야기는 생략해도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렇게 복잡한 일을 하고 있는 토이기에 화의 기운을 어느 정도는 얻어야 한다. 그렇지만 화생토를 한 모든 에너지를 토가 먹어버린다고 보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항목의 설명은 충분한 영양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금(金)이 보는 세상모습




돌이 세상을 본다면 아무래도 딱딱하게 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비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강사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각기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면서 과연 자신의 안목 만큼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금이라고 하는 성분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적어볼 요량이다.


(1) 금이 금을 만나면 의기 투합이다


금은 성품이 단백해 보인다. 색깔이 희다는 점만 봐도 뭔가 짐작이 가는 그 무엇이 있지만, 역시 금은 오행 중에서 가장 단단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본다. 원래가 단단한 것은 두려움이 없다. 사람도 몸이 단단한 사람은 용기가 백배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가려고 한다. 반대로 허약한 사람은 무슨 일이던지 초지일관 하지 못하고, 항상 망설이고 또 생각한다.
몸이 허약한 사람을 떠올리다 보면 ‘쇼팽’ 이 떠오른다. 일평생을 한번도 건강하다는 말을 못들어보고 살았을 상 싶은 모습의 하얀 피부가 떠오른다. 그렇게 생긴 모습이 허약한 금의 모습이라고 느껴진다. 하얀 피부도 그렇거니와, 항상 피아노의 하얀 이빨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다. 금의 활발한 모습이 아니고, 뭔가 병이 들어있는 모습이다. 그럼 여기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금이 금을 만나면 생기와 활기를 느끼기 때문에 반대적인 느낌을 찾아보려고 떠올려 본 것이다.
사실 금은 금을 만나면 서로 배짱이 잘 맞는다. 나무는 너무 사팔뜨기인 것 같고, 불은 너무 설치고, 토는 색깔이 없고, 물은 너무 사색적이라 매력이 없다. 실제로 이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유독 금에게는 이러한 면이 더욱 잘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비위에는 역시 금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을 한다. 이것을 일러서 유유상종이라고 하는가 보다.
바위가 많이 있는 풍경을 보면 뭔가 느낌이 온다. 홀로 우뚝하게 서있는 제주도의 외돌괴는 뭔가 고독해보이고, 쓸쓸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육각바위(중문단지 부근에 있음)가 있는 쪽으로 가보면 서로 옹기종기 모여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도 재미있게 나누고 있는지 재재거리는 소리가 그칠 줄을 모르는 느낌이다. 년전에 동서들과 처제들 5쌍이서 모두 처음으로 제주도 나들이를 갔던 적이 있었다. 낭월이도 제주도 나들이는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길눈이 밝은 축에 들어서 가이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박종혁이라는 통신망에서 사귄 아우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봉고차를 한 대 전세냈다. 그 차로 제주일주를 했는데, 다들 그렇게 만족해 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갈잡이의 보람이랄지 그런 것을 느끼기도 했던 기억이난다.
그래서 제주도에 대한 안내책자를 살펴보면서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 중에서 조그마하게 사진이 나온 것이 있었는데 소개도 간단했다. 그렇지만 그 한마디는 능히 낭월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육각바위’라는 글이었다. 육각으로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는 말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매력이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지점을 ‘기사께 해안’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중문단지를 둘러서는 그 지점을 짐작하고서 운전을 담당한 동서에게 방향을 잡도록 코치했다. 물론 낭월이는 조수석에서 완벽한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길도 포장이 되지않은 채로 특별한 나그네에게만 자태를 보여주는 육각바위들은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그 장소에서 낭월이는 그냥 주저앉아서 주변의 육각으로 생긴 바위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일행들이 신기하다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내내 그렇게 앉아서 금들이 서로 어울려서 이렇게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취해서 그들의 수억만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득 금이 금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그 장면이 떠올라서 몇마디 말씀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금과 금이 모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장관이었다. 마치 죽림칠현이 바닷가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시담을 나누고 있는 듯 한 느낌도 받았던 육각바위를 보면서 금이 금을 만났을 경우에 대한 느낌을 얻었던 것이다. 오로지 바위만으로 모여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과연 다른 오행들도 가능할까? 하는 질문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도리밖에 없다.
목도 목만으로는 별다른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 뭔가 다른 것과 어울려서 작품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목의 모양이다. 하다못해 분재를 해도 화분이 있어야 하고, 수천만원을 하는 난초조차도 화분이나 돌이 있어야 작품이 완성된다. 그리고 불은 스스로 무슨 작품을 만들 수가 있을는지 참으로 의문스럽다. 토는 또 어떤가 생각해보는데, 토만 모아서 커다란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아무도 그 곳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물이라던지, 기암괴석이나 하다못해 안면도와 같은 적송이라고 늘어서 있어야 뭔가 사람을 불러들일 구실이 될 것이다. 또 물도 마찬가지로 물만 많이 모아서는 별다른 예술품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적어도 물 속에다가 고기라도 몇마리 넣어둬야 사람들이 찾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바위들은 전혀 다르다.
단순히 ‘金+金=金’에 불과한데도, 작품이라고 하는 찬사를 받을 수가 있는 성분인 것이다. 그래서 금이 금을 만나면 서로는 배짱이 맞아서 뭔가 일을 꾸밀 수가 있고, 그 결과는 예술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혹 나중에라도 제주도에 가보실 기회가 온다면 필이 이 곳으로 가서 금이 금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받아보시기 권한다. 낭월이는 이렇게 자연에서 언제나 깨어있는 설법(說法)을 들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이것이 인위적으로 꾸민 해석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2) 금이 수를 만나면 철학가이다


생각이 깊고 깊은 철학자가 드디어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서 장광설(長廣舌)을 토하기 시작하면, 그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사유와 명상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결과를 내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천년을 두고서도 아무도 범접을 하지 못할 깊은 내면의 세계가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이 물을 만났을 경우라고 생각을 해본다.
공자님의 깊은 사유를 생각해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또 고치고, 그렇게 수정을 해가면서 세월을 먹으면서 익어간다. 천성이 압축을 시키는 성분이다. 다지고 또 다진다. 그렇게 다지다 보면 그 속에서 정(精)이 나온다. 원래 누르고 다지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혁명은 그렇게 억압을 받는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억압을 떨치고 일어났을 때에는 아무도 막지 못한다. 이와 같이 압축이 될대로 된 금에서 나온 물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한번 막아보라. 그 방법은 많이 있겠지만, 참으로 물길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인생이 살아가면서 알아야 하는 구구절절히 피가 되고 살이되는 말씀으로 집약이 되어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을 할 수가 없다. 어느것 하나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는데도 반대를 하는 사람은 진리를 참구하는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불타는 공명심만이 가득한 허황한 사람일 뿐이다. 참으로 진리를 찾아 다니는 수행자는 어린아이가 말을 하더라도 그 내용에서 진리가 번득이면 귀를 기울인다. 물론 무릎을 꿇고서 설법을 청할 준비도 다 되어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사람은 인연이 닿는 셈이다. 실제로 금은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원치 않으면 입을 열지 않는다. 불에 속하는 사람들의 남들이 듣지 않으면 귀를 잡아당겨서 입을 대고 더 큰 소리로 떠드는 것과는 비교가 된다. 이렇게 강제로 주입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불의 성분이다. 그리고 불의 성분은 금에게는 참으로 못마땅하게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슴속은 묻어두고서 그냥 입으로만 하늘이 어떻고, 신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떠들어 봐도 전혀 가슴에 와서 진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불교의 형태를 보면서 금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는 사람 막지않고, 가는사람 잡지않네.’라는 말에서 특히 그러한 맛이 진동을 한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지않으면 찾아다녀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는 금에서 나온다. 금이 물을 나눠준다. 와서 먹으라고 소락대기를 질러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나면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물이 맛있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이 마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물을 찾게 되어있다. 그리고 조용히 마시고는 또 떠나간다. 그래도 막지않는 것이 금의 마음이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목이말라서 찾아오면 나눠주고, 그렇게 목마름을 달랜 사람은 또 떠나간다. 그리고서는 아무일도 없다. 이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금이 물을 만나면 철할자가 자신이 깨달은 세계를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는 그렇게 행복해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조용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전혀 모른다. 사실 진정으로 큰 일은 조용히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소란뻑지근하게 야단을 피우는 것은 실속이 없는 껍질들의 합창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낭월이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껍질일 가능성이 매우 높겠다. 아니, 실은 껍질을 시끄럽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서 늘상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있는 편이다.


(3) 금이 목을 만나면 못미더워한다


‘무엇무엇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금이 목을 만났을 경우에 생기는 현상이다. ‘가면 안된다.’ ‘먹으면 안된다.’ ‘자면 안된다.’ ‘보면 안된다.’ 등등 무엇이던지 하면 안된다고 말을 하는 것이 금이 목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이 볼적에 목은 항상 어설프기가 물가의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늘상 그렇게 말해 왔다. 이것도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하면 되는 것은 별로 없고, 항상 하면 안되는 것만 나열하게 되는 부모님들이 아마도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금이 볼적에는 목은 그렇게 머트러울 수가 없다. 위태위태 한 것이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풀을 돌맹이로 눌러놓는다’는 말이 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과도 완전히 통하는 말이다. 임시적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나무라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금의 성분을 갖고 있는 조상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원래 살아가는데 약이 되는 것은 금이 남긴 말이다. 그래서 오죽하면 ‘금언(金言)’이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애석하게도 목은 금의 말을 싫어한다. 벗님도 느껴보셨겠지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들이 모두 그렇게 고리타분하고 뭔가를 잘 모르는 겁쟁이의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는 말부터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목은 또 금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래서 금극목(金剋木)이다.
사실 목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모른다. 그저 기회가 올때마다 앞으로만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금이 앞으로 가지 말라고 말을 하면 ‘또 그소리’라고 귀를 짐짓 막아버린다. 물론 정면으로 대항을 하고 싶지만 그래봐야 깨지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므로 머리회전이 잘 되는 목은 그렇게 무모한 일은 벌이지 않는다. 다만 조금만 더 있어봐라, 내가 멋지게 뭔가를 해 보일 것이다. 하는 마음만 잔뜩 품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목의 시기를 넘기면 화의 시기가 기다리고 있고, 이때에는 자립을 할 정도의 힘이 있으므로 금이 잔소리를 하면 집을 나가서 독립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금이 볼적에 목은 천방지축이라서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목을 억압한다. 억압이라는 말을 하면 금은 좀 억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편이다. 목의 입장에서라면 폭력이라고 해야 속이 시원할테니까 말이다. 물론 금이야 사랑의 충고라고 하겠지만.


(4) 금이 화를 만나면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하면 금은 억울할 것이다. 그렇지만 목을 두들겨 팬만큼의 응보를 불에게서 받아야 한다. 우선 움직이기 싫어하는 금이지만 불을 만나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불이 도끼가 되라고 하면 도끼가 되어야 하고, 쇠사슬이 되라고 하면 또 쇠사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재수좋은 어떤 금은 불이 불상(佛像)이 되어라 해서 불상이 되면 일평생 맛있는 음식을 공양받으면서 법당에서 대우를 받는 행운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될 확율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금은 불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변신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렇게 설명을 하다 보니까 또 인위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우리의 주변에서 익숙한 모습에서 느끼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모양인데, 물론 인위적이라고는 해도 자연의 흐름을 이용할 뿐이지 전혀 다른 것으로 마음대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을 볼적에 크게 거부를 하기만 할 것은 없다고 본다. 가령 물로 호미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고, 불로 망치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쇠가 아니고서는 되지를 않는데, 쇠라고 하는 것이 불을 싫어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금이 불을 보면 인내심으로 버틴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불의 담금질이 끝이 날 때가 있을 거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자연계에서 모진 풍상을 홀로 버티면서 꿋꿋하게 서있는 것은 바위이다. 물론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추가로 장식해야 더 어울린다. 이러한 성분을 갖고 있는 금이기에 불에 잠시 단련을 받는 것은 얼마던지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원래가 금은 인내심이 가장 강한 성분이다. 참고 견디는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서 못산다. 참는 것데는 금을 능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정황으로 봐서 금이 불을 보면 인내심으로 견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현상은 어느 곳에서던지 남이 억압을 해도 잘 견디고 참아 낸다는 말도 가능하다. 물론 그렇게 참은 사람이 결국 크게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사실 목은 그렇게 인내심을 발휘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금만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5) 금이 토를 만나면 답답하다


원래 금은 웬만해서는 남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 성분이다. 그만큼 자력갱생(自力更生)의 파워가 있는 성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토가 금을 덮어준다면 금으로써는 귀찮아질 가능성이 많아진다. 자꾸 남에게 드러나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흙은 그러한 금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채로 자꾸 추울까봐 덮어주기만 한다. 멋쟁이 딸년의 다리가 겨울날에 추위로 시퍼렇게 얼어 있으면 어머니의 마음이 안쓰러워서 자꾸 긴 옷을 입으라고 채근을 하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어린 딸년은 도저히 긴 옷을 입어서 날씬한 각선미를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데 결국은 도리없이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한다. 토생금의 이치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은 토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다. 없어도 되는 성분이 괜히 옆에서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한다고 귀찮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토는 또 자신의 몫을 다 하려고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는다. 사실 지지(地支)를 살펴보면 어디를 가던지 토의 냄새가난다. 다른 것은 지장간까지 다 훑어봐도 5개 정도의 성분이 짜여져 있는데, 유독 토에 대해서는 8개의 지지에 골고루 토의 성분이 배합되어 있는 것이 또 못마땅하다. 아니 해중(亥中)의 무토까지도 생각을 한다면 9개이다. 참으로 대단한 토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토가 하나도 없는 지지는 단 3개 뿐이다. 그 3개는 자묘유(子卯酉)이다. 실은 그렇게 토가 많기 때문에 금이라는 성분이 강한 구조로 되어있는데도 우선 입에 쓴 것만 생각을 하고서 거부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다.
이렇게 지지에 에게 도움을 주는 토가 많다는 것에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다. 토가 많다는 것은 또 그만큼의 중요한 몫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는 실로 금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수도 있다. 우리 속담에 ‘입술이 없으니 이가 시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도 오행의 소식이 배어들어 있는 것이다. 원래 이러한 속담이 만들어진 이유는 이에 속하는 힘있는 사람이 미운데 직접적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그 수하에서 돕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의미로 쓰인다.
오행에서는 입술이 토가 되고 이는 금이 된다. 그러므로 입술은 이를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입술이 없으면 이는 금새 바람을 타고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바른 말만 하는 교수가 미우면 정부에서는 그 교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무슨 구실이던지 달아서 내 쫓아버린다. 그러면 눈치가 있는 교수는 어린 제자들이 자신으로 인해서 수모를 당하는 것이 죄스러워서 스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위정자(爲政者)들도 이점을 노리고서 그러한 일을 한다. 앞에서 금과 물의 관계에서도 말했지만, 금은 선생님으로써의 모습이 많이 있다. 그러니 자식들과도 같은 학생들이 이유없는 시련을 당하는데 명색이 스승이라는 자가 모른채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과 토의 관계에서는 이와 반대로 말하는 입을 자꾸 틀어막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입술을 겹겹이 감싼다는 말로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결국은 금은 갑갑해지고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지장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가 있음으로해서 금은 토의 생해준자는 명분을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금의 입은 물인데, 토가 물을 극하는 작용을 함으로써 금으로 하여금 답답한 마음이 들도록 하는 간접작용도 있다고 하겠다.
사실 사주에서 강력한 금이 또 토를 본다면 일순간 그 사주는 혼탁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허약한 금이라면 토가 포근한 이불처럼 느껴지겠지만, 강력한 불이 제련을 해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금이라면 토의 간섭은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불이 금을 극해야 하는데, 토가 있으면 오히려 토를 생조해주는 역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불도 자신의 일을 하는데 토가 짐이되고, 물도 금의 기운을 빼어내는데 토가 방해물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역작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오행의 변화를 다루는 항목에서 다시 언급을 하게 된다.
7. 수(水)가 보는 세상모습




물이 세상을 본다면 모두가 다 활동적으로 나름대로 자신의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자신은 자꾸만 위축이 되는 느낌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더욱더 활발하게 행동을 하려고 할 것이고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일리가 있을법 하다. 만회심리라고나 이름을 지어볼까? 싶다. 즉 스스로 폐쇄적으로 행동을 한만큼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만회심리로 활발하게 움직이려고 하는데 이것이 생각 속에서만 유효하고 실제로는 물의 본성대로 응결되는 성분이기 때문에 결국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법 하다는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1) 수가 수를 만나면 찰떡궁합이다.


