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병곡 선생 권구 행장〔屛谷先生權公行狀〕 대산 이상정 찬

장안봉(微山) 2014. 8. 19. 19:40

권구(權榘)1672년(현종 13)∼1749년(영조 25). 안동 가일

본관은 안동.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증(憕)이며, 어머니는 풍산류씨(豊山柳氏)로 현감 원지(元之)의 딸이다.

처조부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가 살던 향리 안동 족적동(足積洞)에서 사창(社倉)을 열어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켰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그는 경학(經學)·예설(禮說)·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기설에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기타 천문·역수(曆數)·역학(易學)·사기(史記) 등에도 매우 조예가 깊어 〈경의취정록 經義就正錄〉·〈독역쇄의 讀易𤨏義〉·〈기형주해 璣衡註解〉·〈여사휘찬의의 麗史彙纂疑義〉 등을 잡저로 남겼으며, 그밖에도 옛날 명훈(名訓)을 한글로 번역한 《내정편 內政篇》이 있다. 증직은 이조판서

저서로는 《병곡집》 10권 5책이 전한다.

 

병곡 선생 권공 행장〔屛谷先生權公行狀〕 대산 이상정 찬

 

선생의 휘는 구(榘), 자는 방숙(方叔)이다. 윗대의 조상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이 고려를 도와 공을 세워, 안동(安東)에서 사당(祠堂)에 모셔 제향을 받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되었다. 중세에 휘 주(柱)는 벼슬이 참판이었고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연산조(燕山朝)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당하였는데1), 문장과 절행으로 세상에 명망이 있었다. 증조부 휘 경행(景行)은 서반직(西班職)에 음보되었고, 조부 휘 단(摶)은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부친 휘 징(憕)은 선교랑(宣敎郞)이다. 모친 의인(宜人) 풍산 류씨(豐山柳氏)는 현감 류원지(柳元之)의 따님이요, 영의정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서애(西厓) 선생 류성룡(柳成龍)의 증손녀이다. 선생은 숭릉(崇陵) 임자년(1672, 현종13) 윤7월 2일에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한번은 장난치다가 잘못되어 자물쇠를 채웠으나 풀지 못하니, 외삼촌 익찬공(翊贊公)2)이 그것을 보고 꾸짖었다. 선생은 짐짓 자기가 풀겠다고 하면서 “제갈공명이 능히 팔진도(八陣圖)를 풀었으니 천하 물건 중에 어찌 사람이 풀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익찬공이 기특하게 여겼다.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고부터는 굳이 정해진 과목을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였다. 14, 5세가 되자 이미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 외에도 유자(儒者)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되어, 시속(時俗)을 벗어나 고인(古人)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마침내 백가(百家)의 학문에 넘나들고, 천문, 산수, 복서(卜筮), 군율(軍律) 등을 아울러 두루 공부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였다. 이윽고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의 차례를 알아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전념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에 이르렀으며, 굳은 신념으로 깊이 연구하고 심오한 뜻을 궁구하여 종종 침식을 잊었다. 효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으니, 즐거운 안색으로 곁에서 모시고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따랐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여쭌 다음에야 행하였다. 혹시 부모가 편치 않으실 때에는 약과 미음을 드리는 일은 반드시 몸소 하여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정축년(1697, 숙종23)에 모친 의인(宜人)이 마마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부친 선교공(宣敎公)이 부스럼을 앓았다. 선생도 마마를 막 앓았지만 부친의 시탕(侍湯)과 선비(先妣)의 제사를 받드는 두 가지 일에 모두 정성을 다하였다.

무인년(1698)에 선교공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와 거상을 예절에 맞게 하였다. 선교공이 병중에 단술을 잡숫고 싶어 하였지만 의원이 해롭다고 하여 감히 드리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이 때문에 평생 단술을 차마 먹지 못하였고, 사람들이 혹 마마를 겪은 일을 말하면 묵묵히 슬픔을 머금었다. 제사 때면 미리 재숙(齋宿)하여 바깥일을 접하지 않았고, 지시할 일이 있으면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니 마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교공은 간결(簡潔)한 성품으로 스스로 조심하여 지켰고 의인은 서사(書史)를 두루 읽어 옳은 도리를 알았으며, 처가의 어른들도 성대하게 가법을 지녔으므로, 선생은 안팎의 가르침에 무젖어 덕기(德器)를 길렀다. 관례를 치르고 나서는 갈암(葛庵) 이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직접 가르침을 받았는데, 물러 나와 밀암(密菴)3)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다시 서로 연마하여 견문이 더욱 풍부해졌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깊이 궁구하는 공부에 터득한 것이 많았다. 산택(山澤) 권공 태시(權公泰時), 도사(都事) 김공 명기(金公命基), 현감 유공 후광(柳公後光), 창설(蒼雪) 권공 두경(權公斗經) 같은 선배로서 손위의 덕이 있는 어른들도 모두 나이를 떠나 벗으로 지냈고, 유림(儒林)에 큰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의 한마디 말로써 거취를 정하는 일이 많았다. 창설공이 일찍이 “아무개는 나이는 어리지만 식견이 노숙하니, 우리가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고, 유공도 선생의 심오한 학식에 깊이 감복하여, 일이 있으면 자문하였고 임종할 때 당신의 두 아들을 부탁하였다.

선생은 정축년(1697, 숙종23)과 무인년(1698)의 집상(執喪)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게다가 세도(世道)가 심하게 무너져 바로잡을 수가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지금이 어찌 벼슬에 나아갈 때이겠는가.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하고, 마침내 과거(科擧)의 뜻을 접고 집안에 들어앉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경신년(1700)에 전염병을 피하여 외촌(外村)으로 가서 6, 7년을 살았다. 그곳의 습속은 질박하고 어리석으며 사나워서 싸우기를 잘하였으나, 선생이 그곳에 머무르게 되자 욕설이 사라지고 사나운 습속도 점차 바뀌었다.

병신년(1716)에 병산(屛山)의 서쪽 동네4)에 머물다가, 그곳의 그윽한 지세와 깨끗한 경치를 사랑하여 마침내 집을 세내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마을의 이름을 병곡(屛谷)으로 바꾸고 이 이름을 따서 자호(自號)하였다. 근처에 있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장소마다 경치를 평하고 짧은 시를 지어 기록하였으며, 한가한 날에는 시를 읊조리며 배회하여 유연히 세속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품었다. 마을 주민들의 생활이 피폐하였으므로, 사창(社倉)에 축적해 두는 방법을 규약으로 만들고 향약(鄕約)의 옛 법을 손질하여 글로 지어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비록 사창법이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민풍(民風)이 사람의 도리로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 되어 그들의 완고하고 어리석은 습속이 점차 바뀌었다.

