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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전] 12.12사태 비운의 참군인 ?장태완(張泰玩)장군 묘

장안봉(微山) 2014. 6. 1. 04:16

장태완(張泰玩)장군

 

장태완(張泰玩, 1931년 9월 13일 ~ 2010년 7월 26일)은 대한민국군인, 국영기업인, 정치가이다. 본관인동(仁同)이다.

1950년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58년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11월부터 제7대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두환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반대하여 전두환의 반란군과 맞서 싸웠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반란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강제예편되었다. 이때 쿠데타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는 전두환에게 격노하여 그를 '반란군'이라고 욕하면서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지금 전차를 몰고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두환 부대와 맞서 싸우다가 직위해제되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 사장을 맡았고 1988년부터 1995년 3월까지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 회장을 맡았다. 1993년에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정승화,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4년 4월 부터 1997년 4월까지 3년간 제27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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