같은 오행끼리 만나서 가장 잘 융화가 되는 것이 물이다. 물은 어느 강을 타고 내려왔던지 간에, 일단 합류가 되면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서 섞여버린다. 그리고 나면 분류를 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물끼리는 서로 잘 통한다고 볼 수가 있겠다.
물이 분리가 되어서 세력이 약해지면 물로써 그 작용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물은 세력이 어느정도 강하기를 원한다. 흘러갈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게도 못된다면 이 물은 멀지않아서 썩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썩어버리면 아무곳에도 못쓰는 물질로 되어버린다. 이렇게 썩은 물은 어서빨리 바다로 흘러가서 다 많은 물들과 서루 어울려서 정화가 되어야만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이다. 그래서 물들은 서로 만나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물방울 두 개를 유리판에 놓고서 서로 가까이 대어보면 얼른 결합을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물은 결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물이 물을 보면 이렇게 서로 당기는 좋은 사이가 된다고 보면 적절하겠다.


(2) 수가 목을 만나면 살맛난다


물이 아래로만 가는 성분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물도 위로 올라갈 때가 있다. 바로 나무를 만났을 때이다. 물이 아래로만 흐르니까 안목이 좁다. 항상 앞을 내다 볼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도 실은 알고보면 이렇게 앞을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앞을 훤하게 내다볼 수가 있다면 예측이고 공상이고 간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보이는 자료를 바탕삼아서 뭔가 일을 추진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물은 아래로만 내려가다 보니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돌이나 언덕만 있어서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히말리야의 깊은 골짜기의 한 종지 정도의 물이 나오는 구멍으로부터 기나긴 여행을 마친 후에 바다에 도달한 물에게 오면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본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본 것은 물 속을 제외한다면 기껏 양쪽의 강언덕을 본 것이 전부라네, 그 너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알 수가 없었네.”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참으로 물로써는 전혀 높은 곳에 올라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안목이 넓지를 못하다. 그래서 궁리만 많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이 일단 나무를 만나면 문제는 달라진다. 순식간에 나무의 맨 꼭대기로 올라가서 넓고도 광활한 세상을 내려다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나무만나기를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만큼이나 반가워한다. 사실 물이 나무를 보면 그렇게 열심히 스며든다. 그래서 살아있는 나무는 잘 자랄 것이고, 죽은 나무는 썩어버릴 것이다. 물은 미련하게도 나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구분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얼른 올라가서 세상구경을 하고 싶은 욕심에 그러한 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해본다.
이렇게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재수좋은 물은 넓은 세상을 보게되고 그래서 안목이 더욱 커져서 자신의 지혜를 크게 확대하는 계기로 삼는다. 그렇게 세상구경을 하고서는 도로 내려와야 한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도 없다. 다음 물에게 밀려서 스스로는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구경한 세상에 대해서 두고두고 간직을 한다. 물론 다음에 다시 한번 나무를 올라가서 넓은 세상을 봐야겠다는 미련을 간직한채로이다. 그래서 물로 태어난 사주에서 나무를 만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러서 음극즉양생(陰極卽陽生)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이 음의 극에 달한 성분이기 때문에 회광반조(回光反照)의 현상으로 양의 기운인 목을 반기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을 좋아한다는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생각이 된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변에서 찾아봐도 얼마든지 그 의미가 포함된 자료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선 노인들을 보자. 세상을 환갑(還甲)이 넘게 살아온 노인은 어린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그래서 늘상 자식내외와 말썽을 일으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식들의 이유인즉 ‘어린애를 버릇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회광반조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있으면 참으로 수지 맞는 것이다. 무슨 부탁이던지 막강한 실세의 위에 있는 ‘할’자가 들은 어른들이 척척 해결을 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만 봐도 노인(水)들이 어린아이(木)들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자연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혹자는 노인은 앞을 생각해보면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탄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어린애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좋아한다는 말도 하기는 하더라만, 결국 중요한 것은 노인은 어린애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던 간에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낭월이는 ‘물은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고 오래도록 남아있게 할 목적’으로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3) 수가 화를 만나면 발산의 기틀이 생긴다


음...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물이 불을 만나면 아무래도 그냥 조용하게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것이 서로 만나면 뭔가 일이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그럼 물이 불을 만나면 무슨 변화가 생길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물은 불의 협조를 절대로 필요로 한다. 응고되는 성분이 그래도 자유롭게 하늘을 떠다니기 위해서는 불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계속 응고되기만 해서는 결국 싸늘한 얼음덩이리로써 존재하는 방법밖엔 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이니까 물로써는 불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음양의 도리에서도 둘은 간절하게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은 항상 불이 있어야 만물창조의 일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불이 없으면 언제나 얼음덩어리에 불과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한 불이 너무 많아버리면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꾸미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그래서 물은 불을 손아귀에 넣고서 통제를 하려고 한다. 그 결과로 수극화(水剋火)가 되는 모양이다.
주역에서 물이 불을 만나면 기제(旣濟)의 공을 이룬다고 했다. 이 말도 극음(極陰)이 극양(極陽)을 서로 만나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치는 생물에서도 볼 수가 있겠다. 가령 여성을 음이라고 보고, 또한 물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물을 여성으로 보고, 불을 남성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 남성이 여성을 보는 것보다는 여성이 남성을 보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은 자신의 씨앗을 뿌린다는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여성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야 하는 자연법칙에서의 암컷 역할을 해야 한다는 숙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여성은 자식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으로 보호본능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도 동물들에게서 더욱 강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수컷은 씨를 뿌리는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더 할 일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벌의 사회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하다. 여왕벌은 자식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수벌을 기른다. 그렇지만 일단 수정을 하고 나서는 그 조직에서 수벌의 역할은 끝이 난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수벌들이 빈둥거리다가, 여왕봉이 수정을 하고 나면 나머지 벌들은 쫓겨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양식도 아깝다는 투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수의 입장에서 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화의 입장에서 수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욱 강하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만약에 불을 만날 수가 없다면 물은 영원히 물로써만 존재를 할 수밖에 없으므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는 나무도 길러줄 수가 없다고 하겠다. 나무가 불이 없으면 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4) 수가 토를 만나면 따분해진다


토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흘러가고 싶은 물에게는 방해불이다. 토가 없다면 한 순간에 바다까지 떨어질 수도 있을텐데, 토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이러저리 구불구불 흘러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점이 못내 따분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나마 구불구불하게라도 흘러가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만약에 높이 가로막고 있다면 흘러가기에도 지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물은 그렇게 토를 보면 맘대로 할 수가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물의 입장에서야, 토에 대해서는 생전에 한번도 만나지 않더라도 별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좋을 대로만 짜여진 것은 아니니까 도리없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자유롭게 어디던지 돌아 다니는 물 같지만, 실은 토가 길을 내주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그래서 토가 강하게 길을 막고 나서면 가만히 힘을 길러서 모였다가는 한꺼번에 ‘와아~!’하고는 달려나간다. 그래서 둑이 터지기도 한다. 비록 그렇게라도 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쉬임없이 흘러가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반대로 좋은 면은 없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한다. 뭐든지 일방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토가 있으므로 해서 물이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물이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별로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다만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니까 나무가 토에다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간접적으로만 물은 토를 필요로 할 뿐이라는 생각이 된다. 이 문제는 아마도 좀더 궁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틀림없이 뭔가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아직 연구가 부족한 것이 당연하겠기 때문이다.


(5) 수가 금을 만나면 눈물나게 반갑다


물은 금의 생조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당연히 필요로 하게 된다. 물의 힘이 상당히 강하다고 하더라도 뭔가 연약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는데, 상대적으로 물이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토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뜻이다. 토가 강하니까 물은 약해진다. 자연계에서 볼적에 물은 토에 비해서 상당히 약한데, 그 형상은 12지지에서 알 수가 있겠다. 즉 지지(地支)에는 각각의 오행이 음양으로 나눠서 2개씩이 있는데, 어째서 10개가 아니고 12개냐고 하게 되는데, 그 군더더기 처럼 붙어있는 두 개는 다름이 아닌 토인 것이다. 그래서 토는 유난히 지지에서 네 개가 된다. 물론 이렇게 생긴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지구라는 별이 오행중에서 토의 특성이 가장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이 별의 이름이 무엇인가? 바로 ‘지구(地球)’이다. 지구라는 것을 우리말로 한다면 간단하게 ‘땅 덩어리’라는 말로 대신 할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이 별은 당연히 땅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토에 속하는 별에 속해있는 물은 그 허약한 정도가 가장 심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다른 오행은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는 토에게 직접적으로 극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의미인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물은 약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물은 금을 찾게 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나무를 기르려고 해도 물은 그 근원인 금을 생각하게 되고, 더운 기운을 식히려고 해도, 물은 금을 찾아봐야 한다. 또 메마른 토를 적셔주려고 하면 당연히 금이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거의가 물에게 있어서는 약하게 해주는 작용을 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나 강한가를 살펴봐야 하는데. 물줄기인 금이 건재하기만 하다면 이 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이 되므로 참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뭐든지 할 수가 있는 강력한 저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금과 수는 특별하게 궁합이 잘 맞는다. 원래 크게 오행을 분류하게 되면, 금수(金水)를 같이 보고, 목화(木火)도 같이 본다. 서로는 닮았다는 이유인데, 실로 목화가 양(陽)에 속하듯이 금수는 음(陰)에 속하니까 서로 배짱이 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들을 같은 부류로 묶어 놓기도 한다. 사주에 금과 물이 함께 어울려 있으면 자연스러워보인다. 금이 있고 물이 없으면, 너무 강해 보이고, 물만 있고 금이 없으면 힘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은 자연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의 골짜기에 물이 흘러간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리고 그 주변에는 암반이 깔려 있어서 투명한 물이 영롱하게 보이기까지 한다면 누구던지 손을 넣어서 한 모금 먹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생각해 본다면 물과 바위와의 궁합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것인지를 느낄 수가 있겠다.
반면에 골짜기에 물이 흘러가는데, 주변에는 바위라고는 전혀 없고 그냥 흙만 있다면 이때의 물은 과연 어떨것인지 생각해보자. 아무래도 맑은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대개는 흙탕물이 될런지도 모른다. 바위가 정화를 시켜주지 않으면 물은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져 버린다. 흙바닥을 흐르는 물과 암반(岩盤)위를 흐르는 물은 그 품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볼적에도 바위와 물의 궁합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고 하겠다.
第五部




변화론(變化論)






생극(生剋)이 기본적인 오행의 이치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선 생극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렇게 생극에 대해서 그 원리를 파악한 다음에는 다시 그 이면에 전개되는 ‘생극의 변화(變化)’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 말은 생극이 기본은 되지만 전부가 아니라, 생극에서 파생되는 변화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변화라는 말을 들으시면 ‘뭔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보다’ 하는 생각이 드실 것도 같지만, 실은 변화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기본에다가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전혀 별개로 나타난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어째서 변화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뭐든지 기본적인 원리만 이해를 하면 되는데,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기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 기본만 가지고는 참으로 다양한 세상의 이치를 모두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의 이치도 또한 그렇게 기본을 바탕으로 해서 변화되어가는 복잡다양한 모습이 참모양인 까닭인 것이다. 그리고 말은 변화라고 하지만 대개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있다. 그 법칙을 이해하므로써 서로의 관계를 좀더 잘 살피고 헤아리게 되는 안목을 기른다. 가령 木은 기본적으로 물을 좋아하지만, 물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둥둥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의 입장에서는 물이 너무 많다면 물을 미워하게 되는 이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진정으로 오행의 변화에 밝은 것이라고 할만 하다.
기본적으로는 생이 좋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생이 오히려 극이되는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극이 바뀌어서 생이 되는 이치가 있음을 생각할 적에, 음양오행의 이치가 참으로 절묘함을 느끼게 한다. 이 이론들은 송나라 때의 명리학자인 서대승(徐大升) 선생이 문자로 남긴 소중한 자료들이다. 그래서 일명 서대승론(徐大升論)이라고도 한다. 기본적인 오행이 상생이나 상극이 되는 경우를 이해하고 나서는 이렇게 또다른 관점에서 바라다보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항상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제대로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대승 선생은 그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생하는 것도 해가 되는 수가 있다는 것과, 극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이론을 전개했는데 이렇게 다섯가지 오행의 관게에서 서로 미치는 영향을 간단한 글로써 설명한 것은 참으로 오행의 이치에 깊게 통달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당시로써는 참으로 학자다운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다루게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지나치면 곤란하다는 의미가 항상 흐르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항시 느끼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공자님의 말씀인 ‘과유불급’이 항상 생각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는 의미겠지만, 실제로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이 과유불급의 명언을 잊도록 만든다고 하겠다. 물론 노력을 해서 중화(中和)에 가까워지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되겠지만, 이미 사주팔자에서 그렇게 균형이 일그러진 형상을 만났다면 도리없이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니, 그러한 목적으로 이렇게 변화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된다.
1. 생이 지나치면 병이된다




우선 나를 생해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본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은 생을 받아야만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니까 무조건 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은 좋아하고 생의 반대적인 의미가 있는 극은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여기에서 배울 것은 이것이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변화된 이치를 간단하게 글귀로 나타낸 것이 아래에 있는 글이다.