계묘년(1723, 경종3)에 지곡(枝谷)으로 돌아와서, 당신이 거처하는 집의 문미(門楣)에 환와(丸窩)라고 편액하고, 시를 지어 품은 뜻을 드러내었다5).

무신년(1728, 영조4) 봄에 대신이 선생의 행의(行誼)를 조정에 아뢰어, 밀암(密菴)과 함께 천목(薦目)에 들었다. 3월 12일 밤에 홀연히 인마 소리가 요란하더니, 백마를 탄 자6)가 졸개 5, 6십 명과 함께 와서는 말에서 내려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와 마루로 올라, 앞으로 나와서 자기 성명을 말하고는 목소리를 돋우어 “요즘 세상의 소문을 들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궁벽한 동네에 숨어 사니 무슨 소문을 듣겠는가.”라고 답하였다. 그 자가 “지금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르신이 어찌 편안히 계실 때입니까.”라고 하였다. 선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 무슨 말인가.” 하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나는 우리 임금을 저 하늘처럼 받드는데, 그 밖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너는 내 목을 베어 가거라.”라고 하면서 머리를 수그려 그자에게 내밀었다. 역적이 칼을 뒤로 치우고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니, 선생이 몸을 돌려 벽을 보고 앉아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느냐. 이제 빨리 내 목을 베어 가거라.”라고 하였다. 역적이 한참을 쳐다보고 말하기를 “어르신이 지키는 바가 바로 가장 큰 의리이니, 어찌 감히 강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의 대군(大軍)이 예천(醴泉) 경계까지 이르렀으니, 마땅히 안동(安東)을 의귀처(依歸處)로 삼을 것입니다. 아무개 또한 명망이 있으니 내가 가서 그를 만나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속으로 ‘대군이 경계까지 닥쳤다는 말은 허세를 부리며 위협하는 소리에 가까운 것 같으나 그래도 알 수가 없고, 더구나 이자를 그대로 보내 주어 더 깊이 들어가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크게 꾸짖기를 “나는 지치고 쇠잔한 몸이라 칼로 네 배를 찌를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개는 본시 강건한 사람이니 네가 장차 무슨 일을 당하려 하느냐. 우리 고장의 풍속을 유독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반역과 순종을 가리는 것은 종들도 다 아는 것이니, 내 목이 잘린다고 해도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느냐. 간다면 너희는 강호(江湖)의 목 잘린 귀신이 되어 길거리에 나뒹굴 것이다.” 하니, 역적이 몹시 낙담하는 얼굴로 말없이 일어나 떠났다. 선생이 붓을 들어 문짝에 써 붙이기를 “밝은 해 머리 위에서, 한 자락 붉은 마음 비추네. 어찌 생사 때문에 변할까, 굳게 귀신과 맹세했느니.〔白日臨頭上 丹心一縷明 寧將死生變 要與鬼神盟〕” 하였다.

얼마 후 청주성(淸州城)에서 역적이 두 장수를 죽였고, 한 갈래는 안음(安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의 인사들과 병산(屛山)에서 회동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하려다가 안무사(安撫使)와 호소사(號召使)8)의 서신을 받고 마침내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길에서 금오랑(金吾郞)9)을 만났는데, 부(府)에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무사는 선생에게 나명(拿命)이 내린 일을 비밀로 하고 불러서 들어오게 하여 금오랑이 올 때까지 구금하였다. 그날 이것을 본 사람들 중에 얼굴을 찌푸리고 안색을 바꾸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선생은 행동거지가 태연하여 평소와 다름없었다. 안무사가 어떤 이에게 선생에 대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불러들여 막 계단으로 오를 때, 나명이 내렸으니 올라오지 말라고 소리치자 곧바로 내려섰습니다. 그런데 계단 위에 있을 때와 아래로 내려갔을 때의 신색(神色)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학문의 공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4월 5일에 서울에 당도하였고, 다음 날 국청(鞫廳)에 출두하여 죄에 대해 진술하였다. 11일 밤에 정국(廷鞫)이 시작되어 조목에 따라 상세하고 빠짐없이 대답하였다. 정신이 좀 안정되자 점차 온화하고 맑은 천안(天顔)과 메아리 같은 옥음(玉音)을 보고 듣게 되었다. 공초에 대한 확인을 마치자 상이 전교하기를 “처음에 내가 알던 이름과 어긋나서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고, 국옥(鞫獄)은 중대한 일이라 서둘러 사면하지 못하였다. 지금 네가 말한 내용을 보니 매우 조리가 있다. 듣건대, 올바른 사람은 교유함에 ‘반드시 올바른 사람으로 벗을 취하는 의리’10)가 있다고 하였다. 특별히 풀어 주라.” 하고, 궐문을 지키던 군졸 두 명을 붙여 여관까지 선생을 호송해 주라고 명하였다. 조정 신하 중에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 아들이 선생을 수행하다가 충원(忠原)11)에서 구금되었는데, 석방하여 돌려보내면서 안무사 김재로(金在魯)12)가 말하기를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이 ‘영남에는 예부터 거의 공신(擧義功臣)13)이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번 역모의 변란이 영남에서 나온 것을 내가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그대들의 부친이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로서, 무죄로 판명되어 돌아가게 되어 영남의 부끄러움을 씻었다.” 하였다.

역적 조세추(曺世樞)가 안동(安東)의 세 사람을 무함하여 공초(供招)하였으나14) 상이 추궁하지 않고, 관찰사에게 명하여 혐의를 씻어 주고 격려하는 뜻을 효유하게 하였다. 그 유서(諭書)의 내용에 대략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조카 정의련(鄭宜璉)의 초사(招辭)에 ‘3월 10일 이후에 이능좌(李能佐)가 예천(醴泉)에 왔다가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가면서 「안동 놈들 때문에 내 일이 다 망가졌다. 원래 부사(府使) 이정소(李廷熽)의 목을 베고 안동을 전부 우리 편으로 만들려 하였는데, 안동 사람15)이 이것이 무슨 말이냐며 크게 꾸짖었다.」라고 하였고, 이능좌가 이 때문에 화를 내고 갔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안동 사람들이 반역과 순종의 의리를 잘 알아서 역적을 크게 꾸짖고 물리쳐, 그자가 화를 내고 떠나게 한 것이니,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안동 부사 이정소가 풀려나 돌아와서 고향 사람에게 “내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곡(枝谷)16) 덕분이었다.”라고 하였다.