金賴土生 土多金埋, 土賴火生 火多土焦, 火賴木生
금뢰토생 토다금매, 토뢰화생 화다토초, 화뢰목생


木多火熾, 木賴水生 水多木漂, 水賴金生 金多水濁
목다화치, 목뢰수생 수다목표, 수뢰금생 금다수탁


[직역(直譯)]
금은 토의 생을 바라지만, 토가 많으면 금이 묻히고
토는 화의 생에 의지하나, 불이 많으면 토가 갈라지며
화는 목의 생을 원하지만, 목이 많으면 불이 치열하고
목은 수의 생을 기다리나, 수가 많으면 목이 둥둥뜨며
물은 금의 생을 원하지만, 금이 많으면 물은 탁해진다.




이렇게 간략하게 의미를 생각해본다.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나를 생해주는 성분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金이 토를 생해주고 土는 금의 생을 받는 관계지만 토가 너무 지나치게 많으면 금은 흙 속에 묻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보통 철없는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그저 잘해주면 어머니 노릇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서 자식에게 투자를 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자식에게 투자한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사도 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편의 직업도 바꾸라고 한다. 남편의 직업이 자식의 출세에 좋지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투자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을 적에 바로 이 서대승 선생의 이야기는 참으로 영양가가 있는 설법이 된다. 그 아들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극한 어머니들은 결국 엄마 밖에 모르는 아기를 하나 배출하게 된다. 이 아이는 스스로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린 시절을 온실 속에서 자라다 보니 역경에 대한 적응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조금만 환경이 변화하면 죽는다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역시 자신이 없으면 자식은 혼자서 살 수가 없다는 만족감인지 사명감인지 모를 마음으로 아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이 항목에서 경계를 하는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生이 지나치면 剋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귀여운 자식이라도 찬 바람을 쐴 적에는 찬바람을 맞혀가면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사자도 자식이 어느정도 자라면 언덕아래로 굴려버린 다음에 스스로 올라올 수 있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어떻게 사람의 자식을 사자새끼보다도 못하게 교육을 시킨단 말인가?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을 다리는 현상의 단면이라고 본다.
더구나 지금의 현실에서는 여자가 배우기는 많이 배워서 사회에서 일을 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 뿐인 단 하나 뿐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는 극성어머니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여인들은 자신이 못이룬 모든 것을 자식에게 걸고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항상 지나친 보호는 자립하는 의지를 꺽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철저한 보호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결국 이 보호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는 어떨런지 몰라도 자식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도움이 않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식이 거친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나가는 인생의 길조차 막아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아마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다. 그래서 결국은 어머니의 정이 자식을 죽이는 전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는 기가 막힌 상황도 발생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이 바로 이 항목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사주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이러한 지나친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 각각의 오행별로 정리를 해보자.


(1) 수생목(水生木)이 과다하다


우선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 나무는 아시다시피 물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가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경우가 되었던지 간에 물이 결여될 수가 없다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이다. 이렇게 소중한 물이 이번에는 지나치게 많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도 나무는 물에 잠겨서 죽어버릴 것인가? 과연 그렇게 된다면 수생목이라는 말이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고 쥐구멍으로 도망을 가버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에서도 나무는 물에 잠기면 죽어버리게 된다. 여름에 논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벼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벼포기가 물에 담겨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쑥쑥 잘도 자란다. 그러다가 물이 부족해져서 바닥이 거북이 등이 되면 벼들도 빨갛게 타들어간다. 이러한 때에는 농부의 마음도 타들어 가는 것은 물론이다. 그서 비가 내리라고 기우제도 지내고 급하면 남의 논에 있는 물을 도둑질이라도 해서 내논에 집어 넣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지성이면 감천인지 몰라도 하여튼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솟아오른다. 이제 고민 끝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미소만 머금고 있도록 두지를 않는다. 왜냐면 오랬만에 내린 빗줄기는 멈출줄을 모르고 장대처럼 퍼부어 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마철인 것이다. 아니 장마라는 말로는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다. 홍수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도랑을 흐르던 물은 점차 불어나면서 논으로 차오른다. 처음에는 논두렁의 의미가 약간은 있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논두렁의 경계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진다. 오로지 넓고 넓은 물의 벌판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는 오히려 호수라고 해야 더 실감이 날 것이다. 그렇게 넓은 논은 불과 3~4일 내에 물 속으로 잠기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잠시 미소를 머금었던 농부는 다시 수심으로 돌아선다. 가뭄이야 종구락으로라도 물을 퍼다 부어볼 수가 있지만, 이렇게 온 들판이 황톳물로 넘칠때에는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다. 그냥 삽자루를 들고서 망연하게 바라다 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도 철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벼들이 물을 실컷 먹고 잘 자라겠네.”


라고 말이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말이 얼마나 철없는 어린애의 말인지를 안다. 이제 바로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서 아마도 벼들은 죽어버릴 것이라는 것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도 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고려해서 서대승님께서 마련해 둔 말이 바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 항목에 있는 ‘수다목표(水多木漂)’인 것이다. 물이 지나치게 많아서 나무가 표류를 하듯이 그렇게 떠 다니는 경우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심란한 경우가 되면 물을 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이 총동원된다. 그럼 오행의 원리로 따져서 토극수를 하니까 토를 가지고서 물을 빼내면 될까? 과연 물이 범람을 했는데, 토를 퍼부으면 물이 줄어들까? 아마도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행의 원리라고 해서 이렇게 적용을 시키다가는 그나마 조금 남는 희망을 송두리채 빼앗아갈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서대승님은 마련해 두었다. 물이 지나치게 강할 적에는 수문을 확장시켜라 하는 것으로 말이다. 토극수라고 하는 것은 밀가루 반죽이 질어졌을 적에 뿌리는 밀가루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밀가루 반죽에서도 약간의 물기가 많을 적에나 밀가루를 뿌리는 것이지 물을 덜퍽 부었다면 이때는 밀가루 만으로 해결을 하기에는 무리이다. 밀가루를 마냥 넣었다가는 누가 그 많은 칼국수를 먹겠느냐는 것이다. 밀가루만으로 해결을 하기에는 늦었다고 한다면 그릇을 기울여서 물을 따라내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 강한 물은 수문을 만들어서 흘려보내는 것이 처방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반죽이 질다면 도리없이 수제비를 만들 연구를 해야 한다. 반드시 칼국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안목이 부족한 요리사이다. 수제비는 반죽이 약간 질척해야 맛이 있는 것이다. 메뉴는 변경되었지만, 적절하게 응급처치를 한 셈이다. 그런데 수제비로 만들기에도 그 정도가 지나쳤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천상 풀이나 끌여서 겨울이 오기전에 문을 바르는데 쓰라고 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풀로 만드는 것도 오행의 이치에 ‘수다토류(水多土流)라는 멍언으로 분명하게 설명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이 오행의 이치이다. 그냥 단순하게 토극수요, 수생목이 아닌 것이다. 오행의 이치를 약간 배웠다고 해서 아무곳에다가나 적용을 시키면 참으로 철없는 학자일 뿐이다. 그러면 또 ‘물에 잠기면 모든 나무는 죽어버린다’고 고집을 부릴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도 대답을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 수생목의 과다에서도 사는 경우가 있다


수생목이 지나치면 목이 죽어버린다고 말을 했으니 이제 그 이야기는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혀버린 벗님이 계신다면 또 한수 느린 사고방식이라고 말을 해줘야만 낭월이가 욕을 먹지 않게 되니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행의 변화인가보다.
벼나 보리처럼 애초에 물이 적절하게 필요하기를 바라는 초목은 물이 넘치면 곤란하다. 그리고 이것을 일러서 명리학에서는 ‘오행(五行)의 상리(常理)’라고 부른다. 좀 어려운 이야기를 사용한다면 ‘정격(正格)’이라는 말로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격의 이론을 적용시켜야 하는 경우는 모든 사주를 통털어서 약 90% 이상이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는 정격만 주장하고 다른 상황은 무시를 해야 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가 보다. 그러한 학자들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기는 하겠지만, 물속에서도 살아가는 식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실런지가 궁금하다. 미역이나 다시마 등은 과연 물속에서만 살아가는데 무슨 오행의 이치로써 대입을 해서 설명하게 될 것인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반드시 ‘외격(外格)’이라는 사주용어를 대입해서 설명하게 될 때만 합리적인 이치가 된다. 그리고 ‘오행의 편리(偏理)’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겠다. 이렇게 물이 너무나 지나치게 많은 사주에 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물을 거부하고 다른 방법으로 중화(中和)를 이루려고 해도 묘안이 없으므로 천상 죽어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지만 자연의 묘리는 언제나 그 나름대로의 정법(定法)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예 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식물에 대해서는 물속에서 나오면 오히려 죽어버리는 것으로 답을 삼는 것이다. 물로만 이뤄진 사주는 땅을 보면 죽어버리는 것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것이 자평명리학의 탁월한 안목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두루 통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람의 운명을 감정한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물속에 들어있는 식물인지, 땅위의 식물인지는 어떻게 구분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중에 배우게 된다고 뒤로 미루는데, 다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치라는 점은 분명히 강조를 한다.


(2) 목생화(木生火)가 과다하다


나무가 불을 생해주는 경우에 대한 말이다. 여기서는 나무가 과다하게 많아서 불을 생해주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과연 나무가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로 의문을 갖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궁이의 이야기가 등장을 한다. 아궁이란 재래식으로 나무를 이용해서 난방을 하는 방식인데, 아마 이 책을 읽으시는 벗님들 중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벗님들이 간혹 계실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본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벗님은 시골에서 보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시골이라고해도 모두 보일러로 기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궁이를 반드시 볼 수가 있다는 말씀은 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어린 시절에 연속극을 봐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저녁 밥을 하는데 불좀 때어 달라고 부탁을 하시면 거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얼른 앞서지만 어른이 시키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인지라, 투덜투덜 하면서 불을 지핀다. 그런데 마음이 앞선다. 이놈의 밥솥이 얼른 끓어야 방에 들어가서 보다만 연속극을 마져 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궁이가 미어터지라고 나무를 우여 넣는다. 어린 생각에도 나무가 많이 들어가야 불이 활활 타서 빨리 끓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이다. 불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아궁이에다가 대고 화풀이를 한다.


“이놈의 아궁이는 왜 불이 꺼지는거야~!!”


그러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어디 보자’ 하고는 들이밀던 나무를 끌어내고는 속에 있는 나무들을 호비작호비작 들썩거리면서 뒤적거린다. 그러면 불은 다시 슬슬 살아나서 타오르게 되니까, 아궁이를 보고 욕하던 마음이 민망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어려서 시골생활을 하신 벗님이시라면 이러한 경험이 한 두 번씩은 있으실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오행 중에서 목생화이지만 목이 지나치면 불이 꺼진다는 구절인 ‘목다화식(木多火熄)’에 속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행을 공부하시지 않았지만, 삶의 공부를 통해서 목다화식의 이치를 알고 계셨던가보다. 그래서 삶의 경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목의 생이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꺼진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크게 틀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비유가 너무 인위적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법 하다. 자연상태에서 그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있다면 더욱 좋겠는데 그러한 모델이 있을지 찾아봐도 냉큼 쉽지가 않다. 자연적인 상황에서 불이라고 하는 구조를 접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산불 정도인데, 산불에서는 목다화식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것 모두가 자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사람은 자연을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결론이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인간 스스로 할 수가 있는 것보다는 자연이 베풀어 주는 것을 이용해서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 사람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가령 인간들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기구 중에서 인공위성은 그래도 첨단이라고 할만 한 물건이다. 그렇지만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소용되는 물질들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표면은 아무래도 특수금속일 것이다. 그 금속이라는 것은 역시 이 자연이 베풀어 준 것을 이용한 것이다. 변질시키고 가공하는 것도 역시 자연의 힘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리학(物理學)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면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서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니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자연의 본래 모습을 응용한 변화인 셈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자연에 대한 관찰을 한다면 어느것 하나도 자연 아님이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목다화식의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영화 ‘타워링’을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목다화식을 생각해볼 구석이 있다는 것은 역시 명리가의 안목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불길이 마구 솟구치는 빌딩의 모습은 설명을 하지 않다고 될 것이다. 다만 구조작업을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돌아다니던 소방관들이 어느 사무실 앞에 섰다. 경험이 없는 소방관이 얼른 방문을 잡아당겼다. 속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얼른 사람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달궈진 문을 잡아당기는 순간 속에서 불길이 화악~ 내풍겨서 소방관의 얼굴을 덮친다. 자신의 얼굴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을 구한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자신의 문제가 더욱 화급하니 말이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소방관은 다르다. 문을 만져봐서 문이 뜨거우면 이미 불길이 ‘목다화식(木多火熄)’의 상태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속에서 불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아궁이에서 죽어가듯이 말이다. 상황은 달라도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원 엎드려”


이 한마디 속에서 지혜를 읽을 수가 있다. 문을 여는 것은 숨이 죽어가는 불들에게 다시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것이다. 그리고서 문을 화악 열면서 모두 엎드리거나 잠시 밖으로 피한다. 그러면 화악~ 나오던 불길이 잠시 후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바로 그 틈을 타고서 모두는 실내로 들어간다.
당연하겠지만, 내부에서는 불길이 타는 도중에 산소공급이 차단됨으로해서 불들이 질식(?)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마당에 다시 문을 열어서 새로운 산소를 공급해 준다면 틀림없이 불들은 되살아 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아궁이의 사정과 완전히 일치를 하고 있는 이유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목다화식, 즉 목이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꺼진다는 말을 이해해보는 것이다.


(3) 화생토(火生土)가 과다하다


이번에는 불이 토를 생해주는 것에 대해서인데, 토가 불의 도움이 없이는 곤란하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한다. 우선 화가 지나치다면 당장 생각나는 것이 가뭄이다. 가물어서 토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터지는 상황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렇게 가뭄의 상황은 우리가 늘상 보아온 장면이기에 아무도 낮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몇 년간 가뭄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아프리카의 일부지역에 대한 구호금을 보내자는 캠패인을 보면서 화생토의 정도가 과다하면 이렇게 생명력이 죽음에 봉착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비록 토 위에 살고 있는 생명력은 죽어갈망정 실제로 토의 자체는 대단히 강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볼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토의 구조상 딱딱하게 굳어버리면 중용의 본성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고 봐서 토 역시 지나친 열기를 받아서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실제로 열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버리면 토는 그 본성을 버리고 금화(金化)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도자기이다. 재료는 토인데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금이다. 소리도 쇳소리가 나는 것이 영락없는 금인 것이다. 천년을 묻어둬도 생명력이 생길 수가 없는 죽은 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면서 토는 적절한 열을 받아야지 지나친 열을 받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말씀들 드리면 또 다른 관점에서는 화가 지나쳐서 토를 생해주는 것이 넘치니까 토는 금을 생하는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토가 어디까지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또 다른 관점으로 전환을 하게되면 그 상황으로 방향을 바꿔서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화생토(火生土)에 대해서만 국한시켜서 생각을 해보는 장이기 때문이다.


(4) 토생금(土生金)이 과다하다


흙이 금을 생조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토가 지나치게 많다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선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 보석이 흙에 묻힌다는 이야기이다. ‘토다매금(土多埋金)’이라는 말은 보석이 흙에 묻히는 상황을 생각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보석은 진열장에 있을적에 가장 진가를 발휘한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면 더욱 우아하게 돋보인다. 그런데 이 보석을 땅에다가 묻어버렸다면 아마도 모두는 그 위를 그냥 밟고 다닐 것이다. 당연히 화려한 모습은 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석은 땅에 묻히면 안된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보석은 제대로 된 보석을 말하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에 아직 양생이 덜 이뤄져서 덜익은(?) 보석은 아직도 땅 속에서 토의 생을 더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몇십만년 정도는 생을 받아야만이 비로소 완전한 보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덜익은 보석은 토생금의 이론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완전하게 익어버린 보석은 토에 대해서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주용어로는 ‘강금(强金)’이라고 한다. 강한 금은 토를 만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스스로 능히 빛을 낼 수가 있기 때문에 토보다는 오히려 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금은 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은 없거나 약하고, 토만 좌우에 쌓여 있다면 이 사람은 갑갑하기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사주구조에 따라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다.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하면서 토생금이 과다하면 생기는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5) 금생수(金生水)가 과다하다


앞의 수가 금을 만나는 항목에서 수가 금을 만나면 눈물나게 반갑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금이 지나치게 많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눈물나게 반가운 것이 그래도 어느정도 유지가 될것인가를 생각해본다. 당연히 수가 금을 많이 만나면 이번에는 반대로 지겨울 것이다. 금이 너무 많다면 수의 세력에는 나빠질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사방이 바위암벽이라면 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말이다.
이렇게 되면 물의 희망은 나무를 기르는 것인데 무참히도 깨어지고 말 것이다. 금극목에 의해서이다. 그러니 물이 흘러갈 희망이 없다면 이미 죽은 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죽은 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얼마나 금이 지나친 것을 싫어할 것인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러한 이치에서 물은 금의 과다한 생조(生助)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해본다. ‘금다수탁(金多水濁)’이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이다. 탁해진다는 말의 의미는 아마도 썩어버린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더욱 의미가 잘 통할 것 같다.


이상과 같이 생해주는 것이 과다하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다. 내 입장에서 어머니가 지나치게 간섭을 한다면 자신의 주체성이 울게 될 것이다. 세상만사는 적절한 조절이 필요한 것인데, 끝도없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세뇌시킬 것이다. ‘엄마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이치까지 알고 나면 비로소 생해주는 이치의 참 뜻을 헤아리게 된다고 보겠다.
2. 내가 생함이 병이 되는 경우




이번에는 앞의 이야기와는 입장이 바뀐 상태의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자식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의 상황은 어머니의 입장이 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생이 지나친 것도 큰일이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생이 지나치면 역시 뭔가 문제가 발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생각해 보는 내가 생함이 병이 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사주용어로는 ‘설기과다(洩氣過多)’라는 말로 대신할 수가 있겠는데, 각각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해보도록 한다.




金能生水 水多金沈, 水能生木 木多水縮, 木能生火
금능생수 수다금침, 수능생목 목다수축, 목능생화


火多木焚, 火能生土 土多火晦, 土能生金 金多土弱
화다목분, 화능생토 토다화회, 토능생금 금다토약


금은 능히 수를 생하지만, 수가 많으면 금이 잠기고
물은 능히 목을 생하지만, 목이 많으면 물이 위축되고
목은 능히 화를 생하지만, 화가 많으면 목이 불타고
화는 능히 토를 생하지만, 토가 많으면 불이 어두어지며
토는 능히 금을 생하지만, 금이 많으면 토가 약해진다.




인생이 살아감에 있어서 자식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지만 지나치게 많으면 스스로 자식들의 시달림에 견디지를 못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즈음의 젊은 부부들은 참으로 현명해서 절대로 자식을 많이 두지 않는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이 없다는 말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들이 대단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식들이 많아서 행복했던 배달민족들은 이제 자식들이 없어서 쓸쓸하게 될런지도 모르는 시기가 과히 멀지 않았다고 본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하나를 성인으로 만들어서 결혼시키고 살림을 내어 줄때까지 드는 금전적 비용이 막대하게 든다는 것이다. 수억에서 수십억까지도 들어야 한다는 현실에서 스스로 고생을 덜하고 살아남는 방법은 아이를 적게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간단한 공식이 성립한다.
그러다보니 산부인과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미 실수로 생긴 아기를 미리 끌어내려는 부부간의 합의하에서 자식죽이기를 벌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을 지지못할 자식의 출산보다는 계획적인 출산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 아무도 탓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식하나를 키울 적에 그 자식이 얼마나 외로워하고 심심해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이 기르기에 힘겹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식을 하나만 낳아서 애완동물처럼 기르는게 자식 많이 낳아서 키우느라고 고생하고, 또 그렇게 키워봐야 모두 스스로 잘나서 잘 된줄 알지 부모의 희생으로 인해서라고 알아줄 것도 아닌바에야 쓸데없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현명한 오늘의 부모들은 어린아이가 함께 노닐 동무가 없어서 혼자 있다보니 애어른이 되어가거나 말거나, 대인관게를 잘 못해서 영원한 외톨이가 되거나 말거나 오로지 자신의 요량대로 일을 하니 참으로 영악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앞으로 인구는 점점 줄어 들것이고,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하나 뿐인 자식이 죽어버렸을 적에 그때서야 부랴부랴 피임복원수술을 해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는 것도 현실로써 종종 나타나는 일이다.
그래서 이 항목에서는 자식이 8명 9명이 되어서 일평생을 자식키우느라고 자신의 스타일은 전혀 돌볼 겨를도 없이 숨가쁘게 살아왔던 우리의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으로 이해를 했으면 한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항목은 없어질런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식을 하나나 둘만 낳는다면 자식이 많아서 고민스러울 사람이 없어질 것이고 실제의 현실이 그렇다면 자식이 많아서 고민하는 본인들의 사주도 없을 것이니, 이 항목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서 교과서에서 삭제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1) 목생화가 과다하다


보통은 목이 불을 좋아한다. 산 나무는 꽃을 피우고 싶어하므로 불을 좋아한다. 죽은 나무는 감정이 없다고 봐서 좋아하는지 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다만 오행의 순리로 봐서는 목은 불을 좋아한다. 특히 추운 계절에 태어난 나무라면 따뜻한 불기운을 매우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순리로 흐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다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다. 사실 자식이 너무 많았던 예전의 어머니들은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눈을 뜨면서 잠이 들때까지 항상 자식에 대한 걱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을 ‘애물단지’라고 하지 않는가.
자식이 어리면 어린대로, 자라면 자란대로 항상 걱정꺼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식이 좀 적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 당연하다. 오죽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휩쌓여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판단을 했으면 요즘의 딸들은 아예 자식을 낳지 않을 궁리조차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필연적인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그러한 모델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다른 모든 오행의 경우에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과연 나무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겠다.


나무가 자식이 너무 많다는 것은 꽃이 많은 것으로 비유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미 죽은 나무는 감정이 없으므로 여기에서 이야기를 할꺼리로써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봄철에 만개한 벗나무를 생각해보자. 온 산천이 불을 밝힌 듯이 밝은 연분홍색으로 치장을 하게되는 것인 잠깐이지만 참으로 장관이라고 할만하다. 이것은 해마다 남해에서 열리는 군항제라던지 지리산에서 열리는 십리벗꽃의 축제가 있는데, 지금은 이것이 번져서는 전국 어느 동네던지 꽃잔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꽃을 피우느라고 진기를 소모한 나무는 열매를 크게 키울 기운이 없어진 모양이다. 실제로 늦여름에 등장하는 버찌는 콩알 정도의 크기이다.
가령 사과나무나 복숭아 나무의 열매는 그렇게 크게 달리는 것과 비교를 해본다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만약에 벚꽃 이 필적에 90%정도를 솎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실제로 그 많은 꽃을 따낸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아마도 상당히 커지게 되는 버찌를 수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은 농부가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꽃이 지고 나면 신속하게 지나치게 많이 달린 열매를 솎아내는 것이 해마다 대단히 번거로운 그렇지만 생략할 수가 없는 중요한 행사로 등장을 하기 때문이다. 과수원을 하는 사람은 이 시기의 중요성이 일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달려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많은 자식을 키우려면 기운이 탈진한다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자식이 많아서 문제가 발생하게 생긴 오행의 형상에서는 그 자식들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것을 정법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과수(果樹)가 지나치게 많은 열매를 달고 난 다음해에는 힘이 없어서 열매가 신통치 않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해걸이’라는 말로 배운 기억이 나는데, 과수원에서는 이 해걸이를 없애기 위해서 과일의 개수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에 대한 처방으로써 우리 명리학에서 대입하는 것이다. 사주에서 나무로 태어난 사람이 불이 지나치게 많으면 물을 용신(用神)으로 삼게 되는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서대승님은 이것을 일러서 ‘화다목분(火多木焚)’이라고 이름하였다.


(2) 화생토가 과다하다


불의 열기는 토를 만나면 잘 스며들게 되고, 그 중에서도 습토를 만난다면 매우 신속하게 흡수가 된다. 그래서 불은 토를 만나면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약한 불이 지나치게 많은 습토를 만나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원래 오행의 상리(常理)는 상호공존의 원칙을 누리고 있는 것이 자연이다. 어느 한가지만이 특별나게 강하고 또 반대로 어느 한가지의 기운은 매우 약하게 되면 오행의 균형이 지켜지지 않게되고 이것은 자연의 중화된 도리가 아닌 것이다. 이번의 예에서 처럼 불이 약하고 토가 강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이 땅은 어두워지게 된다. 어둡다는 것은 활기가 없다는 말이다. 불의 기운이 허약한 사람은 항상 침체기 되어있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활발한 마음이 부족하다.
불이 자꾸 아래로만 흡수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위로 상승하겠는가 말이다. 원래가 불의 본성은 위로 상승하는 성분인데, 토가 너무 많아서 흡수를 당해버라면 위로 올라가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면 이 땅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일러서 ‘토다화회(土多火晦)의 형태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밝아야 한다. 인간은 양의 기운이 매우 강한 성분이기에 더욱더 불의 기운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인체로 볼적에도 심장이 멈추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근육이니 신장이니 아무리 튼튼하고 강해도 한 순간에 심장이 멎어버린다면 이보다 더욱 급한 상황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료계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판정의 기준을 놓고서 아직도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뇌사(腦死)이냐 심장사(心臟死)냐’를 놓고서 아직도 말이 많은 모양이다.
뇌가 먼저 죽고서 심장이 죽을 경우에 문제는 발생한다. 심장이 먼저 멎어버리면 더 이상 시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뇌가 활동을 중지했는데,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면 이것을 사망으로 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 뇌가 완전히 활동을 중지했다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싶은 이면에는 아직도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장기(臟器)를 이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 배경에 깔려 있다고 하겠다.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가 있는 기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장기는 모두 살아있기 때문에, 신장이나, 안구나, 간이나 등등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이식을 하면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뇌사를 사망으로 보고 싶은 것이 본심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도 심장이 멎어버리면 소용이 없다. 즉시에 모든 기관에는 혈액공급이 중단되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급속하게 부패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인체는 화의 기운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화가 없으면 완전한 사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심장이다. 그런데 심장이 약하면 일생을 활발하게 살아가기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이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격심한 운동도 못하고, 분노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없다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약한 심장을 보호해주려면 목의 기운을 강화해야 하는데, 목은 신경계가 된다. 원래 심장이 약한 사람은 신경도 예민하기 쉽다. 하긴, 목의 기운이 허하지 않다면 심장도 애초에 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던 이렇게 토가 많아서 화가 약하게 되면 매우 곤란한 문제가 발생되므로 토를 제거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경우의 약으로는 목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목극토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이 예의(禮儀)라고 말하는데, 토에 해당하는 신용(信用)이 지나치게 많아버리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자. 믿음이 지나치면 예의가 빠지게 된다. 믿음이 강하다 보면 믿거라... 하고서는 예의를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부간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부인데, 서로 믿거라 하고서는 서로간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다 보니까, 좋을 적에는 아무상관이 없지만 조그만 오해라도 발생을 하게 되면 그동안에 예의를 지키지 않았던 점까지 의문을 부채질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역시 토가 지나치면 화가 약해진다는 이야기이다.


(3) 토생금이 과다하다


토를 일러서 신용(信用)이라고 칭한다. 그만큼 중용의 형태를 보관하고 있는 성분인데, 이러한 신용도 의리를 중시하다 보면 유지를 하기가 어렵게 된다. 신용을 깨는 것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의리(義理)를 들먹이는 것이다. 관공서는 신용이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식적인 기준을 깨어버리기 위해서는 조용하게 만나서 강요를 하면 된다.
“아니, 의리없이 정말 이럴거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만든다. 뭐든지 공식적으로 오행의 상리를 따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문제를 들고 와서는 의리를 내세우면서 편법을 동원해 주기를 강요한다. 물론 이러한 사람은 완전한 벗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과거의 빚을 들먹거리면서 자신의 요구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칼을 들지 않았을 뿐, 강도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강도보다도 더한 사람이다. 강도는 사정이나 해보지만, 이렇게 과거의 신세를 진것에 대한 의무감이 마음의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실은 토가 약하면 중용에 대한 관념도 떨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토가 튼튼하게 제자리를 잡고 있다면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몇번 강조를 해보다가는 스스로 포기를 하고 말 것이다. 물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네’라는 한마디는 하겠지만, 실제로 공무원은 융통성이 없어야 제격이다. 융통성이 가장 많은 사람은 장삿꾼이다. 공무원을 관물먹는 사람이라고 대우를 하는 것도 어찌보면 융통성이 없는 것을 높이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토기운이 부족한 사람은 의리에 끌려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토가 약하면 토를 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금다토약(金多土弱)’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 약해진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불은 어두워지고 토는 약해진다. 약하다는 것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강력한 자기중심이 있어야만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데 마음이 약하면 의리에 끌려서 자신의 주관대로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4) 금생수가 과다하다