시랑(侍郞) 오광운(吳光運)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어 시종 국문을 담당하였는데, 국청을 나와서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아무개가 국문에 임할 때, 모습이 파리하여 마치 입은 옷도 이기지 못할 듯하였지만, 말이 안온하고 상세하여 여러 당상관이 눈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정국(廷鞫)에서 조사할 때, 입으로 불러 주는 대로 공초를 작성하였는데 명백하고 막히는 곳이 없었습니다. 도(道)를 배워 신의 가호를 입은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국(親鞫)을 마치고 상이 대신들을 돌아보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으시자, 대신들이 ‘어제 조사했던 당상과 낭청이 모두 이 사람을 학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과연 그러하다.’라고 하시고 마침내 성문을 닫지 말고 횃불을 들려서 숙소로 보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당일 직접 눈으로 본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적을 꾸짖어 물리친 사실을 말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국옥(鞫獄)의 체통이 지엄하니 묻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죄수들 중에 시끄럽게 떠들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이들이 많았는데, 유독 이 노인은 질문에 따라 조목조목 답하는 것이 상세하고 적절하였으니, 이 때문에 어전에서 학자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잡혀 가던 날에는 미천한 필부(匹夫)와 서인(庶人)들조차 모두 농사일을 멈추고 안타까워하며 탄식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반기고 즐거워하여 함께 길에 나가 환영한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이었고, 원근의 인사(人士)로서 와서 축하하는 사람이 몇 달 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선생은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몹시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마을 밖으로 걸음을 하지 않았다. 날마다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아 책상을 앞에 놓고 깊이 사색에 잠기다가, 터득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하여 두었다. 이따금 몸이 나른해지면 눈을 감고 정신을 모으거나 혹 지팡이를 짚고 이리저리 거닐었고, 한 번도 비스듬히 기대거나 엎드리고 눕는 일이 없었다. 마을 젊은이들이 집 남쪽에 몇 칸의 서재(書齋)를 지으니, 선생이 그 집을 시습재(時習齋)로 이름 짓고, 문과 창과 벽에 전부 명시(銘詩)를 써 붙였다.

늘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였는데 무진년(1748, 영조24)에는 다른 증세가 더해져서, 가끔씩 위독해질 때면 눕고 일어나는 데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기도 하였다. 원근의 사우(士友) 중에 어떤 이가 문병을 오니, 부축을 받고 앉아 옆에서 의관을 붙잡게 하고서 그 사람을 보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번은 작별하지 않을 수 없네.”라고 하였다. 시중드는 사람이 혹 베개 맡에 있는 수건 등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옮기면,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두라고 명하면서 “내가 평소 물건을 항상 제자리에 두어 어두운 데서도 쉽게 찾았으니, 반드시 나의 절도를 지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따금 병에 조금 차도가 있으면, 곁에 있는 사람을 시켜 이부자리를 치우고 두건과 버선을 갖추게 하고, 단정하게 공수(拱手)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조금 뒤에 다시 누웠다. 병이 위독해지자 목 안에서 끊일 듯 말 듯 신음 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면서 “《중용》과 《대학》의 정문(正文)을 내가 일생 동안 외웠으나, 구두(句讀)가 잘못되었다.”라고 하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기사년(1749) 1월 28일에 환와(丸窩)에서 고종(考終)하였으니, 향년 78세였다. 그해 4월 모일, 정산(井山)의 남쪽 기슭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모인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부인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부친 이의(李檥)는 바로 갈암(葛庵) 선생 이현일(李玄逸)의 둘째 아들이며, 양자 가서 존재(存齋) 선생 휘 휘일(徽逸)의 후사가 된 분이다. 부인은 법도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였고, 단정하고 엄숙하며 올곧아 군자를 섬김에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선생보다 8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 묘는 선생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진(縉)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명우(明佑)와 상우(尙佑)이다. 차남 집(緝)은 두 아들 명우(命佑)와 대우(大佑)를 두었고 딸은 유근춘(柳根春)과 김시유(金始裕)에게 출가하였다. 3남 보(䋠)는 아들이 하나로 조우(祖佑)이고 딸은 강복구(姜復九)에게 출가하였다.

장녀는 김신석(金申錫)에게 출가하여 아들 아무개를 두었다. 차녀는 이경(李炅)에게 출가하여 아들 이사적(李師迪)을 두었고 딸은 정랑 박지경(朴趾慶)에게 출가하였다. 삼녀는 유양(柳瀁)에게 출가하여 아들 유일춘(柳一春)과 유만춘(柳萬春)을 두었고 딸은 조계화(趙季和)와 강시민(姜時敏)과 박함경(朴咸慶)에게 출가하였다. 사녀는 강태서(姜泰瑞)에게 출가하여 아들 강조동(姜祖同)과 강조경(姜祖慶)을 두었다. 선생의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은 남녀를 합하여 60여 명이 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중후하며 기상이 온화하여 말을 급하게 하거나 안색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다. 몸은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학문을 연구하는 공부는 매우 독실하였고, 말은 마치 하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지조를 지키는 힘은 더욱 굳세었다. 평소의 행실은 공순하여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으나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온전한 법도를 지녔다. 움직이고 쉬고 일어나고 자는 일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었고, 안석과 책상과 기물(器物)들을 두는 데도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고 방 안에 조용히 앉아 경적(經籍)의 글을 읊고 완미하였는데, 몸을 느릿하게 하고 얼굴을 엄숙히 하며 기운은 온화하고 말은 화순하였다. 손님이나 벗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게 우스개도 하며 자부하거나 꺼리는 태도가 없었으나, 이(利)와 의(義)가 갈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굳게 지키는 바가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사람의 도리는 남과 사귀는 것일 뿐이니, 만일 남과 사귈 때 소홀하고 거만하고 속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종족(宗族)과 지내거나 노복(奴僕)을 부리거나 마을 사람을 대우하는 일을 하나같이 성심과 성의로써 행하였다. 혹 어떤 사람에게 잘못이 있어도 찬찬히 타이르고 목소리와 안색을 바꾸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모두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여 종족에서 비방하는 말이 없고 노복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으며, 선생이 사는 근처 마을이 모두 구습을 혁신하고 좇아 교화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간결하고 소박하여, 음식과 의복은 단지 허기를 때우고 몸을 가리는 것만을 취할 뿐 좋고 나쁘고 편하고 아니고를 따지지 않았다. 거처하는 방이 몹시 수수하고 누추하였으나 거기서 지내기를 편안하게 여겼다. 일찍이 벽에 글을 써서 붙이기를 “가난함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거친 음식에 길들여지니 음식에 쉽게 만족하여 남의 맛있는 음식을 바라지 않고, 거친 옷에 길들여지니 옷이 쉽게 편해져서 남의 수놓은 옷을 바라지 않으며, 좁은 방에 길들여지니 기거가 쉽게 편안해져서 남의 화려한 집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 늘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옛사람이 소박한 삶에 편안하였던 것은 일부러 고생하려 하였던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보존하는 것이 있어서 외물이 저절로 하찮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둔다면, 그 마음에 보존하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 뜻이 서지 않으면 작은 일도 할 수가 없는데 큰일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렇지만 역시 뜻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하였다. 또 “경전을 궁구하는 데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남이 말하는 것에만 의존한다면 자신의 분수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성의(誠意)가 정밀하고 전일하면 금석(金石)도 깨뜨릴 수 있다. 글이란 바로 나의 성정(性情)에 본래부터 있는 일을 말한 것이니, 익숙하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만 하면 저절로 탁 트이는 곳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마음은 반드시 평정을 유지하여 털끝만큼의 인위(人爲)도 끼지 않게 하고,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여 혼미하거나 흐트러지지 않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심(心)은 불의 장기(臟器)이니 원래 밝고 환하다. 단지 물욕(物欲) 때문에 혼탁하게 되어 그 밝음을 잃는 것이니, 마음을 맑게 다스려 혼탁함을 없애면 원래와 같이 밝을 것이다.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으니, 바로 경(敬)일 뿐이다. 경 자의 올바른 뜻을 알고자 한다면 주자의 ‘오직 두려워함이 이에 가깝다.〔惟畏近之〕’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다. 주자가 시에서 ‘호랑이 꼬리 잡듯 봄 얼음 위를 걷듯 나의 생을 부치네.〔虎尾春冰寄此生〕’라고 하였으니, 주자에게 무슨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있었겠는가. 다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을 말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허노재(許魯齋)의 “천만인 가운데 있어도 항상 자기 자신이 있음을 안다.〔千萬人中常知有己〕”라는 말17)을 외우면서, “비록 몹시 소란한 곳에 있어도 나는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자연히 시비를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연구하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대학》과 《중용》과 《주역》에 특히 힘을 쏟았다. 선생은 《대학》에서의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은 바둑판과 같고,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은 바둑알과 같고, ‘지소선후(知所先後)’는 바둑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중용장구》와 《중용혹문(中庸或問)》은 조리가 자세하고 두루 통하여 미진한 점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 장(章)의 순서와 전체의 대의(大義)에 대하여는 중간 중간 문제를 제기하여, 공부하는 방법만 일러줄 뿐 답은 말해 주지 않고, 읽는 사람이 완전히 이해하여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용취정록(中庸就正錄)〉과 〈대학취정록(大學就正錄)〉을 지었다.