물이 지나치게 많아버리면 금이 허해진다는 의미이다. 서대승님은 이러한 상황을 ‘수다금침(水多金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물이 많으면 금이 잠긴다는 말이니 물에 금이 가라앉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위가 물에 잠기면 약해진다는 말은 어쩐지 인위적으로 끌어다 붙인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바위에서 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것과 바위가 약해진다는 것과도 얼른 연관이 잘 되지 않는 느낌이다. 금은 아무리 물이 많아도 약해보이지 않는 느낌조차 있는 것이 자연에서 느끼는 모습이다. 바닷가에서 해중에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서있는 바위들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든다. 가령 홍도의 기암절벽을 자랑하는 돌섬들을 보면서 바위가 약해보이는지 생각을 해볼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절대로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금생수에서 수다금침이라는 말은 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왜냐면 실제로 사주에서는 금의 입장에서 수가 지나치면 금이 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주를 볼적에는 적용이 되는데 자연에서 설명을 하기에는 어색한 것은 아무래도 아직도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거지로 끌어다가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니 이렇게 어중간하게 넘어가는 대목도 있어야 할 모양이다. 하긴 서대승님도 이러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본 끝에 부득이 어색하지만 수다금침이라는 말로 처리를 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5) 수생목이 과다하다


이번의 항목은 그래도 이해가 쉽다. 물이 적고 나무가 지나치게 많으면 나무들이 물을 흡수해버리고 바닥을 봐버리게 되니까, 당연히 물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목다수축(木多水縮)’이라는 말로 표현을 한 것도 능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물이 위축되어버리고 줄어든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은 눈으로도 보일 듯 하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이 된다.
다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다 본다면 물이 나무 속으로 스며들어버린다고 해도, 물 차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은 나무속으로 흡수되어서도 역시 물인 것이다. 그 중에서 일부는 나무로 화하기는 할 것이다. 그 나머지는 다시 순환작용을 거쳐서 대지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이 나무로 화하는 것이 다른 오행과 달리 재미있어 보인다. 물론 토가 금으로 화하는 것도 있으므로 같은 의미는 되겠지만, 그 신속함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수생목이 되어비린다면 물은 나무속으로 스며들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물은 이렇게 되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주를 연구하다 보면 물은 나무가 있으면 자신의 강약을 떠나서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물이라는 성분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디던지 틈바구니만 있으면 스며들어가는 것이 본성이다. 그래서 나무를 보면 즉시로 스며들어 가는데, 언제나 생각하고 궁리하는 성분은 지혜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행의 배열에서 물이 목을 보면 궁리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사주의 십성(十星)으로는 식상(食傷)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다른 오행도 당연히 자신이 생해주면 식상이라고 하는데, 이 물에게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식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맛이 있는 것이다.
물의 자체가 궁리를 하는 성분인데다가 더욱더 궁리를 독촉하는 식상인 목을 지나치게 보았으니까 당연히 그 방면으로 몰두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사주를 감정할적에도 물이 적고 나무가 많으면 오히려 편안한데, 여기에다가 물을 도와준답시고 금이 나타나게 되면 참으로 사주가 탁해져 보인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용신을 정할적에 약하면 자신을 도와주는 오행으로 중심을 잡게 되는 것인데, 유독 물의 입장에서 목이 많아서 약할 경우에만큼은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렇게 그대로 두는 방식을 외격(外格)이라고 부르고, 특히 ‘수목종아격(水木從兒格)’이라고 해서 특별히 학자의 사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물을 도와준다고 금이 나타나면 금극목의 살벌한 기운이 감돌게 되어서 오히려 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다.
3. 중과부적(衆寡不敵)이 되는 경우






金能剋木 木堅金缺, 木能剋土 土重木折, 土能剋水
금능극목 목견금결, 목능극토 토중목절, 토능극수


水多土流, 水能剋火 火炎水灼, 火能剋金 金多火熄
수다토류, 수능극화 화염수작, 화능극금 금다화식




금이 능히 목을 극하지만, 목이 단단하면 금은 부서지고
목이 능히 토를 극하지만, 토가 많으면 목이 꺽여지고
토가 능히 수를 극하지만, 수가 많으면 토는 떠내려가고
수가 능히 화를 극하지만, 화가 강하면 물은 증발되고
화가 능히 금을 극하지만, 금이 많으면 불이 꺼진다.




金이 木을 극하지만 金이 약하고 목이 강하다면 금은 목을 극하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문드러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하극상(下剋上)에 대한 이야기로 통한다. 기본적으로는 상극하(上剋下)이지만 여기에서는 하극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금이 목을 극한다고 해서 언제나 극이 된다고 보지말라는 경고이다. 민초가 아무리 연약해도 눌리고 눌리다 보면 어느 시기에 가서는 도리어 폭발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될것이다.
극을 하되 극을 받는 세력들이 지나치게 강해지기 전에 다스려야지 그냥 마음 놓고 있다가 어느날 반발을 할 적에 갑자기 다스리려고 하다가는 다스리기는 고사하고 어쩌면 자신의 안전도 책임지지 못할런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할런지도 모른다. 사주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다루는 모든 이야기는 나중에 사주를 볼적에 그대로 대입이 되는 이론들이다. 사실은 사주를 볼적에 쓰라고 만들어 놓은 이론인데 실제의 사회적으로 설명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명리학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던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고 또 그래야 명리학이라고 할 수 있지않겠느냐고 생각한다. 실제로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사주의 원리로써 설명이 가능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극하는 무리들이 왕성한 세력을 믿고 설친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이치로 본다. 힘도 없는 사장이 아무리 버티고 호령을 해봐도 이미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면 전혀 먹혀 들지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종업원들에게 넘겨버리면 그들이 알아서 사업을 활성화 시키고 자신에 해당하는 지분을 넘겨 주걸랑 그 돈이나 챙겨서 물러나 버리면 가장 속편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제파악을 못하고서 떼를 쓰다가는 머슴이 안방차지하는 우를 범하게 될런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도 된다. 항상 자신이 지금 현재에 처한 위치가 어디인가를 잘 살피는 것이 현명하다. 물러날 때인지 나아갈 때인지를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하게 되어 있어서 그렇게 물러나야 할 것을 인식은 하면서도 미련이라는 고약한 것 때문에 선뜻 털어버리지를 못하고 결국은 추태를 보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장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한다.




(1) 목이 토를 극함이 무력하다


어려서 부모님을 도와드린다고 감자밭을 나가서 감자알이 굵어지라고 흙을 긁어서 감자포기로 덮어주는 일을 하게 되었던 기억이난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감자에게 북을 줘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알이 굵어지라고 흙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작업은 목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목극토였던가 보다. 토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라는 것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한가지를 배운 나는 마당가에 있는 감나무에다가 감을 많이 먹으려고 동생이랑 열심히 흙을 퍼다가 감나무를 묻었더니 그날저녁에는 야단을 맞았다. 감나무가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흙을 퍼다 부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어른의 꾸지람을 듣고서 황당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것이 바로 오행의 이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로써는 매우 못마땅했는데, 나무에게 흙을 덮어씌우면 나무가 죽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토다목절(土多木折)’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기억이 있어선지 토다목절에 대한 항목을 생각하면 항시 떠오른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에서 토다목절을 바라다 보자. 이번에는 인생으로 비춰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목은 어린 성장기라고 이야기를 드렸다. 그리고 토는 중년을 끝에다 두고 있는 장년(壯年)의 시기라고 본다. 그리고 중용의 이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 처한 연령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장기에 있는 어린사람이든 청소년이든 간에 중년의 어른들이 너무나 간섭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 어린이는 자신의 의도대로 자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른의 틀에 박힌 잔소리는 자유로운 순발력을 발휘하는 소년들에게는 참으로 독약과 같은 것일런지도 모른다.
왕성한 호기심으로 아침저녁으로 되고 싶은 것이 달라지는 시기에, 노숙하게 중용을 이야기한다면 그러한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어려서 만화책을 읽느라고 호롱불의 심지를 돋구다가 기름 많이 든다고 아버님께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난다. 얼른 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말에 공감을 할 턱이 없어서, 이불로 문을 가려서 빛이 나가지 않게 한 후에 날이 샐때까지 만화를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성한 호기심은 밤이 되어도 잠들 줄을 모른다. 이러한 성분은 어른(토)의 말에 별로 큰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목극토의 본성이 나타난다고 생각해본다. 실제로 어른의 말을 듣고 있는 것도 공감을 해서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른의 말이니까 옳을 것이라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다분히 습관적으로 따르는 의미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토에 속하는 중년의 어른들은 그러한 것들이 모두 실속없는 헛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속이 없다는 것 만으로 중단시키려고 한다면 이 어린 나무는 차차로 시달려서 노인화(?)가 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린애는 어린애 다워야 하는데, 어린애가 어른처럼 생각한다면 이것도 문제이다. 역시 자연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토다목절에다가 연결을 시켜보는 것이다. 어린애의 창작성을 꺽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특히 요즘 아이가 적은 시대에서는 반드시 한번 쯤은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하는 오행의 ‘역리(逆理)현상’일 것이다. 애어른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어쩌면 토다목절의 현상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애들이 애들답지 않다고 한다.
항상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씀이 난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해지면,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으로 흐른다. 어른들이 공부를 하지 못했던 보복을 어린애에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도 공부를 못하는 사주팔자를 타고난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기대심리를 충족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서 인생을 하직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것도 토다목절인 것이다. 그 학생들은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오로지 어른들의 공부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그 짐을 덜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토다목절(土多木折)의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만약에 어른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싶다면, “원래가 토다목절은 오행의 일상적인 이치가 아니라 간혹 있는 이치랍니다.”하는 답변을 드리겠다. 참고로 아버지를 오행으로 토가 대신한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2) 화가 금을 극함이 무력하다


금이 강하면 불이 제련(製鍊)을 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광산에서 광석을 채취했으면 이번에는 용광로에서 녹여내는 것이 다음 단계인 것도 분명하다. 이러한 이치로써 화극금을 설명했는데,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불이 매우 약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이 약하다’는 말은 ‘불이 강해야 하는데도...’ 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이이야기는 다른 오행들에게서도 함께 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헤아려주시기 바란다.
분명히 불이 강력하게 금을 녹여준다면 이 금들은 대단한 진가를 발휘하는 보배가 될것인데, 불이 약하다는 것은 자칫 쓸모없는 돌덩어리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금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왕성한 불길로 달궈주기를 바라지만, 참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한 모양이다. 불길이 약해서 달궈주지를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러서 ‘금다화식(金多火熄)’이라고 이름을 한 것이다. 금이 너무 많으면 불이 꺼져버린다는 것이다.
극을 해줘야 할 입장에 있는 불이 꺼져버린다면 이것은 참으로 적은 일이 아니다. 금들의 희망이 무참하게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고, 희망이 없는 금들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발생한다. 이것을 인생에다가 또 덮어씌워본다.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금에 속하는 연령을 대략 50대로 잡아본다고 하면, 불에 속하는 연령은 20대가 될 것이다. 50대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군대를 가고 취직을 하고, 뭔가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길러놓은 보람이 이제 서서히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첫 월급을 타서는 부모님께 선물이라고 사오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활발하고 기운차게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50대의 후반에 들어있는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부모뿐 아니라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활기찬 젊은이들을 보면서 흥겨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젊은이가 힘이 빠져서 비실비실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른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모습이 당장에 떠오른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래도 어른들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게 될것이고, 자신의 가정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말이다. 이렇게도 오행의 역리(逆理)는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인생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현상을 금다화식(金多火熄)의 현상으로 설명을 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자식들은 힘이 펄펄 넘쳐서 아버지랑 씨름을 해서도 마구 이겨야 지면서도 즐거울건데, 그게 그렇지가 못하고 비실거리게 되는 자식은 씁쓰름한 기분이 들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꾸 걱정이 염려가 되고, 염려가 다시 역정(逆情)이 되어서 결국은 자식의 불기운을 꺽어버리는 현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항상 부모님의 꾸지람을 듣는 얼뜨기 자식은 늘상 그모양이다. 활기를 불어넣어준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더욱 힘을 빼는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3) 토가 수를 극함이 무력하다


수가 토의 극제를 받는데, 수가 넘치면 토는 허물어진다. 이것을 이르는 말이 바로 이번 항목에서 말하는 ‘수다토류(水多土流)’의 현상이다. 물이 많으면 토가 허물어지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히 장마중에 일어나는 산사태는 전형적인 수다토류의 현상이라고 하겠다. ‘군중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온다’고 말한다면 군경(軍警)의 힘으로는 이미 제압을 하기기 버거운 상황임을 인식하게 된다. 자칫하면 발포라도 하게 되는데, 근래 역사에서 쓰라린 부분인 ‘광주항쟁’이 그러한 일면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밀물이라는 말은 군중이 수(水)가 되고 통치자는 토(土)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는지 모르겠다만, 우리 오행학자는 그렇게 보고 설명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국가에 전쟁이 발생하면 오히려 나라를 구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의병대가 만들어 지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행의 순류(順流)에 속한다. 이미 수다토류라는 말을 할 적에는 오행이 역류(逆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것이 더 타당할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대항하는 모습이나, 사업주를 상대로 대항하는 종업원들의 상황이 더욱 적절할 듯 하다.
요즘은 ‘쓰레기매립장’이나 ‘오염발생공단’ 등을 설립하기 위해서 마찰이 많은 모양이다. 또 한참은 안면도에 핵 폐기물 매립장을 만들려고 하다가 도저히 성사를 못한 일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들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민주화가 되어서 민중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지만, 오행적으로 볼때에는 목극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말을 하겠다.
실제로 사주를 접하다 보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고 본다. 사주용어로는 재다신약(財多身弱)이라는 말을 하겠지만, 자신이 극을 해야 하는데 극하는 힘이 부족하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서 반발을 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니까 다스릴 적에는 강력하게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설명하는 주체는 당연히 극을 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강경하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항상 주체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극하는 입장이 무력하게 되면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또한 오행의 역류(逆流)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며, 역시 이것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4) 금이 목을 극함이 무력하다


금이 목을 극하는 것은 결실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목은 금의 기운을 받아서 단단하게 내실을 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의 기운이 무력하게 되면 목은 마구 자라서 결국 속이 썩어버리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목을 걱정해줄 처지가 아닌 것이 문제이다. 금이 당장에 목을 극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까, 이 문제가 더욱 시급하다고 보는 것이다.
금이 목을 극하는 힘이 무력하다면 목들은 금을 얕잡아 볼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명령체계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마구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목의 웃자람을 못막아 줌으로 해서 목들은 금을 우습게 볼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써 예상 되는 것이 바로 ‘목다금결(木多金缺)’이다. 목이 강하니까 상대적으로 금은 이지러진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흔히 비유할 적에는 면도날(도루코의 양날있는 것)로 아름드리 나무를 자르려고 한다면 날만 뭉그러지고 되지 않는다는 말로 한다. 이러한 비유를 생각해 볼적에, 약간은 모양이 없는 비유라고 생각이 된다. 그렇지만 내용의 전달은 충분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를 한다. 말이 되기는 되는 것이다. 다만 좀더 오행의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을 해볼수는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목과 금의 대립에 관계되는 현상을 군대(軍隊)라는 집단을 통해서 읽어보려고 생각한다. 군대라는 곳은 오로지 명령체계만이 의미를 갖는 집단이다. 그 집단에서는 강력한 지휘자가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 강력한 지휘자는 사병들을 통솔하는데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요지부동이다. 이것은 강력한 억제력을 나타내는 금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강력해야 할 지휘부가 흔들흔들할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구테타라고 하는 것도 강력한 지휘부가 흔들릴 적에 발생한다. 통제기능이 부실해지면 그 틈을 타고 아래에서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면 평소에 불만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무슨 종류든지 간에 불만은 있게 마련인데, 그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꾸 키우게 되면 결국 통제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체제는 뒤집하고 마는 것이다. 오래도록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인내심이다.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는 부하에게는 언제가 그 틈이 보이기만 하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목다금결(木多金缺)인 것이다.
모쪼록 금은 단단해야 아름다운 법이다. 강가로 수석(壽石)을 주어러 가본다. 전에 단양이 물에 잠긴다고 해서 수석바람이 엄청 불었던 적이 있었다. 수석을 고를 적에는 가장 먼저 확인을 해야 할것이 ‘얼마나 단단한 돌인가’이다. 모양이 다소 그럴싸 하게 생겼다고 하더라도 푸석푸석한 돌이어서는 얼른 팽개쳐 버리고 만다. 돌이 사랑을 받는 것은 그 단단함이다. 그리고 나서 모양을 보는 것이다. 모양이 사랑을 받는 것도 ‘그렇게 단단한 돌이 이리도 묘하게 생겼을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여기에 있는 금은 물렁한 금을 이야기한다.


(5)수가 화를 극함이 무력하다


이번 항목에 대해서는 뭔가 느낌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된다.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불이 마구 치솟고 있으면 소방수가 대단히 강한 물줄기를 쏟아 부으면 불이 약해진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서 수도꼭지를 틀고서 세숫대야로 물을 퍼다가 끼얻는다면 과연 불이 꺼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답은 나오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이다. 불이 꺼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욱 기세를 떨치면서 타오른다. 이러한 현상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며, ‘화염수작(火炎水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이 강해서 이글거리니까 물을 살라버린다는 말이다. 물을 살라버린다는 말이 좀 어색하다만, 옛적의 표현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요즘같으면, ‘한잔의 물로 불꽃을 제하려 한다.’는 말로 대신 할 수도 있겠다. 문자로 만든다면 ‘화염수작(火炎水酌)’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결론은 같은 이야기이다. 물이 말라버리는 것을 사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가 화를 제해줘야 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실제로 사주에 따라서는 수의 기운이 워낙 무력해서 불을 제하지 못하면 불이 수를 깔본다. 수하의 사람이 깔보는 것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가? 얼마나 기분이 엿 같을런지 상상이 된다. 기분이 나쁘니까 더욱 무리를 하게 되고, 그래서 부하는 더욱 비웃는다. 이른바 ‘악순환(惡循環)’인 것이다. 이런 때에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서 산책이라고 나가는게 스스로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오행의 다양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가장이 되어서 가족을 다스리지 못하면 역시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냥 단순이 물은 불을 극하는 것이니까 물만 보이면 불은 죽은척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다양한 오행의 변화하는 소식을 헤아릴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극하는 힘이 무력하면 발생할 수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생각을 해 봤다.
4. 雪上加霜이 되는 경우




金衰遇火 必見銷鎔, 火弱逢水 必爲熄滅, 水弱逢土
금쇠우화 필견소용, 화약봉수 필위식멸, 수약봉토


必爲淤塞, 土衰逢木 必遭傾陷, 木弱逢金 必爲斫折
필위어색, 토쇠봉목 필조경함, 목약봉금 필위작절


약한 금이 화을 만나면, 반드시 녹아버리고
약한 화가 수를 만나면, 반드시 꺼져 버리고
약한 수가 토를 만나면, 반드시 스며들게 되고
약한 토가 목을 만나면, 반드시 허물어지게 되고
약한 목이 금을 만나면, 반드시 꺽이게 된다.




쇠(衰)한 금이 불을 만나면 피곤한 것은 당연하다. 火剋金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항목이 있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보통은 약한 금이 불을 만나면 금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법칙이 있다. 그런데 이 항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약해도 한참을 약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약한 금이 불을 만나게 되면 녹아버리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다. 어설프게 흙으로 덮어주려고 해도 이미 불기운이 강해서 금이 녹아버렸는데 덮어줘봐야 말짱 헛일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대로 불에게 처리를 맡기라는 이야기다. 이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나마나 한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 실제로 사주를 접하다 보면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주를 가끔 만나게 된다. 바로 그때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읽어 뒀던 것이 영양가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에는 내가 약한데 너무나 약하니까 아예 강한 세력을 따르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본다. 그럼 알듯한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설명을 해서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1) 수가 너무 극을 받으면 스며들어 버린다.


물은 아주 미약하고, 반대로 흙은 매우 왕성하다면 이렇게 약한 물은 보나마나 흙 속으로 스며들어서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미 흙 속으로 스며들어버린 물은 물이 아니고 습기(濕氣)에 불과할 뿐이다. 그대로 토화(土化)해버린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이야기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이미 흙 속으로 스며들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를 그냥 물이라고 고집을 피우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실제로 사주를 볼적에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다가 가끔 있는 경우인데, 이러한 상황에 부합되는 경우도 1% 정도 미만일 것이다. 이렇게 적은 경우에 불과하지만 또한 몰라서는 곤란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적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상담을 의뢰하는 본인의 입장에서는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이러한 경우를 몰라서 포기하거나 놓쳐버린다면 이것은 학자로써의 직무유기라고 생각된다. 서대승 님의 마음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항목을 만들어서 공부하는 후학들로 하여금 놓치지 않고 일일이 점검을 할 수가 있도록 일일이 분류를 해서 상황설명을 하신 것이 분명하겠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기억하자. ‘물이 너무나 미약한 상황에서 토가 지나치게 극을 해버리면 흙 속으로 스며들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2) 목이 너무 극을 받으면 꺽어진다


200살은 먹었음직한 거목이 포크레인에 패여져서 뽑히는 장면을 보았다. 그렇게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문명의 이기인 도구에 의해서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서 죽어버리는 장면은 또 오행학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자연파괴는 이렇게 순식간에 이뤄진다. 200년의 세월을 없애는데 200년이 걸리는 것이 아니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목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만약에 금이 대단히 많고, 나무는 약하다면 사태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결과는 보나마나이겠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장작개비도 못되는 부스러기일 망정 말이다. 어쨌던 목이 너무나 약한 상황이라면 그 결과는 아마도 도끼질을 하는 옆에 있는 나무 부스러기 정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금이 강력하게 목을 극하고 있으면 성장을 해야 하는 나무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겠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다. 물론 나무는 당연히 죽어버린다.


(3) 화가 너무 극을 받으면 꺼질 수밖에 없다


약한 불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호롱불을 연상할 수가 있겠다. 호롱불을 보지 못하신 벗님도 계시겠지만, 40대에 계신 연령이시라면 실제로 보셨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게 참으로 약하다. 문만 열고 사람이 들어와도 꺼지고, 옷만 벗어도 그 바람결에 꺼져버린다. 촛불은 그래도 여간 바람에도 견디는데 호롱불은 이렇게 약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가 극을 받으면 꺼진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호롱불이 생각나서 말씀을 드려봤다.
또 생각나는 것 중에 하나는 잠수병(潛水病)이라는 것이 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잠수병이 생길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20여미터 이상 들어가기가 어렵고 전문가들도 깊은 물에서 오래도록 일을 하면 잠수병이 걸리게 될 위험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잠수병이라는 것도 오행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수극화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해본다. 우선 물의 압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심장(火)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심장인 화가 바닷물인 수의 극을 과다하게 받아버리면 잠수병이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때는 물 속에서도 산소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렇지만 산소가 있는데도 잠수병이 생긴다는 것을 보면서 아무래도 심장의 화기운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을 해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깊은 물속이 아무래도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역시 과다한 물의 극을 받으면 화가 꺼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불이 물을 만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무는 금의 극을 받아도 부스러기나마 남기 마련이지만, 불은 자취를 찾을 도리가 없이 완전하게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오행간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보통 극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물이 넘치는 지경이라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뭐하러 구구하게 늘어 놓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낭월이도 이 대목을 공부하면서 정말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신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난다. 그런데 이렇게 강의랍시고 글을 적다 보니까 역시 별수 없이 지껄이게 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도 업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본다. 앞에서의 상황을 주욱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여러 가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구색을 보니까 이러한 항목도 하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대승님께서 생각하실 적에, 자칫 처음 공부하는 학인들이 약한 오행은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었을 법 하다. 그렇다면 이미 꺼진 불을 불이라고 되살아 나라고 나무를 갖다가 쌓아 놓는다면 과연 불이 붙을 것인가를 설명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다소 번거롭다 싶으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서 이러한 대목을 끼워 놓으신 자비심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야 그러한 생각이 든다. 전에는 급한 마음에 얼른 용신찾아서 내 운명을 읽어보기에 급급해서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을 이야기들은 훌쩍훌쩍 넘기면서 영양가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만 열심히 읽었는데, 이즈음에 와서야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읽어 넘겼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상상과 추리를 하는 자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4) 토가 너무 극을 받으면 허물어진다


이번에는 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토는 건드리면 부스러지는 성분이다. 그런데 부스러져봐도 역시 토이다. 아니 오히려 토가 단단해지면 쓸모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면 쟁기로 갈고 노타리로 덩어리를 부순다. 이렇게 해서 사용을 하는 토인데 무슨 의미로 토가 부서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곰곰 생각을 해보는데, 글자로 봐서는 허물어지고 꺼진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함정처럼 움푹 패이는 그런 모습인 듯 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요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읽어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과다한 사세확장으로 인해서 도산되는 기업이 많다고 한다. 사세를 확장시키는 것은 얼른 재벌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고 이러한 마음은 앞으로 나가는 마음이니까 아무래도 목의 마음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 세력을 무리하게 넓혀간다는 의미는 목의 기운이 과다한 영향이라고 봐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수적으로 뭔가가 부작용이 나타나야 정상이 될 것인데, 무리한 사세확장은 틀림없이 금전적인 여려움을 낳게 될 수밖에 없다. 만약에 금전적으로 무리가 없는 한도 내에서 확장을 한다면 아무도 무리한 확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이 부서지게 되고, 그 돈은 신용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아무래도 돈이 떨어지면 신용으로 끌어다가 사용을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신용이 떨어질수밖에 없고, 신용이 부서진다는 말은 역시 오행에서 토의 상징인 신(信)이 부서진다는 것과 완전하게 일치를 하는 것이다. 즉 매일 뉴스에서 들을 수가 있는 ‘기업의 부도’인 것이다. 이미 부도가 나버렸다는 의미가 이번 항목의 성격상 가장 잘 어울릴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그리고 부도가 나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무리한 사세확장이 원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물욕(物慾)은 자신이 수십년을 공들여서 가꿔놓은 기반마져도 물거품이 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이러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과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5) 금이 너무 극을 받으면 녹는다


원래가 금은 녹아야 한다.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드는 것이 금인 까닭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어서인지 생각을 해본다. 금이 녹을 정도가 되면 실제로 그것이 금으로써의 존재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일시적으로 녹았다가 다시 금으로 환원이 되는 것은 예외로 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사시사철 그렇게 녹아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잠시 목적에 의해서 열을 받았다가는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의미이다. 불이 너무나 태왕한 상태로 열을 발산하고 있다면 미약한 금은 보나마나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항상 녹아있는 금은 누가봐도 불덩어리이지 금이 아니다. 지금 서대승님은 이러한 불덩어리를 그냥 금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을까봐서 써놓은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용광로에서 녹아있는 쇳물은 그 자체로 불덩어리일 뿐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다만 이것을 어떤 틀에다가 부어서 그릇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여기서는 항상 그 상태로 쇳물로 존재를 하게 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아두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렇게 지나치게 극을 받으면 그 본래의 형체가 변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봤다. 이것을 일러서 극이 과다한 경우에 발생하는 오행의 변화라고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적절한 것이 가장 좋다. 지나친 것도 반갑지 않고, 부족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데 적절해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경우라면 누구던지 원하는 가장 보기좋은 것인데,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러한 상황은 참으로 어렵다.
대다수는 필경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살아가게 마련이고,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현상이 있으니까, 인간의 사주에서도 또한 그러한 모습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사주는 치우치거나 말거나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중용의 도를 취할 수만 있다면 도인이겠는데,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욕망에 휩싸여서 극에서 극을 달리는 삶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번의 경우처럼 특별한 상황에 해당하는 것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분명히 만날 수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해를 하고 넘어야가 할 대목인 것이다. 이것이 서대승 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5. 강한 흐름은 막지 못하는 경우


强金得水 方挫其鋒, 强水得木 方緩其勢, 强木得火
강금득수 방좌기봉, 강수득목 방완기세, 강목득화


方洩其英, 强火得土 方斂其燄, 强土得金 方化其頑
방설기영, 강화득토 방렴기염, 강토득금 방화기완




강한 금이 수를 만나면, 바야흐로 예리함을 꺽게되고
강한 수가 목을 만나면, 바야흐로 세력을 부드럽게 하고
강한 목이 화를 만나면, 바야흐로 빼어남을 드러내며
강한 화가 토를 만나면, 바야흐로 불꽃을 감추게 되고
강한 토가 금을 만나면, 바야흐로 완고함을 화하게 된다.