선생은 천하의 사물은 수(數)가 아닌 것이 없고 그 이치가 《역(易)》이니, 《역》을 배우고도 이 이치에 밝지 못하면 비록 성현의 말씀을 본떠 똑같이 한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죽은 법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 《주역》을 읽는다고 굳이 현묘한 데에서 찾을 필요는 없고 단지 평소 눈앞에 있는 일과 일상의 행동에서 비교하고 변화를 미루어 보면 통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역》은 미리 정해져 있는 일이 아니니 변통의 옳은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저절로 합치되는 데가 있을 것이므로, 스스로 하나의 주장을 세우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독역쇄의(讀易瑣義)〉를 지었다.

주자(周子)18)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한다.〔陽變陰合〕’라는 말과 ‘다섯 가지의 기가 펴져서 네 계절이 운행된다.〔五氣布四時行〕’라는 말의 뜻을 근거로 연역하여 두 개의 그림을 만들었고, 또 소자(邵子)19)의 ‘감리인신(坎離寅申)의 설20)’을 근거로 한 그림을 완성하였는데, 이 그림들을 합쳐서 〈이오교감도(二五交感圖)〉라고 이름 지었다. 밀옹(密翁 김지행(金砥行))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소 강절(邵康節) 이후로 이 이치에 이른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하기를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이니, 성(性)이 발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이(理)가 스스로 직접 수행할 경우에는 비록 기(氣)가 이(理)를 싣더라도 이(理)가 주인이 되는 것이고, 기(氣)가 바로 일을 주도할 경우에는 비록 이(理)가 그 안에서 행하더라도 기(氣)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性)을 가지고 그 작용을 말한다면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성(性) 안에 있고, 정(情)을 위주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저것은 기(氣)이고 이것은 이(理)라는 구분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지금 각각 한쪽의 설을 주장하여 서로를 끌어당기기만 하는데,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래 모호하게 하나로 합하려는 병통이 있거니와 주기설(主氣說)을 주장하는 사람 역시 너무 과도하게 분석하는 폐단이 있다.” 하였다. 이에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또 일찍이 성현의 중요한 가르침을 요약하여 초학자(初學者)를 가르쳤으니, 이것이 《초학입문(初學入門)》이고, 부인이 덕을 기르고 집안을 돌보는 법도를 언문으로 옮겨 부녀자를 가르쳤으니, 이것이 《내정편(內政篇)》이다. 또 《역대연혁도(歷代沿革圖)》를 지었는데, 중국의 제왕들을 대통(大統)으로 삼고 북쪽 오랑캐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덧붙였으며, 단군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연대에 따라 분류하고, 나라가 분열하고 합하는 때를 구별하여, 이것으로 통합하고 귀속하고 주고 빼앗는 사례를 드러내었다. 질서정연하게 체계를 갖추었고, 오랜 역사의 자취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곧 본받을 바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선생은 14, 5세에 결연하게 세상을 다스려 시폐(時弊)를 바로잡을 큰 뜻을 품었으나, 속에만 간직하고 시험해 보지 못하였다. 경자년(1720, 숙종46)에 양전(量田)할 때 부사(府使) 권공 이진(權公以鎭)이 일을 함께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일을 처리하기 위한 크고 작은 조목들을 간략하게 만들었다. 돌아와서 《정시관규(政始管窺)》를 지었는데, 거기에서 “백성을 돌보는 데는 재정(財政)을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재정을 잘 다스리는 데는 과세를 고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의 법이 전부 여우와 쥐 같은 천한 무리에게 맡겨져, 나라에 내는 정당한 세금과 백성의 피땀 어린 재산이 절취되어 이런 무리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지금 조금이라도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시행되고 있는 규정을 바탕으로 주자(朱子)가 진달(陳達)한 오등호(五等戶)와 수분감방(隨分減放)21)의 뜻을 대략 본뜨고 전부구등(田賦九等)22)의 제도를 참고하여, 그해의 풍흉(豐凶)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거나 체감(遞減)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 가지 조치의 권한이 윗사람에게 있게 되어 아랫사람이 간특한 짓을 심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천유록(闡幽錄)〉을 지었으니, 당시 비천한 사람의 훌륭한 행실이나 기르는 동물의 기이한 일 등을 손 가는 대로 기록하여 권면하고 경계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 당시 유소(儒疏)의 폐단에 대해 논하기를 “영남 선비의 상소는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과 정사년(1617, 광해군9)부터 시작되었는데23), 퇴도(退陶) 선생이 을사년 상소를 중지시켰고, 우복(愚伏)과 수암(修巖 유진(柳袗))이 정사년 상소 때 사람들을 타일렀으니, 그 뜻을 알 만하다. 말류(末流)가 풍속이 되어 예의의 고장이 허물어졌으니, 우리 영남을 침체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이 유소이다.” 하였다. 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에 소란스럽게 상소에 대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이 의논이 만일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우리 영남의 흠이 될 것이다.” 하고, 문하생과 자제들에게 가서 참여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혹 의견이 달라 비방하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자가 있으니, 말하기를 “남과 어떤 일을 논의할 때 자기의 의견을 꼭 관철시킬 수는 없다. 자기가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하면 상대방 역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할 것이니, 피차를 막론하고 오직 시비의 다툼이 어디서 일어났는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실제로 이치에 어긋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색을 온화하게 하여 말을 하면 저절로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혹시 한때는 소란스럽게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안정이 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몇 차례 외부의 일을 맡았을 때, 비록 성격이 서로 어긋나고 취향이 같지 않아도 한 사람도 서운해하거나 원한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은 《주역》의 ‘동이이(同而異)24)’라는 세 글자를 벽에 써 붙이고서 “이것이 처세의 큰 방도이다.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일이 의(義)에 해롭지 않으면 시속을 따라도 괜찮지만, 의에 해가 되면 따라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의미를 말한 것이다. 아래의 구절이 매우 준절하니, 더욱 잘 살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 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는 마치 듣고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스스로 그칠 수가 없었다. 선생은 일찍이 “우리나라는 법제와 교화가 잘 갖추어졌고 대국(大國)에 대한 조공도 어김이 없어서, 안팎으로 걱정할 만한 일이 없고 염려되는 일은 오직 흉작과 기근일 뿐이다. 나라의 경비(經費)가 항상 모자라서 걱정인데도, 글을 숭상하는 풍조가 일어나 백성의 살림이 날로 피폐해졌다. 만약 몇 년 동안 수해나 가뭄의 재난이 있게 되면, 나라가 몰락하여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니, 명나라의 말년(末年)이 바로 이러하였다. 반드시 방비를 튼튼히 하고 비용을 줄여 재정을 넉넉히 하며, 비록 세금을 규정대로 거두지만 때에 맞게 감면해 주어서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인심이 모이도록 한다면, 저절로 뜻밖의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진년(1736, 영조12)에 조정에서 세금을 깎아 주도록 영(令)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에 기쁜 빛을 드러내면서 “이것이 취산(聚散)의 도25)를 따르는 실마리이다. 이 한 가지 일로도 나라의 원기(元氣)를 보호하는 효험이 적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마다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생의 글은 사리가 통하고 말이 순조롭도록 할 뿐이었고, 시(詩) 또한 담담하고 탁 틔어 정신을 맑게 씻어 주었으므로, 당시의 문장대가(文章大家)들 역시 모두 탄복하였다. 남아 있는 글로는 《만록(謾錄)》 몇 권이 있고, 또 《계자상기(季子詳記)》, 《문인기실쇄록(門人記實瑣錄)》 등이 있다.