이번 항목은 바로 앞의 항목과는 정 반대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예는 너무 지나치게 약한 오행을 이야기 한것인데 이번에는 또 지나치게 강한 오행의 처리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첫번째의 구절을 인용해보면 강한 금은 불로써 다스리기가 벅차다는 의미가 있다. 금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이야기는 불이 매우 약하다는 말도 포함이 되기 때문에, 약한 불로써 워낙이 강한 금을 녹이려고 해봐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니까 불로 다스릴 마음을 먹지 말고 차라리 물로써 금의 기운을 金生水하는 것이 좋겠다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어떤 오행이 강하다면 어느 정도로 강한가? 하는 것도 반드시 참고를 해야 한다. 강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기 대문이다. 물론 약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약한지도 분별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분별을 해서 이번의 경우처럼 지나치게 강하다는 판단이 나왔다면 어설프게 극하는 것으로 균형을 잡아보려고 해봐야 결국 부작용만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차라리 그대로 흐름에 맡겨버리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홍수가 나서 대단한 세력으로 물이 흐를 적에는 막아볼 도리가 없다. 그런 경우에는 그대로 물이 흘러가도록 도랑이나 잘 치워주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는 결론이다. 그렇게 세차게 흐르는데 그 물을 막아보겠다고 가마니때기나 가래를 들고 설쳤다가는 자칫 급류에 떠내려 가게 될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이 항목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1) 목이 너무 강하면 꽃을 피우는게 좋다


이제 다시 또 지나치게 강한 경우에 어떻게 처리를 하는 것이 지혜로운지를 생각해보자. 간단하게 설명된 것을 보고서도 능히 이해를 할 일이지만, 다시 부연설명을 해본다. 나무의 기운이 강하면 금으로 극하도록 되어있다. 이렇게 극을 하는 이유는 목의 기운이 강하면 자칫 우쭐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으로 한방 먹이면 잠잠해 지기 때문에 이렇게 극의 방법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어느 정도 강할 적에 이야기이다. 이번 항목에서 말하듯이 지나치게 강하여 금은 보잘것이 없다고 한다면 약한 금이 나무를 극할 방법이 없이 되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구테타가 일어나는 비극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묘안을 짜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지나치게 왕성한 나무는 순리로 흐르게 그대로 둬서 흐름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그 순리로 흐르는 것은 목생화의 이치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반드시 이렇지 않으면 안된다는 형태가 존재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목이 지나치면 불을 찾아야 만이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를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2) 화가 너무 강하면 흙으로 덮는다


불이 강하면 물로 극하여 조절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불이 너무 강해서 약한 물로는 다스리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이렇게 이미 강한 상황으로 기울어져버린 경우에는 물에 대해서는 고려를 할 수가 없다. 오히려 불길만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는 자극요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말씀이다. 자극을 해봐야 오히려 반발하게 되므로 그냥 두고서 불기운이 자연스럽게 토의 방향으로 흐르게 놔두는 것이다. 모든 오행은 필시 흘러가는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강한 불은 그 방향을 토에게로 두는 것이다.
원래가 토는 강한 불기운을 흡수하는데 선천적으로 탁월한 재능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토가 좀더 습기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면 더욱 반갑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다른 오행으로는 지나치게 강렬한 불기운을 다스릴 방법이 없다는 것만 분명하게 이해를 하면 충분하다. 저울질을 해봐서 너무나 불이 강해버리면 바로 이번 항목의 상황처럼 거의 무조건이라고 할 만큼 토의 작용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3) 토가 너무 강하면 돌로 화한다


이번에는 지나치게 강한 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토는 그 본성이 중립을 표시하는 성분이다. 그런데 이 중립이 지나치게 강하면 그 지나친 것의 부작용이 발생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다른 그 무엇으로도 토를 다스릴 수가 없다. 나무로 토를 극해야 하는데, 이미 토가 견고해져서 나무의 뿌리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필히 토가 금으로 화하는 것이 가장 반갑다고 한다. 이렇게 변해주면 토는 비로소 그 강력하게 고집스러운 모습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토가 금으로 화한다는 것이 여간해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토가 단단해지면 바위가 된다는 정도로 헤아리고 그만 두는 것이 오히려 편안할 듯 싶다. 토는 유난히도 고집이 세다. 은근하게 자기 주장이 옳다고 밀어붙일 적에는 영락없는 황소고집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강력한 토가 되면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야 하는 토가 오히려 중립을 지키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뭐든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은 치우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토가 생해주는 작용만이 활동을 하게 된다. 자신의 자식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고집스러움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원래가 고집스러운 어른을 구슬러 보려면 사랑하는 자식을 앞장세우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토가 지나치게 강할 때에는 다른 것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고 오로지 금을 사용해서 토생금으로 기운을 흘려 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요령을 이해하면 되겠다.


(4) 금이 너무 강하면 물을 만든다


금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도 또한 불로써는 다스릴 단계가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한 금은 물로써 기운을 돌리는 것이 역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령 땅 속의 암반은 불로써 다스려봐야 별 영향이 없을 것이 뻔하다. 이러한 암반은 극을해서는 도저히 먹혀 들질 않은므로 필히 암반을 뚫어서 생수를 뽑아 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이해를 해보도록 하자.
지하 150m 아래에서 뽑아올린 물로 만든 맥주는 맛이 더 좋다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컨데는 맛이 좋을 것도 같다. 왜냐면 대단히 강한 암반아래에서 나오는 물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 광물질을 포함한 좋은 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오행으로 볼적에는 강력한 금은 물을 만드는 것밖에 다른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정도 강한 바위라면 불로써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한 금에 대해서 그 사용방법을 일러주는데, 역시 원문에서 보이는대로 ‘강금득수 방좌기봉(强金得水 方挫其鋒)’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강력한 금이 물을 만나면 비로소 그 날카로운 칼 끝을 꺽는다.’는 말로 풀이한다. 이 한마디의 말은 온갖 말로 설명을 하는 것 보다도 더욱 분명하다고 하겠다.


(5) 수가 너무 강하면 나무를 기른다


역시 이미 절제의 단계를 넘어선 물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토극수(土剋水)라는 말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토극수는 고사하고 수극토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서 도리없이 나무나 기르도록 명령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의 항목을 이해하면서 모순을 느끼게 될법도 하다. 이미 맨 처음에 다룬 ‘수생목이지만, 수가 많으면 목이 뜬다.(水多木浮)’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이다. 여기에서는 지금 나무가 떠버릴 것이 확실한데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해서 나무를 길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오행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상황의 설명을 읽으면서 모순을 느낄 수도 있어야 생각이 있는 학자라고 하겠다. 그냥 일러주는대로 ‘그저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아무래도 좀더 깊이있고 살아있는 오행의 원리로 다가가는데에 애로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상황은 같지만,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나무가 주체가 되고, 여기에서는 물이 주체가 된다. 그러니까 나무의 입장에서는 떠버리거나 말거나 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강하므로 나무로 기운을 돌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서는 또 ‘상당히 이기적이네’ 하는 말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이현령비현령(耳縣鈴鼻縣鈴)’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귀에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비웃는 의미로 이러한 말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비웃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그냥 비웃기나 하고 넘어간다면 이 사람은 영원히 오행의 참소식을 맛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리는 이현령비현령인 듯 하다. 생각할 나름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가 있겠는데, 세상의 모든 이치는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다 보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두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장님의 몫이 아니라 우리 보통의 사람들 모두가 갖고 있는 안목일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하겠다. 전체를 깨닫지 못한 보통의 안목으로는 부분적인 것만 보여야 정상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행이 서로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느끼는 상태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다르기 마련이다. 물과 나무의 입장에서 볼적에도 마찮가지이다. 나무는 물이 너무 많아서 싫은데, 물은 또 나무로밖에 흐를 수가 없으므로 나무를 애지중지 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동상이몽이라고 한다. 남보기에는 같은 조건이지만 실제로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조건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오행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여건에 대해서 두루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칫 헛깨비만 보고서 오행을 안다고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이 되어서이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이 걱정이 되신 서대승님께서 구구절절히 머리로 이해를 하고 가슴으로 느낄 내용들을 기록해 놓으셨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좁은 견해에서 보다 넓은 견해를 갖게되는 밑바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믿고서 이 항목을 줄인다.
第六部


왕쇠론(旺衰論)






오행이 강하고 약하게 되는 경우에 어떻다는 형태를 이해해 봤다. 그런데 과연 어떻한 경우에 강하고, 또 어떤 경우에 약하다고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항목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강약(强弱)을 저울질하는 요령에 대해서 이해를 하도록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왕상휴수사(旺相休囚死)’라고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줄여서 하는 것이 ‘왕쇠(旺衰)’인 것이다.
이렇게 왕하고 쇠한 상황을 어떻게 분별하고 판단해야 할 것인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올바른 오행을 이해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개개(個個)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를 했는데, 이러한 것이 서로 얼키고설키면 이떻게 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우선은 오행으로써 서로 대비를 해서 이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확대해석은 계절을 기준해서 판단하면 이해가 빠르다.
계절을 오행의 분류로써 설명하게 되면 약간 혼동스러운 부분이 있다. 바로 토의 계절인 환절기이다. 환절기를 토의 계절이라고 보는데, 실제로는 그 형세가 모두 각각이다. 여름의 환절기와 겨울의 환절기는 정 반대의 현상이 있을 것은 상식으로써도 짐작이 되겠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그냥 토는 무조건 환절기로써만 보자는 것으로 통일을 시켜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설명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모두 일일이 설명하려면 또한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지지(地支)에 대한 것은 다음에 다시 세밀하게 배울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오행으로만 나누도록 한다. 이점만 혼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해를 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이러한 원리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을 해보도록 한다.
1. 나와 같은 오행은 왕(旺)이다




왕(旺)은 왕(王)과도 통한다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오행의 강약을 저울질 할적에 같은 오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해당하는 오행은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도표로써 나타낸다면 간단하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旺)의 형상


상황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계절春夏四季秋冬



어느 오행이 자신과 동일한 오행을 만나면 왕이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오행뿐만이 아니라 계절에 대해서도 고려를 하게 된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하겠다. 그래서 오행에 대해서 왕쇠한 형상을 생각할 적에 가장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 계절이다. 언제 태어났느냐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일일이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한다.


(1) 목이 목을 본다


목이 목을 보거나 목이 봄에 태어나면 이것을 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생각하는 시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사주를 볼적에 월지(月支)에 해당하는 글자가 목의 성분일 경우에 한해서 봄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의 오행이 월지에 있을 경우에는 아무리 꽃이피고 새가 울어도 봄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건데, 입춘이라고 하는 절기를 놓고서 봄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붙어있다. 그런에 우리가 느끼기에는 아직도 바람이 매서운 겨울이라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어째서 아직도 추운 겨울을 놓고서 봄이 시작된다고 했을까를 생각해면, 명리는 오행의 형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이뤄지기 이전의 기운(氣運)을 느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꽃도 피지 않아서 봄이라는 기분이 전혀 들지않는 상황이지만, 오행의 기운은 이미 봄의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운명의 시계는 이렇게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간과하지 않고 포착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앞으로 다가올 개인적인 운명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형상만 보고서 결론을 내린다면 항상 뒤지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기운이 먼저 발생하고 나서 비로소 형상이 생기는 까닭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목의 기운이 무르이고 나서야 비로소 잎도 피고, 꽃도 피는 본격적인 봄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서 아직은 겨울이라고 느껴지지만 자연의 기운은 이미 봄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봄이 어째서 목이냐고 하는 의문이 들런지도 모르겠다. 낭월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혹 공부를 처음 하시는 벗님은 어째서 봄이 목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본다면, 앞에서 배운 오행의 분류에 대한 표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그 표를 보면 목에 해당하는 성분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중에서 봄도 목의 일부라는 것을 헤아리게 된다. 그렇다면 봄이라고 하는 계절에서 뭔가 목에 해당하는 성분을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
봄은 희망이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계획은 봄에 하게 된다. 또한 봄에는 모든 자연의 초목들이 성장을 크게 한다. 이것도 목이 뻗어나가는 본성이 매우 왕성한 시기임을 짐작하게 된다. 이렇게 다른 계절과 비교를 해서 목의 기운이 많이 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봄철을 목이 왕성한 계절로 못을 박아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기억하고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실은 선현들의 수없이 많은 임상과 연구를 통해서 확고하게 다져놓은 것이라는 점을 한번 쯤은 생각해보는 것도 후학의 도리라고 생각된다.


(2) 화가 화를 본다


화가 화를 보면 왕성한 것이라는 것은 앞의 목에 대한 것에서 이미 감을 잡을 수가 있겠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여름과 불과의 관계를 대강 생각해보도록 한다. 여름이 불과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도 봄에 대한것과 마찬가지로 아직 본격적으로 여름의 땡볕이 아니라고 하는 시기에 이미 기운적인 상태에서는 여름의 불기운이 왕성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월지의 오행이 불이라면 일단 불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사주의 어디에 있던지 간에 오행이 불에 해당할 경우에는 그 글자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세력의 정도를 판단하면 된다.


(3) 토가 토를 본다


오행에서 토가 토를 보면 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계절에다가 집어넣으려면 뭔가 만만하지 않은 면이 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지지(地支)에 대한 공부를 마친 후에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지금으로써는 일단 토가 왕해지는 것으로 이해만 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즉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미세하게 살피는 방법이 있으므로 크게 걱정을 할 일은 아니다. 일단 월지(月支)가 토에 해당하는 진술축미(辰戌丑未)월이라면 그냥 왕한 것으로 본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이들 서로간에는 매우 복잡한 관계가 있는데, 간단하게 이해를 도와본다면, 우선 여름의 환절기와, 겨울의 환절기에 대한 토의 힘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가 사계절의 끝에 있기 때문에 이름도 사계(四季)라고 하는 것이다. 계(季)라는 글자의 의미는 막내라는 뜻이다.
즉 원칙적으로 본다면 토의 계절은 없는 셈이다. 다만 각 계절의 막내로써만 존재를 한다는 의미이고, 그러한 계절의 끝들을 모아서 그냥 편리하게 붙인 이름이 사계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끝에서 토의 성분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므로 다른 오행에 비해서 좀 복잡한 형상을 갖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지지에 대한 연구가 깊어진 다음에 다시 거론을 하게 된다.


(4) 금이 금을 본다


가을에는 금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결실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금의 기운이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할적에 가을에는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가는 모습을 하는 것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을을 금의 계절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봄과 비슷한 온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봄철에 느끼는 포근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서늘한 기운이 바로 금의 성분에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5) 수가 수를 본다


겨울은 수의 계절이다. 얼핏 생각하면 여름이 오히려 수의 계절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는데, 그 이유는 여름이 되면 모두가 물을 찾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본체를 살펴보면 더위로 인해서 물을 찾을 뿐이지, 더위가 아니라면 물을 찾을 이유가 없다고 봐서 항상 겉모습에 마음을 쓰지말고 실체를 파악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보겠다.
겨울에는 온통 물로 인해서 난리가난다. 평소에는 잘 다니던 고갯길도 겨울철에 눈이 약간만 내리면 엉망이되어버리고, 사람의 마음도 추워서 잔뜩 웅크려든다. 수의 기운이 위축(萎縮)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겨울을 수에다가 집어 넣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다시 돌고 도는 오행의 순환법칙은 수생목(水生木)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것은 또 머지않아서 봄이 올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한다.
2. 나를 생해주는 오행은 상(相)이다




이번에는 왕보다는 약간 못하지만 그래도 기운을 도와주는 경우에 해당하는 상(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상이라는 글자는 재상(宰相)이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왕(旺)은 왕(王)이라고 했는데, 이번의 상(相)은 재상인 셈이다. 재상이라는 말은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완전하게 강력한 힘은 얻지 못했지만, 두 번째로 강력한 힘을 얻은 것은 되므로 좋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이 되는 조건은 내가 생조(生助)를 해주는 오행을 만나면 성립이 된다. 여기서 혼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은, 내가 생해주는가, 나를 생해주는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생해주는 것으로 상을 삼게 된다. 각 계절의 상황을 고려해가면서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기 전에 우선 도표를 보면서 미리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


상(相)의 형상


상황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오행水木火土金
만나는 계절冬春夏四季秋



(1) 목이 물을 본다


물이 나무를 생해주므로, 물의 입장이 아니라, 나무의 입장이다. 나무가 계절로는 겨울을 만나면 힘을 비축하고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이다.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할 적에는 겨울나무는 죽어있다고 보기 쉽다. 그렇지만 오행가의 눈에는 겨울나무는 기운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에게는 겨울이 필요하다. 겨울에 힘을 많이 축적해야 봄에 더욱더 왕성하게 뻗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봄처럼 왕성한 것은 아니지만 실은 봄철에 왕성해질 수가 있는 것도 겨울의 기운축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에 태어난 나무는 기운을 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물론 힘을 얻고 있는 셈이다.