아, 선현들의 자취가 멀어지고부터, 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문장을 짓는 것을 재주가 있다고 여기고 많이 기억하는 것을 학식이 풍부하다고 여겨, 평생 여기에 빠져 돌아올 줄을 모른다. 선생은 총명하고 예민한 자질을 가지고 독실하고 힘들게 공부에 전념하였다. 말하기를 “도체(道體)가 크다 하나 실로 내 마음에 모두 갖추어져 있고, 사물(事物)이 많다 하나 실로 내 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앎이 정밀하지 않으면 하나로 꿰뚫어 두루 통하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 없고, 실행에 힘쓰지 않으면 학문이 확고하고 조예가 깊은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처음에는 탐구하지 않는 분야가 없더라도 《주역》과 《중용》과 《대학》을 귀착점으로 삼아야 한다. 《대학》을 읽음으로써 나아가는 길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주역》과 《중용》을 읽음으로써 의리를 밝힐 수 있다. 깊이 새겨 보고 묵묵히 외우며, 매일 공부할 과정을 정하여 정성을 쌓고 노력을 계속하여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정신이 여유롭고 기운이 온화해지며, 일상생활의 가운데서도 곁에서 도의 근원을 만나고 온몸으로 묵묵히 깨닫게 된다.” 하였다.

비록 갑작스럽고 위급한 상황을 당하였어도, 앉은 자리에서 흉적의 예봉을 꺾었고 정국(廷鞫)하는 날에 임금의 칭찬을 받았으니, 평소 정예(精詣)한 학식과 온전히 길러진 공력을 그대로 몸속에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하루아침에 억지로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선생은 경륜과 뛰어남을 몸에 지니고서도 헛되이 초야에서 늙어 가 조금도 세상에 시험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선생이 남긴 글이 모두 있으니, 잘 읽는 자가 마음을 기울여 깊이 연구한다면, 또한 이치를 밝히고 경(敬)을 주장하는 일과 세상에 응하여 나가서 다스리는 방도를 터득하여, 선생을 따르는 일에 미혹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몇 번 선생을 자리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질이 우둔하고 정성이 모자라, 책을 끼고 가서 의심나는 곳을 물어 나의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없애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 만년이 되어 남겨진 경서를 안고 귀의할 곳이 없게 된 뒤에, 산처럼 우러러보는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다. 선생의 손자 명우(明佑) 씨가 유사(遺事) 한 통을 나에게 주며 행장의 글을 짓도록 하였으나, 보잘것없는 내가 어찌 감히 붓을 들어 이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정의가 매우 두터워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가첩에 근거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평소 마음에 느끼던 바를 덧붙였다. 이로써 입언(立言)하려는 군자들이 채택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아울러 선생의 훌륭한 인품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을 담았다. 삼가 행장을 쓴다.

 

[주1]갑자사화(甲子士禍) …… 당하였는데 : 권주(權柱)는 일찍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尹氏)를 사사(賜死)할 당시 승정원 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 이 때문에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파직되어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국역 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26일》

[주2]익찬공(翊贊公) : 유의하(柳宜河, 1616~1698)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우눌(愚訥)이다.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과 봉화 현감(奉化縣監), 세자익위사 익찬을 지냈다.

[주3]밀암(密菴) : 이재(李栽, 1657~1730)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가 밀암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이다. 저서로 《밀암집》이 있다.

[주4]병산(屛山)의 서쪽 동네 : 병곡(屛谷)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 이 동네의 이름은 적곡(跡谷)이었다. 《屛谷集 卷8 屛谷記》

[주5]시를 …… 드러내었다 : 권구(權榘)의 문집에 〈환와(丸窩)〉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산에 숨어사는 촌 늙은이 오두막, 인간 세상 아니고 태허 속에 있다네. 황홀한 음양이 시작하기도 전에, 홍몽한 천지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네. 머리 위에 해와 달 한가히 오가고, 눈앞엔 바람과 연기 모이고 흩어지네. 마음에 아무 일 없음을 깨달으니, 이 늙은이 신세 너무나 거침없어.〔林居野老一蓬廬 不在人間在太虛 怳惚陰陽無始際 澒濛天地有形初 頭邊日月閒來往 眼底風煙自卷舒 漸覺胸中無一事 此翁身世太狂疎〕”라고 하였다. 《屛谷集 卷2 丸窩》

[주6]백마를 탄 자 : 《병곡집(屛谷集)》 권7 〈무신록(戊申錄)〉에서, 이 사람을 문경(聞慶)의 이능좌(李能佐)라고 하였다. 이능좌는 무신년(1728, 영조4)에 일어난 역모 사건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한 인물이다.

[주7]두 장수 :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봉상(李鳳祥)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이다.

[주8]안무사(安撫使)와 호소사(號召使) :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에 파견된 영남 안무사 박사수(朴師洙)와 호소사 조덕린(趙德隣)을 가리킨다.

[주9]금오랑(金吾郞) : 의금부 도사의 별칭이다.

[주10]반드시 …… 의리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있는 “저 윤공 타는 올바른 사람이니, 벗을 취함에 반드시 올바를 것이다.〔夫尹公之他 端人也 其取友必端矣〕”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11]충원(忠原) : 충청북도 충주(忠州)의 옛 이름이다.

[주12]김재로(金在魯) : 1682~1759.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혹은 허주재(虛舟齋)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 목사로서 호서 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하였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주13]거의 공신(擧義功臣) :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을 말한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라고도 부른다.

[주14]역적 …… 공초(供招)하였으나 :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조세추(曺世樞)의 공초에 안동의 권구(權榘)와 권덕수(權德秀), 유몽서(柳夢瑞) 세 사람이 이인좌의 일당인 이능좌와 연루되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국역 영조실록 4년 4월 16일》

[주15]안동 사람 : 권구(權榘)를 가리킨다.

[주16]지곡(枝谷) : 권구가 살고 있던 동네의 이름으로, 권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17]허노재(許魯齋)의 …… 말 : 《노재유서(魯齋遺書)》에 있는 구절이다. 허노재는 허형(許衡, 1209~1281)이다. 원나라 때의 경학가로 자는 중평(仲平),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노재는 그의 호이다. 저술로 《노재유서》, 《노재심법(魯齋心法)》, 《독역사언(讀易私言)》, 《허노재집》 등이 있다.

[주18]주자(周子) :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북송의 학자로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저술로는 〈태극도설〉과 《통서(通書)》가 있다.

[주19]소자(邵子) : 소옹(邵雍, 1011~1077)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북송의 학자로 자는 요부(堯夫), 호는 안락와(安樂窩) 혹은 백원(百源)이며,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저서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있다.

[주20]감리인신(坎離寅申)의 설 :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각각 신(申)과 인(寅)에 해당한다는 학설을 말한다. 소옹은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와 감은 음과 양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는 인에 해당하고 감은 신에 해당한다.〔離坎 陰陽之限也 故離當寅 坎當申〕”라고 하였다.

[주21]오등호(五等戶)와 수분감방(隨分減放) : 주희(朱熹)가 〈연화주차(延和奏箚)〉에서 임금에게 아뢴 것으로, 백성의 가호(家戶)를 빈부에 따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흉년이 들면 위의 세 등급은 세금을 형편에 맞게 경감해 주고 아래의 두 등급은 모두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晦庵集 卷13 延和奏箚4》

[주22]전부구등(田賦九等) : 《서경》 〈우공(禹貢)〉에 나오는 내용으로, 토지를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이다.

[주23]영남 …… 시작되었는데 :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는 왕실 외척 간 반목으로 인하여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가 있었고, 정사년(1617, 광해군9)에는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문제로 대신들 간의 논쟁과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다.

[주24]동이이(同而異) : 《주역》 〈규괘(睽卦) 상(象)〉의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 규이니, 군자가 보고서 같으면서 다르게 하는 것이다.〔上火下澤睽 君子以同而異〕”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주25]취산(聚散)의 도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10장의 “재물을 모으면 민심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민심이 모인다.〔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라는 구절을 말한다.

 

屛谷先生權公行狀

 