(2) 화가 목을 본다


이번에는 불이 봄에 해당하면 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불이 여름이 되면 물론 왕성하겠지만, 봄에도 서서히 힘이 자리고 있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봄철에는 목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상(相)에 해당하고, 상당히 힘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3) 토가 화를 본다


사계절의 토가 불을 만나면 기운이 강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의 기운을 제대로받는 계절의 토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상태이다. 이때의 토는 가장 강력한데, 여름내내 강한 불길을 받아서 열기를 저장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태어난 토는 가장 허약한 기운이 되겠다. 그래서 같은 왕이라고 하더라도 상(相)의 성분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정도차이가 있는 것이다.


(4) 금이 토를 본다


금의 기운을 생해주는 토의 계절을 만나면 상이다. 그런데 토가 이리저리 널려 있으니까 금도 여기저기에서 생을 받게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금이 받을 기운은 네군데이므로 매우 강하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오행 중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금이기도 하다. 그리고 토 중에서도 여름을 거치고 넘어온 토의 생이 가장 튼튼하다고 본다.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서 참고를 하게 되는데, 결국은 도움이 되는 것이므로 금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5) 수가 금을 본다


수는 금으로부터 생을 받는다. 그래서 가을에 태어난 수는 특히 원기가 충실한 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통원(秋水通源)’이라는 말로써 그 생왕한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가을에 태어난 물은 그 근원에 통해져 있어서 상당히 좋다는 의미이다.
3. 내가 생해주는 오행은 휴(休)이다




휴식은 일을 마치고서 쉬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백수건달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일을 하지 않고서는 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을 한 상태는 무엇인가를 알면 되는데, 바로 앞의 상(相)에 대한 설명에서 주객이 바뀐 상태가 휴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즉 내가 생해주는 것이 휴가 되는 것이니 마치 아기를 낳은 어머니의 몸처럼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휴(休)의 형상


상황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오행火土金水木
만나는 계절夏四季秋冬春



(1) 목이 화를 본다


나무가 여름에 태어나면 휴(休)가 된다. 얼핏 생각해보면 여름에는 오히려 나무가 왕성해서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본다면 여름의 나무는 기운이 아기를 낳은 엄마처럼 허약하다는 것을 이내 알 수가 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우느라고 속에 품고 있던 기운을 모두 탕진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나무는 뿌리를 건드리면 이내 말라죽어버린다. 그 이유는 허약한 상태의 어머니를 일시킨 것과 같아서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잘 못해서 병을 얻은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여름에 태어난 나무는 쉬어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그냥 쉬기만 하면 기운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보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 보약은 물론 시원한 감로수가 될 것이다. 물이 있어야만이 나무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2) 화가 토를 본다


불의 난폭함도 토를 보면 자상해진다고 적천수(滴天髓)에 언급이 되어있다. 그리고 약한 불은 토가 많으면 불의 힘이 까물까물해진다는 말도 있다. 이말은 화생토가 되어서 휴에 속하면 불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는 약해져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불은 약해지면 꺼져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약한 불은 긴급하게 나무를 추가해서 기운을 돋궈주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필요해지는 오행이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서 나중에 배울 용신(用神)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쓰임새가 있는 글자인 것이다.


(3) 토가 금을 본다


토가 금을 만났으니 자신의 기운을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휴가 된다. 특별히 다른 이야기는 없을 듯 하므로 간단하게 말씀드린다.


(4) 금이 수를 본다


금이 수를 보면 기운이 허약해진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과연 금이 수를 보면 기운이 허약해질런지는 얼른 공감이 가지 않지만, 실제로 사주를 볼적에는 당연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실제로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바위가 거센 물결을 오랬동안 맞고 있으면 깍여서 닳아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단단한 돌은 수석으로 재탄생을 하겠지만, 금의 입장에서는 약해지는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현상을 금이 수를 보면 약해진다고 응용해본다.


(5) 수가 목을 본다


수는 목을 보면 약해진다는 말이야 말로, 가장 이해하기가 쉬운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나무가 물을 흡수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대목은 더 이상 긴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된다.
4. 내가 극하는 오행은 수(囚)이다




왕과 상은 내가 어떤 형태로던지 도움을 받는 형태를 의미한다면 이번의 수(囚)는 피곤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내가 극을 하는 형태인데, 극하는 것이야 내가 극을 하는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으랴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번항목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대일(一對一)로써는 전혀 걱정을 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대다(一對多)라는 조건에서는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적지(敵地)라고 한다면 이 조건은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물론 적들이 나보다는 약하지만, 숫자가 다량이라면 나도 지쳐서 쓰러질 가능성이 많게 된다는 것이 이번에 생각해보는 수(囚)의 의미이다.


수(囚)의 형상


상황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오행土金水木火
만나는 계절四季秋冬春夏



(1) 목이 토를 본다


일단 내가 극하는 오행이 되는 것이다. 계절로 따져도 내가 극하는 오행이 왕성한 계절이다. 목이 토를 본다는 것도 내가 극하는 계절인데, 특히 토의 계절은 사방으로 널려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건이 좀 까다롭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은 그래도 아직 남은 힘이 있어서 상당히 활발하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라던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은 상당히 허약한 상태에 있는 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목의 기운이 상당히 강하지 않으면 견디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실제로 나무는 땅에다가 뿌리를 내리고 지배를 하려고 하지만, 만약에 흙 속에 스며들어있는 물이 없다면 오히려 토의 성분이 목의 수분을 흡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이 토를 극한다고 방심을 해서는 곤란하다. 비상사태라도 선포하고 매우 주의를 해서 운신해야 한다. 이것이 갖히지(囚) 않는 중요한 사항인 것이다. 일명 토수목(土囚木)이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함정에 갖혀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2) 화가 금을 본다


가을의 불을 이야기한다. 여름의 이글거리던 태양도 어느덧 기울어가고 서서히 냉기운이 감돌고 있는 계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이 방자하게 금을 이긴다고 호언장담을 하다가는 어느날 갑자기 금기운에게 휩싸일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형세가 바로 LPG 통이라고 생각해본다. 불의 기운이 약하므로 쇠로 된 통속에 갖혀버린 것이다.
화극금이라고 하였지만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는 금수화(金囚火)의 공식을 다시 만들어야 하게 될 것이다. 약한 불은 금이 능히 가둘 수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묘미가 있는 통이다. 가스통 말이다. 이렇게 불이 녹여버릴 수가 있는 금이지만 세력이 약하면 도리어 갖혀버리는 것이 바로 수(囚)인 것이다.


(3) 토가 수를 본다


강바닥에 있는 토는 수에게 갖혀버린 토이다. 스스로 수를 극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수의 상황에 따라서 꼼짝도 못하고 물속에서 잠자고 있다. 그렇게 갖혀있는 것도 역시 토의 세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강바닥에다가 계속적으로 흙을 실어다가 부어댄다면 토는 강해져서 물을 가로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제방이 될 것이다. 서해안의 간척공사도 그러한 형상의 변형이라고 생각된다.
서산의 A지구나 B지구의 대규모 간척공사를 보면 토가 왕하지 않고서는 물을 제압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현장이 된다. 약한 토는 바다의 갯펄이 되어있다. 물만 들어오면 이내 진흙이 되어버리고 물이 빠져서 조금때(干潮)가 되면 다시 단단해진다. 결론은 토의 세력에 달렸다. 바닷물이 아무리 넘쳐서 토의 세력이 그보다 강하다면 능히 물을 제압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의 세력을 토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토극수(土剋水)라고 큰 소리를 쳐봐야 결론은 수수토(水囚土)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배운다. 물론 겨울의 얼어있는 토가 가장 잘 어울리는 허약한 토일 것이다.


(4) 금이 목을 본다


봄철의 목기운이 워낙이 강하니 봄에 태어난 금은 상대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봄에는 아무리 강력한 살기(殺氣)도 포근한 봄볕을 받게 되면 봄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금의 살기도 봄에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상황을 일러서 목수금(木囚金)이라고 하면 되겠다. 상황은 물론 금이 매우 주의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절대로 힘자랑을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 교훈임은 물론이다.


(5) 수가 화를 본다


여름의 불을 생각해본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에서 남아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강력하게 응고하는 물조차도 산산이 분산이 되어서 수증기(水蒸氣)로 화하고 만다는 것이 이번항목의 주제이다. 응고하는 물이 분산되어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꼴사나운 모습이다. 물론 열기운이 약해진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응고를 하겠지만, 문제는 여름에 태어난 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수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으로 도와서 금생수를 하고 싶지만, 금도 여름에 남아날 턱이 없으니 그냥 마음만 있을 뿐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화수수(火囚水)가 된다.
5. 나를 극하는 오행은 사(死)이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나를 극하는 오행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앞의 항목에서 갖혀버리는 상황을 생각해봤지만, 이번에는 더욱 참혹한 상황이 전개될 모양이다. 나를 극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겠지만, 일단 그러한 입장, 즉 하늘이 무너지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인 것이다. 가능하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가 말이다.
원하지는 않지만 생길 수는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미리 배워둬야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死)의 형상


상황 오행木火土金水
만나는 오행金水木火土
만나는 계절秋冬春夏四季



(1) 목이 금을 본다


불도 금의 계절에는 갖혀버리는 마당에 나무가 금의 계절에 처한다면 천상 죽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死)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일 적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이 가을에 태어난 나무라고 한다면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무슨 묘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의 기운이 넘치는 가을에 태어나면 우선 물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데, 물의 도움이 있다면, 금기운에 눌려서 죽어버리는 비극은 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극을 받는 계절에 태어나면 살아날 방법을 찾기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조건 나를 생조해주는 수의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가을의 목은 이렇게 상태가 좋지않은 것이다.


(2) 화가 수를 본다


상태가 나쁘기는 겨울에 태어난 화도 마찬가지이다. 매우 약해서 자칫하면 꺼져버릴 수밖에 없는 허약한 상황이다. 사방에서 수의 기운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는 냉혹한 수의 기운을 부드럽게 완화시키는 목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이니 스스로는 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토가 목을 본다


봄철에는 농부도 흙을 잘게 부숴버린다.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행위겠지만, 오행가의 눈에는 목극토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약하게 부숴진 흙은 조금만 비가 내려도 쓸려서 떠내려간다. 목의 성분이 워낙이 강하기에 여간해서 토를 구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때에는 강력한 불길만이 최선이다. 억지소리 같지만, 가령 가뭄이 엄청 심하게 들어서 몇십일간 쨍쨍 내리쪼이는 땡볕이 진행되면 농부는 밭을 갈지 않는다. 토가 딱딱해졌기도 하거니와, 밭을 갈고서 씨앗을 뿌려봐야 싹이 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오행가는 ‘불기운이 토를 생해줬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흙의 입장에서는 농사를 지으려고 밭을 갈아부치는 일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토는 가만 두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4) 금이 화를 본다


이번의 경우에는 여름에 태어난 금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인데, 금이 여름에 나면 무조건 허약하여 녹아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일상적인 결론이다. 이렇게 열기가 확확 달아 오를 적에는 반드시 토로서 금을 덮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불과 금 사이를 격리시키는 것으로써 금을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금이 자신의 본성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다른 계산이 먹혀들지 않는다. 물론 물로써 강한 불기운을 제압하는 방법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영구한 방법이 될숙가 없다. 즉 금이 화의 협박으로부터 일시적인 도피는 되겠지만, 다시 금생수로써 물을 생조해줘야 하는 입장이 발생하므로 길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형태는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보겠다. 진통제가 치료되는 약은 아니지만, 대단히 많이 팔리고 있다. 즉 임시변통적인 방법을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이다. 여름의 열기앞에 처한 금을 구제하는 방법으로는 필히 토로써 금을 덮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서, 차선책으로 물로써 불기운을 일시적으로 제압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가장 올바른 오행관이라고 하겠는데, 실제로 사주를 볼적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흔한 경우는 아니므로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토로써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만 이해하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5) 수가 토를 본다


허약한 물이 토의 계절을 만나면 모두 스며들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서 마련해둔 항목이다. 물이 스며들어버리면 자신의 본래 소임인 응고하고 압축하는 작용을 할 수가 없다. 물은 응고하는 성분인데, 토속에 흡수되어버리면 완전히 토의 마음대로 놀아나는 도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되는 것이 상책이지만, 세상의 일이란 것이 또한 어쩔수 없이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쨌던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만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을 만나는 것이 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그런데 토라고 하는 성분은 사계절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많은 변수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판단을 해야 한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피곤한 토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의 토이다. 이때는 대단한 열기를 흡수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간한 물의 세력이 아니고서는 땅속으로 스며들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된다. 그리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토의 계절에는 비교적 사태가 급하지 않다고 보는 것인데, 이때는 겨울의 왕성한 수의 계절을 지난시기가 얼마되지 않았고, 또 토의 상황도 매우 허약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약간의 상황에 의한 행운이다. 워낙이 사주전체가 왕성한 토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라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위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면 곤란하게 된다. 결국은 어떠한 상황이 되던지 금이라는 성분이 없어서는 큰일이라는 점만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계절을 위주로 해서 오행의 상태를 살펴봤다. 어느것 하나도 소흘히 할 수가 없는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오행의 상황을 이렇게 민감하고 섬세하게 살피지 않고서는 감히 인간의 운명을 감정한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게 된다. 이것도 그러한 작업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적에 명확하게 이해를 해야 하겠다. 오행의 왕쇠에 대해서 이 정도만 이해를 한다면 그래도 누구와 이야기를 하더라도 참으로 오행의 소식에 깊이 안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음양오행론의 마무리




이렇게 해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상세하게 음양오행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더 이상 음양오행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간단하게 음양과 오행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실제로는 모든 상황에 대한 힌트가 알뜰하게 들어있다는 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제 앞으로 이해를 하게 될, 십간(十干)이나 십이지(十二支)의 이야기에서도 항상 지금 이 책에서 배운 음양오행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만큼 기본이면서도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모쪼록 가벼운 생각을 하지말고, 꾸준하게 익혀서 확실하게 감을 잡아 두시기 바란다. 아마도 지금 얼마나 제대로 이해를 했는가에 따라서 다음의 공부가 더욱 깊어지는 척도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장담을 할 수가 있다.
그럼 보다 발전된 명리학(命理學)의 문턱으로 전진하시기를 바라면서 입문 중에서도 입문에 속하는 음양오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 한다. 열심히 읽어주심에 감사한다.


著者 낭월(朗月) 박주현 삼가 올림
출처 : 貪 嗔 痴
글쓴이 : 멧돼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