先生諱榘。字方叔。上世祖太師權幸。佐麗祖有功。廟食於安東。子孫遂氏焉。中世有諱柱。位參判贈左參贊。燕山甲子被禍。以文章節行名世。曾祖諱景行。蔭補西銜。祖諱摶。文科正郞。考諱憕。宣敎郞。妣宜人豐山柳氏。縣監諱元之之女。領議政豐原府院君西厓先生諱成龍之曾孫也。先生以崇陵壬子後七月二日生。幼有異質。嘗遊戲誤倒銜鎖金。不可抽。內舅翊贊公見而訶之。乃請自解曰。諸葛孔明能解八陣圖。天下之物。安有人不可解者。翊贊公奇之。旣就學。不煩課授而自曉解。年十四五。已知科臼之外有儒者之學。脫略流俗。追迹古人。遂汎濫於百家。如天文筭數卜筮師律之流。幷皆旁治。領略其大要。旣而審本末輕重之序。專意於六經四子以及洛建之書。篤志硏精。究極其蘊奧。往往忘寢食。事親至孝。怡愉侍側。先意承順。事無巨細。必稟而後行。其有不安節。則藥餌粥飮必躳親。不委之人。丁丑。宜人遇痘而歿。宣敎公患瘡腫。先生纔經痘疾。侍湯奉奠。俱盡其誠。戊寅。宣敎公下世。送終居喪。式遵禮節。宣敎公病中思醴酒。以醫言不利故不敢進。遂終身不忍飮醴。人或有言經痘事。輒默默含恤。祭祀前期齊宿。不接外事。有所指授。下氣低聲。似不能言。宣敎公簡潔自守。宜人涉書史知義方。內氏諸公蔚然有家法。先生外內擩染。養成其德器。旣冠。出入葛菴李先生之門。親承旨訣。退而與密菴諸公。更相切磨。見聞益富。而妙契深造之功。自得爲多。先輩長德如山澤權公泰時。都事金公命基。縣監柳公後光。蒼雪權公斗經。皆折年行爲友。有儒林大議。多以先生一言爲去就。蒼雪公嘗曰。某年少識老。非吾儕可及。柳公亦深服其邃學。有事諮詢。臨終託以二子。先生自丁戊居憂。得羸悴之疾。且見世道橫潰。不可救止。歎曰。是豈進取時邪。不如從吾所好。遂絶意場屋。杜門篤學。庚辰。避病于外村。住六七年。氓俗素蚩悍善鬪爭。及先生居之。惡聲熄而悍習亦漸革。丙申。寓屛山之西洞。愛其地勢幽奧。景物蕭灑。遂賃屋而家焉。改里名爲屛谷。因取以自號。就傍近勝景。逐處題品。詠小絶以記之。暇日嘯詠盤旋。悠然有出塵之想。谷中居民凋敝。約爲社倉積貯法。損益鄕約遺法。爲文曉釋。雖社倉法不果行。民俗得知人道之所當行。漸變其頑愚之習。癸卯。還枝谷。顔其所居室曰丸窩。有詩以見志。戊申春。大臣有以行誼聞。與密菴同入薦目。三月十二日昏。忽有人馬喧闐聲。跨白馬者偕卒五六十人下馬直入升堂。自前道姓名。作聲曰。聞近日時報否。答曰。屛伏竆巷。有何所聞。曰。方有如此如此事。丈人豈高枕安臥時邪。先生蹶起大聲叱曰。是何言也。仍擧手指天曰。吾戴吾君如彼天。寧知其他。爾斷吾頭去。因俯首與之。賊辟劒于後。欲更有言。先生轉身面壁而坐曰。更有何言。斯速斷吾頭去。賊俯仰良久曰。丈人所執。是第一義。何敢相強。今大軍到醴泉界。當以安東爲依歸。某人亦有時望。吾當往見之。先生自念大軍壓境之說。似近虛喝而亦未可知。且不宜縱之使深入。復大叱曰。我是疲殘漢。不能剚刃爾腹。某素強。爾將遭何等事。吾鄕風俗。爾獨不聞邪。逆順之分。奴隷亦知之。吾頭雖斮。豈無他人。行見汝輩爲湖港斷頭之鬼耳。賊頗有摧沮色。默然起去。先生取筆題門扇曰。白日臨頭上。丹心一縷明。寧將死生變。要與鬼神盟。已而。聞淸州賊殺害兩帥。一枝陷安陰。與縣人將會屛山。議倡義擧。得安撫,號召二使書。遂入府。道遇金吾郞。自府向西而馳。安撫秘不宣。招令入來拘。以待金吾。是日觀者無不易容變色者。先生擧止從容如平日。安撫使語人曰。始吾招來纔及階。呼以有拿。命勿上。卽退立而上下階。神色不少異。可驗其學力也。四月五日。抵京師。翌日。詣鞫廳供辭。十一日昏。始廷鞫。條對詳盡。神氣閒定。漸見天顔溫粹。王音如響。及供對畢。傳曰。初以名字相左。不無所疑。鞫獄事體重大。不果遽赦。今見汝言辭。甚有條理。聞所與遊有取友必端之義。特爲放釋。命留門給二卒護送旅邸。廷臣有言其不可。上不聽。二子隨行。見拘於忠原。及放還。安撫使金在魯謂曰。鄭愚伏云。嶺南自古無擧義功臣。今番逆變出嶺南。余甚惜之爾。翁以嶺之望士。白脫而歸。洗嶺南之羞矣。賊世樞又誣招安東三人。上勿問。命道臣諭以蕩滌嘉奬之意。諭書略曰。逆賊希亮姪宜璉招辭。以爲三月旬後能佐來醴泉。發大憤歸去曰。因安東漢。吾事不成。初欲斬李廷熽。統一安東。安東人大叱曰。何爲此言也。能佐以此發憤而去云。卽此觀之。安東之人。能曉解逆順。叱退賊竪。使之發憤而去者。誠可嘉歎云云。李府使廷熽解歸。語鄕人曰。吾得生還。枝谷之力也。吳侍郞光運。以問事郞。始終鞫事。出語人曰。某就鞫。癯然若不勝衣。而辭氣安詳。諸堂上莫不屬目。余取招於廷。口號供辭。明白無滯礙。非學道有神守者。不能也。及親鞫畢。上顧諸大臣曰。何如。對曰。昨日取招。諸堂郞皆稱學者。上曰然。遂有留門賜炬之命。此吾當日所目見也。因及未達叱退事曰。鞫體至嚴。不可攙入所不問。當日諸囚。多亂聒眩人。獨此老隨問條對。詳審的當。所以得學者之名於上前也。方被拿之日。雖匹庶之賤。皆釋耒廢耘。齎咨歎息。及蒙恩而歸。莫不懽欣快樂。相率而迎於路者數十百人。遠近人士來賀者數月不絶。自是益無意世事。非甚不得已。足跡不出洞門外。日整襟危坐。對案潛心。有得輒箚記。有時體倦。則瞑目凝神。或杖策散步。未嘗有欹側偃臥時也。村少築數架書社于舍南。先生名其齋曰時習。戶牖牕壁。皆有銘詩。常苦眩暈。戊辰。添別證。往往而劇。臥起須人。遠近士友有問疾者。擧扶而坐。攬衣冠于傍而見之曰。死生之際。不可無一訣也。侍者或稍移枕邊巾帨等物。命還故處曰。吾平時置物有常處。故雖暗中易以尋索。須遵吾節度可也。有時病氣少安。使左右撤衾褥具巾襪端拱合眼坐。少頃而就枕。至疾革。竊聽喉間隱隱如呻痛聲。忽開眼微笑曰。庸學正文。吾一生所誦。錯了句讀。精神殆不復矣。己巳正月二十八日。考終于丸窩。享年七十有八。四月某甲。奉窆于井山南麓負庚原。會者三百餘人。配載寧李氏。考檥。卽葛菴先生諱玄逸之次子而出爲存齋先生諱徽逸之後。夫人生長法門。端肅靜一。事君子無違德。先先生八年而卒。墓與先生同原而異封。有三男四女。男長縉有二子。明佑,尙佑。次緝有二子。命佑,大佑。女適柳根春,金始裕。次䋠有一子祖佑。女適姜復九。女長適金申錫。有嗣子某。次適李炅。有嗣子師迪。女適正郞朴趾慶。次適柳瀁。有子一春,萬春。女適趙季和,姜時敏,朴咸慶。次適姜泰瑞。有子祖同,祖慶。內外曾玄男女六十餘人。先生天資端重。氣象溫潤。無疾言遽色。體若不勝衣。而鑽硏之功甚篤。言若不出口而操守之力益固。平居恂恂無甚異於人。而自然之中。自有成法。動息興寢。早晏有其時。几案器用。頓放有其所。晨興拜廟。靜坐一室。諷玩經籍。體舒而容肅。氣溫而言和。與賓友處。怡然笑語。無矜持拘束之態。至利義剖判處。毅然有不可奪者。嘗曰。人道只是與人接。苟於接人之際。有忽慢虛僞之意。其餘無足觀已。以故其處宗族御奴僕待鄰里。一以誠心實意。或有過差。諄諄敎戒。不加聲色而人皆畏威懷德。宗族無間言。奴僕不忍欺負。而所居隣里。皆革習而從化。雅性簡素。飮食衣服。只取充飢蔽體。不說及美惡便否。所居室甚樸陋而處之晏如。嘗手書于壁曰。貧有三樂。口習疏糲。飮食易足。所以不願人之膏粱。體習布褐。衣服易便。所以不願人之文繡。處習圭竇。居止易安。所以不願人之華屋。常誡子孫曰。古人所以安於淡素者。非故爲寒苦。心有所存。則外物自輕。若於瑣碎地留念。其中之無所存。可知也。嘗曰。學者先須立志。志不立則小事猶不可做。况大事乎。雖然。亦當看所志者何事。又曰。竆經貴自得。若只依人口說。於己分有何干。又曰。誠意精專。金石亦可開。書是說吾性分中所固有事。熟讀深思。便自有豁然處。又曰。心須頓放平平地。不可著一毫人爲。常自警省。不使昏昧放倒而已。又曰。心是火臟。自然光明。但爲物欲所昏而失其明。澄治而去其昏。則明固自若。澄治之術無他。敬是已。欲識敬字體段。朱子惟畏近之之說最切。朱子詩曰。虎尾春冰寄此生。未知朱先生有何可怖底事。只是心不放過之謂耳。嘗誦許魯齋千萬人中常知有己之語曰。雖當喧擾中。我未嘗不靜。自無顚倒之失矣。先生於書無不硏究。而尤用力於大學中庸周易。謂大學之本末始終如棊盤。三綱八目如棊子。知所先後。是運用底。中庸之章句或問。曲暢旁通。更無餘蘊。然至其各章次第全篇大義。則間間提起。引而不發。使讀者有以融會而自得之。於是作庸學就正錄。謂天下事物無非數而其理則易也。學易而不明乎是。雖依樣聖賢之言。十分無差。終是一箇死法。又謂讀易不必就玄妙處求索。只於尋常眼前物事及日用常行上。比擬推變。可通。易不是繃定底物事。苟不失變通之宜而自然有相合處。不妨自爲一說。於是作讀易瑣義。又就周子太極圖說。陽變陰合五氣布四時行之意。推演作二圖。又就邵子坎离寅申之說。足成一圖。合而名之曰二五交感圖。密翁見而歎曰。康節以後。無人臻斯理也。嘗論四端七情曰。四七皆情也。無非性之發者。然理自直遂。則雖氣有以乘載而理爲之主。氣便用事。則雖理行乎其中而氣爲之主。蓋以性而語其用。則四七在其中。主情而泝其原。則彼氣此理之分。不可亂也。今各主一邊。互相牽挽。主前說者。固有渾淪合一之病。主後說者。亦有分析太過之弊。於是著四端七情說。又嘗節約聖賢要訓。以授童蒙曰。初學入門。又諺翻婦人養德宜家之法。以授婦女。名曰內政篇。又作歷代沿革圖。以中國帝王爲大統。而附以北胡東國。自檀君至于我朝。類其年代。別其分合。仍寓統屬予奪之例。井井有條緖。千古事蹟。擧目瞭然。便是一部敦史也。先生年十四五。慨然有經世救時之志而蘊而不試。庚子經界時。府伯權公以鎭請與同事。先生辭不獲。略爲措置綱目。退而著政始管窺曰。養民莫先於理財。理財莫先於均賦。而國家之法。盡委諸狐鼠賤流。王賦正貢。生民膏血。折入於此輩囊槖。今欲救得一分。莫若因其見行之規。略倣陳說五等戶隨分減放之意。參以田賦九等之制。隨年上下。進退遞減。則庶操縱在上而下不得太肆其姦矣。又著闡幽錄。凡當世賤流懿行。畜物異蹟。隨手箚記。以寓勸戒之意。又論近日儒疏之弊曰。嶺疏始自乙巳丁巳。而退陶先生止之於前。愚伏修巖戒之於後。其意可知也。末流成俗。禮坊蕩然。使吾嶺陸沈者。必儒疏也。庚子。聞疏議紛紜。歎曰。此議若成。必爲吾嶺之累。戒門生子弟毋得往參。或有以異議詆訾而不爲動。嘗曰。與人論事。不可必伸己見。己欲伸己之見。彼亦欲伸彼之見。勿論彼己。惟看是非爭何由起。若果害理而僨事。不得不與辨。然心平氣和。則自可動得。人雖或一時紛擾。久乃自定。以故嘗處一二門外事。雖物色乖張。酸醎異齊。而無一人致憾恨者。嘗手書易同而異三字于壁曰。此處世之大方也。伊川云事之無害於義者。從俗可也。害於義則不可從也。正是說此義。下一句。直是峻截。尤當諦看。於時政得失。若無聞知。而愛君憂國之誠。自不能已。嘗曰。我國法敎備具。皮幣不愆。內外無可虞。所慮者獨凶荒耳。國家經用。每患不給。而貪墨成風。民生日悴。倘有數年水旱之災。將潰敗不可收拾。明之季年是已。須嚴加隄防。省費裕財。雖稅斂正窠。時加減放。以濟民急。使人心翕聚。自無意外之患矣。丙辰。聞朝家有減稅之令。喜形于色曰。此聚散之機也。只此一事。扶護得元氣不少。對人輒稱頌不已。先生爲文。只取理達而詞順。詩亦平淡冲遠。陶寫性靈。一時文章鉅公。亦皆歎服。有謾錄若干卷。又有季子詳記。門人記實瑣錄等篇。嗟乎。自夫賢躅旣遠。人自爲學。綴文詞以爲工。務記覽以爲富。終身沒溺而不知返。先生以聰穎敏妙之資。著篤實堅苦之功。謂道體雖大而實具於吾心。事物雖夥而實本於吾身。知之不精。則無以致融貫會通之妙。行之不力。則無以臻居安資深之域。始者蓋無所不探。而以易中庸大學爲歸宿。以爲讀大學。可使蹊徑正。讀易中庸。可使義理明。潛玩默誦。日有程課。至於眞積力久。深造而自得焉。則心定而理明。神閒而氣和。日用動靜之間。左右逢原而四體默喩。雖當倉卒危迫之際。而折兇鋒於尊俎之間。得天褒於廷鞫之日。非有平日精詣之識完養之功素積於胷中。豈一朝強勉之所可得哉。先生抱負經奇。虛老林泉。不得少試於世。然今其遺編具在。善讀者潛心而玩索焉。亦可以得其明理主敬之工。酬世出治之方而不迷於所趨矣。象靖自少小屢侍座隅。獲承敎誨。惟是質鈍誠淺。不能挾冊質疑以少祛蒙吝。逮玆晩暮。抱遺經而靡所歸。然後益切山仰之懷。其孫明佑氏辱授以遺事一通。俾有以撰次記載之文。自惟庸陋何敢執筆爲玆事役。第事契深重。不敢終辭。謹据家牒。略加櫽括。竊附以平昔所感於心者。以備立言君子之采擇。且以寓高山景行之思云爾。謹狀。

출처 : 豊 柳 마 을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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